아내의 해탈 / 시인 임보
아내가 소녀 시절엔 얼마나 결벽했던지
남의 집에 가서도 자신의 숟가락이 아니면
통 밥을 먹지 않았다고 하니
여타는 말을 안 해도 짐작이 간다
성미가 까다로워 아무나 사귀지 않았고
구미가 까다로워 아무거나 먹지 못했다
그래서 처녀 시절 아내의 별명은
'쌩콩'이었다고 한다
아내가 젊었던 시절
우리 집 걸레는 늘 백옥처럼 희었다
사흘이 멀다고 삶아 대니
제가 어찌 검을 새가 있었겠는가?
그러던 아내에게 언제부턴가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마도 머리털이 세고
치아가 부실해지던 무렵부터였으리라
화장실 문을 개방한 채
일을 보시는가 하면*
식탁, 안방 가리지 않고
틀니를 함부로 빼 놓으신다**
이젠,
성스러움도
수줍음도 다 털어 버린
해탈 여장부가 되셨다
그런데 한 가지 곤혹스런 일은
가끔
주어主語가 없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물론 당신께서야 잘 아시는 내용이지만-.
* 딸애가 지나다 기겁을 하고 문을 닿으면 갑갑한데 왜
닿느냐고 야단이다.
** 네 살짜리 손주 애가 이를 보고 마귀 이빨이라고 놀려 댄다.
*** '아무개가 어떠어떠하다.'고 얘기할 때, '아무개'가 누구
인지는 밝히지 않고 '어떠하다'고만 말하는 생략 어법.
- 임보 시집 < 아내의 전성시대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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