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

(시) 나도 그들처럼 / 침묵 / 손 外 - 백무산

경호... 2012. 4. 28. 03:10

 

나도 그들처럼 / 백무산

 

나는 바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계산이 되기 전에는
나는 비의 말을 새길 줄 알았습니다
내가 측량이 되기 전에는
나는 별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해석이 되기 전에는
나는 대지의 말을 받아 적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부동산이 되기 전에는
나는 숲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시계가 되기 전에는
이제 이들은 까닭 없이 심오해졌습니다
그들의 말은 난해하여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내가 측량된 다음 삶은 터무니없이
난해해졌습니다
내가 계산되기 전엔 바람의 이웃이었습니다
내가 해석되기 전엔 물과 별의 동무였습니다
그들과 말 놓고 살았습니다
나도 그들처럼 소용돌이였습니다

 

 

 

 

 

침묵 / 백무산

나무를 보고 말을 건네지 마라
바람을 만나거든 말을 붙이지 마라
산을 만나거든 중얼거려서도 안된다
물을 만나더라도 입다물고 있으라
그들이 먼저 속삭여올 때까지

이름 없는 들꽃에 이름을 붙이지 마라
조용한 풀밭을 이름 불러 깨우지 마라
이름 모를 나비에게 이름 달지 마라
그들이 먼저 네 이름을 부를 때까지

인간은
입이 달린 앞으로 말하고 싸운다
말없는 등으로 기대고 나눈다

 

 


손 / 백무산

예전엔 얼굴을
보아 알겠더니
요즘엔 뒤를
보아 알겠네

예전엔 말을
들어 알겠더니
요즘엔 침묵을
보아 알겠네

예전엔 눈을
보아 알겠더니
요즘엔 손을
보아 알겠네

 

 


사는 일이 아니라 그리워 하는 일 / 백무산

이게 사는 일인가 돌아본다
언 땅이 녹으면 되리라
꽃이 피면 되리라
비바람 계절만 지나면 되리라
언제까지고 이게 사는 일인가 돌아본다
삶은 언제까지고 유보되고
삶은 그리움으로만 남고
우리는 사라진다

사는 일과 유보하며 사는 일,
나와 나의 허구가 대칭을 이루면 산다

돌아보니
살았다 해야 하나..

아, 산다는 말은
틀린 말.
그리워 하는 일이라고
할 말을..

 

 



사랑과 운명 / 백무산

갈 수 없어 못 갔겠습니까
이런 세상에 꽃피는 사랑과 종말에 대해
내 어찌 청맹과니로만 살았겠습니까
가슴 한 귀퉁이 무너지는 눈물이 없어
돌아섰겠습니까

그곳은 차라리 길이었으므로 갈 수가 없습니다
길은 붙잡을 수 없으니
내 어찌 무어라도 붙잡기를 바라겠습니까
이런 세상의 사랑과 종말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모를 리 있겠습니까
이미 존재하는 길은 머무는 길입니다
머물러 할 수 있는 일은 소유하는 일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나날은 열겹 스무겹 자신을 방어해야 할 뿐
이내 사랑은 식은 찻잔처럼 저물고 오직 머무름의
안락이나 되돌아보는 휴식에 노을은 지고 맙니다
아아 설사 내 모든 것이 잘못된다 해도 한파처럼 엄습해올
외로움을 견디는 것보다는 낫겠다는
유혹을 내 어찌 떨쳤겠습니까
운명을 믿지 않으나 사랑에 대해서는
운명이랄밖에 달리 무어라 하겠습니까

가슴 미어지는 나날을 택했습니다
꽃피듯 한번씩 돌아오겠지요
다함이 없는 그리움으로 돌아오겠지요

 

 


마음에 심는 나무 / 백무산

지난주에 읍내 장에 나가 하나뿐인
쬐그만 책방에 가서 이상국 시집 한 권
주문을 하고 오늘 장날에 들르기로 하였는데
일을 보고 나니 남은 돈이 책값뿐이다

책방 앞에는 묘목장이 열렸다
꽃샘추위 황사바람 부는데
앵두나무 사천 원, 자두나무 오천 원
홍매화 육천 원, 계수나무 만 원
꽃사과 목련 배나무 사천 원
시집 한 그루 오천 원

한 그루밖에 살 돈이 없는데
무얼 어디다 심을까
나는 이미 속이 상해 있었다
지난번에 사다 읽은 나무들 때문에
마음밭을 버리고 봄을 버렸다
나무들은 땅에다 심지만 우리들 마음과
대지 사이에서 뿌리내리고 꽃을 피운다

천지사방 흩어진 몸들은
나무를 통해 마음으로 돌아오고
세상에 지천으로 흘린 마음들은
나무를 통과해 몸으로 돌아오는데

 

 


매화가 지천인데도 / 백무산

섬진강 강마을에 매화가 한창입니다
산자락 에워싸도록 지천입니다
매화긴 매화지만 저리 물량으로
지천이다 보니 매화 보던 옛 감흥이
좀체 일지 않아 아쉽습니다
돌담에 붉은 매화 한 그루면
천지 가득 매화였습니다
우리들 살림도 꼭 그 만큼의
빛과 향으로 족했습니다
동쪽 손님 오시는 길목
담 너머 꽃가지 두엇만 늘어져도
봄은 천지에 가득하였습니다

강을 따라 십 리 넘어 꽃길이지만
빛깔과 향기가 모자라
오히려 아쉽습니다
꽃은 한 송이라도 세상 가득함에
모자랄 것이 없습니다

 

 


미륵사지 / 백무산

별처럼 먼 날이라고 했나요
꽃처럼 가까운 날이라고 했나요
백날을 쪼아 천날을 다듬어
기다리면 오실까요
땅의 신음 사라지는 날
님의 마음 열리는 날

그 모습 잊을까 돌에 새겨 기다렸네
오실 날까지 내 못 살고 죽을까봐
이 마음 돌에 새겨 천년을 살게 했네

천년 흐른 새벽 월악산 눈 내려 희고
거듭거듭 몸을 벗고
돌아와 그 얼굴 산에 비추니
돌아와 내 얼굴 돌에 비추니
눈 위에 부는 바람이
돌의 이마를 문득 깨우네
오마던 님과
기다린 사람이 둘 아니라네

아아, 그래도 이 마음
이리도 울고프게 저리는 것은
아무래도 못다 이룬 몸의 인연 그리워

 

 

 

네게로 가는 길 / 백무산

언제 저리 피었나
그저께가 입동인데
대문간에 한 그루 산수유나무

앙상한 가지마다 돋은 망울들
뽀얀 털 뒤덮인 꽃망울들
산엔 아직 나무들 낙엽도 다 떨구기 전인데
한결울이 오기 전에 이미 꽃망울 다 이루고
기다린다네 봄날 같은 너를 기다린다네

네가 내게로 온다고 꽃이 피는 건 아니야
꽃망울을 내 가슴에 다 이루기 전에
나를 버리고 너를 사랑한다는 맹세는 헛되다

내가 나를 통과하지 않고
어찌 너를 만나랴
너를 만나 꽃을 피우랴
이 겨울 다 건너기 전에
네게로 이르는 쉬운 길로 나는 나서지 않으련다

 

 


꽃은 단 한번만 핀다 / 백무산

물이 빗질처럼 풀리고
바람이 그를 시늉하며 가지런해지고
봄이 그 물결을 따라
흔들리며 환한 꽃들을 피우네

새 가지에 새 눈에
눈부시게 피었네

꽃은 피었다 지고
지고 또 피는 것이 아니라

같은 눈 같은 가지에
다시 피는 꽃은 없다
언제나 새 가지 새 눈에 꼭
한번만 핀다네

지난 겨울을 피워올리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 있어온 모든 계절을
생애를 다해 피워올린다네

언제나 지금 당장 모든 것을
꽃은 단 한번만 핀다네

 

 


그 쬐그만 것이 / 백무산

나 그때 넘어져서 보았다
온몸에 멍이 들고 상처를 입고
쓰러져 얼굴을 쳐박았던 곳
그 코앞에 핀 쬐그만
냉이꽃 한송이를
내 생애도 무너지고
세상도 온통 균열이 지는 통에
그 쬐그만 냉이꽃 한송이가
아주 쬐그만 것이 그 무심한 것이
바람도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땅의 일이라고 전지구의 사건이라고
온몸으로 감당하고 있노라고
날 보고 그 쬐그만 것이
저 무지하게 큰 세상이
아무렴 그보다 더 큰 내가
금이 가고 와르르 무너지고 있는데
무슨 일이냐는 듯이
지금 지구를 이고 지구를 버티고
감당하고 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냐는 듯이
교미하는 거북이 파리 귀찮아하듯이
무슨 일이냐는 듯이
아직 저 쬐그만 냉이꽃의 일도 모르는
내 코앞에서 그 쬐그만 것이

 

 

 


손님 / 백무산

내가 사는 산에 기댄 집, 눈 내린 아침
뒷마당엔 주먹만 한 발자국들
여기저기 어지럽게 찍혀 있다
발자국은 산에서 내려왔다, 간혹
한밤중 산을 찢는 노루의 비명을
삼킨 짐승일까

내가 잠든 방 봉창 아래에서 오래 서성이었다
밤새 내 숨소리 듣고 있었는가
내 꿈을 다 읽고 있었는가
어쩐지 그가 보고 싶어 나는 가슴이 뜨거워진다
몸을 숨겨 찾아온 벗들의 피묻은 발자국인 양
국경을 넘어온 화약을 안은 사람들인 양
곧 교전이라도 벌어질 듯이
눈 덮인 산은 무섭도록 고요하다

거세된 내 야성에 피를 끓이러 왔는가
세상의 저 비루먹은 대열에 끼지 못해 안달하다
더 이상 목숨의 경계에서 피 흘리지 않는
문드러진 발톱을 마저 으깨버리려고 왔는가
누가 날 데리러 저 머나먼 광야에서 왔는가
눈 덮인 산은 칼날처럼 고요하고
날이 선 두 눈에 시퍼런 불꽃을
뚝뚝 떨구며 그는 어디로 갔을까

 

 


장항리 사지 / 백무산

잡초 푸르네
달빛 푸르네

꿈인 듯도 하고
전설인 듯도 하고

천년을 품고 기다렸던가
폐허의 삶

인연은 바람,
흩어진 후에야 비로소 사무치는가

나는 옛적 신라의 승려
무얼 좇아 여기 다시 들어와
가슴을 쳤던가
피가 끓었던가
아, 회한의 눈물

인연은 바람,
얼마를 사무쳐야 그 얼굴 다시 뵈올까

스스로 연민에 빠지는
어스름 숲 그림자

잡초 푸르네
달빛 푸르네

 

 



거꾸로 비추는 거울 / 백무산

인간의 머리는 거만하게 하늘을 향해 있으나
나무는 땅을 향해 감추고 있다.
나무는 인간의 모든 것과
뒤집혀 있고 모든 것을 부인한다.
나무는 거꾸로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유리 거울로는 알 수가 없고
사람을 거울삼아도 알 수가 없어
푸른 나무 거울 하나 걸어두었다.

 

 

 


꽃 / 백무산

내 손길이 닿기 전에 꽃대가 흔들리고 잎을 피운다
그것이 원통하다

내 입김도 없이 사방으로 이슬을 부르고
향기를 피워내는구나
그것이 분하다

아무래도 억울하는 것은
네 남은 꽃송이 다 피워내도록
들려줄 노래 하나 내게 없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내 가슴을 치는 것은
너와 나란히 꽃 피우는 것은 고사하고
내 손길마다 네가 시든다는 것이다

나는 위험한 물건이다
돌이나 치워주고
햇살이나 틔워주마
사랑하는 이여.

 

 


경계 / 백무산

누가 이런 길 내었나
가던 길 끊겼네
무슨 사태 일었나 가파른
벼랑에 목이 잘린 길 하나 걸렸네
옛길 버리고 왔건만
새 길 끊겼네
날은 지고
울던 새도 울음 끊겼네
바람은 수직으로 솟아 불고
별들도 발 아래 지네
길을 가는 데도 걷는 법이 있는 것
지난 길 다 버린 뒤의 경계
아, 나 이제 경계에 서려네
칼날 같은 경계에 서려네
나아가지 못하나 머물지도 못하는 곳
아스라히 허공에 손을 뻗네
나 이제 모든 경계에 서네

 

 


그런 날 있다 / 백무산

생각이 아뜩해지는 날이 있다
노동에 지친 몸을 누이고서도
창에 달빛이 들어서인지
잠 못들어 뒤척이노라니
이불 더듬듯이 살아온 날들 더듬노라니
달빛처럼 실체도 없이 아뜩해
살았던가
내가 살긴 살았던가

언젠가 아침 해 다시 못볼 저녁에 누워
살아온 날들 계량이라도 할 건가
대차대조라도 할 건가
살았던가
내가 살긴 살았던가

삶이란 실체없는 말잔치였던가
내 노동은 비를 피할 기왓장 하나도 못되고
말로 지은 집 흔적도 없고
삶이란 외로움에 쫓긴 나머지
자신의 빈 그림자 밟기

살았던가
내가 살긴 살았던가

 

 


그 아이 집 / 백무산

이제는 낯익은 사람조차 드문 고향
가는 날이 장날이라 장거리 천막 국숫집에서
옛 아버지들처럼 한숨이나 쉬고 앉았는데
맞은 편 국밥집 키가 큰 여자
마음 씀씀이 거침없고 몸놀림이 어찌 저리
넉넉하고 천연덕스런 보살인가
쇠전 앞길 새로 난 신작로
강을 건너야 닿는 중학교 등교길
그 길 다시 넒히느라 핀자 담장이 헐린 집
안방 아궁이가 큰길에 나앉은 집
군용차들이 일으키는 먼지에 언제나 뽀얗던 그 집
담이 있던 자리 넝쿨장미가 길에 밟히던 그 집
길에 나온 그 아궁이에서 아침밥 차리고
동생들 도시락도 담고 개숫물 홱 길에 뿌리다
학교 가던 내 교복 바지를 적시던 그 아이
초등학교를 같은 반에 다녔지만 두어 살 많았던 그 아이
겨울엔 붉은 내복 바지에 여름치마를 입고 오던 그 아이
난 일찍이 세상이 싫어 강둑 풀밭에
머리 처박고 뒹구는 일 많았는데
그럴때면 그 아이 방천둑 아래 비탈밭
땡볕에 벗은 발등 다 태우도록
수건 쓰고 주전자 물로 배를 채우며 종일토록
콩밭 매던 그 아이, 두 학기도 마치기 전에
대구 어디 방직공장에 갔다던 그 아이
비가 내려 넝쿨장미 붉은 꽃 흙범벅이 되어도
바가지 물 떠다 꽃잎 씻던 그 아이 없는 그 집
아, 저 아이가 고마워라 가슴 뛰어라
나의 분노는 다시 많은 상처를 만들었구나
뒤집어 지배한다고 이기는 것이 아니야
아직은 짓밟히고 내동댕이쳐진 곳에 있네
더 온전하게 더 푸르게 피어오르는
넉넉한 저항이여
저 아이가 고마워라 가슴 뛰어라

 

 


길은 광야의 것이다 / 백무산

얼마를 헤쳐왔나 지나온
길들은 멀고 아득하다
그러나 저 아스라한 모든 길들은 무심하고
나는 한 자리에서 움직였던 것 같지가 않다
가야 할 길은 얼마나 새로우며
남은 길은 또 얼마나 설레게 할 건가
하지만 길은 기쁨과 희망을 안겨주었고
동시에 나락으로 내몰았다
나에게 확신을 주었고 또 혼란의 늪으로 내던졌다
길을 안다고 나는 감히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보았다 되돌아 서서
길의 끝이 아니라 시작된 곳을 찾았을 때
길이 아니라 길을 내려 길을 보았을 때
길은 저 거친 대지의 것이었다
나는 대지에서 달아나지 않았으므로
모든 것은 희생되었다 그러자,
한순간에 펼쳐진 바다와 같은 아, 하늘에 맞닿아
일렁이는 끝없는 광야의 그늘을 나는 보았다
우리들 삶은 그곳에서 더이상 측량되지 않는다
우리들 꿈은 더이상 산술이 아니다
길은 어디에나 있고 또 없다
길은 대지 위에 있으나
길은 자주 대지를 단순화한다
때로는 대지에서 자란 우리를
대지에서 추방하기도 한다
우리가 헤쳐온 길이 우릴 버리기도 한다
길은 자주 대지의 평등을
욕망의 평등으로 변질시키고
대지의 선한 의지를
권력의 사욕으로 타락시킨다
삶이란 오고 가는 것일까
인생이란 흐르는 길 위의 흔적일까
저기 출렁이는 물결을 보아라
허공에 맞닿아 끝없이 일렁이는 물결을 보아라
길이란 길은 광야 위에 있다
길 위에 머물지도 말고 길 밖에 서지도 말라
길이란 길은 광야의 것이다
삶이란 흐르는 길 위의 흔적이 아니다
일렁이어라 허공 가운데
끝없이 일렁이어라 다시 저 광야의
끝자락에서 푸른 파도처럼 일어서는
길을 보리라

 

 


길은 그리움으로 열린다 / 백무산

봄빛 바다 위에 햇살이 눈부십니다
감은사지 지나 남으로 달리는
해안도로는 내가 좋아하는 길입니다
봄빛 바다가 펼쳐지기라도 할 때면
길은 그리움으로 열려 일렁입니다

산들이 바다를 만나 멈칫
가파르게 서 있고, 길이 높아
마을 위로 짙부른 바다가 보이고
지붕 위로 배들이 지나고
파도가 길 위에 일렁입니다

길은 산을 오르다
굽이진 자리가 끊어져 보여
하늘길 오르는 듯
구름에 걸려 있습니다

생활은 물 아래 낮고
꿈은 저만큼 높이 걸어놓은 듯
길은 쉼 없이 일렁입니다

이 도시에서 오래 내가
탈 없이 숨을 쉬고 일을 걱정하는 것은
생활은 하늘 높은 곳으로 치솟고
길은 한없이 낮고 순탄하기만 한
곳으로만 흐르기 때문입니다

그리운 마음이 길을 열고
집들은 봄빛 바다를 이고 출렁입니다

 

 


장작불 / 백무산

우리는 장작불 같은 거야
먼저 불이 붙은 토막은 불씨가 되고
빨리 붙은 장작은 밑불이 되고
늦게 붙은 놈은 마른 놈 곁에
젖은 놈은 나중에 던져져
활활 타는 장작불 같은 거야

몸을 맞대어야 세게 타오르지
마른 놈은 단단한 놈을 도와야 해
단단한 놈일수록 늦게 붙으나
옮겨붙기만 하면 불의 중심이 되어
탈 거야 그때는 젖은 놈도 타기 시작하지

우리는 장작불 같은 거야
몇 개 장작만으로는 불꽃을 만들지 못해
장작은 장작끼리 여러 몸을 맞대지 않으면
절대 불꽃을 피우지 못해
여러 놈이 엉겨붙지 않으면
쓸모 없는 그을음만 날 뿐이야
죽어서도 잿더미만 클 뿐이야
우리는 장작불 같은 거야


* 백무산

1954년 경북 영천 출생
1984년 민중시 1집에 [지옥선] 등을 발표하면서 등단함
1989년 제1회 이산문학상 수상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 <길은 광야의 것이다> <인간의 시간> <길은 광야의 것이다> <거대한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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