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

그 / 박철

경호... 2012. 4. 28. 01:04

 

     박 철

 

 

  내 안의 그는 누구냐

 

  책상 옆 벽에는

  "어느덧 나도 그의 나이가 되었다"라고

  적힌 아주 작은 주홍빛 쪽지가

  몇년째 붙어 있다

  아마 언젠가 스쳐가는 단상의 꼬리를 놓치기 아쉬워

  그렇게 적어놓았을 것이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일은 그 쪽지 속의 그가

  누구인지 영 기억이 나질 않는 것이다

  일만 죽도록 하다가 외양간 벽에 기대앉은

  노쇠한 수소 같은 저 아버지였던가

  어린 날 가슴팍을 헤집던 소설 속의

  주인공이었던가 평소 존경하던 선배였던가

  아니면 오늘도 말없이 서 있는

  담장 밖 오동나무였던가 뒷산의

  울음소리였던가

 

  지난 1월 1일 새벽 나는 어둠을 뚫고

  하얗게 눈 내린 들길로 나갔다

  밤 사이 흠뻑 내린 눈길에 첫 발자국을 남기며

  기적(汽笛) 같은 입김을 날리며 떠나간 나와 잃어버린

  세월과

  돌아오지 않는 새를 찾아 나서고 싶었다

  그러나 멀리 어둠이 걷히면서

  나는 아직 속 깊은 동면의 한기에 몸을 떨었다

 

  이른 미명 속에 누군가

  먼저 발자국을 남기며

  들길을 건너간 것이다

 

  연휴를 빼앗긴 어느 공장의 노동자였을까

  서울 거리를 쓸어내기 위해 나선 청소부였을까

  세상물정 잊은 정신 나간 광부(狂夫)였을까

  그때 날이 새고 저 말리 하늘이 뻥 뚫리며 해가!

  해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해를 타고 누군가 날아와 내 비좁은 가슴속에

  똬리를 틀며 털석 주저앉는 것이었다

 

  대체 그는 또 누구란 말인가

 

 

 

 -  박철 시집 『험준한 사랑』(창비, 200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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