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

조오현 (霧山 무산스님) 詩

경호... 2015. 7. 1. 02:40

 

 

 

절간 이야기 / 조오현

 

어제 그끄저께 일입니다. 뭐 학체 선풍도골은 아니었지만 제법 곱게 늙은 어떤 초로의 신사 한 사람이 낙산사 의상대 그 깎아지른 절벽 그 백척간두 의 맨 끄트머리 바위에 걸터앉아 천연덕스럽게 진종일 동해의 파도와 물빛을 바라보고 있기에

"노인장은 어디서 왔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아침나절에 갈매기 두 마리가 저 수평선 너머로 가물가물 날아가는 것을 분명히 보았는데 여태 돌아오지 않는군요."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도 초로의 그 신사는 역시 그 자리에서 그 자세로 앉아있기에

"아직도 갈매기 두 마리가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했더니

"어제는 바다가 울었는데 오늘은 바다가 울지 않는군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절간 이야기 3 / 조오현

 

아득한 옛날의 무슨 전설이나 일화가 아니라요 근년에 비구니스님들이 모여 공부하는 암자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물론 숲속에 파묻힌 돌담 주춧돌도, 천년 고탑도 비스듬한 그 암자의 마당에 들어서면 물소리가 밟히고 먹뻐꾹 울음소리가 옷 자락에 배어드는 심산의 암자이지요.

그 암자의 마당 끝 계류가에는 생남불공生男 佛供 왔던 아낙네들이 코를 뜯어먹어 콧잔등이 반만큼 떨어져나간, 그래서 웃을 때는 우는 것 같고 정작 울 때는 웃는 것 같은 석불도 있지요.

어떻게 보면 암자가 없었으면 좋을 뻔했던 그 두루적막 속에서 20년을 살았다는 노비구니스님이 그해 늦가을 그 석불 곁에 서서 물에 떠내려가는 자기의 그림자를 붙잡고 있을 때 다람쥐 두 마리가 도토리를 물고 돌담 속으로 뻔질나게 들락거리는 것을 보게 되었지요.

 

 “옳거니! 돌담 속에는 도토리가 많겠구나. 묵을 해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 먹어야지. 나무아미타불.”

 

이렇게 중얼거린 노비구니스님이 돌담을 허물어뜨리고 보니 과연 그 속에서는 도토리가 한 가마는 좋게 나왔지요. 그런데 그 한 가마나 되는 도토리를 몽땅 꺼내어 묵을 해 먹었던 다음날 아침에 보니 그놈의 다람쥐 두 마리가 노비구니스님의 흰고무신을 뜯어먹고 있었답니다. 그 흰고무신을 뜯어먹다가 죽었답니다.

 

 

 

절간 이야기 16

 

스승(마조馬祖)과 제자(백장百丈)가 해 저문 강기슭 길을 묵묵히 걷고 있을 때, 한 무리 들오리 떼가 울며 저녁노을이 붉게 물던 서천으로 줄을 지어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문득 스승이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저게 무슨 소리냐?"

"들오리 떼 울음소립니다."

한동안 말없이 걷던 스승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 들오리 떼 울음소리가 어디로 갔느냐?"

"멀리 서쪽으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이 대답이 떨어지자 말자 스승은 제자의 코를 잡고 힘껏 비틀었는데 얼떨결에 당한 제자가 "아야! 아야!" 하고 비명을 내지르자 스승은 벽력같은 호통을 내리쳤스빈다.

"날아갔다더니 여기 있지 않느냐?"

언젠가 이 이야기를 듣고 통도사 경봉노사鏡峰老師에게 "들오리 떼는 분명히 날아갔는데 스승이 왜 ' 여기 있지 않느냐'고 호통을 쳤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경봉노사는 이렇게 혀를 차시는 것이었습니다.

"니가 공부꾼 같으마 들오리 떼 울음이 강물에 남아있다 커겠으나 나는 공부꾼이 아니니 저 아래 돌다리 밑으로 떠내려가는 부처를 보고 오너라. 니가 보고 듣는 세계도 무진장 하지만 니가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세계도 무진장하다카는 것을 알고 있으마… 쯧. 쯧. 쯧."

 

 

 

절간 이야기 19 조오현

 

사내 대장부 평생을 옷 한 벌과 지팡이 하나로 살았던 雪峰 스님은 말년에 부산 범어사에 주석했는데 그 무렵 곡기를 끊고 곡차를 즐겼지요.

그날도 자갈치 그 어시장 그 많은 사람사람 사투리사투리 물 비릿내물비릿내 이것들을 질척질척 밟고 걸어 들어가니, 생선 좌판 위에 등이 두툼한 칼로 생태를 토막내고 있던 눈이 빠꼼 한 늙은 '아즈매 보살'이 무르팍을 짚고 꾸부정한 허리를 펴며 뻐드렁니 하나를 내어 놓았지요.

"요새 시님 코빼기도 본 사람 없다캐싸서 그마 시상살기 싫다 캐서 열반에 드셨나 갰나캐도요. 오래 사니 또 보겠다캐도......"

이러고는 바짝 마른 스님의 손목을 거머잡는가 싶더니 치마 끝자락으로 눈꼽을 닦아내고, 전대에서 돈 오천원을 꺼내어 곡차 값으로 꼭 쥐어 주고, 이번에는 빠닥빠닥한 일만원권 한 장을 흰 봉투에 담아 주머니에 넣어 주면서

"둘째 미누리 아아가 여태 태기가 없다캐도... 잠이 안 온다캐도요. 둘째놈 제대 만기제대하고 취직하마 시님 은공 갚을끼라 캐도요. 그마 시님이 곡차 한 잔 자시고요. 칠성님께 달덩이 머스마 하나 점지하라카소. 약소하다캐도 행편 안 그렁교?"

하고 빠꼼빠꼼 스님을 쳐다보자 스님은 흰 봉투 속을 들여다보고는 神話 하나를 만들었지요.

"아즈매 보살! 요새 송아지 새끼 한 마리 값이 얼마인 줄 알고 캅니꺼? 모르고 캅니꺼? 도야지 새끼도 물 좋은 놈은 몇만 원 한다 카는데에 이것 가지고 머스마 값이 되겠니꺼?"

그러자 그 맞은편 좌판 앞에서 물오징어를 팔고 있던 젊은 아즈매 보살이 쿡쿡 웃음을 참다 못해 밑이 추지도록 웃고 말았는데, 때마침 먹이를 찾아왔던 갈매기 한마리가 그 웃음소리를 듣고 멀리 바다로 날라 갔는데, 그 소문을 얼마나 퍼뜨렸는지.......

그 후 몇 해가 지나 설봉스님 장례식 때는 부산 앞바다 그 수백 마리의 갈매기들이 모여들어서 아즈매 보살들의 울음소리를 흑흑흑......흉내를 내다가 눈물 뜸뜸 떨구었지요.

 

 

 

절간 이야기 .22 조오현

 

어느 신도님 부음을 받고 문상을 가니 때마침 늙은 염장이가 염 습(殮襲)을 하고 있었는데 그 염습하는 모양이 얼마나 지극한지 마 치 어진 의원이 환자를 진맥하듯 시신(屍身)어느 한 부분도 소홀함이 없었고, 염을 다 마치고는 마지막 포옹이라도 하고 싶다는 눈길을 주고도 모자라 시취(屍臭)까지 맡아보고서야 관뚜껑을 닫는 것 이었습니다.

사실 오늘 아침 한솥밥을 먹은 가족이라도 죽으면 시체라 하고 시체라는 말만 들어도 섬찍지근 소름이 끼쳐 곁에 가기를 싫어하는데 생전에 일면식도 없는 생면부지의 타인, 그것도 다 늙고 병들어 죽어 시충(屍蟲)까지 나오는 시신을 그렇게 정성을 다하는 염장 이는 처음 보았기에 이제 상제와 복인들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가는 염장이에게 한마디 말을 건네 보았습니다.

"처사님은 염을 하신 지 몇 해나 되셨는지요?"

"서른 둘에 시작했으니 한 49년 되어 갑니더."

"그러시면 많은 사람들의 염을 하신 것 같으신데 다른 사람의 염도 오늘처럼 정성을 다하십니까?"

" 별 말씀을 다 하시니...... 산사람은 구별이 있지만서도 시신은 남녀노소 쇠붙이 다를 것이 없니더. 내 소시에는 돈 땜에 이 짓을 했지만서도 이 짓을 한 해에 몇백 명 하다 보니 남모를 정이 들었다 할까유. 정이...... 사람들은 시신을 무섭다고 하지만 나는 외려 산 사람이 무섭지 시신을 대하면 내 가족 같기도 하고 어떤때는 내 자신의 시신을 보는 듯해서......"

이쯤에서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갈 길을 그만 가야겠다는 표정이더니, 대뜸

"내 기왕 말씀이 나온 김이니 시님에게 한 말씀 물어봅시더. 이 짓도 하다 보니 시님들도 많이 만나게 되는데,어떤 시님은 사람 육신을 피고름을 담은 가죽푸대니, 가죽 주머니니, 욕망 덩어리라 이것을 버렸으니 물에 잠긴 달그림자처럼 영가(靈駕)는 걸림이 없어 좋겠다고 하시기도 하고,어떤 시님은 허개비 같은 빈 몸이 곧 법신 (法身)이라 했던가유? 그렇게 하고, 또 어떤 시님은 왕생극락 기원하며 염불만 하시는 시님도 있고......아무튼 시님들 법문도 각각 인데 그것은 그만두시고요. 참말로 사람이 죽으면 극락지옥이 있습니꺼?"

흔히 듣는 질문이요 신도들 앞에서도 곧잘 해왔던 질문을 받았지만 이 무구한 염장이 물음 앞에는 그만 은산철벽을 만난 듯 동서 불명(東西不明)이 되고 말았는데, 염장이는 오히려 공연한 말을 했다는 듯

"염을 하다 보면 말씀인데유. 이 시신의 혼백은 극락을 갔겠다 저 혼백은 지옥에 갔겠다 이런 느낌이 들 때도 더러 있어 그냥 해 본 소리니더. 이것도 넋빠진 소리입니더만 분명한 것은 처음 보는 시신이지만 그 시신을 대하면 이 사람은 청결하게 살다가 마 살았겠다 이 노인은 후덕하게 또는 남 못할 짓만 골라서 하다가 이 시신은 고생만 하다가 또는 누명 같은 것을 못 벗고...... 그 머라 하지유? 느낌이랄까유? 그, 그 사람이 살아온 흔적 같은 것이 시신에 남아 있거든요?"

하고는 더 말을 하지 않을 듯 딸막딸막하더니, 당신의 그 노기(老氣)로 상대가 더 듣고 싶어 하는 마음을 읽었음인지,

"극락을 갔겠다는 느낌이 드는 시신은 대강대강 해도 맘에 걸리지 않지만 그렇지 않은 죄가 많아 보이는 시신을 대하면 자신이 죄를 지은 것처럼 눈시울이 뜨뜻해지니더. 정이니더. 옛사람 말씀에 사람은 죽을 때는 그 말이 선해지고 새도 죽을 때는 그 울음이 애처롭다 했다니더. 죽을 때는 누구나 선해지니더...... 이렇게 갈 것을 그렇게 살았나? 하고 한 번 물어보면 영감님 억척 년이나 살 것 같아서, 가족들 기쁘게 해주고 싶어서 한 번 잘 살아 보고 싶어서 그랬니더. 너무 사람 울리시면 내 화를 내고 울화통 터져 눈 못 감고 갑니더. 이런 대답을 들으니 아무리 인정머리 없는 염쟁이지만 정이 안들겠니꺼. 그 돌쟁이도 먹놓고 징 먹일 때는 자기의 혼을 넣고....... 땜쟁이도 그렇다 하는데 오늘 아침 숨을 같이 쉬고 했던 사람이 마지막 가는데유....... 아무런들 이 짓도 정이 없으면 못해 먹을 것인데 그렇듯 시신과 정을 나누다가 보면 어느 사이 그 시신 언저리에 남아 있던 삶의 때라 할까유? 뭐 그런 것이 걷히고 비로소 내 마음도 편안해지거든요. 결국은 내 마음 편안할려고 하는 짓 이면서도 남 눈에는 시신을 위하는 것이 풍기니 나도 아직......"

하고는 잠시 나를 이윽히 바라보더니

"시님도 다 아시는 일을 말했니더. 나도 어릴 때 뒷 절 노시님이 중될 팔자라 했는데 시님들 말씀과 같이 업(業)이라는 것이 남아 있어서......... 이제 나도 갈 일만 남은 시신입니더."

이렇게 말끝을 흐리는 것이었습니다.

 

 

 

절간 이야기 25

 

나는 부처를 팔고 그대는 몸을 팔고

일본 임제종의 다쿠안(澤庵:1573-1645)선사는 항상 마른 나뭇가지나 차가운 바위처럼 보여

한 젊은이가 짓궂은 생각이 들어 이쁜 창녀의 나체화를 선사 앞에 내 놓으며 讚(찬)을 청하고

선사의 표정을 삐뚜름히 살피니 다쿠안 선사는 삥긋삥긋 웃으며 찬을 써내려 갔습니다.

나는 부처를 팔고
그대는 몸을 팔고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고
밤마다 물 위로 달이 지나가지만
마음은 머무르지 않고 그림자 남기지 않는도다

 

 

 

절간이야기 29 / 조오현

 

한나절은 숲 속에서 새 울음소리를 듣고

반나절은 바닷가에서 해조음 소리를 듣습니다

언제쯤 내 울음소리를 내가 듣게 되겠습니까

 

 

 

절간 이야기.31 / 조오현

 

어느날 아침 게으른 세수를 하고 대야의 물을 버리기위해 담장가 로 갔더니 때마침 풀섶에 앉았던 청개구리 한 마리가 화들짝 놀라 담장 높이 만큼이나 폴짝 뛰어오르더니 거기 담쟁이덩굴에 살푼 앉는가 했더니 어느 사이 미끄러듯 잎 뒤에 바짝 엎드려 숨을 할딱거리는 것을 보고 그놈 참 신기하다 참 신기하다 감탄을 연거푸 했지만 그놈 청개두리를 제題하여 시조 한 수를 지어 볼려고 며칠을 끙끙거렸지만 끝내 짓지 못하엿습니다. 그놈 청개구리 한 마리의 삶을 이 세상 그 어떤 언어로도 몇 겁劫을 두고 찬미할지라도 다 찬미할 수 없음을 어렴풋이나마 느꼈습니다.

 

 

 

나는 말을 잃어버렸다 / 조오현

 

내 나이 일흔둘에 반은 빈집뿐인 산마을을 지날때

 

늙은 중님, 하고 부르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더니 예닐곱 아이가

감자 한 알 쥐어주고 꾸벅, 절을 하고 돌아갔다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 산마을 벗어나서 내가 왜 이렇게 오래 사나 했더니 그 아이에게 감자 한 알 받을 일이 남아서였다

 

오늘도 그 생각 속으로 무작정 걷고 있다

 

 

 

어미 / 조오현

 

어미는 목매기 울음을 듣지 못한 지가 달포나 되었다.

빨리지 않는 젖통이 부어 온몸을 이루는 뼈가 자리다.

통나무 구유에 여물 풀냄새에도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긴 널빤지를 죽죽 깔아서 놓은 마루에 갈대를 걸어 만든 자리도

번듯번듯 잘생긴 이집 가족들도 오늘은 꺼무끄럼 하다.

낯설다.

 

다 알고 있다. 풀을 뜯어먹고 살 몸마저 빼았겼음을,

이미 길들여지고 있음을, 다시는 만날 수 없음을,

어미가 살아온 것처럼 살아갈 것임을,

곧 어미를 잊을 것임을.

 

어미는 젖을 떼기도 전에 코를 꿰었다.

난생 첨으로 부르르 몸을 떨었다.아파서만은 아니었다.

쇠똥구리 한 마리가 자기몸 두 배나 되는 먹이를 굴리는 것을 보자

부아가 치밀었던 것이다.

어린 눈에 뿔을 갖고도 멀뚱멀뚱 바라만 보고 있는 그 어미도 미웠다.

그러나 그 어미는 그 밤을 혀가 마르도록 온몸을 핥아 주었다.

그리고 다음날 팔려갔다.

 

보았다. 죽으러가는 그 어미의 걸음걸이를,

꿈쩍 않고 버티던 그 힘 그 뒷걸음질을,

들입다 사립짝을 향해 내뻗던 뒷발길질을,

동구 앞 당산 길에서 기어이 주인을 떠 박고 한달음에 되돌아와 젖을 먹여 주던

그 어미의 평생은 입에서 내는 흰 거품이었다.

 

이후 어미는 그 어미가 하던 일을 대물림 도맡았다.

코에는 코뚜레를, 목에는 멍에를, 등에는 걸채를 다 물려받고

다 받아들이고 다 받아들이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삶은 냉혹하다는 것을 알았고

앎으로 어른스러워졌다.

논밭을 갈고 바리바리 짐을 실어 나르며

몸하면 교배하고 새끼를 낳아 기르며

하 그리 고된 나날을 새김질로 흘려보냈다.

 

이제 어미는 주인의 잔기침 소리에도 그 날 할 일을 알아차린다.

아까부터 여러모로 뜯어보던 거간꾼의 엉너릿 손,

목돈을 받아 침을 뱉아가며 한 장 두 장 세는 울대뼈.

기다랗고 큼직한 궤짝에 들어갔을 목숨 값으로 눈물 많던 할멈 제삿날

조기라도 한 손 올렸으면 좋겠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뿔에 신기하게도 반쯤 이지러진 낮달 빛이 내리비치고

흰 구름이 걸린다.

다급하게 울어쌓던 매미 한 마리 허공으로 가물가물 사라지고

남쪽으로 뻗은 가지에서 생감이 뚝 떨어진다.

두엄발치에 구렁이가 두꺼비를 물고 있는 것을 보고

어미는 오줌을 질금거리며 사립을 나선다.

 

당산 길 앞에서 그 어미가 주인을 떠 박고 헐레벌떡 뛰어와 젖을 먹여주던

십년 전 일을 떠올리고 '음매'하고 짐짓 머뭇거리는 순간

허공에 어른어른거리는 채찍의 그림자.

 

조금만 가물어도 물이 마르는 내를 건너

산모롱이를 돌아가면서 힐끔 돌아 보았지만

목매기는 보이지 않는다.

 

두 아이는 걸리고 한 아이는 업은 아낙이 지나간다.

맞은 편 찻길 밑에 불에 타 그을리고 찌그러진 짐차,

사람들이 빙 둘러 에워싸고 있다.

농한기 산 너머 채석장에서 떠낸 석재를 싣고 읍내로 갔던 길.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 하루에도 몇 차례나 오갔던 길.

올 정초에는 눈이 많아 질퍼덕 질퍼덕거리는 진창에 바퀴가 겉돌아 미끄러지면서

발목이 삐어 돈을 벌어들이지 못했다.

지금 다 아물었으나 큰 힘을 쓸 수 없다.

 

힘없으면 돈을 벌지 못하고 돈을 벌지 못하면 죽어야 한다.

힘없는 죄 외에는 죽을 죄가 없다. 만약 조개더라면 물 위로 떠올라 껍질을 열고

만천하에 속을 다 보여 주었을 것이다.

 

그 할멈은 속을 안다. 힘들거들랑 쉬어라고 멍에 목 흉터를 만져주고

등 긁어주던 할멈.

남몰래 밤재운 익모초 생즙을 쇠죽에 타주고 측백나무 잎을 우려낸 술도

잡곡 가루를 풀처럼 쑨 죽도 먹여 주던 할멈은

채마밭 건너 열두 배미의 논에 곱써래질을 하던 날 죽었다.

 

시체를 관에 넣고 관 뚜껑을 덮은 뒤에야 그 사람의 진가를 안다고

할멈의 장롓날 울었던 앞뒷산 먹뻐꾸기들이 일년 내내 울어

그해 가을 그 울음을 받아먹은 텃밭의 감도 대추도 모과도 맛이 들대로 들었고

벼도 수수도 여물었고 고추도 매웠고 끝동의 오이도 대풍이 들었지만

사람도 죽는다는 것을 알고 나니 언제나처럼 마굿간이 썰렁했다.

 

할멈 보는 데서 고삐를 벗고 풀이 무성한 벌판을 단 한번 달려보지 못한 것이

남아있는 한이지만,

사람도 죽는데 못 죽을 것이 없다고 할멈을 생각하는 사이,

떠밀려 도살장 안으로 성큼 들어섰고

그 꽉 막힌 그 막다른 한순간

 

어미는 목매기의 긴 울음소리를 아득히 듣는다.

 

 

 

숨 돌리기 위하여 / 조오현

땅이 걸어서 무엇을 심어도 좋은 밭
쟁기로 갈아엎고 고랑을 만들고 있다
나처럼 한물간 넝쿨은 걷어내고

이제는 정치판도
갈아엎어야
숨 돌리기 위하여

 

 

노망기 / 조오현

 

내 나이 예순에는

일흔이라는 이를 만나면

이제 죽을 일만 남은 노인이라고

어른 대접을 해 주었는데

 

내 나이 여든이 된 요즈막

일흔이라는 이를 보면

아이 같아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 같아

 

 

파도 / 조오현

 

밤늦도록 불경(佛經)을 보다가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먼 바다 울음소리를

홀로 듣노라면

천경(千經) 그 만론(萬論)이 모두

바람에 이는 파도란다

 

 

일월(日月) / 조오현

 

하늘은 저만큼 높고

바다는 이만큼 깊고

 

하루해 잠기는 수평

꽃구름이 물드는데

 

닫힐 듯 열리는 천문(天門)

아, 동녘 달이 또 돋는다.

 

 

견춘3제(見春三題) / 조오현

 

1. 봄의 불식

 

이 몸 사타구니에 내돋친 붉은 발진

그로 인하여 짓물러 다 빠진 어금니

내 불식 하늘 가장자리 아, 황홀한 육탈(肉脫)이여.

 

2. 봄의 역사

 

내 말을 잘라버린 그 설도(舌刀), 참마검(斬馬劍)도

내 넋을 다 앗아간 그 요염한 독버섯도

젠장할 봄날 밤에는 꽃망울을 맺더라

 

3. 봄의 소요

 

목마르다, 목마르다. 꽃의 내분비에도

해마다 봄이 오면 잦아지는 내 목숨의 조고(凋枯)

올해도 한바탕 소요로 꽃은 올 모양이다

 

 

 

무자화 / 조오현

 

강물도 없는 강물 흘러가게 해 놓고

강물도 없는 강물 범람하게 해 놓고

강물도 없는 강물에 떠내려가는 뗏목다리

 

 

 

내 몸에 뇌신(雷神)이 와서 / 조오현

 

이날 내 몸은 미친 하늘 뇌신이 와서

세상을 다 때려 부수고 서천 번개로 가자 한다

번개 그 불빛만 봐도 나는 잘 갑시는데

 

이 모진 죽살이의 질긴 피죽 벗겨 보면

한치 흙도 파지 않고 인도에도 묻은 지뢰

한자국 높디딘 생각은 저 가교를 밟고 갔네

 

슬픔은 날이 날마다 낙엽처럼 쌓이는데

끝까지 달아봐도 끝내 모를 자유의 근량(斤量)

먼 훗날 홀로 남아서 오늘을 점두(點頭)할 바위도 없다

 

 

몽상 / 조오현

 

산에는 백도라지 들에는 민들레꽃

내 고향 아득한 기억은 우물 속 드리운 얼굴

담장가 등돌리고 섰던 순이 한 번 만나고 싶다.

 

물올라 싱그러운 쑥 내음은 나도몰라

십리도 까마득한 언덕 달은 너무 밝아

못 지울 영상을 밟고 몰래 나온 조그마한 마을.

 

마셔서 차지 않고 못내 비운 이날 밤은

어딘지 시름 번질 속 쓰린 항아린가

깨고난 잠의 자리엔 메아리만 감도네.

 

잘못 살온 세상이라도 정화수 끝내 말고

초 한 자루 밥 한 그릇 외할머니 빌어주신

그날 그 돌상 곁에서 놀 수 없는 왕자여

 

 

오늘 / 조오현

 

잉어도 피라미도 다 살았던 봇도랑

맑은 물 흘러들지 않고 더러운 물만 흘러들어

기세를 잡은 미꾸라지 놈들

용트림할 만한 오늘.

 

 

떠 흐르는 수람 / 조오현

 

가을이 소나기처럼 지나간 그대 정원에

열매 하나가 세상의 맛을 한데 모아

뚝하고 떨어지는구나

다 쭈그러든 모과하나.

 

 

파지(把指) / 조오현

 

조실스님 상당(相堂)을 앞두고

법고를 두드리는데

 

예닐곱 살 된 아이가

귀를 막고 듣더니만

 

내 손을

가만히 잡고

천둥소리 들린다 한다

 

 

사랑 / 조오현

 

사랑은 넝쿨손입니다.

철골 철근 콘크리트 담벼락

그 밑으로 흐르는

오염의 띠 죽음의 띠

시뻘건 쇳물

녹물을

빨아먹고 세상을 한꺼번에 다

끌어안고 사는 푸른 이파리입니다.

잎덩쿨손입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생명의 뿌리입니다.

이름 지을 수도 모양 그릴 수도 없는

마음의

잎덩쿨손입니다.

하나님의 떡잎입니다.

부처님의 떡잎입니다

 

 

재 한줌 / 조오현

 

어제 그저께 영축산 다비장에서

오랜 도반을 한줌 재로 흩뿌리고

누군가 훌쩍거리는 그 울음도 날려보냈다

 

거기, 길가에 버려진 듯 누운 부도

돌에도 숨결이 있어 검버섯이 돋아났나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그대로 내려왔다

 

언젠가 내 가고 나면 무엇이 남을건가

어느 숲 눈먼 뻐꾸기 슬픔이라도 자아낼까

곰곰이 뒤돌아보니 내가 뿌린 재 한줌뿐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