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

아내의 해탈-임보

경호... 2015. 7. 1. 02:38

아내의 해탈 / 시인 임보

 

 

아내가 소녀 시절엔 얼마나 결벽했던지

남의 집에 가서도 자신의 숟가락이 아니면

통 밥을 먹지 않았다고 하니

여타는 말을 안 해도 짐작이 간다

 

성미가 까다로워 아무나 사귀지 않았고

구미가 까다로워 아무거나 먹지 못했다

그래서 처녀 시절 아내의 별명은

'쌩콩'이었다고 한다

 

아내가 젊었던 시절

우리 집 걸레는 늘 백옥처럼 희었다

사흘이 멀다고 삶아 대니

제가 어찌 검을 새가 있었겠는가?

 

그러던 아내에게 언제부턴가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마도 머리털이 세고

치아가 부실해지던 무렵부터였으리라

 

화장실 문을 개방한 채

일을 보시는가 하면*

식탁, 안방 가리지 않고

틀니를 함부로 빼 놓으신다**

 

이젠,

성스러움도

수줍음도 다 털어 버린

해탈 여장부가 되셨다

 

그런데 한 가지 곤혹스런 일은

가끔

주어主語가 없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물론 당신께서야 잘 아시는 내용이지만-.

 

 

 

*    딸애가 지나다 기겁을 하고 문을 닿으면 갑갑한데 왜

      닿느냐고 야단이다.

**   네 살짜리 손주 애가 이를 보고 마귀 이빨이라고 놀려 댄다.

*** '아무개가 어떠어떠하다.'고 얘기할 때, '아무개'가 누구

       인지는 밝히지 않고 '어떠하다'고만 말하는 생략 어법.

 

 

- 임보 시집  < 아내의 전성시대 >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