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영원과 하루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가장 후회하는 것은 ‘삶을 그렇게 심각하게 살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별의 순례자이며, 단 한 번의 즐거운 놀이를 위해 이곳에 왔다. 우리의 눈이 찬란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 아름다운 세계를 반영할 수 있는가?
미드웨스트 병원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한 간호사는 응급 환자를 후송해 오는 직원에게서 다섯 사람이 심각한 부상을 입고 병원으로 실려 오는 중이라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심각했던 상황은 부상자 한 명이 간호사의 남편으로 밝혀지면서 더욱 복잡해졌습니다. 다른 네 사람은 그녀가 알지 못하는 일가족이었습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최선을 다했지만 다섯 명 모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죽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건물이 붕괴되어서? 버스가 충돌해서? 10대 폭력단이 쏜 총에 맞아서? 화재가 일어나서? 아닙니다. 그들은 놀랍게도 화가 나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상황은 이러했습니다. 차 한 대가 시골길에서 앞 차를 추월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운전자들은 서로 양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잔뜩 화가 난 그들은 바로 옆에서 나란히 차를 달리며 서로를 추월하려 했습니다. 맞은편에서 또 다른 차가 달려오는 것을 보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 버렸습니다. 간호사의 남편은 화가 난 운전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서로 앞지르려 한 두운전자는 모르는 사이였습니다. 그들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고 서로에게 화낼 이유도 없었지만, 단지 앞지르려 했기 때문에 화가 난 것이었습니다. 살아남은 운전자는 법의 처벌을 받았습니다.
세 가족은 화에서 비롯된 이 비극적인 사고에 절망했습니다. 전문가들은 오늘날 미국에서 일어나는 자동차 사고의 가장 큰 원인으로 화를 꼽습니다.
누구나 한두 번쯤은 화가 난 상태에서 운전해 본 경험이 있을 테지만, 다행히도 앞의 사건처럼 극단적인 결과로 치닫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러나 이 두 남자가 그랬듯이 화가 쌓이게 놔두면 화는 부정적인 힘으로 돌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화에 지배당하기 전에 우리가 그것을 다스릴 수 있도록 건전한 방식으로 화를 푸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화는 인간이 가진 자연스러운 감정이며, 일반적인 상태에서는 밖으로 표현되면 몇 분, 몇 초도 지속되지 않습니다. 영화관에서 줄을 서고 있는데 새치기를 당하면 우리는 아마 그 사람에게 1분가량 화를 낼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화를 내고 그것을 표현하면서 1분가량 지속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화를 폭발시키는 식으로 부적절하게 표현하거나 그것을 억제해서 쌓이게 할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상황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지나치게 화를 내거나, 아니면 전혀 화를 내지 않는 것으로 끝맺게 됩니다.
억압된 화는 단순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해결되지 않은 채로 마음속에 남습니다. 이 작은 화들을 그때그때 풀어주지 않으면, 그것은 점점 커지다가 대개 엉뚱한 곳에서 폭발합니다. 앞의 두 운전자는 이런저런 화난 일들을 오랫동안 가슴속에 가득 담고 있다가 서로를 만났을 때 그것을 폭발시킨 것입니다. 불과 몇 초 만에 그 화는 화산처럼 폭발했습니다.
화가 쌓여서 생기는 또 다른 문제점은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이 자신들의 행동에 책임을 질 준비가 되어 있는데도 우리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잘못을 인정하는 상대방의 사과가 진실한 것을 알면서도 계속 화가 난다면 그것은 오래된 화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계속해서 모양을 바꾸어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화내는 것은 잘못이라고 가르치는 가정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장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아주 사소한 문제에도 크게 화를 내는 가정에서 자랍니다. 화내는 것과 같은 자연스러운 감정을 표현하기에 좋은 역할 모델을 갖지 못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놀랄 일이 아닙니다. 화가 나는 감정을 어떻게 다룰지 고민하는 대신, 우리는 그것의 정당성을 의심하고, 엉뚱한 곳에 화풀이하고, 무조건 억누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화를 내는 것은 정상적인 반응이며 알맞은 시간과 장소에서 적절하게 표현할 때는 매우 쓸모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화를 내는 환자들이 더 오래 산다는 사실이 많은 연구 결과를 통해 입증 되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들이 와를 냄으로써 더 많은 보살핌을 받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알다시피 화를 내면 주위 사람들의 행동이 달라지고, 그럼으로써 주위 환경을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됩니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의 삶에 알맞은 경계선을 설정해 줍니다. 부적절하거나 폭력적인 방식으로 표현되지 않은 한, 화를 내는 것은 우익하고 건강한 반응입니다.
신체의 중요한 경고 체계 중 하나인 화의 감정을 무의식적으로 억눌러서는 안 됩니다. 화가 난다는 것은 우리가 상처를 입었거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충족되지 않았음을 말해 줍니다. 많은 상황에서 그것은 정상적이고 건강한 반응입니다. 반면에 죄의식과 마찬가지로, 무언가가 우리 사고 체계의 경계선을 넘어섰다고 신호를 보냅니다. 위험한 일을 당했을 때 화를 내는 것은 건강한 반응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런 감정에 솔직하게 행동하지 않을 경우입니다. 때로 우리는 화를 내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며, 그것을 부정하다가 더 이상 화를 낼 수도 없게 됩니다.
화의 감정이 늘 우리의 삶을 집어삼키는 무서운 야수의 모습을 띠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감정일 뿐입니다. 화나는 감정을 지나치게 분석하려 한다거나 그것이 타당한지, 적절한지, 정당한지 묻는 것은 소모적인 일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과연 감정이 필요한지 의심하는 것과 같습니다. 화는 경험해야 할 감정일 뿐 판단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다른 감정들처럼 화내는 것 역시 의사소통의 한 형태이며, 상대방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불행히도 많은 사람들이 그 메시지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종종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느껴야 할지조차 모릅니다. 화가 난 사람들에게 “당신은 어떻게 느끼세요?” 하고 물으면 그들은 “내 생각으로는........” 하고 애써 냉정하게 대답합니다. 그것은 감정적인 질문에 대한 이성적인 대답입니다.
그것은 뱃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뱃속에서부터 느끼는 감정과 솔직하게 접촉해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이것을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눈을 감고 한쪽 손을 배에 갖다 대면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단순한 동작은 우리의 진실한 감정과 접촉할 수 있게 해줍니다. 아마도 뇌가 아닌 몸을 사용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스스로의 감정과 접촉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것은 인간이 몸을 통해 느낀다는 사실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성과 감정을 분리해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성의 지배를 받는 것에 너무나 익숙한 나머지 당신은 자신의 감정과 몸에 대해서는 거의 잊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일상생활 속에서 ‘내 느낌은...’하고 말하는 것보다 ‘내 생각으로는...’하고 말하는 횟수가 얼마나 더 많은지 돌아보십시오.
화를 낸다는 것은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상처가 현재의 고통인 반면, 화는 가끔씩 찾아오는 고통입니다. 이 상처들을 쌓아 두기만 하고 밖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점차 화로 자라나게 됩니다. 상처들이 오랫동안 쌓이면 치유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집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그것을 화라고 인식하지도 못하게끔 됩니다. 그 감정을 품고 사는 것에 익숙해진 당신은 마침내는 화의 감정을 자기 존재의 일부로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나쁜 사람이라고 판단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화의 감정은 직 정체성의 일부가 됩니다. 우리는 이런 자신의 정체성으로부터 오랫동안 쌓여온 해묵은 감정을 제거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자신의 좋은 면을 기억하고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하기 위해서는 화를 풀어 주어야만 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자기 자심에 대해서도 화를 냅니다. 또한 다른 이들을 기쁘게 하느라 자신의 감정을 속임으로써 스스로를 배신했다고 느낄 때에도 화가 납니다.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얻지 못하거나 소원을 이루지 못할 때에도 화가 납니다. 우리가 받을 자격이 있는 것들을 주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화를 내지만, 그것보다 먼저 우리 자신이 스스로에게 주지 않은 것 때문에 화가 났다는 것은 잘지 못합니다. 때로 우리는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하는데, 이 사회에서는 그것이 마치 스스로를 약하다고 인정하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화를 안으로 삭일 때 그것은 종종 우울증이나 자기 비난으로 표현됩니다. 안으로 억누른 화는 과거에 대한 기억을 바꿔 놓으며, 현실을 보는 관점을 왜곡합니다. 이런 오래된 분노는 다른 이들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남습니다.
우리는 상황을 극단적으로 몰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화를 억누르고 있다가 한순간에 폭발시키고 다른 이들과 자신을 비난하는 경우가 그것입니다. 살면서 자연스럽게 화를 표현해 오지 않았기 때문에, 화내는 것을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소리 지르는 사람을 성질 나쁜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고 해서 평화롭거나 화내는 일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이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배우인 고 앤소니 퍼킨스의 부인 베리 베렌슨 퍼킨스는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여성 중 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녀는 우아함과 품위, 따뜻함을 두루 갖추고 있어 만나는 사람을 금방 편안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 부드러운 미소 뒤에는 엄청난 고통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그녀는 표면 아래 살아 있는 분노를 상대할 용기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것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한 적은 없지만, 어떤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 애기를 당신과 함께 나누고 싶어요.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사람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슬픔에 대처하죠. 가장 중요한 것은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고 화를 표현할 방법을 찾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이미 끝난 일이잖아.’ 아니면 ‘화내지 말고 참아.’ 하고 말하지만 그들은 당사자와 같은 경험을 하지는 않았어요. 그것을 겪은 사람으로서 나는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아요.
어느 날 나는 내가 거의 매일 화가 나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아이들을 키우는 것을 도와줄 사람이 없어서 화가 났고, 내 일을 처리해 줄 누군가가 항상 곁에 있었는데 그 사람이 없어진 것에 화가 나기도 했고, 그러다 앤소니가 내 곁을 떠나서 화가 났고, 그것이 내 가슴 밑바닥에 깔린 감정이었어요.
나는 화를 내면서도 그 이유를 모르고 있었던 거예요.
나는 엉뚱한 곳이나 스스로에게 화풀이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어요. 언젠가는 내 안의 분노를 완전히 벗어던지고 싶어요. 나는 분노의 감정을 더 많이 들여다본 사람일수록, 그것을 더 잘 풀어 비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난 앤소니에게 편지를 썼고, 분노의 감정들을 마음속에서 내보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방에 대해 당신이 가진 좋은 감정들을 끌어내는 것이 중요해요. 그렇게 함으로써 분노의 감정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수가 있어요.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나는 무척 충격을 받았고 견딜 수 없이 혼란스러웠어요. 계속해서 화를 억눌렀고 그것은 곧 우울증으로 변했어요. 나는 그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무슨 이유로든 그를 원망하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요.
나는 분노의 감정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어요. 지금까지 내가 한 번도 내 안의 화난 감정과 접촉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많은 부부들이 이따금 화를 내지만, 우리는 화를 내며 싸운 적이 없어요. 가족이니까 싸움을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서로에게 상처가 될 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나 잘해 주었어요. 또 화가 날 만한 상황들을 피해 갔어요. 그러나 마음속의 화를 내보내지 않고서는 용서하기 힘든 법이에요. 화를 많이 내보낼수록 더 많이 용서할 수 있는 거예요.”
두려움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분노로 변합니다. 또한 두려움을 회피하거나 자신이 두려워한다는 것조차 알지 못할 때 그것은 화로 변합니다. 그 화를 처리하지 않으면 심한 분노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려움을 표현하기보다는 화를 내는 데 익숙합니다. 배우자에게 “난 당신에게 화가 났어.”하고 말하는 것이 “난 당신이 떠날까 봐 두려워.”하고 말하는 것보다 쉽습니다. “내가 나쁜 사람일지도 몰라서 두려워.”하고 인정하는 것보다 잘못된 것에 화를 내기가 더 쉬운 것처럼.
앤드루라는 남자는 몇 달 전 여자 친구 멜라니와 한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시내에는 커피숍이 너무 많았고, 그들은 장소를 착각해서 각자 다른 커피숍에서 서로를 기다렸습니다. 앤드루는 멜라니를 30분 정도 기다리다가 그녀의 자동 응답기에 메시지를 남기고 아파트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나(데이비드 케슬러)에게 말했습니다.
“무언가 착오가 있는 것 같아서 나중에 다시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멜라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죠, 내게 무척 화가 났어요. 그녀는 내가 일부러 자신을 기다리게 했다고 생각했고, 내게 무척 실망했어요. 나를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판단한 거죠. 난 우리가 장소를 착각했다고 거듭 말했어요.”
앤드루에게는 단순한 착오가 멜라니에게는 엄청난 실망이었습니다. 멜라니는 그가 믿을 수 없는 사람이며 앞으로도 자신을 실망시키리라고 여겼습니다. 그녀는 그 상황에 지나치게 화를 냈는데, 그 화는 과거의 상처에서 비롯된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녀는 현재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화의 감정 밑에 잠재되어 있는 멜라니의 두려움은 앤드루를 악한으로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불행히도 그녀는 ‘화’라는 첫 번째 단계에 머물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이 첫 번째 단계에 능숙합니다. “네가 오지 않아서 화가 나.”
“네가 늦게 와서 화가 나.” “네가 그 정도밖에 못해서 화가 나.” “네가 한 말 때문에 화가 나.”
마음속 깊이 있는 두려움을 발견하기 위해 먼저 자신을 돌아보는, 두 번째 단계로 들어서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려 주는 단서로는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화-네가 오지 않아서 화가 나.
마음속 깊은 곳의 두려움-네가 오지 않았을 때 내가 버림받은 것처럼 느껴져서 두려웠어.
화-네가 늦게 와서 화가 나.
마음속 깊은 곳의 두려움-너한테는 나보다 일이 더 중요해.
화-네가 그 정도밖에 못해서 화가 나.
마음속 깊은 곳의 두려움- 우리 수입이 줄어서 집세를 못 내게 될까 봐 겁이 나
화-네가 한 말 때문에 화가 나.
마음속 깊은 곳의 두려움- 네가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될까 봐 두려워.
두려움을 해결하는 것보다는 화를 내는 것이 더 쉽지만, 그것이 마음속 깊은 곳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사실, 그것은 종종 표면의 문제를 더 바쁘게 만들 뿐입니다. 사람들은 화에 대해서는 좋게 반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소리를 지른다고 해서 상대방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가 나에게 처음 10분간 소리쳤을 때는 난 여전히 내가 옳다고 생각했어. 그러나 그 소리를 20분 더 들으니까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정말로 이해할 수 있었어.” 하고 말하는 사람을 한 번이라도 만나 본 일이 있습니까?
우리의 두려움이 비록 타당성을 잃게 됩니다. 지각을 하는 동료에게 계속 잔소리를 해대면 상황은 조금도 아나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에게 “할일이 너무 많아. 다 못할까 봐 걱정이 돼.” 하고 말한다면, 동료는 당신의 화난 감정에 기분이 상하지 않고도 당신의 두려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화를 삭이기 위해 많은 소모전을 치르면서, 우리 모두는 영혼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고통을 끌어안은 채 살아갑니다. 심리치료사이자 작가인 다프네 로즈 킹마는 관계를 끝내는 문제에 직면한 이들을 위한 워크숍을 열었습니다.
“나는 눈에 띄게 인상이 강렬한 한 할머니를 잊지 못할 거예요. 그분은 이미 70대 후반이어서, 나는‘저분은 여기에 왜 오셨을까? 저분에게도 끝낼 관계가 있단 말인가?’ 하고 생각했어요. 참석자들은 돌아가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그곳에 온 이유나 크리스마스 때 버림받은 이야기, 자신이 이겨 내려고 하는 것들, 관계의 결말 등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난 마침내 그 할머니에게 물었어요.
‘여기는 왜 오셨어요? 끝낼 관계가 있으신가요?
그러자 그분은 말했어요.
‘난 40년 전에 전남편과 이혼했어요. 이혼한 후로 40년간을 줄곧 화가 난 채로 고통스럽게 살아왔어요. 난 아이들과 내가 아는 모든 이들에게 그 사람을 비난했어요. 그 후로는 남자를 믿지 않았어요. 남자를 만나면 나도 모르게 그 비열한 남자가 떠올라서 그 누구와도 3주 이상 관계를 지속하지 못했어요. 그것을 절대 극복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난 이제 병에 걸려 죽어가고, 살 날이 몇 달 남지 않았어요. 이 모든 분노를 무덤으로 가져가고 싶진 않아요. 사랑하지 않고 삶을 산 것이 너무 슬퍼요. 그래서 이곳에 온 거예요. 평화롭게 살 수는 없었지만 평화롭게 죽고 싶어요.
당신에게 화를 이겨 낼 수 있는 용기와 힘이 있는지 의심스럽다면 이 할머니를 떠올리기 바랍니다. 이분은 슬픈 인생을 살았지만 훌륭한 교사예요.”
우리 사회가 화내는 일을 나쁘고 잘못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건강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화의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그것을 밖으로 표현하는 데 익숙하지 못합니다. 그저 그것을 마음속에 쑤셔 넣고 부정하거나 그냥 간직한 채 살 뿐입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한꺼번에 폭발시키고 맙니다. 작은 일에 대해 화내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평정을 유지하면서, “난 이것에 대해 화가 나요.” 하고 말할 줄 모릅니다. 또한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면 화를 낼 거예요.”하고 말할 줄도 모릅니다. 그 대신 마치 자기는 절대로 화를 내지 않는 착한 사람인 척합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화를 터뜨리며 지난 몇 달 동안 자기를 화나게 한 상대방의 행동을 스무 가지나 나열합니다.
죽음 역시 관련된 사람들 모두를 화나게 합니다. 병원 직원들은 그 화를 어디다 보관할까요? 환자와 가족들은 어디에 보관할까요? 병원 안에 소리 지르는 방이 마련되어 있다면 좋을 것입니다. 특정인을 향해서가 아니라 그냥 크게 소리를 지를 수 있는 방말입니다. 화난 감정을 발산하지 못하면 누군가에게 소리를 지르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소리를 지르면 반드시 그로 인해 일련의 결과가 뒤따릅니다. 화난 사람 곁에 있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화난 사람은 종종 외톨이가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화내는 자신을 자책하면서 화를 삭입니다. 착하고 사랑스럽고 고상한 사람이라면 화를 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화를 내는 것이 정상적인 반응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내면에 쌓여 있는, 자신에 대해서나 타인에 대해서나 또는 신에 대해 갖고 있는 다양한 층의 분노를 해결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신을 욕하며 소리를 지르거나 심지어는 병원 침대를 야구 방망이로 내려치며 화를 표현하는 것은 어떤 이들에게는 도움이 됩니다. 그들은 마침내 그 화난 감정을 꺼내 해결하게 되어 얼마나 좋았는지 종종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리고 신을 욕한 사람들도 처음에는 신이 자신들에게 번개를 내리거나 하는 식으로 벌을 내릴까 봐 두려워했지만, 그 이후 전보다 신과 더 가까워진 것을 느끼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한 여성은 말합니다.
“신은 내가 화를 내도 받아 줄 만큼 마음이 넓은 분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리고 나의 분노가 결국에는 그분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어요.”
한 비행기 승무원이 총을 닦다가 우발적인 죽음을 맞이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녀는 아버지의 죽음을 평화롭게 받아들이려 노력하고 또 노력했지만, 결국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하루는 그녀가 집에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엄청난 비가 쏟아지며 폭풍우가 불어 닥쳤습니다. 그녀는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마당으로 달려나가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자신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 하늘에다 대고 목청껏 소릴 질렀습니다. 그 폭풍우가 그녀 내면의 분노와 접촉하고 표현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고 그녀는 말했습니다. 두 주먹을 허공에 휘두르며 소리를 지른 뒤 그녀는 그 자리에 꿇어앉아 울었습니다. 그런 다음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다시 평화를 느꼈습니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나(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는 죽음에 대한 생각, 회복에 대한 생각을 껴안고 살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는 대신 몸의 왼쪽이 마비된 채로 무능력하게 살아갔습니다. 내 몸의 마비 상태는 더 이상 좋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마치 활주로에 대기하고 있는 비행기와 같았습니다. 그 비행기가 이륙하든지 아니면 게이트로 돌아가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 있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나는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주위 모든 것들, 모든 이들에 대해 화가 났습니다. 심지어는 신에게도 화가 났습니다. 나는 신에게 온갖 욕을 퍼부었습니다. 몰론 내가 벼락을 맞는다든가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한 나의 연구와 이론에 경의를 표했습니다. 그중에는 분노에 관한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나 자신이 화를 내자 수많은 이들이 내 곁을 떠났습니다. 최소한 네 명 중에 세 명은 떠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언론계의 몇 사람은 내가 화를 내느라 ‘좋은 죽음’을 맞이하지 못한다며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나의 이론을 사랑하면서도 그 이론에 충실하게 죽어가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내 곁을 지켜 준 이들은 내가 화내는 것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해 주었으며, 그 덕분에 나는 화를 풀 수 있었습니다.
나는 환자들에게 죽기 전에 화를 풀어야 하며, 그것을 감추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처음 쓰러져서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한 간호사가 실수로 내 팔꿈치 위에 앉았습니다. 나는 너무 아파 소리를 지르며 그녀를 호되게 내리쳤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녀를 진짜로 친 것이 아니라 다른 쪽 팔로 치는 시늉을 했을 뿐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나를 호전적인 환자라고 차트에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의료계에서 너무나 흔한 일입니다. 정상적인 반응을 보인 환자를 과장해서 기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처를 치유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갓난아기와 어린아이들은 감정을 솔직히 느낀 후에 다음 단계로 나아갑니다. 울고 난 뒤 잊어버리고, 화를 낸 뒤 잊어버립니다. 사람은 죽음의 시기에 이르면 다시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 정직해집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은 “난 두려워요.” 또는 난 화가 나요.“ 하고 쉽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더 솔직해지는 법과 화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화는 우리 삶에서 스쳐지나가는 감정이어야지, 존재 그 자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느 날, 병원에 입원해 있는 79세의 로레인을 찾아갔습니다.
얼마 전 그녀는 림프종 진단을 받았습니다. 팔찌를 찬 백발의 그녀는 침대에 앉아 가족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음울한 분위기였지만, 그녀의 단란한 가족 모임을 내가 방해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나(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는 간단히 내 소개를 한 뒤 그녀에게 한가할 때 다시 와도 되겠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물론이에요. 난 방문객들이 오는 것이 좋아요.”
그 자리를 떠나면서 나는 내가 찾아온 이유를 그녀가 아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훤히 꿰뚫어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음날 내가 다시 찾아갔을 때 로레인은 방에서 혼자 라디오를 켜놓고 마치17세 소녀처럼 열정적으로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그녀를 보면서 나는 이 장면에 딱 들어맞는 표현을 생각해 냈습니다. ‘내일은 없다.’
로레인은 엉덩이를 흔들면서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습니다. “뭐 하고 계시는 거예요. 지금?” “와투시 족의 춤을 추고 있어요.”
“왜 그 춤을 추고 계시는 거죠?” “지금 출 수 있으니까요!”
그녀의 말이 옳았습니다. 우리는 놀 수 있기 때문에 놀고 싶어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런 충동을 억제합니다. 다행히도 로레인은 스스로 노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끔찍한 병과 싸우면서도.
죽음은 놀이의 필요성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듣다 보면, 삶의 마지막에 이르면 즐겁게 지낸 놀이의 순간들이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시골길에서 자전거를 타던 거 기억하니?”, “바닷가에 간 일 기억나?” 그들은 ‘아이들과 공원에 놀러 간 일요일’과 ‘자신들의 아이가 지었던 우스꽝스러운 표정들’을 회상합니다.
‘놀이가 왜 배움이 되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후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지난 삶을 되돌아보면서 그들이 가장 많이 하는 후회는 “인생을 그렇게 심각하게 살지 않았어야 하는 건데.” 하는 것입니다.
수십 년 동안 임종을 앞둔 환자들과 상담을 해오면서 우리는 단 한 번도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더 일했어야 하는데.”라거나 “근무시간이 8시간이 아니라 9시간이었다면 더 행복한 삶을 살았을 텐데.”하고 이야기 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성취해 낸 것들을 자랑스럽게 회상하면서도, 삶에는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일에서의 성취감이 사생활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모든 것이 공허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열심히 일했지만 진정한 삶을 살지는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옛말에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바보가 된다.’ 일만 열심히 하는 것은 삶을 균형 잃은 지루한 것으로 만듭니다.
우리는 삶을 누리고 놀이를 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그것도 일평생 동안, 흔히들 잘못 생각하고 있지만, 놀이는 아이들만의 소일거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생명 가진 존재의 생명력입니다. 놀이는 마음을 젊게 하고, 일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며, 인간관계를 잘 맺게 해줍니다. 또한 젊음을 되돌려 줍니다. 놀이는 삶을 가장 충만하게 사는 방법입니다.
그럼에도 놀이는 삶의 우선순위에서 낮게 취급되어 왔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과 가족을 부양해야 하므로 일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그것은 지나치게 강조되어 왔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항상 생산적이고 성공적이어야 하며, 끊임없이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시달립니다.
지금 세대의 사람들은 일하는 법은 알지만 존재하는 법은 잘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 융자금을 갚고 식탁에 오를 가족의 양식을 마련하기 위해 직장에서 8시간을 일하고, 추가로 일주일에 나흘 밤씩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해서, 그것이 꼭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당신이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직업을 두 개 가져야 한다면 그렇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더 나아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주변 분위기 때문에 야근을 하고 주말에도 나와 일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일시적인 것이라면 그렇게 일할 가치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당신의 삶이 된다면, 밤에도 주말에도 쉬지 않고 일만 하게 된다면, 그렇게 할 가치기 있는지 회의가 생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을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이 왜 성공하려고 하는지는 잊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임에 나가더라도 좋은 연줄을 얻기 위한 모임에만 나갈 뿐, 단지 재미를 위한 모임 같은 곳에는 가지 않습니다. 주말은 동료를 따라잡고 승진하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이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쩌다 주말에 놀러 나가서도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초조한 느낌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우리는 성공을 얻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뒷전으로 미루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더 많은 것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성공과 권력이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놀이도 마찬가지로 중요합니다. 인간의 내면에는 놀고, 해방되고, 스트레스와 긴장을 풀려는 욕구가 있습니다. 불행히도 우리는 놀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다가 나중에는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립니다.
많은 회사들이 직원들의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종종 케이크나 풍선을 준비합니다. 이 풍선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며 몇 개는 사무실과 복도 천장으로 올라갑니다. 직원들이 복사를 하러 가거나 동료의 방을 찾아가면서 그 풍선들을 가지고 장난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손끝으로 풍선을 튕기기도 하고, 끈을 잡아당겼다가 놓아 주어 풍선이 천장으로 올라가는 것을 구경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행위를 조심스럽게,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될 때 할 것입니다.
이렇게 고도로 생산적인 사람들도 놀이를 갈망합니다. 많은 이들이 풍선을 빼앗긴 아이들처럼 놀이를 잊은 재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놀이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노는 방법을 잊어버렸습니다. 심지어 놀이가 무엇인지조차도.
놀이란 순수한 즐거움을 얻기 위해 하는 행위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놀이는 모든 한계를 초월해 즐거움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놀이 상대는 성별, 인종, 종교, 연령에 상관없이 그 누구라도 될 수 있습니다.심지어 인간이 아니어도 함께 놀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애완동물과 놀면서 기쁨을 느낍니다.
놀이는 내면의 기쁨이 바깥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웃음, 노래, 춤, 수영, 등산, 요리, 달리기, 게임 등 즐거움을 주는 것이면 무엇이든 놀이가 될 수 있습니다. 놀이는 삶의 모든 측면을 더 의미 있고 즐겁게 만듭니다. 자신이 하는 일에도 더 만족을 느끼게 하고, 인간관계도 좋아집니다. 놀이는 사람을 젊어지게 하고 긍정적으로 만들어 줍니다. 아이들이 가장 먼저배우는 일 중 하나가 바로 놀이입니다. 놀이는 자연스럽고 본능적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삶에서 순수한 놀이의 시간을 거의 갖지 못한다는 것은 정말로 슬픈 일입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놀이에 시간을 쓸 수 있느냐고 물으면, 나는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느냐고 답합니다. 놀이는 삶의 균형을 잡아 주며 정신을 맑게 해줍니다. 잠시 놀고 난 뒤 우리는 일을 더 잘합니다. 일 때문에 미칠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 보십시오. 그들이 영화라고 대답한다면, “영화를 마지막으로 본 때가 언제인가?” 하고 물어보십시오. 그들은 대부분 “몇 달 전.” 하고 대답할 것입니다. 일이 아니라. 당신이 하고 싶은 것을 못하는 것이 당신을 미치게 하는 것입니다.
놀이는 신체의 기능도 돕습니다. 많은 과학적 연구들이 웃음과 놀이가 스트레스를 줄여 주며, 모르핀과 화학적으로 유사한 엔돌핀이라고 부르는 체내 물질의 분비를 촉진한다고 밝혀냈습니다. 자연스럽게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기분을 좋게 만드는 엔돌핀이란 물질은 웃거나 놀이를 한 후에 왜 기분이 좋아지는지를 잘 설명해 줍니다. 그것들은 삶에 에너지를 주는 훌륭한 도우미들입니다.
웃음이 저절로 채워지는 약과 같습니다. 웃음은 웃을수록 더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죽음과 같이 심각한 주제를 다룰 때에도 웃음이 들어설 자리는 언제나 있습니다.
의예과와 심리학과 학생들을 위한 ‘죽음’에 대한 수업이 공개강의로 진행되었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자기 강의를 들으러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교수는,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자 무척 놀랐습니다. 불치병을 앓고 있는 그 여성의 사생활이 염려되어 그는 수업 중에 한 번도 그녀의 상태를 화제로 삼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교수는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주로 걱정한 것은 누군가가 죽음에 대해 농담을 하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을 비하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에게는 그것이 하나의 연구 사례가 아니라 실제 존재하는 문제일 테니까요.”
그러자 그 여성은 대답했습니다.
“농담하고 노는 것이 삶이에요. 웃음은 내가 이 병을 견뎌 내는 방법 중 하나예요. 당신의 학생들이 농담을 했다 해도 난 개의치 않았을 거예요.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사람들이 ‘죽음’이나 ‘암’같은 주제나 단어를 일부러 피하는 거예요. 난 차라리 그것에 대해 농담을 하겠어요. 두려워하고 회피하는 것보다는 웃는 것이 더 즐겁고 진실하니까요.”
제이콥 글라스는 영적인 원리에 대한 책을 여러 권 쓴 작가이자 강사입니다 어느 날 오후 나(데이비드 케슬러)는 시내의 한 찻집에서 이 오랜 친구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그 찻집에서 책을 읽고 차를 마시고 친구를 만나기도 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단출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강의와 집필 활동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 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더 많이 일하하고 충고하면서 작업 시간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자 이 훌륭한 친구가 물었습니다.
“그러면 뭐가 어떻게 된다는 거죠?”
“그러면 당신은 한 주에 더 많은 강의를 할 수 있어요. 멋지게 성공을 하고 그다음엔 퇴직해서 삶을 즐기는 거죠.”
“그러면 찻집에 앉아 쉬면서 책 읽는 시간이 있을까요?”
“물론이죠. 그때가 되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난 지금도 쉴 수가 있어요. 나에겐 휴일도 있고, 삶을 즐길 시간도 있고, 산책을 하고 연극을 보고 느긋하게 점심을 먹을 여유도 있어요. 내가 왜 나중의 삶을 위해 현재의 소중한 시간을 바쁘게 보내야 하죠? 난 지금도 충분히 즐길 수 있어요.”
나는 내가 이야기한 삶을 제이콥이 이미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 했습니다. 나는 쉬면서 차를 마시는 시간에도 생산성을 생각하는 덫에 걸려 있었고, 놀이보다 일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일과 놀이가 완전히 별개의 활동일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이 하는 일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일상의 일들에서 즐거움을 발견하는 것은 하루를 살아가고 평생을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는 목표 지향적이 되기 쉽습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지 못할 때 불행해집니다.
일에서 즐거움을 찾는 동시에, 즐거움으로부터 일을 떼어 놓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남자도 있습니다.
“이런 방법은 어때요? 토요일 하루 종일 일하느라 아내와 함께할 시간을 빼앗기는 대신에, 나는 노트북 컴퓨터를 마당으로 가지고 나가서 네다섯 시간 동안 일합니다. 그렇게 하면 아내와 함께 있을 수 있어요. 그런 식으로 할 일에 놀이를 끌어들입니다.”
그러나 이 남자의 아내는 아마도 그가 제대로 놀지 않는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녀는 아마도 자신이 무시당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의 몸은 아내와 함께 있을지 몰라도 과연 그의 마음과 존재도 아내와 함께 마당에서 놀고 있을까요? 아니면 월요일 회의 안건에 매여 있을까요? 이 남자는 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다른 환경에서 일하고 있을 뿐입니다.
휴대폰은 여가 시간의 상당 부분을 업무 시간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우리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서도 일과 관계된 대화를 합니다. 운전을 하면서도 이야기하고, 쇼핑을 하면서도 전화기를 귀에서 떼지 않습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영화를 보는 동안에도 전화를 받습니다. 어떤 여성은 일을 하면서 휴대폰 통화를 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대화 내용을 들키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취미 생활을 일로 만들기도 합니다. 어느 날 저녁, 암에서 회복되어 가는 한 여성이 남편에게 그 지역 고등학교의 학예회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일이 너무 버겁다고 말했습니다. 피곤에 지친 그녀는 아팠을 때 스스로에게 한 약속을 떠올렸습니다.
“학생들의 장기 자랑에 참여하면 재미있을 것이라 생각했어요. 그러나 지금 난 몸에 무리가 올 정도로 모든 것을 도맡아 하고 있어요. 내 머릿속은 온통 일로 가득 차 있어요. 내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고 생각했을 때, 회복되기만 하면 훨씬 더 즐겁게 살겠다고 자신과 약속했어요. 하지만 이건 전혀 즐겁지 않아요. 일이거든요. 만일 암이 재발한다면 지금까지 주어진 시간을 정말로 즐겼다고는 말할 수 없을 거예요.
우리는 취미가 왜 필요한지 잊었습니다. 당신은 순전히 즐거움을 위해 가구를 만들다가도 갑자기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것으로 사업을 해보면 어떨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갖는 것은 정말 운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취미란 본래 결과물을 생각하지 그저 재미로 하는 일입니다. 팔기 위해 가구를 만든다면 그건 더 이상 취미가 아니라 일입니다.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당신은 자신이 사랑하는 어떤 활동을 무미건조한 것으로 만들었으며, 그 일을 하면서 더 이상 즐거움을 느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삶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놀이를 잊어버립니다. 생산성을 생각하기 이전의, 순수하게 놀이 자체를 즐기던 시절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가슴이 열려 있었고 그 후의 결과에 대해 어떤 죄의식도 느끼지 않고 놀 수 있던 그때를, 그러나 즐기기 위해 인생을 산다는 생각은 의심스런 눈초리를 받기가 쉽습니다. 어린 시절 우리는 어른들에게서, ‘삶은 만만치 않아. 그 미소를 얼굴에서 없애, 무언가를 해, 무언가가 되란 말이야!’ 하고 훈계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래서 파도타기를 하듯 인생을 사는 사람을 무시하며, 왜 그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살아가는지 이상하게 쳐다봅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최소화하고 하루 종일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흘러가듯 사는 사람이 자신의 삶엔 즐거움이 끊이지 않는다고 말하면 우리는 그를 열등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왜 우리는 즐거움이 고개를 내밀지 못하는 세상에서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놀이는 악마의 일터’이며 ‘놀이보다는 일이 먼저’하고 판단합니다. 성공이라는 사다리를 올라가면서 우리는 즐거움을 느끼는 법을 잊어버립니다. 삶을 힘들다고 생각하며 계속해서 삶을 개선하고, 고치고 싶어 합니다. 단지 즐거움을 얻기 위해 시간을 비워 두는 법을 모릅니다.
우리는 즐거움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으며, 그래서 조금만 즐거움을 맛봐도 죄책감을 느낍니다. 놀이에서 얻은 즐거움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이것이 왜 그토록 성공한 많은 사람들이 은밀히 놀 장소를 찾아다니는지, 왜 어떤 사람들에게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자연스런 욕구가 불건전한 방식으로 나타나는지 설명해 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앞에서 말한 풍선을 가지고 노는 사무실 직원들과 같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놀이에 대한 욕구를 억압해 왔기 때문에, 그것들은 불륜이나 약물 중독, 충동적인 쇼핑, 식탐 등의 형태로 표출됩니다. 아니면 자신은 즐거움을 누리거나 행복해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며, 고의로 자신의 삶을 파괴합니다.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는 스스로 나쁜 사람이 되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우리는 하루가 끝날 때마다 “오늘 뭘 했니?” 하고 물어보는 부모 밑에서 자랐습니다. 그 물음에 그날 우리가 한 것들을 이야기하면서 하루를 생산적으로 보냈고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음을 증면해야만 했습니다. 어른이 된 지금도 우리는 순수한 기쁨만을 위해 한 일들보다는 우리가 힘들게 성취해 낸 일들을 나열할 때 훨씬 더 편안함을 느낍니다.
암을 이겨내고 새 삶을 되찾은 로니 카예는 자신이 오후 내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베토벤의 음악만을 들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는 법을 어떻게 배웠는지 말합니다.
“이제 나는 오후 내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베토벤 교향곡 제6번을 들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어요. 그것이 내게 큰 기쁨을 가져다주니까요. 그리고 기쁨의 중요성을 인정할 줄 아는, 그래서 내가 음악을 들었다고 얘기하면 ‘잘했어.’라고 말해 줄 수 있는 친구들을 만들었어요. 음악을 듣느라 다른 일을 하지 않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이제 음악이 내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어요.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또 어떤 상황에 처해 있어도 우리는 다시 놀 수 있습니다. 언제든지 놀이데 대한 감각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노는 법을 압니다. 학교에서도 놀이 시간이 있는데, 그것은 학교 공부가 놀이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놀이 약속을 해서는 안 되는 걸까요?
놀이와 놀이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당신이 만일 왕성한 경쟁의식, 긴박감, 완벽주의, 독단 등의 특징을 가진 A유형의 사람(B유형은 느긋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면 놀이 시간을 당신의 스케줄에 넣고, 때로는 자신에게 놀이를 강요하기도 해야 합니다. 할 일은 항상 많지만 그것이 놀지 못할 이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스스로에게 놀이 시간을 주지 않으면 결국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게 됩니다. 만일 당신이 자신에게 놀이 시간을 주지 않는다면, 당신은 나중에 직장 상사에게 할애한 시간을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가족에게 준 시간도 후회할지 모릅니다. 지금 놀지 않으면 언젠가는 후회하게 됩니다.
놀이란 이따금씩 우리에게 주어지는 휴식의 순간 이상의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놀이는 그것에 실제로 투자된 시간을 의미합니다. 당신은 일에서부터, 삶의 심각성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삶에 다시 순수한 놀이의 시간을 끌어들일 방법은 무수히 많습니다. 아침에 주식 시세를 체크하는 대신 만화책을 읽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 웃기는 영화를 보고 튀는 옷을 사는 것, 화려한 색상의 넥타이를 매는 것, 기발한 속옷을 입는 것, 초대에는 가능하면 응하고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는 것, 무언가 실없는 일을 하는 것.
어느 것이나 놀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놀이도 일로 둔갑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당신이 정말로 산책을 즐긴다면 그것은 놀이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반드시 해야 하는 운동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노는 것이 아닙니다.
스포츠와 게임은 놀이의 훌륭한 출발이 될 수 있습니다. 축구장을 달릴 때나 체스 게임에 열중할 때, 우리 안으로부터 동심이 흘러나오고, 자기 존재를 확인하게 되고, 스트레스가 풀리며, 다른 이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친구들을 초대해 주사위 놀이나 도둑 잡기 등을 하는 게임 파티를 벌일 때가 있습니다. 초대 받은 손님들은 이런 게임들이 얼마나 신나고 재미있는지, 얼마나 멋진 추억을 남겨 주는지 깨닫고는 놀랍니다. 경쟁은 스포츠나 게임에서 활력소가 되고 훌륭한 자극제가 됩니다. 하지만 이것조차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과 게임해 본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재미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네 살 난 엠마로부터 한 가지 배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엠마는 친구 제니와 함께 캔디랜드라는 게임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니가 이기기 일보 직전에 엠마는 흥분해 그 자리에서 뛰어오르며 외쳤습니다.
“오 제니, 난 네가 이겼으면 좋겠어!”
엠마는 다른 사람을 이긴다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게임을 하는 것 자체가 재미있을 뿐입니다. 친구가 이기면 자신이 진다는 것을 아직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단지 노는 것이 즐거운 것입니다. 엠마의 순진함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축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특별한 경우에만 쓰기 위해 아껴 두지 말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기 자신을 축하하십시오. 우리는 좋지 않은 일이 생길 때는 그것에 지나치게 시간을 할애합니다. 오히려 좋은 일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합니다. 친구가 찾아오는 것을 축하하고 주말을 자축하고, 삶을 자축하는 겁니다. 특별한 일이 없더라도 옷을 차려입고, 자신과 가족을 위해 찬장에 넣어 둔 좋은 식기를 꺼내는 겁니다. 우리는 남을 위해서는 정성껏 음식을 마련하면서도 혼자 있을 때는 냉동 참치, 캔 음식 그리고 빵 따위를 먹습니다. 장례식이야말로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잘 차려입고 유족의 집에 모입니다. 그들은 좋은 식기에 담긴 음식을 먹은 후 평소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응접실에 모여 앉습니다. 그러나 고인은 살아생전 이런 것들을 즐길 수 있었을까요?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에게도 시간을 할애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신 혼자 있을 때도 근사하게 시간을 쓸 줄 알아야합니다. 그것은 다른 이들이 떠나고 없을 때나, 우연히 혼자 있을 때 갖게 된 시간이어야 합니다. 그 시간에는 무슨 영화를 볼지,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할지 타협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 순간 당신은 비로소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으며, 진정으로 홀로 있을 수 있으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은 때, 하고 싶은 방식으로 할 수 있습니다.
성공한 사업가인 조지가 암과 한판 승부를 벌인 일에 대해 나(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언젠가부터 목이 붓기 시작했어요. 아주 빠른 속도로 부어오르더군요. 난 곧바로 암 전문의를 찾아갔고 그 즉시 부어오른 부위를 제거했어요. 그리고 화학 치료를 받았죠. 난 부지런한 사업가에서 부지런한 환자로 변해 갔어요. 검사 결과를 꼼꼼히 확인하고, 약을 먹고, 의사의 진찰을 받았습니다. 병을 앓는다는 게 그렇게 큰일인줄 몰랐어요.
화학 치료가 거의 끝나갈 무렵, 복직에 대해 생각해 봤어요,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고, 암 때문에 이제는 내 삶도 너무 심각해졌어요. 모든 게 살아남기 위해 거쳐야 할 과정이었고, 어쨌든 내가 살아 있음에 신에게 감사드렸습니다.
그러고 나니 궁금해지더군요. ‘왜? 무엇 때문에 내가 살아남았을까? 일을 더 많이 하려고? 더 생산적으로 살기 위해서?’
난 그때 비로소 깨달았어요.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공허한 삶을 살아왔는지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은 삶의 의미를 성공에 두었고, 난 성공이라는 이름의 벽을 구성하는 하나의 벽돌에 불과했어요. 난 그런 삶으로는 다시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했어요.
삶을 다시 설계하고,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고, 즐거움을 되찾으리라 결심했어요. 공원에도 가고, 공연도 보러 다니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기로 했어요. 마음의 문을 닫고 지내는 대신 가끔씩 처음 보는 사람들과 수다를 떨기도 하고요. 나는 삶에서 너무 많은 것을 잃고 있었어요. 지금은 그것들을 되찾을 시간이에요.”
우리가 어린 아이였을 때 세상은 마술 같은 일들로 가득했습니다. 그 오래된 느낌을 되살려 조금만 더 즐길 수 있다면 잃어버린 순수함을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나이를 먹어가더라도 마음은 언제나 청춘일 것입니다.
거죽이 늙어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계속 놀이를 한다면 내면은 여전히 젊은 채로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좋은책] > 인생수업' 카테고리의 다른 글
5. 아직 죽지 않은 사람으로 살지 말라 (0) | 2017.12.20 |
---|---|
6.가슴 뛰는 삶을 위하여 (0) | 2017.12.20 |
8.무엇을 위해 배우는 가 (0) | 2017.12.20 |
9.용서와 치유의 시간 (0) | 2017.12.20 |
10. 살고 사랑하고 웃으라. (0) | 2017.1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