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책]/인생수업

9.용서와 치유의 시간

경호... 2017. 12. 20. 11:59

9.용서와 치유의 시간

 

용서의 첫 단계는 상대방을 다시 인간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들은 실수투성이고, 부서지기 쉽고, 외롭고, 궁핍하고, 정서적으로 불완전하다. 다시 말해, 그들은 우리 자신과 똑 같다. 그들 역시 오르막길과 내리막길로 가득한 인생길을 걷고 있는 영혼들이다.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준비하던 인도는 종교 전쟁에 휩싸였습니다. 내전 중에 회교도에게 아들을 잃은 한 힌두교도가 마하트마 간디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회교도들을 용서할 수 있습니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인 자들에 대한 미움이 마음속에 가득한데, 어떻게 하면 제가 다시 평화를 찾을 수 있을까요?” 간디는 그 남자에게 고아가 된 아들을 입양해 자식처럼 키우라고 말했습니다.

삶을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용서가 필요합니다. 용서는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는 방법이며, 우리를 다른 사람과 연결하는 방법입니다. 우리 모두는 상처를 받습니다. 우리는 그런 고통을 겪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는데도 상처를 입습니다. 그리고 진실을 말하자면,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혀 왔습니다. 문제는 상처를 입는 것이 아니라, 상처 입힌 사람을 용서할 수 없거나 용서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계속 아프게 하는 상처입니다. 우리는 이런 상처들을 쌓으며 살아가지만, 그것을 치유하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습니다. 용서가 필요한 이유가 그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용서에 대한 선택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용서의 선택권은 상처를 입힌 사람보다 상처를 받은 사람에게 더 중요한 이기적인 행동입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살면서 느끼지 못한 평화를 되찾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죽음이란 모든 것을 내려놓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용서하지 않을 때, 우리는 오래된 상처와 분노에 매달립니다. 과거의 불행한 기억을 떠올리면서 분노를 되새김질합니다. 용서하지 않을 때 자기 자신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용서는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해서나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나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용서는 다시 한 번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는 자유를 줍니다. 그리하여 모두가 관계를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얻습니다. 그 기회는 용서만이 부릴 수 있는 마술입니다. 타인과 자신을 용서할 때, 우리는 다시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되찾게 됩니다. 부러진 뼈를 치료하면 부러지기 전보다 더 튼튼해지는 것처럼, 우리의 관계와 삶도 용서를 통해 상처를 치유함으로써 더 강해질 수 있습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은 진정한 용서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들은 나는 정말 옳았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알 수 있어. 하지만 내가 너그럽게 너를 용서해 줄게.” 하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그들은 잘못한 건 너나 나나 다 마찬가지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 하지만 난 더 이상 네가 저지른 잘못으로 너를 판단하거나 내 잘못으로 내가 판단되기를 원하지 않아.” 하고 말합니다.

용서를 방해하는 것은 많습니다. 가장 주된 것은 용서함으로써 마치 우리에게 상처가 된 상대방의 행동을 용서한다는 기분이 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에게 상처를 줬어도 괜찮아.” 하고 말하는 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용서는 미움에 집착하는 것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 자신을 위해 상처를 떨쳐 버리는 것입니다. 용서를 미루는 사람들은 그들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을 벌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용서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짓밟고 가도록 내버려 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용서하려면 우리에게 상처를 준 상대방의 당시 상태가 최선이 아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이 그들의 잘못 이상의 존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인간이고, 실수를 한 것이고, 우리와 마찬가지로 상처를 받았습니다. 궁극적으로 용서는 자신 안에서 일어납니다. 용서는 자기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한 행동은 행동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행동을 용서할 필요가 없으며, 단지 그 사람을 용서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용서를 방해하는 또 다른 장애물은 복수에 대한 욕망입니다. 당한 만큼 갚이 주는 것으로는 일시적인 쾌감이나 만족감을 얻을 수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잘못임을 알고 행 행동이므로 결국엔 마음 깊이 죄의식을 남깁니다. 우리는 종종 상처를 준 사람에게 자신이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알리고 싶어서 그를 심하게 비난 합니다. 그러면 우리 자신이 더욱 상처받을 뿐입니다. 상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지만, 그것에 매달린다면 자기 학대가 됩니다.

용서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때로는 그 상황을 무시해 버리는 편이 쉬울 수도 있습니다. 대개 우리는 용서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면서도 고통의 강물이 삶을 관통하며 흐르는 것을 내버려 둔 채 용서를 미룹니다. 죽음이 눈앞에 닥치기 전까지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한 삶은 이런 것이 아니었음을 자각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그 강을 맑게 할 수 있는 시간이 삶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 발이 붂이게 됩니다. 우리는 이 오래된 장소에 익숙해져서 남을 용서하려고 할 때면 마치 위험을 무릅쓰고 미지의 땅을 찾아나서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관계를 회복하기보다는 누군가를 비난하기가 더 쉬운 경우가 많습니다. 모든 초점이 상대방의 잘못에 맞춰져 있는 사람에게 자기 자신의 문제는 보이지 않습니다. 용서함으로써 우리는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되찾고, 불쾌한 사건을 딛고 더 잘될 수 있습니다. 상처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자신을 영원한 피해자로 만드는 일입니다. 용서는 상처를 초월하게 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나 어떤 일 때문에 영원히 상처받은 상태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용서하는 법을 간단히 몇 단계로 정리해서 말한다는 것은 마치 세상을 구원하는 방법에 대해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용서란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용서하려고 할 때 속이 뒤틀리는 느낌을 맛볼 수도 있습니다. 때로 마치 자기가 세상을 구원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것이 우리가 세상을 구원하는 방법입니다.

어린 시절, 우리는 남에게 상처를 주면 곧바로 미안해하고 사과했습니다.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 이렇게 사과하는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과를 받더라도 그걸로 충분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잘못했을 때 우리는 그들의 두려움과 혼란스러움, 무지함을 봅니다. 그들을 한 사람의 인간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인이 되면 다른 사람들을 그들이 우리에게 준 상처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자신이 야기한 고통으로만 평가받는 1차원적인 인물이 됩니다.

용서의 첫 단계는 그들을 다시 인간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들은 실수하고, 때로는 나약하고, 둔감하고, 혼란스러워하고,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들은 실수투성이고, 부서지기 쉽고, 외롭고, 궁핍하고, 정서적으로 불완전합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우리 자신과 똑같습니다. 그들 역시 오르막길과 내리막길로 가득한 인생길을 걷고 있는 영혼들입니다.

그들을 무지하고 나약한 인간으로 인식한 다음에는, 자신의 분노를 자각해야 합니다. 베개를 뒤집어쓰고 소리를 지르거나, 친구에게 화를 털어놓거나, 울부짖는 등 분노를 발산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면서 막힌 에너지를 분출해야 합니다. 그러면 분노의 감정 밑에 깔린 슬픔, 고통, 증오와 상처를 발견할 것입니다. 그것을 찾고 난 후엔 그런 감정들을 충분히 느껴야 합니다.

그다음 단계가 가장 어렵습니다. 이제는 그 감정들을 풀어 주어야 합니다. 용서는 당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들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한 행동은 당신보다는 그들의 세계, 그들 자신의 문제와 더 많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들과의 감정적인 고리를 끊을 때 우리는 자유를 발견할 것입니다. 누구나 해결해야 할 문제를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우리와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평화, 우리 자신의 행복입니다.

상대방이 저지른 행동이 너무 공격적이어서 용서가 불가능하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만의 경우가 우리에게 인내, 사랑, 분노, 용서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줄 것입니다.

 

알리시아에게는 분노할 일이 많았습니다. 10대였을 때, 그녀는 가족들과 함께 나치에 체포되어 집단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그곳에 도착한 직후, 그녀는 보초병에게 가족이 어디에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는 저기에 있어하고 말하며 아무렇지 않게 큰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를 가리켰습니다. 얼마 후 연합군이 들어와 수용소가 해방되자, 알리시아는 덴마크로 가서 스웨덴 행 기차를 기다렸습니다. 다른 생존자들이 함께 있었지만 가족은 없었습니다.

그때 마신 커피의 맛을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어떤 것도 그 맛과 비교할 수는 없어요.”

그때 한 간호사가 여자 한 명과 남자 한 명을 데려와서 자신들도 집단 수용소의 생존자라고 말했습니다.

가방을 가지고 있는 걸로 보아 거짓말 같았어요. 수용소에 나온 사람들은 아무도 가장을 가지고 있지 않았어요. 우리는 여분의 옷 한 벌도 없었거든요. 이 두 여자와 한 남자는 우리에게 어떤 수용소에서 왔는지, 어떻게 그곳에 갔는지 질문했어요. 사람들은 그 질문에 대답을 해주었어요.

다음날 아침 우리를 스웨덴으로 데려다 줄 기차가 도착했어요, 나는 질문을 한 여자 두 명, 그리고 다른 생존자 세 명과 함께 한 객실에 들어갔어요. 두 여자가 가져온 가방 때문에 객실에는 여유 공간이 많지 않았어요. 두 여자는 바닥에 앉고, 다른 세 사람은 의자에 앉고, 나는 위쪽의 짐받이용 선반으로 올라갔어요. 그날 밤 모두 잠들어 있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렸어요. 나는 숨을 죽이고 지켜봤어요. 밑에 있던 두 여자가 가방을 열더니 그 안에 있던 나치 친위대 복장을 한 사람들의 사진을 찢어 창밖으로 버리는 것이었어요. 수용소에 있던 사람은 아무도 보초병의 사진을 갖고 있지 않았어요. 개인 소지품이 허락되지 않았거든요.

어느 역에 도착하자 공무원 몇 명이 기차에 올라와 우리에게 질문을 했어요. 그들이 두 여자와 남자에게 어떤 수용소에 있었는가 등의 질문을 하자, 그들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게서 전날 밤에 들은 이야기를 읊어 댔어요. 난 뭔가 얘기할 수도 있었지만 전쟁이 끝났다는 것이 그저 행복해서 잠자코 있었어요. 난 이 사람들을 벌할 입장이 아니라고 생각했죠. 그들을 벌하는 건 신의 몫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린 스웨덴에 도착했고 그 후로 그들을 다시 보지는 못했어요.

난 그 사람들이 한 일을 용서한 게 아니에요. 용서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하는 것이라고 믿었을 뿐이죠. 그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었어요. 남동생, 부모님, 다른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는데 내가 어떻게 괜찮아. 용서해 줄게.’ 하고 말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복수하고 싶은 욕망을 마음속에 담아 두지 않는 것이 중요했어요. 수용소에 있을 때는 매일아침 거리를 청소하러 갔어요. 그때마다 늘 빵집 앞을 지나야 했죠. 우린 항상 굶주려 있었고, 금방 구운 빵 냄새는 우리를 지독히도 괴롭혔어요. 우리는 모두 자유의 몸이 되면 빵집으로 달려가 빵을 모두 먹어치울 거야.’ 하고 생각했어요. ‘빵집으로 들어가 제빵사를 죽이겠어.’하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어요.”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들은 유대인 대학살만큼 끔찍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용서할 수 없다고 느껴지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알리시아가 한 것처럼 신에게 맡기면 됩니다. 어렸고, 외로웠고, 끔찍한 상처를 입었지만 그녀는 모든 일은 신의 뜻이며 판결은 신의 몫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정말 용서하기를 원하지만 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때는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신이여, 용서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습니다. 부디 저를 도와주세요.”

우리 모두가 언제나 용서를 실천할 수 있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인간인 우리가 모든 경우에 모든 사람을 완전히 용서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역시 때로는 용서하기 힘들 때가 있는데, 내가 죽기 전에 모든 것을 용서하지 못하고 죽더라도 상관없습니다. 나는 성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많이 아파서 움직일 수 없었을 때 나는 간병인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나는 그들이 날마다 엄청난 양의 쓰레기를 버리고 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매일 커다란 비닐 봉지 여러 개에 들어갈 분량이 나왔습니다. 그 당시 나는 침대에 누워 생각했습니다. ‘내가 저렇게 많은 쓰레기를 만들어 낼 리가 없는데!’

내가 그것에 대해 묻자, 그들은 단지 쓰레기를 버리는 것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을 때에야 나는 그들이 날마다 내게서 물건을 춤쳐 내고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금전적 가치가 있는 물건뿐만 아니라 전에 살던 집에 화재가 난 뒤에 남은 몇 안 되는 기념품마저 훔쳐갔습니다. 그림, 졸업장, 학위증서도 훔쳐갔습니다. 다행히 나는 심장이 튼튼했기 때문에 심장 마비를 일으키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을 용서해야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아직은 아닙니다. 나는 용서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습니다. 분명 나는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장 많이 용서해야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나 자신이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까지 자신을 용서해야 합니다.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이 들어도 스스로를 용서해야 합니다. 배움을 얻지 못했다고 생각하면 얻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용서해야합니다.

우리가 한 일 중에 어떤 일을 용서해야 하는지 항상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내가 한 일이 잘못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특히 어렸을 때는 주위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필요 이상의 책임감을 느끼기가 쉽습니다.

알리시아는 아주 어렸을 때 처한 끔찍한 상황에 대해 만일 그때 내가 그렇게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가정함으로써 자신을 괴롭혀 온 것을 용서해야 합니다.

그녀의 가족은 수용소에 도착한 후 무장한 보초병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보초병은 그녀에게 남동생의 나이를 물었습니다. 그녀는 열세 살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녀는 남동생이 유대교의 전통에 따라 이제 막 성인식을 치렀다고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아이들을 제외한 남자들이 곧바로 가스실로 보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그녀는 자신의 말이 동생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생각에 고통스러워했습니다.

나이를 속였어야 했어요. 내가 동생의 진짜 나이를 말하지 않았다면, 그 애는 살았을 거예요. 내가 동생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아직까지 알리시아는 남동생을 그리워하고 있으며 만일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하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잘못된 죄책감으로부터 빠져나와 스스로를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알리시아만큼 큰 문제에 부딪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거의 매일 스스로를 부족하다거나 바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자신을 용서하는 데 중요한 열쇠는 우리가 그때 더 좋은 방법을 알았다면 다르게 행동했을 것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은 커다란 실수가 될 거야.’ 하거나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면 정말 기분이 나쁠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거야.’ 하고 생각하면서 그 일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당시 자신이 옳은 일을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하는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린 자신을 용서해야 합니다. 그리고 설령 고의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가 그만큼 고통스러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었다면 분명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실수를 하고, 우연히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때때로 길을 잃기도 하면서 우리는 이 생을 살아갑니다. 우리가 완벽하다면 여기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용서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만일 자신이 한 일이 용서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하다면, 신에게 처분을 맡길 수 있습니다.

신이여, 전 아직 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저를 용서하시고 제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용서는 일생에 한두 번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평생 계속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용서는 우리의 영적인 정화입니다. 용서는 우리를 평화롭게 하고 사랑과 접촉하도록 도와줍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시 한 번 마음을 여는 일입니다.

 

불치병 진단을 받은 45세의 남성 테리는 중환자실에서 마지막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찾아갔을 때, 그는 아주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의 밝은 성격에 호기심을 느낀 나는 그의 병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병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대답은 매우 분명하고 현실적이었습니다. 나는 물었습니다.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 살아가는 기분이 어떤가요? 우리 모두 머리로는 언젠가 죽으리라는 것을 알지만, 당신은 곧 죽게 되리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느끼며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테리는 대답했습니다.

나도 그건 알지만 난 아주 잘 살고 있어요. 사실 난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해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지금까지의 내 삶은 거의 대부분 불행했어요. 하지만 난 그것들이 최선이었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어요. 내게 남은 시간이 제한되어 있는 지금, 진정으로 삶을 들여다보았어요. 나는 살아 있는 동안에는 진정으로 삶을 즐기고, 죽을 때 역시 흔쾌히 죽기로 결심했어요. 또 떠나기 전에 하고 싶은 일들을 생각했어요. 그러다 보니 나 자신이 전보다 더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삶속의 어떤 것들은 그것들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음을 깨달을 때 그 의미가 변합니다. 그 반대도 진실입니다. 중병에서 회복된 사람들이 자신들이 시한부 인생이었을 때 더 행복했다고 말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테리가 말했듯이,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제한되어 있어서 그 시간을 정말 소중히 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더 행복해집니다.

우리는 대부분 행복을 어떤 사건이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행복은 우리 주위에서 진행되는 일과는 별 관계가 없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것을 얻거나 어떤 일을 하게 되면 완벽하게 행복해질 거라고 확신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도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행복이 복권에 당첨되고, 아름다운 몸매를 갖고, 주름을 제거하는 데서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많이 봐 왔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일시적으로 기분을 좋게 해주겠지만, 그런 기분은 금방 사라지고 곧 전과 같이 행복하거나 불행해할 것입니다. 다행스런 일은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행스런 일은, 우리는 그것들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정신, 영혼은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처음부터 프로그램 되어 있고, 모든 선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누구나 행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올바른 장소에서 그것을 찾는 것입니다.

행복이 우리의 자연스러운 상태인 반면에, 인간은 불행을 더 편안하게 느끼도록 훈련되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행복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때로 행복은 부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과분한 것이라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종종 누군가에 대해 또는 어떤 상황에 대해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먼저 행복을 찾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라고 믿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접근을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라고 여기면서 뒷걸음질 칩니다. 우리는 왜 삶의 목적이 행복해지는 것이 있다는 믿음에 저항할까요?

우리는 행복해지는 것에 죄의식을 느끼며, 많은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불행한데 어떻게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는지 의문을 갖습니다. 또는 누군가가 퉁명스럽게 말한 것처럼, ‘내가 왜 행복해져야 하지? 하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 이유는 당신은 이 우주의 소중한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주위의 모든 경이로운 일들을 경험하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당신이 행복할 때 다른 사람,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줄 것이 더 많음을 기억하십시오. 당신이 충분히 가지고 있고 또 그것에 만족한다면, 부족한 사람의 입장에서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주위 사람들에게 줄 여분의 것이 있으며 시간, 자신, , 행복을 다른 사람들과 더 많이 나눌 여우가 있다고 느낄 것입니다.

실제로 행복한 사람들은 가장 덜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불행한 사람들보다 더 자발적으로 자신의 시간을 내주고 다른 사람을 도우며, 더 친절하고, 더 많이 사랑하거, 용서하고, 배려합니다. 불행은 이기적인 행동을 낳는 반면에, 행복은 주는 능력을 더 키워 줍니다.

진정한 행복은 어떤 사건의 결과가 아니며, 환경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당신의 행복을 결정하는 것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닌, 바로 당신입니다.

오드리라는 여성은 루게릭 병(근육이 위축되고 굳어지는 병)환자를 위한 자선행사에서 가금조성을 맡았을 뿐만 아니라, 그녀 자신도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자발적으로 행사를 주관한 것은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10년 전 처음 병을 진단받았을 때는 앞으로도 살날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후 병은 급속히 악화되었고, 그녀는 이번이 그 일을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임을 깨달았습니다.

오드리는 말합니다.

행사 진행을 한 번 더 하고 싶었어요. 지난 10년 동안 실로 많은 것을 배웠거든요. 처음에 이 일을 했을 때는 내가 이용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난 루게릭 병 포스터 모델이 되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제는 더 나이를 먹었고, 더 지혜로워졌어요. 처음엔 풋내기처럼 경험이 없어서 다른 사람과 의견 충돌이 있었고, 고집을 부리고 허풍도 떨었어요. 이번엔 더 잘할 수 있를 거 같았어요. 그러려고 노력하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2,3주 만에 똑같은 문제들이 전부 다시 일어났어요. 이해할 수 없었어요. 눈물이 났어요. 몇 년 전보다 더 나아진 게 없었어요!

난 나 자신을 다그치기 시작했어요. 내가 성장했고 변했다고 확신했었거든요.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변했지만, 환경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 왜 나는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까요? 아주 비현실적이었던 거예요.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이제 난 그 문제들을 다르게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것은 하나의 도전이고, 그것이 세상의 모든 차이를 만드는 것이었어요. 환경을 바꾸려는 시도를 멈추자 모든 것이 나아졌어요. 난 더 행복해졌어요. 행사는 매우 성공적으로 끝났어요.”

행복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가 아니라, 일어난 일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행복은 일어난 일을 우리가 어떻게 해석하고, 인식하고, 그 전체를 어떤 마음 상태로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리고 일어난 일을 어떻게 인식하는가는 어느 쪽으로 마음을 기울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당신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최악만을 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최선을 보기 위해 노력하는 편입니까? 어떤 것에 관심을 돌리고 마음을 쏟으면 그것은 점점 자라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최선이나 최악이 우리의 해석 안에서, 그리고 자신 안에서 자라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과거를 나쁜 조명 속에 비춰보면서 목적이나 의미가 없는 것으로 바라본다면, 우리가 심는 씨앗이 미래에도 비슷한 모습으로 자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과거를 무거운 짐이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과거는 우리 자신의 일부이며, 그것은 우리를 계속 내리누르고 행복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합니다. 행복은 우리의 자연스러운 마음 상태이지만 우리는 행복해지는 법을 잊었습니다. 일이 어떤 식으로 일어나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갇혀 버렸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들은 적이 있을 법한 다음의 충고를 떠올려 봅시다. ‘다만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하라.’ 그 노력이 오히려 행복을 느끼는 것을 방해합니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어떤 테크닉을 배우거나 행복 창조 이벤트 행사에 참가할 필요가 없습니다. 행복은 행복한 순간을 경험하는 데서 옵니다. 그리고 행복은 느낄수록 더 많아집니다. 어느 날 당신은 5분간 행복을 느낄 것입니다. 5분이 한 시간이 되고, 그 다음에는 행복한 저녁을, 더 나아가서는 행복으로 가득 찬 하루를 보낼 수 있게 됩니다.

비교는 불행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우리 자신과 타인을 비교한다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누구든, 무엇을 소유하고 있든, 무엇을 할 수 있든, 우리는 항상 한두 가지 면에서 다른 사람보다 부족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부자인 사람은 잘생기지 않았고, 세상에서 가장 잘생긴 사람은 몸매가 좋지 않으며, 가장 몸매가 좋은 사람은 아내가 미인이 아니고, 아내가 미인인 사람은 노벨상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적은 노력을 들여 재빨리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며 절망의 나락으로 내려갑니다. 이런 자기 파과적인 비교는 반드시 다른 사람이 대상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과거나 미래와 비교하는 것도 마찬가지 결과를 낳습니다. 오늘 자신의 모습을 타인과 비교하지 않고, 과거의 모습과 비교하거나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아무 문제없다고 여기는 데서 행복은 찾아옵니다.

우리 자신을 환경의 희생자로 생각함으로써 생기는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라는 감정은 우리를 계속 불행에 붙들어둡니다. 그것은 모든 일들을 개인적인 모욕으로 해석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희생자라는 느낌은 모든 일이 자신을 겨냥해 일어난다는 생각에서 나옵니다. 삶에는 손실도 있고 회복도 있고, 햇빛비치는 날도 있고 비 오는 날도 있지만, 그것들이 직접 우리를 향해 날아오지는 않습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상처를 주었다 해도, 그들이 꼭 우리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그렇게 행동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이해하면 희생자라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당신의 감정과 현실은 당신 자신의 생각에 의해 결정됩니다. 당신은 결코 세상의 희생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특정한 일이 일어나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스스로 말하면서 미래의 나라에서 살고 여행합니다. 새 일을 시작하면, 나에게 꼭 맞는 짝을 찾게 되면, 아이가 다 크고 나면......,, 하지만 대개는 자신이 기다리던 일이 일어난 후에도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크게 실망합니다. 그래서 또 다른 새로운 미래들을 만들어 냅니다. 승진을 하고 나면, 아이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나면......., 하지만 이런 식으로 얻은 기쁨은 그다지 오래가지 않습니다. 미래보다는 지금의 행복을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행복할 때는 지금 이 시간입니다. 미래에 행복할 수 있는 것처럼 지금 이순간의 상황에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상황을 실제 모습 그대로 보지 않습니다. 그 대신 우리가 바라는 상황의 모습에 더 집중합니다. 상황에다 우리의 바람을 투영함으로써 진실을 부정합니다. 환상을 보는 것입니다. 진실을 본다는 것은 어떤 일이 일어나든 우주가 정해진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때로 시련을 겪게 될 수는 있지만 우리의 운명이 결코 궤도를 벗어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최선이든 최악이든, 세상은 여전히 돌아가고 우리에게 배움을 주는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잘못된 방향으로 간다고 생각될 때에도, 일들은 우리를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기쁨의 시간으로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나 상황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일도 없습니다.

삶은 우리를 온갖 종류의 역설과 씨름하게 합니다. 31세의 마이크는 결장암을 앓고 있는 아버지 하워드를 문병하러 갔습니다. 병이 심해지자 의사들도 어떻게 될지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마이크는 아버지의 집을 부정기적으로 방문했고 오래 머물지 않았습니다. 마이크는 정이 많은 사람이지만 아버지와 갈등을 겪고 있었으며, 지난 5년간 새어머니와도 원만하게 지내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마이크가 일을 마치고 아버지 집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외출 중이었습니다. 대신 아버지의 형인 월터 삼촌이 있었습니다. 월터가 말했습니다.

이리 와서 기다려라. 아버진 병원에 갔으니 곧 올 거야.”

아버지의 집 거실에 앉아, 마이크는 계속 시계를 확인하며 안절부절 못했습니다. 5분이 지나고, 10, 20분이 지나도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자, 결국 그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습니다.

아버지를 10분 더 기다리다가 메모를 남기고 가야겠어. 난 내 할 일을 했어. 문병을 왔으니까. 아버지가 집에 안 계신 건 내 잘못이 아냐.”

부엌에서 식사를 하던 월터 삼촌은 전화 내용을 듣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조카에게 엿들어서 밍하다고 한 다음, 마이크에게 듣기 싫은 충고를 해도 괜찮은지 물었습니다.

마이크가 말했습니다.

그러세요.”

월터 삼촌이 말했습니다.

우리 아버지, 그러니까 네 할아버지는 내가 30대였을 때 돌아가셨다. 딱 네 나이지. 지금 내가 77세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40년이 흘렀구나. 사실 아버지는 망나니셨다. 압지가 돌아가신 후 난 감정이 복잡했어. 하지만 지금 그때를 되돌아보면 삶의 역설하나를 깨닫게 된단다. 인생은 길지만 시간은 짧다는 것이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아버지와 보낸 시간이 얼마나 적었는지 깨달았고,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 못한 걸 후회했다. 내 삶은 길지만 아버지의 시간은 짧다는 걸 이해하지 못했지.

네가 아버지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는지 안다. 네 아버지는 내 동생이고, 그렇게 수더분한 사람이 못 된다. 너의 새어머니도 마찬가지지. 넌 아버지와의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고 해결하지 못할 수도 있다. 넌 이 문제를 풀 시간이 많다고 생각할 거야. 너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기 때문이지. 하지만 네 아버지는 암 환자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단다.“

마이크는 삼촌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었습니다. 그는 앞으로 50년 동안 아버지에게 계속 화를 낼 수도 있지만, 아버지는 그렇게 오래 기다려 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로 결심했습니다. 꼭 그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 시간들을 충분히 활용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해결되거나 삶의 힘든 시간들을 겪고 나면 행복해지리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균형 잡힌 삶을 살고 싶어 하지만, 우리가 균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균형과는 거리가 멉니다. 사실 그것은 균형에서 너무 많이 벗어나 있습니다. 나쁜 것이 없다면 좋은 것도 없고, 어둠 없는 빛, 밤 없는 낮, 석양 없는 새벽, 불완전 없는 완전함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런 반대되는 것들, 이 모순들, 이 역설들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순 덩어리입니다. 항상 더 많은 것을 얻으려 하면서도, 현재의 우리 모습을 받아들이고 사랑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인간으로 경험하는 것들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면서도 우리 자신이 또한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압니다.

우리는 고통 받지만, 고통을 넘어 일어설 수 있습니다. 상실을 경험하지만, 더불어 영원한 사랑을 느낍니다. 삶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삶이 영원하지 않음을 압니다. 부족함과 풍요, 적고 많음, 크고 작음의 모순으로 가득한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삶의 이런 반대되는 것들을 인식한다면, 더 행복해질 것입니다. 우주의 모든 것은 균형을 이루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 균형을 이해하려면 삶이 승진, 결혼, 퇴직, 치료 등의 큰 사건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 큰 사건들 사이사이에서도 삶은 일어납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많은 것이 삶의 작은 순간들 속에 있습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나(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다만 존재할 뿐입니다. 이것으로 내 삶이 끝난다면, 난 곧 죽게 되기를 바랍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나 자신이 활주로에 발이 묶인 비행기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상태를 회복해 게이트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마침내 이륙하고 싶습니다. 내게 선택권이 있다면 삶을 선택하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걸을 수 있고, 정원에서 일할 수 있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됨을 의미합니다. 내가 살게 된다면, 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나는 지금 사는 것이 아니라, 다만 존재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런 상태에서도 행복감이 느껴지는 작은 순간들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놀러올 때, 특히 갓 태어난 손녀 실비아와 놀 때 행복합니다. 그리고 지금 나를 돌봐 주는 애니도 나를 행복하게 합니다. 그녀는 나를 웃게 만듭니다. 이런 작은 순간들이 단지 존재하기만 하는 것을 견딜 수 있게 합니다.

1950년대에 조나스 솔크가 소아마비 백신을 발견한 것은 누가 뭐래도 역사상의 대사건입니다. 누군가가 그에게 치료법에 대한 특허를 신청할 것인지 질문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는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자가 될 것입니다. 그는 대답했습니다. “햇빛을 특허 낼 수 없는 것처럼 이것도 마찬가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할 것입니다.

오 이 얼마나 큰 희생정신인가. 얼마나 위대한 순간인가. 우리가 삶에서 기다리는 순간이 바로 이런 순간이다. 나에게 그런 순간이 찾아온다면, 그토록 고귀하고 지혜롭게 행동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난 진실 되고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되리라. 힘 있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되리라.”

우리는 진정한 삶을 살기 위해 그런 중요한 순간들을 기다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에 솔크 박사와 함께 일을 하면서 나는 그가 아주 작은 문제에도 큰 사랑과 의미와 힘을 쏟는 것을 보았습니다. 삶의 가장 작은 것들 속에서 그는 가장 큰 것을 발견했습니다. 평범함 속에서 특별함을 발견했습니다. 우리가 씨름하는 가장 큰 역설 중 하나가 바로 우리 자신의 어두운 면, 그림자가 드리운 면입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지만, 우리의 어두운 면을 내쫓아 버릴 수 있다는 믿음은 비현실적이고 실현 불가능한 생각입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의 반대되는 힘들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합니다.

균형을 찾는 일은 힘들지만, 그것이 삶의 일부입니다. 이것을 낮이 지나면 밤이 오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경험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밤이 결코 오지 않을 것처럼 가장하는 것보다 더 큰 평화를 발견할 것입니다. 삶에는 폭풍우가 있습니다. 폭풍우는 항상 지나갑니다. 밤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는 낮은 없고 영원히 지속되는 폭풍우는 없듯이, 우리는 삶이라는 추 위에서 앞뒤로 오가며 좋고 나쁨, 낮과 밤, 음과 양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이 배워야 하는 것을 스스로에게 가르칩니다.

인간은 이런 역설들과 수많은 밀고 당김 속에서 살아갑니다. 우리의 행복이 외부 환경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도 맞는 말이지만, 우리는 그 진실과 이 현실 세계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비극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 이 비극적인 일이 당신에게 어떤 영향도 미쳐서는 안 된다.”하고 말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일입니다. 그랬다가는 분명 두들겨 맞거나 심한 대가를 치를 것입니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비극은 극복할 수 있고, 행복을 찾아 나아갈 수 있습니다. 햇빛은 어둠을 뚫고 비쳐듭니다. 그리고 죽음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때로 삶을 발견합니다.

행복을 발견해 가는 중에도 우리는 어떤 것들을 배워야 합니다. 또 어떤 배움은 가능하면 잊어버려야 합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과는 정반대되는 각도에서 생각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훈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정적으로 생각하도록 배운 것을 잊어야 합니다. 배운 것을 잊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어느 맑고 화창한 날에 자연 속을 거닐면서 행복해지는 연습을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매순간 행복해지는 연습을 하라는 것입니다. 특히 상황이 전혀 개선될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다음번에 누군가가 당신을 화나게 할 때에도, 행복해지는 연습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 순간과 함께하고,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듣고, 그 속에 가치 있는 정보가 담겨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당신의 마음 상태를 방해하지는 못하게 해야 합니다.

당신이 하는 행동 중에서, 어떤 것이 당신에게 행복을 가져다주고, 어떤 것이 절망을 배달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변화를 시도하는 것입니다. 시기하는 감정이 행복을 가져다주는가? 누군가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약점을 잡아 공격하고 나면 오랫동안 기분이 좋은가? 감사할 때 어떤 기분이 드는가?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고 나면 행복을 느끼는가?

교통 체증에 걸리면 욕설을 퍼붓기보다 주위들 둘러보고 모두 같은 상황에 놓여 있다는 걸 이해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느끼는지 생각해 본다면? 타인에게 친절해지는 연습을 한다면? 그리고 익명으로 친절을 베풀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누군가를 보살피거나 도와준다면?

 

이집트 여행 중에 나(데이비드 케슬러)는 치료의 장소로 쓰이던 고대의 어느 사원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만나기로 약속한 친구가 도착하려면 한 시간이나 남았다고 생각하자, 약간 따분했습니다. 마땅히 갈 데도 없어서 사원 앞에 앉아 드나드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사원의 역사와 그곳이 지닌 치유의 힘에 대한 설명이 적힌 표지판을 읽는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나는 그들의 얼굴을 하나씩 관찰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사원 안에서 어떤 것을 치유해 달라고 빌지 궁금했습니다. 그러다가 나는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기다리는 시간을 아까워하기보다는, 이곳에 들어가는 사람들 각각을 위해 기도해 주면 어떨까?’

그래서 나는 이 사람들의 소원을 추측하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들이 자기 존재의 온전함, 타고난 아름다움과 독특함, 사랑과 지혜를 기억하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들이 과거를 치유하고, 미래를 희망과 함께 새롭게 시작할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나 자신도 똑같은 것을 원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대로 잠이 든 나를 친구가 흔들어 깨웠습니다. 시간은 마술처럼 흘러갔고, 내가 느끼는 행복감과 기쁨에 나 자신도 놀랐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방식으로, 다른 배움을 통해 행복을 발견합니다. 삶의 해답들은 대개 단순합니다. 80대 중반의 패트리샤라는 친절한 여성이 그것을 가장 잘 말해줍니다. 그녀는 삶에 만족하는 듯 보였고, 그녀의 삶은 행복 그 자체였습니다. 어느 날 누군가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행복합니까?”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난 멋진 삶을 살았어요. 그것이 나를 행복하게 해요. 여러 해 전 난 삶에서 나 자신을 오래도록 즐겁게 할 수 있는 일들을 선택하는 법을 배웠어요. 간단한 것 같지만, 그것이 인생이에요. 너무 많은 상황들이 얼굴을 내밀죠, 전에 한 번 경험한 적이 있는 일이라면, 좋든 나쁘든 그것에 대해 어떻게 느꼈는지 기억할 수 있을 거예요. 나는 좋은 쪽을 선택하는 법을 배웠어요. 전에 경험하지 못한 일이라면, 그것을 선택한 뒤에 어떻게 느낄지 상상하는 거예요. 내가 오랫동안 불행한 이유는, 내 기분을 좋지 않게 만들 일들을 선택했기 때문이었어요. 마침내 난 삶에 대해 좋은 느낌을 갖게 만드는 것을 선택하는 법을 배웠어요. 자기 자신에 대해 좋은 느낌을 갖게 하는 것, 다른 사람에게 좋은 느낌을 갖게 하는 것,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고 오래 지속될 수 있는 것을 선택하는 겁니다. 그러면 당신은 사랑과 삶과 행복을 선택하게 될 거예요.

그만큼 간단한 거예요.”


'[좋은책] > 인생수업' 카테고리의 다른 글

7.영원과 하루  (0) 2017.12.20
8.무엇을 위해 배우는 가  (0) 2017.12.20
10. 살고 사랑하고 웃으라.  (0) 2017.12.20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말  (0) 2017.12.20
데이비드 케슬러의 말  (0) 2017.1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