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무엇을 위해 배우는 가
그 어떤 것이라도 단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당신이 무화과 하나를 원한다고 나에게 말하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 역시 시간이 필요하다고, 먼저 꽃을 피우도록 기다리라고, 열매를 맺고, 그것이 마침내 익을 때까지 시간을 주라고,
제시카의 아버지는 재미있고, 모험을 좋아하고, 장난기가 많은 매력적인 분입니다. 하지만 그는 제시카의 어머니와 이혼한 뒤, 예측 불가능한 사람이 되어 가끔씩 몇 주, 심지어 몇 개월 동안 사라져 버렸습니다. 부모가 결별했을 때 열네 살이던 제시카는 아버지와 변함없이 가깝게 지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갑자기 사라지는 것에 대해 잘 설명해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말하곤 했습니다. “네 아버지는 원래 그런 사람이야. 너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야.”
생일이나 크리스마스가 아닌데도 아버지가 선물을 가져다주면 제시카는 늘 ‘아버지가 좀 있으면 사라지겠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제시카가 그 자리에서 선물을 열려고 하면 아버지는 말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내심을 가져라, 제시카. 이것은 나중을 위한 선물이란다.”
그로부터 며칠 디, 사라진 아버지가 그리워질 때쯤 어머니는 선물을 열어 보라고 말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제시카는 숙녀가 되었고, 아버지에 대한 사랑도 깊어졌습니다. 학교를 졸업한 뒤 가정 문제 상담사가 되고, 남편과 두 아이를 갖고 나서도 제시카와 70세쯤 된 아버지는 전과 다름없이 가깝게 지냈습니다. 아버지는 사라질 계획을 세우고 나면 언제나 그녀에게 전화해서 곧 여행을 떠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는 떠난 뒤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고 제시카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뭔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버지의 친구들도 몇 년이나 소식을 듣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제시카는 경찰에 실종 신고를 냈습니다.
4년 후 전화가 왔습니다. 아버지는 라스베이거스의 요양원에 있었습니다. 요양원측은 급성 감염 치료를 위해 아버지를 병원에 입원시키는 과정에서 그가 실종자 명단에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요양원 측에서는 그가 가족이 없다는 말을 되풀이했다고 말했습니다. 제시카는 당황했습니다. 하지만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했을 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있었고, 제시카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제시카는 아버지를 찾게 되어 기뻤지만 아버지의 상태를 알고는 가슴이 무너졌습니다. 감염에서 회복되자 제시카는 아버지의 병이 호전되어 자신을 알아볼 수 있게 되기를 소망했습니다.
“언제나 내 인내심을 시험하던 아버지답다고 생각했어요. 아버지를 찾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어요. 처음엔 참고 기다리기만 하면 머지않아 아버지가 기억을 되찾으리라고 생각했어요. 매일, 매주, 아버지를 찾아갔어요.
아버지는 거기 계셨지만 난 그분을 몰랐고 그분도 나를 몰랐어요. 유일하게 아버지를 떠올리게 해준 것은 그를 돌보기 위해 필요한 인내심이었어요. 내가 아는 아버지가 거기 어딘가에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려고 노력했어요. 상담사인 나는 다른 사람들의 문제는 해결해 주었지만, 나 자신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었던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오로지 참는 것뿐이었어요. 그러나 아버지의 상태는 점점 더 악화되었고, 아버지는 결국 폐렴에 걸려 돌아가시고 말았어요.”
1년이 지난 뒤 제시카는 벼룩시장에 내다 팔 물건들을 준비하다가 낡은 자동 응답기를 발견했습니다.
“팔기 전에 시험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플러그를 꽂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어요. 믿을 수 없는 내용이 흘러나왔어요. 거기에 녹음되어 있던 것은 아버지의 마지막 메시지였어요. 아버지가 떠나신 후로 한 번도 듣지 않은 메시지였죠. 아버지는 말씀하셨어요.
‘제시카, 얘야, 내가 떠난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내가 없는 동안 우리가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없어도 내가 항상 널 생각한다는 걸 기억해 주기 바란다. 네가 걱정할 거라는 건 알지만, 내가 어디에 있든 잘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구나. 진심으로 사랑한다. 그리고 다시 보게 되기를 고대한다.’”
제시카는 눈물을 닦았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그런 분이었어요. 내게 항상 인내를 가르쳐 주셨죠. 나중에 열어 보라며 한 가지 선물을 더 남기고 떠나신 것은 정말 아버지다운 일이었어요.”
알츠하이머병과 같은 상황은 우리에게 인내와 이해에 대한 큰 배움을 가르쳐 줍니다. 때때로 그 배움은 환자 자신보다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더 의미가 큽니다.
인내는 가장 힘든 배움, 아마도 가장 큰 절망감을 안겨 주는 배움일 것입니다.
나(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는 결코 참을성 많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항상 바빴고, 매년 수천 킬로미터씩 돌아다니고, 환자를 보고, 강의를 하고, 책을 쓰고, 아이들을 키우는 등 늘 움직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병 때문에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아야만 휠체어를 타고 돌아다닐 수 있으므로 인내가 가져다주는 배움을 얻고 있는 중입니다. 인내가 배움이 된다는 사실은 싫지만 아플 때는 인내하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몸이 웬만큼 좋아졌다는 생각이 들면 친구와 함께 밖으로 나갑니다. 하지만 휠체어를 타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훨씬 많이 돌아다니고 싶습니다. 상점에서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급히 빠져나가려는 사람들이 있을 때면 나는 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된다는 느낌이 듭니다. 한번은 겨울옷을 사려는 친구와 함께 백화점에 쇼핑하러 갔는데, 친구는 나를 한 매장에 남겨 둔 채 다른 매장을 둘러보러 갔습니다. 나는 그녀가 돌아올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기다리는 일을 싫어하지만, 어쩔 수 없이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신이 만일 지금 아프거나 남에게 의지하고 있는 상태라면 모든 장소, 모든 상황에서 인내의 배움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나 역시 내가 그것을 완전히 배울 때까지는 모든 곳에서 인내의 배움이 나를 맞이할 것이라고 여깁니다.
나는 지금 안팎으로 속속들이 이 배움을 얻어 가는 중입니다.
인내가 주는 한 가지 배움은 원하는 것을 언제나 얻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원하지만 한동안 얻을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설령 자신이 생각한 것과는 다른 방식일지라도 결국에는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편리함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불편함을 안고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오리는 당장의 결과와 만족을 기대하며, 실제 가능한 것보다 더 빠른 대답을 원합니다. 24시간 수리를 해주는 곳과 연중무휴로 영업을 하는 쇼핑센터도 있습니다. 배가 고프면 24시간 편의점이나 식당에 이르기까지 언제 어디서든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습니다. 24시간 영업하는 사무용품 가게와 철물점도 있고, 우리의 조급함을 만족시켜 줄 인터넷도 있습니다. 책을 주문하러 서점에 갈 필요도 없고, 집을 보러 부동산 업자와 언덕길을 오르락내리락할 필요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즉석에서 해결됩니다.
사람들은 기다리는 법을 잊어버렸고, 심지어 기다림의 의미조차 알지 못합니다. 원할 때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은 좋지만, 만족을 뒤로 미루고 기다릴 줄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어린아이에게 지금 과자 한 개를 먹을 것인지 아니면 한 시간 뒤에 두 개를 먹을 것인지 선택하도록 했을 때, 후자를 선택한 아이가 나중에 훨씬 더 훌륭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 여러 연구를 통해 밝혀졌습니다. 인내는 아주 중요한 삶의 지혜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위에는 전자레인지 앞에 서서 초조하게 발을 구르거나, 필름을 현상하는 데 한 시간 이상 기다려야 한다면 화를 내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단지 기다림이 주는 불편함이 아닙니다. 우리들 중에는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일 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그들은 바꾸고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세상은 아무 문제없이 굴러간다는 이치를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데 시간이 걸리는 것과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생각의 본질은 같습니다. 곧 상황이 잘못되어 간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인내심의 열쇠는 모든 것이 잘 되리라는 믿음, 인간이 모르는 큰 계획이 존재한다는 신뢰를 키우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잊어버리기가 너무 쉽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계획에 맞지 않는 상황이 벌어지면 당황하며 어떻게든 상황을 통제하려 합니다. 삶을 마감할 때조차도 어떤 이들은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반면, 어떤 이들은 자신이 죽을 때를 성급하게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러다가 죽을 준비가 되기 전까지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말에 안심합니다.
죽음에서든 삶에서든 이것은 진실입니다. 당신이 준비가 되기 전까지는, 곧 모든 일이 나름의 질서에 따라 진행된다는 사실을 믿고 이해하기 전까지는 당신은 삶에서 어떤 것도 제대로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인내심은 규칙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근육과 같습니다. 날마다 훈련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전자레인지로 음식을 데우는 데 걸리는 1,2문 같은 작고 일상적인 상황에서 그 근육을 사용하지 않으면, 삶의 더 큰 도전들에서 우리를 지탱해 줄 튼튼한 근육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항상 치유 중이라는 신뢰감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상황을 바꾸려는 경향이 있으므로, 모든 일이 정해진 순리대로 진행될 것이라고 스스로 안심시켜야 합니다.
암을 딛고 일어선 토크쇼 진행자이자<암에 대해 수다 떨기>의 저자인 셀마 쉼멜은 자신의 아버지가 한 말을 들려줍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알람시계가 우리를 깨운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를 깨우는 분은 신이다.”
우리는 일어날 시간을 정하고, 알람을 맞추고, 그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등의 일이 우리 자신의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 뒤에 더 큰 그림이 있음을 잊어버립니다. 우리가 깨어나 도 하루를 살아야 할지를 결정하는 분은 신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놓치고 있는 더 큰 그림, 사용하지 않는 근육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알람시계를 맞추는 것은 당신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배후에서 당신이 아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일이 진행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레니는 건강검진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암에 걸렸는지 알기 위해 기다린 처음 이틀 동안 레니는 무척 고통스러웠고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계속 다그쳤습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오래 걸리죠? 좀 더 빨리 할 순 없나요? 설마 열흘 정도 걸리는 건 아니겠죠? 의사가 며칠 내게 전화를 안 해주면 어떡하죠?”
나는 대답했습니다.
“어떻게 해도 이틀은 걸립니다. 여기에만 매달려서 이틀을 보내지 말고 그동안 당신이 해야 할 중요한 일을 찾아봐요. 삶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마냥 기다리라는 말은 아닙니다. 결과가 제 시간에 나오지 않는다면, 전화해서 이렇게 물어보면 됩니다. “3일이 지났는데 결과가 안 나왔나요?”
인내하라는 말은 피해자가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참아야 한다고 해서 무기력해지라는 의미가 아니며, 학대나 가혹한 환경을 무조건 견디라는 뜻도 아닙니다. 인내하며 기다리면서도 우리의 힘을 지킬 수 있습니다.
이틀이 지나자 검진 결과가 나왔는데 큰 이상이 없었습니다.
레니는 나중에 말했습니다.
“그 경험을 통해 내 힘이 얼마나 강한지 알게 되었어요. 하나씩 과정을 밟아 가는 법을, 감정을 충분히 느끼는 법을, 그리고 내게 주어진 배움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어요. 우주와 나 자신을 신뢰하는 법을 배웠어요. 전엔 내가 힘을 가지고 있으며 필요할 때면 언제든 그 힘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어요. 이제야 무엇을 바로잡고 무엇을 받아들여야 할지 배웠어요. 너무도 큰 배움이에요.”
레니는 이틀 동안의 기다림에서 많은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을 경험하면서 자기 자신과 삶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또한 이틀 후에 결과가 통보되지 않을 경우, 직접 의사에게 전화하거나 찾아갈 수 있는 힘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힘을 발견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피해를 당한다면 일어서서 “이것은 옳지 않아.” 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삶이 운명의 수순을 밟아 간다면, 있는 그대로의 상황에서 휴식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삶은 경험의 연속이며, 우리 모두는 그 경험들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비록 우리가 보지 못할지라도 모든 경험에는 원인이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모든 사건은 우리에게 필요한 배움을 주기 위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급하게 “난 싫어!
바꾸고 싶어!” 하고 소리친다면 그런 배움을 얻기는 어렵습니다. 때로는 거부하고 불평하고 상황을 바꾸려고 시도하는 대신, 그 상황을 다만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경험은 당신을 치유해 주고, 더 나은 인간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트럭 운전사 게리도 인내가 주는 배움을 얻었습니다. 그는 항상 바쁘게 이동해야만 하는 자신을 불행하다고 여기며 술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제 40세가 된 그는 시력을 잃을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우리 집의 창문 블라인드가 물결 모양으로 보이기 시작했을 때, 내 시력에 문제가 생겼음을 알아차렸어요. 처음엔 피곤해서 그런 모양이라고 생각했어요.”
의사들은 그의 눈에 새로 개발한 약물을 주입했습니다. 그것으로 시력을 앗아가는 바이러스는 잡을 수 있었지만, 그때는 이미 시력의 65퍼센트를 잃은 후였습니다. 그리고 이내 2차 감염이 일어나 왼쪽 눈으로는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두 번의 수술로 실명을 면하기는 했지만 시력은 심각하게 손상되었고, 정상으로 되돌릴 희망은 없었습니다.
게리는 말했습니다.
“처음부터 달리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고 들었어요. 나는 평생 동안 이 고통과 싸우게 되리라는 걸 알았어요. 치료를 받기 위해 뉴욕에 갔을 때 머물 곳이 필요했어요. 어쩌다 보니 가톨릭 수도원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곳도 꼭 차 있었지만 내가 있을 방 하나를 마련해 주었어요. 그곳에 있는 동안 나는 인내심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나는 내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바꿀 수 없음을 이해하게 되었어요. 시력을 되찾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써 봤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없었으니까요.
살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잃게 되죠. 내 경우엔 그것이 시력이에요. 나는 인생의 슬픈 방에만 갇혀 사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보았어요. 시력을 잃은 것은 슬프지만, 남은 생마저 슬퍼하면서 보내고 싶지는 않았어요. 어쩌면 이것은 내게 필요한 시련일 뿐인지도 몰라요. 시력을 잃어가지만 난 조금씩 평화로워졌고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어요.
난 이제 전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어요. 옛날의 난 술을 마시며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생각하면서, 하는 일 없이 빈둥빈둥 시간을 보냈어요. 하지만 이제는 내 앞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법을 포함해, 살아남기 위해 온갖 종류의 새로운 것들을 배워야 했어요. 누구도 날 돌봐 주지 않을 것이고, 나 혼자서 살아가야 하니까요. 나만의 꿈과 목표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나로 하여금 삶을 더 많이 경험하고, 더 많이 누릴 수 있도록 해주었어요. 나는 내기 당구를 좋아했지만, 시력을 잃고 나서는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연습을 조금 했더니 다시 잘할 수 있게 되더군요. 내가 살고 있는 로스앤젤레스의 사람들은 너무 조급한 것 같아요. 항상 시간에 쫒기고, 매사에 서두르기만 하죠. 나도 그들 중 하나지만, 이제는 시간이란 누리기 위해 있는 것임을 알게 되었어요. 우리가 누려야 할 일들은 너무도 많아요.
어떤 면에서 나는 눈이 잘 보였을 때보다 시력이 손상된 지금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어요. 더 열심히 사물을 바라보죠.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요. 나는 모든 일에서 유머와 긍정적인 측면을 찾으려고 노력해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활에서 긍정적인 면이나 유머를 발견하지 못하죠.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내가 특별히 본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단지 그들이 그것을 볼 수 없는 것은 인내심이 부족한 탓이죠.”
더 많은 인내심을 갖는 첫 번째 단계는 상황을 고치거나 바꾸고 싶은 욕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그렇게 보이지 않고 또 볼 수 없을지라도 어떤 일들은 이유가 있어서 일어난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상황을 바꿀 수 없다고 해서 최악이라고 여기지는 말아야 합니다. 일이 일어나고 전개되는 과정을 신뢰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기적적인 일들은 대부분 우리의 도움이나 간섭, 지원 없이도 일어납니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은 단지 우리의 생각일 뿐입니다. 우리는 몸속 세포에게 분열하라고 말할 필요가 없고, 상처에게 치료되라고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차리거나 보지 못하더라도, 모든 일이 좋은 쪽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신뢰하는 것, 인내심을 갖는다는 것은 바로 신뢰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신뢰하는 마음과 함께라면, 당신은 어떤 일도 목적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삶의 종착점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겪은 나쁜 경험조차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로부터 배움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겪은 모든 일, 인생의 거센 폭풍이 지금의 당신을 만들어 냈습니다. 일이 너무 빠르거나 느리게 진행되어 불안하다면 세상의 모든 일은 정확한 시간에 일어나며, 하나의 큰 계획 속에 움직인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당신은 휴식하고, 삶이 펼져지게 하십시오.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이 우리 능력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기다릴 수 있는 시간과 방법, 용기가 있으며, 상황에 자신을 맡기고 마음을 평화롭게 쉬는 힘이 우리 안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의학적 치료를 받는 사람을 의미하는 명사 ‘환자patient'와 평온하게 고통을 참는 것을 의미하는 형용사 ’참을성 있는patient'의 형태가 같은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닙니다. 두 가지 모두 참는다는 의미의 라틴어‘pati'에서 온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개인의 삶이 건강, 일, 연애 생활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바꾸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삶은 결코 그런 것 들이 아닙니다. 삶은 당신이 자신에 관한 것입니다. 삶은 당신이 여러 상황들에 얼마만큼의 사랑, 자비, 유머, 인내를 실천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신과 우주는 상황에 중심을 두고 작업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당신 자신에 중심을 두고 일하고 있습니다. 우주가 왜 당신에게 좋은 일자리를 제공하지 않는지 의문이 든다면, 우주는 당신이 어떤 직업을 가졌는가에 별로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주의 계획은 당신의 직업보다 훨씬 더 클 수 있습니다. 우주는 당신이 결혼을 했는지 여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우주는 당신의 삶에 누가 있는지 없는지 보다 당신의 사랑의 경험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의 건강에만 신경 쓰기보다, 건강 상태가 어떠하든 당신이 하는 삶의 경험에 더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우주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신의 본질이며,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진정한 당신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우주는 필요한 것들을 당신 삶 속에 가져다 놓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그것을 신뢰하고 인내하는 일입니다.
죽어가는 한 어린 소년을 만난 일이 뚜렷이 기억납니다. 생의 끝을 향해 가던 아이는 그림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큰 포탄에 막 맞으려는 작은 인물로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아이가 자신의 병을 파괴적인 힘으로 보고 있음을 의미했습니다. 아이는 자신이 죽어간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을 평화롭게 받아들이는 경지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던 것입니다.
한동안 나(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를 만나면서 아이는 서서히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받아들이고 운명에 순응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새의 날개를 달고 천국으로 날아가는 자화상을 그렸을 때, 나는 우리의 작업이 완성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이제 아이는 사랑의 힘이 자신을 데려가리라는 걸 깨달았으며, 더 이상 죽음에 저항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런 받아들임의 자세는 아이에게 남은 시간이 아무리 짧더라고 그 시간 동안 생의 더 많은 즐거움과 의미를 발견하게 해주었습니다.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경이로운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불행히도 운명에 순응하는 것을 나약함의 상징이나 포기, 굴복으로 여기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받아들임은 나약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것이 잘될 것이고 잘 풀릴 것이라는 믿음에 자신을 맡김으로써 위안과 힘을 얻는 일입니다.
심한 병을 앓거나 큰 상실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모든 일이 잘될 거라고 상상하려면 큰 믿음이 필요합니다. 설령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그것에 그대로 순종하기는 어렵습니다. 누구나 상황을 마음대로 바꾸고 싶어 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이 일어나도록 하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행동은 강인함으로, 받아들임은 나약함으로 해석합니다. 삶은 많은 부분에서 평화로운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상황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는 것이 때로는 긍정적인 해답임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벽에 머리를 부딪쳐야 하는 상황은 우리 스스로가 만드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계속 힘들게 발버둥치고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우주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언제든 스스로를 휴식하게 할 수 있습니다. 직업이나 관계, 상황 등을 계속해서 붙잡고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삶이 예정된 대로 전개된다는 사실을 알면 단순히 휴식할 수 있습니다.
삶을 롤러코스터라고 생각해 봅시다. 롤러코스터를 원하는 방향으로 가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밋밋하고 실망스러울까요? 우리는 그것을 조종할 수도 없을뿐더러, 만일 조종하게 된다 해도 결국 제멋대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롤러코스터에 마음 졸이며 앉아 있었던 때가 그리워질 것입니다.
받아들이라는 신호는 우리가 어떤 상황과 싸우다 지쳤을 때 나옵니다. 손을 들고 항복을 하기 때문에 죽음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걱정을 멈추는 것입니다. 자기 파괴적인 싸움을 중단하는 것입니다. 그 싸움은 우리를 삶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들고, 즐거운 관계를 망치고, 창조성을 파괴하고, 행복과 만족감을 사라지게 합니다. 힘들게 싸울수록 두려움이 생기고, 그 두려움은 우리에게 자신의 힘으로 언제나 삶의 모든 면들을 통제해야 한다는 잘못된 믿음을 심어 줍니다. 이제는 말이 가는 방향에, 물이 흐르는 방향에 거스르지 말고 자연스럽게 몸을 맡길 때입니다.
심장병을 앓고 있는 중년 남자 데일은 말합니다.
“내가 이렇게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몇 해 전 나는 순응하지 않으면 상황이 더 악화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그 반대라고 생각했어요. ‘심각한 심장병에 걸려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어떻게 순응하고, 쉬고, 인생을 편히 살 수 있지?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마음 편히 휴식할 수 있지? 그게 무슨 도움이 되지?’ 그런데 문득 아버지가 나와 함께하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오래되었지만, 지금도 가끔씩 마음과 영혼으로 아버지를 느껴요.
아버지는 좋은 분이셨는데 암으로 돌아가셨어요. 하지만 그 전에 이미 알코올 중독으로 돌아가실 뻔한 적이 있었어요. 아버지는 술 때문에 직장을 잃었고, 어머니를 많이 힘들게 했어요. 아버지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선 도움이 필요했지만, 누군가가 알코올 중독으로 죽어갈 때 우리는 그들의 술주정에만 신경을 쓰고 그들이 죽어간다는 사실은 잊는 경우가 많아요. 게다가 본인이 기꺼이 문제를 인정하고 더 큰 힘에 순종하지 않는 한 변하는 아무것도 없어요. 아버지는 자신이 알코올 중독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어요. 다른 방법으로는 절대 술을 끊을 수 없었어요. 아버지는 결국 알코올 중독 치료회에 가입해서 인생을 바꾸셨어요. 그러고 나서 아버지는 UCLA대학에서 심리학 학위를 받은 후, 감옥의 죄수들을 상담하는 일으 하셨어요. 아버지는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았기 때문에, 특히 순종과 받아들임을 이해하셨기 때문에 그 일을 훌륭히 해내셨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수백 명이 문상을 왔어요. 그들은 모두 아버지를 사랑했어요. 아버지는 그들 모두에게 인생을 포기하는 대신 받아들이고 순응하는 법을 가르쳐 주신 거죠. 나는 아버지가 너무 자랑스러웠어요. 아버지가 얻으신 배움이 내게도 적용 된다는 것을 알았어요. 나는 심장병이라는 진단을 평화롭게 받아들였어요. 현재의 상황을 인정하고, 더 이상 부정하는 것을 중단했으며, 내가 맞서 싸울 수 없는 것들과의 부질없는 싸움도 그만두었어요.
심장병을 앓게 된 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그건 정해진 일이었어요. 그것에 순응함으로써 다시금 삶의 평화와 품위를 찾을 수 있었어요.”
통제란 언제나 좋은 것이며, 일을 돌아가는 대로 내버려 두기만 했다가는 위험에 처할 거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세상일에 우리의 통제가 정말로 필요할까요? 우주에게 태양이 뜨게 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해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날 필요는 없으며, 우리가 바다에서 눈을 뗀다고 해서 해류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지는 않습니다. 아이들에게 매년 성장하라고 잔소리를 할 필요가 없으며, 꽃에게 피는 방법을 성명해 주기 위해 세미나를 열 필요도 없고, 행성들이 서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지 확인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주는 꽃과 나무와 동물과 바람, 태양과 그 밖의 모든 것들이 공존하는 이 놀랍도록 복잡한 행성을 아주 잘 작동시키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힘에 순종하기를 거부합니다. 때로는 힘든 상황에서 좋은 면이나 배움을 발견하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고,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의야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주는 그런 거친 상황을 겪게 하지 않고서는 우리를 치유할 수가 없습니다. 상황이 나쁘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 봐야 합니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왜 일어나는지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삶은 우리에게 겸허함을 요구합니다. 삶은 신비이며, 때가 되면 모든 것이 밝혀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싸움을 멈추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줄다리기 게임을 끝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냥 줄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우리의 방식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처음으로 잠시 멈추고 숨을 돌리면서, 비로소 우주와 신을 신뢰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일이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마음속 청사진을 버리고, 우주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을 받아들이고, 우주의 질서를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그것을 배웁니다. 그들은 나쁜 상황이 더 나은 결과를 낳는 경우가 많으며, 그들이 생각한 것이 반드시 최선은 아니었음을 깨닫습니다. 예를 들어, 획기적인 치료법이 등장할 때 그것은 훌륭한 치료 수단으로 쓰일 수도 있고, 병을 더 악화시키면서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많은 환자들은 자신의 생명을 구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에 그 치료를 받으려 안간힘을 썼을 것입니다. 물론 그들의 생각이 옳을 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무엇이 자신에게 가장 이로운지를 항상 알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삶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알고 싶은 마음과 자신이 진리를 알고 있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불가능한 상황들을 통제하려 들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 당시 우리는 무엇이 최선인지 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환상과 씨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최선을 알지 못했고, 앞으로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삶에 자신을 내맡기기 위해서는 매일 아침 일어나 ‘내 뜻대로’가 아닌, ‘당신 뜻대로’를 말하기만 하면 됩니다.
‘나는 오늘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합니다. 물론 나는 오늘 하루에 대한 계획이 있습니다. 일터에 가고, 쇼핑을 하고, 저녁 외식을 하고.......,하지만 내 계획은 청사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내가 예상치 못한 변화와 길들이 나타날지도 모릅니다. 그 변화는 멋진 놀라움일 수도 있고 두려운 놀라움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나를 새로운 여행으로 이끌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나는 이 모든 것이 내 존재와 영혼을 최상의 장소로 이끌 것이라고 믿습니다.’
파킨슨 씨 병을 앓는 74세의 제임스는 매우 활동적인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는 살아오면서 남에게 끊임없이 베풀었지만 받는 법을 몰랐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살펴 주어야 할 정도로 병이 악화되자, 그는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족들은 그를 간호할 수 있어서 기쁘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난 것을 마음 아파하면서도, 자신들이 그동안 받아온 것을 되돌려 줄 기회가 생겨서 기쁘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남에게 의지해야만 하는 실패자라고 생각한 제임스는 심각하게 자살을 고려했습니다. 그와 대화하면서 나(데이비드 케슬러)는 말했습니다.
“당신이 정말로 자살하려고 마음먹는다면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사람ㄹ은 아무도 없겠죠. 하지만 당신이 괴로운 이유는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잃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군요. 당신은 자살을 선택할 수 있는 반면에, 자살하지 않기로 선택할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겠어요? 당신이 이 상황에 머무는 것을 선택할 수 있고, 그것은 긍정적인 종류의 받아들임이 될 수 있어요. 그것이 좋은 일이라서 긍정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목적을 위해 받아들임을 선택한다는 의미에서 긍정적이라는 겁니다. 당신은 선택을 하는 것이지, 실패자가 아니에요.”
나는 제임스가 퇴역 군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터라 그에게 전쟁터에서 어떤 일을 맡았는지 물었습니다. 그는 자랑스럽게 대답했습니다.
“난 공군 조종사였어요.”
내가 다시 물었습니다.
“제임스, 난 당신이 삶을 스스로 통제하고 싶어 한다는 것과 운명에 순종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당신이 조종사였을 때 긍정적인 방식으로 순종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었던 상황은 없었나요?”
그는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습니다.
“물론 있었죠. 관제탑의 지시에 따라야 했어요. 항공 교통 통제사들이 훨씬 상황을 더 넓게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기꺼이 그들에게 모둔 걸 맡겼죠.”
“그럼 당신은 이 상황에도 당신의 삶과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에 더 큰 계획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어요? 아마 이 배움은 당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것일 거예요. 항공 교통 통제사가 당신 비행기만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모든 비행기를 총괄하는 것과 같지 않나요?”
이 말에 그는 크게 달라진 듯 보였습니다. 그는 받아들임이 선택이며, 그것이 결코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이해했습니다. 받아들이는 것과 포기하는 것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불치병 진단을 받고 나서 양손을 치켜 올리며 “희망이 없어. 난 죽게 될 거야!” 하고 말한다면 그것은 포기입니다. 받아들임은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치료법을 선택해 시도해도 효과가 없을 경우, 우리의 삶에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포기란 우리가 가진 생명력을 부인하는 것이고, 받아들임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질병에 희생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음을 아는 것은 순종입니다. 상황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은 포기이며, 그쪽으로 몸을 돌리는 것은 받아들임입니다.
신은 치밀했습니다. 몸이 반신마비 증세를 일으켰는데도 내(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머리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삶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들을 말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왼쪽 다리와 팔은 쓸 수 없지만, 말하고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반신마비가 된 사람들은 말하는 능력을 포함해 몸 왼쪽의 기능을 전부 상실합니다. 하지만 나는 달랐습니다. 목 위로는 손상되지 않았고 멀쩡했습니다. 그래도 몸의 왼쪽은 마비된 상태인데, 나의 뇌졸중이 특이하다고 말하는 이우가 그것입니다. 정신적인 영향은 없지만, 내 몸은 여성적인 면에 해당하는 왼쪽 부분이 덜 발달했습니다. 여성적인 쪽은 받는 쪽입니다. 분홍색은 대표적인 여성적 색이므로 내가 그 색을 싫어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색을 감상하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나는 받는 법, 감사하다고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인내와 받아들임을 배워야 합니다. 일생 동안 나는 끊임없이 베풀었지만 받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내가 얻어야 할 배움입니다. 사랑을 받고, 보호를 받고, 보살핌을 베푸는 대신 보살핌 받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나는 내가 마음의 주위에 큰 돌담을 쌓아 놓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설계한 것이지만, 사랑을 들어오는 것도 막았습니다.
많은 이들이 삶의 사소한 상황조차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워합니다. 심지어 강연을 들을 때도 강연자에게 도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손을 드는 사람들을 꼭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내가 바로잡아야 해, 저 사람의 말은 틀렸어.”
이런 사람들에게 남의 말을 그저 듣고 받아들이기만 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일입니다. 그들은 굳이 반대할 필요가 없으며 모든 사람을 바로잡아 줄 의무가 자기에게 없다는 걸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은 강연자에게 주장을 입증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것을 듣고 난 뒤 자신의 생각을 조금 바꿀 수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강연자의 설명을 다 듣고 난 뒤, “난 받아들일 수 없어.”라거나 “이 사람의 강연은 다시는 듣지 않을 거야.”하고 말한다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설명을 듣기도 전에 반대부터 한다면 당신은 배움과 받아들임의 상황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의 말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싸움에서 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귀 기울여 들으면서 다른 이들의 관점을 잠시나마 긍정적으로 수긍한 후에 그것을 받아들일지 거부할지 결정해도 결코 늦지 않습니다.
한 유명한 식당의 주인얘기로는 손님들 중에는 주문을 하면서 “이 식당의 그 유명한 시저스 샐러드를 먹어 보고 싶은데 식초와 오일은 조금만 뿌려 주세요.”라거나 “특별 닭고기 요리를 먹고 싶은데, 삶지 말고 그릴에 굽고 소스를 뿌리지 말아 주세요.” 라는 식으로 요구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 식당 주인은 말합니다.
“우리가 내놓는 요리에는 우리만의 독특한 비법이 담겨 있어요. 우리의 요리법을 받아들이려하지 않는다면, 요리사의 뛰어난 실력을 맛볼 기회를 잃어버리는 거죠. 우리 음식을 한 번이라도 먹어본 사람이 소스가 적은 것을 좋아한다거나 정말로 음식을 가려야하는 상황이라면 이해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우리 방식대로 요리를 내놓을 기회를 주지 않는 것뿐이죠.”
우리는 모든 것을 지나치게 통제하려 들며, 학생과 같은 자세로 다른 사람들의 발아래 앉아 있는 법을 잊어버렸습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아주 잠시 동안이라도 다른 이들의 생각과 경험을 받아들일 줄 모릅니다.
자신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상황을 인정하려 들지 않으면 우리는 지치게 되고 그나마 남아 있는 힘과 마음의 평화마저 잃게 됩니다. 상황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면 그것들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행복해져야 해. 나중으로 미뤄서는 안 돼.”
받아들임을 거부하는 것은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상황이 바뀌기 전에는 결코 행복해지지 않을 거야. 어림없는 일이야.”
물론 상황이 바뀌면 더 행복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상황이란 결코 바뀌지 않을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변하지 않는 상황의 희생자가 됩니다. “일이 이러이러하게 되면 더 평화로워질 거야.”하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를 가두는 일입니다. 당신이 상상하는 상황만이 정말 유일하게 좋은 상황일까요?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 다른 환경과 상황도 많지 않을까요? 그중에는 당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일어나는 모든 이을 받아들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보고 있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순종하지 말고 채널을 돌리십시오. 하고 있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새로운 직장을 찾아야 하고, 소음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면 차를 고쳐야 합니다. 당신이 변화시킬 수 있는 상황 때문에 불행하다면 당신의 힘으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나는 다만 우리가 뛰어넘을 수 없는 장애물이라고 판단한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황이 변할 때가지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상황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해서 다시 돌아가 행복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의 사랑에 보답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랑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암을 앓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당장 고칠 수는 없습니다.
이런 나쁜 상황들 속에서 우리는 불행할 대로 불행하지만, 그 사실 자체를 바꾸지는 못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 상황이주는 배움을 얻는 가장 빠르고 강력한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불행한 어린 시절을 바꿀 수는 없지만, 남은 인생은 멋지게 살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당신을 사랑하게 만들 수는 없지만, 당신의 소중한 시간과 열정이 낭비되는 것을 막을 수는 있습니다. 마술 지팡이를 휘둘러 암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삶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당뇨병을 앓고 있는 브라이언은 오른쪽 다리가 감염되어 입원 했습니다. 20대의 이 청년은 다리를 절단할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화가 나서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브라이언은 먼저 모든 감정을 충분이 느끼고,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발산하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는 뒤 내(데이비드 케슬러)가 물었습니다.
“이제 현재의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
처음에 브라이언은 그런 생각을 해봤자 이로울 것이 없다면서 내가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에 화를 냈습니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다리를 잃을지 모른다는 무서운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의 모든 생각을 지배할 거고, 결국 당신은 매순간 두려움과 분노 속에 살게 될 거예요. 차라리 잠시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느낀 다음 솔직하게 받아들이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만일 다리를 잃게 되어있다면, 결국 다리를 잃게 될 거예요. 그것을 생각하지 않는 척하고 말하기조차 거부한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아요.”
“그럼 다리를 잃는다는 사실을 평화롭게 받아들이면, 내가 완전히 현실에 순종한다면, 내 다리는 잘리지 않는다는 거요?”
나는 그에게 영적인 문제는 영적인 문제일 뿐이며 그것을 두고 흥정할 수는 없음을 상기시켰습니다. “내가 영적으로 성장한다면 보상을 받게 되는가?”
하고 물을 순 없는 것입니다. 브라이언이 다리를 잃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리 절단의 가능성은 그를 인질로 잡고 있는 악마와 같았습니다. 이 상황을 통해 내면적으로 성장할 능력이 충분히 있는데도 다리를 잃는다는 생각이 너무도 끔찍해서, 그는 그것에 대해 제대로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마침내 이 상황을 직시할 수 있게 되면서 그는 의문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한쪽 다리를 잃을지도 몰라. 그러면 난 어떻게 될까?’ 그리고 그는 자신이 그것을 견뎌 내리란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의족을 하게 될 것이고 삶은 계속될 것입니다. 일단 ‘받아들임’ 이라는 강의 건너편에 도달하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상황을 평화롭게 바라보게 되었고, 병을 치료하는 데도 적극적으로 협조했으며, 자기 앞에 주어진 길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다행히 다리 치료는 성공적이었고 절단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당시를 돌아보며 브라이언은 그 끔찍한 상황 중에 가장 놀라운 것은 결국 최악의 시나리오를 받아들였을 때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는 사실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내일이 와서 상황이 바뀔 때까지는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일 행복이 가능하다면 오늘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 내일 사랑할 수 있다면 오늘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도 치유의 가능성은 존재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삶에 순종하면 상황은 기적처럼 변할 수 있습니다. 받는 능력은 바로 이 순종 속에서 가능합니다. 삶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길 때 우주는 우리에게 운명을 완성할 수 있는 도구들을 제공합니다.
순종하기에 가장 좋은 때는 언제일까요? 또는 어떤 상황일까요? 매일, 매순간, 매 상황이 순종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와 죽을 때 우리보다 더 큰 힘에 순종합니다. 순종하는 법을 잊어버린 탓에 삶과 죽음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바꿔야 하고 당신에게 그것을 바꿀 힘이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지만 바꿀 수 없는 상황을 인정하는 방법도 배워야 합니다. 거센 파도에 대항해 배에 고이는 물을 펴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싸우면서 두려움을 느낄 때가 바로 그런 때입니다. 현실을 인정하고 항복해야 하는 때가 바로 그런 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싸움이 우리를 소모시킵니다.
평화를 느끼지 못한다면, 삶에 순응할 때입니다.
인생이 마음먹은 대로 풀리지 않는다면, 받아들일 때입니다. 모든 일을 책임져야 한다고 느낀다면, 받아들여야 할 때입니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고 싶다면, 순종할 때입니다.
그리고 만일 변화를 선택해야 한다면, 정확히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봐야 합니다. 연극 배우가 되기를 원한 스티브는 회계사로 살아가는 지금의 삶이 불행했습니다. 불안정한 배우 생활을 위해 안정적이고 확실한 현재의 직업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그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 싸워야 했습니다. 결국 회계사로 남기로 결심했을 때, 누군가가 연극 단체에서 새로운 자금 관리부장을 찾고 있다는 정보를 주었습니다. 스티브는 그 자리를 얻었고, 지금은 뉴욕 브로드웨이 쇼를 전문으로 하는 크고 성공적인 기획사의 자금 관리부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을 이루려는 욕망으로 꾾임없이 분투하는 대신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도 우리 자신에게 베풀 수 있는 멋진 선물입니다. 삶을 뒤돌아본다면, 가장 중요한 순간과 멋진 기회들이 반드시 당신이 세워 놓은 계획과 노력에서 나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당신이 그때 그 장소에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우연의 일치처럼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받아들임이 일하는 방식이며, 삶이 일하는 방식입니다.
자신을 바꾸고 싶어한 사람들은 결국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신발을 만드는 사람은 신발을 만드는 것 이외의 다른 일을 시도하는 대신, 신발을 만들면서도 다양한 스타일과 개성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변화의 필요성은 분명하게 드러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삶에 순응할 때를 알지 못한다면, 다음과 같은 평안의 기도가 마음을 다스려 주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신이시여, 제게 바꿀 수 없는 일을 받아들이는 평화를, 바꿀 수 있는 일을 바꾸는 용기를, 그리고 그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때로 사람들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받아들임의 배움을 얻습니다. 제프는 말합니다. ‘난 스물일곱 살 때 일본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하루하루가 숨 가쁘게 돌아가는 아주 흥미로운 것이었어요. 그런데 큰 프로젝트를 맡은 후 나는 식욕을 잃었고, 피로를 느끼게 되었어요. 처음엔 단순히 일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결국 입원을 했고 폐렴 치료를 받았어요. 병원에서 이런 종류의 폐렴은 후천성 면역 결핍증 바이러스가 원인이라는 말을 들었어요. 그곳의 의사들은 내가 미국에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 정도로 나를 치료해 주었어요.
미국 집으로 돌아올 때, 난 초록색 배낭에 물건 몇 개만 넣어 왔어요. 다른 것들은 모두 일본에 남겨 두었어요. 나의 옛 생활도 그곳에 남겨졌어요. 난 몇 년 동안이나 일본 경영학을 공부했고, 늘 일본에 살고 싶었어요. 폐렴에서 회복되자, 나는 그동안 사라져 버린 모든 꿈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어요. ‘미안해, 넌 더 이상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어.’ 하고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어요. 그것은 진실이었고, 난 더 이상 가질 수 없었어요. 내게 필요한 치료를 제쳐두고 외국에서 살 순 없잖아요. 의료 기관을 찾아다니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도 힘든 일이니까요.
처음에는 화가 났고 좌절감을 느꼈어요. 하지만 곧 아직 선택의 여지가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 선택이란 이제는 이룰 수 없게 된 과거의 꿈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생활을 받아들이는 거였죠.
예전 생활을 붙잡으려 했다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을 거예요. 내게 일어난 일에 순종해야 할 때가 온 거죠. 이제 내게는 완전히 새로운 삶이 주어진 거예요. 현실과 싸우는 것을 중단하자 새로운 꿈과 아이디어가 다시 생겨나기 시작했어요. 나는 변호사들과 함께 일하면서 항상 강한 인상을 받았는데, 나 자신도 변호사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어요. 법과 대학원은 3년제이지만 성공적으로 치료한 덕분에 내게도 미래가 생겼어요. 내게 일어난 일을 받아들임으로써 난 전에는 깨닫지 못한 내가 가진 용기와 적응력을 발견해 낸 거죠. 지금 난 멋진 삶을 살고 있어요. 모든 것이 완벽해요. 미국으로 돌아오게 된 것도 기쁘고, 모든 것이 아주 좋아요. 난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어요. 내가 이 새로운 삶에 순종하자 수많은 새롭고 놀라운 가능성들이 쏟아져 나왔어요.”
제프는 그 일 이후 20년 동안을 자신이 상황의 희생자라고 생각하며 분노 속에서 보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그 대신 삶이 그에게 가져다준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처음엔 고통스러울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내게 사물을 다르게 볼 수 있고 흘러가는 대로 자신을 내맡기는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된 것은 놀라운 선물이에요. 인생은 너무나 짧고, 우리는 우리의 마지막 날이 언제인지 알지 못해요. 나쁜 것 속에서 좋은 것을 발견하는 것이 내가 보상으로 얻은 가장 큰 배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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