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가슴 뛰는 삶을 위하여
당신은 삶을 위하여 얼마나 시간을 할애하는가? 얼마를 벌고, 어떤 야망을 이루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그 모든 일을 한다 하더라도, 삶은 언제까지나 저쪽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당신의 인생 시계는 몇 시인가?
삶은 시간이 지배합니다. 우리는 시간에 의해 살고, 또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론 시간 속에서 생을 마칩니다. 우리는 시간을 쓰고 아끼는 것이 우리 자신에게 달린 일이라고 믿습니다. 시간을 돈으로 살 수는 없지만 시간을 쓰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시간을 계산하며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오늘날에는 지구의 모든 지점에서 현재 시각이 몇 시인지 정확히 알지만, 19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시간을 훨씬 대충 계산했습니다. 기차의 등장으로 더 정확한 시간표가 필요해졌고, 그 결과 미국과 캐나다 철도 회사가 도입한 시스템이 바로 오늘날까지 북미대륙에서 사용하고 있는 네 개의 시간 구역입니다. 처음에 이 구상은 매우 급진적인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시간 구역을 나누는 것을 신에 대한 모독이라고 느꼈습니다. 시간은 쓸모 있는 측정 수단이지만, 우리가 부여하는 만큼의 가치만을 지닙니다. 웹스터 사전은 시간을 ‘연속선상의 두 지점 사이의 간격’ 이라고 정의 했습니다. 흔히 탄생을 삶의 시작으로, 죽음을 삶의 끝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탄생과 죽음은 연속선상의 두 지점일 뿐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시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관찰자에 좌우되는 상대적인 개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정지해 있는가 움직이고 있는가에 따라 시간이 다른 속도로 흘러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1975년 미 해군은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실험했습니다. 그들은 똑같은 시계 두 개를 하나는 땅 위에 두고 또 다른 하나는 비행기 안에 두었습니다. 비행기가 15시간 동안 하늘을 날면서 비교해 보았더니 아인슈타인 이 말한 대로 움직이는 비행기 안에서 시간은 더 느리게 흘러갔습니다. 시간은 또한 어떻게 느끼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한 쌍의 남녀가 영화관에서 똑같은 영화를 보고 있는데, 여자는 그 영화를 좋아하지만 남자는 싫어합니다. 여자에게는 영화가 너무
빨리 끝난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남자는 그 영화가 끝도 없이 지루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두 사람 다 영화가 저녁7시에 시작했다는 것과 저녁 8시57분에 자막이 올라갔다는 것을 알지만, 1시간57분의 경험이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한 사람의 시간이 다른 사람의 시간과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회의, 식사, 영화 관람 또는 다름 활동을 할 때 시간을 정확히 지키기 위해 손목시계를 착용하고 시간을 맞춥니다. 하지만 더 나아가 초, 분, 시간,일, 주, 월, 년이라는 인위적인 구분이 시간 그 자체라고 주장한다면, 각자 자신의 시간을 다르게 경험한다는 사실을 잊는 것입니다. 시간의 가치가 개인적인 인식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흘러가면 모든 것들이 변합니다. 안도 변하고 바깥도 변합니다. 우리의 외모도 내면의 자아도 변합니다. 삶은 끊임없이 변하지만 우리는 대개 변화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변화할 준비가 되어 있을 때조차 그것에 저항합니다.
그러는 사이에도 주위 세상은 빠르게 변화합니다. 그것은 우리와 속도를 맞춰주지 않습니다. 변화란 언제나 너무 빨리 오거나 너무 늦게 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변화는 늘 우리와 함께 있지만 우리는 변화를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변화에 겁을 먹기도 합니다. 그 대신 우리는 스스로 선택한 변화를 선호합니다. 예기치 않은 변화가 생기면 불안해하고, 혹시 삶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갈까 봐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환영하든 거부하는 변화는 일어납니다. 삶의 다름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변화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일어나는 것이 뿐입니다.
변화는 지금까지의 익숙한 상황에 작별을 고하고, 새롭고 낯선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를 불한하게 하는 것은 그 상황의 낯설음이나 익숙함이 아니라, 그 중간에 존재하는 시간입니다. 유방암을 두 차례나 이겨 낸 작가
로니 카예는 “삶에서 하나의 문이 닫히면 언제나 다른 문이 열린다. 그러나 그 사이의 복도는 매우 좁고 길다.”라고 말했습니다. 변화는 대개 지금까지의 문이 닫히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그 문들의 이름은 끝, 완성, 이별, 죽음 등입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불안정한 시기 속으로 들어갑니다. 이 시기는 닫혀진 문을 보고 슬퍼하면서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확실한 시기입니다.
이 시기가 가장 힘이 드는 때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고 느끼는 k로 그때 새로운 일이 일어납니다. 새로운 시작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변화에 맞서 싸운다면 평생 싸움만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를 껴안는 방법, 아니면 적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발견해야만 합니다.
누군가에게 “몇 살인가?” 하고 물을 때, 실제로는 “당신의 인생시계는 몇 시인가?” 하고 묻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를 통해 그 사람을 대략적이나마 파악하려고 합니다. 당신의 나이를 안다면 나는 당신이 어떤 기억들을 갖고 있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만일 케네디 대통령, 최초의 달 탐사, 다이얼 전화기, 디스코가 친근하게 느껴지는 세대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비틀즈의 노래를 부르며 그런 것들을 화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아니면 나는 당신을 ‘꽃의 힘(1960년대 유행한 히피 문화를 상징)’에 사로잡힌 바보라고 생각하면서 그것들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몰고 갈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나는 지금의 당신을 정확히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당신의 과거 경험들을 종합해 그것들이 곧 당신이라고 판단할 뿐입니다.
편견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곧 자유입니다. “40세로 보이지 않으시네요.”라는 칭찬에 “40세의 모습이 곧 내 모습입니다.”하고 대답하는 경우를 보았을 것입니다. 칭찬하는 사람은 “당신은 내 편견에 맞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이며, 젊어 보인다는 칭찬을 부인하는 사람은 “나한테는 40세의 모습이 바로 이 모습이니까 당신의 기대에 따라 나를 정의하지 마라.”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늙어감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주름살은 삶의 일부가 아니라 예방하고, 감추고, 제거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러나 젊음의 에너지와 패기를 그리워하면서도 모두가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다. 그 시절의 방황과 혼돈을 생생하게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들면 삶을 더 잘 이해하게 되고, 더 이상 무의미한 것들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이 시기가 되면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며, 무엇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가도 압니다. 일단 이 배움을 얻고 나면, 누구도 그것을 젊음과 맞바꾸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혜와 명상은 우리에게 젊음이 중요하긴 하지만 언제나 매력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이런 지혜에는 편안함이 있습니다. 청춘은 순수의 시기인 동시에 무지의 시기입니다. 아름다운 시기이면서 동시에 고통스러운 자의식의 시기입니다. 모험의 시기이면서, 또 그만큼 어리석음의 시기입니다. 많은 이들에게 젊은 시절의 꿈은 늙은 시절의 후회가 됩니다. 삶이 끝나가기 때문이 아니라, 그 꿈을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멋지게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하루를, 그리고 하나의 계절을 온전히 경험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삶을 산다면, 우리는 그날들을 다시 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후회를 가져다주는 것은 살지 않은 삶입니다.
인간은 과연 얼마나 오래 살고 싶어할까요? 만일 200년, 아니 영원히 살 기회가 주어진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기회를 받아들일까요? 이런 가정은 생존 기간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사실 우리는 인간에게 기본적으로 주어진 삶의 기간을 훨씬 연장해서 살기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세상이 우리의 이해 수준을 벗어날 정도로 변하고 주위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게 된 후에도 계속 살아 있다면, 그 삶은 얼마나 공허할까요?
한 남자가 92세가 된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휴가 때 어머니를 당신의 고향인 댈러스로 모시고 갔어요. 우린 최신 비행기를 타고 갔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비행기의 최신식 화장실 문을 여느라 애를 먹으셨어요. 어머니는 버튼이 있는 동그란 구식 손잡이에 익숙하셨거든요.
다음날 아침 호텔에서 화재 경보가 울렸어요. 깜짝 놀라 어머니의 방으로 뛰어가 보니 어머니는 잠옷 차림으로 문 밖에 나와 계셨어요. 무척 화가 나신 듯했어요. 나올 때 자석 카드 열쇠를 가지고 나오는 것을 잊으셨는데, 그만 방문이 잠겨 버린 거였어요. 옷을 제대로 입지 않은 것은 둘째 치고, 어머니는 방에 다시 들어갈 수나 있을지 걱정하셨어요. 여행이 끝날 때쯤 어머니는 말씀하셨어요. ‘얘야, 난 더 이상 이 세상에 맞지 않는 것 같구나. 전자레인지도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모르겠고, 리모컨으로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는 것도 낯설기만 하다. 열쇠 대신 카드를 사용하는 법도 모르겠고, 내 친구들도 이제 다 떠났다. 세상은 계속 변하는데 난 너무 뒤쳐졌어.’ 어머니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 여행 동안 어머니가 얼마나 절망적이고 복잡한 심경이었을지 알게 되었어요.”
우리가 밤하늘을 보는 것은 말 그대로 과거를 보는 것입니다. 오늘 밤의 하늘을 보는 것이 아니라 몇 년 전, 적게는 2,3년 전에서 많게는 100만 년 전의 하늘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별이 내보내는 빛이 지구에 와 닿기까지 그만큼의 시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 경험하는 것들도 이와 비슷합니다. 당신이 어렸을 때 이웃집 말썽꾸러기를 떠올려 보십시오. 당신이 만일 그때 그 아이를 문제아라고 생각했다면 오늘 그를 만나도 약간은 경계할 것입니다. 지금의 그가 아니라 과거의 문제아로 그를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현재의 모습으로 부모님을 바라볼까요? 사실 그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 부모님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만물박사’라는 강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가끔씩 부모님을 무서운 존재로 떠올리는 것도 우리가 어렸을 때 헤어스타일을 마음대로 못하게 하고, 귀가 시간을 엄격히 통제하고, 숙제 검사를 하던 기억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친구의 아버지를 만난다면, 당신은 친구보다 더 사실적으로 그분을 보게 될 것입니다. 과거의 무거운 짐가방들 없이 현재의 그분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인 아버지들의 모습으로 그분을 대할 것입니다. 친구의 아버지가 배관공이라면, 당신은 배관공에 대해 갖고 있는 모든 관념들을 동원할 것입니다. 그분이 나이가 많으시다면 노인데 대한 당신의 느낌을 끌어올 것입니다. 그분의 과거 모습을 들여다볼 수도 있지만, 그것은 당신의 친구와는 아주 다른 측면에서일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적인 사건에서도 이와 비슷한 반응을 보입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아이가 있습니다. 그에게 우편물이 도착하는 시간은 불행한 시간입니다. 우편물 속에는 자신의 부모를 괴롭히는 빚쟁이들의 독촉장이 끼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우편함에서 자주 아버지의 보너스 수표나 친구의 생일 파티 초대장을 발견하곤 한 또 다른 소년이 있습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첫 번째 소년은 우편물이 도착하면 저도 모르게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기 쉽지만, 두 번째 소년은 행복한 마음으로 우편물을 기다립니다. 그들의 감정은 현재 그들에게 도착하는 우편물의 내용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들은 과거의 우편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현재 모습을 잘 모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대개 자신의 실제 모습보다는 과거나 미래의 모습을 봅니다.
어제의 내가 반드시 지금의 나는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 크나큰 자유가 있습니다. 그때 더 이상 과거에 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일어나 샤워를 하며 어제의 때를 씻어 내지만, 어제 느낀 감정의 찌꺼기를 여전히 갖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지 않는다면, 상대방과 자신을 진정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살지 않으면, 행복을 발견할 수도 없습니다. 과거의 문을 닫지 말고 가끔씩 그 문을 들여다보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잭은 언제나 이 순간을 살 줄 아는 사람입니다. 몇몇 마라톤 경기에서 선수로 뛴 적이 있는 그는 늘 현재에 충실합니다. 방 안으로 들어설 때면 그는 이미 수천 번은 와 본 곳인데도 매번 처음 온 것처럼 주위를 둘러봅니다. 누군가를 만나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물을 때도 언제나 진심을 담습니다. 다른 사람과 얘기를 나눌 때면 진정으로 그 사람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습니다. 눈으로 상대방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머릿속으로는 점심 식사 메뉴라든가 그날 저녁의 모임, 혹은 이메일에 답장을 뭐라고 쓸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잭은 언제나 그 순간 속에, 그 자리에 있습니다.
불행히도 잭은 악성 림프 종양에 걸렸는데 병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습니다. 두 다리가 부어올랐고, 그의 몸에서 가장 먼저 제 구실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순간에 충실하는 그의 삶의 방식은 병이 깊어지면서 더 두드러졌습니다. 누군가 그에게 몸이 어떤지 물으면, 그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자신의 몸과 마음 상태를 꼼꼼히 돌아봅니다. 마찬가지로 남의 안부를 물을 때에도 자신의 진심을 담아 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은 진심으로 그와 연결된 느낌을 받습니다. 그는 현재의 손간 속에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 주는 완벽한 모델입니다. 먼 과거에 매이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일단 상대방이 이야기를 시작하면 자신이 한 말은 완전히 잊습니다. 그는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도록 만듭니다. 아무도 “잘 지내요?” 나 “별 일 없어?”와 같은 그의 질문에 적당히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싶게끔 만들며, 그의 질문에는 진심을 담아 답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한 순간도, 그 어떤 것도 놓치려 하지 않습니다. 잭의 인생에는 가을이 오지 않으며, 언제나 여름날로 가득합니다. 봄의 희망에 마음을 빼앗긴 채 겨울을 지내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삶의 모든 계절에서 늘 현재에 충실합니다.
잭과 같은 사람을 만나고 나면 당신의 현재가 얼마나 과거와 미래에 의해 강탈당하는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를 보내버리고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 삶에 얼마나 멋진 경험들을 안겨 주는지 모릅니다. 애인과 이야기하는 동안에는 내일 아침 수업 따위는 잊고 대화에만 몰두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수업 준비를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애인과 진실한 대화를 나눌 수 있고 강의도 더 잘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하는 겁니다. 우리는 어느 샌가 미래에 의존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어떤 이는 미래만 바라보며 살고, 또 어떤 이는 미래를 꿈꾸며, 또 다른 이는 미래를 두려워합니다. 이 모든 접근은 현재를 사는 것을 방해합니다. 어느 날 밤, 병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게 된 50대의 한 남자가 잠을 자다가 두려움에 떨며 깨어났습니다. 수첩을 펼쳐 보니, 앞으로 몇 주 동안 어떤 일정도 잡혀 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미래는 말 그대로 텅 비어 보였습니다. 그는 이 병을 헤쳐 나가려면 과거도 잊고 미래도 잊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날 밤 그렇게 미친 듯이 수첩을 펼쳐 보고 나서야 비로소 미래를 잊어버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살아온 시간의 구조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했습니다. 이런 상실의 경험을 통해 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누구인지, 그리고 자신이 시간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 배우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그는 자신이 알고 있던 시간의 개념이 무너지는 현실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예를 들어, 친구들이 언제 방문해야 좋을지 물으면 그는 언제든 상관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시간이 흔들리더라도, 그리고 전처럼 자신이 시간을 채우기 위해 애쓰지 않더라도 자신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느껴갔습니다. 그리고 그 느낌이 더욱 깊어지자, 그는 시간이라는 것이 완전히 사라지더라도 자신은 여전히 존재하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설명했습니다.
“인위적인 시간들에서 멀어질수록 나는 내가 시간 속에서 살아왔고 시간 속에서 죽게 되리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이 본래 영원하며, 시간을 초월해 영원히 존재하리라는 걸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계속 존재할 것입니다.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우리는 실제로 시간을 초월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과거를 확신할 수 없으며, 그것이 시간의 실체입니다. 과거에 일어난 일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 일어났는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두 말할 필요 없이 미래에 대해서도 알지 못합니다. 사실상 우리는 시간이 직선으로 흐르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합니다.
대개 과거란 현재 이전의 시간이며 미래는 앞에 놓인 시간이라고 여기지만, 이것은 시간이 일직선으로 된 연속선상에 놓여 있음을 전제로 한 가정입니다. 과학자들은 시간이 일직선이 아니며, 우리가 ‘과거-현재-미래’라는 단단한 형태 속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직선적인 것이 아니라면 과거, 현재, 미래가 동시에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만일 시간이 직선적인 것이 아니고, 우리가 과거, 현재, 미래에 동시에 존재한다면 우리의 삶이 어떻게 달라질까요?
프랭크와 마거릿은 50년 동안 멋진 결혼 생활을 해왔습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이 각별한 두 사람은 한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습니다. 병에 걸려 죽게 되자 마거릿은 말했습니다. “난 이 병을 받아들일 수 있어요. 내가 죽으리라는 사실도 받아들일 수 있어요. 하지만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더 이상 프랭크와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이에요.”
병이 깊어지면서 그녀는 끝내 남편과 헤어지게 된다는 생각에 더욱 고통스러웠습니다. 죽기 몇 시간 전, 그녀는 침대 곁에 앉아있는 프랭크에게로 얼굴을 돌렸습니다. 그녀는 말했습니다.
“난 곧 떠날 거예요. 하지만 이제 괜찮아졌어요.”
프랭크가 물었습니다.
“괜찮아졌다니, 무슨 뜻이오?”
“방금 누군가 내가 가게 될 곳에 당신이 이미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그곳에 가면 당신이 있을 거예요.”
과연 병실에 앉아 있는 프랭크가 사랑하는 아내를 천국에서 기다릴 수도 있을까요? 어쩌면 가능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지금쯤 시간의 개념에 대한 의문들이 당신의 머릿속을 맴돌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간 속에서 살고 숨 쉬고 있는 프랭크로서는 마거릿을 다시 보려면 5년, 10년, 아니 20년이 더 걸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녀가 가게 될 곳에 시간이라는 것이 없다면, 그녀가 도착한 1초 후에 그가 도착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시간은 죽은 자보다 살아 있는 자에게 더 긴 것입니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사람들은 시간에 대해 더 강렬한 느낌을 갖습니다. 그들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 갑자기 두려워집니다. 삶의 또 다른 모순이 여기에 있습니다. 추상적인 것에서 현실로 이동하면서 당신은 처음으로 시간이 제한되어 있음을 느낍니다. 하지만 환자의 생명이 6개월 남았다고 해도 그것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의사가 과연 있을까요? 인간의 평균 수명에 대해 아무리 잘 안다 해도 당신은 자신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습니다. 당신은 이 ‘알 수 없음’과 싸워야 합니다. 때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분명합니다. 삶의 끄트머리에 선 당신은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고 싶어 하지만, 지금까지도 결코 알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다른 이들의 삶과 죽음을 보면서 우리는 종종 그들이 너무 일찍 갔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삶이 미완성이라고 생각하지만, 삶의 완성에는 단 두 가지가 필요할 뿐입니다. 탄생과 죽음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100세 가까이 살면서 멋진 삶을 살아야 그것이 마치 완성된 삶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미완성인 채로 죽었다고 여깁니다.
베토벤은‘겨우 57세를 살았으나, 그가 남긴 업적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잔 다르크는 20세도 안 되어 죽었지만, 그녀는 오늘날까지 기억되며 추앙받고 있습니다. 존F. 케네디 주니어는 38세의 나이로 아내와 처제와 함께 죽었습니다. 그는 끝내 백악관에 입성하지 못했지만 어떤 미국 대통령보다 사랑받았습니다. 이런 삶을 과연 미완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삶을 인위적으로 측정하고 판단하는 ‘손목시계에 의한 삶’을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삶 속에서 무엇을 배울지,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또 그들이 어느 정도의 시간을 갖게 될지 모릅니다.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중요한 것은 주어진 시간이 다하기 전까지 우리는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는 것은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도전은 이 순간을 충분히 경험하는 것입니다. 물론 쉬운 도전은 아닙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로 지금 이 순간의 가능성을 놓치지 않는 것......, 미래의 기대로부터 자유로울 때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이 신성한 공간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초원의 집>에서 아버지 역을 맡은 배우 마이클 랜던이 1991년 세상을 떠났을 때 아들 크리스토퍼 랜던은 열여섯 살이었습니다. 크리스토퍼는 아버지의 죽음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과 두려움을 주었는지 말했습니다.
“다들 예상했듯이 아버지의 죽음은 내게 너무도 큰 영향을 미쳤어요. 난 언제나 그리운 마음으로 지난날들을 떠올려요. 아버진 현명하고 매력적이고 재미있는 분이셨어요. 아버지에게는 여러 면이 있으셨죠.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나만 아는 아버지의 모습이었어요.
아버지의 죽음은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어요. 그것은 나를 한 인간으로 변화시켰어요. 어릴 때 난 늘 내성적이고 수줍음 많고 불안정한 아이였어요. 너무 대단한 아버지를 두어서 언제나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그늘이 사라진 거예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내가 갖고 있던 두려움들이 차츰 엷어질 무렵 나는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았어요.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으로 사람은 죽음과 첫 관계를 맺게 되죠. 그렇게 죽음을 접할수록 두려움이 사라지게 되는데, 그것은 죽음을 이미 한 차례 겪었기 때문이에요.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함께 있었고, 마지막으로 눈을 감은 후에도 함께 있었어요. 나는 죽음 곁에 있었고, 그것을 생생하게 만질 수 있었어요.
이제 죽음은 내게 현실이고 만질 수 있는 것이 되었어요. 그리고 전보다 죽음을 훨씬 덜 두려워하게 되었어요. 지금은 모든 것이 예전만큼 두렵지 않아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두려워하던 것들도 이제는 두렵지 않아요. 나는 비행기 타는 것을 몹시 겁냈어요. 비행기만 타면 아버지가 웃으실 정도로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곤 했으니까요. 아버지가 돌아기시자 그것을 비롯해 다른 많은 두려움들이 사라졌어요. 그리고 나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본래의 내 성격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게 되었어요. 모든 일에 자신감으로 넘치게 되었고, 전에는 결코 하지 않던 일들을 하게 되었어요.
전에는 교차로에 서면 건너갈 수 있는 기회가 있어도 망설였어요. 실패가 두려웠고, 바보처럼 보이는 게 무서웠어요. 그래서 종종 기회를 놓쳐 버렸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죽음과 마주했을 때, 난 사람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런 깨달음을 갖고 모든 도전과 마주해야만 한다는 것도, 비로소 내가신고 있는 신발이 편안하게 느껴졌어요. 더 이상 나 자신에 대한 두려움, 내가 누구이며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 없이 내개 다가오는 기회들을 붙잡았어요. 비행기 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고향을 떠나 영국의 학교에 진학했어요. 편안한 집과 안정된 생활을 떠나는 것이 내게는 큰 모험이지만, 세상 속에 뛰어들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는 법을 배웠어요.
나로서는 정말 큰 변화였어요. 인간은 고통을 통해 성장한다는 사실을 난 굳게 믿어요.”
만일 우리가 기회를 붙잡고 두려움 속으로 뛰어든다면 어떻게 될까요? 앞으로 나아가 꿈을 추구하고 자신의 소망을 따른다면? 자유롭게 사랑하고 관계 속에서 완성을 이룬다면? 그런 곳은 어떤 세상일까요? 아마 두려움이 없는 세상일 것입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삶에는 우리기 경험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두려움이 우리를 가로막지 않을 때 더 많은 일들이 가능합니다. 우리의 내부와 외부에는 새로운 세상이, 훨씬 두려움 없는 세상이 있습니다. 그 세상은 우리가 발견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두려움은 가장 원초적인 단계에서는 우리를 지켜 주는 경고 체계 역할을 합니다. 밤늦게 시내의 위험 지역을 걸을 때 두려움은 위험 가능성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라고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위험이 잠재된 상황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건강하다는 신호입니다. 그것은 일종이 보호자입니다. 그런 두려움이 없다면 오래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 위험이 없는 곳에서도 두려움을 갖기 쉽습니다. 그런 두려움은 만들어진 것이며 사실이 아닙니다. 진짜처럼 느껴지지만 아무런 현실적 근거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것은 수시로 찾아와 우리의 삶을 방해합니다. 그 두려움은 목적도 자비심도 없어 보입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를 무기력하게 하고 정신을 병들게 합니다. 두려움fear이란 ‘실제처럼 보이는 가짜 증거false evidwnce appearing real'의 약자입니다. 이런 종류의 두려움은 과거의 경험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매래의 두려움의 원인이 됩니다. 우리 자신이 만들어 낸 이런 두려움은 한 가지 좋은 역할을 합니다. 곧, 우리에게 사랑을 선택하도록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나오는, 성장과 치유의 갈망입니다. 이는 또 다른 선택의 기회입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실기 위한 선택, 두려움 대신 사랑을, 환상 대신 현실을, 과거 대신 현재를 선택하기 위한 기회입니다.
만일 우리가 두려움을 이겨 낼 방법을 발견할 수 있다면, 만일 그 많은 기회들을 이용할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꿈꾸기만 해온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편견에서 자유로워진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다른 이들의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쉰 살이 엄은 기운 넘치는 여성 케이트가 자신의 쌍둥이 여동생 킴에 대해 말했습니다.
“10년 전, 킴은 자신이 대장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렇게 심한 상태는 아니어서 초기에 치료할 수 있었어요. 그때 난 킴이 죽으면 내 안의 일부도 같이 죽는다는 걸 알았습니다. 킴의 병은 내 삶을 온통 뒤흔들어 놓았어요. 일란성 쌍둥이인 우리는 서로의 생활을 낱낱이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감정까지도 느낄 수 있었어요. 킴은 암에 걸리기 훨씬 이전부터 우리 두 사람이 삶을 제대로 살 수 없을 정도로 늘 어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그때를 되돌아보면 우리가 얼마나 두려워하며 살았는지 알 수 있어요.
하와이로 여행 깠을 때 우리는 훌라 춤을 배우고 싶었지만 남들에게 바보 같아 보일까 봐 겁이 났어요. 우린 파티 음식 전문회사에서 10년간 일했고 우리의 이름을 내건 식당을 차리는 게 늘 꿈이었지만, 실패할까 두려워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생각조차 못했어요. 내가 이혼을 한 뒤엔 함께 유람선 여행을 해볼까도 생각했지만, 우리끼리만 떠나기가 두려워서 하지 못했어요.
이제 우리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어요. 전에는 두려운 무엇인가가 늘 있었어요. 킴의 병과 수술이 가장 큰 두려움이었어요. 하지만 그 힘겨운 난관을 이겨낸 지금 두려운 것이 뭐가 있겠어요? 우리가 두려워하는 대부분의 것들이 실제로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두려움은 우리에게 실제로 일어나는 일과는 상관이 없어요.”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대부분은 걱정과 두려움의 전조 없이 찾아옵니다. 우리가 가진 두려움은 죽음을 막아 주는 것이 아니라 삶을 가로막습니다. 인간의 삶은 우리가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이 두려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두려움은 사랑, 진실 된 감정, 행복, 자기 존재의 확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가로막는 그림자입니다.
폭력적인 부모에게 입양되어 자라난 아이가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 아이는 폭력적인 부모에게서 벗어나 자신을 사랑해 줄 훌륭한 새 가정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혼자 쓸 수 있는 방과 혼자만의 텔레비전까지 갖춘 좋은 집에서 살게 될 텐데도 아이는 그 말을 듣자 두려움에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나쁜 상황에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새로운 집은 알 수 없는 위험으로 가득했습니다. 아이는 너무 오래 두려움을 느끼며 살아왔기 때문에 두려움 없이는 미래를 볼 수 없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아이와 같습니다. 두려움 속에서 자란 우리는 미래에도 두려움만 볼 뿐입니다. 우리의 문화는 두려움을 판매합니다. 텔레비전 저녁 뉴스의 예고편은 그런 기사들로 가득합니다. ‘우리는 위험한 음식을 먹고 있습니다!’ ‘당신의 아이가 입고 있는 옷도 안전하지 못합니다.’, ‘피서지에 도사리고 있는 죽음의 위험! 9시 특별취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두려워하는 일들이 실제로 얼마나 일어날까요? 사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과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은 큰 관계가 없습니다. 현실에서 우리가 먹는 음식은 대부분 안전하며, 아이들의 옷에 갑자기 불이 붙지도 않을 것이고, 즐겁게 휴가를 보내고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두려움이 우리의 삶을 지배합니다. 보험 회사 직원들은 우리가 걱정하는 대부분의 일들이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그리고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들은 매년 수백억씩 벌어들입니다. 물론 보험을 들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도전적인 스포츠에 참여할 때 즐거울 확률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남을 확률이 높으며, 또한 가끔씩 위기를 겪고 힘든 일을 당하더라도 사업에서 성공할 확률도 높습니다. 모임에서도 좋은 사람들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확률이 우리에게 불라하게 작용하는 것처럼 나쁜 일을 더 많이 예상합니다. 가장 큰 도전은 이 두려움을 이겨 내는 일입니다.
후천성 면역 결핍증으로 투병해 온 트로이는 자신을 행운아라고 생각했습니다. 병에 걸렸는데도 아무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트로이는 육체적으로는 잘 견디고 있었지만, 정신은 두려움 때문에 마비가 될 정도였습니다.
살면서 그는 많은 두려움을 겪어 온 터라 두려움이라는 감정에 익숙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여태까지의 두려움은 삶에 약간 거리를 두게 만들 만큼이었지 지금처럼 정신을 마비시킬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후천성 면역 결핍증을 앓고 있는 지금 나는 폐인이 되었어요. 마치 나의 모든 두려움이 하나의 큰 질병으로 합쳐진 것 같아요.
친구 빈센트는 언제나 내게 힘이 되어 줍니다. 그는 언제나 내가 두려움보다 강하다고 말해 줘요. ‘물러서지 말고 그것들과 당당하게 맞서, 너의 가장 큰 두려움을 점심 식사에 초대해. 그러면 그것이 실제론 그렇게 힘들지만은 않다는 걸 알게 될 거야.’라고요.
난 생각했어요. ‘두려움과 정면으로 맞서라고? 지금 불치병을 앓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그의 말을 받아들이기는커녕 꼬투리를 잡았던 거죠. 내가 가진 두려움이 나를 산 채로 잡아먹고 있다는 걸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었을 거예요.
빈센트의 동료 한 명이 내게 연락했을 때 나는 직장을 쉬고 있는 상태였어요. 그 동료는 자신의 여동생 재키도 후천성 면역 결핍증을 앓고 있고 병원에서 이제 막 퇴원했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그는 그녀를 도와줄 사람을 찾고 있는데,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는지 묻더군요. 난 생각해 보고 나중에 전화해 주겠다고 했어요. 그리고는 빈센트에게 의견을 물으러 갔어요. 빈센트는‘그녀는 절실하게 얼마나 아픈지 물었더니 아마도 곧 죽게 될 거라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자 내 안에 있던 모든 두려움이 수면 위로 떠올랐어요. 나는 빈센트에게 물었어요.
‘내가 죽어가기 때문에 사람들은 특별히 내가 그녀를 돌볼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빈센트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어요.
‘네가 그 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을 거라고 사람들은 믿는 거야.’ 난 ‘이런, 사람을 영 잘못 봤군.’ 하고 생각했어요. 나느 그 일을 할 수 없었어요. 나 역시 너무 두려웠거든요. 빈센트는 그렇더라도 그녀를 만나 보기는 해야 할 거라고 했어요.. 하지만 난 그것마저도 두려웠어요. 그러다가 문득 지금까지 두려워해 온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그녀를 만나 보기로 결심했어요. 그리고 빈센트에게 함깨 가 달라고 부탁했어요. 난 그녀의 집 현관까지 갔다가 뒤돌아서서 ‘빈센트, 미안하지만 난 할 수 없을 것같아.’ 하고 말해 버렸어요. 그러자 빈센트는 태연하게 ‘좋아, 집에 돌아가서 전화를 하자.’ 하고 말했어요.
난 다시 한 번 그녀의 집 현관을 바라봤어요. 바로 저 문 안에 나의 모든 두려움이 있었어요. 난 그 문 안으로 들어가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보기로 결심했어요. 무언가가 나를 이끈 것 같아요.
그녀는 휠체어에 앉아 있었는데 몸무게가 40킬로그램도 안 돼 보였어요. 벌써 두 차례나 발작을 일으켰기 때문에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어요. 여태까지 그녀의 눈처럼 큰 갈색 눈을 본 적이 없어요. 그 눈을 바라보면서 그 안에 있는 모든 두려움을 보았어요. 그녀의 얼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어요.
‘난 죽는 것이 두려워요. 아무도 없이 혼자서 죽음을 맞게 될까봐, 당신이 나를 떠날까 봐 두려워요.’
바로 앞에 나를 괴롭히는 가장 큰 두려움이 앉아 있었어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면서 견딜 수 없이 슬퍼졌어요. 마음속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어요.
‘그녀에게로 다가가, 너 자신의 두려움 속으로 들어가란 말야.’
난 눈을 감고 그녀에게 물었어요.
‘오늘부터 시각해도 될까?’
결국 두려움에 가득 찬 이 낯선 여인을 도와주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나중에야 그녀의 부모님조차 후천성 면역 결핍증에 걸린 그녀를 피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그녀를 돌봐 줄 누군가를 고용하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어요. 그들은 단지 그녀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가끔 친구 한두 명이 문병을 왔을 뿐이었어요. 난 처음에는 파트타임으로 가다가 나중에는 더 많은 시간을 그녀의 곁에서 보냈고, 결국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어요. 처음엔 나 자신이 두려움을 견뎌 낼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지만 결국 해냈어요.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어요.
죽음이 가까워오자 그녀는 다시 병원에 입원을 했어요. 그녀는 너무 겁에 질렸고, 내가 함깨 있어 주기를 원했어요. 그녀가 죽던 날 난 병실 안에 있었어요. 병원 측에서 그녀의 부모를 불렀지만 그들은 대기실에 머문 채 병실에는 들어오지 않았어요. 그녀의 곁에 앉아 그 커다란 갈색 눈을 들여다보면서 내가 함께 있다고 말해주었어요. 그녀의 두려움이 생생히 느껴졌어요. 그토록 강렬한 느낌은 처음이었어요. 그때 다시 마음속에서 이런 말이 들리더군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두려움은 아무 힘이 없어.’
난 그녀에게 말했어요.
‘내가 너의 손을 잡고 있어. 난 여기서 저쪽 세계의 사람들이 널 데리러 올 때까지 이렇게 손을 잡고 있을 거야. 조금 있으면 그들이 너의 손을 잡겠지. 두려워하지 마. 두려워할 필요 없어.’
그리고 그녀는 죽었어요. 격렬하게 오르내리던 그녀의 가슴이 고요해지는 것을 나는 지켜보았어요.
그녀를 데려가기 위해 영안실에서 사람들이 왔어요. 그들은 그녀가 후천성 면역 결핍증 환자라는 사실을 전해 듣지 못한 것 때문에 화가 나 있었고, 그녀를 만지는 것조차 두려워했어요. 그래서 한 간호사와 내가 재키를 시신 주머니에 넣었어요. 사람들이 그녀를 두려워하는 것을 보자 마음이 아팠어요. 그들에게 맡기느니 내손으로 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녀의 죽음을 지켜보는 일은 내 생애에서 가장 힘든 일이었어요. 난 다만 계속해서 그녀에게 말했어요. ‘두려워 하지마. 두려워할 필요 없어.’
트로이는 사랑으로 두려움을 이겨 냈습니다. 친절은 언제나 두려움을 이깁니다. 그것이 두려움을 물리치는 방법입니다. 두려움은 사랑의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두려움은 대개 텅 빈 마음속에 깃들며, 사랑과 친절의 힘으로 앞으로 나아갈 때 그것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삶에서 많은 것들을 두려워합니다. 대중 앞에서 연설하는 것이나 데이트 신청, 때로는 자신의 외로움을 인정하는 것조차 두려워합니다. 많은 경우, 거부당해서 밑바닥의 감정을 겪는 것보다는 아예 시도하지 않는 편이 더 쉽습니다. 사실 두려움은 매우 다루기 힘든 감정입니다. 옷을 여러 벌 겹쳐 입고서 자신의 실체를 너무도 잘 숨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을 한 겹씩 벗겨 내야 다른 모든 두려움의 근원인, 맨 아래에 자리 잡은 두려움의 실체와 만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대개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당신이 일터에서 맡은 프로젝트 때문에 몹시 걱정하고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당신의 걱정 맨 위에 있는 두려움의 껍데기를 벗겨내면 그 프로젝트를 잘 해내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는 심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 밑으로도 여러 층의 두려움이 쌓여 있습니다. 월급이 인상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직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생존하지 못하리라는 두려움들이 그것입니다. 이 마지막 두려움은 본질적으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돈이나 직업에 관련된 두려움 밑에는 생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아니면, 당신이 누군가에게 데이트 신청하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두려움 밑에는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또 그 밑에는 당신에게 맞는 짝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깔려 있습니다. 또 그 밑에는 당신이 사랑받지 못하리라는 두려움이 깔려 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어떤 상황에서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 밑바닥에는 ‘난 잘할 수 없어.’하는 두려움이 깔려 있습니다. 파티 때 아무와도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구석에 홀로 서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있을 겁니다. 그들은 왜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할까요? 두려움 때문입니다. 자신이 파티 장소에서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는 두려움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은 어딘가 충분하지 못하다는 두려움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충분히 매력적이고, 충분히 예쁘고, 충분히 다정하고, 충분히 재미있지만, 자신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전부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흘러가며, 결국에는 모든 불행의 원인이 됩니다. 두려움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줍니다. 모든 두려움은 죽음의 두려움에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죽음과 관계된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법을 배울 수만 있다면 삶의 다른 일들에 훨씬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은 바로 그 궁극적인 두려움, 죽음의 두려움과 마주해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깨닫습니다. 죽음이 자신을 파괴하지도 못하며,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도 못하리란 것을,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두려움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우리에게 두려움은 매우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모든 두려움이 사라진다면 살이 얼마나 달라질까요? 만일 아무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꿈을 추구한다면, 당신의 삶은 틀림없이 지금과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이것이 죽음을 앞둔 사람이 얻는 배움입니다. 죽음은 우리를 최악의 두려움과 맞서게 합니다. 그것은 가능한 또 다른 삶을 보여 주고, 그럼으로써 우리 의 남은 두려움을 사라지게 합니다.
불행히도 그런 두려움이 사라질 무렵이면, 우리는 우리가 꿈꾸어온 것들을 실천하기엔 너무 늙었거나 병에 걸려 있을 것입니다. 숨겨 둔 열정을 펼치거나, 자신에게 진짜 맞는 일을 찾거나, 원하는 사람이 되기도 전에 우리는 나이가 들고 병에 걸립니다. 만일 자신이 진정ㅇ로 원하는 일들을 했다면 어느 날 병에 걸리고 나이가 든다 해도 후회로 가득 차지는 않을 것입니다. 절반도 살아보지 못한 채 생을 끝낸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한 가지 배움이 분명해집니다. 꿈꾸는 일들을 아직 행동에 옮길 수 있을 때, 두려움을 이겨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초월하기 위해서는 다름 감정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곧 사랑의 감정입니다. 행복, 불안, 기쁨, 분노 등 우리가 평생 겪는 많은 감정들에는 다양한 이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감정은 오직 두 가지뿐입니다. 사랑과 두려움이라는 두 가지 근원적인 감정이 자리 잡고 있지만, 사실은 사랑 또는 두려움만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그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느끼는 동시에 두려움을 느낄 수는 없습니다. 그것들은 반대되는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이 있는 곳에 사랑이 설 자리는 없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두려움이 차지할 자리는 없습니다. 사랑을 하면서 동시에 두려웠던 적이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둘 중 어느 쪽에 설 것인지 결정해야만 합니다. 그곳에 중립지대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적극적으로 사랑의 감정을 선택하지 않으면 당신은 자신 안에서 두려움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부정적인 감정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든 순간은 우리에게 사랑과 두려움 중 어느 한 쪽을 선택할 권한을 줍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힘든 상황에서는 두려움 대신 사랑을 선택하기가 특히 어렵습니다.
사랑을 선택했다고 해서 다시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게 되는 건 아닙니다. 사실 사랑을 선택하고 나면 많은 두려움들이 치유되기를 바라며 수면 위로 떠오릅니다. 이것은 늘 진행되는 과정입니다. 음식을 먹은 후 다시 배고픔을 느끼는 것처럼, 사랑을 선택한 후에 당신은 다시 두려움을 느낍니다. 몸에 필요한 영양을 공급하고 매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음식물을 먹어야 하듯이, 영혼을 성장시키고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사랑을 선택해야 합니다. 재키를 돌본 트로이처럼, 그는 두려움 대신 계속해서 친절을 결심한 것입니다.
두려움보다 더 위대한 무언가에 자신을 바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삶에서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두려움이 돌아올 때마다 그는 지금 이 순간 속의 사랑으로 되돌아와야 했습니다. 우리가 만들어낸 두려움들은 과건 미래 중 어느 하나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랑만이 현재의 감정입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유일한 순간은 지금 이 순간뿐이며, 사랑만이 유일하게 실재하는 감정입니다. 현재 일어나는 감정은 사랑뿐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항상 과거에 일어난 어떤 경험이나 일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미래에 일어나리라고 여겨지는 어떤 일들을 걱정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현재를 산다는 것은 두려움이 아닌 사랑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사는 것, 그것이 인간의 목표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자신을 사랑으로 채울 때, 두려움을 걷어 낼 수 있습니다.
불행히도 우리들 대부분은 두려움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프리랜서로 일하는35세의 그래픽 디자이너 조슈아도 그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미술을 전공했고 화가가 되기를 꿈꾸었지만, 지금은 대부분의 시간을 명함을 디자인하면서 보냅니다. 이 젊은이는 과거에는 원대한 계획이 있었지만, 그것을 현실에서 이룰 수 있을지 두려웠습니다. 그는 종종 이렇게 말했습니다.
“난 원래 이런 사림이야, 난 성공과는 거리가 먼 성향이야.”
나(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조슈아와 함께 이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무엇이 그를 그토록 무기력하게 느끼게 하는지 알아내려고 했습니다. 그는 큰 실패나 패배감을 맛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럴 기회도 없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로 전혀 그림을 그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화를 나누다가 우리는 그의 아버지의 죽음까지 접근하게 되었습니다. 조슈아는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많은 일을 하고 싶어 했지만 끝내 못 하셨어요. 나와 비슷해요. 실패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죠.”
이야기를 계속하면서 우리는 그의 아버지가 꿈을 실현하지 못한 데는 별다른 이유가 없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물었습니다.
“아버지가 왜 실패했다고 생각하죠? 혹시 머리가 나쁘셨나요?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셨나요? 재능이 없으셨나요? 아니면 오랫동안 실패만 되풀이했나요? 그분이 주저하신 까닭이 뭐죠?” 조슈아는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습니다.
“아버지에게는 잘못된 것이 없었어요. 압지는 똑똑하셨고, 재능도 있었고,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셨어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으셨지만, 다만 절대 시도하지 않으셨죠. 그러면서 늘, ‘우리 집안은 일이 잘 풀린 적이 없어.’하고 말씀하셨어요.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지는 20년 동안 연락이 끊긴 어린 시절의 친구들을 무척 만나보고 싶어 하셨어요. 그러면서도 먼저 연락을 하려고 하지는 않으셨어요. 그분들이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아버지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을 거라는 이유 때문이었어요.”
조슈아는 갑자기 무언가로 머리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가 말을 이었습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겠어요. 난 언제나 내가 실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림을 그릴 만한 실력이 없다고.”
이 젊은이의 문제는 그림을 그리는 대신 명함을 디자인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실력이 부족하다고 여긴 나머지 꿈을 이루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은 데 있었습니다. 두려움이 없어진다면 지금 당장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내가 묻자 그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그림 공부를 다시 시작하고 싶어요.”
그것이 그에게는 오히려 두려움이 끼어들지 않게 하는 방법일 수 있습니다. 내가 물었습니다. “그것이 당신과 아버지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주겠군요.”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습니다.
“네 아버지는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두려움을 떨쳐 내지 못하셨지만 난 다를 거예요.”
이제 조슈아는 다른 삶을 살 기회, 두려움 없는 삶을 살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위대한 화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단지 그림 그리는 일을 즐기면서 살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그는 두려워하면서 삶을 살아가지 않을 것이고, 두려움에 차서 죽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죽음의 가능성을 안고 살아가지만,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더 이상 가능성이 아니라 확실성입니다. 그런 긴박한 상황에서 그들은 어떻게 할까요? 그들은 더 대담해집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삶의 종착점에 있는 환자들은 곧잘, 자신들이 더 이상 두려워할 것이 없고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뒤 무한한 행복을 발견했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두려움 그 자체이지 우리가 두려워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두려움은 분노, 방어, 자만심 등 여러 가면을 쓰고 있습니다. 두려움을 지혜로 바꿔야 합니다. 매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들을 작은 것부터 하나씩 실천해야 합니다. 당신의 두려움은 도전 받지 않을 때에만 힘을 갖습니다.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사랑과 친절의 힘을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두려움 속에서 살 때 당신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어떤 생각을 갖는가에 따라 두려움이 커지거나 사랑의 마음이 강해질 수 있습니다.
사랑은 더 많은 사랑을 불러옵니다. 두려움 역시 더 많은 두려움을 불러오는데, 특히 그것이 감추어져 있을 때 더욱 그렇습니다. 그리고 두려움에서 어떤 행동을 할 때 더 많은 두려움이 밀려옵니다.
진정한 자유는 가장 두려운 일들을 대담하게 행할 때 성취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에 붙들리지 않고 크게 한 걸음 내딛는 순간, 당신은 삶을 잃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게 됩니다. 두려움, 걱정,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겉으로만 안정된 삶을 사는 것이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을 당신 삶의 변함없는 일부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두려움을 걷어 버리거나 이겨 내야 역설적이게도 삶의 가장 안전한 장소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때 비로소 망설임 없이 사랑하고, 솔직하게 마음속 말을 하고, 자기 방어를 하지 않고도 자신을 지키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일단 두려움을 뛰어넘으면 새로운 삶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궁극적으로는 두려움을 벗어 버리는 것입니다. 헬렌 켈러는 말했습니다.
“삶은 하나의 모험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두려움이 주는 이런 배움 들을 자신의 것으로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경이롭고 놀라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두려움이 없는, 우리가 꿈꾸던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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