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책]/인생수업

4 상실과 이별의 수업

경호... 2017. 12. 20. 12:06

4 상실과 이별의 수업

 

당신이 아름다운 정원에 앉아 있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고통 속에 있다면, 만일 당신이 상실을 경험한다면, 그리고 만일 당신이 머리를 모래에 묻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아주 특별한 목적으로 당신에게 주려는 선물로 여긴다면 당신은 성장할 것이다.

 

박사 과정을 끝마쳐 가는 한 심리학과 학생이 할아버지의 병환 때문에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길러 주신 할아버지가 이대로 돌아가실까 봐 무척 염려했습니다. 졸업을 얼마 앞둔 시점에서 휴학을 하고 할아버지와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도 고민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마지막 학년에 많은 것들을 배우기 있었기에 이번에 학업을 끝마치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는 나(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에게 말했습니다.

지금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은 제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성장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어요.”

나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진정한 인간으로 성장하고 싶다면, 이 우주가 당신을 상실이라고 하는, 인생의 박사 과정에도 등록해 놓았음을 깨달아야 해요.”

 

결국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집과 자동차, 직장, 돈과 젊음, 심지어 사랑하는 이들까지도 우리가 잠시 빌려 온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이들도 우리 곁에 영원히 붙들어 둘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안다고 해서 슬퍼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자각으로, 지금 이 순간 누리고 있는 경험들의 소중함과 사물들의 가치를 더 많이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이 하나의 학교라면, 상실과 이별은 그 학교의 주요 과목입니다. 상실과 이별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필요한 시기에 우리를 보살펴 주는 사랑하는 이들, 또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손길을 자각하기도 합니다. 상실과 이별은 우리의 가슴에 난 구멍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이끌어 내고, 그들이 주는 사랑을 담아 둘 수 있는 구멍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를 창조해 낸 완벽한 세계인 어머니의 자궁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상실을 겪으며 이 고통스런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이곳은 배가 고프다고 해서 언제나 먹을 것이 제공되는 않는, 또는 자신을 돌봐 줄 어머니가 없을지도 모르는 미지의 세계입니다. 어린 시절 언제나 누군가의 품에 안겨 ㅇㅆ던 우리는 갑자기 당 위에 홀로 서야 할 순간을 맞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친구들은 이사 등의 이우로 우리 곁을 떠나며, 가지고 놀던 장난감은 부서지거나 사라지고, 야구 시합에서 패배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첫사랑과는 결국 헤어지게 될 뿐입니다. 하지만 이런 일련의 이별들은 겨우 시작에 불과합니다. 한 해 한 해 흘러갈수록 우리는 선생님을 잃고, 친구들을 잃고, 어린 시절의 꿈을 잃습니다.

청춘, , 자유와 같은 무형의 것들도 결국엔 사라지거나 퇴색해갑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은 잠시 빌려 온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그들의 주인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현실은 영원하지 않으며, 우리가 갖고 있는 것들에 대한 소유권 역시 영원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일시적인 것들입니다. 영원한 것은 어디에도 없으며, 모든 것을 언제까지나 소유하고 있으려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그리고 상실을 막으려는 어떤 시도도 허사로 끝납니다.

우리는 삶을 이런 식으로 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마치 삶이 영원한 것처럼, 삶 속에 있는 것들이 언제나 우리 곁에 있을 것처럼 가장합니다. 놀라운 일은, 불치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가족들이 환자의 마지막 순간이 가까워질 때까지도 다가올 죽음을 숨긴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겪어야 할 상실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하지 않으며, 죽어가는 이에게 그것을 언급하는 건 더더욱 원치 않습니다. 병원 관계자 또한 아무 말도 해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삶의 끝에 다가가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상황을 모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행동이 얼마나 근시안적인가요? 그리고 이것이 그 사람을 돕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또 얼마나 어리석은가요? 많은 불치병 환자들이 자신의 가족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내가 죽어간다는 걸 숨기려 하지 말아요. 어떻게 그런 걸 숨길 수가 있죠?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내가 죽어간다는 걸 일깨워 주고 있는 걸 모르겠어요?“

죽음을 앞둔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잃어 가는지 알고 있으며, 그 가치를 이해합니다. 자신을 속이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한밤중에 고통으로 몸부림치다 깨어났을 때 나(데이비드 케슬러)는 죽음을 느겼습니다. 처음 통증을 느낀 순간부터 그것이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복부 통증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의사에게 진찰을 받으러 갔더니, 소화제를 처방해 주며 좀 더 지켜보자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나 목요일이 되자 통증은 더 악화되었고, 의사는 정밀 검사를 해보자고 했습니다. 그날 하루 동안 병원에 입원해 몇 가지 검사들을 받았는데, 위에 이상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내시경 검사도 했습니다. 회복실에서 의사는 내게 장입구를 부분적으로 가로막고 있는 종양을 발견했다고 했습니다.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얘긴가요?”

내가 놀라서 묻자, 의사는 간단히 대답했습니다.

조직을 떼어 검사실로 보냈으니, 며칠 뒤 결과가 나올 겁니다.”

종양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악성은 아니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결장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나흘 동안 검사 결과를 기다리면서, 젊음과 건강, 그리고 마침내는 삶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슬픔에 잠겨 있었습니다. 종양은 양성으로 판명되었지만, 그 며칠 동안 느낀 상실감은 정말이지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삶이 곧 상실이고 상실이 곧 삶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 평생 상실과 싸우고 그것을 거부합니다. 상실 없이 삶은 변화할 수 없고, 우리도 성장할 수 없습니다. 옛 유대 격언에도 많은 결혼식에 가서 춤을 추면 많은 장례식에 가서 울게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당신이 많은 시작의 순간에 있었다면, 그것들이 끝나는 순간에도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만일 당신에게 친구가 많다면, 그만큼의 이별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겪는 상실에는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습니다. 부모의 죽음에서부터 전화번호를 적은 메모지를 잃어버리는 것에 이르기까지 상실은 다양합니다. 죽음처럼 영원한 것도 있고, 출장을 갈 때 아이와 떨어지는 것처럼 일시적인 것도 있습니다. 죽음을 포함한 모든 상실의 과정에서 사람들이 보이는 다섯 단계의 반응은, 삶에서 겪는 모든 크고 작은 상실에 공통적으로 나타납니다. 당신의 아이가 시각 장애아로 태어났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당신은 아마 다음과 같은 반응을 거칠 것입니다.

첫 번째 반응은 부정입니다.

의사는 아이가 앞을 못 볼 거라고 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아가 들면 아이는 정상적으로 될 거야.”

두 번째 반응은 분노입니다.

의사들은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우리에게 좀 더 빨리 알려줬어야지! 신은 왜 우리에게 이런 시련을 주는 거지?”

세 번째 반응은 타협입니다.

아이가 말귀를 잘 알아듣고, 자라서 혼자 앞가림을 할 수 있게만 된다면, 난 견딜 수 있어.”

네 번째 반응은 절망입니다.

이건 끔찍한 일이야, 아이의 인생이 너무나 불쌍해.”

그리고 다섯 번째 반응은 수용입니다.

어떤 문제가 생겨도 우린 잘 이겨 낼 수 있어. 아이는 그래도 사랑으로 가득한 멋진 삶을 살 수 있어.” 아니면 좀 더 사소한 문제로 넘어가서, 당신이 콘택트렌즈를 잃어버렸다고 가정해 봅시다. 렌즈를 잃어버린 것에 당신은 다음과 같이 반응할 것입니다.

첫 번째, 부정입니다.

내가 그걸 떨어뜨렸다니, 믿을 수 없어!”

두 번째, 분노입니다.

젠장, 좀 더 조심했어야지!”

세 번째 타협입니다.

렌즈를 찾게 된다면, 앞으론 훨씬 더 조심할 거야.”

네 번째 절망입니다.

그걸 잃어버리다니, 너무 아까워 견딜 수 없어. 새것을 사야 하잖아.”

그리고 다섯 번 째, 수용입니다.

괜찮아, 어차피 언젠가는 바꿔야 하는데 뭐, 내일 아침 새 렌즈를 맞춰야겠어.”

모든 사람이 상실에 대해 매번 이 다섯 단계를 모두 거치지는 않으며, 반응이 항상 순서대로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또는 한 단계를 반복적으로 겪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매번 여러 가지 형태로 상실을 경험하며, 그것에 반응합니다. 이렇게 축적된 상실의 경험은 삶에 더 잘 대처할 수 있는 힘이 됩니다.

누군가를 또는 무언가를 잃게 되었을 때 느끼는 감정은 그것이 무엇이든 당신이 마땅히 느껴야 할 감정입니다. 우리는 결코 누군가에게, “넌 부정의 단계에 너무 오래 있었어. 이제 분노의 단계로 넘어가야 해.” 하고 말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치유의 과정은 저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상실을 경험했을 때, 그 반응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상실은 우리에게 공허함과 무기력함, 분노, 슬픔, 두려움 등의 감정을 남깁니다. 불면증에 시달리거나 하루 종일 잠만 자게 될 수도 있습니다. 식욕이 없어지기도 하고, 반대로 눈에 띄는 건 무엇이든 먹어 치우기도 합니다. 극단적인 감정을 오가거나, 그 사이의 감정 상태를 두루 거치기도 합니다. 이런 단계들을 거치는 것이 치유의 과정입니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시간이 그 모든 것을 치유하리라는 사실입니다. 불행히도 치유의 과정이 언제나 직선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래프의 상승선처럼 빠르고 분명하게 회복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치유의 과정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과 같습니다. 온전히 자신을 회복해 가다가도 갑자기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역행하는 것 같다가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치유의 과정입니다. 결국 당신은 치유될 것이며, 온전한 자신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지는 못하겠지만, 그 상처를 치유 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여행의 어느 지점에 도달하면, 당신이 잃어버렸다고 슬퍼한 사람이나 사물이 결코 당신에게 소유된 적이 없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또한 한편으론 그것들을 다른 방식으로 영원히 소유하게 되리라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나 사물들이 지금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기 바라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상실은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어려운 배움 중 하나입니다. 상실감에서 얼른 벗어나려고 애쓰고, 때로는 그것을 미화시켜 보기도 하지만,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던 사람이나 사물과의 헤어짐은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입니다.

곁에 없다는 사실이 언제나 마음을 성장시켜 주지만은 않습니다. 때로 그것은 견딜 수 없는 슬픔과 고독감과 공허를 안겨줍니다.

상실 없이는 성장도 없습니다. 또한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성장 없이는 상실의 경험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이해하기 어려우며, 어쩌면 그래서 우리는 매번 상처를 받는지도 모릅니다.

이 개념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교사는 일찍 자식을 잃은 부모들입니다.

그들은 마치 세상이 끝난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말하는데,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입니다. 그러고 나서 몇 해가 지나면 어떤 부모들은 그런 비극이 자신들을 성장시켰다고 말할 것입니다. 물론 자식을 잃지 않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 상실이 뜻밖의 방식으로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열렬히 사랑하고 헤어지는 것이 한 번도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는 걸 배웠습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 중 누구도 사랑하는 아이를 떠나보냈다고 해서, 아예 그 아이가 태어나지 않은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어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상실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성장했는지는 한눈에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장합니다. 상실로 인해 고통 받은 적이 있는 사람은 결국 더 강해지고, 더 온전한 존재가 됩니다.

중년의 나이에 이르면 머리카락은 조금 빠지지만, 외모 못지않게 내면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퇴직하면 수입은 없어지지만,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노년에 이르면 자식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지만, 베풀었던 사랑을 돌려받습니다. 소유하던 것을 잃은 슬픔이 가시고 나면 자신이 좀더 자유로워지고, 세상을 가볍게 여행할 수 있게 되었음을 깨닫습니다. 때로 관계가 끝났을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의 자신이 아닌, 홀로 있는 자신을 말합니다. 어떤 물건이나 능력을 잃게 되었을 때 비로소 자기가 잃어버린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상실이라고 하면, 우리는 대개 사랑하는 사람, 목숨, 가정, 아니면 돈과 같이 중요한 것들을 잃는 경우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상실이 주는 배움을 통해 어느 순간 당신은 삶에서 하찮게 여기던 것들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신체 마비로 생활 반경이 거실에 있는 환자용 침대와 그 옆 의자로 제한된 지금에서야,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이제까지 당연시해 온 것들이 아직 곁에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직 화장실은 혼자서 갈 수가 있습니다. 만일 혼자 힘으로 화장실에 갈 수 없고 혼자서 목욕을 할 수 없다면, 엄청난 무력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여전히 내 힘으로 할 수 있어서 지금 나는 너무도 감사합니다.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분명 가장 가슴 아픈 경험입니다. 다른 이들에게 결례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언급하자면, 이혼이나 별거를 통해 헤어짐을 경험한 사람들은 종종 죽음이 궁극적인 상실이 아님을 깨달았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사람과의 이별이 훨씬 더 힘든 경험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계속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알면서도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은, 죽음으로써 영원히 헤어지는 것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들다고 그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경우에는 가슴속이나 기억 속에 계속 살아 있기 때문에 그와 함께할 새로운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로부터 우리는 상실에 대해 흥미 있는 것들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의학적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로 부터도 다음의 공통된 점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한결같이 더 이상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들은 이제 죽음이란 필요 없어진 옷을 벗는 것처럼 육체를 떠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셋째, 그들은 죽음 속에서 온전한 자신을 느꼈고, 자신이 모든 사물, 모든 존재와 연결되어 있음을 느꼈습니다. 더불어 어떤 상실감도 느끼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절대 외롭지 않았으며 누군가가 자신과 함께 있음을 느꼈다고 말합니다.

30대 남성은 아내가 갑자기 자신을 떠났다고 내게 말했습니다. 그는 완전히 망연자실해 있었습니다. 앞으로 자신이 겪게 될 고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상실감이라는 게 이런 건가요? 내 친구들 중 여럿이 불화나 이혼, 죽음 등으로 배우자를 잃었어요. 그들이 슬픔과 아픔을 호소하곤 했을 때 난 그게 어떤 것인지 알게 되니 그 친구들한테 가서,‘미안해. 네가 그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어.’하고 말해 주고 싶어요. 난 성숙해졌고 타인의 마음을 더 헤아릴 줄 알게 되었어요. 앞으로 상실로 괴로워하는 친구가 있으면,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그들 곁에 있어 줄 거예요. 전에는 전혀 생각하지 못

한 방식으로 그들에게 힘이 되어 주고, 겪는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해 줄 거예요.”

이것이 상실이 우리 삶에 기여하는 것 중 하나입니다. 상실은 이간을 하나로 묶어 주고, 서로 깊이 이해하게 해줍니다. 그리고 삶의 어떤 가르침보다도 더 깊이 우리를 연결해 줍니다. 상실의 경험 속에 하나가 되었을 때, 인간은 새롭고 깊어진 시각에서 서로를 염려하고 이해하게 됩니다.

상실만큼이나 힘겨운 것은 상실을 겪게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입니다. 흔히 환자들은, “건강이 회복되지 않을 거라면 차라리 죽어 버릴 거야.”라거나 검사 결과가 나오길 기다리는 것이 힘들어 죽겠어.”하고 이야기합니다. 재결합을 시도하고 있는 한 부부는 별거하고 있는 지금 상황은 정말 죽을 맛이에요. 이 일을 빨리 해결하거나, 아니면 아예 끝장을 보는 게 나을 것 같아요.” 하고 불평합니다. 삶은 때로 언제 상실을 겪게 될지 모르는 불확실성 속에서 우리를 살게 만듭니다. 검사 결과를 듣기 위해 며칠을 기다려야 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병과 싸우는 모습을 무한정 지켜보고 있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실종된 아이를 기다리며 몇 시간, 며칠, 몇 주,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을 불확실하고 불안한 상태로 지내야만 할 수도 있습니다. 교전 중에 행방불명된 군인의 가족들은 지옥과도 같은 고통에 시달립니다.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포기하지 못하고 기다리는 사람도 많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거나 구조되었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되기 전까지는 포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영 소식을 듣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 있을지 모르는 상실에 대한 불안감 역시 하나의 상실입니다. 어떤 결말이 나오든, 그것은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명백한 상실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나(데이비드 케슬러)는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그분의 밝은 얼굴과 눈빛, 다정한 미소, 그리고 마치 당신 팔의 일부와도 같은 검은 줄이 달린 금장 손목시계........,아버지와 그 손목시계는 언제나 내 유년의 기억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그 시계를 무척 좋아한다는 걸 아셨습니다. 아버지의 임종을 앞두고, 나는 아버지 곁에 앉아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습니다. “아버지에게 어떻게 작별 인사를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버지가 대답하셨습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란다. 하지만 난 너를 포함해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에게 작별 인사를 해야 한단다. 네 얼굴에서부터 우리 집까지 모든 것들에게 말이다. 어젯밤에는 창밖의 별들에게도 작별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시계를 가리키며 말씀하셨습니다.

내 시계를 좀 벗겨 주겠니?”

됐어요, 아버지. 아버진 항상 그 시계를 차고 계셨잖아요.”

그렇지만 이젠 시계와도 작별을 해야 할 때가 왔구나. 이제부턴 네가 차도록 해라.” 나는 천천히 아버지의 시계를 풀어 내 손목에 찼습니다. 내가 그 시계를 바라보고 있을 때, 아버지가 말씀하셨습니다.

너도 언젠가는 그 시계와 작별해야 할 때가 있을 거다.”

몇 해가 지났어도 그 말씀은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그 시계는 내게 생의 무상함을 일깨워 주는, 달콤하면서도 쓰라린 상징물입니다.

나는 그 시계를 손목에서 푼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한 달 점쯤의 일입니다. 직장에서 바쁜 하루를 보내고 퇴근길에 친구와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고 샤워를 한 뒤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옷을 차려입고, 저녁 모임에 나갔습니다. 그날 밤 막 잠자리에 들려는 순간, 나는 시계가 없어진 걸 알아차렸습니다. 그 후로 며칠 동안 시계를 찾아 사방을 돌아다녔지만 헛수고였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내 어린 시절의 상징인 시계를 잃어버렸다는 자책감과 싸우면서,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하신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언젠가 내가 죽는 날, 혹은 다른 어떤 상황에 의해 그 시계를 잃게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잠시 우리에게 맡겨진 것에 불과하다는 가르침을 새삼 뼈져리게 느꼈습니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그 생각에 익숙해졌고, 필연적으로 일어난 상실에 적응이 되어갔습니다. 나는 시계에 집착하는 대신, 나와 아버지를 연결해 줄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았습니다. 언젠가는 나 역시 모든 것들과 작별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씀에 평화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석 달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침대 스탠드에 물을 쏟고 말았습니다. 울을 닦아 내려고 침대 너머로 몸을 기울이다가 시계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침대 난간 뒤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시계는 다시 내 손목으로 돌아왔지만,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다는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모든 것들과 작별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결국엔 자신의 내면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무언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물건을 소중히 간직하는 이유는 그 물건 자체의 가치보다는, 그것이 상징하는 의미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의 의미는 물건과는 상관없이 영원히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상실은 아주 복잡한 감정이며, 한 가지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상실에 대한 반응은 어느 누구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슬픔은 아주 개인적인 감정입니다. 슬픔의 감정은 사람에 따라 격렬하게 나타날 수도 있고 깊숙이 잠재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상실 또는 상실의 가능성은 가족, 친구, 직장 동료, 환자를 돌보는 의료진 등 주변 모든 이들의 감정에 영향을 미칩니다. 심지어 애완 동물조차 상처를 받습니다. 주위 모두가 상실감을 느낍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서로 멀어질 수도 있고 더 가까워질 수도 있습니다.

세미나에 참석한 한 여인은 남편을 잃은 슬픔에 빠져 있었습니다. 남편과 사별해서가 아니라, 투병 생활을 하던 남편과 이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암으로 투병하는 동안 어떻게 갈등이 시작되었는지 설명했고, 그것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남편이 치료를 받는 동안, 나는 밤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요. 잠이 들었다가도 다시 깨어 그 사람이 숨을 쉬고 있는지 확인해야만 했어요. 남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거의 소진된 상태였어요. 깨어 있는 상태로 누워서 이 사람이 숨을 멎는 날엔 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어요. 그러다가 결국 신경 쇠약에 걸리게 되었고, 죄의식 속에서 이혼하고 말았어요.

몇 년이 지난 지금, 그는 건강을 회복했어요. 그 일을 겪으면서 난 누군가 생명이 위태로운 사람이 곁에 있으면 모든 이의 관심이 그 사람에게만 집중된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모두들 그의 몸 상태가 어떤지, 기분은 어떤지, 치료가 잘 되고 있는지에만 신경을 썼어요. 그때 나는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자신이 너무 이기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에게 이봐요, 난 어떡해야 하죠?’ 하고 말할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어요.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거요. 난 환자가 아닌데, 죽어가는 사람은 바로 남편인데, 어떻게 내가 도와달라고 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계속 입을 닫고만 지내다가 결국 무너져 버린 거죠.”

살인이나 전염병, 돌발적인 재난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을 때 우리의 슬픔은 가중됩니다. 죽음이 가져온 상황보다 분노 때문에, 또는 사건의 갑작스러움 때문에 우리의 삶이 정상적인 궤도를 이탈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모든 슬픔의 감정은 복잡합니다. 그것은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후천성 면역 결핍증 바이러스가 번지던 1980년대 초,에드워드는 사랑하는 친구들을 스무 명 넘게 떠나보냈습니다. 당시 그는 자신의 감정이 상실의 감정치고는 너무 가볍다고 생각했습니다.

난 분명 그들을 사랑했는데, 왜 별로 슬프지가 않지?’

그는 이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에도 15년이 넘도록 그는 사랑하던 친구들의 죽음에 제대로 슬퍼하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혼란스러워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갑자기 그는 두려움에 떨며 잠에서 깨어나, 미친 듯이 집 안을 뒤져 그때 죽은 스무 명의 사진을 찾아냈습니다. 한순간에 슬픔이 무서운 기세로 덮쳐 왔습니다. 슬픔은 가가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준 것입니다. 우리는 가각 다른 시기에 각각의 방식으로 상실을 경험합니다.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기까지 저마다 유예 기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가 되면 그 감정들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준비될 때 까지 그 감정들은 어딘가에 안전하게 숨어 있습니다. 이것은 부모를 여읜 아이들이나 십대들에게 흔히 있는 일입니다. 어른이 되어 감정을 다스릴 수 있게 되기 전까지 그들은 그렇게 큰 슬픔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과거로부터 달아날 수는 없습니다. 과거의 슬픔은 종종 우리가 준비가 되어 그것을 꺼낼 때까지 유예되어 있습니다. 때로는 새로운 상실이 과거의 슬픔을 일깨우기도 합니다. 또는 나중에 다른 상실을 경험할 때까지 현재의 상실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1940년대에 흔했던 전쟁 신부(전쟁터에 나간 군인과 결혼한 신부)’중 한 사람이었던 모린은 당시 병무청으로부터 남편의 사망 통지서를 받고 망연자실했습니다. 학생 커플인 모린과 롤랜드는 일본이 진주만 폭격을 감행한 몇 주 뒤, 롤랜드가 입대하기 직전 서둘러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들이 결혼하던 해에 롤랜드는 공군 훈련을 마치고 해외로 파병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망 통지서가 날아온 것입니다. 21세에 과부가 된 모린은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기보다는 곧바로 다른 주로 이사해 직장을 구하고, 새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재혼을 했습니다. 그 후 세 딸을 낳았고, 과거는 완전히 잊혀졌습니다. 새 남편은 모린의 전남편에 대해 일고 있었지만, 그녀는 세 딸이나 새로 사귄 친구들에게 롤랜드에 관한 이야기를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집에 그의 사진을 걸지도 않았고, 전의 시댁 식구들이나 두 사람이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 중 어느 누구와도 연락을 끊었습니다. 그렇게50년이 지났고, 두 번째 남편도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 그러자 사별한 두 남편을 향한 슬픔이 한꺼번에 몰려와 눈물이 터져나왔습니다. 감정을 달래기 위해 그녀는 거실에 두 사람의 사진을 나란히 걸어 두었습니다. 첫사랑과 두 번째 남편의 사진을, 그러면서 마침내 자신이 겪은 상실감과 슬픔을 정리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사랑하던 사람, 특히 뒤섞인 감정을 느낀 부모님을 잃었을 때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상실감을 헤쳐 나가는 데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은, 자기가 사랑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 상실감을 느끼는 자신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입니다. 한 여성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는 내개 아주 심하게 대했어요. 말 그대로 폭군이었죠. 그런 엄마가 돌아가셨는데 내가 왜 슬퍼해야 하죠?”

메리 셀리의 유명한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원작으로 한 영화에서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자기가 만든 인조인간의 삶과 행복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 않은 채, 비참하고 고통스런 삼을 살 수밖에 없는 그 유명한 괴물을 만들어 냅니다. 영화의 결말 부분에서 프랑스켄슈타인 박사가 살해되었을 때, 괴물은 울음을 터뜨립니다. 자신에게 큰 고통을 안겨준 사람이 죽었는데 왜 그렇게 슬피 우느냐는 물음에 괴물은 간단히 대답합니다.

그는 내 아버지였으니까.”

책임을 다해 우리를 돌봐 준 사람들의 죽음에 우리는 슬픔을 표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아야 할 사랑을 주지 않은 사람들의 죽음도 마찬가지로 슬퍼합니다. 나는 이런 경우를 수없이 봐왔습니다. 심하게 구타당한 아이가 병원에서 엄마를 애타게 찾지만, 엄마는 아이를 때린 죄로 구치소에 갇혀 있기 땜에 올 수 없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냉혹하게 대한 사람들의 죽음에 대해서도 진심으로 슬픔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들의 죽음이 슬프게 느껴진다면 슬퍼해야 합니다. 충분히 그 상실을 느끼고 슬퍼해야 하며, 그들이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되더라도 그들의 죽음이 무시 되어선 안 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상실의 감정이 복잡하든 단순하든, 우리는 자신만의 시기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것을 치유할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지금쯤 상처가 치유되었어야만 해.”라거나 치유되는 속도가 너무 빨라.”라고 말할 순 없습니다. 슬픔의 방식은 개인마다 다릅니다. 그러므로 삶의 어느 한 지점에 묶여 있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한 우리는 치유될 것입니다. 상실의 슬픔을 이겨 내기 위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재현하기도 합니다. 그러고는 마침내 그것을 치유해 냅니다. 상실로 상처받았다면, 상실로부터 자기를 지키는 방법을 찾아낼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상실감을 잊으려 노력하면서 다른 사람을 도울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상처를 잊기 위해 다른 사람의 상처를 돌봅니다. 그러다 보면 누구의 도움 없이도 홀로 설 수 있게 됩니다.

 

질리언은 다섯 살 때 부모에 의해 고아원 계단에 버려졌습니다. 아직 어렸던 질리언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습니다. 이제 지혜로운 중년 여성이 된 그녀는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자립심도 강합니다. 그녀는 유년의 상실이 자신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삶의 대부분을 그 상실감을 치유하려 애쓰면서 보냈다고 그녀는 말했습니다.

어릴 적에 겪은 일이 고통스럽긴 하지만, 이미 40년도 더 된 일이예요. 그런데 지난 20년 동안 그 누구도 내가 스스로를 학대하는 것만큼 날 학대하진 않았다는 걸 깨달았어요.”

(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는 물었습니다.

예를 들면, 주말을 같이 보내자고 누군가 전화해 주길 바라면서도, 막상 전화가 오면 전화기를 자동 응답으로 돌려놓거나 바쁘다고 말해 버리는 거예요. 그들에게 내가 얼마나 오로운지 알리고 싶지 않았어요., 나를 불러 낼 기회를 전혀 주지 않은 거요. 또 휴가가 생겨도 일부러 아무 계획도 잡지 않았어요. 그리고는 아무도 내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느끼며 외롭게 지냈어요.”

그녀가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상실을 치유하기 위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본래의 상실이 일어난 상황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결국 질리언은 치유되고 있습니다. 그녀는 이제 자신을 돌볼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는 걸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48세의 성인 여성이지, 더 이상 고아원에 버려진 어린 소녀가 아니에요. 어린이들은 피해자가 될 수 있지만 난 이제 어린애가 아니에요. 내가 원하는 일을 해줄 사람은 이제 나 자신이에요.”

왜 당신은 자신을 학대하는 사람들과 계속 만나게 되는 걸까요? 그것은 세상이 당신의 상실을 치유해 줄 사람들과 상황들을 당신에게 지속적으로 보내 주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당신은 치유될 것입니다. 치유는 이미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가 지난 상실을 칭함으로써 얻는 배움은, 새로운 상실을 피해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상실을 겪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그것은 결국 찾아옵니다.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지내면 상실을 경험하지 않을 것이라 믿지만 그것 자체가 하나의 상실입니다.

갈등을 겪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둘 다 아이를 갖고 싶어 했지만 여자가 계속 아이 갖는 것을 미루었습니다. 알고 보니, 여자의 부모와 조부모가 모두 암으로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그녀는 아이를 갖게 되면 자신이 아이들을 잃거나, 아이들이 그녀를 잃게 될까 봐 두려웠습니다. 앞에서 상실의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미래의 일은 아무도 알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상실을 막을 수도 없고, 상실이 없는 상황을 보장할 수도 없습니다. 이 여성은 아이를 입양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암이 발병하는 원인이 유전적인 것이라면 아이를 입양하면 암에 걸릴 확률이 낮아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 아이들의 유전자에 또 다른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이들이 교통사고로 죽는 것까지 어떻게 막겠습니까?

그녀 자신을 위해서는 암을 예방하는 생활 습관을 기를 수가 있습니다. 좋은 음식을 먹고, 운동을 하고, 자주 정기 검진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진이나 사고, 강도를 당해 죽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상실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녀는 자신이 두려워하는 모든 일들이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며, 필연적인 것은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두려운 일들로 가득한 불완전한 세상에서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후에야 그녀는 아이를 갖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런 상황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상실이거나 또 하나의 예정된 상실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 이상의 역할을 합니다. 그것은 우리 안으로부터 상실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을 이끌어 냅니다. 그것은 옛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필연적인 방문입니다. 온전한 자신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입니다.

상실은 종종 어른이 되는 입문식입니다. 상실은 우리를 진정한 남성, 여성, 친구, 진정한 남편과 아내로 만들어 줍니다. 상실은 불길을 헤치고 삶의 다른 편으로 갈 수 있는 통과의례와 같습니다.

 

아직 어린 나이였을 때, 병원에서 퇴원하시던 어머니가 그 자리에서 다시 쓰러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데이비드 케슬러)는 너무나 무서웠고 어머니에게 다시 입원하라고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나의 겁먹은 얼굴을 내려다보며 말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쓰러지게 마련이란다. 그리곤 다시 일어서지. 그게 삶이야.”

상실은 여러 면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잃는 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균형이든, 품위든 모든 상실에는 닮은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불길을 뚫고 지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그 불길 속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이 탄생하며, 흙 속에 묻혀 있던 다이아몬드가 밖으로 나와 빛을 발하는 것처럼 우리 자신도 변화합니다. 사회가 상실을 경험하듯, 가정과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실을 둘러싸고 가정은 혼란을 겪습니다. 그 구성원들이 헤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상실을 충분히 겪고 나면 변화하고 재결합하게 됩니다.

상실을 치유하는 데는 여러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마음의 준비가 되면 먼저 상실을 느끼고 그 사실 자체를 인정해야 합니다. 상실을 부정하는 시간을 갖되, 자신이 느끼는 것이 정상적인 감정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고통을 겪는 것만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때가 되면 그것을 이해할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당신은 상실을 가져다준 이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죽음과 맞서 싸우는 사람들을 관찰하다 보면 그들의 행동에서 놀라운 상징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처음엔 마치, “나는 한 때 이곳에 존재했었다.”고 말하려는 듯이 열심히 자신의 사진을 찍습니다. 그러다가 병세가 차츰 악화되고 감정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면 더 이상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사진조차도 영원하지 않다는 걸 깨달은 것입니다. 기껏해야 그것들은 여러 세대를 거쳐 자신들이 누군지도 모르는 후손들에게 전해질 것입니다. 그들은 알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이라는 것을, 상실 너머에 존재하는 추월적인 부분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결코 사라지지 않는 자기 자신의 진정한 부분, 사랑하는 이들의 진정한 부분을 당신은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나아가 정말로 소중한 것은 영원히 간직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당신이 느낀 사랑과 당신이 준 사랑은 결코 사라질 수 없다는 사실을.

어느 늦은 저녁, 나는 암 병동에서 환자를 만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자신이 돌보던 환자가 죽어서 큰 충격에 휩싸인 간호사와 얘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하소연했습니다.

이번 주에만 벌써 여섯 명이 죽었어요. 더 이상은 못 참겠어요. 사람들이 죽고, 죽고, 또 죽어가는 걸 보고 있을 수가 없어요. 끝이 보일 것 같지가 않아요.”

나는 이 마음 여린 간호사에게 잠깐 밖에 나가서 산책을 하자고 권했습니다. 그녀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공중다리를 건너 옆 건물로 갔습니다. 그리고 모퉁이를 돌아 산부인과 병동으로 들어가서는, 신생아실이 들여다보이는 유리 칸막이 앞으로 그녀를 데려갔습니다. 그 앞에 서서 나는 마치 한 번도 보지 못한 광경을 보는 듯 새 생명들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을 지켜보았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힘들 때마다 자주 여기 들러서 이 세상에 단지 죽음만이 있는 건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얘기해 주세요.”

가장 고통스런 상실을 겪는 와중에도 삶은 계속됩니다. 온갖 상실과 고통이 당신에게 밀어닥치더라도 새로운 생명의 기운이 주위를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고통의 한가운데 있을 때는 상실감이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지만, 삶이라는 수레바퀴는 계속 굴러갑니다. 그 간호사는 자신의 직업을 단지 죽음의 측면에서만 바라보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쩌면 오래전에 이곳과 비슷한 신생아실에서 태어났을지도 모를 사람들, 그들이 자신의 삶을 완성하도록 돕는 것이 그녀의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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