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사랑 없이 여행하지 마라
삶의 이 여행을 하는 동안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당신의 임무는 사랑을 찾는 일이 아니다. 당신의 마음속에 스스로 만들어 놓은 사랑의 방해물을 찾아내는 일이다. 누군가 옆에 있다는 것은 사랑에서, 삶에서,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이다.
사랑 정의 내리기조차 매우 힘든 이것은 삶에서 유일하게 진실하고 오래 남는 경험입니다. 그것은 두려움의 반대말이고, 관계의 본질이며, 행복의 근원입니다. 또한 우리 자신을 이루고 있는 가장 깊은 부분이고, 우리 안에 살면서 우리를 연결해주는 에너지입니다. 사랑은 지식, 학벌, 권력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사랑은 모든 행위 너머에 있습니다. 또한 삶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 유일한 선물입니다. 결국 그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환상과 꿈, 공허함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사랑은 진실의 근원입니다.
사랑이 가진 모든 힘과 위대함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어렵습니다. 평생 사랑을 찾아다니는 이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얻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고, 사랑을 얻으면 그것이 오래가지 않을까 봐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에 갖게 된 그림입니다. 가장 흔한 그림은 갑자기 누군가 특별한 사람을 만나서 완벽하다고 느끼며, 모든 것이 멋져 보이고, 그 후로 영원히 행복하게 산다는 낭만적인 이상형입니다. 그러다가 현실의 삶에서 그렇게 낭만적이지 못한 상황들에 맞닥뜨릴 때, 그리고 대부분의 사랑이 조건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크게 상처받습니다. 심지어 가족과 친구 간의 사랑도 각자의 기대와 요구에 좌우되고 있습니다. 기대와 요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현실의 사소한 갈등은 필연적으로 악몽을 만드는 씨앗이 되고, 우리는 결국 사랑 없는 관계 속에 놓인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낭만적인 환상에서 깨어나 어릴 적에 꿈꾸던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냉정한 세상과 마주합니다. 이제 어른의 시선으로 사랑을 보면서, 분명하고 현실적이고 씁쓸하게 사랑을 바라봅니다.
다행히도 진실한 사랑은 틀림없이 존재하고, 우리가 꿈꾸는 사랑도 불가능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분명 존재하지만, 우리가 선택한 방법으로는 그것에 다가갈 수 없습니다. 진실한 사랑은 완벽한 동반자나 가장 좋은 친구를 찾으려는 꿈속에서는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무조건적인 사랑, 곧 우리가 무엇을 하든 하지 않든 상관없이 우리 자신에게 바쳐지는 사랑을 원합니다. 만일 운이 아주 좋다면 인생에서 몇 분 동안은 그런 사랑을 경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 삶에서 경험하는 사랑은 대부분 매우 조건적입니다. 우리는 다른 돈을 많이 벌기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해주기 때문에, 돈을 많이 벌기 때문에, 재미가 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잘하기 때문에, 살림을 잘하기 때문에 사랑을 받습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치 우리는 언제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구실을 찾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강연이 끝나자 단정한 차림의 여성이 나(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를 찾아왔습니다. 단정한 차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 것입니다. 미용실에서 갓 나온 듯 곱게 정돈된 머리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옷차림이 그것입니다.
그녀는 말했습니다.
“작년에 당신의 워크숍에 참석했었어요. 집에 돌아오는데 열여덟 살 된 아들 생각에 머리가 복잡했어요. 매일 저녁 집에 돌아오면 아들은 여자 친구한테서 얻은 꼴사나운 색 바랜 티셔츠를 입고 식탁 앞에 앉아 있었어요. 아들이 그 옷을 입고 있는 걸 이웃 사람들이 보고 자식 옷도 제대로 못 입힌다고 흉볼까 봐 걱정이 되었어요. 아이는 늘 패거리들과 함께 거기 앉아 있었거든요.”
‘패거리들’이라고 말할 때 그녀의 얼굴엔 혐오감이 어렸습니다. ‘매일 저녁 집에 돌아오면 난 옷차림부터 시작해 아이를 야단쳤어요. 이것저것 꼬투리를 잡아........우리 관계는 늘 그런 식이었어요. 그날 나는 당신의 워크숍에서 해본 삶과 작별하는 연습을 떠올렸어요. 그리고 삶이란 나에게 잠깐 동안 맡겨진 선물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영원히 내 곁에 두지는 못하겠지요. 나는 삶에 대해 여러 가지 가정들을 떠올려 보았어요. ‘만일 내가 내일 당장 죽는다면, 내 삶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들까?’ 아들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삶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문득 이런 가정을 해봤어요. ‘만일 내일 아들이 죽는다면, 난 어떤 기분일까?’
그러자 우리 둘의 관계에 대해 엄청난 상실감과 후회의 감정을 갖게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음속으로 계속 이렇게 끔찍한 시나리오를 쓰면서 그 아이의 장례식에 대해서도 상상해 봤어요. 나는 아들에게 정장을 입혀서 묻지는 않을 거예요. 정장을 입는 타입의 아이가 아니거든요. 그 애가 그토록 좋아하던 지저분한 셔츠를 입혀서 묻을 거예요. 그렇게 그 애의 삶을 기리게 될 거예요.
그러자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들이 죽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그 애를 있는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겠구나.‘ 그 애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런 선물을 줄 생각이 없었던 거예요.
갑자기 그 티셔츠가 아들에게는 큰 의미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유야 어찌 됐든 그건 그 애가 좋아하는 옷이니까요.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가서 아들에게 마음대로 티셔츠를 입어도 좋다고 말했어요. 아들을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그 애를 사랑하는 기분은 정말
행복했어요. 이제 나는 더 이상 아들을 완벽하게 만들려고 하지 않아요. 지금 이대로의 ㅁ습도 사랑스럽다는 걸 알았거든요.”
서로에게 걸고 있는 기대를 버려야 평화롭고 행복한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대개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엄격한 조건을 내세웁니다. 우리는 거의 조건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조건적인 사랑에 익숙해졌기에,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매우 까다로운 과정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서로에게서 완전히 무조건적인 사랑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런 무조건적인 사랑을 인생에서 단 몇 분만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연장할 수 있는 방법은 있습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경우 중 하나는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 부모에게 주는 사랑입니다. 그들은 부모의 돈이나 지위에는 개의치 않습니다. 그저 부모로서의 우리를 사랑할 뿐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의 웃음이나 좋은 성적, 말을 잘 듣는 것에 대해 보상을 해줌으로써 결국 사랑에 조건을 다는 법을 가르칩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우리를 사랑하는 방식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조금만 더 많이, 조금만 더 오랬동안 무조건적인 사랑을 준다면 지금과는 아주 다른 세상이 올 것입니다.
사랑에 대한 조건은 관계를 무겁게 짓누릅니다. 그런 조건들에서 벗어난다면 생각지도 못한 다양한 방식으로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은 그 사랑이 되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감정이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받는 사랑을 일일이 계산한다면 결코 사랑받는다고 느끼지 못할 것이며, 언제나 손해 본다는 기분이 들 것입니다. 정말로 사랑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사랑을 재는 행위 자체가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사랑받고 있지 않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당신이 사랑을 움켜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다툴 때면 당신은상대방이 잘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와가 낫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 당신은 스스로 마음을 닫고 사랑을 거두었기 때문에 당황한 것입니다. 상대방이 당신의 마음에 들 때까지 자신의 사랑을 움켜쥐고 있는 것이 해결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가 또는 그녀가 당신의 마음에 들면 어떻고, 또 안 들면 어떻습니까? 어머니, 친구, 형제들이 변하지 않는다고 그들을 다시는 사랑하지 않을 건가요? 그들이 무엇을 하든 그들을 사랑한다면 당신은 그 변화를 보게 될 것이고, 갇혀 있던 우주의 모든 힘이 해방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상대방의 가슴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비행기 승무원이었던 여성이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나는 동료 승무원 중 한 명과 친하게 지냈어요. 어느 날 그녀가 생각나서 전화를 걸었죠. 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보고 싶었거든요. 나는 그녀의 자동 응답기에 전화해 달라고 메시지를 남겼어요.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그녀로부터 연락이 없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어요. 남편은 그냥 다시 전화를 하거나 하고 싶은 말을 자동 응답기에 남기라고 했어요. 난 그녀가 너무 바빠서 전화할 시간이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점점 더 화가 났어요. 결국 내가 사랑을 거두고 그녀에게 마음을 닫아 버렸어요. 그런데 다음날 그녀가 탄 비행기가 추락했어요. 내 사랑을 그냥 주지 않은 것이 너무도 후회스러웠어요. 나는 사랑이 게임이며 규칙을 따라야 한다고 행각하고 있었던 거예요.”
나(데이비드 케슬러)는 자신에게 그토록 모질게 굴 필요는 없다고, 그 친구도 그녀와 친구로 지내는 동안 자신이 사랑받고 있었음을 알았을 거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나는 그 여성이 이제 그만 자신을 용서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녀는 친구에게 한 것과 똑같은 행동을 자기 자신에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어느 한 순간, 한 가지 행동만을 놓고 사랑을 판단하고는 마음을 닫아 버렸습니다.
우리는 사소한 일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더욱 큰 그림 안에서 사랑을 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전화 한 통 같은 사소한 것이 사랑을 진정한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 여성의 이야기는 규칙, 조건, 평가 같은 것들이 어떤 식으로 사랑을 방해하는지 보여주는 예입니다. 이것은 무척 힘든 배움입니다. 마음을 다시 열기 위해서는 사물을 다른 각도에서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을 닫고 편협해지는 것은 다른 사람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왜 전화를 걸지 않는지, 왜 그렇게 큰 목소리로 말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반면 자신이 받은 상처와 고통,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오해를 받았는가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습니다. 사실 우리는 웃음과 이해, 사랑을 무조건적으로 주지 않음으로써 서로를 배신하는 것입니다. 신이 우리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을 혼자 움켜쥐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사랑을 움켜쥐는 것은 상대방이 우리에게 보이는 태도보다 훨씬 더 부당한 것입니다.
어느 늦은 밤, 한 여성이 자신의 삶과 사랑에 대해 말했습니다.
“나는 남자들을 믿지 않는 엄마 밑에서 자랐어요. 엄마에게 남자들이란 그저 경제적인 안정을 위해 이용해야 할 존재에 불과했어요. 엄마의 딸답게 나 역시 삶에 사랑이라는 것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어요. 굳이 그런 귀찮은 일을 말들 필요가 없잖아요? 내가 사랑하고 믿는 유일한 남자는 오빠뿐이었어요. 오빠는 내 전부였어요. 오빠이면서 친구였고 보호자였죠. 오빠는 훌륭한 여성과
결혼했어요. 내가 20대 후반이었을 때 오빠는 몹시 아팠어요. 의사들도 원인을 알아내지 못했어요. 병원에 함께 앉아 있으면서, 오빠도 나도 오빠가 곧 죽으리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오빠가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고 말했어요. 오빠는 내게 삶이 자신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 이야기했어요. 설령 그 순간이 삶의 끝이라 해도 어느 것과도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요. 나만 빼고요. 오빠는 이렇게 말했어요.
‘난 네가 자신의 삶과 사랑을 놓치게 될까 봐 걱정이야, 사랑만큼은 절대 놓치지 마. 삶이라는 여행을 하는 동안 사람은 누구나 사랑을 해야만 해. 누구를, 언제, 얼마나 오랫동안 사랑하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내가 사랑한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지 그걸 놓치지 마. 삶이라는 이 여행을 사랑 없이는 하지 마.’ 오빠의 마지막 충고 덕분에 나는 전정한 삶을 찾게 되었어요. 계속 남자들을 믿지 않을 수도 있었고, 진정한 여자도 진정한 사람도 되지 못할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나는 스스로의 불신과 두려움에 맞서 싸웠어요. 나는 오빠가 바라던 대로 살려고 노력했어요. 오빠의 말이 맞았어요. 이 시간과 이 삶을 갖고서도 사랑하지 않는다면 생을 충분히 산 것이 아니지요.”
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대해 더 정확히 말하면 ‘자기 보호’에 대해 이 여성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찍부터 남자를, 여자를, 결혼을, 부모를, 배우자의 부모를, 동료를, 직장 상사를, 심지어는 삶 그 자체를 믿지 않도록 배워왔습니다. 그것도 우리를 가장 아끼는 사람들로부터 계속 주의를 받아왔습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가슴 깊은 곳에서 우리 자신이 충분히 살고 충분히 사랑하도록, 삶에서 위대한 모험을 하도록 운명 지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 느낌이 깊은 곳에 파묻혀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거기에 있습니다. 어떤 행동이나 사건, 아니면 누군가의 말 한 마디를 계기로 빛을 보기만을 기다리면서.
몇 해 전 나(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면서도 더 열정적으로 살고 사랑한 한 소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홉 살 인생 중 여섯 해 동안을 암과 싸웠습니다. 나는 병원에서 그를 한 번 보고는 그가 그 싸움을 끝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죽음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가 퇴원하는 날 나는 작별 인사를 하러 병원에 둘렀습니다. 그는 뜻밖에도 나에게 집에 같이 가자고 청했습니다. 내가 시계를 훔쳐보며 망설이자 그는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집앞 도로에 차를 세웠습니다.
소년은 아버지에게 3년 동안 버려 둔 채 차고에 세워져 있던 자신의 자전거를 꺼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의 가장 큰 소원을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그때가지는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자전거에 보조바퀴를 달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어린 소년이 그 말을 하기까지는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또래들이 앞바퀴를 들고 뒷바퀴만으로 달리거나 자전거로 온갖 재주를 부릴 때, 자전거에 보조 바퀴를 달고 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이에겐 창피한 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눈물을 글썽이며 아이의 부탁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소년은 나를 향해 말했습니다. ‘아주머니는 엄마를 붙잡아 주세요’
엄마들이란 다 그렇습니다. 항상 자식을 보호하고 싶어합니다. 엄마는 소년이 동네를 한 바퀴 돌 동안 계속 아이를 잡아 주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이의 위대한 승리를 빼앗는 일이고, 엄마도 그것을 이해했습니다. 그녀가 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은, 아이가 마지막 소원을 이루는 동안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를 보호하고 싶은 충동을 잡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동안 기다렸습니다. 시간이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습니다. 모퉁이에서 아이가 간신히 균형을 잡으며 나타났습니다. 끔찍할 정도로 파리하고 창백해서 아무도 그가 자전거를 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밝게 미소 지으며 우리에게 달려왔습니다. 잠시 후 아이의 아버지가 보조 바퀴를 떼어 냈고, 우리는 자전거와 아이를 위층으로 옮겼습니다. 아이는 말했습니다.
“동생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제 방으로 오라고 해 주시겠어요?”
2주 뒤 소년의 1학년짜리 동생은 우리에게 형으로부터 생일 선물로 자전거를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소년은 동생의 생일에 자신이 곁에 있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나 봅니다. 삶의 시간도 기력도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이 용감한 소년은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동생에게 자전거를 물려줌으로써 자신의 마지막 꿈을 이룬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삶, 사랑, 모험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우리는 그것들을 시도해서는 안 되는 이유들로만 무장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들은 언뜻 우리를 보호해 주는 듯하지만, 사실은 우리를 가두고 삶에 거리를 두게 합니다.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짧습니다. 만일 타야 할 자전거와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있다면, 바로 지금이 그것을 할 때입니다.
사랑에 대한 배움을 생각하면서, 나 자신과 내 삶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은 나에겐 여전히 배워야 할 것이 남아 있음을 의미합니다. 내가 연구 해온 많은 사람들처럼 나 또한 스스로를 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합니다. 여전히 스스로를 촌사람 같다고 생각하는 나는 ‘자기애’라는 말을 들을 때면 이기적이고 자기도취에 빠진 여자가 떠오릅니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나에게는 그 표현이 그리 친숙하게 다가오지 못하나 봅니다.
나는 수십 년째 계속 해오고 있는 연구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삶에서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랑을 받는다면 스스로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애와 상관없이 살아갑니다. 나는 수천 명의 삶과 죽음을 보면서 그것을 실감했고, 이제는 나 자신에게서도 그것을 느낍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아직 거기까지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요? 이것은 가장 큰 도전이며,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대부분은 어렸을 때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고 배웠습니다. 자신에 대한 사랑은 자기도취나 이기주의와 종종 혼동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사랑이라는 것은 자신에게 잘 맞는 짝을 만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사랑을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경험한 것은 대개 ‘보상’에 불과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공부 잘하고, 할머니께 웃음을 보이고, 손을 자주 씻으면 ‘사랑받을’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그것이 조건적인 가짜 사랑이라는 것을 알지 못할 채, 사랑받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사랑이 그토록 많은 것들을 인정받아야 하는 것이라면, 대체 어떻게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자신에 대해 우리는 자신에 대해 너그러운 마음을 갖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당신은 자신의 영혼에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하고 있습니까? 자신을 기분 좋게 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자신을 사랑할 때는 스스로를 미소 짓게 만드는 일들로 삶을 채우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영혼을 노래하게 하는 일입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좋은 일’ 이라고 배운 것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자기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일 뿐입니다. 일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 ‘생산적으로’ 하루를 보내는 것보다는 늦잠을 자는 쪽이 영혼에 더 많은 영양을 공급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영혼에 더 많은 영양을 공급할수록 우리 주위 모든 곳에 있는 사랑이 흘러들어올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어리석다고 생각하며 이미 저지른 행동을 후회하거나 자신을 학대합니다. 만일 다른 사람이 실수를 했다면 아마도 당신은 “걱정 마, 누구나 다 그러는데 뭐,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냐.” 하고 위로의 말을 건넬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똑같은 실수를 범하면 스스로를 쓸모없고 실패한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우리는 오히려 남에게 더 관대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하듯이 스스로에게도 친절하고 너그러워지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캐롤라인은 키가 크고 매력적인 40대 후반의 여자로 자신의 영혼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름다운 검은 머리와 따뜻한 미소를 가졌습니다. 그녀와 나(데이비드 케슬러)는 함께 연구 과제를 진행하다가 알게 되었는데 지금까지 내가만난 사람 가운데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또한 그녀는 똑똑하고 친절하며 유머 감각이 있는 치과 의사와 2년째 좋은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몇 달 남지 않은 결혼식 준비에 한창이었고, 아이를 입양할 계획도 있었습니다.
캐롤라인과 함께 다니는 것은 매우 기분 좋은 일이었습니다. 그녀에게 낯선 사람이란 없었습니다. 회사의 안내 직원이든 식당 종업원이든, 영화관에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든, 그녀는 누구에게나 다정하고 친근하게 대했습니다. 어느 날 나는 저녁 식사를 하면서 그녀에게 연애 운이 좋은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웃으면서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6년 전 그녀는 가슴에서 혹울 발견했습니다. 의사는 조직 검사를 해보더니 뭔가 이상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혹이 암인지, 만일 암이라면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알려면 사흘 정도 가리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난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어요. 여기서 모든 게 끝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모든 불행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어요. 그 사흘은 내 삶에서 가장 긴 시간이었어요. 결국 암이 아니라는 결과가 나왔지만, 나는 힘들게 보낸 그 사흘을 아무 의미 없이 잊지는 말자고 다짐했어요. 그때까지 살아온 것과 똑같이 살지는 않겠다고요.
마침 크리스마스가 다가왔고 예년처럼 이런저런 파티에 초대를 받았어요. 크리스마스 때면 난 사귀는 사람 없이 혼자인 경우가 많았고, 사랑을 찾기 위해 최대한 많은 파티에 참석하곤 했어요. 나를 사랑해 줄 사람, 내가 스스로에게 주지 못하는 모든 사랑을 나에게 줄 사람을 원했어요. 파티에 가서 혹시 그런 사람이 있나 한번 살펴본 뒤, 없다고 생각되면 그대로 나와서 다른 파티로 갔어요. 이렇게 파티마다 뛰어다니고 나서는, 외출하기 전보다 더 비참하고 외로운 기분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어요.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어요.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했어요. 나 자신에게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전처럼 사랑을 찾아 방황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어요. 파티에 내가 찾는 완벽한 남자가 없다 해도 다른 사람들이 있겠지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좋은 사람들이요. 그냥 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즐겁게 지내기로 했어요. 마음을 열고, 있는 그대로의 사람들을 좋아하고 사랑하기로 했어요. 그게 누구든 상관없이.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파티가 끝나고 나서도 외롭거나 비참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사람들과 진심으로 이야기를 나눴거든요. 그날 밤 내 얼굴의 미소와 웃음소리는 진짜였어요. 내가 느낀 사랑도 진실한 감정이었고, 정말 멋진 시간이었어요. 나는 사람들로부터 더 많이 사랑받고 있다고 느꼈고, 놀랍게도 나 자신을 훨씬 더 좋아하게 되었어요.
그 후로도 계속 그런 마음 자세를 잃지 않았어요. 파티에서뿐만 아니라 직장에서도, 가게에서도,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을 베풀수록 더 많은 사랑을 느끼게 되었어요. 더 많은 사랑을 느낄수록 나 자신을 사랑하기도 쉬웠고요. 친구들과도 전보다 더 가까워졌고, 멋진 사람들도 새로 만났어요. 나는 행복한 사람, 사람들이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되었어요. 더 이상 과거의 비참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나는 날마다 사랑을 경험하게 되었어요.”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주위에 언제나 있는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모든 장벽을 없애는 것입니다. 자기 주위에 세워놓은 장벽들을 감지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장벽들은 엄연히 그곳에 있고, 우리의 모든 관계에 개입합니다.
신 앞에 서게 되는 날 우리는 이런 질문을 받게 될 것입니다.
“너는 너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고, 또 받았느냐?”
다른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을 사랑함으로써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신은 우리에게 사랑하고 사랑받을 무한한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 기회들은 주위 모든 곳에 널려있고, 우리는 손을 뻗어 잡기만 하면 됩니다.
서른여덟 살의 한 남자가 전립선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는 홀로 치료 과정을 홀로 견뎌 내면서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의 얼굴은 외로운 현실에 대한 슬픔으로 가득했습니다. 나(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는 뻔한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은 똑똑하고 매력적이고 친절한 사람이며, 또 지금 함께할 사람을 원하는 것 같군요. 그런데 왜 아내도, 여자 친구도 없죠?”
그가 말했습니다.
“난 사랑에 있어선 별로 운이 없었어요. 나는 여자들을 사랑했고 늘 행복하게 해주려고 노력했어요. 사랑을 할 때 그들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내 모든 에너지를 쏟아 최선을 다했어요. 하지만 결국엔 늘 그들을 실망시켰어요. 그들을 기쁘게 해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그 관계가 끝나 있었어요. 하지만 그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나는 언제든 다시 사랑을 시작할 수 있었고, 항상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있었으니까요. 이제 난 인생의 반을 살았는데 삶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빨리 끝날 것 같군요. 이제야 겨우 내가 사랑을 해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어요. 하지만 어쨌든 내가 여자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면 그녀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겠죠. 그냥 떠나 버리는 게 더 쉬운 일이에요.”
나는 그가 분명 생각해 보지 않았을 법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사랑이 여자를 행복하게 해주는 게 아니라면요? 만일 사랑이 그냥 옆에 있어 주는 것이라면요? 우리는 누군가를 항상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어요. 만일 당신의 기준이 틀렸고, 그냥 거기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면요?”
삶에는 굴곡이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문제를 모두 해결해 줄 수는 없지만, 그냥 옆에 있어 줄 수는 있습니다. 결국 오랜 시간을 두교 본다면 그것이 가장 강한 사랑의 표현이 아닐까요?
나는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지금처럼 전립선암 진단을 받고 병원에 누워 있다면, 어떤 여자도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함께할 누군가가 여기 있다면, 그게 당신에게는 훨씬 더 큰 의미가 아닐까요?”
강연을 끝맺을 때면 나(데이비드 케슬러)는 종종 시애틀 근처에 사는 한 젊은 어머니와 그녀의 딸 보니 이야기를 청중에게 들려주곤 합니다. 이 이야기는 낯선 사람의 위로도 힘이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일을 하러 나가면서 여섯 살 난 딸 보니를 이웃집에 맡겼습니다. 오후에 보니가 이웃집 앞마당에서 놀고 있는데, 모퉁이에서 차 한 대가 나타나 갑자기 질주해 오더니 잔디 위에서 놀고 있던 아이를 덮쳤습니다. 아이는 도로 한가운데 까지 튕겨 나갔습니다. 곧 바로 경찰이 출동했습니다. 그중 한 경찰이 소녀에게로 달려갔으나 아이는 이미 심하게 다친 상태였습니다. 아이를 구할 수 있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던 경찰은 아이를 안아 올렸습니다. 그러고는 두 팔로 꼭 껴안았습니다. 응급요원들이 도착했을 때는 아이는 숨을 쉬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곧 산소 호흡기를 가동하고 보니를 긴급히 병원으로 호송했습니다. 응급실 의료진들은 이이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한 시간 넘게 분투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한 간호사가 직장에 있는 보니의 엄마와 간신히 연락이 닿았습니다. 간호사는 가엾은 엄마에게 그녀가 그날 아침 사랑스럽게 키스해 주던 어린 딸이 방금 숨을 거두었다는 말을 전해야만 했습니다. 병원에서는 그녀를 데리러 누군가를 보내겠다고 했으나, 그녀는 먼 거리를 스스로 운전해서 오겠다고 고집했습니다. 마침내 아이의 엄마가 병원으로 뛰어 들어왔습니다. 그녀는 평정을 유지하려고 애썼지만, 숨을 거둔 채 누워 있는 어린 딸을 보자 곧 무너져 버렸습니다. 의사들이 그녀 곁에 앉아 딸의 상태를 설명하고 딸을 살리기 위해 자신들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말했습니다. 하지만 엄마에게는 위안이 되지 못했습니다. 간호사들도 소녀를 살리기 위해 소녀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달랠 수 없는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습니다. 망연자실해 있던 엄마는 잠시 후 친척들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응급실을 가로질러 공중전화 부스로 갔습니다. 그러자 거의 네 시간 동안 그곳에 묵묵히 앉아 있던 경찰관이 일어섰습니다. 그는 현장에 맨 먼저 도착해서 어린 보니를 품에 안아준 바로 그 경찰관이었습니다. 그는 소녀의 엄마에게 다가가서 어떤 상황이었는지 이야기 하고,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이이가 그때 혼자가 아니었다는 것만 알아주십시오.”
엄마는 그 말을 듣고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그녀는 딸이 삶의 마지막 순간에, 비록 낯선 사람으로부터라도 사랑을 느꼈다는 사실을 알고는 마침내 위안을 얻었습니다.
누군가 옆에 있다는 것은 사랑에서, 삶에서,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몇 해 전 나(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한 병원에서 흥미로운 현상을 목격했습니다. 죽음을 앞둔 환자들이 얼굴이 몰라보게 밝아진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나 때문이 아니라 병원에서 일하는 청소부 아주머니 때문이었습니다. 그녀가 중환자실에 왔다 갈 때마다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나는 그 비결을 알 수만 있다면 백만 달러도 아깝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어느 날 복도에서 마주친 그녀에게 나는 다소 무뚝뚝하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내 환자들에게 어떻게 하는 거요?”
그녀는 방어적으로 대답했습니다.
“그냥 병실을 청소할 뿐이에요.”
그녀가 어떻게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지 알고 싶어서 나는 눈에 안 띄게 그녀를 쫓아다녔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별달리 특별한 일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뒤를 밟은 지 2,3주가 지났을 때, 그녀는 나를 붙잡아 간호사실 뒤켠에 있는 방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몇 해 전 겨울에 자신의 여섯 아이중 하나가 몹시 아팠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녀는 한밤중에 세 살 난 아들과 함께 응급실에 가서, 아들을 무릎에 앉혀 놓고 몇 시간 동안이나 의사가 오기만을 가다렸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고, 그녀는 품 안에서 어린 아들이 폐렴으로 죽어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녀는 이 모든 고통과 아픔을 어떤 증오나 원한, 분노도 담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 이야기 했습니다.
나는 물었습니다.
“왜 이 이야기를 하는 거죠? 그것이 죽음을 앞둔 환자들과 무슨 관계가 있죠?”
그녀는 대답했습니다.
“죽음은 내게 더 이상 낯설지 않아요.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 같아요.
가끔 중환자실에 들어가 보면, 환자들은 몹시 겁에 질려 있어요. 그러면 나도 모르게 다가가서 그들을 쓰다듬게 돼요. 나는 그들에게, 나도 죽음을 보았는데 죽음이 다가와도 무섭지 않을 거라고 말해 줍니다. 그리고 그냥 함께 있어 줍니다. 도망치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아요. 나는 다른 사람들 곁에 있어 주려고 노력해요. 그것이 사랑이지요.”
심리학이나 의학을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이 여성은 삶의 가장 큰 비밀 하나를 알고 있었습니다. 사랑은 바로 곁에 있어 주는 것이며 돌봐주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때로 상황 때문에 같이 있어줄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우리는 언제나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러 해 전 나(데이비드 케슬러)는 뉴올리언스의 의사 간호사 협회에서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곳 틀레인 대학에서 사회복지사들을 위해 강의를 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직업적으로 보람 있는 경험이 될 테지만, 분명 즐거운 여행은 아니었습니다. 비행기가 착륙하자 온갖 감정이 북받쳐 올랐습니다. 그곳은 내가 어머니의 생전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장소였습니다. 나는 모든 일정이 끝나면 어머니가 마지막 숨을 거두신 병원에 찾아가 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동네 병원에서는 어머니의 병을 고칠 수가 없어서, 우리는 집에서 두 시간 떨어진 곳에 있는 더 큰 병원으로 어머니를 모셨습니다. 그때 나는 열세 살이었습니다. 병원 규칙에 의하면 최소한 열네 살 이상이어야 면회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잠깐 숨어 들어가서 어머니와 애기하고, 만지고, 함께 있을 기회를 노리며 몇 시간 동안이나 중환자실 밖에 앉아 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와 내가 묵고 있던 병원 바로 옆의 호텔에 경찰이 들이닥쳐 투숙객들 모두 방을 비워 줘야 했습니다. 아버지와 내가 어머니를 보러 가기 위해 호텔 로비에 내려와 있을 때, 경찰관들이 뛰어 들어와 우리를 밀어내며 대피하라고 외쳤습니다. 건물 밖으로 뛰어나가면서 우리는 총소리를 들었습니다. 누군가가 호텔 옥상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총을 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와 나는 어머니와 함께 있기 위해 바로 병원으로 가고 싶었지만, 관계자들은 병원 옆에 있는 건물로 들어가라며 우리를 막았습니다. 결국 경찰이 어느 정도 상황을 정리한 뒤에야 우리는 병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그 저격수는 후에 경찰에 의해 사살되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겪는 동안에도, 열세 살의 나는 어머니와 짧으나마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작별 인사를 할 수 있게 되기만을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로부터 26년이 지난 지금, 나는 병원을 바라다보면서 호텔 앞에 있는 작은 풀밭을 거닐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날의 모든 흥분과 혼란을 떠올려 봅니다. 26년 전 어머니가 생의 마지막 2주를 보낸 중환자실 문 밖에 서서, 어머니를 보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가 들여다보았던 바로 그 창으로 안을 들여다봅니다.
간호사 한 명이 다가오더니 내게 누구를 찾아왔느냐고 묻습니다. 나는 아니라고 대답하면서, 정작 그때는 간호사들이 나를 들여보내주지 않았던 아이러니에 대해 생각합니다.
“원하시면 들어가셔도 돼요.”
“아닙니다. 내가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이제 이곳에 없거든요. 어쨌든 감사합니다.”
그 어린 시절로부터 긴 세월이 흐르고 많은 배움을 얻은 지금, 나는 어머니가 내 가슴과 마음속에, 그리고 이 이야기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압니다. 또한 어머니가 다른 곳에, 다른 어떤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나는 믿습니다. 더 이상 어머니를 보거나 만질 수 없지만 마음으로 느낄 수는 있습니다. 어머니의 마지막 나날들 동안, 비록 내 몸은 그 곁에 없었지만 마음만은 늘 어머니와 함께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있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의료진들이나 그저 친절한 행인들이 심지어 그 사람의 이름도 모르면서 곁을 지켜 주는 것은 사랑의 강력한 행위입니다. 청소부, 어머니, 친구,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소녀를 품에 안아 준 경찰관.........
사랑에 대한 배움은 모든 형태로, 모든 종류의 사람과 상황으로부터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지, 돈을 얼마나 버는지, 어떤 사람을 알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곁에 있어 줄 수 있고, 주위의 사랑에 마음을 열 수도 있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우리의 삶 속에, 모든 아름다운 경험 속에, 때로는 비극 속에 존재합니다. 사랑은 삶에 깊은 의미를 불어넣는 순수한 재료입니다. 사랑은 살아 있고 만질 수 있으며, 우리 안에서 숨 쉬고 있습니다. 사랑은 신과 신성함에 대한 경험입니다. 우리는 손을 뻗어 그것을 붙잡기만 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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