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
배움을 얻는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갑자기 더 행복해지거나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더 이해하고 자기 자신과 더 평화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도 당신이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려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당신만의 여행이다.
여러 해 전,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우리의 워크숍에 참가한 40대 초반의 여성이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었습니다.
“어느 금요일 오후, 나는 혼자서 차를 몰고 시내 외곡 쪽으로 달리고 있었습니다. 주말이라 고속도로로가 붐볐지만, 어서 빨리 교외로 나가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었습니다. 고속도로 중간쯤 갔을 때 앞서 달리던 치들이 갑자기 멈춰 섰습니다. 나도 차를 정지한 뒤, 백미러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내 뒤를 따라오던 차 한 대가 전혀 정지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그대로 달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차는 전속력으로 돌진해 왔습니다. 그 차의 운전자가 순간적으로 한눈을 팔았으며, 곧 내 차를 강하게 들이받으리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차의 속도, 그리고 내 차와 앞 차의 간격을 볼 때, 나는 아주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순간 나는 운전대를 움켜지고 있는 내 손을 내려다보게 되었습니다. 의식적으로 그렇게 꽉 잡았던 건 아닙니다. 나도 모르게 그런 것이었고, 그것이 내가 그때까지 살아온 방식이었습니다. 계속 이런 식으로 살고 싶지도 않았고, 이런 식으로 죽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양손을 옆으로 내려놓았습니다. 운전대를 놔버린 것입니다. 삶에, 그리고 죽음에 순순히 나 자신을 맡겼습니다. 뒤이어 엄청난 충격이 느껴졌습니다. 얼마 후, 사방이 고요해지고, 나는 눈을 떴습니다. 너무나 놀랍게도 나는 하나도 다치지 않고 멀쩡했습니다. 내 앞에 있던 차는 박살이 났고, 뒤 차 역시 완전히 부서진 상태였습니다. 내 차는 그 중간에서 마치 종잇장처럼 구겨져 있었습니다.
경찰은 내가 몸의 긴장을 푼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했습니다. 근육이 긴장하면 심한 부상을 입을 확률이 훨씬 커진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큰 선물을 받은 기분으로 그곳을 떠났습니다.
단지 다치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 이상의, 더 큰 의미를 지닌 경험이었습니다. 나는 그동안 내가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지 알게 되었고, 그것을 바꿀 기회를 얻었습니다. 지금까지 늘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살아왔지만, 이제는 손바닥 위에 부드러운 깃털이 놓인 것처럼 평화롭게 손을 편 채로도 삶을 살 수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나 자신을 가까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죽음의 문턱 가까이 가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이 여성 역시 한 가지 배움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배움, 곧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배움입니다. 인간 모두의 내면에는 자신이 되기를 갈망하는 어떤 존재가 있습니다. 그 존재에 가까이 다가갈 때, 우리는 그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인가 잘못되어 ‘진정한 나’에서 멀어져 갈 때도 그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인간은 삶 속에서 배움을 얻으려 하고 그 해답을 찾습니다. 두려움과 후회와 싸우고, 의미와 사랑과 용기를 추구하며, 상처와 상실,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를 찾고,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을 발견하려고 시도합니다. 사랑하는 이의 얼굴이나 종교, 신, 또는 그런 것들이 있다고 여기는 장소에서 해답을 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또한 많은 이들이 돈과 지위, 완벽한 직업 등에서 의미를 찾으려고도 합니다. 하지만 이내 그런 것들에서는 자신이 추구하는 의미를 발견할 수 없으며, 심지어는 그것들이 고통을 가져다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삶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지 못한 채 잘못된 길을 따르다 보면, 삶에 의미 따위는 없으며 행복은 그저 환상에 불과하다고 여기게 됩니다.
지식이나 진리의 추구, 또는 창조적인 일 속에서 의미를 찾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불행이나 죽음 앞에서 그것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의사로부터 암 판정을 받거나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을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과 싸우거나 지진과 해일 같은 재난을 당하는 것을 지켜봐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들은 삶의 종착점에 서 있습니다. 동시에 새로운 인생의 문 앞에 서 있기도 합니다. 불행이라는 거대한 ‘괴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죽음과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어느 순간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것은 근본적인 배움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절망이라는 어둠 속에서 남은 생 동안 무엇을 할지 결정해야만 했습니다. 이 배움이 모두 즐거운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삶을 더 의미 있게 해준다는 것을 누구나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그 배움을 얻기 위해 꼭 삶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할까요? 지금 이 순간 그 배움을 얻을 수는 없을까요?
삶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이 배움 들은 무엇일까요? 수십 년 동안, 죽음을 앞둔 이들과 아직 살아 있는 이들을 치료하면서 우리는 인간에게 필요한 배움 들이 결국은 누구에게나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들은 두려움, 자기 비난, 화, 용서에 대한 배움입니다. 또한 삶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배움, 사랑과 관계에 대한 배움입니다. 놀이와 행복에 대한 배움 들도 있습니다.
배움을 얻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갑자기 더 행복해지거나 부자가 되거나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하고 자기 자신과 더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난 내 삶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더 즐겁다”라고 누군가는 말했듯이, 삶의 배움을 얻는다는 것은 삶을 완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삶을 받아들일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배움을 얻기 위해 이 세상에 왔습니다. 아무도 당신이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려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당신만의 여행입니다. 삶의 이 여행에서 우리가 맞붙어 싸워야 할 것은 많을 수도 적을 수도 있지만, 결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이상의 것들이 아닙니다. 사랑을 배울 필요가 있는 사람은 결혼을 여러 번 하게 될 수도 있고, 어쩌면 한 번도 못할 수도 있습니다. 돈에 대한 배움이 필요한 사람은 돈을 전혀 갖지 못할 수도 있고, 또는 지나치게 많이 가질 수도 있습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삶을 깊이 들여다보고, 죽음이라는 종착점에서 바라본 삶의 모습이 어떠한지 발견해 나갈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이 고립된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식으로 연결되어 있고, 어떻게 사랑이 커지는지, 관계가 어떻게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는지 배울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환상과 행복의 실체를 배우고, 자신이 진정으로 누구인지 알아나갈 것입니다.
또한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데 필요한 모든 조건을 자신이 이미 갖고 있음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에서 큰 상실감에 빠졌을 때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소유하고, 간직하고, 떠날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제 밖에서 행복을 찾는 일을 중단했습니다. 그 대신 이미 갖고 있는 것에서 삶의 의미와 진정한 부를 발견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동안 삶의 풍요로움으로부터 그들을 차단하고 있던 벽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직장이나 가족에 대한 좋은 소식, 월급 인상이나 휴가를 기다리면서 내일을 살지 않습니다.‘오늘’의 모든 풍요로움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가습에 귀기울이는 법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삶은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수업과 같습니다. 그 수업들에서 우리는 사랑, 행복, 관계와 관련된 단순한 진리들을 배웁니다. 오늘 우리가 불행한 이유는 삶의 복잡성 때문이 아니라 그 밑바닥에 흐르는 단순한 진리들을 놓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사랑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만족스런 사랑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느끼는 것은 대부분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두려움, 불안, 기대 실리가 만들어 낸 허상에 불과합니다.
지구라는 행성 위를 함께 걸어가고 있지만 우리들 각자는 외롭고, 무기력하고, 부끄러운 존재들입니다.
때로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할 때, 우리는 더 많이 성장합니다. 조건이 가장 나쁠 때, 오히려 자신이 가진 최상의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배움을 통해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진정한 삶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배움을 얻는 주체는 누구인가? 다시 말해, 나는 누구인가? 아마도 이것이 첫 번째 질문이면서 가장 어려운 질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이 질문을 던집니다. 탄생과 죽음 사이에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경험이 있다는 것은 분명히 일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경험 자체인가, 경험하는 자인가? 나는 이 육체인가, 아니면 나의 잘못들인가? 내가 앓고 있는 병이 곧 나인가? 나는 내가 자란 과정의 결과물인가? 나는 변화할 수 있는가? 그리고 변화한 후에도 여전히 나안가? 아니면 돌에 박힌 화석처럼 변화할 수 없는가?
당신은 그 어느 것도 아닙니다. 당신에게도 틀림없이 결점이 있겠지만 그것들이 당신은 아닙니다. 병에 걸렸을 수도 있지만 그 병이 당신은 아닙니다. 재산이 많을 수도 있지만 당신의 은행 잔고가 당신은 아닙니다. 당신은 결코 당신의 이력서, 배경, 성적, 실수, 육체, 역할, 직함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들은 언제라도 변할 수 있기 때문에 당신이 될 수 없습니다.
당신 안에는 정의 내릴 수 없는 불변의 무엇인가 있습니다. 그것은 없어지거나 나이, 질병, 상황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다. 당신 안에는 태어날 때부터 갖고 나온, 지금까지 지니고 살아왔으며 죽을 때도 함께할 진정한 모습이 존재합니다. 놀랍게도 당신은 변함없이 당신인 것입니다. 병과 싸우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전정한 자신이 아닌 것들을 모두 벗어던져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을 보고 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그의 실수, 잘못, 질병들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전에는 그것들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이제는 오직 ‘그 사람’ 만이 보일 뿐입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이 가까워 오면 사람들은 더 진실해지고, 정직해지고, 더 진정한 자신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 것처럼.
그렇다면 삶의 시작과 끝에서만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 자신일수 있는 것일까? 극단적인 상황에서만 단순한 진리가 드러나는 것일까? 그런 상황이 아니면 결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일까?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 다른 사람에게서도 그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삶의 궁극적인 배움입니다.
누군가 미켈란젤로에게, 어떻게 피에타 상이나 다비드 상 같은 훌륭한 조각상을 만들 수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미켈란젤로는 이미 조각상이 대리석 안에 있다고 상상하고, 필요 없는 부분을 깎아내어 원래 존재하던 것을 꺼내 주었을 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할 완벽한 조각상이 누군가가 자신을 꺼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당신 안에 있는 위대한 사람도 밖으로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내면에 위대함의 씨앗을 가지고 있습니다. 위대한 사람이란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특별한 무언가를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단지 가장 뛰어난 자신을 드러내는 데 장애물이 되는 것들을 제거해 버렸을 뿐입니다.
불행히도 우리의 진정한 자아는 현실에서 쓰고 있어야 하는 가면과 역할들에 가려져 있기가 쉽습니다. 부모, 회사원, 공동체의 리더, 아웃사이더, 모범생, 반항아, 아픈 부모를 돌보는 착한 아이 등의 역할은 우리의 자아를 파묻는 바윗돌이 될 수 있습니다. 때로 우리에게 그런 역할이 강요되기도 합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의사가 돼라’, ‘여자답게 행동해라’, ‘회사에서 승진하려면 유능하고 부지런해야 한다.’
때로는 그 역할이 멋있어 보이거나, 사회적 지위를 보장해 주거나, 이익이 되기 때문에, 또는 그렇게 보이기 때문에 자진해서 그 역할을 맡은 경우도 있습니다. 변화하는 환경에 맞춰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새로운 역할을 맡았다가 그 결과에 상처받기도 합니다. 이런 말을 하는 부부가 있습니다. “결혼 전에는 좋았는데, 결혼하고 나니까 뭔가 잘못된 것 같아.” 결혼하기 전의 그들은 그 자신들이었지만, 결혼한 뒤에는 자신이 알고 있는 ‘남편’과 ‘아내’ 의 역할을 떠맡으려고 했습니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남편과 아내가 어떠해야 하는지 기준을 세우게 되었고, 그것에 맞춰 행동하려 한 것입니다.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지키며 스스로 어떤 배우자가 되고 싶은가를 찾는 대신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남자도 있습니다. “난 삼촌 노릇은 훌륭하게 해냈는데, 아빠 노릇을 하려니 정말 힘이 들어.” 삼촌이었을 때는 마음으로 교류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되자, 자신이 맡아야 할 특정한 역할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 역할이 그가 진정한 자신이 되는 것을 가로막은 것입니다.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세쌍둥이 중 한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그 시절의 세쌍둥이는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장난감을 갖고 놀고, 똑같은 학교에 다녔습니다. 사람들도 세쌍둥이를 각각의 개인으로 대하지 않고 한 묶음으로 대했습니다. 나는 우리가 아무리 모범생이라도, 또는 얼마나 노력했는가에 상관없이 항상 C학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곧 깨달았습니다. 우리 가운데 한 명운 A를, 다른 한 명은 F를 받을 수도 있었지만 교사들은 항상 우리를 혼동했기 때문에 모두에게 C를 주는 안전한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심지어 아버지 무릎에 앉았을 때도 아버지는 내가 우리 셋 중 누구인지 구별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곧잘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넌 누구지?” 이런 것들이 자기 정체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어찌 보면 세쌍둥이로 태어난 것에서부터 나의 진정한 모습을 찾고자 하는 탐구가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항상 나 자신이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비록 그것이 언제나 현명한 선택은 아니었을지라도 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어리석은 가짜가 되고 싶진 않았습니다.
평생에 걸쳐 진정한 자신이 되는 법을 배워 왔기 때문에 나는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을 알아보는 요령이 생겼습니다. 나는 그것을 ‘냄새 맡는다’고까지 표현합니다. 상대방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코뿐만 아니라 모든 감각을 동원해 감지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의 냄새를 맡는 법을 나는 터득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진짜라고 느껴지면, 나는 그들에게 접근해도 좋다는 신호를 보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서 가 버리라고 신호를 보냅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진정성의 냄새를 맡는 예민한 후각을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이미 진정한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기 때문입니다.
내 삶에서 사람들의 진정하지 못한 모습을 가려내기가 힘들 때도 있었지만, 어떤 때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나를 강연 장소까지 태워다 주고 강단까지 휠체어를 밀어 줌으로써 ‘좋은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내가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 상황에서 나는 나 자신이 그저 그들의 자기만족을 위해 이용되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들이 좋은 사람을 연기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좋은 사람이라면, 내가 집에 안전하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도 신경 쓸 것입니다.
우리는 평생 동안 여러 가지 역할을 맞습니다. 그러나 역할을 바꾸는 법은 알면서도 그것을 뒤돌아볼 줄은 모릅니다. 배우자, 부모, 직장상사, 좋은 사람, 반항아 등 표면적으로 맡게 되는 역할들이 반드시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은 어떤 상황에서는 꼭 필요한 역할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것들 중에서 우리에게 맞는 역할과 그렇지 않은 것을 가려내는 일입니다. 그것은 마치 양파 껍질을 벗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양파 껍질을 벗길 때처럼 어느 정도 눈물이 나는 것은 감수해야 합니다.
자신의 부정적인 면을 인정하고 그것을 드러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우리들 각자에게는 간디에서 히틀러까지, 모든 인물이 될 가능성이 숨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히틀러가 될 수 있는 면이 숨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하지만 모든 인간에게는 부정적인 모습이 잠재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을 부인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자신은 결코 부정적인 생각이나 행동을 할 리가 없다며 자신에게 잠재된 어두운 면을 완전히 부정하는 사람이 있다면 큰 문제입니다. 자신에게 부정적인 면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일단 인정하고 나면 노력으로 그것을 내보낼 수 있습니다.
삶이 가르쳐 주는 배움 들을 통해 우리는 종종 자신이 원하지 않는 역할들을 벗어던집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본질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특별히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면, 좋은 사람인 척하는 가면을 벗어 버리고 진정한 자신을 찾아야 합니다. 모든 순간을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려는 삶은 가식적이기 때문입니다. 추가 반대쪽 끝까지 올라가야만, 다시 말해 때로는 진솔한 불평도 늘어놓을 줄 알아야만 진정한 자신이 되는 중간 지점으로 올수 있습니다. 대가를 바라고 베푸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비심에서 베푸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어린 시절 살아남기 위해 터득한 방어술을 버리는 일입니다. 이 방어술들은 일단 더 이상 필요 없게 되면 거꾸로 자신을 공격해 올 수가 있습니다.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상황에서 도망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며 자란 여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술에 취해 소리 지를 때 여섯 살짜리 여자 아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힘겨운 어린 시절을 견디도록 도와주었지만, 자라서 어머니가 되면 아이들에게 해로운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방어술은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힘든 시절에 도움을 준 것에 감사한 뒤, 떠나보내야 합니다. 사람들은 때로 결코 가질 수 없는 것 때문에 슬퍼합니다. 이 여성은 자신이 결코 가질 수 없었던 정상적인 어린 시절 때문에 슬퍼해야만 했습니다.
때로 우리는 이런 역할들로부터 많은 것을 얻기도 하지만, 그 때문에 치러야 하는 대가가 크다는 것도 깨닫습니다. 어느 시점이 되면 그 대가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더욱 커집니다. 많은 사람들은 중년에 이르러서야 자신들이 사실 좋은 사람이지만 가족과는 전혀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상황을 이해하지도 못한 채 부모와 형제들을 항상 행복하게 해주어야 하는 책임을 떠맡았고, 갈등을 해결해야 했으며, 식구들에게 돈을 빌려 주고, 직장 구하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어느 순간 당신은 그런 짐스러운 역할이 당신 자신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는 그것을 놓아 버립니다. 그때 당신은 여전히 좋은 사람이지만, 더 이상 다른 이들을 행복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어떤 인간관계는 잘 풀릴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언제나 의견충돌과 실망이 있게 마련입니다. 만일 당신이 모든 문제를 떠맡아야 한다는 책임감을 버리지 못한다면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자신이 되었을 때 그동안 자기가 맡은 역할이 너무 무거웠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지금 난 모든 사람의 행복을 책임지지 않아도 되어서 너무 기쁘다.’ 또한 자신이 그동안 다른 이들을 속여 왔음을 깨닫습니다. ‘난 다른 사람들을 조종하려고 했다. 착하게 굴어서 다른 이들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하면서.’
당신은 이제 자신이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도 충분히 사랑받을 가치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또한 자신이 한 행동들의 근원이 두려움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착하지 않다는 두려움, 천국에 못갈 것이라는 두려움, 호감을 못 받을 것이라는 두려움........, 당신은 보상을 받기 위해 그 역할을 이용한 것입니다.
“난 언제나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고 존경받는 인간이 되겠다고 마음먹었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나도 다른 이들과 아무 차이 없는 한 사람의 인간일 뿐임을 깨닫는다.”
새로운 자신을 발견한 당신은 이제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 그들 역시 자기 자신을 발견해 가는 중임을 깨닫습니다. 그동안 당신은 스스로가 더 강하다고 느끼기 위해 다른 이들을 약하게 대해 왔습니다. 다른 이들의 문제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자기 자신의 문제를 회피해 왔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성격의 어두운 면들을 상대해야만 합니다. 흑백은 차라리 구별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숨기고 부정하는 것은 보통 회색 부분입니다. 좋은 사람, 외톨이, 희생자, 순교자......., 이런 것들이 그림자에 가려진 회색 부분입니다. 자신의 부정적인 면을 인정하지 않으면, 자기 안에 깊이 뿌리박힌 부정적인
생각들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모두 인정할 때 비로소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습니다. 역할을 잃는 것이 슬플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곧 자신의 진정한 모습에 가까워지는 편이 훨씬 낫다는 걸 알게 될 것입니다. 본래의 당신은 변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늘 같은 사람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자신을 멋있게 보든 초라하게 보든 우리는 주변 상황으로 자신을 정의하는 습관이 있지만, 그것은 결코 진정한 자기 자신이 아닙니다. 모든 일이 잘 풀리고, 날씨도 좋고, 주가는 오르고, 차는 깨끗이 세차해 윤기가 나고, 아이들이 좋은 성적을 받아 오고, 저녁식사도 괜찮았다면, 스스로 굉장한 사람처럼 느낄 것입니다. 반면에 상황이 그렇지 못하면 자신을 가치 없는 사람으로 여깁니다. 우리는 늘 사건들의 흐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일도 있습니다. 하지만 본래의 자신은 그보다 훨씬 더 강합니다. 본래의 자신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맡은 역할들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역할들은 별로 도움이 안 되는 환상일 뿐입니다. 우리의 모든 역할과 상황들 밑에 진정한 우리 자신이 숨어 있습니다. 거짓된 모습에 대한 환상을 버릴 때 진정한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스스로를 정의 내리기 위해 타인을 살펴봅니다. 그래서 타인의 기분이 나쁘면 우리 자신도 실망합니다. 다른 이들이 우리가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자신도 모르게 방어 자세를 취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정정한 자아는 그런 방어를 넘어선 곳에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건강하고, 완전하며,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부유하든 가난하든, 젊은이든 노인이든, 또는 관계를 시작하고 있든 끝내고 있든 그것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인생의 시작에 있든 끝에 있든, 절정기에 있든 절망의 나락에 있든, 우리는 언제나 그 모든 상황을 초월한 존재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앓고 있는 병이나 직업이 아니라, 당신 자신일 뿐입니다. 삶이란 무엇을 하는가가 아닌, 존재에 관한 문제입니다.
죽어가는 한 여성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누구입니까?”
그녀는 말했습니다.
“지금껏 내게 맡겨진 역할들 속에서 내 삶은 너무나 평범했어요. 다른 이들과 똑같은 삶을 살아온 것 같았어요. 도대체 내 삶이 다른 이들의 삶과 뭐가 다를까 싶었어요. 하지만 병을 앓게 되면서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어요. 난 아주 특별한 사람인 거예요. 어느 누구도 나와 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보거나 삶을 경험하지 못했을 거예요.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이 세상이 시작된 이후부터 끝나는 날까지, 나와 똑같은 사람은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거예요.”
이것은 이 여성뿐만 아니라 당신에게도 진실입니다. 아무도 당신이 겪은 것과 같은 방식으로, 당신이 겪은 특별한 역사와 사건들로 세상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진정한 당신은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특별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자신이 누구인지 발견한 후에야 비로소 그 특별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진정한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고 깨닫는 순간 사람들은 심하게 절망합니다. 자신을 알려는 노력의 첫걸음을 시작하려면 커다란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때로 자신이 생각해 온 것과는 다른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는 당황하곤 합니다.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진단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아내려는 최초의 시도를 합니다. ‘지금 죽어가는 사람이 누구지?’ 하고 자문하면, 대개 우리의 어느 한 부분은 죽지 않고 살아남아 지금까지처럼 존재를 이어가리라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병에 걸려 더 이상 은행원, 여행가, 의사, 어머니의 역할을 할 수 없는 날이 오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만일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면, 나는 과연 누구인가?’ 만일 당신이 사무실의 성실한 직원, 이기적인 삼촌, 헌신적인 이웃이 아니라면, 당신은 누구인가?
진정한 당신을 발견하고 스스로에게 진실해지려면, 또 자신이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을 찾아내려면 일상적인 일에서 그것을 경험해야만 합니다. 직업을 선택하는 일에서부터 입고 있는 옷에 이르기까지, 기쁨과 평화를 주는 것들을 선택해야 합니다. 만일 다른 사람의 눈에 가치 있게 보이려고 일한다면,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만 하는’일에 자신이 얼마나 붙잡혀 사는지 알면 놀랄 것입니다.
가끔씩은 억누르고 있던 충동에 몸을 맡기고, 이상하거나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보아야 합니다.
당신이 진정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또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면 무엇을 할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결과에 신경 쓰지 않고 원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을 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당신이 누구인지, 또는 적어도 당신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줄 것입니다. 당신의 대답은 스스로에 대한 부정적인 믿음의 증거일 수도, 또는 진정한 자신을 별견하기 전에 배워야 할 교훈일 수도 있습니다. 만일 물건을 훔치겠다고 대답한다면, 당신은 충분히 갖지 못한 것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겠다고 대답한다면, 당신은 진실을 말하기가 불안한 것입니다. 지금은 사랑하지 않는 누군가를 사랑하겠다고 대답한다면, 당신은 사랑을 두려워하는지도 모릅니다.
휴가 여행을 떠날 때면 나(데이비드 케슬러)는 늘 바쁘게 돌아다녔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낮 동안에 최대한 많은 것을 보고 많은 일을 하고, 밤늦게 완전히 지쳐 호텔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결국 휴가 기간 동안 전혀 즐겁지 않았고 오히려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음을 깨닫게 되자, 나는 아무도 보고 있지 않다면 무엇을 할지 자문해 보았습니다. 내 마음속에서는 아침 늦게까지 자고, 느긋하게 몇몇 군데만 관광하고, 하루 한 시간씩 베란다나 해변에 앉아 책을 읽거나 그냥 가만히 있고 싶다고 대답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봐야만 성이 차는 열성적인 관광객’은 나 자신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전에는 휴가를 떠나면 열심히 구경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구경과 휴식을 적절히 섞을 때 더 즐겁고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훨씬 행복해졌습니다.
세 딸의 아버지인 티모시는 60세 되던 해에 심장 마지를 겪었습니다. 그는 혼자서 세 딸을 키웠으며, 언제나 좋은 아버지였습니다. 그러나 심장 발작 이후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딱딱하게 굳어진 건 내 동맥뿐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내 마음도 굳어 있었습니다. 아마도 아내가 죽었을 때부터인 것 같아요. 난 강해져야만 했습니다. 딸들 역시 강하게 자라 주길 바랐고, 그래서 애들을 아주 엄하게 대했죠. 이제 그 임무는 끝났어요. 나도 예순이 되었으니 내 삶도 곧 끝나겠지요. 더 이상은 그렇게 엄한 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아요. 난 내 딸들이 아버지가 자신들을 무척 사랑했다는 걸 알게 되기를 바라요.”
티모시는 병실에서 딸들에게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딸들도 늘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고는 있었지만, 그의 부드러워진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더 이상 전과 같은 아버지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제 마음속 깊은 곳의 자기 자신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도, 마이클 조던 같은 뛰어난 운동선수도 아니지만 ‘필요 없는 부분을 깎아 내는 것’ 만으로도 우리의 타고난 재능을 눈부시게 꽃피울 수 있습니다. 본래의 당신은 가장 순수한 사람이며 완전한 존재입니다. 당신은 스스로를 치유하고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습니다. 당신의 진정한 자아는 어둠 속에서 당신을 인도하는 불빛과 같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면 자신이 해야 할 일, 배워야 할 교훈이 보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존재와 안에 있는 존재가 하나가 되면 더 이상 숨거나 두려워하거나 자신을 보호할 필요가 없습니다. 상황을 초월한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어느 늦은 저녁, 루게릭 병으로 고통 받는 한 남자와 얘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가장 힘든 것은 뭔가요. 병원에 갇혀 지내는 건가요. 아니면 병 그 자체인가요?” 그는 말했습니다.
“아니오. 가장 힘든 건 사람들이 나를 과거형으로 대한다는 점입니다. 나를 과거의 존재로 생각하는 겁니다. 지금 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든, 난 여전히 완전한 사람입니다. 이 루게릭 병이 나는 아닙니다. 내 안에는 정의할 수 없고 변화하지도 않는 나의 일부가 존재합니다. 그것은 나이를 먹거나 병에 걸린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아요. 내가 붙들고 있는 나의 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이며,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나입니다.”
그 남자는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얼마나 많은 돈을 갖고 있든, 자녀를 몇 명 두었든, 자신의 본질은 그런 것들과 상관없는 저 너머에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 역할들을 벗어던진 후에 남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들 각자에게는 무한히 선해질 수 있는 가능성 역시 잠재해 있습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주는 것, 판단하지 않고 귀 기울여 들어주는 것, 조건 없는 사랑을 베푸는 것 등이 그것입니다. 그 가능성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우리가 시도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하루의 매 순간마다 크거나 작은 방법으로 그것에 접근해 갈 수 있습니다. 진정한 자신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인간적인 자아를 존중하는 것을 말합니다. 때로 감추고 싶은 자아의 어두운 부분까지도 포함해서, 우리는 흔히 사람들이 선한 마음에 이끌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전정한 인간의 모습에 이끌리는 것입니다. 인위적이고 멋진 모습들로 진정한 자신을 가리고 있는 사람보다는 그 자체로 진정한 자신의 모습인 사람을 좋아합니다.
여러 해 전 나(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운 좋게도 시카고 의대에서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교수로 뽑힌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교수들에게는 매우 명예로운 일입니다. 교수라면 학생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상을 받게 되었다는 발표가 나던 날, 다들 평상시와 다름없이 친절하게 나를 대했습니다. 하지만 상에 대해 언급하는 교수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나는 그들의 미소 뒤에서 그들이 말하지 않는 무엇인가를 느꼈습니다.
저녁때가 되자, 아동 심리학자인 동료 교수가 멋진 꽃다발을 보내왔습니다. 카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질투가 나서 죽을 지경이지만, 어쨌든 축하해요.’
그 순간부터 나는 이 남자만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가식적이지 않기 때문에 좋았습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언제나 알 수 있을 것이며, 내 곁에 있어도 안전하다고 느낄 것입니다. 그가 자신을 솔직하게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자신에 가까워지려면 자신의 어두운 면과 결점에 대해서도 솔직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안심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 대한 진실, 우리가 진정 누구인지 아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한 남자가 건강이 몹시 안 좋은 70대 후반의 자기 할머니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분을 보내 드리는 것이 정말 힘들었어요. 난 간신히 용기를 내어 말했죠. ‘할머니, 전 할머니를 보내 드릴 수 없어요.’ 이기적으로 들리리라는 건 알지만, 그게 내 진심이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얘야, 난 만족한단다. 내 삶은 멋지고 완벽했어. 더 이상 내 모습이 생기로 가득 차보이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난 이미 이 여행에서 많은 것을 누렸어. 삶이란 마치 파이와 같지. 부모님께 한 조각, 사랑하는 사람에게 한 조각, 아이들에게 한 조각, 일에 한 조각, 그렇게 한 조각씩 떼어 주다 보면 삶이 끝날 때쯤엔 자신을 위한 파이를 한 조각도 남겨 두지 못한 사람도 있단다. 그리고 처음에 자신이 어떤 파이였는지조차 모르지. 난 내가 어떤 파이였는지 알고 있단다. 그것은 우리 각자가 알아내야 할 몫이지. 난 이제 내가 누구인지 알면서 이생을 떠날 수 있단다.”
“할머니가 ‘난 이제 내가 누구인지 안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난 그분을 보내 드릴 수 있었어요. 그 말씀이 그렇게 만든 거죠. 난 할머니에게, 내가 죽을 때쯤엔 나도 할머니처럼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어요. 할머니는 마치 비밀이라도 말하려는 듯 앞으로 몸을 숙이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네가 어떤 파이인지 알기 위해 죽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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