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問/人文學

차길진의「漢文으로 푸는 세상살이」/ 人怕出名, 猪怕壯인파출명, 저파장

경호... 2015. 7. 17. 05:32

차길진의「漢文으로 푸는 세상살이」

 

人怕出名, 猪怕壯 (인파출명, 저파장)

돼지가 통통하게 살이 오르면 목에 칼이 들어오고, 사람은 이름이 나면 구설수에 휘말린다

 

有名稅 장터에서 두 사람이 엿장수에게 엿을 샀다.

어진 사람은 「이가 없어 음식을 제대로 씹지 못하는 마을 노인들께 이 엿을 奉養(봉양)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한 사람은 도둑이었다.

그는 「끈적끈적한 엿을 남의 집 문틈에다 밀어 넣으면 문 밖에서 문고리를 손쉽게 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같은 엿이지만 사람이 쓰는 用度(용도)에 따라 相剋(상극)으로 갈린다.

 

얼마 전 인터넷에 공개된 일화다.

한 사람이 권위 있는 잡지에 이렇게 寄稿(기고)했다.

 

「변호사나 창녀나 똑같다」

 

누가 감히 이런 말을 律師(율사)들에게 공개적으로 선언한단 말인가. 당장 반박논리가 가마솥처럼 들끓고, 기고자는 명예훼손 被疑者(피의자)로 법정을 들락거리거나, 적어도 괘씸죄로 사회에서 매장당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반응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오히려 박수까지 받았다. 이 말을 한 사람은 바로 원로 변호사였고, 기고된 잡지는 법률 전문지였다.

 

유사한 일화가 있다.

어느 신축 건물 공사장에서 일꾼들이 간식시간에 같이 일하는 동료를 불렀다.

 

『이 노가다 자식아, 한잔 처먹고 해』

『그래 임마. 한잔 줘봐』

 

상대방이 이렇게 싱글벙글 받아 넘겼다. 신축건물 주인이 이 광경을 보고, 일꾼들의 노고를 격려하기 위해 술값 하라며 수표 한 장을 건넸다. 친근감을 표시하려고 빈 술잔을 집어들고 술 한잔을 청했다.

 

『나도 한잔 줘봐, 노가다들아』

 

일꾼들은 노발대발하며 『우리가 거지냐』며 건물주인의 멱살을 잡았다. 좋은 의도와는 달리 낭패를 본 것이다. 두 경우 모두 是非(시비)의 문제가 아니라 適材適所(적재적소)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사회적 지위에는 代價가 따른다. 有名稅(유명세)가 그것이다.

유명세의 「세」자는 세력(勢)이 아니고 세금(稅)이란 의미다. 有名稅에 대한 一喝(일갈)이 「人怕出名, 猪怕壯(인파출명, 저파장)」이다. 뜻을 그대로 풀면 사람은 이름 나는 걸 두려워하고, 돼지는 덩치 커지는 걸 두려워한다」이다.

 

돼지가 통통하게 살이 오르면 목에 칼이 들어오듯, 사람은 이름이 나면 구설수에 휘말리기 쉽다는 얘기다.

 

아이들끼리 싸움을 해서 자기 자식이 맞고 들어오면 그 부모는 당장에 달려가 때린 부모에게 항의한다. 때린 아이 부모는 맞은 아이 부모에게 면전에서 싹싹 빌지언정, 뒤돌아 서서는 웃는다.

반면 사과는 받아 냈지만 맞은 아이의 부모는 후련하지 않다. 근래 모 재벌 회장의 폭행사건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여러모로 사회정의의 문제라기보다 有名稅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평범한 사람이 자식들 싸움으로 치고 박고했더라면 언론이 실시간 「수사 속보」를 내보내면서까지 이렇게 요란스러웠을까?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귀엽다고 한다.

어떤 부모라도 맞은 자식에 대해 분풀이를 하고 싶은 심정이야 인지상정이겠지만, 이분은 有名稅 때문에 사회적 파장을 고려해 좀더 신중히 대처를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전국시대 齊(제)나라 威王(위왕) 때의 일이다.

威王이 즉위한 지 9년이 되었지만 간신 周破湖(주파호)가 국정을 제멋대로 휘둘러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다. 이를 보다 못한 후궁 虞姬(우희)가 威王에게 간곡히 아뢰었다.

 

『전하, 주파호는 속이 검은 사람이오니 그를 내치시고, 北郭(북곽) 선생과 같은 어진 선비를 등용하시옵소서』

 

이 사실을 안 주파호는 『우희와 북곽 선생은 전부터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고 우희를 모함했다. 威王은 마침내 우희를 옥에 가두고 철저히 조사하라고 명했다.

 

주파호에게 매수된 관원은 억지로 죄를 꾸며 내려고 했다. 威王은 아무래도 미심쩍어 우희를 불러 직접 신문했다.

 

우희는 이렇게 말했다.

 

오이밭에서 신발 고쳐 신지 말아야

 

『전하, 臣妾(신첩)은 이제까지 한마음으로 전하를 모신 지 10년이 되었사오나 오늘날 불행히도 간신들의 모함에 빠졌나이다. 신첩의 결백은 靑天白日(청천백일)과 같사옵니다.

만약 신첩에게 죄가 있다면 그것은 「오이 밭에서 신을 고쳐 신지 말고(瓜田不納履), 오얏나무 아래서 갓을 고쳐 쓰지 말라(李下不整冠)」고 했듯이, 남에게 의심받을 일을 피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신첩이 억울하게 옥에 갇혀 있는데도 누구 하나 변명해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제 不德(부덕)입니다. 이제 신첩에게 죽음을 내리신다 해도 더 이상 변명하지 않겠사오나 주파호와 같은 간신만은 내쳐 주시오소서』

 

威王은 우희의 충심어린 호소를 듣고 이제까지의 자신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威王은 당장 주파호 일당을 삶아 죽이고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잡았다.

 

이른바 사회의 지도층은 「瓜田不納履 李下不整冠(과전불납리 이하부정관)」의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세 가지 불행

 

宋(송)나라의 한 학자는 남자의 세 가지 不幸(불행)을 말했다. 첫째가 초년에 登科(등과)해 官職(관직)에 나아가 출세하는 것, 둘째가 부모의 後光(후광)으로 높은 벼슬을 하는 것, 셋째가 능력이 좋은데 문장까지 탁월하고 생김새가 美男(미남)인 경우다.

 

남들이 모두 부러워할 조건을 不幸이라고 한 이유는 「極上(극상)하면 自滅(자멸)」하기 때문이다. 최고의 위치에 오르면 그때부터 스스로 멸하는 법이다.

 

어떤 재력가가 『어떻게 하면 우리 가문이 대대로 富(부)를 이어 나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기에 조심스럽게 충고했다.

 

『제발 좀 국민에게 많이 로비하십시오. 그 정도의 재력을 가지셨다면, 代를 이어 재물을 물려가는 것도 좋지만, 국민에게 많이 돌려 주셔야 합니다』

 

 

 

 

 

容情不下手 下手不容情(용정불하수 하수불용정) 

 

「용서했으면 때리지 말고, 때렸으면 용서하지 말라」

 

헤픈 관용은 비극을 초래한다

 

容情不下手 下手不容情(용정불하수 하수불용정)은 「용서했으면 때리지 말고, 때렸으면 용서하지 말라」는 충고의 말이다.

 

敵(적)을 몰아붙일 때는 안면을 바꿔야 한다. 밟으려면 확실하게 밟아야 싹이 고개를 들지 못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친 사람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예수다.

 

부처는 『善樂於愛欲 以杖加群生(선락어애욕 이장가군생) 於中自求安 後世不得樂(어중자구안 후세부득락)』이라 했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즐거움을 좋아한다. 생명체를 때리거나 죽이는 데서 즐거움을 찾는 사람은 후세의 즐거움을 얻지 못한다」는 얘기다.

 

부처와 예수 모두 容情에는 고개를 끄덕이고, 下手에는 손사래를 치고 있다.

 

하지만 聖人(성인)이 아니라면 「최선의 복수는 용서」라는 달관의 경지를 외면하는 편이 낫다.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인 容情은 또 다른 비극을 초래한다.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부를 수도 있듯, 개인의 부당한 容情이 쌓이면 역사의 愚(우)가 빚어질 수도 있다.

 

불필요한 용서는 아니 한 것만 못하다. 나는 줬는데 상대방이 빼앗겼다고 착각한다면, 참 억울하다. 以心傳心(이심전심)이 통하지 않는 자에게는 말(言)로 주입할 수밖에 없다.

「사람 마음이 다 똑같지」라는 착한 심성을 헤아려 주는 존재는 하늘뿐이다.

 

은인과 원수라는 천양지차를 혼돈하는 남녀노소는 뜻밖에도 수두룩하다.

 

『가수로, 영화배우로, 탤런트로 데뷔만 시켜 주면 평생 은인으로 모시겠다』며 무릎 꿇기도 불사하던 연예인 지망생이 스타가 된다. 동시에 무명 시절의 계약서는 불공정 계약의 표본처럼 돼버린다. 티격태격 소송이 잇따른다. 스타 연예인이나 그를 기획한 사람이나 容情不下手 下手不容情를 떠올리게 마련이다.

 

자녀교육의 원칙도 容情不下手 下手不容情에서 찾을 수 있다.

 

부모가 자녀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容情不下手 下手不容情가 전부다. 물론 容情과 下手에는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기분이 좋다고 마냥 용서하고, 기분이 나쁘다고 매를 들어서는 안 된다.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容情 혹은 下手가 설득력과 위력을 발휘한다.

 

용서하자니 괘씸하고, 내치자니 싹수가 아깝다. 이럴 때도 정답은 下手不容情이다. 靑出於藍(청출어람)할 역량이라면 처음부터 맞을 짓을 하지 않는 법이다. 당장의 불편함으로 容情하고 싶더라도 참아야 한다.

 

내 덕에 취직한 사람, 내 덕에 승진한 사람은 머지 않아 바닥을 드러낸다. 조직사회에서 미련과 惻隱之心(측은지심)은 절대부분 버려야 옳은 덕목일 수 있다. 어느 분야든 정상에 오른 이들의 공통점은 「스스로 컸다」는 것이다.

 

下手不容情이 꼭 단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전화 한 통 걸지 않는 절교만으로도 효과는 충분하다. 두렵고 아쉬운 것은 용서를 구해야 할 상대방이다.

 

중국 春秋(춘추)시대의 越王(월왕) 句踐(구천)은 吳王(오왕) 夫差(부차)에게 패하자 목숨을 구걸해 살아남는다. 그 후 그는 쓸개를 핥으며 복수심을 불태운다. 越의 미녀 西施(서시)를 夫差에게 바친다. 夫差가 西施에게 빠져 있는 동안 句踐은 재기해 마침내 吳를 멸망시키기에 이르렀다.

 

夫差가 下手不容情하지 못한 代價(대가)는 亡國(망국)이었다. 夫差는 宰相(재상) 伍子胥(오자서)의 下手不容情 주장을 받아들여야 했다. 伍子胥는 『句踐을 용서하면 반드시 화근이 남을 것』이라며 제대로 내다봤었다.

 

容情은 용서할 사람과 용서받을 사람이 분명해야 한다. 용서받을 일도 분명해야 한다. 용서하는 이가 떳떳해야 하고, 용서받아야 할 이가 진실하고 겸허해야 한다. 숨기거나 잊어서는 안 된다. 일부러 잊게 만들어도 안 된다.

 

信賞必罰

 

容情不下手 下手不容情는 「信賞必罰(신상필벌)」과도 相通(상통)하는 원리다. 상을 주고 벌을 주는 데 엄중하다는 것은 곧 용서할 것인가, 때릴 것인가의 선택이기도 하다.

 

泣斬馬謖(읍참마속)을 보자. 군율을 세우기 위해서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을 버렸다. 중국 蜀(촉)나라의 諸葛亮(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면서 馬謖의 목을 베었다. 군령을 어긴 죄다. 大義滅親(대의멸친), 큰 도의를 위해 私的인 감정을 버린 것이다.

 

容情不下手 下手不容情는 기업에도 적용된다.

 

三星그룹 창업주인 湖巖 李秉喆(호암 이병철) 회장은 「疑人勿用 用人勿疑(의인물용 용인물의: 의심나는 사람은 쓰지 말고, 쓰는 사람은 의심하지 말라)」라는 用人원칙으로 容情不下手 下手不容情를 실천했다.

 

湖巖은 흐르는 물이 괴기 시작하면 전체가 썩고 만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泰山不讓土壤 故能成其大(태산불양토양 고능성기대), 「흙 한 줌도 버리지 않은 덕에 태산을 이룰 수 있었다」는 믿음으로 容情不下手하려 애쓰는 한편, 下手不容情이 필요할 때는 한없이 차가워졌다.

 

容情不下手 下手不容情를 지탱하는 힘은, 개인적 이득이다. 중국의 法家(법가) 철학자 韓非子(한비자)가 일찌감치 간파한 진리다.

 

하인이 열심히 일하는 것은 충실해서가 아니라 보수를 받기 때문이다.

 

주인이 하인을 잘 대해 주는 것 또한 친절해서가 아니라 열심히 일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어부가 징그러운 뱀장어를 손으로 주무르고 여자들이 송충이 같은 누에를 손으로 만지는 것도 다 이익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해관계만 맞으면 낯선 사이라도 화목하게 살고, 이해가 상충하면 아비와 자식 사이라도 충돌하게 마련이다. 이득만 생기면 사람은 누구나 최고의 용사가 된다.

 

容情에는 타이밍이 중요

 

容情不下手 下手不容情하려면 정직해져야 한다.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잊을 수는 없다」는 修辭(수사)는 솔직하지 못하다.

 

「나는 용서할 수 없다」는 속내를 에둘러 표현한 것에 불과할 뿐이다.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다는 대범함을 가장해서도 안 된다. 모두 용서한다는 것은 곧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소리다.

 

下手는 거칠지만 正義일 수 있다. 下手를 復讐(복수)라 해석해도 무방하다. 개한테 물렸다고 「어찌 사람이 개를 물겠는가」라고 容情만 하면 리더가 될 수 없다. 가정에서는 下手, 사회와 조직에서는 容情하는 것은 위선이다.

 

容情을 버리고 下手 일변도로 나아가야 할 경우는 크게 세 가지다. 누군가가 나의 보스, 나의 배우자, 나의 이름을 더렵혔다면 下手不容情 외에는 대응책이 없다.

 

그래도 굳이 容情하고 싶다면, 타이밍을 잘 맞춰야 한다.

 

큰 용서보다는 적절한 시기의 요긴한 용서가 더욱 효과적이다. 加虐的(가학적)이면서 동시에 被虐的(피학적)인 성품이라면 下手 없는 容情만 고수해도 좋다. 敵을 가장 괴롭히는 방법이 바로 용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월간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