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학 산책]
反面을 읽고 속마음을 숨겨라… 귀곡자에서 배우는 21세기 협상술
신동준 박사·21세기정경연구소장
세 치 혀를 통해 이뤄지는 유세는 비즈니스 협상과 여러모로 닮았다. 대화를 주도하며 상대의 속셈을 헤아린 뒤 원하는 바를 교묘히 관철하는 게 그렇다.
동양 고전 가운데 이를 집대성해 놓은 것이 '귀곡자(鬼谷子)'이다. 귀곡자는 외교학파에 해당하는 종횡가(縱橫家)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전국시대 중기를 화려하게 수놓은 대표적인 종횡가 소진(蘇秦)과 장의(張儀) 모두 귀곡자의 제자이다. '전국책'은 이들의 활약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귀곡자'가 총론이라면, '전국책'은 각론에 해당한다. 중국인은 병법가 손빈(孫??賓)과 방연(龐涓)도 귀곡자의 제자였다고 믿고 있다. 북송대의 사마광은 '자치통감'에서 두 사람 역시 귀곡자 밑에서 병법을 배웠다고 기록해 놓았다. 현재 귀곡자의 은거지로 알려진 중국 허난성 운몽산(雲夢山) 일대에 '중화제일 고군교(古軍校)' 깃발 아래 거대한 규모의 관광단지가 조성돼 있다.
유학자들은 '귀곡자'를 음모의 집대성으로 간주하고 오랫동안 금서로 취급했다. 그러나 '손자병법' 등의 병서가 궤계(詭計)를 통한 승리를 역설했듯이 '귀곡자' 역시 음모를 통해 뜻하는 바를 관철하라고 주문했을 뿐이다.
"성인은 은밀히 일을 도모하는 까닭에 신묘하다는 칭송을 듣고, 밝은 곳에서 그 공을 드러내는 까닭에 명민하다는 칭송을 듣는다. 사람들이 성인의 정치와 용병을 신명하다고 칭송하는 이유다."('귀곡자' 〈마의〉)
어떤 사물이든 대립되는 현상이 병존하기 마련이다. 사물을 관찰할 때 정면(正面)만 보지 말고 반면(反面)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나라를 다스리거나 군사를 지휘할 때 반드시 속마음을 철저히 숨기는 음도(陰道)를 행해야만 대공을 이룰 수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대통령짓 못해 먹겠다'며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 놓는 극단적인 양도(陽道)와 대비된다.
유가의 '맹자'가 정면을 응시한 것이라면, '귀곡자'는 병가의 '손자병법'과 법가의 '한비자'와 마찬가지로 반면의 작용에 주목했다. 모택동은 '모순론'에서 반면의 중요성을 이같이 강조했다.
"염결(廉潔)이 있으면 반드시 탐오(貪汚)가 있고, 탐오가 있으면 반드시 염결이 있기 마련이다. 이게 바로 '대립물의 통일'이다. 세상사 모두 대립물의 통일이다."
경제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위정자와 기업 CEO 모두 사안의 반면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귀곡자'보다 더 좋은 이론서도 없다.
여기에 소개된 비책은 마음을 여닫으며 대화를 이끄는 벽합(??卑闔), 얘기를 뒤집으며 상대의 반응을 유인하는 반복(反覆), 상대와 굳게 결속하는 내건(內??建), 벌어진 틈을 미리 막는 저희(抵?s戱), 칭송하며 옭아매는 비겸(飛箝), 상대의 형세에 올라타는 오합(?g合), 상대가 속마음을 털어놓게 만드는 췌마(?\摩), 시의에 맞게 계책을 내는 권모(權謀) 등 모두 8가지다. 당태종 이세민과 키신저가 곁에 두고 읽었다는 얘기도 있다. 온갖 지략이 난무하는 21세기 비즈니스 정글에 활용하면 큰 도움을 받을 것이다.
[동양학 산책]
"먼저 백성을 부유하게 하라" 기업가 정신 강조한 관중과 사마천
1960년대 말 중국의 문화혁명 당시 사인방(四人?)은 공자를 보수반동의 괴수, 관중을 법가(法家)의 효시로 분류했다. 엄법(嚴法)에 기초한 부국강병을 주장한 관중의 최종 목표는 '예의염치를 아는 문화대국의 건설'이었다. 그에게서 관건은 부민(富民)이었다. 이를 통찰한 사마천은 '사기(史記)'의 '화식열전'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관중은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알고 의식이 넉넉해야 영욕을 안다고 했다. 본래 예의염치는 재화에 여유가 있을 때 생기고, 없으면 사라진다. 사람은 부유해야만 인의도덕도 행할 수 있다.
'천하가 희희낙락한 것은 모두 이익을 위해 모여들기 때문이고, 천하가 흙먼지가 일 정도로 소란스러운 것은 모두 이익을 찾아 떠나기 때문이다'라는 얘기가 빈말이 아니다."
실제로 관중은 자신이 쓴 '관자'의 '치국' 편에서 "무릇 치국평천하의 길은 반드시 우선 백성을 잘살게 하는 데서 시작한다. 백성들이 부유하면 다스리는 게 쉽고 백성들이 가난하면 다스리는 게 어렵다"며 필선부민(必先富民·반드시 먼저 백성을 부유하게 만들어야 한다)을 역설했다. 관중이 '상가(商家)'의 시조로도 불리는 이유이다.
공자는 이런 측면에서 관중의 사상을 잇는다. '논어'의 '자로' 편에 등장하는 일화가 그 증거다.
천하유세에 나선 공자가 낙양 인근의 위(衛)나라로 갔다. 상업이 번성해 크게 번잡한 도성 모습을 보고 찬탄하는 공자에게 제자인 염유가 어떻게 다스리는 게 좋은지 물었다. 공자는 이에 대해 "백성들이 이미 많으면 부유하게 만들어줘야 하고 부유해졌으면 가르쳐야 한다"고 답했다.
이른바 '선부후교(先富後敎)'사상으로 관중의 '필선부민'과 맥이 닿는다.
사마천은'사기'에서 말한다.
"천금을 모은 자를 보면 하나같이 성실한 마음으로 자신의 일에 매진한 덕분에 부를 이뤘다. (중략)
빈부의 차가 빚어지는 것은 결코 누가 빼앗거나 주어서 나타난 결과가 아니다. 산업의 상호관계와 재화의 흐름을 잘 아는 자는 늘 여유 있고 이를 모르는 자는 늘 부족할 수밖에 없다."
사농공상의 위계질서가 엄격한 당시 상황에서 사마천은 시장의 자유를 역설하며 상공인의 치부(致富)를 적극 옹호한 것이다. 이런 사고는 파격이었다. 그렇다고 사마천이 '균부(均富)'를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사기'의 '평준서'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나라가 태평할 때는 사람들 모두 자중자애하며 부를 누렸다. 이후 부호들이 부를 빙자해 토지를 마구 겸병하며 관직도 없이 위세를 부리자 종실과 공경 이하의 사대부들 역시 이를 흉내 내며 앞다퉈 도를 넘는 사치를 부렸다."
관중과 사마천의 지적은 현대적 의미로 보면 기업가 및 상인 정신의 소중함과 정부의 적절한 시장 개입을 강조한 것이다. 시장과 정부의 역할을 공히 중시한 칼레츠키의 '자본주의 4.0'론과 흡사하다.
최근 중국에서는 '商家'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하다. 우리도 세계에 두루 통하는 모델을 만들어 세계 시장을 공략할 필요가 있다.
[동양학 산책]
"부자의 富 덜어내 백성을 고르게 만들라"
상군서에서 배우는 21세기 富國전략
19대 총선이 막을 내렸지만 곳간의 사정도 헤아리지 않은 채 '묻지마 복지 공약'의 선심 공세가 더 강화될까 겁부터 난다. 격동의 시대에 부국강병의 방략이 전혀 안 보이기에 더욱 그렇다.
'삼국연의' 속의 유비는 시종 군자의 표상으로 그려져 있으나, 그는 원래 부국강병에 심혈을 기울인 인물이다. 정사 '삼국지'에 인용된 제갈량집에 따르면 그는 임종 때 아들 유선에게 이런 유조(遺詔)를 내렸다.
"제자백가서를 포함해 '육도'와 '상군서'를 읽도록 해라. 의지와 지혜를 넓히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승상이 이미 '한비자'와 '관자' 등의 필사를 끝냈다고 들었으나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니 네가 다시 청해 통달할 때까지 열심히 읽도록 해라."
이 가운데 '상군서(商君書)'는 전국시대 중엽 진나라를 최강국으로 만든 상앙(商?i)의 저서인데 '한비자'와 쌍벽을 이루는 법서로 '농전(農戰)'이 핵심이다. 평소 농사를 지으며 '부국'에 매진하다가 전시에 용사로 싸우며 '강병'에 헌신하는 것을 말한다.
상군서는 시종 부국강병을 역설한다. 청조 말기 공맹사상의 대변자를 자임한 호광총독 장지동(張之洞)과 당대 최고 지식인으로 손꼽혔던 양계초를 비롯해 명대와 청대 말기의 난세에 유학자들은 상군서를 탐독하며 주석 작업에 뛰어들었다. 장지동은 서구 열강의 침탈이 가속화하며 유가경전에 대한 회의와 서학(西學)에 대한 열기가 뜨거워지자 상군서를 중학(中學)의 핵심으로 내세웠다.
상군서의 부국강병 방략은 크게 두 가지로 '중벌소상(重罰少賞)'과 '빈치균민(貧治均民)'이다.
중벌소상은 엄한 벌로 중죄의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는 이형거형(以刑去刑)과 오직 전공에 의해서만 관직과 작위를 내려 백성을 천하무적의 전사로 만드는 이전거전(以戰去戰)으로 나타났다. 공평무사한 법치를 요체로 파악한 셈이다. 실제로 상앙은 태자 사(駟)가 법을 어기자 태자의 스승과 교관의 코를 베고 얼굴에 먹을 뜨는 형벌에 처했다. 빈치균민은 가난한 자를 부유하게 만들고, 부유한 자의 부를 덜어내 백성을 고르게 만드는 경제정책을 말한다. 공자가 역설한 균부(均富)와 취지가 같다.
"나라가 부유한데도 국고를 계속 채우면서 부유한 백성의 부를 덜어내는 빈치(貧治)로 다스리는 나라는 강해진다. 나라가 가난한데도 국고를 계속 비우면서 부유한 백성을 더욱 부유하게 만드는 부치(富治)로 다스리는 나라는 패망한다.('상군서'〈거강〉편)
'상군서'의 이런 '빈치' 중시 사상은'부치'에 가까운 무차별 무상 급식 정책이 난무하는 요즘과 분명하게 대비된다.
최근 중국에서 상군서를 새롭게 해석한 주석서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G2시대를 난세로 간주해 빈치균민의 취지를 살리고자 한 것이다. 상군서의 내용 대부분은 천하통일을 위한 공격경영 일색이다. 안방과 문밖의 경계가 사라진 21세기 경제전쟁 시대에서 최후 승자가 될 수 있는 지략이 무궁무진하다. 글로벌 시장을 석권코자 하는 기업 CEO들이 일독하면 큰 도움을 받을 것이다.
[동양학 산책]
조조·당태종·강희제… 名君의 기본 요건은 戰場에서도 책과 함께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것을 수불석권(手不釋卷)이라고 한다. 명군(名君)의 기본 요건이다. 중국의 역대 제왕 가운데 이를 실천한 대표 인물은 조조와 당태종, 강희제 등 3인이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낸 조조가 가장 관심을 기울인 것은 병서였다. 생전에 주석서인 '손자약해(孫子略解)'를 비롯해 '병서접요'와 '속손자병법'등 여러 권의 저서를 펴냈다. '손자약해'가 현재 우리가 읽고 있는 손자병법이다.
그의 리더십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기존의 가치와 관행에 얽매이지 않는 창조적인 발상, 능력위주의 인재등용과 적재적소 활용, 파격적인 포상과 일벌백계의 신상필벌, 때가 왔을 때 우물쭈물하지 않는 과감한 결단이다. 삼국시대는 실이 마구 뒤엉킨 것과 같은 난세였다. 근원적인 해결은 단칼에 실타래를 베어버리는 쾌도난마밖에 없었다. 난마는 군웅할거를 뜻한다. 백성들에게는 지옥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오랫동안 '난세의 간웅'으로 매도됐다. 중국의 초대 사회과학원장을 지낸 곽말약은 말했다.
"후한의 조정은 외척과 환관들의 온갖 비행으로 인해 부도덕한 지배층의 소굴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자들을 몰아낸 게 어찌 찬역인가? 조조는 부패하고 무능한 한나라를 대신해 위나라를 세우고, 경제를 부흥시켰고, 한나라를 재건하겠다는 백일몽에 빠진 유비 등의 야심가들과 싸웠다. 그는 탁월한 정치가였고, 우수한 전략가였고, 백성들의 아픔을 아는 진정한 황제였다."
그는 험한 산과 깊은 물을 건널 때 시흥이 일면 곧바로 시를 지었다. 건안문학(建安文學)을 창도한 것이다.
당태종 이세민은 당나라의 실질적인 창업주였다. 군웅 토벌에 나서면서 서예이론서를 써낼 정도로 문예에 조예가 깊었다. 그가 명장 이정(李靖)과 함께 역대 병서의 특징을 논한 '당리문대(唐李問對)'는 북송(北宋) 때 '손자병법'과 더불어 무경7서의 하나가 됐고, 명신 위징(魏徵)과 치국평천하를 논한 정관정요는 역대 제왕의 필독서였다. 조조처럼 검박한 생활을 영위한 그는 동궁을 다시 축조해야 한다는 건의가 올라오자 이렇게 답했다.
"짐이 기거하는 궁전은 건축한 지 40여 년이 경과했지만 손상된 곳이나 파괴된 곳이 많지 않다. 다만 태자의 궁전은 목수들이 몹시 새롭고 기이하게 지으려 한 나머지 건축한 지 얼마 안 됐는데도 훼손된 곳이 많다. 지금 다시 고치고자 해도 예전 궁전과 닮게 만들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중국 최대 백과사전인 고금도서집성을 펴낸 청나라 강희제(康熙帝)는 서양 과학기술에도 비상한 관심을 기울였다. 신강 일대를 평정할 때 군막 안에서 선교사들과 함께 삼각함수를 푼 게 그렇다.
그의 일상생활은 서민과 거의 같았다. 명나라는 황궁의 침상과 바닥깔개 등에 매년 3만냥을 지출했으나 그의 치세 때는 전무했다. 그는 "모든 비용은 백성의 고혈로 이뤄지는 것이다. 황제로서 절제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내궁인 건청궁의 궁녀도 100여명 남짓해 역대 황제 중 가장 적었다. 그의 손자 건륭제(乾隆帝)는 수불석권을 행했으나 검소한 삶을 살지는 않았다.
100여 년 동안 이어진 소위 강건성세(康乾盛世)의 정점에서 세계 GDP의 3할을 차지한 덕분이다. 그가 가장 중시한 것은 인재의 등용과 활용이었다. 용인의 이치를 논한 정관정요를 늘 몸에 지니고 다녔다. 동서고금의 모든 책을 망라한 '사고전서(四庫全書)'도 이때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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