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논어, 그 사람 공자》 펴낸 역사학자 이덕일
공자의 뜻을 제대로 따른 조선 유학자는 누구일까요?
《조선 왕을 말하다》 《조선왕 독살사건》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윤휴와 침묵의 제국》 《정조와 철인정치시대》 《사도세자의 고백》 《고구려는 천자의 제국이었다》… 서점에서 역사학자 이덕일 박사의 책을 찾으면 40~50권이 나온다.
이 중에서 《조선왕 독살사건》은 이제까지 40만 부 이상 팔렸고,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조선 왕을 말하다》 등 10만 부 이상 팔린 책도 많다. 1997년 첫 책 《당쟁으로 본 조선역사》를 낸 이래 매년 꼬박꼬박 책을 내놓고 있는데, 그의 책 대부분이 스테디셀러가 되어 10여 년 동안 서점가에서 생존해 있다. 웬만한 소설보다 재미있는 그의 역사책은 비전공자에게도 역사에 대한 흥미와 재미, 문제의식을 일깨웠고, ‘역사의 대중화’에 많은 기여를 해왔다.
그가 이번엔 논어와 공자에 관한 책을 내놓았다. 최근 발간된 《내 인생의 논어, 그 사람 공자》다. 논어(論語)는 요즘 서점가의 핫 아이템. 논어 관련 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때에 이덕일 박사는 어떤 생각에서 지금, 논어와 공자를 이야기할까? 그를 만나기 위해 서울 마포구 잔다리로 66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를 찾았다. 연구소 문을 여니 30여 석의 책-걸상이 놓여 있는 강의실이 바로 나타난다. 이곳에서 그는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저녁, ‘1차 사료로 본 한국사 논쟁’ ‘21세기 논어(論語) 신강(新講)’을 강의한다. 강의실 너머 연구소 한편에 있는 그의 연구실에서 시원한 매실차 한 잔씩을 앞에 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제까지 우리나라 역사 인물들의 이야기를 주로 써왔는데, 지금 논어와 공자 책을 낸 계기와 이유가 있습니까?
“우리 사회에서 논어나 공자가 소비되는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어요. 논어가 처세서로 많이 활용되고 있는데, 공자는 사실 처세에 실패한 인물이거든요. 공자는 어떤 길을 가면 성공하는지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게 자신의 신념과 다르면 가지 않는 원칙주의자였습니다.
제후들이 원하는 게 자신이 만들려고 하는 사회의 그림과 다를 때 단호하게 돌아섰죠. 원칙도 없이 현실에 참여해 이도 저도 아니고 만신창이가 되고 마는 요즘 사람들과는 달랐습니다. 조선 후기 주자학에서는 공자와 주희를 신처럼 받들었는데, 공자는 이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습니다.
신이 되기보다 신을 공경하는 사람이 되고자 했죠. 신격화된 공자를 벗겨내고 실존인물로서 공자가 뭘 고민했고,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어떤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는지를 담았습니다.”
이 시대에 왜 논어, 그리고 공자가 부각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공자는 춘추시대, 전쟁이 일상화되고 인간이 도구로 여겨지던 시대에 진정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정치체제는 어떠해야 하고 인간은 어떠해야 하는지 기본적인 고민들을 이야기했습니다. 물질문명이 극도로 발달하면서 그 폐해가 드러나는 요즘, ‘이게 인간 삶의 전부가 아니구나’라는 자각이 생기면서 논어를 다시 읽고 공자의 일생을 돌아보게 된 것 같습니다.
공자의 가르침은 ‘수기치인(修己治人)’ 네 글자로 묶이지요. 끊임없이 자신을 닦고, 그렇게 닦은 인격으로 세상 사람들을 다스리고 편안하게 하는 것이 공자가 바랐던 군자상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수기(修己)가 안 된 인물들이 치인(治人)을 하려 드니 온갖 갈등과 혼란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덕일 박사는 그동안 여러 저서를 통해 조선 후기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노론)이 주자학을 절대주의 사상으로 떠받들면서 신분제를 고착화하고 남녀 차별을 극대화하고, 사회의 모든 변화를 가로막았다고 역설해왔다. 이를 통해 양반 사대부의 계급적 이익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반면 윤휴 중심의 남인은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 혼자 알고 나는 모른다는 말이냐?”고 항변하며 주자학의 절대적 가치에 항거하다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처형당했다.
그렇다면 정작 공자는 자신의 말이 절대적이라고 했을까? 공자는 제자가 실수를 지적할 때 선선히 잘못을 인정할 뿐 아니라 심지어 “나는 행운이구나. 진실로 허물이 있으면 사람들이 반드시 아는구나!”라며 다행으로 생각했다. 공자는 학문이란 스스로 답을 찾으려 노력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했다.
“한 모퉁이를 들어 가르쳐주었는데 세 모퉁이로 답하지 못하면 다시 말해주지 않는다”고 했다. 하나를 가르쳐주었는데, 나머지를 찾으려 스스로 애쓰지 않으면 발전이 없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교육은 어떻습니까? 학생 스스로 답을 찾을 기회를 주지 않고 무조건 외우게 하는 주입식 교육입니다. 이렇게 된 연원의 첫 단계는 조선 후기 주자학이 유일사상 체제가 되면서 다른 사상은 이단으로 몰아 죽이면서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일제가 식민통치를 위해 ‘따지지 않고 외우는’ 교육 시스템을 만들면서입니다.”
그 역시 획일적인 교육 때문에 암울한 학창시절을 보냈다고 말한다.
“저는 좌파고 우파고 전체주의하고는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은 학교인지 군대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죠. 교련복 입고 등교해 군사훈련을 받았으니까요. 학교 공부에는 뜻이 없었지만 책은 많이 읽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고향은 평북 용천으로, 함석헌 선생과 동향(同鄕)이었다. 어려서부터 종교인이자 교육자, 사회운동가인 함석헌, 유영모, 김교신 선생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다. 이런저런 책을 읽으면서 ‘대학에 가면 역사를 공부하고 싶다’고 마음먹었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동년배보다 5년 늦게 숭실대 사학과에 들어갔고, 1998년 ‘동북항일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런데 박사과정에 다니면서 ‘우리나라 역사학계의 지형에 문제가 많다’고 느꼈고, 기존 학계와 뜻을 같이할 수 없어 대학교수의 길은 포기했다.
“미국으로 가서 한국학을 하면서 우리의 정신적 정수(精髓)를 세계화하는 작업을 할까, 이곳에 남아 역사를 대중화하는 작업을 할까 고민했습니다. 그 와중에 쓴 책이 《당쟁으로 본 조선역사》였고, 그 책이 많은 독자들로부터 호응을 얻었지요. 그 책은 1997년에 나왔는데, 박사학위는 1998년 2월에 받았습니다.”
그의 책은 인물을 중심으로 물 흐르듯이 이야기가 전개돼 흥미진진하게 술술 읽힌다.
“제게 역사책 쓰는 방법을 가르쳐준 스승은 조선후기 역사가 이긍익입니다. 이긍익이 쓴 역사책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을 보면, 한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상반된 시각을 모두 쓰면서 일일이 출처를 밝혔습니다. 이긍익이 당쟁으로 풍비박산이 난 집안사람이라 한 시각으로만 쓰면 객관성을 의심받았겠지요. 직접 만나지는 않았지만 저술을 통해 사사받는 방식은 조선시대에도 흔했습니다.
다산 정약용도 성호 이익을 스승으로 삼았는데, 두 사람은 만난 적이 없지요. 다산은 성호 이익으로부터 주자학을 뛰어넘어 고대 유학으로 거슬러 올라가 학문하는 방법을 깨우쳤습니다.”
지금은 내는 책마다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를 만드는 저술가가 되었지만, 직업도 없이 읽고 쓰는 일만 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생활을 어떻게 해결할지 걱정되지 않았을까. 그에게 물었다.
“요즘 정서와는 맞지 않는 것 같아 잘 말하지 않는데, 하루에 라면 3개, 소주 한 병만 있으면 충분하다 생각했습니다.”
그는 역사학계가 정설로 받아들여온 것들에 대해 끈질기게 문제제기를 해왔다. 조선 후기부터 내려온 노론 중심의 사관, 식민사관이 극복되어야 우리 역사가 바로 쓰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제 책에 대해 상반된 평가가 많아요. 누구는 주장이 너무 강하지 않으냐고 하는데, 누구는 ‘왜 당신 이야기는 없느냐’고 합니다. 1차 사료를 그대로 제시하기 때문이지요. 요즘 왕조실록이나 개인문집들이 인터넷으로도 서비스되니 독자들에게 직접 찾아 읽고 판단하라고 합니다.
한국고전번역원, 국사편찬위원회뿐 아니라 대만의 중앙연구원 사이트까지 활용할 수 있으니까요. 중세 신부들은 자신들만 아는 라틴어로 성경을 읽으며 ‘이렇게 쓰여 있다’고 일방적으로 이야기했는데, 마틴 루터가 라틴어를 독일어?영어로 번역하면서 일반인도 직접 성경을 읽기 시작했잖아요?
이제 학자들이 독점해온 사료를 일반인도 마음껏 접근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사료를 읽는 사람이 많아질 때 우리 역사기술에도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의 책을 읽는 지식독자가 학자들보다 수준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조선 왕을 말하다》 같은 책은 결코 쉬운 책이 아닌데, 10만 부 넘게 팔렸습니다. 지적인 이야기를 소화해낼 만큼 독자층이 성숙했다는 이야기지요. 대중강연을 해보면 듣고 질문하는 수준이 굉장히 높습니다. ‘당신 책을 읽고 역사책을 쓰게 됐다’며 책을 보내오는 분도 있고요. 대학 중심의 학문 카르텔이 이미 깨지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 역사의 소재는 저 같은 사람 100명이 1000년을 쓸 수 있을 정도로 무궁무진합니다.
특정 학자가 해석한 2차 사료가 아니라 1차 사료를 직접 접하며 글쓰기를 하시라 권하죠. 저희 연구소의 강좌도 거기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는 연구소에서 5000보 떨어진 곳에 집을 얻어놓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읽거나 쓰는 작업을 계속한다. 오고가면서 1만 보를 걷는 게 운동시간. 외부 강연도 시간 뺏기는 게 두려워 제한적으로만 받아들인다고 한다. 우리 역사를 연구하다 보면 ‘내 이야기를 써달라’는 인물, 사건이 생기는데 그것이 축적돼 책이 된다. 콘텐츠가 축적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길지만, 집필시간은 길지 않다 한다. 글을 쓰면서 어떤 장면은 드라마틱하게, 어떤 장면은 사료 그대로를 제시하며 독자들을 역사의 현장으로 이끌고 간다. 그에게 글을 쓰는 궁극적인 목적이 뭔지 물었다.
“제게 쓰는 일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일부로, 세상에 참여하는 방식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책을 통해 사상과 학문을 전파하며 세상을 조금 더 좋은 방향으로 바꾸어나가는 역할을 해야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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