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問/人文學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 / 전혜린

경호... 2015. 7. 14. 07:05

 

 

 

권태란 우리를 소모시키고 파괴시키는 격렬한 열정이다.

권태란 이제 서로 신뢰할 수 없게 된 옛 공범자 두명 사이의 무서운 증오감이다.

 

나는 추구한다. 창백하고 순수한 달의 그 무감각한 냉정을 나는 갈망한다.

 

나는 끈끈한 것, 숨이 뜨거운것, 야비한 것, 친숙한 것을 증오한다.

나는 평범한 것을 증오한다.

 

나는 절대를 추구한다.

그러나 생은 나에게 평범과 피상의 것 외에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는다.

나는 중세와 대리석을 동경한다. 그릴파르처의 '절대세계'를 나는 동경한다.

무섭게 깊은 사랑, 심장이 터질듯한 환희, 죽고 싶은 환멸 등등,,,

일상 생활의 평면성이, 내용없는 인간들이 나를 질식시킨다.

나를 절망속으로 몰아 넣는다.

 

그리고 너의 사랑의 발작을 주의하라!

 

고독한 자는 그가 만난자에게 너무도 빨리 손을 내민다.

너는 많은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서는 안되고 단지 앞발을 내밀어라.

 

그리고 네 앞발에 발톱도 있기를 바란다.

 

정신속에서 나를 구제하지 않는다면 생이란 제로인 것이다.

존재에, 욕망에, 메커니증에 빠져서 응결되어 흐름이 없는 생이라면 계속할 이유가 없다.

어떤 순간에라도 정신의 비약이 느껴지는 순간이면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란 끝없는 겸손과 신뢰와 회의, 투쟁과 오해의 총체인거 같다.

그것을 감정적으로 본다면 '불안'일 것이다.

 

무언지 허전하고 가슴이 답답한 느낌이 든다.

나무라도, 돌이라도 굳은 것을 안고 엉엉 울거나 막 취해 웃고싶은 느낌!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데서 오는 허망.

 

끝없는 회의의 숨가쁜 교차, 그리고 둔중한 단조, 이것이 생활의 리듬인 것 같다.

될 수 있는 대로 감정은 질식시켜버릴 것.

오로지 맑은 지혜와 의지의 힘에만 기댈 것.

 

이것이 사람이 도달 할 수 있는 최고의 곡예사(Akrobat)인 것 같다.

그 상태에서는 야심을 느낀다. 다른 모든 것은 아무래도 좋다.

물같이 맑은 의식의 세계에서 늙은 잉어같이 살고 싶다.

 

니체의 말, '이모든 괴로움을 또다시!'가 얼마나 숨막히게 무서운 말인가를 느낀다.

온갖 싫은 일들, 너저분하고 후줄그레한 일들,

시시하고 따분한 일들이 깔려있는 운명의 아스팔트지만 이 길이 끝이 안났으면 하는,

또는 또 한번 하는 의욕은 실로 무겁고 기름진 삶의 욕구의 사고(思考)일 것이다.

 

... 

 

 

의식하는 나와 생활하는 나,

내 손의 상부 구조와 하부 구조,

내 의식 속의 남의 의식, 남의 의식 속의 나의 의식,

커뮤니케이션의 너무나 드물고 너무나 짧은 데서 오는 단절감, 비애,

영혼과 영혼이 완전한 고독 속에서 맞부딪치는 어려움,

쉬운 길, 만인의 길, 자기를 내 던지고 유한성과 탁월성에 눈 감는 길의 크나큰 유혹,

나만이 어떤 오식 활자같이 거꾸로 박혀 있는 것 같은 콤플렉스.......

기타 삶의 메카니즘이 요구하는 의무 반감 및 무력이 모든 갈등에 넘친 가시밭 같은 길이 우리의 삶의 질이다.

매일 우리는 그 길 위에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땀과 피를 흘리는지 모른다.

공동 사회는 우리의 의식이 실존하는 것에 반대밖에 되지 못하고 세계는 개체와 분쟁 상태로 대립해 있는 것이고 또 우리는 타자 존재 없이는 생각할 수도 없는 세계 속의 존재인 것이다.

얼마나, 얼마나 모순에 넘친 가엾은 존재가 인간인 것일까?

언제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살아야 한다.

그것이 소제기같이 우리를 분말화하는 것에 불과하고 삶이란 풍화작용의 일종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우리는 이 무서운 허무감에 눈을 뜨고 응시해야 한다.

 

무無를 견딜 수 있는 경지를 내 속과 내 주변에 만들어야 한다. 우리 삶이란 결국 부단히 나에 이르는 길 외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이것을 잊지 말고 올해는 보다 나에 성실하게, 보다 진정한 실존으로서 존재하고 싶다.

나와 내 죽음의 본질을 파악하려고 모색하고 싶다.

온갖 정신의 게으름이나 낭비를 두려워하자.

무엇보다도 속화俗化에의 그것은 방지되어야 한다.

나의 생활을 시작하면 곧 등장할 내 속의 속물을 미리 공포스럽게 혐오하고 멀리 하자.

언제나 언제나 너 자신이어야 한다.

아무 앞에서도 어디에서도.......

우리의 일회성을 명심하고 일순간을 아끼자.

미친 듯이 살자. .

 

 

-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  中에서

 

 

... 

 

 

 

사랑을 받고 싶은 본능 / 전혜린

 

사랑만이 우리를 온갖 악에서 해방시켜 주는 유일한 요새다.

많은 사랑을 적당한 방법으로 받고 자라난 사람만이 정상적인 정서와 남을 사랑하는 마음의 부드러운 풍요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이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생래의 두 가지 본능이 있다.

하나는 타인 또는 사회로부터 자기(또는 자기의 재능, 기타 어떤 형태의 현존재)를 인정받고 싶다는 충동이고 또 하나는 남의 사랑을 갈망하는 마음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도 사랑받고 싶은 본능은 몹시도 강하게 우리에게 집착하는 내면적 욕구이다. 순탄하게 정상적이고 절도 있는 범위 내에서 풍요하고 만족스럽게 사랑을 받고 자라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하늘과 땅 이상의 심연이 놓여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한 인간 속에 내재하는 위대함의 가능성이 컸다 하더라도 이 기본 조건의 상위는 꼭 그들의 생이나 작품이나 사람을 통해서 표현되고야 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똑같은 정도의 천분을 가진 두 작가의 경우, 풍부하고 정상적인 애정을 받고 자라난 사람과 그와 반대되는 사람의 작품을 보면 그들의 작품 속에 그들이 받고 자란(또는 못 받고 자란) 애정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다.

 

괴테의 모든 작품에 깃든 자족한 고요, 풍요한 조화는 그의 행복했던 어린 시절, 양친의 조화된 생활을 생각함이 없이는 완전히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온갖 정열이나 회오에서도 온건함과 절도 내지 품성을 끝까지 잃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중용'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중용은 어떤 나라의 어떤 사람의 경우에 있어서도 어린 시절 및 양친의 생활과 훈육과 끊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어떤 교육도 암시, 모방 또는 반발에의 이상의 무엇일 수 없다는 이론을 긍정시켜 준다.

다시 말하면 결과로 보아서 부모는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이다. 우리는 부모의 행위를 보고 무의식 중에 모방하고 또는 의식적으로 반발한다.

그들의 명령과는 관계 없이......

 

여기에 부모의 역할에 어려움이 놓여 있는 것이고 여기에 괴테적인 조화의 인격을 가진 사람을(그의 재질과 물론 무관하게) 우리 주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원인이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의 내부에 정리되지 못한 여러 가지 복합 현상을 숨기고 있다.

그리고 그 원인은 거의 전부 부모의 부조화된 사랑 또는 일분의 편애 또는 학대, 무관심 등에 그 제일 깊은 원인을 가지고 있다. 부모의 잘못으로 어린 아이의 정서가 정상적인 단계로 발육을 못하고 억압되었을 때 그 억압된 정서는 의식 밑으로 들어가서 병적 증후로 되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발산되는 것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인간의 본능 발달의 단계는 유년기에는 자기애(나르시시즘), 다음에는 자기와 비슷한 모습과 성격을 가진 사람을 사랑의 대상으로 동성애를 거쳐서 이성인 타인을 사랑의 대상으로 하는 이성애의 시기로 옮겨 간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까지의 발달에 여러 가지 장애가 있었을 경우에 본능은 하급의 발달 단계에 고착해서 완전한 이성애로까지 발달하지 못하고 도착 현상을 일으키게 된다고 한다.

 

새디즘, 매저키즘 또는 이상 성격이 그 결과이며 인간의 정신갈등은 요컨대 전적으로 나와 본능과의 알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프로이트는 보고 있다. 어려울 때 우리가 받은 애정, 다시 말하면 우리의 내년에 있는 애정을 우리가 길러 받은 정도 여하에 우리가 정상적인 인간인가 아닌가의 키 포인트가 있다는 것이다.

맹목적적인 동물적 사랑은 백해 무익이리라. 그러나 우리에게는, 특히 유아기의 우리에게는 햇빛보다도 부모의 애정이 필요하다는 것은 이미 확인된 사실이다.애정 속에서 어린이가 잔인한 인간, 무궤도한 반사회적 내지는 위법적 인간으로 되는 일은 거의 없다.

 

그와 반대로 냉혹하고 무관심한 가정에서 소망되지 않은 아이로 탄생해서 온갖 부드러운 정서를 의식 밑에 몰아 넣어야 하는 유년기를 보내지 않으면 안 됐던 사람한테서 우리는 그가 선에 있어서도 악에 있어서도 과장된 과격한 정서와 열정적인 면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만약 그 외의 어떤 범행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크게 놀라지 않을 것이다. 스웨덴의 극작가 스트린드 베리는 몹시 극단적이고 병적인 만큼 애정에도 증오에도 집념이 강한 이기주의적인 인간으로 그의 작품과는 별개로 인간으로서의 그의 생은 실패로 끝난 사람이다.

 

그런데 그의 일생을 통한 기행과 병적 발작과 고뇌는 그의 유년기에 이미 싹텄었다. 주인과 식모 사이에 생긴 '소망되지 않는 아이'였던 그는 일생 동안 그의 출생의 수치와 아버지의 냉담과 어머니의 경멸을 극복하지 못했었다. 오스트리아의 극작가 그릴파르처도 조화되지 않은 부모의 문제성을 그대로 반영한 억압과 복합에 넘친 폐쇄적인 성품의 인간이었고 작품 속에서의 승화 작용 이외의 그의 생은 역시 하나의 실패작으로서 가정도 아이도 가져 본 일이 없는 사람이다.

 

릴케도 엄격한 아버지와 경박한 어머니의 무지와 이별로 아버지 혼자의 손으로 키워진 유년 시절의 소유자다. 그 자신의 결혼에 의한 내면적 안정을 획득하려는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일생 동안 어머니로부터 정신적 고통을 느낀 결과 비정상적일 만큼 여성에 정신적 동경과 관심을 갖고 방황했다.

베토벤의 가정적 불행과 그의 생의 어두움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재능의 개화는 왕왕 이러한 모순된 성격의 대립 속에서 끊임 없는 승화에의 의지 속에서만 가능한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천재를 안 가진 범인은 높고 아름다운 것 속에 자기의 억압을 높여서 표현하는 대신 여러 가지의 이상 현상(남을 해치고 싶은 욕망, 또는 자학 또는 기타의 병적 발작) 속에 배설하려고 하는데 그치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일반적인 사회적 견지에서 볼 때 애정이 없는, 또는 양친이 화목하지 못하고, 조화되지 않은 가정에서 아이 속에 있는 애정을 눌러 없애는 방식으로 기르는 교육은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요즈음 청소년의 범죄가 많다고 한다.

 

특히 온 집안을 살해한, 전에 수재였다는 청년의 경우도 최근에 있었다. 그 청년의 과격하고 비정상적인 행위의 원인은 물론 부모에게 있다. 행위를 결과로만 보지 않고 원인에서 본다면 부모 쪽에 몇 배의 책임이 있다. 사랑을 받은 일도 없고 자기 내부에 있는 사랑마저 완전히 눌러 버려진 아이가 자라나서 냉혹하고 과격하고 인간의 존귀성을 무시하는 사람이 되었다면 그 잘못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처음부터 애정의 햇빛을 담뿍 쬐어 주어 잘 자라게 하지는 않고 어린 싹을 짓누르려는 전연 비협조적이고 오히려 파괴적인 태도로 임하고 있다가 그 나무가 자라서 다른 나무와 같이 무성하고 싱싱하지 않다고 우리는 욕할 수가 있는 것일까? 청춘 시대는 직관과 감각이 예민하고 순수하며 세계 전체와 자기 자신에 대해 요구가 높고 많은 교만한 시절이다. 따라서 이 시절에 더욱 범죄의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 또는 슈닛츨라의 ≪테레에제≫의 아들, 또 그와 유사한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의 아들 중 젊은 범인들의 무리가 전부 불행한 가정의 소산으로 되어 있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이다. 사랑만이 우리 인간을 온갖 악에서 해방시켜 주는 유일한 요소라는 것은 몇 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자기의 내부에 있는 애정을 조금도 구김 없이 발달시켜서 그 애정을 남에게 순수하게 쏟을 수 있게 된 사람만이 정상적이고 성실한 사람일 수가 있는 것이니까 그러한 사람에게만 사회에의 연대감, 타인에의 책임감과 박애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사랑 속에 자라나고 사랑을 지닌 사람은 반사회적이거나 위법적일 수가 없으며, 사랑을 모르고 자라나고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전부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가능성에 있어서 반사회적 위법적일 수가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온갖 청년의 범죄를 볼 때 그의 어린 시절이 눈앞에 그려지고 한편 구석에서 손가락을 빨거나 매를 맞고 울고 있거나 하는 아무도 돌보아 주지 않는 어린 아이의 모습이 선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그 오랜 억압의 생활은 지옥보다도 길었으리라고 동정이 가고 결국 그를 도울 수 있었고 앞으로도 도울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사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다.

 

나쁜 것은 언제나 아이가 아니라 부모인 것이다.

마치 나쁘게 자란 나무의 책임이 정원사에게 있듯이.

 

 

 

 

사치의 바벨탑 / 전혜린

 

 

여성의 가장 큰 본질적 약점은 사치의 광적 추구와 같은 생에 대한 비본연성인 것 같다.

 

'여자는 전체로 보아서 아직도 하인의 신분에 있다. 그 결과 여성은 자기로서 살려고 하지 않고 남성으로부터 이렇다고 정해진 자기를 인식하고 자기를 선택하도록 된다. 남자의 손에 쥐어진 경제적 특권, 남자의 사회적 가치, 결혼의 명예, 남자에 의존하는 것에서 얻는 효과, 이러한 모든 것이 여자들로 하여금 남자의 마음에 들도록 애쓰고 있다.'

 

여성에 관해서 말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남성에 대한 여성의 관계에 있어서 언급되어야 한다. 우리 나라뿐 아니라 전세계의 어느 나라에서도 여성과 남성 간의 사회적 차이와 대립이 완전히 제거된 곳은 없으며 앞으로도 사회 구조의 전적인 변화가 없는 한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몹시 느린 속도로 향상되어 가는 과정에 있고 아직도 우리는 평균적으로 보아서 여자가 사회에 한 발을 디디고 서기가 마치 미국에서 한 흑인이 그렇게 하려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힘드는 처지에 있다. 그러한 남성과 여성 간의 커다란 차이를 미리 고려하면서만 우리는 여성의 제문제 또는 약점을 파고들어갈 수가 있을 것이다.

 

여성의 가장 본질적 약점으로 나는 생 전반에 대한 비본연적 태도를 들고 싶다. 자기 자신을 순간순간마다 의식하고 사회와 세계에 대해서 자기를 투기하고 초월하면서 사는 것이 본연적인 생활 태도라면 태반의 여성의 생활은 그와 반대라고 말할 수 있다. 즉 보다 큰, 보다 진실한 문제--유는--에 빠져 있고 그 곳에서 아무런 타격도 전율도 반응 없이 흘러가듯이 사는 생활 태도, 말하자면 비진정하고 불성실한 생활 태도가 대부분 여자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남녀를 막론하고 인간이라는 무서운 조건하에 있는 우리가 해야 할 유일의 일은 우리의 삶을 규명하는 것일 것이며 적어도 그러한 근본적인 생활 감정에 지배된 생활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유일의 진실하고 엄숙한 문제는 회피하고 자그마한 일들, 물진, 사치스런 생활, 남자에게 의존 또는 기계와 같은 나날의 틀 속에 안면하는 의식, 이러한 것들 속에 자기를 소외해 버리는 생활은 허위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생과 사에 자기를 똑바로 응시하고 산다는 것은 무서운 용기와 신경력을 요한다. 특히 이 사회의 구조와 한국적 풍토 속에서는 너무나 신경이 긴장되는 작업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 없이는 전생의 의의가 무로 화하는 것이니까 그것을 회피하는 것은 일회적으로 주어진 우리 삶에의 죄인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기를 좀더 응시할 수 있을 것, 자기를 견딜 수 있을 것이 결과적으로는 다 비극인 우리의 생의 소상을 긴박한, 팽팽하게 차 있는 참된 순간으로 지속시키는 방법일 것이다.

 

우리가 존재에서 외면하고 사실의 세계로만 눈을 향하는 데에 여성에 대한 사회의 비난의 근본 원인이 있다고 본다. 자기 과제를 느끼지 못하는 삶에는 필연적으로 공허가 따르고 따라서 오락의 필요가 생긴다.

 

최신 유행의 여성들에게 갖는 매력은 거기에 있다. 왜냐하면, 물건을 사는 것--특히 몸에 붙일--은 어느 나라 여성을 막론하고 남자들에게 있어서 바와 필적할 만한 상쾌한 오락인 까닭이다.

 

가장 유행이고 가장 비싼 물건을 입거나 신을 여자의 얼굴에는 반드시 어떤 빛나는 생기가 떠 있다. 그 순간은 그 여자는 살고 있는 까닭에 자기가 이룰 수 없는 사회 내의 일이나 지위나 가치의 인정을 완전히 보상해 주어서 하고 있다. 사치스러운 복장에 대한 여성의 판타직은 억눌려진 야심 사회 내에서 해당하고 싶은 본질적 욕망과, 자기는 다른 여자와 다르다고 어떤 여자든지 반드시 믿고 있는 오신, 또 누구나 다소 가지고 있는 나르시즘(자기 연애) 등의 혼합물인 것이다.

 

정말로 수많은 여인은 이 광신의 추구를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아끼지 않고 있다. 월급의 전액을 차지하는 값의 지갑을 태연히 들고 다니고 연봉에 해당되는 값의 외투도 서슴지 않고 해 입는다.

 

현실에서는 발견하거나 인정되지 않는 자아의 가치를 이러한 방법으로나마 가상적으로라도 만들어 보려는 것이다.

 

외투도 신도 곧 닳아 버리는 물건이고 유행도 바뀐다. 즉 가상적 자아의 '바벨탑'은 너무나 빨리 무너지는 것이다. 그러면 또 새로운 투쟁이 시작된다. 이렇게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여성의 물질에 대한 애착은 웃거나 비난하기에는 너무나 어둡고 심각한 근원이 여성의 내재 속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비본질적 존재로 여성을 만든 것은 여성의 지능 계수도 생리도 아니고, 다만 사회의 상황인 것으로 사회와 가정은 여성을 가능한 한 비본질적으로 교육하기에 전력을 다해 왔다.

 

여성의 자주성을 찾으려는 가장 조그만 움직임이나 생각까지도 조소되고 비난받아 왔고 다만 두 사람의 합의에 의해서 공동하게 생활을 건설해 가고 둘이 다 자아의 생장을 지속시켜 가는 공동체라고 보아야 할 결혼을 사회는 여자의 궁극적인 숙명, 여자의 자아 발전의 무덤으로서 또 어떤 절대적인 영광스러운 예속으로서 가르쳐 주어 왔다.

 

말하자면 비진정하면 할수록 여자다운 여자일 수 있다. 그러한 전통에 닦인 여자도 자연히 그러한 사고 방식을 갖게 되었고 그것에서 이익을 끝내어 줄 것까지도 알게 되었다.

 

즉 자기의 삶 전부를 실존을 스스로 순간마다 결단하고 세계로 향해서 투기하는 생활 대신에 한 남성에게 자신을 꽉 맡겨 버리고 자기는 더 이상 사고할 필요 없이 사소하고 무상하게 흘러가는 일상성과 사실성의 세계에 파묻히는 편이 얼마나 편하고 또 사회에서 잘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의식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어느 여자도 그것에 완전히 만족하거나 행복을 느끼지도 않을 것이다. 적어도 그런 생활에는 일순 일순의 팽팽한 충일감과 초월의 느낌이 없을 것이다. 어느 주부든지 어떤 순간에는 반드시 자기를 부조리하게 느낄 것이다. 쌀 씻고 빨래하고 옷 꿰매고, 나날의 무서우리만큼 단조한 반복 속에서 그 여자의 인식은 엷게나마 눈을 뜰 것이다.

 

이것이 나의 생활인가 하고, 그럴 때 우리는 그 의식의 각성을 소중히 포착해야 한다. 그리고 파고 들어가야 한다. 분명 그것은 나의 생활이 아닌 것이다. 누구냐의 생활에 불과한 것이지 자기를 사물이나 타자의 속에 소외 해 버린 일반적인 아무나의 삶이지 그것은 이 일회적인 나만이 가질 수 있는 삶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것을 의식할 때 우리는 생이 진정한 것이 아니었고 불성실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보다 한 발자국 나와 가까워진다. 자아에 대해서 비로소 눈을 뜬 느낌을 갖게 된다.

무엇보다도 자아에 자기의 감정과 이성과 신경에게 충실한 것, 그것 이외에 우리가 자아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없다. 그것만이 사치, 허위, 소극성, 아첨, 비굴, 수다 등등의 여성에 붙여진 비난의 제 레테르를 벗는 길로 한 걸음 나아가는 길이다.

 

이 모든 레테르는 남성들의 사회에서 남성에 의해서 붙여진 레테르이다. 그러나 사회 상황의 변화에 의해서 남녀가 정말로 동등한 입장이 되고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세계를 향해서 자신을 초월하는 행위 속에 자기를 찾을 수 있을 때까지 여성은 개인적으로라도 무서운 고독과 절망과 싸우면서 자아를 좇는 길을 걸어가지 않을 수 없으며 현재도 걸어가고 있는 사람이 숨은 곳에 많으리라고 확신한다.

 

지엽적인 여성의 결점은 모두 이러한 비실존적 생활 태도에서 나온 것이므로 우리는 여성의 결점을 열거하는 것보다도 우선 우리의 존재의 문제를 좀더 밝혀야 한다고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경제적으로 비의존적으로 투기가 가능해진다면, 아니 한 마디로 여성의 경제적 지위가 남성의 그것과 동등해진다면 여성의 근본 결함인 비진정, 불성실한 생활 태도는 자연 소멸하고 여성도 보다 높은, 보다 참된 과제를 자기의 생활 과제로 삼게 될 것이다.

 

 

 

 

휴식과 포도주에 넘친 어둠 / 전혜린

 

슬픈 기타 소리가 흐른다.

그리고 방 안의 부드러운 등불로 꿈 속처럼 너는 돌아간다.

공기에서는 서리와 안개와 낙엽 냄새가 섞여서 났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공원에 가는 일도 드물어졌다. 11월 중순--아직 한국에서는 가을이지만 여기서는 눈이 큰 송이로 내렸다.

눈이 내리는 소리, 그리고 난로의 석탄이 타오르는 소리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날이 계속되었다. 눈이 와도 무섭게 왔다. 세원 둔 자동차가 눈에 폭 파묻혀 안 보이게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나는 한국서 가져온 얇은 천으로 된 학생용 검은 오버를 입고 오돌오돌 떨면서 학교에 다녔다.

 

점심은 커피 대신 그로크(펄펄 끓인 포도주)와 수프로 했다.

그래도 추웠다.

때로는 눈이 멎고 다시 영원한 뮌헨의 하늘빛인 회색 구름장이 덮이거나 안개비가 촉촉히 내렸다.

나는 두꺼운 색양말을 신고 두꺼운 머릿수건을 쓰고 다시 공원으로 갔다. 사람이라고는 없고 나뭇가지가 앙상한 해골을 노정시키고 있었다. 벤치에 앉아서 검은 나뭇가장이들 사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변함없는 회색일까? 하고...

아는 얼굴이나 목소리가 하나만 있어도 이 하늘이 이렇게까지 우울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원한 물음 '당신이 어디서부터 왔는가?'에서 도망하고 싶었고 황색 비전을 나는 좇고 있었다. 낮이나 밤이나 우울한 회색과 안개비와 백일몽의 연속이었다. 악몽처럼 혼자라는 생각이 나를 따라다녔고 절망적인 '고국까지의 거리감'에 나는 앓고 있었다.

지금도 나는 뮌헨의 가을 하면 내가 처음 도착한 해의 가을이 생각나고 그 때의 심연 속을 헤매던 느낌과 모든 것이 회색이던 일상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아무것에도 자신이 없었고 막막했고 완전히 고독했던 내가 겪은 뮌헨의 첫가을이 그런데도 가끔 생각이 나고 그리운 것은 그러나 웬일일까? 뮌헨이 그 때의 나에게는 미지의 것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인지, 또는 내가 뮌헨에 대해 신선한 호기심에 넘쳐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안개비와 유럽적 가스등과 함께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 때의 나의 젊은 호기심인지도 모른다.

나의 다시없이 절실했던 고독인지도 모른다.

 

 

 

 

 

밤이 깊었습니다 / 전혜린

 

삶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별로 즐거운 일이 아닙니다. 너무나 추악하고 권태로운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약간의 베일을 씌우고 약간의 안개로 가리고 삶을 볼 때 삶은 아름다워지고 우리에게 견딜 수 있는 무엇으로 변형됩니다. 덜 냉혹하게 덜 권태롭게 느껴집니다. 저녁 때 푸른 어둠 속을 형광이 일제히 켜지는 시간부터 神秘(신비)는 비롯되는 것입니다.

 

어둠은 奇蹟(기적)을 낳습니다. 어둠 속에서 우연히 만난 옛날에 알던 사람과 우리는 곧 核心(핵심)에 와 닿는 對話(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낮은 赤裸裸(적나라)한 日光(일광)으로 모든 浪漫(낭만)을 박탈해버리는데 比(비)해서 밤은 우리를 꿈속같이 막연하고 不透明(불투명)하게 부드러운 낭만으로 감싸줍니다.

 

우리들 人間(인간)은 너무나 不完全(불완전)하기 때문에 밤이 切實(절실)히 必要(필요)합니다. 자기가 대낮이라고 외치고 '빛' 이기만 하고 어둠일 줄을 모르는 슬픔을 노래한 니체(Nietzsche)보다 우리는 "오 밤이여, 나는 또 코카인을 먹었다!" 라고 詩(시)를 쓴 벤(Benn)에 더 同情(동정)이 갑니다. 그만큼 니체의 時代(시대)보다 現代(현대)는 生活(생활)이 복잡해지고 낮의 부담이 더 무거워진 것입니다.

우리는 삶을 신비화하기 위해서, 또 日常(일상) 생활의 기계적인 궤도가 주는 피로에서 놓여나기 위해서 또 정말로 자기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기 위해서 밤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밤은 우리를 포근히 안아줍니다. 모든 괴로운 사람에게도 다 밤은 부드러운 이불이 되어주고 감싸 줍니다. 마치 우리는 어머니의 胎(태)안에 있는 것 같은, 完全(완전)히 모순없는 內在(내재)의 意識(의식)이 주는 하모니를 心身(심신)에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몸을 밤에 내어 맡깁니다. 孤獨(고독)하게 어둠 속에 누워있을 때 우리는 事物(사물)이 突然(돌연) 그의 日常性(일상성) 밖으로 달아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온갖 물체가 입체성을 잃고 마치 流動體(유동체)처럼 우리의 意識(의식) 속에 홀러 들어오고 外界(외계)와 우리가 奇妙(기묘)한 새로운 關係(관계)에 서게 됩니다.

 

낮 동안에는 觀察(관찰)이나 評價(평가)의 對象(대상)이었던 對象(대상)으로서의 외계가 不時(불시)에 그 限界(한계)를 넘고 우리와 '너의 관계' 즉 아무런 제3조건이 개입할 수 없는 단 둘만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외계와 완전히 合一(합일)될 수 있는 완전한 瞬間(순간)을 우리는 그때 體驗(체험)하게 됩니다. 여태까지 不可能(불가능)하게 생각되었던 모든 일이 不時(불시)에 너무나 當然(당연)하고 自然(자연)스러운 일로 생각됩니다.

 

우리는 일상성의 테두리밖에 있는 것이니까…. 그때 우리는 정말로 우리들 自身(자신)일 수가 있습니다. 어둠보다 더 짙은 것, 더 부드러운 것 그리고 더 純粹(순수)한 것이 있을까? 모든 조잡과 不調和(부조화)와 추악의 原色(원색)을 抽象(추상)해 낸 검은 빛, 누비아 女人(여인)의 몸의 빛과 같이 매끈한 暗黑(암흑)이 지금 훈훈하게 우리를 안고 있습니다.

 

어둠에 몸을 맡기십시오. 밤의 품안에 안기십시오.

낮의 생활의 소용돌이가 남겨놓은 原色(원색) 자갈돌을 어둠으로 덮으십시오.

 

暗黑(암흑)을 포옹하십시오. 순수를 渴求(갈구)하십시오.

우리의 生(생)은 투쟁과 갈등의 끊임없는 反目(반목)의 持績狀態(지속상태)입니다. 꿈과 現實(현실) 藝術(예술)과 生活(생활), 生(생)과 死(사), 이런 反對(반대) 開念(개념)들이 우리의 生(생)의 瞬間瞬間(순간순간)을 갈등과 決斷(결단)으로 몰아넣고 우리를 緊張(긴장)시킵니다.

 

한 순간 한 순간이 우리의 意識(의식)의 결단 없이는 흘러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순간의 總體(총체)가 우리의 생이며 우리는 우리의 생에 '責任(책임)' 이라는 무거운 쇠사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自由(자유)'라는 날개가 우리의 등에 달려 있는 것도 우리의 발에 묶인 쇠사슬의 對價(대가)인 것이니 結局(결국) 우리는 一生(일생)동안 꿈속에서밖에는 날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모순과 갈등, 그리움과 환멸의 不連續線(불연속선)인 생에 대해서 죽음은 休息(휴식)과 모든 투쟁의 종언을 뜻합니다. 생이 偉大(위대)한 대낮이라면 死(사)는 밤일 것입니다.

 

모든 모순과 분규를 일단 그대로 받아들인 채 포근히 감싸 덮고 마는 포섭力(력)과 유화력의 소유자가 밤입니다. 괴로운 사람일수 록 밤을 사랑합니다. 햄릿도 "죽는다는 것은 잘 자는 것….

그 以外(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그의 밤을 渴求(갈구)해 왔고 종래는 덴마크王國(왕국)의 기나긴 밤 - 깨어남 없는 잠을 가져오는 永遠(영원)의 밤을 빚어내고 말았습니다. 그는 모든 생각하는 사람, 괴로워하는 사람처럼 밤의 人間(인간)이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낮보다는 밤에 생보다는 死(사)에 그의 關心(관심)이 가있던 人間(인간)이었습니다. 밤은 그러니까 일상성으로부터의 脫皮(탈피)에서부터 生命(생명)으로부터의 超絶(초절)로까지 昇華(승화)될 수 있는 힘의 所有者(소유자)이기도 한 것입니다.

 

괴로울 때 우리는 밤을 바랍니다. 밤을 그립니다.

그리고 밤이 되고저 우리를 파괴해버리는 일까지도 있는 것입니다.

車(차) 소리도 발걸음 소리도 멎었고, 바람소리가 별과 섞이는 時間(시간)이 되었습니다. 暗黑(암흑)의 魔力(마력)이 噴水(분수)처럼 소리높이 우리 속에서 또 우리 주변에서 솟아나고 소리를 내면서 시간입니다.

내 마음도 밤입니다. 모든 연인들의 마음처럼 밤입니다. 그리고 분수처림 소리높이 내 마음은 깨어 납니다. 낮 동안 모든 굴레와 생활이 주는 汚辱(오욕)에 눌려져 있던 내 마음이 비로소 크게 노래하는 시간이 왔습니다.

 

낮동안 우리는 얼마나 밤에 굶주렸었는지 모릅니다. 거칠고 손 때 묻은 石灰(석회)벽 속에서 손을 더럽히는 노동에 종사해야 했던 우리의 영혼이 한 송이의 리라꽃으로 變身(변신)하는 시간이 왔습니다.

魔術(마술)의 시간, 陶醉(도취)의 시간, 사랑을 위한 시간입니다. 낮 동안 잠들었던 우리의 마음이 활짝 깨어나고 그리움에 몸부림치면서 純粹(순수)를 찾는 때입니다. 아, 영혼으로만 가득 찬 밤 속에 있고 싶습니다. 散文(산문)대신에 詩(시)를, 計算(계산)대신에 낭만을, 現實(현실)대신에 꿈을 우리에게 갖다주는 것은 다만 밤 뿐입니다. 어떤 애인보다도 부드럽고 甘味(감미)롭고 짙은 밤뿐입니다. 밤이 없다면 우리의 生(생)은 살만한 것일까요? 계속적인 倦怠(권태)와 疲困(피곤)에 질식해버릴 것이고 애인과 만나는 일도 없어지게 되고 말지 않았을까요?

밤이 없었다면….

 

밤이 있으므로 해서 우리의 생은 生氣(생기)를 얻습니다. 우리의 애인은 매혹을 얻습니다. 밤처럼 우리를 도취시키는 것이 또 있을까요? 우리들 누구나를 마술사로 만들어 버리고 童話(동화)의 主人公(주인공)으로 錯覺(착각)시키는 것은 밤이 가진 힘입니다.

 

밤에 우리는 낮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비약을 합니다. 우리는 미칠 듯이 불타고 흐르고 불길 속에 뛰어 듭니다. 限(한)없는 불길 속에, 목숨 속에 우리는 마음을 던져 넣고 몸을 내어 맡깁니다. 누구나가 누구나에 대해서 애인일 수 있는 순수한 순간을 밤은 만들어 냅니다. 어떤 낮의 日光(일광)보다도 우리의 밤의 영혼은 뜨겁고 熱狂的(열광적)이고 맑습니다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가슴을 더듬 듯 우리는 밤의 乳房(유방)에 얼굴을 파묻고 밤에서 홀러 나오는 향기와 꿀을 빨아들입니다. 연인을 위한 시간! 우리 모두가 참다운 연인으로 變身(변신)하는 시간! 가슴 속에서부터 맑은 샘물이 소리를 내면서 쏟아져 나오는 시간입니다.

 

누구나에게 밤은 연인이 되어줍니다. 우리의 작열하는 영혼과 신비하게 비약하는 몸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검게 무겁게 포옹해 주는 애인이 밤입니다. 보석처럼 빛나는 순결한 肉體(육체)를 우리는 어둠 속에 내어 맡깁니다. 그리고 뜨겁게 뜨겁게 땅과 포옹합니다. 우리의 精神(정신)이 흙과 섞입니다. 흐느끼면서 우리는 흙의 습기와 암흑에서 母性(모성)을 理解(이해)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낮 동안의 노동이 蒼白(창백)하고 立體感(입체감)없이 평평한 무엇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낮을 觀念(관념)이라면 밤을 땅이라고 육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관념에만 사로잡힌 사람은 결국 인간일 수 없는 亡魂망혼)에 不過(불과)합니다.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영혼의 향수가 向(향)하고 있는 것은 밤입니다. 무엇보다도 밤입니다. 밤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참으로 현명한 사람은 아닙니다. 밤이 우리에게 주는 充溢感(충일감)과 보호되어있는 느낌이 자기의 것이 아닌 사람은 정신의 不具(불구)입니다. 절름발이입니다. 생에 熱狂(열광)하는 사람이 同時(동시)에 죽음을 熱愛(열애)하고 있듯 우리는 낮과 밤을 모두 사랑할 줄 알아야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에 제일 밑에 고여 있는 샘물을 끌어내어 솟아오르게 하는 것은 낮이 아니고 밤입니다.

 

낮을 일에 밤을 휴식에 할당하신 하나님은 과연 예지로운 분입니다. 낮은 투쟁과 모순, 밤은 조화와 고요, 낮은 생활, 밤은 사랑, 낮은 산문, 밤은 詩(시), 이렇게 分類(분류)되는 것도 모두 그것에 비롯하는 것이니까요. 밤입니다.

 

바람소리가 별들과 混合(혼합)되는 시간, 신비가 탄생하는 시간, 마술이 이루어지고 연금술이 증명되는 시간, 애인들의 침대가 딸기빛으로 붙타는 시간입니다. 어둠의 두터운 포옹 속에 우리의 그리움을 모두 쏟아버리는 시간입니다. 질식을 위한 시간 환희와 도취를 약속하는 시간입니다.

커튼이 두껍게 가린 창은 어둠을 더 짙게 몰아다주고 있습니다.

完全(완전)한 암흑 속에서 당신의 영혼을 라일락꽃으로 변형시키십시오. 지금이 바로 기적이 일어나는 시간인 것입니다. 당신의 애인은 침대 속에 당신 대신에 한 송이의 횐 라일락가지가 놓여있는데 놀랄 것입니다. 밤입니다. 모든 연인들의 시간입니다. 내 마음도 지금 분수처럼 소리를 내면서 밤을 향해 솟아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저녁 때 어둠이 다가옵니다. 그리고 恐怖(공포)가…. 어렸을 때 나는 어둠을 무척 두려워했습니다 나의 머릿속은 무섬과 우울과 별이 쏟아지는 마당에서의 유희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눈을 감으면 붉고 노랗고 녹색 빛나는 은하수가 어둠속물 흘러서 나의 意識(의식) 속까지 파고들었고 눈을 뜨면 하얀 유령같은 物體(물체)가 나를 응시했습니다.

 

나는 갑자기 마당을 달리고 있는 들쥐의 모습을 생각해냈습니다.

푸른 거울 속에서부터 아름다운 公主(공주)가 나타났고 나는 죽음과 같은 暗黑(암흑) 속에 가라앉았습니다. 밤의 입술은 붉은 과실같이 열렸고 별들은 밤의 가슴에 감추어진 悲哀(비애) 위에서 빛을 발했습니다.

어둠 속을 나의 환상은 무덤가를 거닐었습니다. 시체를 바라보았습니다. 병풍 뒤에 눕혀졌던 할머니의 주검이 주었던 奇妙(기묘)한 錯亂(착란)을 느끼면서…. 할머니의 아름다운 손에는 腐敗(부패)의 綠色(녹색) 斑點(반점)이 떠 있었습니다. 나의 영혼은 山(산) 속을 헤매었고 절간의 문전에서 한 조각의 떡을 애걸하기도 했습니다. 한 마리의 검은 말이 돌연 옆에서 튀어 나와 길을 막는데 놀라면서 ―.

 

다시 한 이부자리 속에 혼자 누워있는 자신을 알고 이유 모를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나의 이마에 손을 얹어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다시 나는 환상 속을 찾아 헤매었습니다. 아, 들판에 넘친 어린애들의 歡聲(환성), 누렇게 익은 보리이삭을 노래한 마음, 불처럼 타오르는 경건한 두려움, 나는 조용히 개구리같은 별의 눈을 보았습니다. 떨리는 손에 낡은 돌의 차가움을 느꼈고 푸른 샘의 傳說(전설)을 들었습니다. 銀(은)빛나는 생선떼, 허리 구부린 나무에서 떨어지는 과일, 나의 걸음걸이에서 울리는 音響(음향), 어린 마음은 어른을 경멸하는 마음과 傲漫(오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다시 자기 방으로 돌아오기 前(전)에 나의 어린 영혼은 아무도 살지 않는 古城(고성)곁을 지났습니다. 지쳐버린 大理石像(대리석상)이 슬픔으로 시간을 보내면서 저녁의 어둠 속에 서서 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늑대같이 어두운 洞窟(동굴)에서 날을 보내고 의식의 薄明(박명) 속에서 증오하면서 밤을 기다렸습니다.

 

거짓말을 하고 훔치고 엄마의 횐 얼굴에서 몸을 숨겼습니다. 폭풍우 속의 숲길, 내가 걷는 狂亂(광란)의 샛길을 피해 달아나는 검은 짐승. 증오는 나의 마음을 불태웠습니다.

 

초록빛 여름의 마당 속에서 아무말도 안하는 아이에게 가했던 暴力(폭력) 그리고 그 아이의 얼굴에서 나의 착란한 모습을 찾을 수 있었을 때의 歡喜(환희), 그것은 새빨간 꽃에서 잿빛을 띤 해골이, 죽음이 나타나는 시간이었습니다.

 

아, 어린 시절의 窓(창)가의 어둠은 서글픈 것이었습니다. 塔(탑)과 鐘(종) 그리고 나의 위에 돌처럼 떨어져 내린 죽음의 그림자,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어둠이 감긴 방 속에서 허위와 음탕이 나의 어린 머리를 태웠습니다. 파란 옷의 스치는 소리가 나의 몸을 굳게 했습니다.

문간에 엄마의 밤의 모습이 서 있었습니다. 나들이옷의 香氣(향기), 비단 스치는 소리, 흰 털외투, 그리고 天使(천사)의 날개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서 이마를 만지는 어둠의 손길. 나는 엄마를 소리높이 부르는 대신 굳은 몸으로 잠을 가장하고 어머니가 바쁜 걸음으로 나간 뒤의 향기와 비단 스치는 푸른 음향에 굶주렸었습니다. 아, 밤이여, 어둠과 별들이여, 나는 어둠 속을 不具者(불구자)들과 함께 산으로 달려갔습니다.

얼어붙은 山頂(산정)에는 오로라 빛이 덮여 있었고 나의 마음은 어둠 속에서 가냘픈 소리를 냈었습니다. 거치른 나뭇가지가 내 위에 무섭게 가라앉았고 붉은 囚人(수인)들이 숲에서 걸어나왔습니다.

 

어린아이의 간을 빼어먹는다는 붉은 남자들이었습니다. 나의 마음은 밤마다 水晶(수정)으로 되어서 깨어져 흩어 졌고 어둠이 나의 이마를 때렸습니다. 잎이 없이 앙상한 느티나무 밑에서 나는 얼어 붙은 손으로 한 마리의 검은 고양이를 목 졸라 죽였습니다. 그때 슬픔의 소리를 높이 지르면서 왼손편에 한 天使(천사)의 횐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때 어둠 속에서 붉은 남자들의 모습이 커져 갔습니다. 그러나 내가 돌을 집어서 그 그림자에 던졌더니 신음소리와 함께 도망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느티나무 그늘에서 天使(천사)의 횐 얼굴이 한숨을 짓고는 살아졌습니다. 나는 돌밭에 누워서 별들이 수놓은 金(금)빛 포장을 감탄했습니다. 그러나 박쥐 떼에 몰려서 나는 어둠 속에, 완전한 암흑 속에 다시 떨어져 버렸습니다. 허물어진 집 속에 걸어 들어가서 나는 야수가 되어 깊고 깊은 잠에 들었습니다.

 

밤이 왔습니다.

밤은 때로는 두려운 무엇이기도 합니다. 외로운 사람, 병든 늙은 사람에게는 -특히 겨울밤은 그렇습니다.- 바깥은 검은 추위가 꽉 채우고 있고 大地(대지)는 딱딱하고 空氣(공기)는 싸늘한 맛을 지니고 있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별들까지도 무슨 나쁜 前兆(전조)를 알리고 있는 듯 슬프게만 보입니다. 외로운 우리는 돌같이 무거운 다리를 끌고 언 街道(가도)를 터덜터덜 걸어갑니다. 우리의 발이 땅을 디딜 때마다 새파란 얼음 같은 소리가 나고 우리의 얼굴은 비애로 石花(석화)됩니다. 돌로 덮인 언덕, 鐵路(철로)가의 제방, 銀(은)빛 눈과 얼음 속에서 고요하게 解體(해체)되어가는 차가운 肉體(육체), 찬바람만이 占領(점령)하고 있는 방 속에서 가구는 부식되어 가고 있습니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손으로 幼年時代(유년시대)를 탐지해 보지만 살찐 쥐떼들의 장롱을 갈아먹는 소리에 부딪쳐 무너지고 맙니다. 암흑 속에서 굶주림의 저주가 붉게 피어오르고 허위의 검은 칼이 먼 靑銅(청동)색 문을 때려 부수는 메아리 소리도 들립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밤! 허무와 비애와 추위와 기아만이 지배하고 밤의 마력의 권외에 놓인 부록같은 밤! 우리가 앞으로 얼마나 많이 갖게 될지 모르는 소망되지 않는 밤, 견디는 것이 전부인 밤…. 이런 밤은 정말로 우리를 미치게 합니다. 자기가 한 일, 안 한 일에 대한 후회 그리고 모든 것을 일어난 그대로 있는 그대로 놓아 둘 수밖에 없고 교정이 不可能(불가능)한 것을 깨달은 데서 오는 늪 속 같은 쓰디쓴 비애. 이런 밤입니다. 우리가 검은 毒(독)을 마시고 죽음의 味覺(미각)을 알고 싶어지는 것은. 또 한 번만 머리를 검게 만들고 지나간 해들은 다시 고쳐 살고 몰락하기 前(전)에 다시 다시 한 번만 활짝 피어 보고 싶어서 흰 가루를 먹는 것은 이런 밤입니다. 옛 詩人(시인)들이 술항아리를 꺼내러 地下室(지하실)로 내려간 것도 이런 밤입니다.

 

불기도 없는 방, 열도 없는 마음과 몸, 아무 그리움도 채울 수 없는 눈동자를 하고 우리는 그저 아침이 올 것을 기다립니다. 이때 텅 빈 가슴에 湖水(호수)처럼 밀려와서 꽉 차는 感情(감정)이 있습니다. 공포―, 存在(존재)의 공포 또는 죽음에의 공포가 그런 것입니다. 물끄러미 어둠을 응시하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는 것은 자기의 생과 死(사)뿐입니다. 固定觀念(고정관념)처럼 공포가 가슴에 붙어버립니다. 自己(자기)가 지난 날 자기 자신이었던 어느 特定(특정)의 존재라는 것을 生生(생생)하게 느끼고 自身(자신)이 그 피부의 울타리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것을 깨닫는 데서 오는 숨막힌 공포감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왜 우리이고 다른 것 일 수 없는가? 의문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擇(택)할 最善(최선)의 方法(방법)은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힘든 일일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안 일어났고 안 일어나며 앞으로 일어날 수 없는데 이 생을 무엇 때문에 一秒(일초)라도 더 견딜 必要(필요)가 있단 말인가?" 라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우리의 가슴속에 들릴 것이니까요. 그러나 우리는 그 목소리에 귀를 막도록 애써 봅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난날의 경험 중에서 우리가 그것을 상기함으로써 잠시 동안의 기쁨을 가질 수 있고 事件(사건)들을 생각해 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우리의 體驗(체험)이 적은 生(생)에서 특히 작은 공간을 차지했던 일들 -表現(표현)도 거의 되지 않고 만 友情(우정) 또는 망쳐버려질 시간이 주어지지 않고 끝난 애정-이 甘美(감미)로움을 끝까지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젊음의 戰場(전장)에서 우리가 거치고 지나간 시체들 중에 不快感(불쾌감)없이 回想(회상)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둘의 애정이 끓어오르기도 전에, 따라서 식을 수 있게 되기도 전에 어떤 外部的 狀況(외부적 상황)에 의해서 이별해야 했던 사람은 그 中(중)에 들어가겠지요. 먹지 않고 놓아둔 과자를 어린애가 언제까지나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心理(심리)이기도 합니다.

 

西洋(서양) 할머니들 중에는 갖가지 리본으로 묶어 놓은 젊은 시절에 받은 戀書(연서)를 고이 간직해 두고 그것을 잠 안 오는 밤에 읽다가 잠드는 분들이 흔히 있다고 합니다.

외로울 때 옛 편지나 옛 日記(일기)를 읽는 것도 한 方法(방법)이겠지요. 너무나 時間的(시간적) 거리가 있어서 小說(소설)보다도 그 戀文(연문)들은 남의 얘기같이 들리고 非現實的(비현실적)으로 느껴져서 결국 졸리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잠이 안 오는 사람, 또는 최면체가 될 연문도 안 모아둔 사람은 할 수 없습니다. 공상 속에서 별을 세어 보십시오. 千(천)까지 세고 또 천까지 세고….

단 만약에 당신이 박카스와 조금 친한 분이라면 주저 마시고 포도주병을 꺼내 오십시오.

밤이 깊었습니다.

 

 

 

  

 

 

전혜린(田惠麟, 1934년 1월 1일 ~ 1965년 1월 10일)은 대한민국의 번역자이자 수필가이다.

독일 유학파출신이다.

수필이자 일기인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와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 가 유명한 저서이다. 1934년 1월 1일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났다.

1965년 1월 10일 자살로 생을 마감한 뒤, 경기도 안양시 조남리 선산에 묻혔다.

 

수필가. 평남 순천 출생. 독일 뮌헨대 독문과 수료. 여러 대학의 강사를 거쳐 성균관대 교수 역임.

31세로 자살함.

자유로운 정신과 현실 세계와의 치열한 대결 속에 불꽃처럼 살다가 간 지식인이었다. 끈기와 탄력과 집중력을 갖고 생을 긍정했고 생의 완벽성을 구했다.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삶에 대한 그의 강렬한 사랑과 일종의 필수적인 비애의 기록으로서 수많은 젊은이들의 심금을 울린 바 있다.

 

 

 

 

Sto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