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問/人文學

탐욕.자업자득.사도(師道) ?[황종택의 新 온고지신]

경호... 2015. 7. 14. 04:06

[황종택의 新 온고지신]

 

탐욕의 종말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했던가. 권력욕, 명예욕, 재물욕 말이다. 이 중 특히 재물욕에서 탈이 나 사람들은 좌절하고 뜻이 꺾이곤 한다.

탐욕의 종말!

 

명심보감 안분편(安分篇)에 “만족을 아는 사람은 가난하고 신분이 낮아도 또한 즐거울 것이고, 만족을 알지 못하는 이는 돈 많고 신분이 귀해도 역시 걱정된다(知足者貧踐亦樂 不知足者富貴亦憂)”고 우려한 뜻이 깊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772∼846)의 시 ‘감흥’의 가르침은 크다.

 

“명예는 여러 사람의 것이니 많이 취하지 말고,

이득은 내 몸의 재앙이니 적당히 탐하여라.

사람은 표주박과 달라서 안 먹을 수 없지만, 대강 배가 부르면 일찌감치 수저를 놓아야 하느니라

(名爲公器無多取

利是身災合少求

雖異匏瓜難不食 大都食足早宜休).”

 

당송팔대가로서 명문장가 소동파(1036∼1101)의 외침도 가슴에 닿는다. 그는 ‘적벽부(赤壁賦)’에 이르길

“무릇 천지 사이에 모든 물건은 그 주인이 있으니(且夫天地之間 物各有主),

진실로 나의 것이 아니라면 비록 털끝만한 것이라도 취할 수 없다(苟非吾之所有雖一毫而莫取)”고 했다.

 

지도층의 의식이 중요하다. 공(功)을 이뤘으면 적당한 시기에 물러날 줄 알아야 한다. 노자의 도덕경(道德經) 교훈대로 공성신퇴(功成身退)할 일이다.

 

한(漢)나라 개국공신 한신과 장량은 대조가 된다. 자신의 지위가 높아지자 두려움을 느낀 장량이 신선이 되겠다는 핑계로 권좌에서 물러나 생명을 유지한 반면, 한신은 만족할 줄 모르고 경박한 무리와 어울리면서 무언가를 더 바라다 반역죄로 처형되고 말지 않았는가.

 

‘큰 집이 천 칸이라도 밤에 자는 자리는 여덟 자밖에 안 된다(大廈千間 野臥八尺)’고 했거늘.

 

 

 

 

[황종택의新온고지신]

 

자업자득

 

 

 

 

 

 

뿌린 대로 거둔다. 삼라만상의 보편적 진리다. 명심보감에 이르길 “오이를 심으면 오이를 거두고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둔다(種瓜得瓜 種豆得豆)”고 했다.

스스로 지은 바는 스스로 거두게 마련(自業自得)이기에 “(군자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남을 탓하지도 않는다(不怨天 不尤人)”고 맹자는 가르치고 있다.

 

성철 스님도 납자십게(納子十偈)의 하나로 수행자들에게 “콩 심어 콩 나고 그림자는 형상 따라 삼세의 지은 인과는 거울에 비추는 듯, 나를 돌아보며 부지런히 성찰한다면 하늘이나 다른 사람을 어찌 원망하리오(種豆生豆影隨形 三時業果如鏡照 痛自省察極勉勵 那得怨天更尤人)”라고 했잖은가. “네가 행한 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네가 행한 일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다”라는 성서의 가르침과 궤를 같이한다고 하겠다.

 

서경 태갑편(太甲篇)의 경책처럼 하늘이 내린 재앙은 피할 수 있으나 자신이 저지른 화는 피할 수 없는(天作孼猶可違 自作孼不可還) 것이다.

조선 현종 때 영의정을 지낸 허적은 집안이 가난해 무척 고생하면서 공부했다. 그러다 벼슬을 하게 돼 월급을 받으면 옛날 어려웠던 시절을 생각해 이웃에 베푸는 삶을 살았다. 송덕비를 세울 정도였다. 그러나 서자(庶子) 허견 때문에 멸족의 화를 당하게 됐다.

 

허적은 이를 담담히 받아들였다. 젊은 벼슬아치 시절 사치스런 옷을 입은 상놈을 옥에 가두자, 그 아내가 찾아와 욕을 해대기에 매를 때리다 부부를 함께 죽이고 말았다. 그런데 얼마 후 서자 견을 낳던 날 밤 꿈에 한 노인이 “그대가 내 아들 내외를 죽였으니, 나는 당신에게 못된 아들을 점지해 당신 집안을 멸망시키겠소”라고 말한 게 떠오른 것이다.

 

‘하늘의 그물망은 넓고 성긴 듯 하나, 새는 법이 없어 빠져나갈 수 없다(天網恢恢疎而不失)’고 했다.

노자의 훈계다.

 

 

 

 

[황종택의新온고지신]

 

사도(師道)

 

 

 

 

 

배움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

뜻을 펴게 한다. 성취의 동기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학문의 힘이다.

 

공자가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不亦說乎)”라고 말한 소신 발언의 배경이 확연해진다. 배움은 폭넓고 깊어야 한다. 맹자가 “널리 배우고 그것을 상세히 설명함은, 장차 후학들에게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함이다(博學而詳說之 將以反說約也)”라고 강조한 이유이기도 하다.

 

배움의 가치는 장자가 명쾌하게 정리했다.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재주 없이 하늘에 오르는 것 같고,

배워서 지혜가 깊어지면 마치 상서로운 구름을 헤치고 푸른 하늘을 보며 높은 산에 올라 사해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

(人之不學 如登天而無術

學而智遠 如披祥雲而覩靑天).”

 

배움은 본인이 하기 나름이다. 그렇다 해도 앞서 문리를 터득한 스승, 곧 사부(師父)의 가르침이 있어야 온전히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스승 역시 인격에 바탕한 지식, 지혜를 후학에게 전수하는 데서 희열을 느낀다. 제자가 스승을 능가하면(靑出於藍) 그 기쁨은 더욱 크다. 주역에 이르길 “교육함으로써 바르게 양성하는 것은 성인의 공덕이다(蒙以養正 聖功也)”라고 한 연유가 여기에 있다.

 교육이란 자신의 덕을 쌓는 길이다. 맹자가 “배우기를 싫증내지 않는 것은 지혜로운 것이고(學不厭智也), 가르침에 게을리하지 않음은 인자한 것이다(敎不倦仁也)”라고 한 바는 오늘에도 울림이 크다.

 

스승의 할 일도 적잖다. 무엇보다 학생에 대한 고른 사랑이다.

 

“비록 한 묶음의 말린 고기(乾肉)밖에 가져오지 않는다 해도 나는 어떠한 사람에게나 교육을 했다”고 말한 공자의 사도(師道)는 그래서 빛난다.

가르침에 계층·계급의 구분이 없다는 ‘유교무류(有敎無類)’의 교육철학이다.

 

임금과 스승, 부모의 가치가 같다(君師父一體)는 옛말처럼 스승의 고마움을 아는 세상이 됐으면 한다. 스승의 훈육이 있어 비로소 인격체로 거듭나지 않는가.

 

 

녹명문화연구소장

 

/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