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ly BIZ] 김형철 교수의 '서양 인문 오딧세이'
어린아이처럼 살 수 있다면 우리는 니체의 '초인'이 된다
오늘을 즐기고 현재에 살아라
'강자를 약자로부터 보호하라!'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Nietzsche)의 말이다.
약자를 강자로부터 보호하라는 말은 많이 들었어도 강자를 약자로부터 보호하다니 어불성설 아닌가? 강자를 보호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우리 자신을 한번 들여다보자.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시려는 거지 근성, 강자에게 빌붙어 살아가려는 노예 근성, 게으름, 나약함이 보이지 않는가? 이런 약자의 도덕을 극복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이 바로 강자다.
극기(克己)의 자세로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이 강자다. 니체는 우리에게 초인(超人·?Mbermensch)의 길을 걸어갈 것을 요구한다. 자신의 운명을 사랑할 줄 아는 자세를 갖추라고 말한다.
약자들은 "지금은 불우해도 저 세상에 가면 영원한 축복을 받게 된다"며 자기 불행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보다 잘살고 힘있는 자들을 저주하고 증오한다.
이런 상황에서 강자를 보호하지 않는다면 약자들이 똘똘 뭉쳐 강자들을 못살게 굴 것이다. '강자를 약자로부터 보호하라!'는 그런 의미이다. 이 세상의 위대함은 초인과 같은 강자들이 창조해가는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정신 발달은 세 단계를 거친다.
첫째는 '낙타'의 단계다. 낙타는 덩치는 커도 겁이 많고 소심하다. 주인이 아무리 부려도 불평 한마디, 저항 한번 하지 않고 복종한다. 여기는 '무엇을 해야 한다'는 약자의 도덕을 그냥 따라하는 단계다. 더운 사막에서 주인이 아무리 무거운 짐을 올려놓아도 순종하는 낙타처럼. 사실 사막에서 대열로부터 낙오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때 복종은 자발적 복종이 아니다. 자연히 가슴 속에 원한(怨恨) 같은 감정이 쌓인다. 힘에 눌려서 어쩔 수 없이 복종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성숙된 모습을 보일 수 없다.
다음은 '사자'의 단계이다. 사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려고 한다. 주인이라고 해도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면 대든다. '원하는 것을 하라'는 자세로 삶을 살기 때문에 굴레를 씌우려는 용과 계속 충돌한다.
사자는 늘 고독하고 불안하다. 팀워크를 이뤄서 큰일을 할 수가 없다.
다른 존재와의 끊임없는 마찰 속에서 살아간다. 인간이 고도의 문명을 이루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서로 협력하고 신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역시 성숙된 모습은 아니다. 사자의 단계를 극복하라.
마지막은 '어린아이'의 단계이다. 의외다. 어린아이가 인간 정신 발달 최고의 단계라니!
어린아이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다. 잊어버리고 즐겨라!
애들 노는 것을 보면 조금 전까지 토닥거리고 싸우다가도 금세 헤헤 웃는다. 과거를 잊어버려라! 과거의 성공을 잊어버려라. 과거에 성공한 방식대로 계속 해나가면 적들이 가만 놔둘 것 같은가?
과거의 실패도 잊어라. 과거에 잘못 내린 결정에 계속 마음 아파한다고 해서 나아질 것은 하나도 없다. 과거를 잊으면 현재에 몰입하게 된다.
CARPE DIEM(카르페디엠)! 오늘을 즐겨라! 현재에 살아라!
니체가 생을 긍정적으로 생각한 철학자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즐긴다는 것은 선택해서 집중적으로 몰입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운명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다.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을 사랑하라!
어린아이처럼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는 초인이 된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즐긴다는 것은 그러한 일이 영원히 반복된다고 하더라도 늘 같은 선택을 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다음에 그와 같은 반복된다는 것이 생각하기조차 끔찍하다면 아예 하지도 말라! 이것이 바로 '영원 회귀'의 사상이다.
영원히 반복된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후회가 없는 세상에 산다는 것이 바로 최선을 다하면서 즐기고 사는 삶이다. 당신은 그런 멋진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 그런 삶을 살기를 원하고 그를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강하게 만들고 있는가?
자신에게 명령하라! 그렇지 않으면 평생 다른 사람의 명령을 듣고 살아갈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자신의 내면 의지를 실천해나가는 것은 엄청나게 강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남이 나에게 명령 내리기 전에 자신에게 스스로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김형철 교수의 '서양 인문 오딧세이']
사람은 배우기를 원한다. 고통없는 배움은 없다. 깨우치려면 모든 걸 의심하라
"사람은 배우기를 원한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 제1권 1장 첫 문장에서 한 말이다. 인간 본성을 한마디로 줄이면 '끊임없이 배우려는 존재'라는 말이다. 권력, 명예, 부(富)를 모두 가진 사람이 허무감을 느낀 끝에 현자(賢者)에게 물었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의 답은 이랬다.
"한평생 배우러 왔다가 갑니다."
철학자 몽테뉴는 "철학은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했다. 죽음은 모든 이에게 공포의 대상이다. 하지만 우리는 왜 있는 게 없어지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가? 반대로 세상에 태어나기 전 오랫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는 공허함이나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가? 죽고 난 뒤 무존재(無存在)가 됐을 때, 우리는 내가 무존재한 것에 대해 아무 감정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둘 다 모두 내 것이 아니다.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현재뿐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서 "현재를 즐기라"고 말한다. 이것이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고통 없는 배움은 없다"고 했다. 배우는 과정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태 알고 있는 것을 부정하지 않고 새로 배울 수 있는 것은 없다. 그것이 경험으로 전해지는 '암묵지(暗默知)'든, 지식으로 전달되는 '형식지(形式知)'든 마찬가지다.
이미 알고 있는 것만 계속 반복하는 존재는 이미 죽은 존재다. 사람은 자신을 부정해나가면서 학습하며 성장한다. 마치 내 몸 안의 세포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죽어야 새로워지는 것처럼. 자아실현을 하려면 부단히 자기를 부인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2500년 전 아테네 델포이 신전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배우려 하지 않는다.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배우려 한다. 배우는 방법은 '질문'이다.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모르면서도 질문하지 않는 것은 죄다.
"크게 깨우치려면 모든 것을 의심하라!"고 데카르트는 설파했다. 그는 감각적으로 지각하는 모든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명백한 사실마저 의심했다. 내가 앉아 있는 의자, 글 쓰고 있는 컴퓨터, 밖에 보이는 나무,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는데도 악마가 나로 하여금 존재한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라고 가정해 본 것이다. 그랬더니 그것을 반박할 근거를 찾지 못했다. '1+1=2'라는 수학적 진리도 마찬가지로 근거가 불확실하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것을 의심하더라도 내가 현재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의심할 수가 없다. 여기서 그가 터득한 명제가 서양철학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이라는 깨달음이다.
공자는 "세 사람이 걸어가면 그중에 내 스승이 있다(三人行 必有我師)"고 했다. 참학습은 책뿐만 아니라 사람과 만나는 일, 교류에서 이뤄진다는 얘기이다.
리더는 부하를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부하가 배우도록 도와주는 멘토이다.
부하가 배우도록 돕는 방법은 학습 분위기와 여건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자극하는 질문을 계속 던지는 것이다. 그들이 질문하도록 도우려면 먼저 질문하는 자세를 보일 수 있어야 한다.
부하들과 진정 소통하는 리더는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부하들 앞에서 솔직하게 인정한다. 가장 창의적인 리더가 되는 것 역시 모두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의문을 품을 때 가능하다.
리더 가운데 최악의 리더는 부하와 경쟁하는 리더이다.
반대로 최고의 리더는 부하를 리더로 키워주는 리더이다. 그 최상의 방법은 배울 기회를 주는 것이며, 구체적으로 더 큰 임무와 역할을 맡기는 것이다. "사람은 배우기를 원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이 말의 유효기간은 우리가 죽는 날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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