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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文化의 이해 / 정무환(성본)

경호... 2012. 12. 5. 23:23

불교문화연구 <제9집>

 

 

禪文化의 이해

 

정무환(성본)

* 동국대학교 불교문화대학 선학과 교수

 

 

차 례

Ⅰ. 서언 - 선문화란 무엇인가?

Ⅱ. 선의 문화는 창조적인 힘이다.

Ⅲ. 선문화의 사상 - 無心의 道

Ⅳ. 선문화의 생활

Ⅴ. 결언

 

 

국문초록

 

선문화(禪文化) 혹은 선(禪)의 문화라는 말이 일반화 되고 있다. 그러나 선불교에서 주장하고 있는 선에 대한 정확한 정신과 사상을 이해하지 않고서 선문화라는 말을 사용 한다는 것은 많은 폐단과 오해를 초래 할 수가 있다. 본 논문은 선불교의 정신과 사상적인 토대에서 이루어진 선문화, 혹은 선의 문화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사상적인 토대를 확고히 할 필요성에서 제시한 글이다.

 

본 논에서 언급한 것처럼, 선문화 혹은 禪의 文化란 禪의 수행과 정신, 혹은 선사상을 통해서 이루어진 인간의 창조적인 문화이다. 선의 정신 혹은 선사상의 토대위에 이루어진 인간생활의 모든 知的, 예술적 문화 전부를 일컫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자각의 주체인 근원적인 본래심에서 불법의 지혜와 인격으로 전개한 인간의 모든 생활과 생활공간(道場), 건축, 道具, 미술, 禪墨, 墨跡, 頂相, 예술, 문학 등 생활양식 일체를 총칭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선의 문화는 반야의 지혜로 이루어진 출세간적인 가치관의 창조적인 정신문화이기 때문에 중생심으로 작용한 세간적인 일반 사람들의 문화나 문학과는 차원을 달리 한다.

 

불교에서는 자아의식과 번뇌 망심(心), 자의적인 생각(意), 주객, 자타, 선악, 등 이원적이고 상대적인 차별의식(識)인 중생심으로 희 노 애 락의 감정(情)과 탐진치의 삼독심과, 오욕망 등의 중생심으로 세속적인 가치관에 토대를 두고 있는 세간의 문학과 문화와는 철저히 구분해야 한다.

 

불교와 선불교는 출세간의 종교인데 반하여 세계의 모든 종교는 선과 악을 구분하고, 악을 멀리하고 선을 추구하는 취사선택의 상대적인 가치관에서 윤리도덕과 절대자의 구원론을 강조하고 있는 세간적인 가치관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주제어 : 선문화, 선과 문화, 반야의 지혜, 무심, 선과 차.

 

 

Ⅰ. 서언 - 선문화란 무엇인가?

 

선문화 혹은 선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禪이란 무엇인가? 라고 하는 언어의 의미와 槪念부터 분명히 파악하고 이해해야 한다.1]

 

1]한자로 文化란 원래 ‘文治敎化’ 에서 유래되었는데, 형벌이나 武力 등을 사용하지 않고 文德으로 사람들을 敎化한다는 의미이다. ?說苑?에 ?문화로 다스려 고치지 못하면 뒤에는 벌을 주어야 한다.(文化不改 後加誅)?란 말도 있다.

한편 文化와 같은 의미로 ‘文明’ 혹은 ‘文明開化’ 란 말이 있다. 문명은 인간, 즉 인류의 사회가 야만(野蠻)에서 벗어나 문명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인간과 인간과의 대화는 言語와 文字로써 의사전달이 가능하며, 이러한 인간 사회에서 인간들이 각자의 마음을 열고, 의사전달을 통해 인간 상호의 공감대를 형성하며, 서로 서로 의사전달이 가능해지고 생활의 도구나 지혜를 통해서 학문, 사상, 예술 등이 발달하게 된다.

즉 인간 각자의 지혜로 세상을 깨우치고 열린사회를 만들어 살기 좋은 사회가 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文明은 영어로 civilization 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라틴어 civis (市民) 혹은 civilitas (시민의 身分)에서 유래되었고, 미개(未開), 야만(野蠻)에 대한 敎化나 세련(洗練)을 의미하며, 원래 사회적인 진보 발전의 관념과 결합되어 있는 말이다. (예를들면 인더스 文明과 메소포타미아 문명, 에집트 文明, 황하문명 등이다)

그러나 文化와 文明은 드디어 同義語로 사용되어 일반 사회의 정신적 내지 물질적 발달의 단계나 그 所産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의 합성어로 文化國家, 文化遺産, 文化生活 등이란 말로 오늘날 인간 사회에 널리 사용되고 있다.

문화나 문명은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인간의 지혜로 이루어진 정신적, 육체적인 모든 생활의 所産이며 遺物, 遺産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간의 문화와 문명이 인간 생활에 그대로 맥맥히 전승되고 있는 것은 물론, 언어 문자나 문학, 예술, 미술, 음악, 건축이나 시설물(道場) 등으로 전래되고 있는 모든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이 사회의 구성인으로서 인간의 지혜로 만들어낸 언어 문자나 사상, 종교, 예술, 생활의 도구 등 인간과의 대화와 교류를 통해서 이루어진 內外面적인 모든 文化遺産을 총칭한다고 할 수 있다.

 

 

선이란 무엇인가? 라는 문제를 제기 할 때, 선의 槪念이나 선의 수행, 선사상 등을 한마디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중국 당대에 완성된 조사선의 입장에서는 인간 각자의 근원적인 本來心(平常心)으로 몸과 마음이 평안한 가운데 자신의 구체적인 일상생활을 반야 지혜로 사는 安身立命의 삶이라고 간단히 요약할 수 있다.

 

즉 貪瞋痴 三毒心과 상대적인 차별심, 분별심으로 주객을 나누는 이원적인 사고의 중생심은 자의적인 판단으로 사량분별하여 수많은 고통과 생사윤회를 초래하는 업장을 만들고 있다. 그래서 중생은 삼계에 윤회하게 되는데, 이러한 세간의 중생들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해 설한 불법은 자타, 주객, 선악 등의 이원적인 사고와 일체의 상대적인 차별심을 초월하여 근원적인 불심의 반야지혜로 삼업이 청정한 출세간적인 삶을 살게 한다.

 

선은 중생심의 욕망과 불안으로 고통을 초래하는 세속적인 가치관을 초월하여 몸과 마음의 평안과 반야 지혜의 창조적인 힘으로 출세간적인 가치관을 확립함과 동시에 무한한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불법의 지혜와 인격으로 자기 향상을 이루는 힘을 체득 하게 한다.

 

자각적인 깨달음의 체험으로 본래심의 경지에서 반야지혜의 창조적인 삶으로 일상생활 속에서 선의 생활을 하기 위해선 먼저 불법의 대의(玄旨)를 분명히 체득하고 불법의 정신을 완전히 자기 자신이 활용 할 수 있도록 정법의 안목을 구족해야 한다. 필자는 이것을 불법의 自己化라고 하는데, 불법의 지혜를 구족하여 자기 자신이 언제 어디서든지 일상생활 하는 가운데 불심의 지혜를 마음대로 활용하여 자신의 독자적인 삶을 건립 할 수 있을 때 선의 창조적인 문화생활로 전개된다고 할 수 있다.

 

선의 수행은 대승불교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자아의 무한한 가능성과 인격형성을 향한 원력과 서원을 세우고 선지식을 참문하는 구도자의 생활부터 시작된다. 立志求道心으로 스승과의 인연을 맺고 여법하게 불법을 수학하며, 여법하고 엄격한 入格出格의 선수행을 닦고 불퇴전의 보리심으로 佛祖의 가르침을 자신이 직접 체험하고 확인하여 철저한 확신으로 반야의 지혜를 구족하는 것이다.

 

불법의 정신과 사상을 선의 체험과 깨달음에서 읊은 노래가 悟道頌이며, 스승의 선법을 전해 받은 인가증명이 袈裟(傳衣), 傳法偈, 선승의 초상화(頂相), 禪板, 淨甁, ?杖子 등이고, 스승이 제자들에게 내린 법문이 上堂 示衆이며, 法語이다.

 

선승들의 법문과 대화의 언어, 그리고 행동으로 제시한 言行錄을 모은 법문집을 語錄이라고 하며, 특별히 불법의 진수를 禪墨의 글씨를 써서 제시한 법문을 墨跡이라고 하고, 圓相이나 십우도와 같은 그림으로 그려서 제시한 법문도 있는데, 이 모든 불법 개시의 방편법문과 선승들의 생활법문이 선의 문학이며 선의 문화인 것이다.

 

구름과 강물이 흘러가는 것(行雲流水)처럼, 일체의 번뇌 망념을 텅 비운 無心의 경지에서 매사의 모든 일을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일을 본래심으로 평안하고 無事하게 법계에 유희하는 삶(遊戱三昧)으로 살고 있다. 또한 선승들은 일상의 매사를 반야 지혜로 전개하여 身口意 三業이 청정하기 때문에 자취와 흔적의 業障을 남기지 않는 무애자재한 삶이 모두 선의 문화생활이 된다.

 

즉 禪의 文化란 이러한 禪의 수행과 정신, 혹은 선사상을 통해서 이루어진 인간의 창조적인 문화이다. 선의 정신 혹은 선사상의 토대위에 이루어진 인간생활의 모든 知的, 예술적 문화 전부를 일컫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자각의 주체인 근원적인 본래심에서 불법의 지혜와 인격으로 전개한 인간의 모든 생활과 생활공간(道場), 건축, 道具, 미술, 禪墨, 墨跡, 頂相, 예술, 문학 등 생활양식 일체를 총칭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선의 문화는 출세간의 반야지혜로 이루어진 문화이기 때문에 중생심으로 작용한 세간적인 일반 사람들의 문화나 문학과는 차원을 달리 한다. 즉 불교에서는 자아의식과 번뇌 망심(心), 자의적인 생각(意), 주객, 자타, 선악, 등 이원적이고 상대적인 차별의식(識)인 중생심으로 희노애락의 감정(情)과 탐진치의 삼독심과, 오욕망 등의 중생심으로 세속적인 가치관에 토대를 두고 있는 세간의 문학과 문화와는 철저히 구분해야 한다.

 

불교와 선불교는 출세간의 종교인데 반하여 세계의 모든 종교는 선과 악을 구분하고, 악을 멀리하고 선을 추구하는 취사선택의 상대적인 가치관에서 윤리도덕과 절대자의 구원론을 강조하고 있는 세간적인 종교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유마경? 『화엄경』 등 대승 경전에서 세간적인 중생심의 이원적이고 상대적인 차별심과 사량분별심을 思議라 하고, 불성의 반야 지혜로 작용하는 출세간적인 지혜를 不可思議, 혹은 不可思議解脫法門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대승불교는 如法한 반야 지혜를 체득하여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여 일체의 상대적인 차별세계를 초월한 출세간의 종교임을 천명하고 있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Ⅱ. 선의 문화는 창조적인 힘이다.

 

선의 수행과 생활로 이루어진 선의 문화는 불법의 정신과 사상을 체득하여 독자적인 지혜의 안목과 인격으로 지금 여기 자신이 세운 원력의 일을 불법의 지혜로 건립하는 독창성이 있다. 그래서 선의 문화는 반야 지혜로 자신의 삶을 건립하는 창조적인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선사상의 토대가 되는 법문이 『유마경』에 ‘無住의 본체에서 일체 법을 건립한다(從無住本立一切法)’ 혹은 『금강경』에서 ‘진실로 어떤 경계에도 머무름이 없는 불심의 지혜로 살아야 한다(應無所住 而生其心)’ 라는 말씀이다. 『放光般若經』20권에도 '等覺의 法位에서 마음의 동요없이 제법을 건립하는 곳으로 삼는다(不動於等覺法 爲諸法立處)' 라고도 주장하고 있다.2]

 

일체의 대상 경계에 머무름이 없도록 하는 무주(無住)의 법문이란 반야의 지혜로 일체의 차별세계의 대상 경계를 초월하여 걸림 없이 자신의 지혜로운 삶을 전개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육조단경』에 ‘자성이 본래 동요가 없이 능히 만법을 만든다.’ 라고 하고 또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이 텅 비어야 비로소 능히 만법을 건립한다.’ 라고 주장하고 있다.

 

『화엄경』 여래출현품에 '만약 부처의 경계를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자신의 의식을 텅 비워 허공과 같이 하라. 번뇌 망상과 모든 목적의식을 멀리 여의면, 본래 마음이 향하는 곳마다 모두 무애자재 하리라(若有欲知佛境界, 當淨其意如虛空, 遠離妄想及諸趣, 令心所向皆無碍.)' 라고 읊고 있는 것처럼, 무애 자재는 心意識의 작용으로 의식의 대상이 있는 중생심을 허공처럼 텅 비우고, 진여삼매인 불심의 지혜작용으로 전개되는 경지에서 가능하다.3]

 

2]『유마경』 관중생품 (『대정장』 14권 547쪽 下). 『금강경』(『대정장』8권 749쪽 下). 『방광반야경 20권 (『대정장』8권 140쪽 下)

3]80권 『화엄경』제50권 (『대정장』 10권 265쪽, 中)

 

 

번뇌 망념을 텅 비운 근원적인 본래심(불심)의 작용인 반야의 지혜로 지금 여기 자신의 모든 삶을 여법하고 삼업청정한 삶으로 건립하는 것이 선의 문화생활인 것이다. 불법을 건립한다는 것은 시절인연에 따라 전개하는 자신의 모든 일을 불법의 지혜로 여법하게 원력행을 실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즉 지금 여기 자신의 모든 일을 근원적인 본래심(불심)의 지혜로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독자적이고 창조적인 삶이 되는 것이다.

 

선의 실천 정신은 일체의 개념이나, 혹은 권위, 의례의식의 형식을 통과하지 않고, 근원적인 본래심의 직관적인 지혜로 자신의 삶을 건립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에서는 ‘無法을 法으로 삼고, 무문을 法門으로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無法은 因緣의 법칙이 형성되지 않은 입장으로 空의 세계를 말하며, 無門은 인간의 자각적인 주체인 근원적인 본래심이 어떤 槪念(觀念)의 門이나 윤리, 혹은 형식, 권위 등을 통과하지 않는 지혜의 작용을 말한다. 본래심으로 근원에서 지혜의 작용을 空의 세계에 그대로 전개하는 깨달음의 세계를 無法과 無門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世俗의 모든 사람들은 형식과 권위, 그리고 어떤 門(학교 등)을 통한 格式에 고정되어있는 생활이며, 틀에 박힌 고정관념이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관습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불법의 지혜를 구족한 出世間의 수행자는 이러한 일체의 관문과 형식의 틀을 모두 초월하여 근원적인 본래심의 경지에서 반야의 지혜로 창조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世俗에서는 어떤 고정관념이나 윤리도덕, 관습, 名相, 槪念 등의 틀에 맞추어서 사물을 인식하고 생각하고 판단하지만, 출세간의 삶은 정해진 법칙도 없고(無法) 고정된 형식의 문도 없는 無門의 경지에 사는 것이다.

 

『금강경』에서 한결같이 강조하는 말이 '고정된 법이란 없다(無有定法)' 과 '실다운 법이란 없다(實無有法)' 이라는 법문이다. 일체의 모든 법은 인연법이기 때문이며, 無常하고 개체적인 영원한 어떤 自性이 없는 無我이기 때문이다.

 

또한 불법이라는 법문의 가르침과 개념의 틀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전등록?29권 同安察선사의 ?十玄談?에 ‘ 대장부는 모두 하늘을 찌르는 뜻이 있으니, 여래가 실행한 곳을 실행하지 말아야 한다(丈夫皆有衝天志, 莫向如來行處行)’ 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대장부는 독자적인 지혜로 자기가 세운 원력의 삶을 보살도로 실행하는 것이다.4]

 

4]『전등록』29권 (『대정장』51권 455쪽, 中)

 

 

『벽암록』제2칙에 '같은 방향으로 불도의 길을 가지만, 가는 방법이 다르다(同途不同轍)' 이라는 말이나, 제7칙에 '푸른 하늘을 독자적으로 걸어가야 한다(丹?獨步)' 라는 주장과 같은 취지이다.

 

선승들이 똑 같은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여 불보살과 똑같은 대승보살도를 실천하는 정신은 같지만, 불법을 체득한 지혜는 시절인연에 따른 독자적인 안목의 방편지혜와 행화로 자신의 원력행을 회향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해진 형식과 맞출 틀(型)이 없는 것이다. 임제의 주장처럼, 일체의 모든 형식과 격식, 권위를 초월한 무위진인이 일체의 모든 차별 대상경계를 탈피하여 독자적인 자신의 길을 걸어가기 때문에 獨脫無依라고 하는 것이다.

 

마치 허공에 새가 날아가는 것(鳥道)처럼, 종횡무진(縱橫無盡)하여 自由自在하고, 걸림 없고(無碍), 任運自在롭고 자유 奔放한 지혜작용의 氣力(活力)이 넘친다. 언제나 자각적이고 주체적인 본래심에서 전개한 지혜로운 생활이기에 매사가 새롭고 창조적인 생활이 되는 것이다.

 

선의 문화는 無位眞人, 혹은 無依道人의 무애자재한 반야지혜의 창조적인 보살도의 생활로 이루어진 모든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임제록』에 ‘심법(心法)은 형상이 없이 시방세계에 두루 관통하며, 지금 여기 자신의 목전에서 분명하게 작용한다.’ 라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선은 형체 없는 마음(無的)의 주체적인 지혜 작용이 無相의 美를 자유자재로 표현하며 다양한 선의 문화와 예술을 창조한다.

 

선에서 ‘자아의식을 텅 비우고 무심(無心)한 경지가 되도록 하라’ 라고 강조 하는데, 자기 자신의 존재의식(我相)을 완전히 텅 비워 버리도록 하는 것이다. 자기라는 자아의식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중생심으로 작용하는 대상 경계에 대한 분별심과 차별심, 목적의식과 의도적인 조작심이 없어진 無相 無我의 경지를 말한다.

 

『금강경』에서 주장하는 無相, 無我란 일체의 형체가 없고 자아의식이 완전히 없어진, 본래 無一物인 자기의 본래 모습을 말한다. 말하자면 어떤 지위나 명예, 형상이나 이름, 衣裳 등으로 장식된 자기 모습이 아닌 일체의 이름과 형상(名相)이 붙여지기 이전의 근원적인 자기모습을 말한다. 선에서는 부와 모에 대한 상대적인 차별심이 일어나기 이전의 자기 본래면목(父母未生以前의 自己 本來面目)이라고 하며, 임제는 일체의 권위나 지위, 三賢 十聖의 法階까지 초월한 근원적인 본래인을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고 했다.

 

無相, 無我라고 해서 결코 단순한 자기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거나 非存在를 의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정과 긍정, 존재와 비존재와의 무한한 모순대립을 벗어날 수 없는 현실적인 有相의 자기가 그 대립을 안으로 脫却하여 그 본래의 면목을 自覺한 無相의 근원적인 自己인 것이다.

 

無相한 자기는 의식하는 主觀과 의식되어지는 客觀이 一體이며 둘이 아닌 不二의 경지(삼매)에서 無相한 자기가 有相의 사물에 자기를 표현한 곳에서 선의 생활과 선의 문화가 창조되는 것이다.

 

즉 일체의 名相과 고정관념, 차별 분별심에서 벗어난 근원적인 본래심의 지혜로 자기를 어떤 그림이나 글씨 등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여기서 자기 본래인의 지혜로 창조적인 선문화가 이루어진다. 그래서 선은 시시각각 자기를 깨달음의 지혜로 창조적인 삶을 건립하는 생활인 것이다.

 

선이란 무한한 창조적 주체(본래심)의 자각적인 지혜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무한의 창조를 위해서는 각자의 주체인 본래심을 어디에 집착하거나 속박시킨다면 자유스러운 창조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체의 기존 개념이나 논리적인 사고 형식에서 탈피하여, 선의 실천으로 자기의 본래 면목을 깨닫도록 하는 일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오로지 일체의 대상경계나 상대적인 차별심을 초월하고 각자의 본래심으로 사유하고 자각하는 지혜작용이 자신의 모든 삶을 창조적인 생활로 만드는 것이다.

 

본래심의 자유 자재한 지혜의 작용과 무한한 창조성의 高揚을 추구하는 것이 선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본래심의 지혜로 창조하는 선의 문화의 특징을 정리해 보면,

 

1) 현실을 直視하고 重視하는 直觀적인 본래심의 지혜작용(현실성의 종교).

 

2) 현실의 모든 삶을 본래심(불심)의 全體作用이 선의 생활로 전개되는 것.

이론적인 객관이 아닌 지금 여기서 자신의 행위 행동으로 전개하는 생활(실천) 창조적인 활동은 현실적 시절인연의 反應이 있어, 자신이 직접 그 시절인연의 삶속에 들어가 행동하고 있는 것.

자신과 자기의 일(생활)이 일체가 되고 하나가 된 생활 속에 몰입하여 살고 있는 것.

이러한 경지를 日常三昧. 王三昧. 遊戱三昧 라고도 한다.

 

3) 불법의 지혜로 일체의 모든 사물을 如實하게 판단하는 正法의 眼目을 구족하는 것.

사물을 보는 상대적이고 이원적인 대립과 차별을 초월하여, 근원적인 불심으로 본래적인고 전체적인 見地에서 제법의 실상과 진실을 여실하게 볼 수 있는 통찰력(正法眼目)이 智慧이다.

 

4) 지금 여기, 자기의 일을 원력행으로 실행하는 능동적인 활동(自發性).

자신이 세운 원력의 삶을 실행하는 자발성으로 자각적인 주체의 삶을 건립한다.

근원적인 본래심에서 전개되는 지혜로운 모든 일이 창조로운 자기 자신의 삶으로 건립된다.

시절인연으로 전개하는 매사를 一期一會 만남의 귀중한 의미와 가치를 일체 중생과 회향한다.

 

 

중생심으로 작용하는 일체의 상대적인 차별심과 분별심을 초월한 본래심의 지혜작용은 순수하고 일체의 모든 선의 세계를 포용한다. 이러한 선의 정신에 토대를 두고 있는 蘇東坡의 유명한 ?白紙贊?이라는 시가 있다.

 

 

素紈不畵意高哉

한 폭의 하얀 비단에 그림 없는 그 본래의 모습이여!

?着丹靑墮二來

만약 붉은색, 푸른색 색칠을 하면 차별세계에 떨어진다.

無一物處無盡藏

한 물건도 없는 곳에 일체의 모든 것이 무진장 있으니,

有花有月有樓臺

꽃이 있고 달이 있고 이를 보는 높은 누각도 있네.5]

 

5]矢代幸雄 『水墨畵』 (日本 岩波新書)144쪽. 이 책에에서는 이 시를 소개 하면서 출처를 밝히지 않고 있는데, 『東坡詩集』 에는 보이지 않는다.

 

 

하얀 純白의 비단 종이위에 무한한 자연의 아름다움과 진실이 갖추어져 있는 것처럼, 일체의 모든 사물 존재와 무진장한 세계가 펼쳐진다. 일체의 번뇌 망념을 텅 비운 근원적인 본래심은 마치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虛空과 같아 空寂한 본래 그대로의 세계인 것이다.

 

허공이 비어 있기에 아름다운 꽃과 달과 자연의 일체 모든 존재가 꾸밈없이 본래 그대로의 모습으로 무한의 진실과 아름다움을 우리들의 눈앞에 그대로 순수하게 드러내고 있다.

 

無一物處無盡藏이란 말은 근원적인 본래심의 청정한 경지에 일체의 만법을 포용하는 것을 말하는데, 마음에 한 물건도 소유하는 일이 없을 때에 일체의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는 것과 같(無所有中一切)은 뜻이다. 즉 번뇌 망념이 없는 無心의 경지에서 자기와 일체의 모든 존재와 함께 할 수 있게 되는 萬法一如의 도리를 설하고 있다.

 

선에서는 이 말을 ‘無一物中無盡臧’ 으로 바꾸고 있는데, ‘中’ 은 일체가 모두 空한 경지임과 동시에 十方 三世와 함께하는 지금 여기를 말한다.

 

『조주록』에 ‘어떤 것이 화상의 家風입니까?’ 라는 질문에 조주선사는 ‘안으로는 無一物, 밖으로는 無所求’ 라고 답하고 있다. 無一物이라는 말은 『六祖壇經』 혜능의 유명한 게송에 ‘本來無一物인데 何處有塵埃’ 라고 설한 말에 근거를 두고 있다. 본래 無一物이기 때문에 본래 청정한 텅 빈 空의 세계를 표현한 말로 즉 청정한 본래심에는 선과 악이라는 고정된 어떤 개념(法)이나 존재도 없고, 妄念, 妄心도 없는 바로 깨달음의 경지인 것이다.

 

?證道歌?에도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覺卽了 無一物.

깨닫고 보면 한 물건도 없는 것.

本源自性天眞佛,

본원 자성은 그대로 天眞의 부처이다.

五陰浮雲空去來,

오온(五蘊)의 뜬 구름이 헛되이 去來하니,

三毒水泡虛出沒

탐진치 삼독심이 헛되이 출몰한다.

了了見 無一物

분명히 깨달아라! 한물건도 없음을,

亦無一兮亦無佛.

하나도 없으면 또한 부처도 없는 것.

大千沙界海中?.

대천의 사바세계도 바닷물의 거품이요,

一切賢聖如電拂,

일체의 賢聖도 전기불과 같이 잠간 비춤이다.

假使鐵輪頂上旋,

설사 철륜(鐵輪)을 머리에 이고 돈다고 할지라도,

定慧圓明終不失.

정혜가 원만하게 밝으면 결코 잃어버리지 않으리.

 

 

황벽의 『전심법요』나 『완릉록』에도 『증도가』의 이 일절을 인용하고 있으며, 돈황본(S.1494 號本) 『臥輪禪師 看心法』에도 '심중이 고요하고 청정하면 대상경계의 한 물건도 없으니, 의식의 대상(물건)이 없고, 마음이 동요되지 않으니 본성이 항상 평안하다(心中寂淨無一物, 無物不動性常安)' 이라고 읊고 있다.

 

선의 이미지로 말하고 있는 고요함(寂靜)과 한가함(無事)은 중생심으로 작용하는 일체의 사량 분별이 텅 비워진 근원적인 본래심(無一物)의 경지를 표현한 말이다. 일체의 번뇌 망념의 일이 없는 청정한 본래심이 한가하고 조용한 경지에서 무위의 즐거움을 즐기는 여유(閑)와, 조용히 맑고 차분하게 안정된 충만감에 즐거움의 삶을 사는 멋이다. 선에서는 寂靜, 古雅, 枯淡의 멋이라고 한다.

 

본래심의 寂靜과 번뇌 망념의 일이 없는 無事의 경지에서 전개한 眞人(覺者)의 생활은 그대로 청정한 空의 세계에 노닐고, 법계에 유희하며 일체의 자취나 흔적도 남기지 않는 무(無)의 경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근원적인 주체인 本來心을 일상의 경계에 매몰시키지 않고 空과 無의 세계에서 지혜롭게 살아가는 眞人의 생활이 선의 생활이며, 그러한 선의 생활이 모두 각자의 독창적인 선문화를 창조하는 것이다.

 

선의 경지를 표현한 선문화의 정신은 寂靜과 無事 이 외에도 無心, 閑居, 隱居, 閑寂 등이 있는데, 이러한 말은 동양적인 정서를 대표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이처럼 동양인들의 정신적인 思惟는 번뇌 망념의 번거로운 일을 텅 비운 무심의 경지에서 無事한 생활의 여유와 한가함으로 절대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노자나 장자가 추구한 無爲自然이나, 중국선승들이 주장한 獨脫無依, 無依 道人, 無位眞人의 세계인 것이다.

 

그리고 노자, 장자, 선은 산악형 종교로서 隱居的인 素養이 많은데, 이러한 중국적인 정서가 선불교의 사상과 결합되면서 한층 더 구체적인 정신과 사상으로 深化되었으며, 실제 선의 생활을 통해서 구체적인 선문화로 실현되었다.

 

범부 중생의 세속적인 가치관과 일체의 번거로움을 떨쳐버리고 한적한 산중에 隱居하여 참선 修道를 통한 깨달음의 경지에서 읊은 悟道頌이나 樂道歌, 청정한 법계를 그대로 표현한 山水畵, 무심의 경지에서 쓴 선승들의 墨跡, 일상의 飮茶(禪茶) 생활 등은 無法과 無門의 경지에서 전개된 창조적인 선문화라고 할 수 있다.

 

 

Ⅲ. 선문화의 사상 - 無心의 道

 

출세간적인 반야지혜와 본래심으로 청정한 삶을 사는 선승들의 생활은 적정함과 청순함으로 心境은 맑고 지혜작용은 깊다. 그러한 선의 경지를 표현한 선문화의 세계를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불심의 지혜작용은 깊고 幽玄하며, 불가사의 해탈 경계로서 微妙하다고 하겠다. 즉 번뇌 망념을 텅 비운 청정한 본래심은 純一無雜하여 소박하고 불심의 지혜작용은 지금 여기 자신의 창조적인 삶을 전개하는 斬新性 이라고 하겠다.

 

선은 번뇌 망념이 없는 無心의 경지에서 無碍자재한 지혜로 창조적인 삶을 이루며, 일체의 행위를 삼업이 청정하여 자취나 흔적을 남기지 않는 沒?跡의 行을 전개하며, 텅 빈 공(無法)의 세계에서 번뇌 망념의 일없이 無事하게 살아간다.

 

이러한 선의 세계를 無法의 법을 실행한다고 하는데, 선의 예술이나 禪墨도 이러한 경지에서 지혜로운 작용(삶)으로 표현된 것이다. 즉 근원적인 본래심에서 일체의 思量分別의 作爲性이 없는 無作의 妙用을 실행하고 無作爲의 지혜작용으로 운행한 것이 선승들의 禪墨이며 禪畵인 것이다.

 

세속인은 틀에 짜여진 書法에 의한 글씨를 쓰고 따르지만 선은 無法이기에 정해진 틀이 없다. 無法의 법을 행하기에 언제 어디서고 縱橫無盡 자유롭고, 또한 본래심의 전개이기 때문에 일상생활의 每事가 자기 창조의 지혜로운 삶으로 전개된다.

 

禪墨이나 禪畵 혹은 茶器를 만드는 사람들의 마음가짐과 행동이 無心 無作의 妙用으로 만들어진 無心의 작품이기에 如如美, 혹은 不二美의 예술성이 있는 것이다.

 

선의 세계는 많은 세월 수행과 몸에 익은 숙달로 잘 만들려고 하려는 작위성과 조작성의 의지나 무엇을 추구하려는 목적의식도 없어진 無作爲의 無心한 경지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선승이나 작가와 작품이 혼연 하나가 되는 一如의 경지에서 이루어진다. 주관과 객관이 나누어지지 않고, 私心과 분별이 없는 不二의 경지, 一行三昧의 경지에서 이루어진 지혜작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연히 선과 악, 범부와 성인, 아름다움(美)과 추(醜)함 등의 상대적인 분별과 차별심을 초월한 無心의 생활이 되는 것이며, 이러한 무심의 경지가 실로 美醜, 善惡, 自他 등 이원론적이고 상대적인 차별세계를 초월한 不二의 경지에서 반야지혜로 창조하는 삶이 되는 것이다.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 본래심의 표현으로 이루어진 선의 생활이 선의 예술이 되고, 선의 창조적인 문화가 되는데, 그것은 무심의 경지에서 불이법문(不二法門)인 반야의 지혜로 전개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선의 예술과 미술을 平常美, 無事美, 如如美, 不二美의 작품으로 평가되는 까닭인데, 이러한 선 예술의 세계를 일본의 柳 宗悅는 본래심의 自然功德, 혹은 無功德의 功德이라고 했다.6]

 

작가가 아름답고 좋은 작품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의식과 作爲性에 집착되어 있는 한 이러한 如如美의 작품은 이루어 질 수 없다. 美醜의 분별에 방황하지 않고, 작자와 작품이라는 둘의 차별, 분별도 완전히 없어진 一行三昧의 경지, 본래심의 自己佛이 된 경지에서 이루어진 작품에서 不二美가 빛난다.

 

不二美란 아름다움(美)에도 추(醜)함에도 걸림 없고, 이러한 미추의 상대적인 모든 세계를 포용한 근원적인 본래심인 無心의 경지에서 자유자재한 지혜작용으로 표현된 작위성이 없는 소박한 아름다움인 것이다.

 

柳 宗悅은 不二美, 如如美, 無事美의 사상적인 근거를 ?無量壽經?의 48원 가운데 제4원에 ‘설사 내가 그 정토의 나라에 왕생 할지라도 그 나라 가운데 인간과 천상의 모두가 형상이 같지 않고 좋아함과 추함의 차별이 있으면 정각을 취하지 않으리라(設我得佛 國中人天 形色不同 有好醜者 不取正覺)’ 라고 설한 원력을 제시하고 있다. 극락정토는 美醜, 善惡, 是非, 凡聖 등의 二元론적이고 상대적인 차별 분별심이 없는 깨달음(無心)의 세계이다.7]

 

6] 柳宗悅 『美의 法門』 (日本, 岩波文庫. 1995년 11월) 30쪽.

7] 柳宗悅 앞의 책 119쪽 이하 참조.

 

 

?반야심경?에 ‘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말이 있다.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라는 주장은 색과 공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사실을 卽이라는 말로 주장하고 있다. 卽은 ?유마경?에서 生死卽涅槃, 煩惱卽菩提 라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둘이 아니라 둘이 하나이며, 같다는 의미로서 不二, 혹은 一如, 如如와 같은 말이다. '色과 空, 번뇌와 보리, 생사와 열반이 같다.'라고 하는 것은 대상 경계가 같은 것이 아니라 인식의 주체인 근원적인 본래심(마음)에서 같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면 우리들이 식사 할 때 숟가락과 젓가락이라는 물건(色)을 사용하지만 이 물건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고 무심하게 사용하면서 식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젓가락을 사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 젓가락을 가지고 식사 하게하면 아무리 애를 써도 사용하기 힘들다.

 

이처럼 똑같은 일을 수없이 반복함으로써 몸에 완전히 베여있는 생활을 習性이라고 한다. 본래의 성품에 깊이 박혀서 본래심의 작용처럼 무심하고 자연스럽게 작용되는 행동을 말한다. 이러한 경지에 들게 되면 무슨 일이든지 무심한 경지에서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기 까지는 많은 노력과 훈련과 숙달이 요구되는 것이다.

 

無心이란 마음에 걸림과 막힘이 없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모든 不可思議한 지혜작용의 源泉이며, 근원적인 본래심에서 작용하는 직관적인 힘은 물이 세차게 흐르는 것처럼 걸림 없고 힘차다. 無心의 경지에서 그린 秋史(阮堂) 金正喜의 蘭草 그림에 붙인 게송을 음미해 보자.(그림 참조)

 

 

不作蘭畵二十年

난초 그리기 20년의 세월, 제대로 그린 것 한 번도 없었네,

偶然寫出性中天

우연히 그린 그림 오래두고 마음속에 생각했던 바로 그 경지로다.

閉門覓覓尋處

어쩐 일인가 문을 닫고 조용히 관찰해 보니.

此是維摩不二禪

아! 이것이 유마의 不二禪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잘 그리겠다고 하는 중생심의 마음(趣向心), 조작된 마음, 욕심이 사라지지 않았을 때에는 아직 명예나 이익, 타산이 남아 있어 각자 천진성의 본래 면목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일체의 조작심과 작위성, 自他, 主客, 美醜 등의 상대적인 차별, 분별심이 없어진 不二禪(無心)의 경지에서 우연히 그린 난초 그림에서 비로소 자신이 마음속에서 갈망하던 참 맛이 되살아 난 것을 스스로 경탄하고 있다.

 

유마의 不二法門은 일체의 상대적인 분별과 차별을 초월한 근원적인 본래심의 경지를 말한다. 不二禪은 자타 주객의 대립이 없어진 본래심(무심)의 세계이며, 萬法一如의 경지이다.

 

세속의 모든 예술이나 문화는 기준의 법칙과 형식의 틀을 벗어나기 어렵다. 書畵人은 筆法과 형식, 틀에 맞춘 모방의 작품생활을 서도나 그림문화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선승의 선화와 선의 문화는 정해진 법이나 형식과 틀이 없다. 법이 없기에 無法을 法으로 삼고 있다. 또한 門이 없는 無門의 大道를 행하는 無碍自在人이다. 선의 예술은 無門을 통과한 선승들의 본래심을 표출한 것이기에 종횡무진 자유 자재하다.

 

본래심의 직관적인 지혜작용이기에 무심한 素顔으로 일체의 전통적인 권위와 형식, 규정을 초월하여 독자적인 창조성으로 脫俗과 ?脫의 경지이다.

 

그래서 선문화와 예술은 破格적이고, 세속적인 가치와 사고를 초월한 독자적인 創造性을 가지고 있다. 어떤 개념과 형식, 틀에 박힌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무심의 지혜작용으로 분출하는 강한 힘의 약동성과 절대 유일한 각자의 개성을 표현한다.

 

단순히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미적 아름다움보다도 근원적인 본래심에서 지혜작용으로 개성 있게 전개된 지금 여기, 자기 삶의 힘으로 이루어진 절대 유일한 창조적인 문화이기 때문이다

 

 

1. 自然스러운 天眞性 - 脫俗. 어린아이의 마음(天眞性)

 

어린아이의 그림에 천진한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 어린아이들은 자신이 하는 일에만 몰입하여 그 어떤 무엇도 의식하지 않고 걸림 없는 自由自在한 힘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세 화가들은 이러한 어린이의 천진 자재함을 구하기 위해 원시인이나 어린아이들이 그리는 것 같은 그림을 그리기도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진짜의 천진스러운 자재로움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천진함을 겨냥한 자재로움이기에 진실로 아름다운 작품은 지극히 드물다고 한다. 이것은 흔히 의식적인 사고로는 무심한 경지에서 지혜작용으로 전개된 道의 생활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어린이가 학교에 들어가면서 부터 지금까지의 천진성과 자유스러움을 잃어버리고 만다. 아름다움과 추함(美醜)의 상대적인 의식과 차별심에 걸림 없이 순수한 본래심의 지혜로 이전처럼 그림을 그릴 수가 없게 된다. 분별심이 이러한 비극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교과서와 선생의 가르침, 의식이 어떤 사물의 개념에 얽매이고, 분별심과 차별심을 일으키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어린아이의 천진한 그림이 그림의 극치인 것은 아니다. 상대적인 차별과 분별의 二元적인 갈등을 극복하고, 二元의 갈등을 초월한 그 고뇌를 통과하고 체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충분히 무르익고 자재롭게 숙달된 작품이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어린아이의 자유스러움은 지극히 연약한 것이다. 그 작품은 깨끗하고 순진한 것이라도 인간 사고의 사상적인 깊이가 없고, 창조적인 문화의 힘이 없음은 二元의 고뇌와 갈등을 극복하고 초월한 체험과 지혜의 힘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어른들의 고뇌는 상대적인 차별심과 분별심에 떨어져 二元의 연못(늪)에 침몰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편견과 고정관념의 함정에 집착하여 쉽게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에 불법의 가르침은 일체의 상대적인 차별심과 편견, 고정관념을 텅 비우도록 空의 사상을 설법한 것이다.

 

모든 상대적인 차별상, 이원적인 二相은 자아의식과 人爲的인 환영(幻影)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불법의 지혜로 깨달아 분명히 확인하여 확신을 체득하게 하여 자신의 본래 면목인 不二의 세계로 되돌아가라고 설하고 있다. 자각적인 확신으로 채득한 깨달음이야 말로 불법의 가르침에서 제시한 선의 본질이며, 일체의 생사고해를 해탈하는 길이기 때문에 참된 중생구제가 된다.

 

둘(二)은 중생심의 의식적인 造作과 作爲이고, 차별과 분별심의 세계이며, 不二는 자연, 본래, 근원적인 본래심의 세계를 말한다. 상대적이고 이원적인 세계를 초월한 경지를 不二라고 하는데, 둘이 아닌 하나는 본래 그대로의 모습인 如如, 如來, 一如, 眞如이며 無心의 경지이다.

 

일체의 번뇌 망념이 없는 본성을 不生, 無法, 如如, 여시, 여법이라고 하는데, 여여는 본래 자연 그대로의 의미이다. 일체의 세속적이고 상대적인 중생의 이원적인 갈등과 고뇌의 집착은 이 불이법문으로 설한 출세간적인 반야지혜의 가르침 이외에 구제될 수 있는 길은 없다.

 

二相, 二元의 차별세계에 침몰하기 쉬운 인간은 될 수 있는 한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정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원력을 세운 보살이 불법의 수행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먼저 상대적인 차별의 二相과 二元에 얽매여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불법의 정신과 지혜로 관찰하여 일체의 착각과 환상을 초월하는 不二법문을 체득하는 구도의 여행을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 구도의 여행은 전연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를 새롭게 개척하고 모험하면서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니고 있는 본래의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구도적인 여행인 것임을 명심해야 된다. 그래서 선의 수행은 근원인 본래로 되돌아가는 還源(還元)을 강조하며, 본래, 근원, 고향의 집으로 되돌아가는 길을 수행의 방향과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불교수행의 어원인 bhavana 는 본래 있는 그 상태에 있도록 하고, 그 본래대로 되도록 하라는 의미이다. 『화엄경』에서 ‘초발심을 일으킨 그 때가 바로 정각(初發心時便成正覺)’이라는 것은 초발심을 일으켜 깨달음의 정각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근원적인 본래심의 초발심이 바로 불심의 정각을 이룬 깨달음인 것이기 때문에 초발심과 정각은 둘이 아닌 하나(一如)인 것이다.

 

의상의 『법성게』에서 ‘法性圓融無二相’ 이라고 읊고 있는 것처럼, 진여자성은 두 가지 모양(二相)이 없다. 본래 그대로이기에 여여하고 청정한 것이다. 선에서는 진여 자성을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본래 청정한 부처의 眼目(문수의 지혜: 正法眼目)과 자비의 얼굴(보현의 行化)을 구족한 것을 의미한다.

 

단지 우리들의 집착심과 무명이 그 청정함을 제멋대로 흐리고 더럽히고 있음에 불과한 것임을 자각하면 된다. 자성이 청정한 근원적인 각자의 본래로 되돌아감은 自覺에 의해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종색(宗?)의 『坐禪儀』에 ‘번뇌 망념이 일어나면 번뇌 망념이 일어난 사실을 자각하라. 번뇌 망념을 자각하는 그 지혜작용이 깨달음이기에 망념은 저절로 없어진다(念起卽覺, 覺之卽失)’ 라고 주장하고 있다.8]

 

망념을 자각하여 번뇌 망념이 없어지는 그 순간 돈오견성이 이루어지며, 불심의 지혜작용이 전개되기 때문에 선은 항상 지금 여기 자신의 일에서 자각적인 지혜작용으로 깨달음의 생활을 전개 할 수 있는 것이다.

 

8]『대정장』48권 1047쪽 中. 정성본 『선불교의 실천수행』(중앙승가대학교 대학원 학술대회 논문집 『승가의 실천수행』 2008년 10월 참조.

 

 

2. 圓相의 선문화

 

?人天眼目?제4권에는 선종에서 一圓相을 그려서 깨달음의 경지를 대화로 전개한 선문답은 南陽慧忠국사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전한다.

 

南陽慧忠가 제자인 耽源應眞에게 내린 일원상의 의미를 仰山慧寂이 接化의 수단으로 응용한 것인데, 圓相에는 96種의 의미가 있지만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이 6가지가 된다.

 

1) 圓相 : 원상을 그림으로써 절대의 진실, 불법 그 자체를 나타낸 것

2) 義海 : 여러 가지의 三昧를 모두 이 一圓相 가운데 포함 한 것

3) 暗機 : 主客의 대립이 일어나기 이전의 작용

4) 字學 : 원상이 불법을 나타내는 글자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

5) 意語 : 원상이 그대로 宗意를 나타내고 있는 사실

6) ?論 : 圓相이 그대로 宗意에 契合되어 있는 사실

 

 

?신심명?에 ?둥글기가 큰 허공과 같아서 결여됨도 없고, 모자람도 없다(圓同太虛 無缺無餘).?라고 읊고 있는 것처럼, 圓相은 아름다운 완결체임과 동시에 일체의 모든 존재를 포용하고 있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太虛는 허공이며 大空, 虛空界로 일체의 삼라만상을 모두 포용하고 있는 것이다. 허공이 텅 비어 있기에 일체의 우주 만물을 싣고 살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것이다.

 

텅 비어 있다고 함은 그저 아무것도 없는 무의미한 공간이 아니라 ,그 텅 빈 공간이 삼라만상 일체의 모든 존재가 각자의 본성과 독자적인 모습을 보존한 채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참된 공간인 것이다. 말하자면 일체의 모든 존재의 참된 實相과 그 존재들의 본질을 떠 받쳐 주고 있는 공간이며, 일체의 모든 존재들을 포용하고 수용하여 삶의 장소로 제공하고 있는 공간인 것이다.

 

텅 비어 있기 때문에 모든 사물과 생명들이 존재할 수 있고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텅 빈 허공과 같은 공간이 없다면 인간은 물론 일체의 모든 사물이 숨을 쉴 수도 없고, 각자의 위치에서 독특한 삶을 영위할 수도 없으며, 가능성과 창조와 자기성장과 발전도 있을 수 없다.

 

선에서는 텅 빈 허공을 단순한 사물로 취급하지 않고, 이를 각자의 마음에 비유하여 무심한 허공처럼 텅 빈 마음으로 일체를 포용하고 무한한 지혜와 자비를 전개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텅빈 허공을 본래심으로 하여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그림이 一圓相이다.

 

이러한 法界의 實相을 하나의 圓相이란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대승기신론?과 ?화엄경? ?능엄경?에서 한결같이 法界一相을 허공에 비유하고 있는 설법을 중국인들이 圓相이란 그림으로 도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즉 인도인의 추상적이고 논리적인 표현을 중국인들은 구체적인 圖象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중국인들의 具象性은 ?周易? 繫辭 上 등에도 언급 되고 있다. 말하자면 圓相이란 하나의 기호를 象徵化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선종에서 不立文字 敎外別傳 以心傳心을 강조하며 형이상학적인 논리를 토대로 한 설법보다도 圓相으로 선문답을 하는 예가 많이 보이고 있는 점이나, 또한 주장자나 방망이(捧), 고함 소리(喝), 사물을 가리키며 불법의 대의를 질문하는 지사문의(指事問義), 혹은 어떤 사건을 제시하여 설법하는 일(指事說法)을 하고 있는 점도 이러한 중국인의 현실을 중요시하는 思考 경향의 일면을 엿 볼 수 있다.

 

圓相은 불교 사상의 핵심인 空(sunyata, sunya)의 상징이며, 심볼이라고 할 수 있다. 空은 인도에서 발견된 대승불교의 실천 정신이며, 一切皆空의 진실을 완성한 반야 사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도불교의 空의 사상을 중국불교에서는 하나의 둥근 圓으로 상징하여 표현하고 있다. 空을 圓相의 이미지로 파악한 것은 중국 선종의 지혜이며, 圓相은 대승불교의 심볼 마크가 되었고, 선불교의 상징이 되었다.

 

선의 어록에 圓과 圓相에 대한 표현이 지극히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圓, 圓位, 圓覺, 圓鏡, 圓敎, 圓光, 圓孔, 圓寂, 圓珠, 圓照, 圓成, 圓常, 圓通, 圓相, 圓智, 圓頓, 圓音, 圓滿, 圓明, 圓融 등이 있다.

 

 

3. 圓相의 의미

 

?전등록?에 반산보적선사가 ‘마음의 달이 홀로 둥글고, 밝은 빛은 만상을 삼킨다(心月孤圓 光呑萬象)’ 라고 읊고 있는 것처럼, 圓은 圓滿 全體, 일체의 모든 존재를 포용하는 의미의 상징이다. ?信心銘?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결여된 곳도 없고 남는 곳도 없는 완전무결하고 원만한 모습의 상징은 眞如 자성, 불성의 청정한 實相, 법신, 法性, 佛心, 大道, 至道, 至理 등 법계에 두루하며 평등 절대의 진리를 표현한 심볼이다.

 

즉 중생의 心性이 周遍하여 평등한 사실을 表象한 것이다.

 

선문답에서 선승들이 학인들을 제접하면서 拂子나 如意, 주장자, 혹은 손가락 등으로 大地나 虛空, 혹은 공간에 一圓相을 그리기도 하고, 붓을 가지고 墨書하여 절대의 진실을 그림으로 表示하였다.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이 ‘周邊이 없는 圓에는 中心點이 이르는 곳에 있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삼각형과 사각형의 그림을 원상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圓에 周邊 즉 둘레, 주위를 한정시킨 것이 없게 되면 어느 곳에서도 원은 중심이 되기 때문에 一圓相은 고정된 住處가 없다. 그래서 無住이며 無碍自在할 수가 있는 것이다.

 

삼각형이나 사각형은 중심이 한곳에 정해져 있기 때문에 고정화 된다. 圓에 周邊이 있으면 중심은 한 곳 뿐이기에 萬事가 固定化 된다. 그러나 圓周가 없으면 어느 곳에서라도 중심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주체가 됨과 동시에 자유롭게 작용할 수가 있다.

 

절대적인 것에는 周邊을 붙일 수가 없다. 그렇게 되면 크게 치면 크게 울리고 적게 치면 적게 울리는 도리로, 적은 인물은 작은 것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어디에도 주변을 만들려고 하는 버릇이 있다. 주위를 설정하지 말고 크게 자기를 원과 같이 고정된 주체가 없이 무애 자재하게 걸림 없이 살도록 해야 한다.

 

『금강경』에서는 ‘언제 어디서고 머무름이 없이 마음을 불심의 지혜로 작용하라’ 라고 설한 것이다. 圓相의 선문답은 이러한 절대의 경지에 살 수 있는 법문인 것이다.’

 

지극히 간단한 하나의 선으로 원을 그린 원상은 시작과 끝이 없는 무한하고 무상한 시간의 연속성을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시작도 없고, 마침도 없는 無始無終이며, 영원(劫)과 刹那(一念)가 함께 하며, 둘이 아니며(不二), 다르지도 않고(不異) 하나(一如)인 것이다. 圓相은 시간의 연속성을 상징한 심볼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 인도에서는 四季節의 연속성, 일체 존재의 생명과 生老病死의 연속성과 시간적인 인식철학은 輪廻사상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시간적인 인식은 農耕생활의 풍토에서는 인생의 行路이며, 매일매일 반복되는 태양과 달의 행로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혜능의 말처럼, 잎이 떨어져 근원인 뿌리(본래)로 되돌아가는 것이다.(老子의 歸根得旨)

 

원상은 불교철학에서 궁극적인 절대의 경지로 제시한 一切萬法의 근원적인 본래 모습을 一切皆空의 세계를 圖示的 표현한 것이다. 諸法의 근원적인 본래 모습은 空相이라는 경전의 사상을 하나의 圓相으로 표현한 것이며, 자각의 주체로서 주장하는 각자의 불성이나 如來藏,진여 自性도 一切皆空이라는 범주를 벗어난 존재가 아니며, 그 예외일 수 없다. 一切皆空이라는 그 사실을 깨닫는 자각의 주체가 불성이며 여래장일 뿐이다. 따라서 자성이 청정한 마음을 원상으로 상징화 한 것이다. 또한 선에서 제시한 圓相은 무한의 시간에 공간을 중복시킨 불교철학의 動的인 圖式化라고 할 수 있다.

 

十方(東西南北 四維上下)은 불교의 세계관을 입체적으로 제시한 것이고, 三世(과거 현재 미래)는 무한한 시간을 하나의 원상으로 상징한 것이다.

 

즉 시간과 공간의 중복성을 하나의 원상으로 표현하여 지금(시간), 여기(공간)서, 자기 자신이 일체의 번뇌 망념을 텅 비운 마음(반야의 지혜)으로 자신의 주체적인 삶을 창조적으로 살 수 있는 불교 사상을 표현하고 있다.

 

흰 白紙위에 그린 하나의 圓相은 시간과 공간 속에 살고 있는 자기의 본래 면목을 상징한 것이다. 흰색은 텅 빈 청정한 본래 모습인 허공의 실상을 상징하며, 본래 청정한 만법의 본질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얀 화선지 위에 검은 먹물로 그린 하나의 원상은 무엇인가?

 

諸行無常하며 일체개공(虛空,白紙)인 사바세계에 살면서 萬法의 본질을 체득하는 자기의 본래 모습을 표현한 것이며, 자각의 주체를 상징한 것이다.

 

리들 각자 또한 일체개공의 범주 속에 포함되어 있는 존재이며, 본래의 모습은 空한 것임을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무상하고 일체개공(허공)한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본래 모습도 또한 空(本來無一物)한 것임을 원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 각자가 마음을 비우고 本來無一物의 세계인 無心의 경지에서 만법이 일체개공인 허공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모습을 하나의 원상으로 상징하여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공의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자각주체인 마음 또한 공한 것임을 하나의 원상으로 圖示한 것이다.

 

원상의 思想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圓融無碍 : 圓滿. 完全無缺, 모자람도 남음도 없는 원만의 상징. 十은 圓數.

平等一相 : 法界平等.自他不二. 萬法一如. 一切皆空의 상징.

淸淨湛然 : 자성청정심의 상징. 法界淸淨.

寂然無爲 : 조작과 작위성이 없는 본래 그대로의 모습. 本來寂靜의 세계

一切皆空 : 不生不滅,無始無終, 增減,去來,住往 등이 없는 본래의 경지.

寶鏡三昧 : 海印三昧

心月孤圓 光呑萬象: 법계에 두루하여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음. 法身光明.

人法雙亡 : 十牛圖의 人牛俱忘.

十方三世 : 무한한 삼라만상을 포용하는 공간과 시간을 중복시킨 상징.

無始無終 : 영원한 시간의 상징.(劫과 刹那)

圓相과 十牛圖.

 

 

Ⅵ. 선문화의 생활

 

선의 문화생활은 불법의 지혜로 지금 여기 자신의 일을 무심의 경지에서 불국토와 정토로 건립하여 보살도의 원력을 실행하는 것이다.

 

?조당집?제15권에는 마조도일선사의 법을 이은 방거사(龐居士)는 선의 생활을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心如境亦如 마음이 청정(여여)하면 경계도 여여하리.

無實亦無虛 고정된 실체도 없지만, 그렇다고 허망하지도 않네.

有亦不管, 있음(有)에도 관계치 않고,

無亦不居 없음(無)에도 마음이 머무르지 않으니,

不是賢聖, 이는 바로 성현도 아니요,

了事凡夫 일대사를 끝마친 평범한 사람이다.

 

 

‘마음이 여여하면 경계도 여여하다(心如境亦如)’라는 말은 불법의 대의를 깨달아 일체의 번뇌 망념을 텅 비운 본래심의 경지에 살고 있는 입장을 읊고 있다. 『금강경』에서 설한 '如來者 卽諸法如義' 라는 말과 같이 如如는 여래와 같이 일체의 모든 존재(諸法)와 같은 뜻이라는 의미이다. 진여의 지혜작용인 여래 법신은 일체 만법과 하나(一如)이며, 같고(如如), 둘이 아닌 것(不二)이고, 다르지 않은 것(不異)이기 때문에 『신심명』에서는 일체 만법과 하나(萬法一如)라고 읊고 있다.

 

의상의 『법성게』에 '법성은 원융하여 두 가지 모습이 없으며, 일체의 모든 법은 움직임이 없어 본래 적멸한 모습이다(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 라고 하며, 본래부터 동요함이 없는 법성(법신)을 부처(舊來不動名爲佛)라고 한다고 읊고 있다.

 

『금강경』에서 강조하고 있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등 四相을 텅 비운 자아의 참된 모습(眞如法身)인 如來는 일체의 모든 존재의 본성(法性)이며, 제불법신이기 때문이다.

 

여여(如如)란 진여 자성이 본래 그대로 여법하고 여실하게 지혜작용하고 있는 의미인데, 자신의 마음도 본래 그대로 진여자성이 청정한 지혜작용의 경지이고, 마음이 청정하니 자신의 삶과 함께하는 일체의 차별 대상 경계 또한 본래 그대로 여여하고 여법하게 시절인연에 따라 무심하게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기신론?에 번뇌 망념이 일어나면 대상 경계(法)가 일어나고, 번뇌 망념이 없으면 대상 경계도 없어진다는 말처럼, 인식의 주체인 마음에 번뇌 망념이 없기 때문에 차별세계인 대상 경계도 없는 본래 그대로의 여법하고 여실한 깨달음의 삶이 전개되는 것이다.

 

‘고정된 실체도 없지만, 그렇다고 허망하지도 않네(無實亦無虛).’는 이 일절은 ?금강경?에서 설한 법문을 읊은 말이다.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무실(無實)이란 말은 일체의 모든 존재나 사물은 물론 최상의 불법이나 깨달음도 독자적인 고정된 자성이나 실체가 없다는 공(空)사상의 진실을 설한 것이다.

 

?금강경?에는 깨달음이나 부처, 여래, 보살의 이름이나 모양 등 어떠한 존재라고 할지라도 독자적인 개체의 자성이 없기 때문에 ‘고정된 법이란 있을 수가 없다(無有定法)’, 혹은 ‘고정된 실체의 법이 없다(無有實法)’ 라고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일체의 모든 존재나 법은 인연법이며, 시절인연으로 이루어진 방편법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야경? 제8권에 ‘만약 어떤 가르침(法)이 있어 열반의 경지보다도 더 수승하다고 할지라도 나는 역시 환화와 같고, 꿈과 같다고 설한다.’ 라고 했다.

 

일체의 모든 법은 자성이 없고,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경전에는 꿈, 환화, 물거품, 그림자, 이슬, 아지랑이 등으로 비유하여 설하고 있다. 그러나 중생은 불법을 알지 못하는 무지와 무명으로 눈으로 보고, 듣고, 냄새나고 촉감으로 느끼는 모든 사물을 실재로 영원히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집착하며, 소유하려고 애착을 갖기 때문에 번뇌 망념과 사물에 집착하여 업장을 만들고 다양한 고통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허망하지 않다고 하는 무허(無虛)는 불법의 진실을 체득한 반야의 지혜로 일체의 번뇌 망념을 텅 비울 때 근원적인 본래심(진여자성의 불심)은 일체의 모든 존재나 사물 경계를 여여하고 여실하게 보고 듣고 작용할 수 있는 지혜작용은 허망하지 않다는 사실을 말한 것이다. 참선수행은 불법의 가르침을 통하여 만법의 진실을 올바르게 체득하여 정법의 안목을 구족할 때 일체의 존재나 사물경계에서 집착하지 않고, 마음도 본래 그대로 여여하고 사물도 본래 그대로의 모습을 여여하게 보고 듣고, 차별 분별심도 없이 반야 지혜로 지금 여기 자신의 삶을 편안하고 창조적인 삶으로 살 수가 있는 것이다. 방거사는 이러한 최상승의 반야법문을 체득하여 읊은 말이다.

 

방거사는 자신이 일상생활하는 가운데 일체의 존재사물이나 의식의 대상 경계에 대하여 본래심으로 여여하게 대하고 있는 자신의 심경을 ‘있음(有)에도 관계치 않고, 없음(無)에도 마음이 머무르지 않는다.’ 라고 읊고 있다. 유와 무, 범부와 성인, 선과 악, 등은 중생이 상대적인 차별심과 분별심을 만드는 대표적인 개념의 언어(말)이다. 불법은 유를 버리고 무를 취하거나, 악을 멀리하고 선을 추구하는 차별의 종교가 아니다.

유와 무, 선과 악을 모두 함께 초월하여 일체의 집착과 상대적인 차별심을 만드는 대상경계를 모두 텅 비우도록 공(空)의 법문을 설한다.

 

사물 경계를 의식하면 지금 여기 자신의 일에 몰입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불법은 체득한 정법의 안목으로 무심의 경지에서 반야지혜로 창조적인 삶을 살도록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불법의 지혜를 체득한 정법의 안목으로 지금 여기 자신의 삶을 편안하게 사는 나야 말로 ‘성현(聖賢)도 아니요, 일대사를 마친 평범한 사람이다(了事凡夫).’라고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화엄경? 등 많은 경전에서는 방편 법문으로 불법을 수행하여 삼현(三賢) 십성(十聖)의 경지에 이르고 부처나 보살이 되도록 설하고 있지만, 참선수행은 성현과 부처의 경지까지 초월하지 않으면 지금 여기 자신의 삶을 지혜롭게 살 수가 없다. 그래서 임제도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부처라는 상대적인 의식을 텅 비우고), 조사나, 부모, 권속 등의 상대적인 의식을 모두 텅 비우도록 강조하고 있다.

 

방거사는 자신을 생사윤회를 초월한 일대사의 일을 마친 범부라고 주장한다. 즉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여 지금 여기 자신의 매사 모든 삶을 생사윤회에 떨어지는 업장을 짓지 않고, 일체의 흔적과 업장의 자취를 남기지 않는 신구의 삼업이 청정한 삶을 사는 평범한 생활인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평상심으로 불도를 실행하는 평범한 위인이라는 의미이다.

 

?벽암록?제5칙의 게송에 ‘봄날의 온갖 꽃은 누구를 위해서 피는가?(百花春至爲誰開)’ 라는 말이 있다. 꽃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해서 피는 것일까? 그렇다면 자아의식과 상대적인 차별심에 떨어진 것이다.

 

방거사의 딸 영조는 ‘百草頭上에 祖師意가 있다.’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꽃은 각자 자기 본분사의 생명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며, 달마조사도 자기 본분사인 원력행을 한 것이다. 법을 전하기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하기 위해서는 주관적인 자아의식과 상대적인 차별심에 떨어진 중생이된다.

 

달마대사나 방거사와 같이 모두 각자 자신이 세운 보살도의 원력을 지금 여기 자신의 삶을 통해서 반야의 지혜로 무심하게 살고 있는 것이 선의 생활이다.

 

송대 白雲守端선사가 ‘風流스럽지 않은 곳에 더욱 風流스러움이 있다(不風流處也風流)’ 말하고 있는 것처럼, 풍류스러움을 느끼거나 의식하면 풍류스럽지 못한 것이다.9]

 

9]『白雲守端廣錄』 (『卍속장경』 120책 218, d)

 

 

자기 자신이 번뇌 망념을 텅 비운 무심의 경지에서 자신의 일과 혼연 일체가 되어 자신의 삶을 살 때 멋있는 풍류스러운 삶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 자신의 삶과 하나가 된 삶으로 사는 그 경지를 터득할 때 선문화의 생활을 더욱 더 깊은 경지에서 살아 갈 수 있는 것이다.

 

운문선사는 ‘좋은 일은 없었던 것보다 못하다(好事不如無)’ 라고 주장하는데, 아주 특별한 일(奇特事)에서 즐겁고 좋은 선의 문화생활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평상심이 道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일상생활을 전개하는 평상심(본래심)으로 지금 여기 자기의 일에서 일체의 모든 자연과 하나가 되는 좋은 삶을 만들도록 해야 한다.

 

운문선사는 또 ‘날마다 좋은 날(日日是好日)’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데, 그것은 항상 언제 어디서나 지금 여기서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생활의 지혜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선과 차의 문화생활

 

차를 마시는 일과 참선을 하는 일은 분명히 다른 일인데 어떻게 禪茶一如의 주장이 이루어 질 수 있는가? 차를 마시는 茶道의 문화가 어떻게 선의 경지와 같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일까?

 

禪茶一如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禪,혹은 선의 경지란 어떤 세계인가?를 이해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唐代 조사선에서 말하는 禪이란 단순히 번뇌를 퇴치시키기 위해 한적한 곳에 조용히 앉아서 닦는 좌선이나 명상의 차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조사선에서 말하는 禪은 한마디로 인간각자의 근원적인 본래심을 자각하고, 자각된 본래심(평상심)으로 일체의 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차별심이나 분별심의 번뇌도 없이 일상생활의 每事를 걸림 없이 무애자재롭게 지혜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마조도일은 이러한 조사선의 경지를 평상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진실 된 道의 세계라는 조사선의 새로운 道의 정의를 ‘平常心是道’ 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臨濟도 언제 어디서나 각자의 본래심을 잃어버리지 않고 자각한 본래심으로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아갈 때 ,자신이 서 있는 그 곳이 바로 진실 된 깨달음의 경지가 된다고 하는 ‘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는 名句를 설하고 있다.10]

 

10]『임제어록』 (『대정장』47권 498쪽 上) 정성본역주 『임제어록』(서울, 한국선문화연구원. 2003년 12월.)에 수록한 임제의 선사상을 참조.

 

 

차를 마시고, 차의 생활을 하는 茶道의 경지가 이와 같이 선의 생활, 혹은 선의 경지와 같다고 하는 禪茶一如,혹은 茶禪一如라는 주장은 사실 禪僧들의 입장에서 주장된 말이 아니고, 茶道의 생활을 하는 茶人들의 입장에서 주장된 말이다.

 

草衣선사(1786--1866)가 추사 김정희에게 차를 만들어 선물하자, 보답하는 글로 쓴 추사의 명필 “茗禪”이란 내용도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서울 澗松美術館 所藏. 별첨 자료 참조)

 

초의선사는 특별히 禪茶一如나 茶禪一如라는 말은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어떤 衲子가 茶道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게송에는 禪茶一如의 경지를 단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雅俗淸塵元一致

고상함과 속됨, 청정함과 더러움의 세계가 원래 하나인 것인데,

不別鳴蟬與?鴉

매미소리와 까마귀 우는 소리를 구별하지 말라.

 

 

고상함과 속됨, 청정함과 더러움은 인간들의 차별과 분별심에서 주장된 번뇌의 소산이다. 근원적인 본래의 세계에서는 일체의 차별과 분별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초의선사는 이러한 차별들이 본래 하나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범부나 성인, 선과 악, 깨끗함과 더러움, 아름다움과 추함 등 도 모두 상대적인 분별과 차별심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차별 분별심을 여의고, 근원적인 본래심으로 되돌아갈 때, 매미소리나 까마귀 울음소리에도 끄달리지 않게 된다는 말이다. 즉 일체의 상대적인 경계나 소리, 모양에도 끄달리지 않고 구별하고 분별하는 차별심에 떨어지지 않게 된다는 말이다.

 

일체의 분별과 차별의 세계를 떠나 근원적인 본래심으로 茶를 달이고 마시는 것이 茶道인 것임을 단적으로 설하고 있다. 茶를 마시는 일상의 행위를 道의 경지로 전개하는 정신이 이러한 차별의 세계를 초월한 茶道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禪茶一如의 정신은 『信心銘』에서 주장하는 다음의 게송을 통해서 그 정신을 살펴볼 수가 있다.

 

 

心若不異 마음에 차별 분별이 없으면,

萬法一如 일체의 만법은 하나와 같다.

一如體玄 하나와 같기에 진여 本體가 玄妙하여,

兀爾忘緣 무심하게 일체의 반연을 잊는다.

 

 

근원적인 本來心의 경지에서 일체의 妄心과 妄念을 여의면 그대로 만법과 하나가 되는 경지를 萬法一如라고 한다. 一如는 不二, 不異, 如如, 如來와 같은 의미의 불교 용어인데, 번뇌 망념을 텅 비운 본래 청정한 마음(자성청정심)인 진여(眞如)이다. 『금강경』에 ‘여래란 일체의 모든 만법과 같다는 의미이다(如來者 諸法如義)’ 라고 설하고 있는 법문이다.

 

우리들 인간이 行住坐臥의 일상생활을 여러 가지 일과 행위를 통해서 다양하게 전개할지라도 일체의 주위 경계나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언제나 근원적인 본래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선의 생활이다. 때문에 이러한 본래심으로 사는 선의 생활 속에 인간의 每事가 포함되지 않는 것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證道歌』에도 ‘인간의 행위가 모두 선이요, 앉아 있는 것도 또한 선이다. 그래서 말을 할 때나 묵묵히 있을 때나, 움직일 때나 조용히 있을 때나 본래심으로 언제나 편안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行亦禪,坐亦禪,語?動靜 體安然)’ 라고 읊고 있는 것처럼, 인간의 모든 행위가 모두 禪이되기 때문에 언제나 일체의 근심걱정이 없는 편안한 생활이 될 수 있는 것이다.

 

『維摩經』 보살품에도 ‘일체의 모든 동작이나 발을 옮기고 움직이는 것은 모두 깨달음의 경지(道場)에서 佛法에 住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大正藏? 14권 542쪽 下)라고 설하고 있다.

 

行住坐臥의 일상생활이 佛法을 벗어나지 않는 것은 깨달음의 장소(本來心)를 상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차를 마실 때나 식사를 할 때, 모든 행동과 삶이 佛法의 세계에 住하며, 평상의 일상생활 그 모두가 본래심으로 佛法을 전개하는 것이다. 平常心(본래심)이 바로 道라는 말은 이러한 정신을 단적으로 제시한 조사선의 사상이며, 道의 定義이다.

 

선불교는 평상심으로 전개하는 일체의 모든 행위와 행동, 威儀와 儀容이 불심의 지혜作用이며, 생활의 종교이다. 인간의 행위 그 모두가 근원적인 본래심으로 전개하는 선의 생활이기 때문에, 차를 마시는 일이나 참선을 하는 일이나 차별, 분별심이 없는 생활이기에 禪茶一如의 세계가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다. 다양한 인간의 모든 행위를 一如로 할 수 있는 것은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근원적인 주체인 本來心으로 전개되는 행위이기 때문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한적한 곳에 조용히 앉아서 참선을 하는 坐禪의 이미지와 조용히 차분한 자세로 차를 마시는 외관상의 모습과 행위를 같은 것(一如)으로 간주하고 茶禪一如, 혹은 禪茶一如의 경지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오히려 행위의 구분을 일체화하려는 의도에서 분별심과 조작심이 증대될 뿐이다. 좌선과 차 마시는 행위를 억지로 일체화 시키려는 조작된 의지가 작용하게 되는 부작용이 증대될 뿐이다.

 

차를 마시거나 좌선을 하거나 상관없이 일체의 행위와 분별에 떨어지지 않고, 자기의 행위가 지금이라는 시간과 여기라는 공간, 즉 자신이 근원적인 본래심으로 時空을 초월하여 일체가 된 日常三昧의 세계에서 茶禪一如의 경지가 이루어진다. 임제는 이러한 경지를 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고 하고, 또 경계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無依道人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말하자면 자기가 지금 여기의 자신의 일(一事)에 절대의 경지(깨달음 세계)를 실행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선은 이러한 일상생활 속에서 절대적인 자기를 무애자재하게 전개하는 생활의 종교인 것이다. 차를 마시는 茶道의 경지도 이러한 선의 경지를 통해서 茶禪一如의 세계를 전개할 수가 있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秋史 金正喜의 명필로 전해지고 있는 유명한 다음의 게송은 茶禪一如, 혹은 禪茶一味의 세계를 단적으로 읊고 있다.

 

 

靜坐處茶半香初

본래심의 경지에서 차를 마시면 차 맛은 언제나 처음 그대로.

妙用時水流花開

신묘한 마음의 지혜작용은 물이 흐르고 꽃이 피듯 如法하네.

 

 

일체 만법의 본질적인 깨달음의 세계를 禪茶의 생활로 읊고 있는 名句이다. 『法苑珠林』 71권에 '禪靜坐處'란 말이 보이며, 山谷 黃廷堅 (1045--1105)의 詩에 '無一空山 水流花開'라는 말이 보이지만, 이 詩는 禪茶一如, 禪茶一味의 경지를 체득한 秋史의 독창적인 偈頌이라고 할 수 있다.

(* 이 시는 황산곡의 작품으로 『산곡문집』에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황정견은 黃龍祖心선사에게 참선을 배운 사람이다)

 

『從容錄』 48칙에 '妙用 無方이지만, 손을 내밀 수 없는 곳 있다.' 라는 말이 있다. 즉 깨달음을 얻은 커다란 지혜작용(機用)은 종횡무진 자유 자재로운 것이란 말이다. 無方은 고정된 방향과 위치 없는 것으로 일체처에 무애자재하다는 의미로서 眞空妙有나 大機大用과 같은 의미이다.

 

靜坐處란 깨달음의 경지인 근원적인 본래심의 당체(本體)를 공간(場所)적인 입장에서 표현하고 있는 말이고, 妙用時란 이러한 본래심의 미묘한 지혜작용이 시절인연에 따라 여법하게 전개되는 사실을 시간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말하자면 반야사상의 본체와 작용을 體用의 논리로 읊은 게송이다. 즉 본래심의 경지인 본체에서 좌선을 하고 차를 마시면 향기나 맛 등의 현상적인 경계나 분별, 차별심에 떨어지지 않고 언제나 처음(근본, 본래심)의 그 깨달음의 경지를 상실하지 않는 경지를 읊고 있다.

 

茶半香初란 자각의 주체(本體)인 본래심의 경지에서 참선하거나 차를 마시기에 차를 반잔 마시거나 두 잔을 마시거나 몇 잔을 마셔도 자신이 마시는 차의 향기나 맛의 경계에 떨어져 감정에 끄달려 처음(初)인 근본의 본체(本體)을 상실하지 않고, 항상 본래심으로 여여하게 살아가는 선의 생활을 읊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처음(初)은 原初인 본래심을 의미하는 말이다. 『화엄경』에 ‘처음 발심한 그 마음이 바로 그대로 정각인 깨달음의 마음과 같다(初發心時便成正覺)’ 이라 했듯이 처음은 근원적인 본래심의 지혜작용이며, 즉 一味를 의미하는 것으로 근원적인 본래심의 경지를 표현한 말이다. 一如나 一味는 근원적인 본래심에서만이 체득될 수 있는 경지이기 때문이다.

 

海水一味는 짠맛으로 일체 모든 강물의 맛과 향기를 하나로 會通하고 廻向한다. 즉 근원적인 본래로 還源하여 본래로 되돌아가게 하는 환귀본처(還歸本處)나 萬法歸一 등의 표현도 모두 근본이며 본체인 근원적인 一心을 말한다. 道의 경지는 일심의 자각적인 세계이다.

 

따라서 이러한 근원적인 본래심에서 전개되는 무진장한 지혜(本來智,自然智)의 작용은 언제나 如法하고 자유 자재롭게 펼쳐지는 깨달음의 세계를 읊고 있다.

 

물이 흐르고 꽃이 피는 모습은 본래심의 작용인데, 이러한 지혜의 작용은 물이 위에서 밑으로 흐르듯 如法함과 불변의 법칙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꽃이 피는 시절 인연과 현실을 파악하는 지혜의 작용이 무애 자재로움을 읊고 있는 것이다.

 

 

Ⅴ. 결언

 

선의 문화는 세속적인 가치관을 초월하여 몸과 마음이 평안한 불심의 반야지혜로 독자적이고 창조적인 문화생활을 하는 것이다. 자신의 살고 있는 생활공간인 집과 정원, 禪室과 茶室 등 삶의 생활환경을 독자적인 선의 지혜로 만들고, 자연 친화적인 공간적인 시각과 자연의 법음을 함께하는 청각적인 생활환경으로 만들어 보자.

 

텅 빈 禪室은 본래의 적정으로 마음의 안정과 평화의 삶을 창조하는 공간이다. 독자적인 선의 사유와 지혜작용은 창조적인 선문화의 원천이 된다. 선실의 텅 빈 적정의 공간은 몸과 마음을 평안하게 하며, 無心의 경지에서 무한한 창조적인 지혜와 한량없이 큰 자비의 덕행을 실행하는 청정한 도량이 되는 힘이 분출되도록 하는 것이다. 向上一路의 무한한 가능성을 실행할 수 있는 자기 창조의 사유공간이 되도록 한다.

 

다실은 좋은 인연의 만남과 대화로 지혜와 인격을 나누고 배우는 장소로 자각적인 선의 문화생활이 되도록 한다. 존경과 경의심으로 귀중한 손님을 맞이하는 깨끗한 정원과 다실의 꽃꽂이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함께하는 시절인연이 되고 一期一會의 귀중한 만남과 삶을 의미 있고 보람참 행복의 시간이 되도록 한다.

 

그리고 선실과 다실에는 禪墨이나 禪機畵, 十牛圖, 圓相, 達摩圖 등은 손님과의 지혜와 인격을 나누는 대화의 소재가 된다.

 

이러한 선의 문화생활은 남의 흉내나 모방이 아니며, 남과 비교하고 경쟁하며 대립하는 생활이 아닌 근원적인 본래심의 지혜와 인격으로 경의와 공경심을 나누는 품격 있는 보살행의 미덕이 되는 것이다.

 

 

 

秋史 金正喜의 不二禪蘭과 茗禪

 

 

 

 

 

 

참고문헌

 

1. ?금강경? (?대정장? 제8권)

2. ?유마경? (?대정장? 제14권)

3. ?법화경? (?대정장? 제9권)

4. ?화엄경? (?대정장? 제9권, 10권)

5. ?수능엄경? (?대정장? 제19권)

6. ?대승기신론? (?대정장? 제32권)

7. ?조당집? 20권.

8. ?전등록? 30권 (?대정신수대장경? 51권)

9. 돈황본 ?육조단경?

10. ?임제어록? (?대정장? 제47권)

11. ?신심명? (?대정장? 제48권)

12. 정성본, ?선의 수행과 깨달음의 내용?, ?한국불교학? 제42집 (한국불교학회. 2005년)

13. 정성본, ?선불교의 중도사상?, ?한국불교학? 제30집 (한국불교학회. 2001년)

14. 정성본, ?선불교의 실천수행?, ?승가의 실천수행? (중앙승가대학교 대학원, 불교학술대회 2008년 10월)

15. 柳田聖山 ?禪과 日本文化? (일본, 講談社 학술문고. 1985년 10월)

16. 柳宗悅 ?美의 法門? (일본, 岩波文庫. 1995년)

17. 久松眞一 ?禪과 藝術? (일본. 理想社. 1970년)

18. 久松眞一 ?茶道의 哲學? (일본. 講談社 학술문고. 1992년)

 

 

 

 

Abstract

 

Understanding of Ch'an (Zen) Culture

 

by Jung, Moo-hwan (Ven. Sung-bon)

 

Ch'an culture(禪文化) or the culture of Ch'an is so well-known that it comes to be a generalized term. However, if we do not exactly know the Ch'an mind and thought that Ch'an Buddhism insists, it brings about various abuses and misunderstandings in using this term. This study focuses on presenting the inevitability of ideological basis for correctly understanding and utilizing Ch'an culture that has been influenced on the backgrounds of Ch'an Buddhism.

As discussed in the main subject, Ch'an culture is a creative one that a human being forms in his life through Ch'an practice or Ch'an thought. It can be called a term that designates not only all the intellectual and artistic parts of human activities on the backgrounds of Ch'an thought, but also all the ways of life, including living abodes, architecture, fine arts, Ch'an calligraphy(禪墨), ink trace developed by Ch'an monks(墨跡), portrait of Ch'an master(頂相), arts, literature, etc., which have been evolved by the knowledge and personality of Buddha-dhamma with orignal mind as the subject of self-realization.

In addition, Ch'an culture is more highly estimated than the mundane cultures and literatures created by the mind of sentient-beings because it is a originative mental culture which has supramundane values by pa???-knowledge. Therefore, it should be differentiated from the worldly cultures. Because they have been formed by the mind of sentient-beings with dual and relative discriminations, ie. pure consciousness and deluded mind, subject and object, oneself and others, good and evil, etc., and they are also the creations of such emotions as happiness, anger, sorrow and pleasure, or as three poisons ie. greed, hatred and delusion.

Furthermore, this type of differentiation underlies the fact that Buddhism and Ch'an Buddhism are supramundane religions without discrimination of good and evil, while the other worldly religions emphasize soteriology from the Absolute, and feature the relative ethical values to pursuit the good, avoiding the evil from the perspective of discrimination.

Key words :

Ch'an culture, Ch'an and culture, pa???-knowledge, no-mindedness, Ch'an and t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