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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학동’ 터 쌍계사 불일암 [동양학 박사 조용헌의 靈地(영지) 기행 ⑪]

경호... 2012. 12. 5. 23:24

[연재ㅣ동양학 박사 조용헌의 靈地(영지) 기행 ⑪]

 

보조국사가 수도한 ‘청학동’ 터 쌍계사 불일암

 

우리나라에는 십승지(十勝地)가 있다. 중국에서는 신선이 살 만한 이상적인 명당을 동천(洞天), 복지(福地)라고 부르지만 우리는 십승지라고 부른다. 10여 군데의 뛰어난 장소를 꼽아본다면, 지리산 운봉, 봉화군 춘양, 공주 유구·마곡, 예천 금당실, 충북 영춘면 의풍리, 상주 우복동, 풍기 금계동, 무주군 무풍면, 변산 호암(壺岩), 경기 가평 설악면, 단양군 단성면 적성면 등이다.

십승지는 난리를 피할 수 있는 깊은 산골이다. 산골이기는 하되 최소한의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농토가 있는 곳이다. 십승지가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난세에 피난할 수 있는 피난지라고 한다면, 평화 시에 도를 통할 수 있는 이상적인 땅이 또 있다. 그게 바로 청학동(靑鶴洞)이다. 청학동은 십승지보다 한 차원 더 높은 땅이라고 할 수 있다. 목숨을 부지하는 차원을 떠나 도를 통하고 해탈할 수 있는 신령한 땅이 청학동인 것이다. 가히 신선들이 사는 이상세계가 바로 청학동이다. 이 청학동이 어디인가에 대한 많은 토론과 주장이 있었다. 각종 풍수지리 비결서(秘訣書)에 보면 ‘여기가 청학동이다’는 내용이 많이 나온다. 일단 청학동은 지리산 어디인가에 있다고 되어 있다.

가장 일반적인 청학동으로는 악양이 거론된다. 지리산을 배산으로 하고 섬진강을 임수로 한 천혜의 지역이 악양이다. 뒷산에서 산나물과 각종 약초, 과일을 채취할 수 있고, 섬진강에서는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 거기에다 섬진강은 흘러가는 방향도 서출동류(西出東流) 아닌가! ‘서쪽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흘러가는 강물’인 섬진강은 명당수이다. 서출동류는 햇빛 일조량을 가장 많이 함유한다. 그래서 명당수라고 한다.

 

 

▲ 불일암 암자의 전경.

 

 

악양에는 들판도 넓어 농사가 충분하다. 현재도 전국에서 귀촌하고 싶은 첫 번째 선호지역이 악양이라고 한다. 악양에 가보면 삼면을 1,000m가 넘는 지리산의 봉우리들이 둘러싸고 있고, 그 앞을 섬진강이 감아 돌면서 남해 바다로 흘러가고 있으니 가히 ‘서민 청학동’이라 할 만 한다. 서민들이 살 만한 이상적인 땅이라는 의미에서 ‘서민’자를 넣어 보았다.

‘중산층 청학동’은 지리산의 ‘세석평전’이 아닌가 싶다. 세석평전은 1,500m가 넘는다. 서민이 살기에는 높은 고지이다. 어느 정도 세상과 거리를 둘 수 있는 ‘중산층’이 살 수 있는 곳이다.

‘중산층 청학동’을 지나면 한풀선사가 말 타고 다니던 청학동이 있다. 푸른색의 학(鶴)이 지붕을 장식하고 있는 이곳은 ‘도사 청학동’이라고나 할까.

쌍계사 뒤로 1시간쯤 올라가면 1만 평 규모의 평전이 하나 나타난다. 그게 ‘불일평전’이다. 여기도 청학동이다. 쌍계사에서 불일평전 올라가는 중간쯤에는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고, ‘환학대’(喚鶴臺)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바위언덕이 있다. ‘학을 부르는 언덕’이라는 뜻이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말기의 최치원이 여기에서 학을 불렀다고 한다. 최치원이 환학대에서 학을 불러 타고 가야산 홍류동으로 날아가곤 했다는 전설이다.

 

 

▲ 불일암 왼쪽의 봉우리는 청학봉, 오른쪽은 백학봉, 앞으로는 섬진강에서 올라온 하얀 순백색의 띠가 백운산을 감싸며 불일암을 둘러싸고 있다. 이 터가 바로 신선이 산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쌍계사에는 진감국사(眞鑑國師)의 비문이 있다. 최치원이 직접 글을 쓴 4개의 고승 비문인 ‘사산비명’(四山碑銘) 가운데 하나인 진감선사비가 쌍계사에 있다. 이 진감선사비문을 작성할 당시 최치원이 이 환학대에 자주 머물면서 비문의 내용을 구상했다고 전해져 온다. 진감국사는 당나라에 유학을 가서 중국불교계에서 고승으로 인정받고 신라에 귀국한 인물이다. 최치원도 당나라 유학생 출신이다. 진감선사나 최치원이나 당나라에서 인정받고 성공하여 귀국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진감국사(禪師)의 출신 성분이다. 당시 당나라 유학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귀족집안 자제들이나 유학 갈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그런데 진감은 돈도 없고 배경도 없는 평민 출신이었다. 비문에 보면 진감은 배의 노를 젓는 ‘노꾼’으로 당나라 가는 배를 탔다고 되어 있다. 당시 외국 가는 배를 탈 때는 각 파트별로 임무가 정해져 있는데 그는 노 젓는 뱃사공으로 나왔다. 진감은 지금의 전북 익산시 금마면 출신이었는데, ‘노’를 잘 저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뱃사공으로 채용되어 당나라로 가는 배를 탈 수 있었던 것 같다. 원래부터 유학생 신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당나라에 내리고 보니까 ‘나도 공부해야겠다. 출가해서 도 닦자’는 결심을 굳히고 중국의 사찰로 들어갔다. 1960년대 우리나라에서 서독에 광부나 간호원으로 갔다가 박사학위 따서 교수된 사례와 비슷하다.

최치원도 구 백제 지역인 전라북도 옥구군 출신이다. 옥구군에는 최치원 관련 유적과 전설이 여기 저기 남아 있다. 옥구군과 금마면은 같은 전북지역으로 아주 가까운 거리다. 어떻게 보면 최치원에게 진감국사는 같은 고향 사람이자 당나라 유학 선배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진감국사가 신라에 돌아와 터를 잡고 머무르던 지리산 쌍계사에 최치원은 특별한 친밀감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환학대를 비롯하여 지리산 곳곳에 남아 있는 최치원 관련 전설과 유적은 이러한 맥락에서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 험준한 계곡 사이에 있는 불일폭포. 그 밑에는 바위 절벽 속에 호룡대라는 도를 닦기 좋은 터가 있는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사 일이 잘 안 풀리면서도 자연에 대한 동경이 있는 인물들은 입산한다. 좌절한 나머지 자살하는 사람도 있지만, 자연에 대한 깊은 향수가 있는 사람들은 산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다. 자연을 좋아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생과 사가 갈리는 셈이다. 둘레가 800리에 해당되는 지리산은 세상사에 좌절한 낭인들이 들어와서 살기 좋은 최적의 산이었다. 현재까지도 지리산은 낭인과(浪人科)의 해방구다. 그 낭인과의 대부가 최치원이라고 보아도 좋다.

청학이 사는 청학동은 한국인의 유토피아였다. 고통 없는 세상이 청학동이다. 그 청학동은 지리산에 있다고 생각했다. 옛 선인들은 지리산을 날아다니는 학(鶴)으로 여겼다. 왜 학으로 생각했을까. 학은 크기가 큰 새다. 보통 새는 아니다. 사람이 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새를 타고 하늘을 난다는 생각이 우화등선(羽化登仙)의 시초다. 학술적으로는 신조(神鳥) 토템이라고 한다. 원시 시대에 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는 생각이 신선설화의 기본이 되었다. 그만큼 큰 새는 자유와 초월의 상징이었던 셈이다.

지긋 지긋한 전쟁과 질병, 굶주림으로 시달리는 이 세상을 시원하게 떠나 버릴 수 있는 방법은 새처럼 나는 것이다. 더군다나 학은 색깔도 희다. 성스러운 느낌이 든다. 그런데 청학은 백학보다 더 특별한 학이다. 산을 우리는 청산이라고 하지 않던가.

‘청산’(靑山)에는 ‘청학’(靑鶴)이라야 궁합이 맞는 것인가. 우리 선인들은 지리산을 두 마리의 학으로 비유했다. ‘남비청학쌍계사(南飛靑鶴雙溪寺), 북래백학실상사(北來白鶴實相寺)’가 그것이다.

“남쪽으로 날아간 청학은 쌍계사가 되었고, 북으로 날아온 백학은 실상사가 되었구나.”

지리산의 남쪽을 대표하는 사찰이 쌍계사이고, 북쪽을 대표하는 사찰이 실상사이다. 쌍계사와 실상사는 두 마리의 학이 날아가서 된 사찰이라고 상상했던 것이다.

불일암 좌로는 청학봉·우로는 백학봉이 감싸

쌍계사 뒤로 올라가서 환학대를 거쳐 불일평전에 다다르고, 불일평전에서 약수를 한 모금 마시고 5분 정도 더 바위절벽 옆을 가면 불일암이 나온다. 불일암에서 300m만 더 가면 불일폭포다. 그 터는 나이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내가 20대 후반 불일암 터에 왔을 때는 하나도 좋은 줄 몰랐다. 그러나 이제 50대가 되어 불일암에 올라와보니 왜 진작에 이 터에 자주 오지 않았나 하는 후회가 된다. 감탄을 금할 수 없다.

 

 

▲ 불일폭포 가는 길에도 단풍이 빨갛게 물들어 있다.

 

 

물론 옛날에는 불일암에 터만 있었지, 암자는 없었다. 근래에 암자를 복원한 것이다. 불일암 마당에서 보면 오른쪽에 바가지처럼 둥그런 바위 봉우리가 하나 서 있다. 왼쪽을 보니 역시 바위 봉우리가 하나 뭉쳐서 터를 받쳐 주고 있다. 암자 스님에게 물으니 왼쪽의 봉우리는 청학봉(靑鶴峰)이고, 오른쪽의 봉우리는 백학봉(白鶴峰)이라고 한다. 암자를 좌우로 청학봉과 백학봉이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좌청룡, 우백호가 아니라 좌청학, 우백학인 셈이다.

암자의 마당에서 멀리 바라다 보이는 산봉우리들은 광양의 백운산 자락이다. 1,000m가 넘는 백운산의 봉우리들이 멀리서 이 터를 받쳐 주고 있다. 마침 불일암에 청곡(靑谷) 선생이 기도하러 와 있어서 풍수를 이야기하다 보니, 저 멀리 보이는 백운산은 나는 비학(飛鶴)이라고 설명한다. 청학, 백학, 비학이 모두 이 터를 옹위하고 있는 것이다. 청곡의 주장에 의하면 불일평전과 불일암이야말로 원조 청학동이라고 한다.

청곡은 김제에서 학성강당(學聖講堂)을 운영하고 있는 유학자다. 선대부터 유학을 연마해 온 기호 유림의 뼈대 있는 집안 후손이다. 유교의 사서삼경은 물론 풍수와 한의학에 대해서도 깊은 조예가 있다. 10대 후반부터 전국을 걸어 다니면서 기인달사들을 만나며 주유천하를 경험한 그는 정신세계의 미묘한 도리에 대해서도 이해가 깊다. 그가 25년 전쯤인 20대 중반에 불일암 터에서 텐트를 치고 유교경전을 읽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하루는 경전을 읽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어디선가 글 읽는 소리가 계속 들리는 환청을 체험했다. 그러다가 며칠 후 비몽사몽간에 사방 천지에서 수많은 귀신들이 나타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한다.

청곡은 칼을 뽑아 달려드는 귀신들의 목을 쳤다. 수많은 귀신들을 잡아 족치던 중에 마지막 남은 1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어린 승려 귀신이 나타났다. 청곡이 칼을 뽑아 죽이려고 하자 책상 밑으로 들어가면서 “한번만 살려 주세요! 저를 살려주면 나중에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하면서 사정을 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살려 주었다고 한다.

 

 

▲ 불일암 대웅전도 암자 뒤에 있다.

 

이런 정신세계의 체험이 있은 뒤에 신통한 현상이 나타났다. 그 뒤로 산을 보면 ‘어디에 기운이 뭉쳐 있는지,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복호혈(伏虎穴)인지, 와룡혈(臥龍穴)인지’ 눈으로 훤히 보이더라는 것이다. 풍수에 개안하게 된 셈이다. 이런 걸 보면 사람은 자기에게 맞는 터가 있다. 특히 자기에게 정신세계의 체험을 하게 해준 터는 특별한 영지(靈地)인 것이다. 청곡에게 있어서 불일암 터는 특별한 곳이다.

그가 이후로 학성강당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25년 만에 다시 불일암 터에 와서 머무르던 중에 필자와 만나게 되었다. 하룻밤 자면서 청곡과 우리나라 도맥과 명당, 그리고 신비체험, 난치병을 치료하게 된 이야기 등등을 하게 되었다. 필자는 사업 이야기, 정치 이야기보다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가 우리나라 곳곳에 포진해 있는 명당과 그 명당에 얽힌 사연, 그리고 도사들의 기행이적(奇行異蹟)에 관한 것들이다. 문제는 이런 이야기를 나눌 상대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날 불일암에서 청곡을 만나 도담의 재미를 만끽했다.

원래 불일암은 진감국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쌍계사를 짓기 전에 수도하던 암자 터가 아닌가 추정한다. 그만큼 혼자서 도를 닦는 터로는 이상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이다. ‘불일’(佛日)이라는 명칭이 붙게 된 계기는 고려 후기의 불일(佛日)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여기에서 수도한 인연 때문이라 한다.

불일암 스님의 배려로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인가. 옆의 불일폭포에서 쏟아지는 물소리가 밤새도록 들리는 게 아닌가. 낮에 들리는 물소리와 밤에 들리는 물소리의 느낌이 달랐다. 경전에 보면 꿈에서도 물소리를 들어야 번뇌가 사라진다고 되어 있다. 꿈에서 그 물소리에 정신을 집중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이 물소리를 듣는 나는 누구인가?’하는 화두가 잡아진다고 되어 있다.


 

 

▲ 조용헌 박사(오른쪽)가 암자에서 불일암과 그 터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불일폭포 밑 호룡대는 道 닦기 좋은 터

불일암 자체도 깎아지른 절벽 위에 터를 잡고 있다. 이 절벽 밑에 내려가면 그 계곡이 아주 험하다고 한다. 칠선계곡보다 더 험준하다는 것이다. 한번 급경사의 계곡으로 내려가면 오도 가도 못하는 수가 있다.

지리산의 도사들 사이에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불일폭포 밑에는 호룡대(虎龍臺)라는 터가 있는데, 바위 절벽 속에 있어서 도를 닦기에 좋은 곳이라 한다. 반야봉 밑에 있는 금강대(金剛臺)는 개운조사가 공부했다는 전설이 있고, 영신대(靈神臺)는 기도하기에 아주 좋은 터라고 한다. 호룡대는 험한 바위 절벽 속에 숨어 있어 일반인의 눈에 전혀 안 뜨이는 지점이므로 숨어서 신선공부하기에 좋은 터라고 전해진다.

불일암에서 자고 아침 7시쯤 일어나 백운산 쪽을 바라보니 그 밑으로 하얀 백색의 띠 같은 모양의 안개가 산 밑을 감싸고 있다. 섬진강에서 올라온 것이다. 섬진강의 새벽 안개를 멀리 떨어진 산 위에서 바라보니 순백색의 띠처럼 보인다. 마치 섬진강에 사는 만년 된 신령스런 두꺼비가 품어낸 진액(津液) 같다고나 할까. 아니면 섬진강 백룡이 품어낸 안개일까. 백운산 밑을 띠처럼 두른 순백색의 아침 운무를 보니 이 불일암 터가 신선이 사는 터임을 알겠다.

 

 

/ 월간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