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學報第60輯
현대 한국 간화선의 원류와 구조에 대하여
-경봉선사를 중심으로-
정유진*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선학과 교수.
<목 차>
Ⅰ. 서론
Ⅱ. 현대 한국 간화선의 원류
1. 송원대 간화선의 원류
2. 현대 한국 간화선의 원류
Ⅲ. 현대 한국 간화선의 구조
1. 송원대 간화선의 구조
2. 현대 한국 간화선의 구조
Ⅳ. 결론
<한글요약>
중국 송대 간화선은 오조법연과 원오극근에게서부터 맹아가 트기 시작하여 대혜 종고에 이르러 대성하게 되었고, 그 후 원대에 들어와서는 고봉원묘와 그의 제자 중 봉명본의 활약에 의하여 再起되었다.
한국선, 즉 한국의 간화선은 고려시대의 지눌과 혜심 이후 그 뿌리를 내리고, 그 유행은 원대 고봉원묘와 중봉명본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 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고봉원묘의 선요를 애독하기 시작하면서 선요가 조선시대에 간화선의 표준이 되었고, 특히 휴정의 선가귀감은 선요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그 다음 조선말, 대한제국 시대에는 경허등의 활약이 있었으며, 현대에 접어들어서는 특히 경봉이나 성철 등의 활약에 의하여 간화선이 일반 재가자나 납자들에게 보편화되었다고 생각한다.
대혜가 간화선을 주장하게 된 근본 이유는 문자선의 병폐와 무사안일선의 병폐를 바로 잡고, 공안 본래의 의미를 되찾고자 하는 데 있다. 양자의 병폐는 둘 다 깨달음을 소홀히 하는데 있었다. 그래서 대혜는 공안이라는 도구를 들고 나와 자기의 마음 바탕을 비추어 보는 수단으로 삼은 것이다. 이 공안은 간화선에 있어서 가장 핵심이 되는 요소로서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지만 이것을 사량분별로써 이해하려고 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강조한다. 즉 단지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도구일 뿐이라는 말이다.
경봉선사가 보는 화두란 학인이 법을 묻는데 格外로서 답을 한 것 이라고 하기 때문에 이는 공안의 본래 의미를 말한 것으로서 원오가 말하는 문을 두드리는 기와 조각 이라는 의미라든가 대혜가 말하는 의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도구 라는 의미 와는 다르게 이해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또 화두가 따로 있는 것 이 아니다 고 하기 때문에 화두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시설된 방편이라고 보고 있는 것 같다.
다음 경봉은 무자공안을 포함하여 화두를 참구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그저 간단하 게 무자를 계속 생각하면 된다 고 할 뿐 고봉화상과 같이 구체적으로 믿음, 분심, 의심의 삼자를 체용관계로 연결시켜서 설명하거나 그 상호관계를 말하지 않고, 직접 수도하는 자의 입장에 서서 설명하고 있다. 경봉도 고봉과 마찬가지로 이 셋은 솥발 (鼎足)과 같아서 그 중 하나만 없어도 참선을 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경봉이 화두를 참구함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사항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대혜서장의 이른바 간화10종병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경봉선사의 모든 법어집을 읽고 느낀 점에 의거하여 필자의 견해를 피력하면, 물론 심중의 주관적인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이지만 지금 한국의 대다수의 납자들은 경봉선사의 가르침과 크게 다르지 않게 간화선을 실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이러한 결과를 가져오기까지의 前史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한국 간화선의 원류는 멀리 송원대에서부터 비롯되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고려시대에 간화선의 교과서와 같은 역할을 한 보조지눌의 간화결의론의 영향과 조선시대에 고봉원묘선의 선요을 많은 사람들이 애독한 그 영향이 줄곧 이어져 현대에 이르고 있다고 판단한다.
?주제어
간화선, 공안, 화두, 신심, 의심, 분심, 격외.
Ⅰ. 서론
한국의 현대 간화선의 원류와 구조를 고찰함에 있어서 현대 선승들을 전부 논의의 대상으로 삼아야 객관성과 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논문의 범위가 너무 넓어지기 때문에 경봉선사 한 사람으로 한정한다.
본고는 제목에 따라 먼저 한국 현대 간화선의 원류를 찾아냄에 있어서 우선 그 원류의 근간이 되는 중국 송원대의 간화선의 원류를 찾아 낸 후 그 원류에 맞추어서 한국의 현대 간화선의 원류를 밝혀내 보기로 한다.
다음 현대 한국 간화선의 구조도 역시 먼저 송대 간화선의 구조를 사상(내용)적인 측면에서 고찰한 후 그것에 맞추어 한국 현대 간화선의 구조를 찾아내 보기로 한다. 전자인 간화선의 원류는 중국과 한국의 선종사 속에서 규명될 내용이고, 후자인 간화선의 구조는 양국의 선사상사적인 측면에서 규명될 내용이다.
요컨대 본고는 중국 간화선의 역사와 사상(내용)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통하여 한국의 현대 간화선의 원류와 구조를 찾아내는 것이 목적이다. 그런데 과거(唐?宋? 元?고려?조선?근대)의 간화선의 원류와 구조는 이미 기록으로 남아있는 자료를 토대로 하여 규찰하면 되겠지만 현대 또는 지금의 추세나 흐름은 필자가 지금까지 여러 납승들로부터 보고 들은 내용을 근거로 할 수 밖에 없었음을 미리 말해 둔다. 그리고 논지의 전개는 내가 해인사 강원에 있었을 때 여러 대덕스님들로부터 들은 법문과 수차례에 걸쳐서 행해진 禪和子대회에서 보고 들은 내용과 그리고 필자의 實參을 근거로 하여 과거의 간화선의 원류와 구조로 소급해 보는 형식이 취해질 것이다.
Ⅱ. 현대 한국 간화선의 원류
현대 한국 간화선의 원류를 찾아냄에 있어서 이미 서론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선 먼저 송원대 간화선의 원류를 인물 중심의 선종사적인 입장에서 규명해 낸 후 그 흐름이 고려조에서는 어떤 사람을 거쳐서, 또 현대에는 어떤 선승들을 통하여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는지를 더듬어 보는 것이다.
1. 송원대 간화선의 원류
중국의 송원대 간화선의 원류를 고찰하기 전에 먼저 밝혀두고 싶은 말은 본고에서는 인물을 중심으로 하여 중국 간화선의 원류와 한국 현대 간화선의 원류를 고찰하겠지만 그 자체를 깊이 파고들어가 하나하나 자세하게 검토할 생각은 없다. 기존의 선행연구를 토대로 하여 다만 큰 맥락만 잡아서 한국의 현대 간화선으로 연결시키는 것으로서 만족하고자 할 뿐이다.
현대 한국 간화선의 원류를 그 발상지인 송원대의 선승에서 찾아야 한다는 전제하에 먼저 송대의 선승들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현대 한국 간화선의 원류를 그 발상지인 송원대의 선승에서 찾아야 한다는 전제하 에 먼저 송대의 선승들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송대 간화선은 조주의 무자공안에 최초로 주목한 사람인 五祖法演(?∼1104)선사로부터 시작된다. 그 다음 ?悟克勤(1063∼1135)을 거쳐 大慧宗?(1089∼1163)에 이르러 간화선은 대성하게 된다.
대혜가 湛堂文準(1061∼1115)과 張商英(1043∼1121) 의 권유를 받아들여 임제종 양기파인 원오극근의 제가가 되어 그의 법을 계승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러면 오조법연과 원오극근과의 관계를 봐보 자. 이 두 선사의 개오의 기연을 圓悟佛果禪師語錄권12에 게재하고 있다.
즉 “오조 법연이 陳提刑이라는 관리와 小艶의 詩1)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듣고, 의심을 하고 있던 차에 불법의 대의가 무엇인가? 뜰 앞에 측백나무니라 고 하는 데서 원오 극근선사가 도를 깨달았다”2)고 한다.
이로써 師資關係가 분명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남송에 접어들면서 운문종의 활동은 점차 위축되어 그 말엽에는 계보마저 단절 되고 만다. 반면에 임제종과 조동종의 두 파는 선의 주류를 차지하여 크게 발전을 하 게 된다. 그 중에서도 임제종 양기파의 발전은 대단했으며, 그 중심에 선 인물은 바로 원오극근 문하에서 나온 대혜종고이다. 대혜는 마침내 간화선을 조직화하고, 공안을 참구하는 방법을 체계화하여 대혜파를 형성하는 등 획기적인 공적을 세우게 된다. 그 후 원대에 활약한 대다수의 선승들도 역시 임제종 계통의 인물들이었는데, 대 혜파에서는 물초대관의 제자, 晦機元熙(1238∼1319)와 언계광문의 제자, 雲峰妙高 (1219∼1293)가 나왔다. 또 破庵派에서는 설암조흠 문하의 高峰原妙(1238∼1295)와 그의 제자 中峰明本(1263∼1323)3)이 나와 크게 활약을 하게 된다. 특히 원대에 주목 해야 할 선승은 고봉원묘와 중봉명본의 두 사람이다. 왜냐하면 한국에 송 왕조의 선종을 유행시키는데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그 유행을 이끈 것은 아 마도 간화선을 간명직절하게 체계화한 고봉원묘의高峰原妙禪師禪要 1권(한국에 언제 전래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음. 이 책은 조선시대 가장 많이 읽혀졌던 어록 가운데 하나라고4) 한다.) 때문이 아닐까라고 추측해 본다. 원대 이후의 중국선은 전 시대와는 판이하게 다른 양식으로 변화를 하기 때문에 사실상 중국선종의 발전의 역 사는 송대에 이미 끝이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이후 공안선은 한국, 베 트남, 일본 등 해외로 전파되어 새로운 발전을 하게 된다.
요컨대 중국의 송대 간화선은 오조법연과 원오극근에게서부터 맹아가 트기 시작하여 대혜종고에 이르러 대성하게 되었고, 그 후 원대에 들어와서는 고봉원묘와 그의 제자 중봉명본의 활약에 의하여 재흥되었다고 본다.
1)圓悟佛果禪師語錄?권12(?대정장?권47, p.775중), “頻呼小玉元無事, 只要檀郞認得聲. 官人?未曉, 老僧聽得忽然打破漆桶(자주 <양귀비가> 시녀인 소옥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특별히 어떤 용무가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밖에 있는 그녀의 情夫인> 낭군<安祿山>이 그 소리를 알아 차리기를 바랄 뿐이다).”
오조법연이 인용한 小艶의 시는 五家正宗贊 권2 五祖法演章과 가태보등록 권28의 靈巖安頌古에도 보인다. 경봉도 야반三更에 문빗장을 만져보거라(서울:밀 알, 1982), p.14, p.282,니가 누고?(서울:Human & Book, 2003), p.113에 각각 인용하고 있다.
2)위의 본문에 말하는 개오의 기연은 경봉선사가 야반三更에 문빗장을 만져보거라, p.282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대혜의 개오의 기연어구는 有句無句는 등나무가 (다른) 나무에 기대는 것과 같다 고 하는 것이다. 대혜는 이것을 반년 동안 참구하여 마침내 깨달음을 얻고, 원오선사로부터 인가를 받았다고 한다.
3)天目中峰이 禪淨一致를 제창했기 때문에 원오 문하의 정통파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선정일치는 원?명시대의 특징이다.
4)黑田亮,朝鮮舊書考, p.142.
2. 현대 한국 간화선의 원류
주지하는 바와 같이 중국으로부터 한국에 선이 처음 전래된 것은 신라하대이지만 한국에 선이 본격적으로 정착하게 된 것은 공안선 이후의 일이라고5) 한다. 柳田聖山 은 한국에 송 왕조의 선이 뿌리를 내리는 것은 지눌(1158∼1210)과 그의 제자, 혜심 (1178∼1234) 이후의 일이며, 간화선의 유행은 특히 원대의 고봉원묘(1238∼1295)와 중봉명본(1263∼1323)의 영향 때문이라고6) 한다.
그렇다면 한국에 선이 정착한 것은 송대 이후이고, 간화선의 유행은 원대에 들어와서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인물의 입장에서 말하면 간화선이 뿌리를 내리는 것은 지눌과 혜심 이후이고, 유행은 중봉명본 이후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 당시 선승들의 생몰년대를 놓고 보면 보조나 혜심의 두 사람은 중봉명본이 출생하기 이전에 이미 죽고 없기 때문에 중봉명본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볼 수 없고, 그 이전인 송대 선승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 라서 한국에 간화선이 정착하게 되는 것은 대혜종고(1089∼1163) 이후 송대 선승들 의 영향 때문이고, 그 유행은 원대의 고봉원묘(1238∼1295)나 중봉명본(1263∼1323) 의 활약에 의한 것이라고 결론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고려시대 간화선을 정착 시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당시 간화선의 교과서와 같은 역할을 한 지눌의 看話決疑論이라고 생각한다.
그 후 太古普愚(1301∼1382), 幻菴混修(1320∼1392) 등을 거쳐서 조선시대 淸虛休靜(1520∼1604)에 이르게 되는데, 그 당시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봉원묘의 선요가 가장 많이 읽혀졌다고 하기 때문에 조선시대에 간화선을 널리 보급시키는데 주된 역할을 한 것은 선요라고 판단한다.
이 선요의 영향을 받은 것이 휴정의 禪家龜鑑이다. 조선말, 대한제국 시대에 이르면, 경허(1849∼1912), 용성(1864∼1940), 한용운(1879∼1944), 만공(1872 ∼1946), 박한영(1870∼1948), 한암(1876∼1951), 권상로(1879∼1965), 경봉(1892∼ 1982), 성철(1912∼1994) 등의 선승들이 출현하는데 바로 이들이 현대 한국 간화선의 주역들이라고 생각한다.
요컨대 현재 한국의 선은 조사선의 사상과 간화선의 실천이 혼융되어 있는 선이라 고 할 수 있지만 이중 간화선은 고려시대의 지눌과 혜심 이후에 그 뿌리를 내리고,그 유행은 원대 고봉원묘와 중봉명본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 후 조선시대에 들어 와서는 고봉원묘의 선요가 애독되기 시작하면서 이것이 조선시대 간화선의 표준 이 되었고, 그 다음 조선말, 대한제국 시대에는 경허 등의 활약이 있었으며, 현대에 접어들어서는 특히 경봉이나 성철 등의 활약에 의하여 간화선이 일반 재가자이나 납자들에게 보편화되었다고 생각한다.
5)伊吹敦, 최연식,새롭게 다시 쓰는 중국 禪의 역사(고양: 대숲바람, 2005), p.196.
6)柳田聖山, 추만호 외,선의 사상과 역사(서울: 민족사, 1989), p.265.
Ⅲ. 현대 한국 간화선의 구조
지금까지 고찰한 내용은 선종사 속에서 중국의 간화선의 원류가 어느 시기에 한국 에 정착되었으며, 유행은 언제부터 했는지에 대하여 대략 살펴보았다. 이제 고찰하고자 하는 간화선의 구조란 시각문에서 본각문으로 들어가는 구조이다. 이 시각문이란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수행자가 간화선의 핵심요소가 되는 화두를 어떻게 참구하여 자기의 심지를 개발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이 화두를 잘못 참구하면 病痛, 즉 心病이 생기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이하 간화선의 구조에 서는 화두참구를 중심으로 사상(내용)적인 면에서 대혜종고와 고봉원묘가 주장하는 구조와 경봉이 주장하는 구조와의 同異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참고로 밝혀 두고 싶은 말은 한국에서는 공안이라는 말보다 화두라는 말을, 또 공안선이라는 말보다는 간화선이라는 말을 더 즐겨 쓴다. 물론 의미는 같다.
1. 송원대 간화선의 구조
먼저 대혜종고가 왜 간화선을 주창하게 되었을까? 다시 말해서 그가 간화선을 조직하여 대성하고, 공안참구의 조직적 방법을 확립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사상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첫째 송대 선승들이 당대 조사선의 정신을 잘못 이해하여 無事安逸禪으로 흐르는 것을 보고 이를 바로 잡기 위하여 공안선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누구나 다 깨달음의 본성(불성)을 구비하고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자성을 개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공안을 참구하여 깨달음을 성취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둘째 송 초 이후의 선이 당대에 완 성된 조사선과는 달리 문자선으로 잘못 흐르는 경향이 있어서 대혜는 이를 바로잡고자 공안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깨달음(開悟)의 체험을 중시했던 것이다. 개오의 체험을 중시했다는 것은 곧 선승들의 심리가 다시 내부로 향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마침내 대혜는 큰 깨달음(大悟)을 법칙으로 삼게 되었던 것이다.
대혜는 無事安逸禪, 즉 현실적으로 깨닫지 못했으면서도 깨친 선승의 흉내를 내거나, 특히 깨달음이 없는 상태에서 단순하게 정신집중만을 강조하는 묵조사선을 강하게 비판했다.
대혜가 말하는 묵조사선이란 깨달음이 없이 단순히 정신집중에만 머무 르는 선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 원인은 구체적인 의심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대혜는 강한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도구로써 공안을 제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대혜는 무사안일선의 병폐나 문자선의 병폐를 바로 잡기 위하여 그 도구로써 공안을 내세우고 있는데, 그 公案(話頭)이란 무엇일까?
공안선, 즉 간화선에서 공안은 정신을 집중시키기 위한 하나의 단순한 도구에 불과하다. 원오는 이를 그 의 어록인 佛果圓悟眞覺禪師心要 권하 印禪人에게 주는 법문에서 鼓門瓦子(깨달음의 문을 두드리는 기와조각)라고 표현하고 있다. 공안의 내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직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의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가 하는 것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살아있는 공안(活句)은 강한 의심을 불러일으키면 일으킬수록 좋은 것이다.
요컨대 공안이란 수행자로 하여금 강한 의심을 불러일으키게 하여 정신을 한 곳에 집중하게 하는 단순한 도구일 뿐인 것이다. 이 공안, 즉 화두는 간화선의 구조를 구성하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이다.
다음 간화선의 구조에 대해서 살펴보자. 大慧普覺禪師語錄 普說卷第16에 “시각이 근본에 합쳐지는 것을 깨달음이라 한다(始覺合本之謂佛)”7)고 하는 말이 있다. 이 구에서 근본(本)은 아마도 本覺일 것이다. 그러므로 대혜의 간화선은 본각의 작용인 시각을 본각에 합하는 이른바 시각문적인 수행구조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는 대승기신론의 본각, 시각, 불각의 구조를 토대로 한 것이다. 대혜가 말하는 시각이란 믿음과 의심과 분심으로 응어리진 화두를 끊임없이 참구하는 것이다. 疑團으로 정신을 집중하는 사이에 자기도 모르게 의심이 타파되어 본각에 합쳐지는 것이 깨달음인 것이다.
경봉선사는 시각이니 본각이니 이런 말조차도 쓰지 않는다. 간단하게 화두만 참구하면 된다 고 할 뿐이다. 다시 말해서 화두를 참구하는 그 자체가 벌써 시각이고, 화두가 순일하게 잘 드리면 그것이 다름 아닌 본각이기 때문에 굳이 시각이나 본각 따위를 말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해서 화두만 참구하면 된다 고 한 말 속에는 이미 시각과 본각이 하나가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간화선의 모든 실천이 집약되어 있다고 본다. 선수행은 단순간결해야 한다. 왜냐하면 복잡하면 실천이 불가능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망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내용을 요약하면 대혜가 간화선을 주장하게 된 근본 이유는 문자선(고칙공안을 비평하는 것, 拈古, 頌古, 著語, 評唱등)의 병폐와 무사안일선의 병폐를 바로 잡고, 공안 본래의 의미를 되찾고자 하는 데 있다. 양자의 병폐는 둘 다 깨달음을 소홀히하는데 있었다. 그래서 그는 공안이라는 도구를 들고 나와 자기의 마음 바탕을 비추어 보는 수단으로 삼은 것이다. 그리고 대혜는 이 공안은 간화선에 있어 서 가장 핵심이 되는 요소로서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지만 이것을 사량분별로써 이해하려고 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강조한다. 즉 단지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도구일 뿐이라는 말이다.
7) 大慧普覺禪師語錄 大慧普覺禪師普說卷第16(?대정장?권47, p.878중).
2. 현대 한국 간화선의 구조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간화선을 實參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핵심이 되는 것은 깨달음의 도구인 화두, 즉 공안인 것이다. 이 화두를 어떻게 참구하느냐에 따라 간화선의 성패가 좌우된다. 本章에서는 경봉선사의 법어집을 통하여 경봉이 간 화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화두를 어떻게 보고 있고, 또 화두를 어떻게 참구하며, 그리고 화두를 참구함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사항은 어떤 것을 말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고찰해 보고자 한다. 요컨대 화두참구의 방법과 주의사항에 대한 고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경봉은 화두에 대하여 야반三更에 문빗장을 만져보거라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화두라고 하는 것이 천 칠 백 개의 공안이 있는데 무엇을 일부러 의심하려고 내놓은 것이 아니라 학인이 법을 묻는데 格外로서 답을 한 것을 몰라서 그것이 화두가 된 것이지 화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8)
고 한다. 이는 공안의 본래 의미를 말한 것으로서 원오가 말하는 문을 두드리는 기와조각 이라는 의미라든가 대혜가 말하는 의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도구라는 의미와는 다르다. 즉 화두라는 것은 학인의 물음에 답한 격외도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깨달음의 당처는 사려분별에 있지 않고, 또 絶言絶慮의 경지에만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기 위하여 말을 빌려 표현한 것이 화두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끝에 화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 말은 화두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그때그때의 질문에 따라 시설된 방편일 뿐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야반三更에 문빗 장을 만져보거라 에서 “(화두)는 얼토당토 않은 것이지만 그것을 자꾸 참구하면 ……”9)라고 하는 말 가운데 얼토당토 않은 것이라는 것은 곧 말도 안 되는 말이라는 의미이다. 이것 역시 格外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경봉선사는 화두를 격외도리라고만 보고 있느냐 하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그의 법어집 전체를 통하여 보면 화두에는 의심이 귀하다 고 하기 때문에 경봉도 역시 대혜나 고봉과 마찬가지로 화두의 생명은 곧 의심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8)경봉, 야반三更에 문빗장을 만져보거라?(서울:도서출판 밀알, 1982), p.229.
9)상게서, p.17.
그런데 간화선이란 말을 입에 올리자마자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조주(778∼897)의 狗子無佛性話이다. 물론 趙州無字의 공안에 최초로 관심을 보인 사람은 오조법연이지만 대혜선사도, 경봉선사도, 성철선사도 조주무자 만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다시 말해서 趙州無字의 공안은 오조법연에게서 시작되어 대혜종고 에 의해서 강화되고, 또 이 공안이 일반화 된 것은 남송시대의 無門慧開(1183∼1260) 에 의해서이지만 대혜 등 여러 선승들은 수많은 공안에 대해서 모두 평등한 입장을 취했을 뿐, 어느 하나의 공안만을 중시하는 일은 없었다.
경봉도 야반三更에 문빗장을 만져보거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참선하는 이들이 麻三斤이나 庭前栢樹子나 無字나 乾屎?등 천 칠 백 공안 중에 어느 하나를 들고 자꾸 참구하여 나아가 지극히 고요한 경지에 이르면 본래 이 자리가 고요한 것이지만 편안함이 그 어디에도 비할 수 없는 아늑함이 생긴다.”10)
고 한 것처럼 어느 특정한 화두를 지정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경봉선사는 화두를 간택하여 다른 사람을 지도할 때는 “그 사람의 근기를 살펴서 모든 것을 세밀히 가르쳐 주어야 몸에 병도 생기지 않고, 세월도 헛되이 보내지 않으며, 고생을 하지 않게 된다”11)고 한다. 따라서 공안의 간택은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 결정 되는 문제인 것이지 어느 하나의 공안만을 선택해서 그것만 참구해야 된다는 철칙 같은 것은 없는 것이다. 이런 견해도 역시 대혜종고와 일치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오조법연 이후 무자공안의 취급법은 종래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고, 또 대혜의 간화선에 있어서 무자공안이 중심이 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의 어떤 교수사는 간화선은 조주의 無字공안만을 참구하는 것이라고 못을 박고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방금 말한 것처럼 화두에는 우열이나 好惡가 있을 수 없고, 단지 그 선택은 수행자의 근기에 따른 문제일 뿐이기 때문이다. 또 나아가 공안의 사명은 어디까지나 강한 의심을 유발하는데 있으므로 어떤 공안이라도 수행자로 하여금 강력한 의심을 유발시켜 줄 수 있는 것이라면 좋은 활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문혜개가 無門關을 편집할 때 제1칙으로서 趙州狗子공안을 맨 앞에 내세우게 되는데, 아마 이것이 계기가 되어 조주의 무자공안은 남송 이후 선의 방법을 꿰뚫는 하나의 도구가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 무문혜개가 趙州狗子 공안을 제1칙으로서 들고 나온 의도는 이 하나의 공안 속에 자신의 실천사상을 집약 하고자 하는 생각도 들어 있을 것이다.
10)상게서, p.18.
11)야반三更에 문빗장을 만져보거라, p.280. 참고로 공안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授受? 參究?印可가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즉 먼저 스승은 제자의 근기에 맞는 공안을 선택해 야 하고, 학인은 그 간택된 공안을 마음에 병이 생기지 않도록 바르게 참구해야 하며, 그리고 깨달은 후 스승으로부터 반드시 인가를 받아야 한다.
다음 경봉선사는 화두를 어떻게 참구하라고 가르치고 있는지에 대하여 고찰해 보자. 경봉선사의 화두참구법을 보기 이전에 대혜의 공안참구법을 간명하게 요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고봉화상의 三要說을 보면, 高峰原妙禪師禪要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착실하게 참선하려고 하는 자는 반드시 세 가지 조건을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
그 첫째는 大信根이다.
명확하게 이것이 있음을 알아서 마치 수미산에 기대고 있는 것처럼 확고부동하게 마음을 쓰는 것이다.
둘째는 大憤志이다.
아버지의 원수를 만났을 때 바로 한 자루의 칼로 내리쳐 베어버리려고 하는 의기이다.
셋째는 大疑情 이다.
남모르게 어떤 비밀스러운 일을 이룬 사람이 이제 막 드러내 보이려고 하는데 아직 드러나지 않은 때의 심경이다. … (중략) … 다만 이 세 가지 조건 가운데 어느 한 가지라도 결여된다면 마치 다리가 부러진 솥처럼 결국 아무런 쓸모도 없게 될 것이다.”12)
12) ?高峰原妙禪師禪要(卍續藏?권122, p.714상),
“若謂著實參禪, 決須具足三要.
第一要, 有大信根. 明知此事, 如?一座須彌山.
第二要, 有大憤志. 如遇殺父寃讐, 直欲便與一刀兩斷.
第三要, 有大疑情. 如暗地做了一伴極事, 正在欲露未露之時.
… (중략) … 苟闕其一, 譬如折足之鼎, 終成廢器.”
고봉화상이 實參의 조건으로서 내세우고 있는 大信根(믿음)이란 달마의 深信, 즉 누구나 다 같이 진실한 자성을 가가지고 있다는 것을 깊게 믿는 것과 같은 확신이나, 대승기신론의 四信가운데 불성을 믿는 것과 같은 그런 믿음은 아닌 것이다. 또 근본불교에서 주장하는 五根이나 五力가운데 하나로서 실천덕목을 말하는 것도 아니 다. 다시 말해서 고봉화상이 주장하는 믿음은 직접적인 믿음이 아니라 그 반대계기인 의심에 의해서 변증된 믿음인 것이다. 쉽게 말해서 의심에 의하여 변증된 믿음인 것이다. 그래서 高峰原妙禪師禪要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의심은 믿음을 본체로 삼으며, 깨달음은 의심을 작용으로 삼는다. 믿음이 충분하 다면 의심도 충분하며, 의심이 충분하다면 깨달음도 충분하다.”13)
13) ?高峰原妙禪師禪要(卍續藏권122, p.711하),
“疑以信爲體, 悟以疑爲用. 信有十分, 疑有十分,疑得十分, 悟得十分.”
믿음, 분심, 의심 이 세 가지의 요소는 세 가지 조건 가운데 어느 한 가지라도 결 여되면 마치 다리가 부러진 솥처럼 결국 아무런 쓸모도 없게 된다 고 한 것처럼 화 두를 참구함에 있어서 어느 한 가지라도 빼거나 소홀히 해서는 절대 안 된다.
"의심은 믿음을 본체로 삼으며, 깨달음은 의심을 작용으로 삼는다. 믿음이 충분하다면 의심도 충분하며, 의심이 충분하다면 깨달음도 충분하다" 고 한 말을 분석해 보면, 결국 의심과 믿음과 그리고 깨달음과의 三者關係로 요약이 되는데 이 셋은 비례 관계에 있다. 즉 의심이 크면 클수록 믿음도 커지고, 깨달음도 또한 커지는 관계이다. 일단 깨달음은 제쳐놓고, 의심, 믿음, 분심의 삼자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믿음은 의심과 분심을 깨달음으로 이끄는 전제이다. 이 가운데 분심이란 마치 모기가 鐵牛의 등에 앉아서 부리로 철우의 등을 뚫고 피를 빨아먹으려고 온몸 전체를 부리와 함께 박아 넣으려고 하는 것과 같은 大勇猛心이다. 요컨대 의심, 믿음, 분심의 세 가지는 철저하게 서로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완전히 하나로 뭉쳐져야 한다. 실천적인 입장에서 말하면 믿음과 분심과 의심의 삼자를 응결시켜 無字면, 無字자만을, 一口吸盡西江水면 一口吸盡西江水만을 참구하는 것이 간화선이다.
그러면 경봉선사는 믿음, 분심, 의심의 삼자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살펴보자. 그는 믿음 등 삼자를 고봉화상처럼 구체적인 체용관계로서 연결시켜서 설명하지 않고, 직접 수도하는 자의 입장에 서서 설명하고 있다. 경봉도 고봉과 마찬가지로 이 셋은 솥발(鼎足)과 같아서 하나만 없어도 안 된다고 강조한다.
야반三更에 문빗장을 만져보거라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도인은 마음을 잘 비울 줄 알고, 발심을 크게 하여야 한다. 크게 신심을 내고 발 심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집을 짓는 사람이 터를 잘 고르고 주춧돌을 잘 놓는 것과 같다.
… (중략) …
생사를 해탈하고, 인천의 안목이 되고, 우주의 빛이 되려고 하면 큰 포부와 큰 원력과 신심이 있어야 한다. 예전의 사람도 첫째 대신심을 내라고 했다.
… (중략) …
도리를 깨치는 경지에 도달하려면 수도하는 데에 여러 가지의 지장도 있고, 고통과 난관이 있느니, 이러한 것을 돌파하자면 대용맹이 있어야 한다.
… (중략) …
대분심을 내야 한다.
공부하는 데 있어서 上乘과 最上乘은 수행절차에 구애받지 않겠으나 중?하근기의 사람은 화두로써 공부를 지어야 한다. 이 화두에는 疑情이 귀하니 예전 사람들도 대의정을 일으키라고 하였다. 대신심과 대분심과 대의정은 솥발과 같아서 하나만 없어도 안된다.”14)
14)상게서, pp.295∼296.
위의 인용문에서 본 바와 같이 근본골격은 고봉화상의 삼요설과 크게 다르지 않으나 설명함에 있어서 약간 차이가 있다. 즉 경봉선사는 수도인의 기초로서 맨 먼저 大信心을 내야하고, 그 다음 수도하는 데 여러 가지 지장과 고통과 난관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大勇猛(大憤心)을 내야하며, 그리고 화두에는 疑情이 귀하기 때문에 大疑情을 일으켜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 고봉화상의 三要說은 淸虛休靜(1520∼1604) 의 선가귀감?에 몇 글자의 출입은 있으나 내용은 그대로 계승되어 있다.15)
또 無字公案을 참구하는 방법을 야반三更에 문빗장을 만져보거라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無字話頭)은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고 자꾸 생각하면 앞뒤가 뚝 끊어지고, 전후가 끊어져서 구경에 가서는 어떤 경계를 보든지, 어떤 소리를 듣든지 해서 활연히 마음자리를 깨닫게 된다.”16)
또,
“수도하는 사람은 이런 말 저런 말을 듣고 사량분별로써 이리저리 맞추고 따져서 알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화두가 寂寂한 중에 惺惺하고, 성성한 중에 적적하여 惺惺不昧로서, 가나오나 앉으나 누우나 한결 같고, 寤寐에도 한결같아서 잡념이 없는 것이 곧 좋은 시절이다.
이렇게 일주일만 연속되면 홀연히 화두가 타파되는 동시에 문득 자기의 본래면목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경지를 지낸 뒤에는 일체공안의 의심이 녹아진다. 그 후에는 눈 밝은 종사를 찾아가서 점검을 받고 保任에 관한 한 마디를 들어야 한다.”17)
고 한다. 오직 무자만을 끊임없이 참구하다가 보면 응결된 의심덩어리가 타파되어 마침내 깨달음이 온다는 것이다. 환언하면 무자공안을 참구하는 것과 정신이 통일되는 것은 동시인 것이다. 무자에 의한 의심덩어리의 응결과 이것을 안으로부터 일거에 타파하는 주체성의 개발과는 동시인과라는 의미이다. 간단히 말해서 무자공안의 참구는 선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정신집중의 훈련이다. 정신집중에 의해서 일체의 번뇌를 拂拭시키는 것이다.18) 물론 단순한 정신집중(대혜는 이를 묵조사선이라 비판함)이 아니라 깨달음이 동반된 정신집중인 것이며, 적극적으로, 또는 결과론적으로 말하면 공안에 의하여 전도된 생각이 바로 서게 되면 마음의 전환이 이루어져서 인간의 체질이 변혁되는 것이다. 경봉은 그의 어록 도처에서 정신집중의 효과로서 통 찰력이 생기고, 판단력이 빨라진다고 강조하고 있다.19)
15) 休靜, 禪家龜鑑(韓佛全제7책, p.636하),
“參禪須具三要, 一有大信根, 二有大憤志, 三有大疑情. 苟闕其一, 如折足之鼎, 終成廢器.”
16)상게서, p.189.
17)상게서, p.282. 이 인용문의 내용은 대혜서장의 答富樞密第1書(荒木見悟, 大慧書 禪の語錄17(東京:筑摩書房, 昭和44年), p.50. 또 서장 答江給事(대정장 권47, p.921하)도 참조하라.)의 것과 대동소이하다.
18) 니가 누고?, p.174에서 경봉은 “화두만 간절히 들고 있으면 망상도적이 침노하지 못한다” 고 한다.
19)상게서, p.366, “정신을 집중시키는 禪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모둔 부분에 정말 귀중한 원동력이 된다.” 또 같은 책, p.396, “예술?철학?종교가 전부 정신집중하는 거기에 묘가 있다. 나중에 견성성불은 못하더라도 하루에 대여섯 시간만 정신이 집중되면 관찰력과 판단력이 빨라지고, 기억력이 좋아지며, 하찮은 생각이 바른 생각으로 돌아서고 몸에 병이 있더라도 없어지고, 맑은 지혜가 나와서 사농공상의 경영하는 모든 일들을 다 잘하게 된다.”
또 경봉선사는 續法海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부하는 사람도 끌고 나가는 화두가 행주좌와, 어묵동정에 一如해서 간단이 없어야 되는 것이다. 밥을 먹을 때도 놓지 말고, 대소변 볼 때도 놓지 말고 항상 상속되어야 되고, … (중략) … 화두가 순일하면 한 생각 일어나고, 한 생각 없어지는 것이 곧 없어진다. 한 생각 일어나고, 한 생각 없어지던 것을 애를 써서 공부를 해 가노라면 고요한 寂에 들어간다. 우리가 공부를 해서 지극히 고요한 데 들어가야 되지 화두가 어디로 가버리면 참선도 안 되고, 아무 생각 없이 정신 나간 사람처럼 우두커니 앉아만 있는 이것은 無記로서 기록함이 없는 것이다. 寂中의 고요한 가운데 不昧話頭 라 꿈에도 화두를 들고 간단이 없어야 된다.”20)
20)경봉, ?續法海?(양산:통도사 극락호국선원, 1979), pp.145∼146.
위의 인용문에서 화두가 항상 끊임없이 제기되어야 한다는 내용은 대혜의 서장 答江給事(대정장 권47,p.921하)에서 주장하는 것과 같다. 대혜는 여기뿐만 아니라 이런 내용은 도처에서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경봉선사는 화두가 어디론가 가버리면 無記空, 즉 몰자각 상태에 빠져 버리기 때문에 고요한 가운데 항상 불매화두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는 깨달음 법칙으로 삼는21) 대혜의 사상과도 일치 한다.
그리고 경봉선사는 니가 누고? 에서 무자공안을 잘못 참구하고 있는 납승들을 경계시키고 있다. 즉 “무자화두는 무 무 무 하고 자꾸 속으로 외워서는 안 된다”22)고 주의를 주고 있다. 속으로 무 무 무 하면서 그 소리를 듣는 것은 수식관이지 무자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어떤 교수사는 앞에 언급한 소염의 시, 즉 양귀비가 밤으로 자주 소옥아! 소옥아!라고 그녀의 몸종의 이름을 부르는데, 그 부르는 이유는 정말 어떤 일을 시키기 위해서 부르는 것이 아니라 밖에 있는 그녀의 情夫인 안록산이 알아듣도록 부르는 일종의 암호와 같은 것이다. 이 시를 예로 들어서 속으로 無라고 소리를 내고, 그 소리를 듣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경봉선사가 지적 한 것처럼 무자공안을 잘못 참구하고 있는 것이다. 수식관에서 하나 둘 셋 을 셀 때 그 숫자에 하나 라든가 둘 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 숫자 하나하나는 절대의 소리로서 분별 이전의 소리이다. 물론 無자도 父母未生以前의 소리, 즉 분별 이전의 소리이지만 단순히 無라는 소리를 내고, 그 소리를 듣는 것이 무자 공안을 참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경봉선사가 말한 것처럼 오로지 믿음, 분심, 의심 의 삼자로 응어리진 無만을 끊임없이 참구(생각)하는 것이 간화선이다. 이 때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의심을 참구해서는 안 된다.
현재 한국의 납자들은 무자공안의 의심을 더욱더 내면으로 심화시켜서 의심하고 있는 바로 그 놈이 누구인가? 라고 되묻고 있다. 이른바 이뭣고? 이다. 이 이뭣고 는 화두가 아니라 본래면목을 확인하고자 하는 일종의 自問이다.
21)大慧普覺禪師語錄 法語卷第20(대정장 권47, p.895상).
22)경봉, 니가 누고?, p.341.
마지막으로 화두를 참구함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사항23)이 무엇인지를 고찰해 보겠다. 경봉선사는 무자화두를 참구함에 있어서 경계해야할 10가지 병통을 들고 있다.
니가 누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무자화두는 알음알이를 두드려 없애는 무기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화두에 대하여 옛 사람이 열 가지 병을 말하였다.
1. 있다 없다 하는 것으로 알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2. 참으로 없는 無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3. 무슨 도리로 알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4. 뜻으로 이리저리 헤아려서 알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5. 미간을 찡그리고, 눈을 깜짝깜짝하는 곳에 집을 짓고, 뿌리를 박지 말아야 한다.
6. 다른 사람의 말에서 찾으려고 하거나 말재주로써 活計를 짓지 말아야 한다.
7. 일 없는 굴속에 주저앉지 말아야 한다.
8. 불조의 向上關을 擧起하는 곳에서 알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9. 문자 중에서 引證하지 말아야 한다.
10. 迷한 것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아야 한다.”24)
23)공안 공부에 대한 여러 가지 주의점은 대혜의 서장 答張舍人狀元에도 나온다(荒木見悟,大慧書, p.228).
24)니가 누고?, p.157, ?야반三更에 문빗장을 만져보거라?, p.279.
경봉선사가 말하는 옛 사람이란 대혜종고를 가리킨다. 이 열 가지를 소위 看話十種病25)이라고 하는데, 대혜서장의 答富樞密第1書에 8가지가 나오고, 나머지 둘은 다른 곳에 나온다. 그 두 가지는 不得作眞無會(無에 대하여 정말 無한 것이라고 해서도 안 된다)26)와 不得將迷待悟(선은 깨달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깨달음에 대한 企待心이 정진상에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27)이다.
경봉선사는 “1,700 가지 공안 가운데 어떤 화두를 궁구하든지 간에 이 무자화두참구의 병통에 의거하여 자기 공부에 지장 없이 지어가야 하고, 그 밖에 의심나는 일이 있으면 선각자에게 자주 물어야 한다”28)고 한다.
그리고 경봉은 이런 10가지 병에서 벗어나 무자공안을 참구할 때는 마치 닭이 알을 품듯이(如鷄抱卵), 고양이가 쥐를 잡으려고 하는 것과 같이(如猫捕鼠), 굶주린 사람이 밥을 생각하듯이(如飢思食), 목마른 자가 물을 생각 하듯이(如渴思水), 화염 속에서 뛰쳐나오고자 하는 것과 같이, 머리에 불이 붙은 것을 끄고자 하는 것과 같이, 천 길이나 되는 우물 속에 떨어진 사람의 마음과 같이 하라29)고 한다. 여기 닭이 알을 품듯이(如鷄抱卵) 등의 비유는 휴정의 선가귀감에 나오는 말인데,30) 한마디로 말해서 마음을 一境에 머무르게 하여 일체의 思念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선의 본질을 비유한 것이다.
경봉은 무자공안이라는 것은 사상이 아니라 단지 정신을 통일하는 수단(방법)에 불과한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경봉선사는 매듭 짖는 말로서 “수도하는 사람이 미리 이러한 병을 참작하여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게 정진하여 오매에도 惺惺함이 눈앞에 나타나면 자연히 지극히 고요해지고, 고요하면 맑아지며, 맑아지면 밝아져서 통하게 된다”31)고 한다.
25)荒木見悟, 大慧書 禪の語錄17(東京:筑摩書房, 昭和44年), p.51,
“不得作有無會. 不得作道理會. 不得向意根下思量卜度. 不得向揚眉瞬目處타根. 不得向語路上作活計. 不得?在無事甲裏. 不得向擧起處承當. 不得向文字中引證.”
(무자화두의 無에 대하여 유무의 분별심을 일으켜도 안 되고,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니 무슨 딴 도리가 있는가라고 생각해서도 안되며, 제 6의식, 즉 情念을 가지고 이런가? 저런가? 헤아려서도 안 되고, 흔히 무엇을 생각해 내려고 할 때와 같이 눈썹을 치켜 올리거나 깜짝깜짝하는 가운데서 알아내려고 해서도 안 되며, 정신상 아무런 활동도 없이 우두커니 있어도 안 되고, 화두의 秘義를 體究한 바도 없이 그저 드는 곳에서 무슨 수를 내려고 해서도 안 되며, 경전이나 어록 등 문자 중에서 인증을 내려고 해서도 안 된다.)
26) 大慧普覺禪師語錄 書卷第30 ‘答張舍人狀元’(?대정장?권47, p.941중), “不得作眞無之無卜度.”
27)同上, p.923하.
28) 니가 누고?, p.158.
29)상게서, p.343.
30)休靜, 禪家龜鑑(韓佛全제7책, p.636중∼하), “凡本參公案上, 切心做工夫. 如鷄抱卵, 如猫捕鼠, 如飢思食, 如渴思水, 如兒憶母. 必有透徹之期.”
31) 야반삼경에 문빗장을 만져보거라, p.297.
또 경봉선사는 화두를 참구해 나가다가 보면 이상한 경계들이 나타나는데, 이런 경계들에 끄달리게 되면 참선은 다 틀려버리기 때문에 꾸준히 화두만 참구해 나가라고 경고하고 있다.
니가 누고?에,
“공부를 해 나가면 본래 맑은 그 자리가 점점 맑아져서 광명스런 훤한 기운이 도는 데 설사 석가여래가 나타나더라도 이 화두 공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어떤 불보살이 나타나더라도 한 방망이 먹일 용기가 있어야 할 텐데, 부처가 나타나서 삿된 생각으로 절을 하거나 하면 미치고 마는 것이다. 훤한 광명이 나타나 으레 그런 광명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만 이 화두만을 참구해야지 전에 없었던 것이 나타났다고 해서 훤한 그것만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참선은 다 틀린 것이다.”32)
지금까지 고찰한 내용을 토대로 해서 경봉선사의 看話禪觀을 사상적인 측면에서 한마디로 요약해서 말하면 중국 송대 대혜종고의 간화선의 실천법과 거의 대동소이 함을 알 수 있다. 경봉선사의 법어집에 나오는 구절구절마다 그 출처를 대혜의 어록에서 찾아서 완전한 글로서 보여 줄 수 있지만 그렇게 하면 논문이 산란스럽기 때문에 간략히 그 출처만 밝혀 두는데 그친다.
32)상게서, p.342. 좌선 중에 나타나는 경계에 대해서는 關口眞大,現代語譯天台小止觀 覺知魔事第8 (東京:大東出版社, 昭和53년, p.101 이하)에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Ⅳ. 결론
중국 송대 간화선은 오조법연과 원오극근에게서부터 맹아가 트기 시작하여 대혜 종고에 이르러 대성하게 되었고, 그 후 원대에 들어와서는 고봉원묘와 그의 제자 중 봉명본의 활약에 의하여 再起되었다고 본다.
한국선, 즉 한국의 간화선은 고려시대의 지눌과 혜심 이후 그 뿌리를 내리고, 그 유행은 원대 고봉원묘와 중봉명본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 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고봉원묘의 선요를 애독하기 시작하면서 선요?가 조선시대에 간화선의 표준이 되었고, 특히 휴정의 선가귀감은 선요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그 다음 조선말, 대한제국 시대에는 경허 등의 활약이 있었으며, 현대에 접어들어서는 특히 경봉이나 성철 등의 활약에 의하여 간화선이 일반 재가자나 납자들에게 보편화되었다고 생각한다.
대혜가 간화선을 주장하게 된 근본 이유는 문자선(고칙공안을 비평하는 것, 拈古, 頌古, 著語, 評唱등)의 병폐와 무사안일선의 병폐를 바로 잡고, 공안 본래의 의미를 되찾고자 하는 데 있다. 양자의 병폐는 둘 다 깨달음을 소홀히 하는데 있었다. 그래 서 대혜는 공안이라는 도구를 들고 나와 자기의 마음바탕을 비추어 보는 수단으로 삼은 것이다. 이 공안은 간화선에 있어서 가장 핵심이 되는 요소로서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지만 이것을 사량분별로써 이해하려고 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강조한다. 즉 단지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도구일 뿐이라는 말이다.
경봉선사가 보는 화두란 학인이 법을 묻는데 格外로서 답을 한 것이라고 하기 때문에 이는 공안의 본래 의미를 말한 것으로서 원오가 말하는 문을 두드리는 기와 조각이라는 의미라든가 대혜가 말하는 의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도구라는 의미와는 다르게 이해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또 화두가 따로 있는 것 이 아니다 고 하기 때문에 화두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시설된 방편이라고 보고 있는 것 같다.
다음 경봉은 무자공안을 포함하여 화두를 참구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그저 간단하게 무자를 계속 생각하면 된다 고 할 뿐 고봉화상과 같이 구체적으로 믿음, 분심, 의심의 삼자를 체용관계로 연결시켜서 설명하거나 그 상호관계를 말하지 않고, 직접 수도하는 자의 입장에 서서 설명하고 있다. 경봉도 고봉과 마찬가지로 이 셋은 솥발 (鼎足)과 같아서 그 중 하나만 없어도 참선을 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경봉이 화두를 참구함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사항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대혜의 서장의 이른바 간화10종병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경봉선사의 모든 법어집을 읽고 느낀 점에 의거하여 필자의 견해를 피력하면, 물론 심중의 주관적인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이지만 지금 한국의 대다수의 납자들은 경봉선사의 가르침과 크게 다르지 않게 간화선을 실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이러한 결과를 가져오기까지의 前史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한국 간화선의 원류는 멀리 송원대에서부터 비롯되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고려시대에 간화선의 교과서와 같은 역할을 한 보조지눌의 간화결의론의 영향과 조선시대에 고봉원묘선의 선요 을 많은 사람들이 애독한 그 영향이 줄곧 이어져 현대에 이르고 있다고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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關口眞大, ?現代語譯天台小止觀?( 覺知魔事第8 )(東京:大東出版社, 昭和53년)
大慧宗?, ?大慧普覺禪師語錄?(?대정장?권47)
高峰原妙, ?高峰原妙禪師禪要?(?卍續藏?권122)
休靜, ?禪家龜鑑?(?韓佛全?제7책)
圓悟克勤, ?圓悟佛果禪師語錄?권12
希?紹曇, ?五家正宗贊?( 속장 2乙-8, 國譯禪宗叢書1-6)
雷庵正受, ?嘉泰普燈錄?권28( 속장 2乙-10)
大慧宗?, ?書狀?(?高麗版, 和刻本?)
On the Derivation and Structure of Korean Ganwha Seon in Modern Times
? Focus on Gyeong-Bong Seon Master ?
Jung, Eu-Gene
Kanhua ch?n(看話禪) in Song dynasty of China stemmed from W? z? f? y?n(五祖法演) and Yu?n w? k? q?n(圓悟克勤) and completed its foundation by D? hu? z?ng g?o(大慧宗?), and afterward resurged in Yu?n(元) dynasty by the activities of G?o f?ng yu?n mi?o(高峰圓妙) and his diciple, Zh?ng f?ng m?ng b?n(中峯明本).
Hanguk Seon(韓國禪), namely Korean's Kanhua ch?n established its foundation by JInul(智訥) and Hyeshim(慧諶) in Koryo dynasty and its trend was accomplished by G?o f?ng yu?n mi?o(高峰圓妙) and Zh?ng f?ng m?ng b?n(中峯明本) in Yu?n dynasty. Afterward Seon yo(禪要) which was wrote by G?o f?ng yu?n mi?o became a standard text of Kanhua ch?n in Chosun dynasty which is supposed to have influenced on Son ga gui gam(禪家龜鑑) that was wrote by Hyugeong(休靜).
After ward in the late Chosun dynsty, a Korean empire period the remarkable activities of Kyeongheo(鏡虛) was presented, and present day it is thought that Kanhua ch?n was widely spread to the Buddhist priest and lay practitioners, especially by the activities of Kyeongbong(鏡峰) and Seongchol(性徹).
The principal reason that D? hu? insisted Kanhua ch?n was to correct the illness of Lettered Seon(文字禪) and Complacent Seon(無事安逸禪) and recover the fundamental meaning of G?ng?n(公案), which illness of both is thought to neglect the fundamental enlightenment of Buddhism. So D? hu came to assert the G?ng?n, as an expedient of discerning the intrinsic mind of a self. According to D? hu this G?ng?n is an essential element of Kanhua ch?n but is strongly emphasized that the G?ng?n should not be understood by deliberation or discrimination. Namely the G?ng?n is understood as an expedient of causing the mind of doubt.
Seon master, Kyeongbong defined the Head Phrase(話頭) by saying, ‘Answer by means of transcendence for the disciple's question’, which definition expresses the fundamental meaning of G?ng?n, but its definition shows different view contrary to the view that Yu?n w? expressed Head Phrase by saying ‘a piece of roof tile for knocking door’ and also to the view of D? hu? that defines the Head Phrase as a tool for bring about question. Also Kyeongbong asserted that the Head Phrase is not regulated by any means, so that the Head phrase is just an expedient that is established diversely according to the different situations.
Nextly, Kyeongbong expressed his idea of pursuing Head Phrase including ‘Letter Wu(無字)’ G?ng?n by simply defining it by Just continuously concentrate on the ‘Letter Wu(無字)’, which is a direct description on the standpoint of practitioners, but it excludes the explanation by master, G?o f?ng that considering concrete combination of three elements of belief, exertion and doubt. G?o f?ng explains those three elements on the basis of nature and phenomenon activities or by on the mutual relations of those elements. But Kyeongbong like master G?o f?ng put emphasis on those three elements by figuring those to the tripod base of a kettle that excluding any of those elements the practices of Seon is not accomplished.
And Kyeongbong utters matters that require attention in pursuing Head Phrase but it is just a quotation of ‘Ten ills of practicing Head Phrase’ presented in Seojang.
Expressing the opinion of arguer on the basis of reading all the works of Kyeongbong Seon master, however is may be a subjective experience it is supposed that most of Seon practitioners of Korean monks follow and practice the teaching of master, Kyeongbong. Approaching the history backward that eventually resulted in the present situation it is needless to say that root of Korean Kanhua ch?n dates back to Song and Yuan dynasty of China and influenced by Kan hwa gyeol lon(看話決疑論), a work of Jinul(智訥) in Koryo dynasty which was regarded as a textbook in practicing Head Phrase, and also influenced by considering Seonyo, a work of G?o f?ng yu?n mi?o in Chosun dynasty.
?Key Words
Kanhua ch?n(看話禪), G?ng?n(公案), Head Phrase(話頭), Belief(信心), Exertion (忿心), Doubt(疑心), Transcendence(格外)
논문접수일: 2011년 11월 17일,
심사완료일: 2011년 12월 20일,
게재확정일: 2011년 12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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