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佛敎에關한 글

만물이 모두 내 안에 갖춰져 있다.낙암(樂菴) / 이상하

경호... 2012. 11. 30. 02:19

만물이 모두 내 안에 갖춰져 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세상을 마음속에 담고 살아간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동양학에서는 대개 세상 속에 산다는 점을 중시하면 유교 사상에 가깝고, 세상을 마음속에 담고 있다는 점을 중시하면 불교 사상에 가깝다. 그렇지만 유교 사상이라 하여 마음을 중시하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전국시대 맹자(孟子)는 세상 만물이 내 안에 다 들어 있으니, 내 마음이 진실하면 이보다 더 큰 즐거움은 없다고 하여, 진정한 행복은 나의 내면에 있다고 하였다.

 

 

"맹자가 “만물이 모두 내 안에 갖춰져 있다.” 하였으니, 이는 인(仁)의 본체가 지극히 큼을 비유한 말이다. 무릇 천지간에 사해(四海)와 팔황(八荒), 금수(禽獸)와 초목(草木) 등이 다 물(物)인데 인자(仁者)는 이 모두를 똑같이 보아서 자신에 속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나의 백성이고, 모든 이민족들이 다 나의 이민족이며, 모든 금수와 초목들도 다 나의 금수와 초목인 것이다. 나[我]란 물(物)에 상대되는 개념이니, 비록 피차의 구별을 있을지라도 내가 저 만물을 모두 포괄할 수 있고 만물 각각에 맞게 처리할 방도가 있으니, 따라서 만물이 모두 나의 마음속에 갖춰져 있어 조금도 부족한 바가 없는 것이다.

 

내가 만물을 접할 때 처리하는 방도가 극진하지 못하면 내 자신에 돌이켜 볼 때 필시 무언가 미흡하여 허전하게 느껴질 터이지만, 나 자신에 돌이켜 보아 부족한 바가 없다면 그 즐거움이 어떠하겠는가! 그러므로 “서(恕)를 힘써 실행하면 인(仁)을 구함이 이보다 더 가까울 수 없다.” 하였으니, 이 인을 구해서 인을 얻는 것이 이른바 “자신에 돌이켜 진실하면 즐겁다.”는 것이다.

 

《예기(禮記)》에 “성인(聖人)은 사해(四海)로 한 집을 삼고 중국으로 한 몸을 삼는다.” 하였는데 이는 그래도 조금 부족한 점이 있다. 《맹자(孟子)》는 여기서 개념을 미루어 넓혀서 만물을 자신에 소속시키는 데 이르렀으니, 더할 나위 없다 하겠다."

 

 

[孟子曰: “萬物皆備於我”, 此形容仁體之極大. 大凡盈天地之間, 四海八荒, 禽獸草木, 皆物也. 仁者一視, 莫不屬己.

故兆民皆我民也; 蠻夷皆我蠻夷也; 禽獸草木皆我禽獸草木也. 我者物之對也. 雖彼我相形, 我可以包括無外, 而各有處之之道, 是萬物皆備於我之度內而無闕.

我若處之不盡其道, 則反諸我身, 必有?焉而?矣. 反之而無所欠闕, 其樂當如何哉! 故曰: “强恕而行, 求仁莫近焉”, 求仁得仁, 所謂反身而樂也.

禮云: “聖人以四海爲一家, 中國爲一身”, 此猶欠少. 孟子又推擴至萬物屬己, 可謂盡之矣.]

 

- 이익(李瀷) 〈만물비아(萬物備我)〉《성호사설(星湖僿說)》제20권 경사문(經史門)

 

 

〈해설〉

맹자가 “만물(萬物)이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으니, 자신에 돌이켜보아 진실하면 즐거움이 이보다 더 클 수 없고 서(恕)를 힘써서 행하면 인(仁)을 구함이 이보다 가까울 수 없다”1) 한 말을 성호(星湖) 이익(李瀷)이 설명한 글이다. 맹자의 이 말을 풀이하여 주자(朱子)는 “만물(萬物)의 이치가 나 자신 안에 갖추어져 있으니, 나 자신이 진실하면 마음이 참으로 즐겁고 남을 나와 같이 생각하면 사사로운 생각이 일어날 수 없어 인(仁)의 상태가 된다.” 하였다.

 

1)“萬物皆備於我矣. 反身而誠, 樂莫大焉; 强恕而行 求仁莫近焉.”《孟子 盡心 上》

 

성호(星湖)는 위 맹자의 말을 인(仁)의 개념을 가지고 해석하였다.

즉, 인자(仁者)는 천지 만물을 모두 똑같이 보아서 자신에 속하는 것으로 여기므로 세상 사람은 모두 나의 사람이고, 나아가서 짐승, 초목들까지도 모두 나의 짐승, 나의 초목으로서, 모두 내 안에 포괄된다. 따라서 남은 그저 남일 뿐이 아니라 나의 남이며, 사물은 그저 사물일 뿐이 아니라 나의 사물이니, 사물을 접응할 때 자신이 할 도리를 다하지 못하면 마음이 흡족하지 못하고, 자신을 돌이켜 보아 흡족하면 마음이 즐겁다.

남이 그저 남일 뿐이라 느껴지고 사물이 내 밖의 사물일 뿐이라 느껴진다면 이는 나의 마음이 진실하지 못한 것이요 인(仁)하지 못한 것이다. 이럴 때 나의 마음은 내 안의 사물을 분리하여 타자(他者)로 인식한다. 나와 사물이 분리되면, 그 사이에 갈등이 일어난다. 이 갈등은 서(恕)를 통해 해소된다.

주자(朱子)는 서의 개념을 추기급인(推己及人)이라 하였다. 쉽게 말하면 자기의 입장을 미루어서 남을 헤아려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마음이 사물과 접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 서이니, 서가 제대로 되지 못하면 사물과 나 사이가 벌어지게 된다. 또한 서가 빠진 인(仁)은 한갓 공허한 관념에 그친다.

 

고전을 읽다 보면 두 번씩 놀라곤 한다. 옛 성현의 말들이 너무도 비슷함에 놀라고, 한편 서로 같은 듯하면서 너무도 다름에 또 한 번 놀라곤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유교와 불교는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생겨났고 사상도 매우 다르다. 그런데 유교와 불교의 경서들에는 흡사한 말들이 왕왕 발견되곤 한다. 그렇지만 그 말의 취지는 대개 다르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세상을 마음속에 담고 살아간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세상 속에 산다는 점을 중시하면 유교 사상에 가깝고, 세상을 마음속에 담고 있다는 점을 중시하면 불교 사상에 가까울 것이다.

 

유교의 인(仁)과 서(恕)는 천지 만물을 나에게 속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데 그치고, 천지 만물과 완전히 합일한 것은 아니다. 성호가 피차의 구별이 있다고 하고 나의 사람, 나의 짐승, 나의 초목이라 했듯이 남이 아니라고 느낄 뿐 나와 만물 사이에 관계는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나와 만물의 간격을 단숨에 허물어 몽땅 공무화(空無化)해 버린다. 나와 남이란 개념을 아예 없애 버리는 것이다.

유교는 자기와 세상과의 관계 정립을 중시하여 삼강오륜(三綱五倫)과 같은 윤리를 중시하는 반면 불교는 세상과 자기와의 갈등을 근원에서 해소하여 완전한 해탈을 추구한다. 그래서 말은 서로 비슷하지만 그 취지는 다른 것이다.

 

‘만물이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다’고 한 말은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더 쉽게 해석할 수 있다. 유교의 관점에는 여전히 나와 만물 사이에 관계가 남아 있으니, 곧바로 생각해서는 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만물을 모두 내 안에 담아 둘 엄두가 나지 않는다.

맹자의 본의와 다르겠지만, 불교의 관점에서 맹자의 말을 해석해 보자.

 

불교의 사상은 어디까지나 유심론(唯心論)에 입각한다 할 수 있다. 유심론에 의하면, 우주 만물은 저마다의 실체가 있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빚어내는 형상이고 내 본성의 거울에 비쳐 있는 그림자일 뿐이다. 우주 만물 뿐 아니라 우주 만물을 상대하는 나도, 필경 나의 내면 의식에 비쳐진 빈 형상일 뿐이니, 나는 내 안에 또 하나의 나를 만들어서 만물을 상대하고 내 내면의 거울은 나와 만물 모두를 아울러 비추고 있는 것이다.

 

자, 만물을 내 안에 담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리고 내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자.

내 안에는 만물 뿐 아니라 만물을 상대하는 또 하나의 나도 있다. 이 또 하나의 나가 바로 우리가 늘 ‘나’라고 주장하는 바로 그 나이니, 이 나를 의식하면 곧바로 세상과 간격이 생겨 만물은 남이 된다. 만물을 남으로 인식하면, 내 마음은 인(仁)하지 못하게 되고 사람과 사물을 접할 때 진실하지 못하게 된다.

자기라 주장하는 이 나가 없으면, 우리의 마음은 텅 비고 고요하다. 이 마음자리는 그저 대상을 비출 뿐 분별이 없으므로 우주 만물을 다 포괄하여도 비좁지 않으니, 피아(彼我)를 분별하는 생각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만물을 다 담아도 늘 고요하고 즐겁다.

 

 

 

 

가난해도 즐거운 집, 낙암(樂菴)

 

물질만능이라는 오늘날 세상에 안빈낙도(安貧樂道)와 같은 고루한 선비나 할 말을 운운해서는 세정(世情) 모르는 딱한 사람 취급을 받기 십상이리라. 그렇지만 정녕 가난해도 즐거울 수 있다면, 그 즐거움이야말로 외물(外物)에 의해 변치 않는 참된 즐거움이 아닐까.

그런 즐거움을 삶 속에서 찾는 길을 가르쳐 줄 수 있다면, 지금의 재미없는 인문학이 참으로 할 만한 학문이 되고, 생기를 잃어가는 인문학이 다시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지 않겠는가.

 

 

"나는 지난해 사직하고 돌아온 뒤로 겨우 한 차례 사직을 청하여 윤허를 받지 못하고는 성상(聖上)을 번독(煩瀆)할까 몹시 두려워 몸을 사리고 입을 다문 채 올해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마침 나이 일흔이라 치사(致仕)할 시기가 되었기에 감히 성상께 글을 올려 모든 직임을 벗겨줄 것을 청하였으니, 윤허 받지 못할 리 없을 것입니다.

만일 윤허 받지 못한다면 속속 글을 올려 기필코 뜻을 이루고야 말 작정입니다. 명분이 바르고 말이 이치에 맞으니, 성상을 번독할 염려는 생각하지 않아도 될 듯합니다.

이 소원을 이룬다면 산은 더욱 깊어지고 물은 더욱 멀어지며, 글은 더욱 맛이 있고 가난해도 더욱 즐거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滉去年歸後, 僅一辭不得, 極以煩瀆爲恐, 側身緘口, 拖至今年,

適當引年之限, 乃敢上箋陳乞, 理宜無不得者.

萬一不得, 續續拜章, 以得遂爲期. 名正言順, 煩瀆之嫌, 有不當計也.

此願得遂, 意謂山當益深, 水當益遠; 書當益有味, 貧當益可樂也.]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집안에 거처하며 예전에 공부한 글들을 다시 읽으며 이치를 사색하노라니 자못 맛이 있습니다. 이에 고인(古人)들처럼 누추한 집에서 편안히 거처하며 변변찮은 음식을 달게 먹는 것을 거의 바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살고 있는 집이 산기슭에 가깝기에 작은 초암(草庵)을 새로 지어 한가로이 기거할 곳으로 삼고자 합니다.

낙(樂) 자를 이 초암의 이름으로 걸고자 하니, 지난번에 주신 편지에서 “가난해도 더욱 즐거울 수 있으리라” 라고 하신 말씀을 말미암아 제 마음에 바라는 뜻을 깃들인 것입니다.

산은 비록 높지 않으나 시야가 두루 수백 리로 펼쳐져 있어 집이 다 지어져 거처하면 참으로 조용하게 공부하기에 알맞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공부를 하노라면 그 정경(情境)에 절로 일어나는 흥취가 없지 않을 터이니, 이 밖에 세상의 부질없는 일 따위야 무슨 개의할 게 있다고 다시 입에 올리겠습니까."

[歸臥一室, 溫繹陋學, 頗覺有味. 蓬?之安ㆍ簞瓢之甘, 亦庶乎可以有望也.

家近山崖, 新築小菴, 擬爲棲遲之所.

欲以樂字揭其名, 蓋緣前書所示貧當益可樂之語, 用寓鄙心之所願慕者.

山雖不深, 眼界周數百里, 屋成而居, ?合靜修之地.

從事其間, 不無情境助發之趣也. 此外悠悠, 何足介意而更有云云耶?]

 

- 이황(李滉)ㆍ기대승(奇大升) <양선생왕복서(兩先生往復書)> 《고봉집(高峯集)》

 

 

〈해설〉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보내고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답한 두 통의 편지에서 각각 일부분만 발췌하였다. 퇴계의 편지는 1570년 1월 24일에 보낸 것이고, 고봉의 편지는 그 해 4월 17일에 보낸 것이다.

 

위 퇴계의 편지에서, 산은 더욱 깊어지고 물은 더욱 멀어진다는 것은 세상을 떠나 깊이 은거함을 뜻한다. 가난해도 더욱 즐겁다는 것은 공자(孔子)의 “가난해도 즐거워한다.[貧而樂]”1)는 말에서 온 것이다.

또한 공자가 안회(顔回)를 두고 “한 그릇의 밥과 한 바가지의 물로 누추한 마을에 사는 것을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디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는구나. 어질도다, 안회여![一簞食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回也不改其樂 賢哉回也]”2) 라고 하였다.

그저 가난을 편안히 여길 뿐만이 아니라 책에서 진리를 아는 참된 맛을 느낄 것이라 했으니, 이것이 소위 가난을 편안히 여기고 진리를 즐긴다는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이다. 위 고봉의 편지에서 말한 ‘누추한 집에서 편안히 거처하며 변변찮은 음식을 달게 먹는 것’도 안빈낙도의 삶임은 말할 나위 없다. 고봉이 살던 곳에는 산이 높지 못하다. 그래서 퇴계의 말을 받아서 ‘산은 비록 높지 않으나’라고 했으니, 재치 있는 화답이다.

 

1) 자공(子貢)이 묻기를, “가난해도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여도 교만하지 않으면 어떠합니까?[貧而無諂 富而無驕何如]” 하니, 공자가 “괜찮지만 가난해도 도를 즐기고 부유하여도 예를 좋아함만은 못하다.[可也 未若貧而樂富而好禮者也]” 하였다. 《論語 學而》

2) 《논어(論語)》 <옹야(雍也)>에 보인다.

 

 

퇴계는 노병(老病)을 이유로 누차 사임하여 1569년 3월에야 69세의 나이로 우찬성(右贊成)을 벗고 명예직인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띤 채 돌아왔고, 고봉은 44세 때인 1570년 2월에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을 사임하고 귀향하였다. 퇴계가 도산에 돌아온 뒤에도 계속하여 사직을 청했던 것은 이 판중추부사의 직함마저 벗겨줄 것을 청한 것이다.

 

당초 인종(仁宗)이 재위(在位) 기간 1년이 채 못 되어 승하했다는 이유로 권신(權臣) 윤원형(尹元衡)이 문소전(文昭殿)에 인종을 부묘(?廟)하지 않았다. 그 뒤를 이은 명종(明宗)을 문소전에 부묘하게 되자 고봉을 위시한 사림들이 인종도 함께 부묘할 것을 주장, 이에 반대하던 영의정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의 뜻을 거슬렀다. 이로부터 고봉은 당시 영의정의 미움을 받았고, 결국 조정을 떠났다. 이에 앞서 퇴계는 고봉에게 사직하고 낙향하여 학문에 정진할 것을 간곡히 권유하였다.

 

고향에 돌아온 고봉은 곧바로 고마산(顧馬山) 남쪽에 낙암(樂菴)을 지어 그 해 5월에 완공하였다. 현재 고봉의 고향인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 용동마을에서 2km 남짓 떨어진 신촌마을 뒷산 낙암산이 바로 고마산이다.

 

위 고봉의 편지에 대해 퇴계는 그 해 7월12일에 답장과 함께 낙암에 대한 기문(記文)과 액자(額字)도 써서 보내 주었다. 기문에서 퇴계는 낙암에 가보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였다.

 

한편 이 해 정월에 보낸 편지에서 퇴계는 평소 건강을 잃을 만큼 술을 좋아하던 고봉에게 술을 자제하라고 간절히 충고하였다. 고봉은 답장에서, 근래 병이 많아 술을 끊었고, 앞으로도 술을 끊도록 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때 고봉은 이미 퇴계가 염려한대로 건강이 많이 나빠져 있었던 듯하다.

 

이듬해 여름에 홍문관 부제학, 이조참의에 연이어 제수되었으나 고봉은 모두 부임하지 않고 낙암에 굳게 은거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1572년 2월에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조정이 부르자 국가의 중대한 일이라 고봉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고봉은 그 해 10월에 벼슬을 사퇴하고 다시 낙향하다가 천안(天安)에 이르러 갑자기 발병(發病)하였고, 태인(泰仁)에 이르자 병세가 더욱 위독해져 11월 1일에 운명하니, 향년이 겨우 46세였다.

 

퇴계와 고봉이 주고받은 편지는 100여 통이 넘지만 고봉은 불과 세 차례 서울에서 퇴계를 만날 수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퇴계는 인품이 겸허하고 신중한 반면 고봉은 호탕하고 과감하였다. 그러나 퇴계는 문하에 출입한 사람들 중 고봉을 가장 깊이 인정하였다. 그래서 퇴계가 벼슬을 그만두고 조정을 떠날 때 선조(宣祖)가 조정 신료들 중 누가 학문이 뛰어난 사람인지 묻자, 퇴계는 “기대승은 글을 많이 보았고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어 통유(通儒)라 할 만합니다.” 하여, 오직 고봉을 추천하였다.

퇴계는 또 임종할 때 유언으로 “비석을 세우지 말고 작은 돌에다 앞면에는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쓰고 뒷면에는 세계(世系)와 출처(出處)만 간략하게 기록하라. 기고봉(奇高峯) 같은 사람이 이런 글을 짓게 되면 필시 장황하게 나의 행적을 서술하여 세상의 비웃음을 사게 될 것이다.” 하였으니, 고봉을 내심 가장 뛰어난 제자로 인정하고 있었던 셈이다.

 

퇴계는 1569년 3월에 도산서당에 돌아와서 그 이듬해 12월에 세상을 떠났고, 고봉은 1570년 2월에 낙향하고 5월에 낙암을 완공하여 안돈(安頓)하다가 1572년 2월에 조정에 가서 그 해 11월에 운명하였으니, 두 분 모두 꿈에도 그리던 자신의 삶을 채 2년도 살지 못하였다. 그러나 자칫하면 자기 삶을 잃은 채 부질없이 각축하다가 떠나기 쉬운 인간세상에서 두 분은 삶의 깊고 참된 즐거움을 알고 누리다 가셨으니, 단지 아쉽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늘날 인문학은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다. 경제(?)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니, 글을 읽는 재미를 더하여 사람들의 흥미를 끌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기실 이 밖에 딱히 쇠락해 가는 인문학을 되살릴 방도를 찾기도 어렵다. 그렇지만 아무리 각색하여 대중을 불러 모을지라도 인문학을 하는 사람의 삶이 사람들을 감동시키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점점 인문학에 흥미를 잃게 되고 필경에 인문학은 학문의 권좌에서 내려와야 할지도 모른다.

 

 

 

글쓴이 : 이상하
? 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 교무처장
? 주요저서
- 한주 이진상의 주리론 연구, 경인문화사
- 유학적 사유와 한국문화, 다운샘(2007) 등
? 주요역서
- 읍취헌유고, 월사집, 용재집,아계유고, 석주집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