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佛敎에關한 글

참선과 인(仁).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 이상하

경호... 2012. 11. 30. 02:18

참선과 인(仁)

 

세상이 아무리 발전해도 사람들이 고대의 사상에 여전히 관심을 보이는 것은 생명의 근원, 삶의 본질적인 가치를 거기서 찾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불교라 하면, 우리는 깨달음과 자비를 먼저 떠올린다.

그런데 대개 참선하는 선객(禪客)들에게서는 존재의 근원을 꿰뚫고 생사(生死)를 단숨에 끊으려는 명징(明澄)하고 단호한 눈빛은 읽을 수 있고, 사람을 평온하게 품어주는 자비는 좀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불타의 동체대비(同體大悲)는 더욱 찾아보기 어렵다.

오늘날 불교계 일각에서도 바로 이 점을 선불교(禪佛敎) 편향의 문제점으로 비판하고 있다. 조선전기에 매월당 김시습(金時習)은 인(仁)이 결여되었다고 참선의 결함을 지적하였다.

 

 

"인(仁)이란 천지가 만물을 생성하는 마음이고 우리가 덕(德)으로 삼는 것이다. 대개 마음의 온전한 덕은 지극한 이치가 아님이 없는데 인이란 내가 이를 말미암아 태어났고 만물과 그 근원을 같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본성의 주체로서 사덕(四德)의 우두머리가 되어서 나머지 의(義)ㆍ예(禮)ㆍ지(智) 셋을 아울러 포괄한다. 나머지 셋을 아울러 포괄하므로 정(情)으로 발현하는 것이 사단(四端)이 되고, 이 사단 전체를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또 관통한다.

관통하기 때문에 수오(羞惡)ㆍ사양(辭讓)ㆍ시비(是非)가 그 작용이 되는데 언어와 동작 등 모든 행위에서 인성(仁性)을 본체로 삼지 않음이 없다.

 

만약 그 본체가 없어서 사사로운 생각이 제멋대로 일어난다면 가까운 친족을 사랑하는 것과 만물을 두루 사랑하는 것의 구분, 신분의 높고 낮은 등급의 차이, 공경하고 겸양하는 즈음, 시비와 사정(邪正)의 분변에 있어 잘못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까닭에 인(仁)을 실천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자기의 사욕을 극복해야 하니, 자기 사욕을 극복한다면 마음이 툭 트여서 지극히 공정하여 타고난 본성을 잘 보전한다. 이렇게 되면 본성에 갖추어진 이치가 막히고 가려지는 바 없어서 본성이 사물에 적용되는 것이 모두 도(道)에 맞지 않음이 없다. 그리하여 나의 본성이 천지 만물과 유통하여 천지가 만물을 끊임없이 생성하는 이치를 나의 마음에 두루 포괄하지 않음이 없게 된다.

 

그렇다면 계(契)란 무엇인가? 계란 합한다는 뜻이니, 이른바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이 이것이다.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은 단지 터럭만한 사욕도 없어, 활짝 트여 더없이 맑은 것일 뿐이다.

그러나 ‘더없이 맑다’는 것은 단지 문을 닫고 고요히 앉아서 눈을 감고 머리를 숙인 채 사물을 전혀 접응(接應)하지 않는, 선가(禪家)에서 말하는 ‘마음을 그저 쉬고 쉰다.’는 것이 아니다. 대개 사물을 만나 응접하거나 행위와 동작을 할 때 한 점 사사로운 생각도 없어서 한 마음의 묘한 이치가 위에 말한 것처럼 두루 천지 만물과 유통하여 모든 이치를 포괄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계인(契仁)은 승려이다. 승려가 정좌하여 마음을 억눌러 참선을 하는 것이 유자(儒者)에게 비판받는 것은 단지 인(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계인씨가 만약 인에 힘을 쓸 수만 있다면 정좌할 때 그 마음이 온전히 지극한 이치라 조금도 흠궐(欠闕)이 없고 사물을 접응하고 대응할 때 하늘로부터 받은 본성이 사단(四端) 밖으로 가득 발현할 터이니, 인(仁)의 작용은 굳이 작은 은혜를 베풀어 남을 사랑한 뒤에야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훗날 머리에 관을 쓰고 집안과 나라에서 일하고 조정에 설 때 어디서나 사람들이 우러러 보지 않음을 없을 것이요, 물러나 몸을 감추고 누추한 거리나 외진 산골에 곤궁하게 살아도 마음에 절로 기뻐서 마치 봄기운 충만한 듯, 느긋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화락(和樂)하여 그 절개를 바꾸지 않을 터이니, 아! 아! 인(仁)의 분량이 크도다."

 

성화(成化) 경자년 입추일(立秋日)에 벽산청은옹(碧山淸隱翁)은 설을 쓰노라.

 

[仁者, 天地生物之心, 而我之所以爲德者也. 蓋心之全德, 莫非至理, 而仁者, 我所由以生, 與萬物同此元元者, 故主於性中, 爲四德之長而兼包焉. 惟其兼包也, 故發於情爲四端, 而四端之中, 惻隱又貫通焉.

惟其貫通也, 故以羞惡辭遜是非爲其用, 而於動靜云爲之際, 未嘗不以仁性爲體.

 

如無其體, 私意妄作, 於親親及物之分ㆍ尊卑等殺之間ㆍ恭敬揖遜之際ㆍ是非邪正之辨, 不能無過焉.

是故, 爲仁者, 須要克己. 若克己私, 廓然至公, 涵育渾全, 而理之具於性者, 無所壅蔽, 施於事物之間者, 莫不各當其道, 與天地萬物相爲流通, 而生生之理, 無不該遍矣.

 

然則契者何? 契也者, 合也, 所謂不違, 是也. 不違, 只是無纖毫私欲, 豁然淨盡而已.

然曰淨盡云者, 非直閉門靜坐, ?眼低頭, 不接物, 不應事, 所謂休去歇去者也. 蓋遇物應事, 施爲動作, 絶一點私意, 一心之妙, 周流該博, 如上所云也.

 

契仁, 浮屠氏也. 浮屠靜坐捺念爲參禪, 爲儒者所?, 但不能仁也. 契仁氏若能用力於仁, 則其靜坐之時, 渾然至理, 無所欠闕, 而於接物之際ㆍ對機之間, 天命之性, ?然發見於四端之表, 而仁之爲用, 不必煦煦摩撫, 然後用之矣.

他日冠諸顚, 施於家邦, 立於朝廷, 無處不瞻仰, 退屈藏身, 居陋巷, 守窮谷, 怡然自樂, ?若陽春, ??寬?, 不易其介矣. 噫噓?, 仁之爲量也大矣哉!

 

成化庚子立秋日, 碧山淸隱翁說.]

 

- 김시습 (金時習) <계인설(契仁說)>《매월당집(梅月堂集)》

 

 

〈해설〉

이 글은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52세 때 계인이란 승려에게 써 준 글로 계인이란 호에 의미를 부여한 글이다. 벽산청은(碧山淸隱)은 매월당의 다른 호이다.

 

매월당은 사욕이 없어지면 사람의 본성인 인(仁)이 저절로 발현하니, 마음을 인위적으로 다스리는 참선은 옳지 않은 공부 방법이고, 본성을 잘 보전하면 그 마음이 천지만물의 이치와 하나가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계인(契仁)이란 호의 뜻을 인(仁)에 계합(契合)하라는 것이라 설명하였다. 굳이 마음을 눌러 다스리지 않아도 마음에 사사로운 생각만 없어지면 바로 인에 계합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굳이 산 속에 있지 않고 세상에 나가 일을 하더라도 항상 마음이 안락할 것이라고 하였다.

 

범어인 석가모니를 의역(意譯)하여 능인(能仁)이라 하므로, 계인이란 호가 본래 유가의 인(仁)에 계합하라는 뜻을 가졌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런데 승려의 호를 유가(儒家) 공부에 적용하고 유가의 학설로 그 의미를 부여한 것은 매월당 같은 괴짜가 아니면 하기 어려울 터다.

 

당(唐)나라 때 문장가 한유(韓愈)가 문창(文暢)이란 승려에게 준 <송부도문창사서(送浮屠文暢師序)>에서 유가의 도가 아니라 불교의 설로써 승려에게 글을 써 준 사람들을 비판하고, 유가의 도의 훌륭함을 설파, 은근히 환속할 것을 권한 바 있다. 이후로 유자(儒者)들은 승려에게 시문(詩文)을 써줄 때 은근히 승려들을 낮추어 보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왔다. 그렇지만 매월당처럼 불교를 수행하는 승려에게 유가의 인(仁)을 수행의 요체로 삼아서 설명하고, 환속하여 유가(儒家)의 삶을 살라고 노골적으로 권한 경우는 드물다.

게다가 그 자신도 불교의 학설에 심취하여 《조동오위요해(曹洞五位要解)》ㆍ《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 등 중요한 저술을 남겼으며, 입산과 환속을 거듭하다 만년에는 결국 승려의 신분으로 돌아갔지 않은가.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이념과 지식이 과잉(過剩)하여 넘친다. 흑백의 색안경을 낀 채 불요불급(不要不急)하며 불분명한 지식들을 머리 속에 잔뜩 담고서 비틀비틀 불안한 걸음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보이는 것마다 나누고 쪼개어 나와 적을 구별하고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는 너무 많다. 지식인들은 옛날에 군자와 소인을 나누듯이 나와 상대편을 나누어 서로를 한사코 반대하고 부정한다. 이제 좌니 우니 진보니 보수니 하는 이념의 갈등은 더 이상 우리 사회를 발전시키는 동력이 되지 못한다. 한갓 부질없는 대결이며, 때로는 진실을 호도하는 책략이 될 뿐이다.

 

지금에 와서는 매월당과 같이 불교의 참선과 유교의 인(仁)을 변별할 겨를이 없다. 나와 남의 경계선을 잊고 나와 남을 하나로 느끼게 할 수만 있다면, 그리하여 이 사회의 고질병을 조금이라도 치유할 수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건 불문곡직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2011.08.29.

 

 

 

 

유자(儒者)인가 승려인가,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우암(尤庵)은 매월당의 모습이 7,8촌(寸) 크기의 작은 화폭 안에 다 들어갔지만 매월당의 유상(遺像)이나마 다시 나타난 것은 세상에 도의(道義)를 바로 세우는 데 크게 기여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암이 인정한 것은 여기까지이다. 우암의 지적대로, 불안정한 천재 매월당이 노년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선택한 안식처는 불교였음을 그 자신이 그린 화상이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공자(孔子)가 전대의 성현에 대해 서열을 매겨 서술한 것이 많지만 오직 단발하고 문신한 태백(泰伯)을 천하의 삼분의 일을 차지하고서도 은(殷)나라를 섬긴 문왕(文王)과 아울러 지극한 덕이라 일컬었는데 선유(先儒)는 “그 뜻이 은미하다.” 하였다.

 

우리 동방의 습속은 옛것을 좋아하여 옛 성현의 유상(遺像)을 소장하고 있는 이들은 많다. 그런데 지금 연지(延之)는 유독 매월당(梅月堂)의 진영을 모사하고 장차 공이 자주 가는 춘천(春川)의 산골에 집을 짓고 안치하려 한다.

내가 그 유상을 자세히 보았더니 수염은 비록 있었으나 관과 옷은 승려들이 착용하는 것이었다. 내가 예전에 율곡선생(栗谷先生)이 어명을 받들어 지은 매월당의 전(傳)을 살펴보았는데, 매월당은 젊어서는 유생이었고, 중간에 승려가 되었고 만년에는 머리를 길러 유가(儒家)로 돌아왔다가 임종할 때에는 다시 두타(頭陀)의 형상을 했다고 되어 있었다. 세 번 그 형상을 바꾼 셈인데 유독 이 승려의 형상을 영정으로 남기고 스스로 찬(贊)을 썼으니, 여기에는 무슨 뜻이 있지 않을까.

 

매월당이 출가하여 방랑했던 것은 기실 세상에서 몸을 숨기고자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백세(百世)의 뒤에도 이 작은 화폭에서 그 기상과 정신을 보는 사람은 이 화상(畵像)이 바로 매월당임을 알아볼 것이다.

 

올 여름에 성공(成公) 삼문(三問)의 신주(神主)가 뜻밖에도 인왕산 자락 아래에서 나왔기에 경향(京鄕)의 사대부들이 홍주(洪州) 땅 노은사(魯恩祠)에 봉안하였으니, 후세의 군자 중 공자의 말씀처럼 이 두 분을 아울러 일컬을 이가 있을까. 찾아오는 이 없어 쓸쓸해지지나 않을까.

 

연지는 이미 그의 조부 석실선생(石室先生)을 위해 도연명(陶淵明)의 취석(醉石)ㆍ고송(孤松)ㆍ오류(五柳) 등의 이름을 도산(陶山)에 새겼고 다시 이 일을 하였으니, 그의 감회가 깊었던 것이리라.

 

아아! 매월당이 비록 살아계신다 하더라도 7척의 몸에 불과할 터인데 지금은 7,8촌(寸) 크기의 화폭 안에 다 들어갔다. 그런데도 논자(論者)들은 매월당이 세상에 다시 나타나느냐 감춰지고 마느냐가 세도(世道)에 관계된다고 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임자년 11월 모일에 은진(恩津) 송시열(宋時烈)은 발문을 쓴다."

 

 

[孔子序列先世聖賢多矣, 而惟以斷髮文身之泰伯, ?稱至德於三分天下以服事殷之文王, 先儒以爲其指微矣.

 

東俗好古, 其藏古聖賢遺像者亦多矣. 而今延之獨摹梅月公之眞, 將結茅於公所遊春川之山谷而掛置之.

余竊諦審之, 其?鬚雖在, 而冠服則正緇流所著也. 余嘗按栗谷先生奉敎所撰公傳, 公少爲儒生, 中爲緇流, 晩嘗長髮歸正, 臨終時更爲頭陀像.

蓋三變其形矣, 獨乃留此緇像而自贊焉者, 豈亦有意存乎其間耶!

 

蓋公出家放迹, 實欲藏晦其身. 然百世之下, 見其氣象精神於片幅之上者, 猶知其爲梅月公矣.

 

今年夏, 成公三問神主忽出於仁王山斷麓下, 京外士夫奉安於洪州地魯恩洞, 後之君子其有?稱二公如孔聖之言者耶? 其不落莫否耶?

 

延之旣爲其大王考石室先生刻置淵明醉石?孤松?五柳等名號於陶山, 復繼以此擧, 其所感者深矣.

 

嗚呼! 雖使公生存, 不過七尺之軀矣, 今乃輸在七八寸矮絹, 而論者謂其顯晦之所關在於世道者何也?

 

壬子十一月日, 恩津宋時烈跋.]

 

- 송시열 (宋時烈) <매월당화상발(梅月堂?像跋)>《매월당집(梅月堂集)》

 

 

 

〈해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화상에 대해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쓴 발문인데, 매월당 자신이 직접 그린 자화상을 모사한 그림을 보고 쓴 것이다.

 

매월당은 절의(節義)를 지킨 유자(儒者)와 불교의 고승, 두 가지 모습으로 역사에 남아 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왕명을 받고 지은 <김시습전(金時習傳)>에서 ‘심유적불(心儒跡佛)’로 매월당의 정체를 규정한 바 있다. 그의 사상의 본령은 유교이고 승려 생활은 살아가는 방편이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암은 매월당이 스스로 그린 자기 화상의 마지막 모습이 승려의 복장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연지(延之)는 조선시대 문신이요 학자인 김수증(金壽增 1634~1701)의 자이다. 그는 호가 곡운(谷雲)이고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손자이다. 위 석실선생은 바로 청음을 가리킨다.

 

김수증은 1670년, 강원도 화천 용담리에 농수정사(籠水精舍)를 짓고 은거하면서 주자(朱子)의 행적을 모방, 자신이 사는 지역을 곡운(谷雲)이라 명명하고 화가 조세걸(曺世傑 1635~1705)을 시켜 실경산수화로 <곡운구곡도>를 그리게 하였다. 따라서 매월당 화상도 김수증이 조세걸을 시켜서 모사했을 가능성이 크다.

 

태백(泰伯)은 주(周)나라 태왕(太王)의 맏아들이다. 태왕에게 아들이 셋 있었는데 태백, 중옹(仲雍), 계력(季歷)이었다. 태왕이 은(殷)나라를 정벌할 생각이 있었는데 태백이 그 뜻을 따르지 않았다. 막내 계력은 창(昌)이라는 훌륭한 아들을 두었기에 태왕은 왕위를 계력에게 물려주어 창에게 전해지게 하려 하였다.

태백은 부친의 뜻을 알고 아우 중옹과 함께 나라를 떠나 남쪽 오랑캐의 땅인 형만(荊蠻)에 가서 단발문신(斷髮文身)하여 스스로 후사(後嗣)가 될 수 없음을 보였다. 창이 훗날 문왕(文王)이 된다. 조선의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전하는 과정과도 비슷하다.

 

“그 뜻이 은미하다.”고 한 선유(先儒)는 주자(朱子)의 집주(集註)에 나오는 범씨(范氏), 즉 범준(范浚)을 가리킨다. 《논어(論語)》 <태백(泰伯)>에서 공자는 태백과 문왕 두 사람을 두고 각각 “지극한 덕이라 이를 만하다.” 하였는데, 태백과 문왕 모두 임금을 배반하지 않고 천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자가 신하의 도리를 지키지 않는 자를 경계하는 뜻을 은미하게 담아서 말했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 우암은 매월당이 단종(端宗)에 대해 절의를 지켜 불사이군(不事二君)한 것을 높이기 위해 서두에 이 말을 인용하였다. 그리고 사육신(死六臣)의 성삼문(成三問) 신주와 생육신(生六臣)의 매월당 화상을 함께 말함으로써 두 사람의 절의를 아울러 치켜세웠다.

 

매월당의 유교에 대한 인식은 매우 긍정적인데 불교에 대해서는 긍정과 부정, 비판과 수용의 상이한 양상을 보인다. 그래서 얼핏 보아서는 율곡의 말처럼 그의 사상 성향이 유교 쪽으로 더 쏠려 있는 것으로 판단하기 쉽다. 그런데 정작 매월당 스스로 그린 자신의 만년의 모습은 승려의 복장에 목에는 염주를 두르고 있다.

 

탁월한 식견을 가진 문학가요 사상가였던 그로서는 천부의 재능을 자랑할 수 있는 문학을 버릴 수도 없었을 것이고 유자(儒者) 본연의 임무인 현실 참여를 포기할 수도 없었을 것이며, 예로부터 유자들이 통상 그러했듯이 불교에 심취했더라도 그 자신은 역사에서 유자로 평가되고 싶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실제로 때로는 불교에 마음이 끌리기도 하고 때로는 정주(程朱)의 학설에도 귀가 솔깃했을 것이다. 끊임없는 지적 호기심, 어느 한 곳에 안정하지 못하는 충동성 등 천재가 갖기 쉬운 속성을 우리는 매월당에게서 볼 수 있다.

 

매월당은 유교와 불교를 넘나들며 어느 한 쪽에 완전히 정착하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 지금 매월당의 문집을 보면, 청산과 세속을 넘나드는 삶의 자취, 그리고 그에 상응하듯 불도(佛道)에 심취하다가 문득 스스로를 명교(名敎)의 죄인으로 자책해 놓고는 그리고 다시 입산하는 등의 불안정한 심적 변화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경주(慶州)를 지나다가 오도(悟道)했다는 기록을 스스로 남겼지만 그는 결코 깨달음을 이룬 각자(覺者)로 자처하지도 않고 천재가 갖기 쉬운 현실과 자아와의 괴리, 그로 인해 생겨난 모순과 갈등을 농세(弄世)의 자조(自嘲)로 거침없이 표출하기도 한다. 이러한 그의 상반되고 모순되게 보이는 모습들은 바로 그의 내적 변화의 적나라한 표출이었다.

 

매월당은 자신이 그린 화상(畵像)에 스스로 적기를 “네 모습은 지극히 하찮고 네 말은 지극히 어리석으니, 의당 너를 산골짜기에 두어야 하리.[爾形至? 爾言大? 宜爾置之 丘壑之中]” 하였으니, 세상을 아주 떠나 청산에 머물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세상에 맞추어 살아갈 수도 없는 자신을 희화한 자조의 독백일 터다.

 

 

글쓴이 : 이상하
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 교무처장

주요저서
- 한주 이진상의 주리론 연구, 경인문화사
- 유학적 사유와 한국문화, 다운샘(2007) 등

주요역서
- 읍취헌유고, 월사집, 용재집,아계유고, 석주집 등 

 

 

/ 한국고전번역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