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병통과 치유]
1. 갈등선(葛藤禪)
참구 않고 지식으로만 풀이하는 것
갈등 화해시키고 하나 만드는 게 선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언제나 갈등이 있게 마련이다. 사회적으로는 지역간, 계층간, 빈부간의 갈등이 있고, 개인적으로는 직장이나 가정에서의 갈등, 그리고 자신의 직업이나 하는 일에 대한 갈등 등, 갈등의 갈래는 매우 많다.
‘갈등(葛藤)’이란 칡[葛]과 등나무[藤]가 서로 얽히는 것과 같이, 개인이나 집단 사이에 목표나 이해관계가 달라 서로 반목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일이 복잡하게 뒤얽혀서 판단하기 어려운 상태, 혹은 의견 충돌로 인하여 불화음이 전개되고 있는 상태다. 심리학적으로는 한꺼번에 해결할 수 없는 2개 이상의 욕구가 발생한 상태, 혹은 방향이 전혀 다른 두 개 이상의 욕구가 동시에 발생하여 몹시 고민하는 상태, 그리하여 현재의 위치에서 마음이 이동하기 곤란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선(禪)에서 ‘갈등(葛藤)’이란 언어문자를 가리킨다. ‘갈등선(葛藤禪)’이란 이리저리 언어문자로 선을 풀이,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칡이나 등나무 덩굴이 뒤엉켜서 있듯이, 난해한 수사(修辭)를 동원하여 언어적으로 장황하게 풀이하는 것을 뜻한다. 즉 실제적인 참구는 하지 않고 지식과 학식을 동원하여 고칙(古則)이나 공안(公案), 화두를 풀이하는 것, 또는 그런 선승이나 납자를 깎아 내리는 말이다. 그래서 어구를 가지고 노는 것(완롱/玩弄)을 ‘한갈등(閒葛藤)’이라고 한다. 부질없이 한가롭게 말장난이나 하고 있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는 ‘문자선’이라고 한다.
선은 지식이 아니다. 선은 직접적인 수행과 실제적인 체험을 통하여 존재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다. 공(空)의 진리, 본래면목을 발견, 체득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와는 반대로 실참(實參) 없이 언어적·문자적으로 고칙이나 공안을 풀이, 해석하는 것으로 선을 삼는다면 그것은 스스로 언어의 함정에 빠져버린 것이다. 여기서 ‘실참(진실한 참구)’이란 오로지 앉아 있는 것[坐禪]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실참이란 마음을 화두나 공안에 올인(All In)하는 것을 말한다. 정려(精慮, 고요히 생각함, 명상), 선정(禪定), 혹은 하나의 주제를 깊이 생각하는 것[思惟修]이다.
‘임제록’의 ‘상당 1’ 끝부분을 읽어보도록 하겠다.
“또 임제스님이 말했다. 오늘의 법연(法筵, 설법)은 일대사(一大事, 일생일대의 중대사, 곧 깨닫는 일)를 밝히기 위한 것이오. 더 질문할 사람이 있소? 있다면 속히 나와서 질문하시오. 그러나 그대들이 조금이라도 입을 열면 그 즉시 진리와는 멀어지게 될 것이오. 어째서 그러한가? 보지 못했소?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법은 언어문자를 떠나 있다’라고 하셨소. 그 이유는 법은 인(因)에도 연(緣)에도 속해 있지 않기 때문이오. 그대들이 철저하게 내 말을 따르지(믿지) 않기 때문에, 오늘 이리저리 언어문자[葛藤]로 떠들고 있는 것이오. 이것은 왕상시(王常侍)와 여러 관원들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오. 도리어 여러분들의 불성을 더 어둡게 할까 걱정이 되오. 법문 그만하고 물러가느니만 못할 것 같소.”
다음은 황벽의 ‘전심법요’이다. 배휴가 물었다. “어떤 것이 세간의 진리입니까?”
황벽화상이 대답했다. “언어문자로 설명해서 무엇 하려는가? 본래 청정한데 어찌 언설을 빌려서 묻고 답하겠는가?"
만법은 일(一), 일여(一如)이다.
일여란 곧 ‘여여(如如),’ ‘진여’로서 진리와 합일된 상태이다. 둘이 아닌 하나(一), 그것을 유마거사는 ‘불이(不二, 하나)’라고 했다.
둘은 이원론이고 이원(二元)은 갈등이고 갈등은 공이 아닌 불공(不空)이다.
갈등은 이물질이 들어가서 청정성을 상실한 상태다. 그 상태가 번뇌 망상이고, 그것을 보유하고 있는 존재가 바로 오늘의 우리, 중생이다.
현실과 이상(理想) 모두를 갈등상태로부터 화해시켜서 하나로 만들어야 한다. 하나가 되면 속이 후련해진다.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함구는 하나지만 개구(開口)는 입이 둘이다. 언어문자(갈등)의 방해공작으로 인하여 선의 본질과 갈등상태로부터 다시 합일시켜서 부처와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2. 노파선(老婆禪)
노파처럼 지나칠 정도로 세세하게 지도
오히려 동량이 될 재목 망치는 결과 초래
‘노파선(老婆禪)’이란 노파심(心) 즉 간절하고 자상한 마음으로 선을 지도하는 것을 말한다. 노파(할머니)의 마음은 아주 간절하고 자상하다. 노파의 눈에 비춰진 세상은 온통 걱정덩어리로 보인다. 하나 같이 물가에서 놀고 있는 어린애와 같아 보인다. 남의 일도 내 일 이상으로 생각한다. 고구 정녕한 마음, 그것을 노파심절(老婆心切)이라고 한다.
선어록에는 노파선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그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할머니가 손자를 생각하듯 아주 친절하고 자상하게 지도해 주는 것으로서, 이는 원래 의미 그대로 긍정적인 뜻이다. 다른 하나는 선의 핵심이나 고칙, 공안, 화두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너무 자세하게 알려 주는 것, 즉 너무 지나치게 많이 알려 준 결과 수행자로 하여금 실참(實參)할 필요가 없게 만들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이는 부정적인 뜻이다.
이 두 가지 의미 가운데 선어록에서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는 경우가 많다. 즉 좋은 의미로 쓰일 때는 친절과 자상함을 뜻하지만, 반대로 비판적인 의미로 쓰일 때는 ‘노파처럼 지나칠 정도로 너무 많이 세세하게 알려주어서 오히려 동량(棟梁)이 될 재목을 망쳐버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는 의미로 쓰인다.
부모가 자식을 기를 때는 마음은 그렇지 않지만 겉으로는 조금은 엄격하고 냉정해야 한다. “매를 아끼면 자식을 망친다”는 영국의 속담처럼 잘못을 해도 지적하지 않고, 자식이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주다보면 자식을 망치게 된다. 초등학교를 졸업해도 숫가락질도 못하게 된다.
선승이 수행자를 교육시키는 방법도 그와 다르지 않다. 수행자로 하여금 스스로 공안이나 화두를 참구하여 깨달음을 얻도록 해야 하는데, 즉 화두를 참구하는 방법만 알려주면 되는데, 그만 노파심이 간절한 나머지 직접 실참(實參)을 통하여 알아야 할 것까지 다 알려 주어 버린 것이다. 그 결과 제자는 애써 참구할 필요가 없어진다. 불로소득 무임승차로서 아무런 감동이나 느낌, 마음으로 얻은 바가 없다.
노파심이 간절하여 매우 친절하고 자상하게 알려 주었지만, 결과는 역효과가 난 것이다. 수행자 지도를 잘못한 것인데, 노파선이란 이런 선승을 두고 하는 말이다.
다음은 이와 관련된 두 가지 공안(선문답)을 보도록 하겠다. 먼저 ‘무문관’ 제23칙 ‘불사선악(不思善惡)’ 공안 끝부분에 나오는 무문혜개(無門慧開, 1183~ 1260)의 평이다.
“무문이 말했다. 육조는 이 일에 있어서, 매우 성급하게 말해 준 것이다. 노파심이 간절했다고는 할 수 있으나 그것은 비유한다면 금방 따온 여지(支, 과일 이름)라고 하는 과일을 직접 껍질까지 벗겨 입에 넣어준 격이나 다름없다. 제자로서는 씹을 필요도 없이 목구멍으로 꿀꺽 넘겨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無門曰. 六祖可謂, 是事出急家. 老婆心切. 譬如 新支 剝了殼去了核. 送在爾口裏. 只要爾嚥一嚥).”
노파심절로서 너무 자상하게 다 알려 준 결과, 수행자로 하여금 직접 참구할 필요가 없도록 만들어 버렸다고 평하고 있다. 제자에게 과일을 따 준 것도 지나친데, 게다가 손수 과일의 껍질을 까서 입에 넣어주기까지 하였으니 훌륭한 종장(宗匠)은 못 된다는 것이다.
다음은 ‘임제록’‘보화장’이다. “보화스님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하양스님은 갓 시집 온 새색시이고, 목탑스님은 노파선(老婆禪)이구만. 임제는 어린 사내 아이 같지만 탁월한 안목을 갖추고 있네
(普化以手指云, 河陽新婦子. 木塔老婆禪. 臨濟小兒. 却具一隻眼).”
보화스님은 하양스님을 평하여 선을 모르는 애숭이이고, 목탑스님은 너무 고주알 미주알 말해주는 노파선승이라고 조롱한다. 이상 두 용례에서 본다면 노파선은 주로 비꼬는 말, 조롱하는 말, 비하하는 말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암증선(暗/闇證禪)
검증되지 않은 알음알이를 깨달았다 착각
무식하면 용감하듯 우매하면 큰 소리만 쳐
오늘날 우리나라 참선 수행자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선에 대해 아무런 지식도 없이 처음부터 무작정 앉아 있기만 한다는 것이다.
화두를 참구하는 구체적인 방법도 모른 채 앉아 있는 것으로 선을 삼고 있고, 용맹정진, 장좌불와 등 무지한 방법을 수행의 척도로 삼고 있다. 적지 않은 수행자가 선병(禪病)에 걸려 무의미한 인생을 보내고 있다.
참선 수행에서 가장 범하기 쉬운 오류는 깨달음에 대한 환상과 착각이다. 무엇이 정도(正道)이고 정각(正覺, 바른 깨달음)인지 모르는 상태로 수행한다. 신체적 정신적 신비주의나 환영(幻影), 환시(幻視) 등을 깨달음으로 여긴다. 그리하여 약간 정신적 신체적 특이 현상이나 특별한 증세가 나타나면 곧 깨달았거나 또는 깨달은 것으로 오판한다.
객관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수행 방법과 깨달음을 가지고 깨달았다고 자칭하는 것, 혹은 그런 수행자를 암선(暗/闇禪)ㆍ암증선(暗/闇證禪)ㆍ암증선사(禪師)ㆍ암증비구(暗證比丘)ㆍ암증법사(暗證法師)ㆍ암선자(暗禪子)라고 한다. ‘암(暗/闇)’은 어두운 것, 우매한 것, 무지한 것을 말하고, ‘증(證)’은 증득(證得)의 준말로 깨달은 것을 뜻한다. 즉 정각(正覺)이 아닌 엉뚱한 것을 깨달았다고 큰 소리 치는 것을 말한다. 다른 말로는 맹선(盲禪, 눈이 먼 것), 무지선(無知禪)이라고 한다.
‘암증선’이라는 말을 처음 쓴 것은 천태지의(538-597)이다. 그는 ‘법화경’ 주석서인 ‘마하지관’ 5권에서, 무지한 채 그냥 앉아 있기만 하는 어리석은 선 수행자를 일컬어 ‘암증선사(暗證禪師)’라고 했고, 실천적인 수행은 하지 않고 경전을 외우기만 하는 교학승을 ‘문자법사(文字法師)’라고 규정했다.
당시(남북조 시기) 불교계에서 이런 시사적(時事的)인 성격의 신조어를 썼다는 것은 이미 이때부터 선종ㆍ교종 할 것 없이 어리석은 수행자들이 많았음을 말해 준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신조어가 생길 수 없다.
그러므로 언어의 발생과 변천과정을 잘 고찰해 보면 그 시대의 정치ㆍ종교ㆍ문화적 상황을 알 수 있다.
천태지의 이후 선종에서는 자파(自派)가 아닌 화엄ㆍ천태ㆍ법상(유식) 등 교학승들을 지엽적인 것을 탐구하는 문자법사(文字法師)라고 조롱했고, 이에 교종 쪽에서는 선승들을 일컬어 교리를 모르는 암증선사(暗證禪師)ㆍ암증맹오(暗證盲悟, 교리에 어두운 눈먼 깨달음)라고 조롱했다. 천태지의의 생몰연대(538-597)를 볼 때, 선(禪)과 교(敎)의 대립은 보리달마(346-495, ?-528)가 입적한 후 50여 년 정도 있다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암증선’이라는 말은 선종 내부에서도 상대방을 조롱, 비하하는 용어로 많이 사용되었다. 예컨대 선지(禪旨)에 어두운 자, 정법에 대한 안목(정법안)이 없는 자, 앉아 있을 뿐 교리나 사상에 대해서는 무지한 자, 언어문자에 집착해 있는 자, 교만한 자 등을 비난할 때도 이 말이 사용되었다.
독선적인 깨달음, 또는 그와 같은 깨달음에 안주하는 무리를 ‘암효득(暗曉得)’이라고 부른다. ‘암암리(暗暗裡)에 안 것’ 등의 뜻으로, 암증선과 같은 말이다. ‘벽암록’ 38칙의 본칙과 착어를 읽어보도록 하겠다.
<본칙> “풍혈선사가 상당하여 말했다. 조사의 심인(心印)은 그 모양이 마치 철우(鐵牛, 무쇠소)의 작용과 같아서 배척하면 심인이 나타나고 잡으려고 하면 심인이 부서진다. 그렇다면 배척하지도 잡지도 않는다면 이것이 심인인가 심인이 아닌가? 그때 한 노파장로가 나와서 말했다. 모갑(某甲, 제가)이 철우의 작용을 갖고 있습니다”
원오극근(1063-1135)은 착어에서 “낚시로 사기꾼(暗曉得) 하나를 낚았네. 매우 기특한 놈이로다(釣得一箇暗曉得, 不妨奇特)”라고 혹평했다. ‘사기꾼’ ‘가자’ ‘엉터리’라는 뜻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처럼, 어리석고 우매하면 큰 소리 칠 수밖에 없다. 진품을 본 적 없으므로 짝퉁을 진품이라고 할 수밖에 없고, 개뼉다구를 가지고 소뼉다구라고 할 수밖에 없다.
4. 야호선(野狐禪)-上
깨달은 듯한 태도로 남 속이는 사이비선
진실한 참구 없는 짝퉁 선승 경멸 때 사용
‘여우’, ‘들 여우’를 야호(野狐)라고 한다.
여우는 예부터 교활하고 의심이 많은 동물로 인식되어 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갖가지 유언비어를 만들어 여우를 미워했다.
간사하거나 약아빠진 사람을 두고 ‘여우같은 인간’, ‘백여시’라 했고, 교활한 여자를 두고 ‘여우같은 년’ 더 교활한 여자는 ‘불여우’라고 했다.
그런데 요즘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는 종종 자신을 ‘여우 00’ 혹은 ‘00여우’라고 애칭하기도 한다. 자진해서 여우가 된 것인데, ‘애교 많은 여자’, ‘센스가 듬뿍 있는 여자’라는 뉘앙스일 것이다.
여우(野狐)는 재주 많은 원숭이와 함께 선어록에 자주 출현한다.
맡은 역할은 주로 분별심과 알음알이, 잔꾀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실제 여우는 매우 꾀가 많아서 사람들이 녀석을 잡으려고 화약이나 올무를 놔두면 조심스럽게 물어서 절벽 밑으로 던져 버린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영리한 여우가 오래되면 요괴로 둔갑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야호와 합성된 선어로는 ‘야호선(野狐禪)’ 외에도 ‘야호정(野狐精)’, ‘야호정매(野狐精魅)’, ‘야호견해(野狐見解)’, ‘야호연(野狐涎)’ 등이 있다.
선어록에서는 여우를 야호(野狐)라고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호리(狐狸)라고 한다.
‘야호선’이란 정도(正道)가 아닌 삿된 선(禪), 즉 엉터리 선(禪)을 뜻한다. 진실한 수행은 하지 않은 채 깨달은 듯한 태도로 남을 속이는 것, 즉 사이비선(似而非禪)을 이른다.
모양새는 진짜와 별 다름없어 보이는데 자세히 관찰해 보면 진짜를 모방한 짝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야호정(野狐精), 야호정매(野狐精魅)는 ‘여우 혼’ ‘여우 귀신’, ‘여우 도깨비’ 등으로, 주로 진실한 참구가 없는 엉터리 선승을 경멸할 때 쓰는 말이다.
야호견해(野狐見解)는 ‘들 여우의 견해’라는 말로 정견, 정법안이 없는 선승을 뜻한다. 야호연(野狐涎)은 ‘여우의 침(口液)’인데, 엉터리 선승의 잘못된 설법이나 가르침을 가리킨다.
사이비들은 대체로 여우처럼 지능지수가 높아서 남을 잘 속인다. 문장이나 말이 화려하다. 종교 사기꾼일수록 그럴싸하여 보통 사람은 좀처럼 가려내기 어렵다.
그들은 자신이 깨달았다고 하면서 ‘당신의 전생을 안다’느니, 또는 ‘몇 년간 장좌불와 했다’는 등 이상한 말로 상대방을 현혹한다.
주로 도교의 양생술이나 기공, 단전호흡 등을 가지고 사기를 친다. 그리고 ‘마음자리를 봐야 한다’, ‘마음은 불 속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다’는 등 전형적인 법문으로 선지식 행세를 하는데, 이들을 지칭하여 야호선(野狐禪)이라고 한다.
여우가 선어록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백장야호(百丈野狐, 백장과 들 여우) 공안이다.
이 공안에서 야호(여우)는 노인으로 둔갑(변신)했다가 다시 여우로 둔갑하는데, 이것을 본다면 백장야호에 나오는 여우는 꼬리가 아홉 개 달린 구미호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음은 ‘백장광록’과 ‘무문관’ 2칙, ‘선문염송’ 184칙 등에 나오는 백장야호(百丈野狐) 공안이다.
‘일하기 싫으면 밥도 먹지 말라(一日不作 一日不食)’는 명언을 남긴 백장선사(720-814)가 상당(上堂)하여 법문을 할 때마다 어떤 노인이 들어와서 법문을 듣고 나가곤 하였는데, 하루는 법문이 다 끝났는데도 나가지 않고 있는 것을 보고 백장선사가 “거기 서 있는 이는 누구인데 나가지 않고 있소?”라고 물었다.
이에 노인이 “저는 과거 가섭불 때 이 절 주지로 있었는데, 어떤 학인이 ‘대수행인(大修行人, 大悟한 수행자)도 인과에 떨어집니까?’하고 묻기에 ‘불낙인과(不落因果,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라고 대답했다가, 뒤에 5백 생 동안 여우의 몸을 받았습니다. 바라건대 화상께서는 저를 위하여 한마디(一轉語, 깨달을 수 있는 한마디)를 내려 여우의 탈을 벗겨주소서.”라고 하였다.
5. 야호선(野狐禪)-下
꾀 많은 여우처럼 분별심 가지면 깨닫지 못해
임제는 귀신 타령 수행자 여우도깨비라 비난
이에 백장선사가 “불매인과(不昧因果)니라”라고 하자, 즉시 노인은 합장하면서 “저는 이미 깨달아서 여우의 몸을 벗었습니다. 뒷산에 가면 죽은 여우의 시체가 있을 것이오니, 망승(亡僧, 죽은 스님)을 천도하는 법식대로 화장하여 주옵소서.” 이에 백장화상이 유나(維那)를 시켜 노인의 부탁대로 화장을 해 주었다고 한다.
이 공안에서 핵심은 불낙인과(不落因果)와 불매인과(不昧因果)이다. 그 차이점은 ‘낙(落)’ 자와 ‘매(昧)’ 자에 있는데 무슨 차이일까?
불낙인과는 인과응보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로, ‘대수행인(大修行人, 大悟한 수행자)은 인과응보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열심히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도 자기가 지은 선악의 과보는 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지은 죄가 있다면 누구든 그 과보를 받게 되는데, 다만 대수행인은 받아도 흔적 없이 받으므로 받지 않는 것이나 같다는 것이다. 주고받는데 실물이 오고가지 않을 뿐인 것이다.
즉 ‘대수행인도 인과에 떨어집니까?’라는 질문에 노인이 ‘인과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不落因果)’고 대답했는데, 결론적으로 이 말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인과응보설을 부정한 것이 되므로, 그 과보로 오백생 동안 여우의 몸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불매인과(不昧因果)는 인과응보를 분명하게 인식(不昧)하고 있다는 뜻인데, 인과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으므로 그 한마디에 여우의 몸을 벗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정견(正見)은 불매인과(不昧因果)이고, 사견(邪見)은 불낙인과(不落因果)이다. 노인으로 둔갑한 여우가 정견도 없이 함부로 불낙인과라고 했기 때문에 야호선으로 매도된 것이다.
사실 이 백장야호 공안은 역사적인 사실은 아니다. 픽션으로서 백장선사가 인과응보설을 믿지 않고 함부로 행동하는 수행자들에게 교육적인 차원에서 경종을 울려 주기 위하여 만든 의도적인 것이다. 오백생 동안 여우의 몸을 받기 싫거든 언행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호리호골(狐狸狐?)이라는 말이 있다. 여우는 의심이 매우 많아서 자기가 물건(고기 등 먹을 것)을 묻고 나서 의심이 나서 또 자기가 파본다는 것인데, 의심이 많으면 일을 성공시키지 못한다는 말로 쓰인다.
의심이 많으면 결정을 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성공하지 못한다. 그리고 선의 정신에 입각하여 말한다면 부질없이 불낙(不落)과 불매(不昧) 두 글자를 놓고 분별심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꾀 많고 의심 많은 여우처럼 분별심을 가지면 깨닫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임제선사는 ‘귀신을 보았다느니’, 또는 ‘유령을 보았다’고 하는 수행자 무리를 지칭하여 야호정매(野狐精魅, 여우 도깨비)라고 비난한다.
“여러분! 중요한 것은 평상심이 곧 선이오. 이것저것 조작하고 흉내 내지 마시오. 요즘 옳고 그른 것도 구별하지 못하는 바보 같은 승려들이 있소. 그들은 귀신을 보았다느니, 유령을 보았다느니 헛소리하고 있소. 또 동쪽을 가리키고 서쪽을 가리키면서 ‘맑은 날이다. 흐린 날이다’라고 떠들고 있소. 이와 같은 무리들은 진정(眞正)한 견해가 없는 자들로서 모두 시주의 빚을 지고 있소. 반드시 염라대왕 앞에서 뜨거운 쇳덩이를 삼키게 될 것이오. 양가집 자제들이 야호정매(野狐精魅, 엉터리 선승)에게 홀리면 인생을 버리게 되오. 눈먼 자들이여, 그동안 공짜로 먹은 밥값을 지불해야 할 날이 있게 될 것이오.(‘임제록’ 시중 10)”
임제선사의 법어와 같이 정법안을 갖추고자 하는 선승이 귀신이나 유령을 보았다고 한다면 그는 이미 중병에 걸린 사람이다.
여우 도깨비에게 홀린 것이므로 선원에서는 고칠 수가 없다. 좌선한다고 앉아 있어봐야 소용이 없으므로 양복을 입혀서 미아리고개로 데려다 주어야 한다. 이런 수행자들은 참으로 불쌍하고 딱하기 그지없다. 잘못된 줄도 모르고 그것도 수행이라고 일평생 허송세월할 것이 아닌가? 진정 견해를 갖추지 못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윤창화 민족사 대표는
해인사 강원과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수원 등에서 수학했다. ‘왕초보 선박사 되다’ ‘무자화두 십종병에 대한 고찰’ ‘한암의 자전적 구도기 일생패궐’ 등 많은 저술과 논문이 있다.
/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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