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나복두선(蘿蔔頭禪)
철저하지 못한 선으로 인가 남발하는 선승
깨달음을 팔아먹는 머리좋은 장사꾼 일 뿐
나복두선은 매우 희귀한 선(禪)이다. 아마 처음 들어본 독자들도 많을 것이다. 희귀한 선이 많지만 나복두선은 그 가운데서도 더 희귀하다.
‘나복(蘿蔔)’ 또는 ‘나복두(蘿蔔頭)’란 밭에서 자라는 ‘무’ ‘큰 무’를 가리킨다. ‘무’의 한자표기이다.
무는 첫째가 색이 희고 미끈해야 한다. 또 무는 물이 많아야 하는데 칼로 잘랐을 때 물기가 뭉실 솟아올라야 한다.
그러지 않는 무는 좋은 무가 아니고 바람이 들어간 무는 아무데도 쓸데가 없다. 무 가운데서도 조선무는 전라도 항아리처럼 짧고 통통하고 왜(倭)무는 긴 데 주로 단무지(다꾸앙, 닥꽝)을 담글 때 쓴다.
무를 채로 썰어서 나물로 만든 것을 나복채(蘿蔔菜)라고 하고, 흰쌀에 무를 썰어 넣어 쑨 죽을 나복죽(蘿蔔粥)이라고 한다.
무(蘿蔔)의 강도는 배추보다는 단단하지만 나무나 돌에 비하면 단단하지 못하다. 채소류로서 바닥에 떨어뜨리거나 던지면 마치 소형폭탄이 떨어진 것처럼 박살난 무 조각이 낭자(狼藉)를 이룬다.
‘나복두선’이란 무와 같이 야물지 못한 선(禪), 단단하지 못한 선, 철저하지 못한 선을 나복두선이라고 한다. 한편으로는 인가(認可)를 남발하는 선승, 수행자 지도를 잘못하는 선승도 나복두선이라고 한다.
‘벽암록’ 98칙 천평양착(天平兩錯, 천평의 두 번 실수) 공안에는 나복두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내용인즉슨 천평(天平)이라는 스님이 철저하지 못한 엉터리 선(禪), 야물지 못한 나복두선을 수행한 후 깨달았다는 자만심에 도취하여 가는 곳마다 함부로 지껄인다는 것이다.
“천평은 일찍이 진산(進山) 주(主) 선사를 참방한 이래, 제방(諸方)의 여러 선원을 다니면서 (엉터리 禪인) 나복두선을 배웠다. 그리하여 깨달았다는 생각이 뱃속(머릿속)에 가득 차서 가는 곳마다 함부로 큰소리 치고 있다.
‘나는 선을 알고 도를 안다’고.”
(天平, 曾參進山主來, 他到諸方, 參得些蘿蔔頭禪, 在皮裏. 到處便輕開大口道,
我會禪會道).
나복두로 만든 도장, 인장(印章)을 ‘나복인(蘿蔔印)’이라고 한다. 그리고 같은 뜻을 갖고 있는 ‘동과인자(冬瓜印子)’라는 말이 있다. 동과(冬瓜)란 박과에 속하는 한해살이 덩굴성 식물로서 여름에 노란 꽃이 피며 가을에는 호박과 같은 것이 달린다. 그것으로 만든 인장(印章), 도장이라는 뜻인데, 호박으로 만든 도장(冬瓜印子)과 무로 만든 도장(蘿蔔印)이 얼마나 단단하겠는가? 찍으려고 누르면 으스러질 것이다.
원오극근은 ‘벽암록’ 98칙 평창에서 깨달았다고 큰 소리 치고 있는 천평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조롱하고 있다.
“천평은 여기저기 선원에서 호박도장을 가지고 인가해 주는 선승으로부터 인가를 받아가지고는
‘나는 이제 불법의 기특한 곳을 알았다. 다른 사람에게는 알려 주지 않으리’라고 마음 먹고 있구나.”
(只管被諸方, 冬瓜印子, 印定了. 便道,
我會佛法奇特, 莫敎人知
‘碧巖錄98評唱’)
간화선의 거장 대혜 선사는 장사인(張舍人)에게 답한 편지(‘서장’ 張舍人 章)에서,
“절대로 동과(冬瓜)로 만든 도장을 가지고 어루만져 주면서 깨달았다고 인가해 주는 엉터리 선승들을 따르지 마십시오(切忌被邪師, 順摩, 將冬瓜印子印定) 이런 자들은 도마죽위(稻麻竹葦, 벼, 삼, 대나무, 갈대)처럼 아주 많습니다. 당신은 총명하고 식견이 있으므로 이런 악독의 해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즉 투철하게 깨닫지 못한 자들이 무나 호박에 새긴 도장을 가지고 깨달았다고 인가해 주는 데 현혹되지 말라는 것이다. 인가 받아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요즘도 동광인자나 나복두인을 가지고 인가도장을 남발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깨달음을 팔아먹는 머리 좋은 장사꾼들이다.
蘿蔔 무. 십자화과의 채소(菜蔬) . 紅蘿蔔 홍나복 : 당근. 蘿蔔菜 나복채 : 무나물.
蘿 쑥 나,쑥 라.1. 쑥 2. 무 3. 여라(선태류에 속하는 이끼) 4. 풀가사리(풀가사릿과의 해조(海藻)) 5. 울타리 6. 소나무겨우살이 7. 담쟁이덩굴(포도과의 낙엽 활엽 덩굴나무)
蘿 여라 라 .여라(女蘿). 소나무겨우살이. 풀에 난 것은 토사(?絲), 나무에 난 것은 송라(松蘿). 지칭개. 엉거시과의 두해살이풀. 아호(莪蒿). 무우. 나복(蘿蔔). 바자울. 울타리. 담쟁이덩굴.
蔔 무 복. 1. 무(십자화과의 채소) 2. 나복(蘿蔔) 3. 치자꽃 / : 무우. 나복(蘿蔔). 치자(梔子)꽃.
12. 사선(邪禪)
달콤한 것이 입맛 당기기에 邪쪽에 몰려
신통·타심통·축지법은 불교아닌 도교
사(邪)는 정(正)과 항상 반대에 있다.
정(正)과 사(邪)의 싸움은 인류가 생긴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공맹(孔孟)은 의(義)를 정(正), 불의를 사(邪)로 규정했고 붓다는 희생제와 번제(燔祭)를 올리는 바라문교도(힌두)들을 어리석다고 하여 사(邪)로 규정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항상 사(邪) 쪽으로 몰린다. 달콤한 것이 입맛에 당기기 때문인데 정의의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어떤 용어에서 ‘사(邪)’자가 들어가면 일단은 색안경을 끼고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때론 타인을 매도하기 위한 야비한 방법으로 ‘사(邪)’자를 쓰는 경우도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맹종은 고래로 치자(癡者)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이다.
‘사선(邪禪)’이란 ‘잘못된 선(禪)’, ‘삿된 수행법’, ‘삿된 선승의 가르침’을 말한다. 선의 정의에 어긋나는 선, 목적과 방법, 방향이 올바르지 못한 선이 사선이다.
사선이라는 말은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용되어 왔지만 본격적으로 썼던 선승은 간화선의 거장 대혜선사(1089∼1163)이다. 그는 같은 시대, 같은 지역(항주, 영파)에서 활동하고 있는 굉지정각의 묵조선을 혹평하여 ‘묵조사선’이라고 비판했는데, 이 문제는 간화선, 대혜선사의 입장에서 비판한 것이므로 놔두고, 여기서는 진정으로 삿된 선은 어떤 것인지 규명해 보고자 한다.
선(禪)의 목적, 참선 수행의 목적은 어리석은 마음을 치유하는 데 있다. 욕망에 오염되어 있는 이 마음을 세탁, 청정하게 하는 데 있고, 고정관념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해탈인이 되자는 데 있다.
교리적으로는 무상·무아·연기·중도·공(空)의 이치를 깨달아서 존재의 실상을 확실하게 파악해 보자는 데 있다(如實知見). 머릿속에 들어 있는 번뇌 망상을 비워버리는 것, 그것이 곧 공(空)이다.
선의 목적이 이와 같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엉뚱한 삿된 것을 가지고 선 수행의 목적, 또는 깨달음으로 착각하고 있는 수행자들이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있지도 않은 신통술 타심통 같은 것, 혹은 장생불사·신선술·기공·축지법 등 도교적인 것을 깨달음으로 착각하고 있는 경우이다.
또 요즘에는 귀신을 본다느니, 전생을 안다느니, 남의 운명이나 미래를 훤히 안다는 등 혹세무민의 통속적인 것을 가지고 사기를 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또 자나 깨나 한결같이 일심으로 화두를 참구해야 한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는 ‘몽중일여(夢中一如)’, ‘오매일여(寤寐一如)’를 오해하여, 실제 꿈속에서도(夢中一如), 깊은 숙면 속(寤寐一如)에서도 화두 참구가 되어야만 깨달은 것, 깨닫게 되는 것이라고 왜곡한다.
이런 것은 사실 육체적 신비주의를 추구하고 있는 도교수행파(道敎修行派)에서나 할 수 있는 말이고, 불교나 선에서 이런 것을 말한다면 그것은 삿된 가르침으로 깨달음의 목적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또 ‘불성=영혼’으로 오해하고 있는 이들도 적지 않고, 환영(幻影)이나 환시(幻視)가 나타나야만 깨닫게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만일 영혼을 곧 불성으로 본다면 불교나 선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결국 영혼의 세계를 깨닫자는 것인데, 영혼의 유무(有無), 영혼의 세계는 어떤 것인지, 그런 것을 알고 싶다면(실제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그것은 차라리 무속인을 찾아가는 것이 더 첩경일 것이다.
그 밖에 주력 수행도 이상한 신비적인 것을 추구한다면 그 역시 삿된 것이다. 선 수행의 목적과는 180도 다르다.
13. 황양목선(黃楊木禪)
오래 앉아 참선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
현재에 안주하면 정신 썩고 타락해 퇴보
황양목(黃楊木)은 나무 이름이다. 회양목과(―楊木科 Buxaceae)에 속하는 관목으로,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회양목’이라고 한다. 한국의 산지에서 많이 자라는데 특히 석회암지대의 산기슭과 산중턱에서 많이 자란다. 키는 작은 것은 50센티, 큰 것은 7m 정도. 상록수라서 정원수로 많이 심는다.
회양목(황양목)은 나무 재질이 매우 단단하고 견고하다. 도장(인장)을 새길 때 많이 사용한다고 해서 일명 ‘도장 나무’라고도 한다. 또 회양목으로 만든 호패를 황양목패(黃楊木牌)라고 하는데, 초시(初試)에 합격한 진사(進士)나 생원(生員)들이 차고 다녔다. 회양목의 용도(조각용도 등)가 매우 다양하여 공물(貢物)로 바치던 황양목계(黃楊木契)도 있었다.
나무 애기는 그만하고, ‘황양목선(黃楊木禪)’이란 근기와 자질이 매우 둔해서 오래 참구(공부)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 이유는 황양목의 장점은 매우 단단한 대신, 단점은 자라는 속도가 아주 더뎌서 1년에 겨우 1촌(一寸, 약 3센티) 정도 자란다. 그런데 윤달이 든 해(閏年)는 도리어 1촌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빗대어 ‘진촌퇴척(進寸退尺, 한 촌 전진하고는 한 자=30센티 퇴보)’이라고 한다. 그래서 한자리에 정체되어 전혀 발전이 없는 사람, 또는 아무리 오래 선방에 앉아 참선을 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켜 황양목선이라고 한다.
운허 스님 편 ‘불교사전’에는 “깨달은 곳에 주저앉아서 활용하는 솜씨가 없는 사람을 꾸짖는 말.” 그리고 ‘선학사전’에는 “수행에 정진하지 않아 퇴보한 선승(禪僧)을 가리킴”이라고 설명되어 있는데, 모두 진취가 없는 선승을 가리킨다.
선어 가운데 ‘백척간두(百尺竿頭) 진일보(進一步)’라는 말이 있다. ‘100척(약 33미터)이나 되는 장대 끝(竿頭)에서 과감하게 한발 더 내 딛으라’는 뜻인데, 깨달음을 성취했다고 해서 그 자리에 안주하면 그 역시 자신을 구속하는 올가미, 집착이 되기 때문이다.
한발 더 내 딛었을 때(進一步) 비로소 진정한 깨달음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해진 법은 없다. 그것을 이름하여 아뇩다라 삼먁삼보리(최고의 깨달음)라고 한다.”는 ‘금강경’의 법문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수행자든 학자든 정권(政權)이든 간에 현 위치에서 안주하면 매너리즘에 빠진다. 특히 정신세계는 더욱 더하여 그 자리에 안주하면 정신이 썩고 타락해 버린다. 썩으면 정화 능력을 잃고 퇴보할 수밖에 없는데,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백척간두 진일보에 대하여 ‘깨달은 이후에는 다시 중생 속으로 내려와서(진일보) 중생을 구제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것은 십우도에서 맨 마지막 그림인 입전수수(入廛垂手, 세속으로 내려와 손을 내 밀라)와 같은 뜻으로, 부처가 되었다면 그 자리에 안주하지 말고 다시 세속으로 들어와서 중생을 제도하라는 것이다. 안주, 집착은 선의 핵심이자 목표인 공(空), 중도, 무집착의 세계를 역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혜선사(1089∼1163)도 황양목선을 조롱했다. ‘대혜어록’ 17권 ‘보설’에, 단칠(斷七)이라는 시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하루는 여러 관원들과 함께 방장실에서 저녁을 먹고 있을 때였는데, 나는 손에 젓가락을 든 것도 잊은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화두삼매). 그때 노화상(대혜)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자는 황양목선을 하여 도리어 쭈그러들었군”이라고 하였다. 즉 밥을 먹을 때는 밥 먹는 일에 열중하라는 것이다.
은나라 탕왕은 매일 같이 세수하는 대야에 이런 문구를 새겼다고 한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날마다 새로워져야 한다는 뜻인데, 날마다 새로워진다는 것은 한자리에 정체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14. 상사선(相似禪)
관념적으로 깨달아서 무늬만 비슷한 선
오늘날 ‘할’ 남발도 여우소리만 만들뿐
가짜가 없는 나라는 없지만 중국만치 짝퉁이 많은 나라도 드물다. 심지어 소고기, 계란 같은 것도 만든다고 하니 그 나머지는 말할 것이 없을 정도다. 몇 년 전부터 중국정부는 가짜와의 전쟁을 선포했다고 한다. 그런데 워낙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대국 기질이 있어서, 혹 그 조차도 짝퉁이 아닌지 의심이 간다. 대체로 진실하지 못한 사람일수록 ‘나는 진실한 사람’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상품도 짝퉁이나 가짜는 대체로 고가품에 집중되어 있다. 싼 물건에는 짝퉁이 별로 없는데 노력과 대비해 보았을 때 경제적 가치가 현저하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무형적인 경우는 종교계에 많이 분포해 있다.
선에도 짝퉁선이 있다. 이를 상사선(相似禪)이라고 한다. ‘상사선’이란 참된 선(禪)이 아닌 가짜 선, 사이비 선, 엉터리 선승을 가리킨다. 진실한 깨달음이 아닌 가짜 깨달음, 지식적 관념적인 깨달음, 또는 무늬만 비슷한 선이 상사선이다. 곧 짝퉁선으로 깨닫지도 못했으면서 깨달은 척하는 경우(사기)와, 또 하나는 자기는 분명히 깨달았다고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기엔 아직은 깨닫지 못한 것(자기도취 혹은 착각), 또는 덜 깨달은 것을 말한다.
상사선의 어원은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상사각(相似覺)에서 비롯되었다. 아직 완전히 대승의 진리를 깨닫지는 못했지만 어느 정도 깨달은 것이 상사각이다. ‘대승기신론’에서는 ‘거친 분별과 집착하는 모습은 떠났기 때문에 상사각이라고 한다(以捨?分別執着相故 名相似覺)’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여기서 ‘거친 분별과 집착하는 모습(?分別執着相)’이란 아직 미세한 것까지는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지만, 큰 것들은 제거된 상태, 혹은 개념적으로는 알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선에서는 ‘대승기신론’의 해석보다 훨씬 더 낮추어 사용하고 있다. 즉 사이비선, 짝퉁으로 보고 있는데, 대혜 선사(1089∼1163)는 ‘서장’에서 고산체 장로에게 답한 편지(答?山逮長老)에 다음과 같이 혹독하게 비판하고 있다.
‘근래 불법(佛法)을 아주 헐값으로 팔고 있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도처에서 한 무더기 한 짐씩 상사선을 배워가지고 팔고 있는데, 잠시라도 종사(宗師)들이 방치해 두면 마침내 주거니 받거니 헛소리를 이어받아서 서로 인가해 주며 후학들을 호도하고 속여서 점점 바른 종지를 사멸시키고 있습니다. 직지인심의 선풍을 쓸어버리고 있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여기서 ‘불법(佛法)을 아주 헐값으로 팔고 있다’는 말은 사이비 선승들이 짝퉁선을 가지고 아무에게나 깨달았다고 인가(認可)를 해 주는 것을 말한다. 깨닫지도 못한 자들이 상사선(相似禪)을 가지고 인가증명서를 남발하여 선의 값어치 없는 물건으로 만들고 있다는 뜻이다.
고봉 원묘의 제자 천목 중봉 화상(1243~1323)은 “만약 깨달은 것도 없이 함부로 자의적으로 선을 말한다면 이것은 모두 업식을 희롱하여 생사의 업을 맺게 되는 것이니, 그는 윤회의 그물로 들어가 고해에서 죄과를 받게 될 것이다.
오늘날 선원에서는 상사선을 공부한 이들이 많은데, 그들은 단지 문장을 줄줄 해설하는 것을 가지고 최고로 삼고 있다. 번뇌 망상이 흘러 마르지 않는데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을 일러 잘못된 앎, 잘못된 깨달음이라고 하나니, 옛 선승들은 이것을 일러 ‘들여우의 침(타액)’이라고 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라서 선을 하는 이들 가운데는 종종 불립문자의 미명 하에, 조사어록도 읽지 않고 자의적으로 선에 대하여 말하는 이들이 많다. 올바른 선지(禪旨)나 지혜, 안목, 정법안장도 없으면서 통속적인 법문과 무용(武勇) 같은 수행담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다. 할(喝)을 남발하여 사자 소리(獅子吼)를 여우 소리로 만들고 있다.
15. 잔자선(?子禪)
空 잘못알아 일없이 세월만 보내는 선승
선승의 밥 값은 본래면목을 제시하는 것
평소 ‘조사선·간화선·묵조선’ 이런 말은 자주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잔자선(?子禪)’이라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금시초문. 필자 역시 최근에 들었다.
‘잔자(?子)’란 풀을 뽑거나 김을 맬 때 사용하는 호미를 가리킨다. 아주 작은 농기구로 그 능력은 삽이나 괭이에 못 미치지만, 흙을 굵어내는 등 섬세한 작업에는 아직 호미를 당할 농기구가 없다.
잔자선(?子禪)이란 호미가 흙을 긁어내고 땅을 파내듯이, 모든 것을 파내고 깎아 내려서 일체를 허무로 보는 선(禪), 즉 일체를 공으로 간주해 버리는 것을 말한다. 일체개공으로 이해하는 것은 좋은데, 공의 의미를 잘못 이해한 결과 허무, 허무주의에 빠져서 전혀 노력, 정진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모든 것은 다 공한 것이야. 다 쓸데없는 것이야’하면서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빈둥 세월만 보내는 선승, 하릴없이 시간만 죽이는 선승을 가리킨다. 철학적인 용어로는 니힐리즘(nihilism), 즉 허무주의가 잔자선이다. 이것을 선불교에서는 ‘낙공(落空, 공에 떨어지다)’ 또는 ‘공망(空亡, 공해서 없다는 생각)’이라고 한다. 모든 것을 공(空)의 논리 속에 수장(收藏), 매몰시켜 버리는 잘못 된 선을 가리킨다.
공(空)의 정의는 ‘나(我)’라고 하는 존재 즉 자기 자신을 공한 것으로 보는 아공(我空)과, 일체 사물, 즉 객관적인 것들도 모두 공으로 보는 법공(法空)이 있다. 이 두 가지를 합한 말이 일체개공인데, 초점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심리적인 현상을 공한 것으로 보라는 것이다. 번뇌 망상과 분별심 등을 실재하는 것으로 보지 말고 공한 것으로 보라는 것이다.
인식하고 있는 이 세계, 인식되고 있는 모든 것들은 모두 마음 작용, 곧 생각(의식)에서 일어난 현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체유심조이며, 착시현상, 또는 아지랑이 현상으로, 자성이 없는(無自性) 공한 것(空)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보았을 때 비로소 집착하는 마음에서 해탈하여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혜 선사는 잔자선에 대해 묘심 거사에게 행한 법문에서 다음과 같이 혹평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죽은 사람처럼 눈을 감고 앉아 있는 것, 그것을 가지고서 항상 묵묵히 비춘다(?照, 진리와 하나가 됨)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또 원숭이(번뇌 망상) 목줄을 단단히 잡고서 그놈이(번뇌 망상) 날뛸까 두려워하고 있는데, 옛 선승들은 이것을 공망(空亡, 허무)에 떨어진 외도이며, 혼(魂)이 흩어지지 않은 죽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살아 있지만 아무 생각이 없는 것).
진실로 마음의 생사(분별심)를 끊고 마음의 때를 씻고 번뇌 망상을 제거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이 원숭이(분별심, 중생심)를 한 방망이로 때려죽여야만 합니다. 만일 오로지 원숭이 목줄을 꽉 붙잡아 마음을 조복시키려고 한다면 이는 집착이 정도를 지나친 것이니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정안(正眼)으로 본다면 이들은 모두 천마외도이고 망량(??, 도깨비 즉 망념)이며 요정(妖精, 망상)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불교의 것들이 아닙니다’ (‘대혜어록’ 22권 示妙心居士)
사실 우리나라에도 의외로 공에 매몰되어 있는 이들이 많다. 공의 진정한 뜻은 번뇌 망상을 비우라는 것인데, 100프로 오해하여 ‘아무것도 없는 공한 것(空亡, 허무주의)인데, 뭐 할 것(노력 등을 말함)이 있느냐? 다 부질 없는 짓’이라고 하면서, 빈둥빈둥 밥이나 축내면서 허송세월하는 이들이 많다.
불제자로서 사명감이나 역사의식은 찾아볼 수 없다. 날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왔다갔다 놀기만 하는데, 밥값은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선승의 밥값은 본래면목을 제시하는 것이다.
윤창화 민족사 대표는
해인사 강원과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수원 등에서 수학했다. ‘왕초보 선박사 되다’ ‘무자화두 십종병에 대한 고찰’ ‘한암의 자전적 구도기 일생패궐’ 등 많은 저술과 논문이 있다.
/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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