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광선(狂禪)
경전·계율 무시 마구잡이 행동 일삼는 납자
공부도 않는 자들의 경허 스님 흉내는 안돼
무엇을 해석할 때는 반드시 언어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여러 가지 용어 가운데 ‘왜 하필이면 그 말을 썼는지 그 의미와 의도, 그리고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관찰해야 한다. 우리의 생각이나 인식, 사상이나 철학은 언어문자를 통해서 표출된다. 그러므로 언어문자를 제쳐놓고 해석, 풀이한다는 것은 자의적인 해석에 불과하다.
광선(狂禪)이란 ‘미친 선’이라는 뜻이다. ‘광선’이라는 두 자(字)에서 주어는 ‘미칠 광(狂)’이다. 미쳤다는 것은 정상에서 이탈한 정신 상태, 정신착란 혹은 그런 상태를 말한다. 이에 대해 중국 남조(南朝) 제나라의 역사를 적은 책인 ‘남제서(南齊書)’에는 ‘태만교자 위지광(怠慢驕恣 謂之狂)’이라고 말하고 있다.
‘태만하고 교만, 방자한 것을 광이라 한다’는 것인데, 매우 옳은 정의이다.
광선 혹은 광선자(狂禪者)는 ‘비정상적인 언행을 하는 선승’ ‘광대 같은 미치광이 납자’를 가리킨다.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나 경전, 계율, 교학 등을 무시한 채 마구잡이로 행동을 일삼는 납자를 가리킨다.
그들은 음주(飮酒)와 식육(食肉), 그리고 섹스가 반야지혜를 수행하는데 아무 지장을 주지 않는다고 한다. 손이 닿는 대로 먹고 마시고 껴안고 발이 닿는 대로 ‘갈 지(之) 자’ 걸음을 한다.
그 밖에 선정(禪定)은 하지 않고 문자나 지식만을 탐독한 결과 오만방자한 것도 광선이고, 지혜만 있고 선정력(禪定力)이 없는 광혜(狂慧)도 광선의 일종이다.
천태종 출신 적진(寂震)은 ‘금강삼매경 통종기(通宗記)’에서 다음과 같이 광선을 비판한다.
“달마의 선종은 오직 명심견성(明心見性)만 최고로 여긴 나머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일대 장교(一大藏敎, 경전)를 부질없는 군소리로 여겨서 무엇 때문에 장황하게 49년 동안 말할 게 있느냐고 한다.
아! 말세의 광선자들은 교학을 내팽개치고 망령되이 반야를 말하며, 그 행동은 범부와 같은데도 곧 제불(諸佛)과 견주어 같다고 하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또 여래께서 말씀하신 경전과 가르침은 다 문자에 불과하다고 하니 어찌 언어문자를 떠나서 이치를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이상에서, 광선승(狂禪僧)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대장경 등 경전을 아주 하찮게 여긴 나머지 종잇조각이나 휴지조각, 또는 쓸데없는 말, 부질없는 말을 수록한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살불살조(殺佛殺祖) 즉 ‘부처와 조사는 성스러움의 대상이지만 성스러움에 갇히면 진면목, 실체를 볼 수 없다’는 말을 곡해하여 예불도 하지 않고 존경심을 나타내도 않는다. 이런 행동은 주로 문자를 모르는 무식한 납자, 참선도 하지 않는 건방진 납자들이 깨달은 척 그런 짓을 한다.
광선승은 한때 우리나라에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 당시(1920∼30년대) 불교잡지를 보면 “선승이라고 하는 자들이 너도나도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가리켜 ‘구린내 나는 똥 무더기’라고 말하고 다닌다고 비판하고 있는 기사를 볼 수 있는데, 특히 해방 후 선이 다시 일어나던 1960∼70년대는 이런 말이 더욱 유행했다.
근래 광선의 대표적인 인물은 경허 스님이라고 할 수 있다. 경허화상은 기질이 매우 호탕하여 술과 고기는 다반사(茶飯事)로 여겼다. 마을에서나 저잣거리에서나 어디서나 거리낌 없이 드셨는데, 여색(女色)에도 무애자재했다.
윤리와는 거리가 먼 광선을 일삼았는데, 무애자재한 세계, 깨달음의 세계라는 미명 하에 윤리 도덕을 무시한 것이다. 깨달았다고 해서 윤리 도덕을 경시하고 몰인격적인 행동을 한다면 그것은 한마디로 광기(狂氣)에 지나지 않는다.
무애자재란 욕망과 번뇌, 망상으로부터 자재함을 뜻하는 것이지, 주색잡기를 뜻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경허 스님의 경우 깨달음이 있어서였는데, 공부도 하지 않은 자들이 너도나도 흉내 내는 것은 조심해야 할 일이다.
17. 약홍은선(藥汞銀禪)
수은이 순은 아닌 것처럼 내용없는 짝퉁선
환영을 깨달음인양 착각하여 날뛰는 경우
문제가 있는 선(禪)을 찾다보니 정말 별난 선도 다 있었다. 약홍은선도 그 가운데 하나인데 그 명칭이 하도 특이해서 되래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먼저 ‘약홍은’이라는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지 알아야 할 것 같다.
약홍은(藥汞銀)은 수은(水銀, mercury)을 가리킨다. ‘홍(汞, 수은 홍)’이라고도 하고 ‘약홍은’이라고도 한다. 수은은 넓은 의미에서는 은(銀)의 일종이긴 해만 순도가 낮은 은(銀)으로 순은(純銀)은 아니다.
고대 중국의 천자들은 장생불사를 위하여 수은을 먹기도 했는데, 진시황은 수은 중독으로 죽었다고 한다. 수은은 주로 진사(辰砂)를 불에 녹여 만드는데, 온도계 등 열(熱) 전달 용도로 많이 쓴다.
약홍은선(藥汞銀禪)은 ‘짝퉁선(禪)’ ‘가짜선(禪)’ ‘사이비선(禪)’을 가리킨다. 수은이 은의 일종이긴 해도 순은(純銀)은 아닌 것처럼, 약홍은선 역시 진정한 선이 아닌 짝퉁선, 사이비선을 가리킨다. 겉모양새, 행태는 선(禪)인 것 같은데 내용물은 없는 엉터리 선으로, 다른 말로는 상사선(相似禪, 사이비선)이라고도 한다.
요즘 유명 메이커의 짝퉁 상품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초심자로서는 이런 짝퉁선, 가짜선, 사이비선을 가려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대체로 가짜나 짝퉁일수록 말이 거창하고 요란해서 빨려 들어가기 쉬운데, 문제는 불확실한 지식, 정도(正道)에서 벗어난 수행법, 얼치기, 엉터리 깨달음을 가지고 다 알았다고 하면서 도인 행세, 큰스님 행세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이들은 언론이나 인터넷 등에 그럴싸한 글이나 수행담, 체험담을 올려서 마치 자신이 도인(道人)인양 포장한다. 이미 열반하신 어느 선승으로부터 사사했다느니, 특별한 가르침을 전수 받았다느니, 몇 년 동안 장좌불와, 용맹정진 등을 했다고 하면서 장막을 친다. 심지어는 전생을 안다느니, 미래를 훤히 내다본다느니 하는 등 그럴싸한 말로 초심자를 홀린다.
또 이들은 아무에게나 반말을 하면서 상대를 카리스마로 제압하여 믿도록 하는데, 그런 다음에는 서서히 본색을 드러내서 직간접적으로 적지 않은 금전을 요구한다. 당연히 많이 내면 빨리 깨닫게 해 준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에도 이런 엉터리, 짝퉁 수행법, 약홍은선 등이 적지 않다.
운서주굉(1535∼1615) 선사가 편찬한 ‘선관책진’에는 초석범기(1296∼1370) 선사의 법문이 실려 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약홍은선(짝퉁선, 엉터리선)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약홍은선자들은) 입만 열면 자신이 곧 진짜 선승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어떤 것이 선입니까’하고 물으면 어름어름 하다가 마침내는 벙어리가 되고 만다. 이 어찌 부끄럽고 딱한 노릇이 아니겠소.
버젓이 부처님 밥을 처먹고 있으면서 본분사(本分事, 선의 핵심)는 모르고 너도나도 세속적인 지식이나 글을 가지고 큰 소리 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있소.
또 어떤 자는 부모 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과 같은 뜻임) 소식은 규명하려고 하지 않고 방아나 찧으면서 복이나 짓기를 바라며, 업장을 참회한다 하니, 참으로 도(道)와는 너무도 멀구나.
(…)
이와 같은 선(禪)을 약홍은선이라고 칭하나니 이 은(銀)은 진은(眞銀)이 아니다. 불에 한번만 들어가도 곧바로 녹아 흘러내리고 만다(恁?參的 是藥汞銀禪, 此銀非眞, 一鍛便流. ‘선관책진’ 초석범기 법문)
엉터리 선사들은 선의 핵심, 선의 진수(眞髓)가 뭐냐고 물으면 이런 말 저런 말로 얼버무린다. 확실한 대답을 하지 못하는데, 그것은 진정견해가 확립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약간의 다른 경계 즉 환영(幻影)이나 환시(幻視) 혹은 마음이 조금 평온해 진 것을 가지고 곧 깨달음으로 착각하여 날뛰는 경우가 허다하다.
18. 하마선(蝦?禪)
두꺼비·청개구리가 팔짝 뛸 줄만 알 듯
관념에 사로잡혀 역량이 전혀없는 선승
‘하마’라고 하면 우리는 언뜻 아프리카에 살고 있는 동물로, 입과 머리 등 몸집이 매우 큰 하마(河馬)가 아닐까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여기서 하마(蝦?)는 양서류, 파충류의 하나인 두꺼비와 청개구리를 함께 가리킨다.
두꺼비는 우리나라에도 많다. 야행성이라서 주로 밤에 활동하는데, 후미진 곳에 있다가 작은 동물이나 곤충 등이 나타나면 번개같이 잡아먹는다. 두꺼비는 혓바닥이 매우 길고 또 혀에는 강력 본드 같은 끈적끈적한 액이 있어서 ‘쭉’하고 내밀면 10센티 거리에 있는 먹잇감도 순식간에 딸려 들어간다.
두꺼비가 혓바닥을 내밀어 먹잇감을 잡아채는 속도가 0.5초 정도라고 한다. 특히 두꺼비는 여름날 밤에 전깃불을 켜 놓고 있으면 날아드는 날파리나 불나방, 하루살이 등을 잡아먹기 위해 나타나는데, 필자는 처음 그 광경을 보고 섬뜩할 정도로 놀랐다. 마치 내가 딸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두꺼비(蝦?)는 행동이 매우 느리다. 굼벵이와 같은 속도라서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고 있으면 답답할 정도이다. 청개구리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도 그 녀석들의 행동반경이 약 1.5킬로미터나 된다고 한다. 이 녀석들도 비장의 무기를 하나 갖고 있는데, 상황이 급하면 ‘팔짝’ 하고 뛸 줄은 안다. 그런데 그 기술이 단발성으로서 연거푸 뛰지도 못하고 멀리 뛰지도 못한다. 간혹은 착지 기술이 부족해서 전복사고를 일으키기도 하는데, 몸뚱이를 바로 하는 데도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다.
하마선(蝦?禪)이란 두꺼비나 청개구리가 행동할 때 한갓 팔짝 뛸 줄만 알고 다른 행동은 전혀 할 줄 모르는 것처럼, 하나만 고집하여 다른 것은 전혀 모르는 선승, 자유자재한 살림살이가 없는 선승,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선승, 역량(力量)이 전혀 없는 선승을 가리키는 말이다. 말하자면 깨달아도 수행자들을 지도할 능력이 없는 선승을 가리키는데, 이는 오로지 좌선만 했고, 학문이나 교학 등 지식을 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는 맹꽁이 같은 천성을 타고 났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교사 임용고시에는 합격했으나 학생을 지도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선생과 같다. 이런 이들이 학인들이나 납자들을 제접, 지도하게 되면 편협한 지도를 하게 되어 결국 납자들을 망치게 된다. 마치 오늘날 우리나라 선(禪)처럼 경전이나 어록은 일체 보지 말고 오로지 앉아 있으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는 교학적, 학문적 바탕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견(正見)과 정법안(正法眼)이 없어서 맞지도 않는 말을 마구잡이로 지껄이고 있다는 의미로도 많이 쓰인다.
선어에 ‘하마구(蝦?口)’라는 말이 있다. ‘두꺼비 입’이라는 뜻으로 하마선과 같은 말이다. 한두 가지 법문만 할 줄 알고 다른 법문은 전혀 할 줄 모르는 사람, 판에 박은 대로 법문하는 것, 또는 알맹이 없는 말을 쓸데없이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또 ‘사하마(死?蝦)’라는 말이 있다. ‘죽은 두꺼비’라는 뜻인데, 역량이 충분하지 못한 선승을 가리키는 말이다. 살아 있는 두꺼비도 걸어가는 것을 보면 답답한데 한여름 죽어 누워 있는 두꺼비야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雲門) 或云 佛法兩字拈却成 得箇是?. 代云 死蝦?’(雲門錄 中)
선은 집착, 주의(主義) 등 고정관념을 부정하고 무집착, 중도를 추구한다. 집착이나 고정관념은 해탈이 아닌 구속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사구백비(四句百非, 모든 것을 부정함) 곧 중도의 논리이다. 또 선은 어떤 실체를 부정하고 무실체(공, 무아)에서 진리를 찾는다.
그래서 ‘몰저선(沒底禪, 밑 없는 배)’, ‘무영탑(無影塔, 그림자 없는 탑)’, ‘몰종적(沒?迹 자취가 없다)’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하마선(蝦?禪)은 얼치기 깨달음으로 다른 사람조차 미혹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혼자 깊은 산속에서 살아야 한다.
19. 맹선(盲禪)
법문도 못하고 수행자 지도도 못하는 선
선수행 핵심은 장좌아닌 법안 갖추는 것
맹(盲)은 눈이 먼 것,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을 뜻한다. 글자를 낱낱이 해체하여 풀이하는 것을 ‘파자(破字, 글자를 쪼개다)’라고 하는데, 맹(盲)’ 자를 파자하면 ‘죽(亡)은 눈(目)’, 혹은 ‘눈(目)이 사망한 것(亡)’을 뜻한다.
파자는 주로 필자처럼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나 하는데, 한자가 상형문자이므로 일치하는 경우도 많다.
맹목(盲目)은 앞뒤를 가리거나 사리를 판단할 능력이 없는 상태를 말하고, 맹신(盲信)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않고 무작정 믿는 것을 말하고, 맹점(盲點)은 어떤 일에 결경적인 문제점이 있는 것을 말한다. 멍청한 것을 ‘맹하다’고 하듯이 ‘맹(盲)’ 자 속에는 무지와 멸시가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맹선(盲禪)’이란 소견(所見), 지견(知見), 정견(正見)이 없는 선승을 가리킨다. 어리석은 선승, 안목 없는 선승을 가리키는 말로, 오래도록 앉아 있었지만, 아직 눈이 열리지 못한 것, 개안(開眼)하지 못한 것을 폄하하는 말이다. 맹선은 교학적, 학문적인 바탕 없이 무작정 앉아 있기만 했기 때문인데, 절구통처럼 앉아서 버티는 데는 일가견이 있으나 정견, 정법안이 전혀 열리지 않아서 법문도 맹꽁이처럼 한 가지 외에는 못하고 수행자를 지도할 줄 모르는 것을 말한다.
천태지자대사는 ‘관심론’에서 “와서 법을 구하는 모든 이들을 보면 삼매를 닦아서 선정(禪定)을 얻는 데만 힘쓰고, 관심에 대하여 물으면 전혀 모른다. 맹선으로 소견이 없다(諸來求法者, 修三昧得定. 不知問觀心, 盲禪無所見)”라고 하여 좌선, 선정제일주의를 비판하고 있는데, 마음을 관찰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안목 또는 지견(知見)이 없는 선승을 ‘미려마라(?黎麻羅)’라고 한다. ‘미려’는 애꾸눈, 사팔뜨기이고, ‘마라’는 색맹(色盲)으로, 식견이 없는 자, 안목이 없는 자를 가리킨다. ‘벽암록’ 51칙 평창을 보도록 하겠다.
선의 근원(宗?)을 확립하고자 한다면 안목 있는 사람을 식별할 줄 알아야 한다.
전진(前進)과 후퇴, 옳고 그름을 식별할 줄 알아야 하고, 죽이고(殺, 把住) 살리고(活, 放行), 사로잡고(擒, 把住) 놓을 줄(縱, 放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애꾸눈이나 사팔뜨기, 색맹(色盲)처럼 안목이 없으면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마구잡이로 묻고 아무렇게나 답하게 된다.
이것은 (자신의 콧구멍(본래면목)이 자신에게 있는데도) 다른 사람의 손 안에 있는 격이나 마찬가지임을 전혀 모르고 있다.
(大凡扶?宗?, 須是辨箇當機,
知進退是非, 明殺活擒縱.
若忽眼目?黎麻羅, 到處逢問便問, 逢答便答.
殊不知 鼻孔在別人手裏.
‘碧巖錄’ 51則)
또 안목이 없는 것을 ‘당착노주(撞著露柱)’, ‘사한(死漢)’이라고도 한다. ‘당착노주’란 눈앞에 노주(露柱, 기둥)가 있는지도 모르고 가다가 머리를 부딪히는 것을 말하고, ‘사한(死漢)’이란 ‘죽은 놈’이라는 뜻으로, 참선학도(參禪學道)에 눈이 뜨이지 않은 선객, 즉 맹선(盲禪)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상의 여러 선어에서도 본다면 선수행의 핵심은 고목처럼 오래 앉아 있는데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핵심은 지견, 안목, 정안(正眼), 법안(法眼)을 갖추는데 있다. 그래서 임제의현은 올바른 견해 즉 진정(眞正)한 견해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수행의 척도는 좌선의 다소(多少) 여부를 가지고 판가름해서는 안 되고 정법안을 갖추었는지 여부를 가지고 판단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는 어리석게도 절구통처럼 오래 앉아 있는 것, 맹선(盲禪)을 가지고 수행의 척도로 삼고 있다. 주로 과거 어느 선승 밑에서 두들겨 맞으면서 열심히 참구했다는 것만 강조한다. 유명한 선승을 등에 업고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려고하지 말고 자기의 법력, 능력으로 설 자리를 찾아야 한다.
20. 일두피선(一?皮禪)
제구실 못하는 어리석은 선승 얕잡는 말
깨달았다 착각해 아만심만 가득한 납자
‘일두피선(一?皮禪)’에 대하여 말하기 전에 먼저 이 네 자의 뜻(字意)을 정리한 다음 설명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일(一)은 본래는 수사(數詞)인데, 여기서는 부사로 ‘한낱’, ‘그저’를 뜻한다.
두(?)나 두피(?皮)는 위(胃), 배(腹), 뱃가죽으로, ‘밥통’ 또는 ‘한낱 밥이나 축내는 사람’이라는 뜻하고, 같은 말로 두리(?裏, 뱃속), 두피리(?皮裏, 뱃가죽 속)가 있는데, 심중(心中), 즉 마음속을 뜻한다.
‘벽암록’ 51칙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다.
“이 납자(스님)는 암두가 짚신을 신은 채 그들의 뱃속을 마음대로 헤집고 다녔는데도 조금도 모르고 있구만.”
타인이 짚신을 신고서 자기의 뱃속을 휘젓고 다녔는데도 모른다면 그 사람은 매우 딱한 사람이다. 알아차리자면 제3의 눈 즉 통찰력과 지혜의 눈(慧眼)이 있어야 한다.
결국 ‘일두피선’이란 우리말로 표현하면 ‘밥통선’이라는 뜻이다.
즉 밥만 축내고 성과는 없는 것, 제구실을 못하는 어리석은 선승을 얕잡아 이르는 말로, 아둔한 이나 안목이나 지견 또는 정안이 없는 이를 가리킨다. 또 알기는 많이 알고 있어도 자유 자재하게 활용하지 못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일두피선과 비슷한 말로는 죽반승(粥飯僧), 반대자(飯袋子)가 있다. 죽과 밥을 축내는 선승(당송시대 선종사원에서는 아침에는 죽, 점심은 밥을 먹었다)이라는 뜻인데, 이를 밥자루, 밥통이라고 빗대기도 했다.
원오 극근의 ‘심요(心要)’ 한 단락을 보도록 하겠다.
“황룡(黃龍) 혜남선사가 지난날 자명석상(慈明石霜)선사를 뵙기 전에는 한낱 밥통선((一?皮禪)만 알고 있었다(正眼이 없었다는 뜻). 취엄(翠巖)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그로 하여금 자명선사를 찾아가도록 했다. 그는 거기서 오로지 현사가 ‘영운선사가 아직 투철하게 깨닫지 못했다’고 말한 곳을 끝까지 참구했는데, 시절인연이 도래하여 기왓장 부서지듯 얼음 녹듯 화두가 풀려 마침내 인가를 받았다. 그리하여 30년 동안 이 도장으로 뭇 납자들의 알음알이(지식의 잔꾀)를 제거해 주었다. 병을 낫게 하는 데는 많은 약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핵심을 찌르는 긴요한 곳에는 한 방이면 된다. 어찌 많은 가르침(불법)이 필요하겠는가?”
훌륭한 한의사는 여기저기 침을 놓는 것이 아니다. 혈맥의 중요한 곳에 한두 방을 놓을 뿐이다. 유명한 정비사는 엔진 소리만 들어도 어디가 고장 난 것인지 100% 안다. 깨닫게 하는 데는 많은 말이 필요 없다. 정신을 차리게 하는 한마디면 된다. 방장이나 조실의 역할은 바로 그 한마디이다.
일두피선이라는 말 속에는 앞에서 말한 뜻 외에도 ‘뱃속에 가득 처넣다’, ‘잔뜩 처넣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이것저것 잔뜩 들어서 아만심, 자만심이 부처님 머리 위에 올라가 있는 것, 스스로 깨달았다고 인정 한 결과 안하무인(眼下無人)이 된 것이다.
‘벽암록’ 20(龍牙西來意 공안) 본칙 평창에 나오는 선화(禪話)를 보도록 하겠다.
“용아(龍牙)는 타고난 기질이 총명하고 민첩하여 항상 일두피선(一?皮禪), 뱃속에 자기가 최고라는 자만심이 가득한 것)을 메고 행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곧바로 장안에 있는 취미선사를 찾아갔다.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 취미가 말했다. ‘나에게 선판(禪板, 방선 시간에 등을 기대고 쉬는 판)을 건네주게.’ 용아가 선판을 건네주자 취미는 그 선판을 받자마자 용아를 후려쳤다.”
취미선사가 선판으로 용아를 친 것은 용아의 육체를 친 것이 아니고, 용아의 자만심을 친 것이다. 요즘도 한낱 밥통이나 짊어지고 다니는 이들이 적지 않다.
결제가 되면 선원을 찾고, 해제가 되면 어디론지 사라진다. 아무런 생각도, 문제의식도 없이 이곳저곳 선원을 순례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래가지고는 백날을 다녀도 지견, 정안이 열리기는커녕 자만심만 쌓여가게 된다. 커리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다운 시키는 한방이 중요하다.
21. 골동선(骨董禪)
오래되고 늙어서 아무 쓸모가 없는 선
선은 과거 가치관과 기존 관념도 거부
골동품(骨董品)은 오래되어서 희소가치가 있고 또 예술적 가치도 높다. 고완(古玩)·고동(古董)이라고도 하며, 요즘은 ‘골동’이라는 말 대신 주로 ‘고미술품’이라고 부른다. 한편 ‘골동(骨董)’이라는 말은 시대에 뒤떨어지고 쓸모없는 낡은 것이나 그런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기도 한다.
서양에서는 처음에 그리스·로마 시대의 고전문화 유물들만을 지칭했으나 점차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오래된 장식품들을 모두 가리키게 되었다. 동양에서는 중국에서 ‘골동’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는데 송대(宋代)에는 문인들 사이에서 골동품 수집과 완상(琓賞)이 교양의 하나였다. 명대(明代)의 문인 동기창(董其昌)도 골동을 매우 좋아했고, ‘부생육기’의 작자 심복과 비운의 아내 운이는 둘이서 매일 같이 시장에 나가 싼 공동품을 사다가 매만지는 것이 낙이었다.
이렇듯 골동품은 적어도 100년 이상은 지나고 예술적·역사적으로 중요한 물건이라야 한다. 반면 ‘골동선(骨董禪)’이란 ‘오래되고 늙어서 아무 쓸모가 없는 선’이라는 뜻이다. 낡고 닳아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 들끓는 번뇌 망상과 변화된 현실의 삶에 조금도 대처하지 못하는 선, 옛말이나 되풀이하는 무력한 선을 이른다.
선은 응고되어(執着)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것을 스스로 거부한다. 과거의 통속적인 사고나 생각에 고착화되어 본드처럼 붙어 있는 것을 싫어한다. 과거의 가치관은 물론 기존의 관념도 거부한다(無執着).
선은 항상 새로운 것을 지향한다(日日是好日). 그것이 자신을 고정된 틀에 매어 있지 않게 하는 방법이다(空, 中道). 선에서는 그것을 ‘깨어 있다(惺惺着)’라고 한다. 과거에 매몰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운허 편 ‘불교사전’에서는 골동선에 대해 ‘경심(輕心,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과 만심(慢心, 아만)으로 기운 없이 참선하는 모양을 꾸짖는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경심과 아만심이 가득차서 활발발하게 참선을 하지 못함을 꾸짖는 말’이라는 뜻인 것 같다.
운문선사는 골동선에 대하여 ‘운문광록’에서 다음과 같이 혹평한다.
“선을 도둑질 하는 놈들(掠虛漢, 사기꾼 등)은 남이 뱉은 침이나 먹고(남의 말, 남의 법문) 한 무더기 골동(낡아빠진 옛말)이나 기억하여 가는 곳마다 ‘나는 선문답을 다섯 번, 열 번 이해했다고 자랑하고 떠들어 댄다. 그들이 아침저녁으로 물어서 이런 식으로 겁(劫)을 지나도록 논해보았자 꿈에서도 도(道)를 볼 수 없을 것이다”라고.
여러 선어록의 갖가지 법문 방식을 졸졸 외워서 여기저기 다니면서 법문이나 하고 선승인 척 삼배(三拜)를 받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지만, 천 년 전 당송시대에도 많았던 모양이다. 시대만 다를 뿐 사람의 심성은 불변인 것 같다. 운문선사는 이들을 가리켜 ‘남이 뱉은 침이나 핥아 먹고 낡은 골동이나 복창(復唱)하여 팔아먹는 자들이라고 평한다.
‘선문염송’ 1419칙에도 골동선에 대한 공안이 나온다.
오조 법연(五祖法演)이 외출했다가 들어와 법문을 하였다.
“밖에 나간 지 반 달 동안 눈으로 콧구멍(본래면목)을 보지 못했다. 조사선(祖師禪)을 잃고 골동품(骨董品) 하나를 주워왔다. 자, 말해 보라. 어디에 둘까? 한몫은 석가부처님께 바치고, 한몫은 다보불탑에 바치리라.”
골동품, 고미술품은 한인(閑人)이 쳐다보는 완상(玩賞)의 대상이다. 그러나 선은 완상의 대상은 아니다. 선은 맑디맑은 가을날이다. 안개 낀 날의 아련한 감상적 풍조가 아닌, 청아한 가을날 저녁이다. 티 한 점, 구름 한 점 없는 날, 번뇌 망상이 확 걷혀버린 만리무운(萬里無雲)이다.
윤창화 민족사 대표는
해인사 강원과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수원 등에서 수학했다. ‘왕초보 선박사 되다’ ‘무자화두 십종병에 대한 고찰’ ‘한암의 자전적 구도기 일생패궐’ 등 많은 저술과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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