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심성론(心性論)과 성리학
오늘날 성리학은 불교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 성리학은 안은 불교이고 밖은 유교인, 이를테면 내불외유(內佛外儒)라는 것이다. 성리학이 불교의 영향을 받고 생겨났음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성리학은 불교를 배우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라 불교에 대응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 따라서 불교가 없었다면 성리학은 생겨날 수 없었겠지만 뒤집어서 말하면 불교가 없었다면 성리학은 굳이 생겨날 필요가 없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송(宋)나라 성리학자들은 대개 불교를 공부하였고, 특히 주자는 불교에 대한 조예가 매우 깊었으므로 그들의 저술에는 불교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간파해 놓은 견해들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와서 성리학자들은 대개 더 이상 불교를 연구할 필요를 못 느끼고, 중국의 학자들이 밝혀놓은 이론을 그대로 답습하여 불교를 배척할 뿐 자신이 불교를 공부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조선시대 성리학 저술에서 불교에 대한 정밀한 이론을 발견하기 어렵다.
조선 중기 탁월한 학자인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은 자신이 직접 불경을 읽은 공부의 바탕 위에서 성리학과 불교의 차이를 밝혀 놓았다.
"세상에서는 불교의 심성설(心性說)은 모두 유가(儒家)의 말을 훔친 것이라 하는데 이는 꼭 그렇지는 않다.
지금 불교의 경론(經論)과 주소(注疏)들을 보면 대개 당(唐)나라 이전의 책들이다.
이때에는 정주(程朱)의 성리설(性理說)이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았는데도 저들이 심성(心性)을 말한 것이 이미 이치에 가까운 말이 많고 왕왕 지극히 정미(精微)하고 딱 들어맞는 말들도 있다.
한(漢)나라 이래 선비들이 어찌 꿈엔들 이런 말을 했겠는가. 그런데 저들이 어디에서 이러한 말들을 훔쳤단 말인가.
육경(六經)의 말들은 진실로 그보다 앞선 시대에 있었다. 그러나 성명(性命)의 이치는 《주역(周易)》?《중용(中庸)》에 보이고 심학(心學)의 방도는 《대학》?《논어》?《맹자》에 갖춰져 있는데도 한(漢)?당(唐)의 선비들은 평생토록 이 책들을 읽으면서 못 보고 지나쳤거늘 저들은 곁에서 엿보고 근사한 것을 훔쳤다면 그 자체만 해도 이미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저들은 당초에 심성이 나에게 본래 갖춰져 있는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심성을 찾을 줄 알아 그 그림자를 대략이나마 본 뒤에 유가(儒家) 경전 중 심(心)이니 성(性)이니 하는 글자들을 가지고 맞춰서 말한 것이니 애초에 마음속에 본 바가 없고 단지 우리 유가의 말을 훔쳐서 자기들의 말을 꾸민 것은 아니다."
[世謂佛氏心性之說, 皆竊取儒家緖餘, 此未必然也.
今考其經論疏?, 大抵皆唐以前書.
於時, 程朱性理之說, 未出於世, 而其說心說性, 已多近理, 往往有極精微極親切處.
漢以來諸儒, 何曾夢道此等語, 而謂彼於何竊取耶?
若六經之說, 則固在其前矣. 然以性命之理, 著於易傳中庸, 心學之方, 備於大學語孟, 而漢唐諸儒, 沒身從事, 當面蹉過; 彼乃從傍窺見而竊取其近似, 已是不易.
然亦合下知得此箇物事, 是吾所自有底. 故便會尋求, 約略見其影象, 然後將經傳中心性名字說合之; 非初無所見於中, 而但竊取吾儒緖餘, 以文其說也.]
"마음을 두고 “신령하고 밝아서 어둡지 않다.[靈明不昧]”, “깨어 있고 고요하다.[惺惺寂寂]”라 한 말들은 모두 불교에서 먼저 말한 것이지만 우리 유가에서도 그렇게 말하는 것을 꺼리지 않은 것은 그 이치가 같기 때문이다.
“뭇 이치를 갖추었다.[具衆理]”, “모든 이치가 다 갖춰져 있다.[萬理咸備]”라는 말들은 불씨(佛氏)가 말하지 못했는데, 우리 유가에서만 분명히 말한 것은 같지 않은 점이 바로 여기 있기 때문이다."
[說心而曰靈明不昧, 曰惺惺寂寂, 皆佛氏之所先道, 而吾儒不嫌於言之者, 以其理同也.
曰具衆理, 曰萬理咸備, 佛氏之所未道, 而吾儒獨明言之, 則所不同者, 正在於此耳.]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 주(注)에서 “시선은 단정히 한다.[端視]”는 대목을 풀이하기를 “눈이 딴 곳을 보면 마음은 다른 곳으로 가니, 본래 마음을 제어하기 위하여 우선 시선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시잠(視箴)>의 “사물이 눈앞을 가리면 마음이 옮겨가니, 밖을 제어하여 안을 안정시킨다.”는 말과 같은데 그 글이 정밀하고 긴절(緊切)하여 좋다.
[般若經註釋端視云: “目若別視, 心則異緣; 本欲制心, 且令端視,” 此視箴“蔽交於前, 其中則遷; 制之於外, 以安其內”之意, 而立語精切可喜.]
[해설]
송(宋)나라 성리학자인 정이천(程伊川)은 “학자가 불교의 학설에 대해서는 음란한 음악이나 아름다운 여색을 피하듯이 멀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게 그 속에 빠져들게 된다.”고 하였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이러한 경계를 지켜 대개 불경을 읽지 않았다. 학문 풍토가 이렇다 보니, 불경을 갖추고 있는 집도 드물어 보려야 보기도 어려웠다.
그런데 농암의 저술을 보면,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 《능엄경(楞嚴經)》 등의 불경을 읽고 그 내용을 들어서 비판해 놓았는데, 비록 성리학자의 시각에서 나온 것이지만 불교에 대한 그의 안목은 조선시대에 보기 드문 것이다. 명문가의 선비요 탁월한 성리학자였던 그가 불경을 읽었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의외인데, 그의 부친 김수항(金壽恒)이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사사(賜死)되고 누이와 막내 동생이 요절하는 등 불운했던 가정사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그 아우인 삼연재(三淵齋)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이 산사를 다니면서 면벽좌선(面壁坐禪)을 하고 승려들과 교제가 많았다는 사실도 이를 방증한다.
불교에서 사용하는 심(心)ㆍ성(性)과 같은 말들은 중국에서 불경을 번역할 때 중국의 고전에서 가져다 쓴 것이다. 중국의 문자로 인도의 글을 번역하다 보니 자연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래서 성리학자들은 불교가 중국으로 건너오면서 중국의 말을 훔쳐서 썼다고 주장하였는데, 이에 대해 농암은 성리학이 생기기 전에 불서가 먼저 중국에 들어오고 번역되었다고 반박하였다.
또한 한(漢)ㆍ당(唐)의 선비들은 평생 유가의 경서를 읽으면서도 심성(心性)의 중요성을 알지 못했는데 불교에서는 그 말을 가져다 쓰고 심성을 찾을 줄 알았다고 하고, 불교에서 심성에 대한 이론과 공부가 있은 다음에 심성(心性)이란 한자를 갖다 썼다고 하였다. 주자학의 나라 조선시대에 나오기 쉽지 않은 견해이다.
허령불매(虛靈不昧), 성성(惺惺)과 같은 말들은 《대학》의 명덕(明德), 경(敬)을 설명할 때에 왕왕 사용되었다. 이러한 말들 때문에 오늘날에 와서는 성리학이 불교에서 온 것이라는 주장을 펴는 학자들이 많은데, 농암은 이치가 같다면 불교와 같은 말을 사용해도 문제될 게 없다고 보았다.
당(唐)나라 때부터 유행한 선(禪)불교가 송(宋)나라 때에 와서는 지식인 사회 전반에 걸쳐 풍미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지식인들은 불교의 용어들을 일상 중에 자연스럽게 사용하였다. 그렇지만 불교의 영향을 받아서 성리학이 생겨났다는 말과 성리학이 불교에서 왔다는 말은 매우 다르다.
인도의 사상인 불교가 오랜 세월 중국을 휩쓸면서 중국의 전통 사상인 유교가 퇴색되고 불교는 말폐(末弊)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서 불교의 이론에 대응하기 위해 성리학이 생겨났던 것이니, 이를 두고 불교의 영향을 받아서 불교에 대응하기 위해 생겨났다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또한 불교의 사상에 대응하다 보니 자연 불교의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농암이 “《금강반야경》 주(注)에서 ‘시선은 단정히 한다.[端視]’는 대목을 풀이한 것을 정이천(程伊川)의 <시잠(視箴)>과 같은 뜻이라 하면서 표현이 좋다고 칭찬한 것에서 그가 불경을 꼼꼼히 읽고 좋은 점은 취했음을 알 수 있다.
주자의 저술을 읽고 주자학을 깊이 연구한 학자로서 불경을 읽고 유교 쪽의 지나친 주장을 반박한 것은 공정하고 탁월한 안목이라 아니할 수 없지만, 농암도 어디까지나 주자학자인 만큼 불교에 대해서는 대체로 비판적이다. 그렇지만 농암의 저술에 보이는 불교에 대한 비판은 매우 예리하고 탁월하여 송나라 성리학자들의 견해에 비해 손색이 없다.
옛날의 수행자와 오늘의 수행자
종교에는 대개 말세론이 있다. 수백 년 전에도 천여 년 전에도 자신이 사는 세상은 늘 말세라니, 세상은 발전해 간다고 생각하는 지금의 상식으로는 얼른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을 말세로 인식함으로써 자신과 현실을 반성하고, 옛날을 추상(推上)하여 높은 자리에 앉힘으로써 흠결 없는 삶의 전범을 세울 수 있는 것이 말세론의 장점이다. 근래에 와서 종교인들의 현실 참여가 부쩍 늘어났다. 세상이 혼란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현실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는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오늘날 세상은 참 복잡해졌다. 웬만한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도 세상사 시비를 정확히 판단하기 어렵다. 이쪽에서 보면 이렇고 저쪽에서 보면 저런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시비와 갈등 속에서 사람들의 영혼은 쉴 곳이 없는데, 수행을 업으로 삼는다는 종교인들까지 싸움판에 끼어들어서야 되겠는가.
사람들이 종교인에게 바라는 것은, 세상사 덧없는 시비를 가리는 일이 아니라 영혼의 안식을 찾은 사람의 적정(寂靜)하고 평안한 모습이다. 세상은 늘 말세라, 옛날에도 출세간(出世間)에 안주하지 못하고 세상사를 기웃거리는 종교인이 많았다.
"옛날의 불법(佛法)을 배우는 이들은 부처님의 말이 아니면 말하지 않았고 부처님의 행실이 아니면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보배로 여긴 것은 오직 불경의 신령한 글뿐이었다.
오늘날의 불법을 배우는 이들이 서로 전해가며 외는 것은 사대부의 글귀이며 간청해 받아서 갖고 다니는 것은 시대부의 시이다. 심지어 그 표지를 울긋불긋하게 칠하고 그 시축(詩軸)을 좋은 금으로 꾸미며 아무리 많아서 부족한 줄 모르고 더없는 보배로 여기니,
아, 어쩌면 이리도 옛날과 지금의 불법을 배우는 이들이 보배로 삼는 것이 다른가!
내 비록 불초하지만 옛날의 배움에 뜻을 두어 불경의 신령한 글을 보배로 여긴다. 그러나 그 글이 매우 많고 대장경의 바다는 끝없이 넓어 후세의 동지(同志)들이 뿌리를 찾지 못하고 잎을 따는 수고를 면치 못한다.
그러므로 불서(佛書)의 글들 중에서 요긴하고 절실한 것들을 수백 말씀을 모아서 종이에 쓰니, 글은 간약(簡約)하고 뜻은 두루 갖춰졌다 할 만하다.
만약 이 말씀들을 엄한 스승으로 삼아서 깊이 연구해 오묘한 이치를 얻는다면 구절마다 산 석가가 있을 것이니, 힘써야 할 것이다!
비록 그렇지만 문자를 여읜 한 구절과 격외(格外)의 뛰어난 보배는 쓰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장차 뛰어난 근기(根機)를 가진 사람을 기다리노라."
[古之學佛者, 非佛之言, 不言, 非佛之行, 不行也. 故所寶者惟貝葉靈文而已.
今之學佛者, 傳而誦則士大夫之句, 乞而持則士大夫之詩; 至於紅綠色其紙, 美金粧其軸, 多多不足, 以爲至寶. ?! 何古今學佛者之不同寶也.
余雖不肖, 有志於古之學, 以貝葉靈文爲寶也. 然其文尙繁, 藏海汪洋, 後之同志者, 頗不免摘葉之勞.
故文中撮其要且切者數百語, 書于一紙, 可謂文簡而義周也.
如以此語以爲嚴師, 而硏窮得妙, 則句句活釋迦存焉, 勉乎哉!
雖然離文字一句?格外奇寶, 非不用也, 且將以待別機也.]
"도를 닦는 사람은 마치 한 덩이 칼 가는 숫돌과 같아 이 사람도 와서 갈고 저 사람도 와서 가니, 자꾸만 칼을 가는 동안 다른 사람의 칼을 잘 들지만 자신의 돌은 점차 닳아간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와서 자기 숫돌에 칼을 갈지 않는다고 투덜대니,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修道之人, 如一塊磨刀之石, 張三也來磨, 李四也來磨; 磨來磨去, 別人刀快, 自家石漸消.
然有人更嫌他人不來我石上磨; 實爲可惜.]
- 휴정(休靜 1520~1604),《선가귀감(禪家龜鑑)》
[해설]
조선 중기의 고승인 청허(淸虛) 휴정(休靜)이 자신의 저술인 《선가귀감(禪家龜鑑)》에 쓴 서문으로 가정(嘉靖) 갑자년(1564, 명종19) 여름에 쓴 글이다. 휴정은 서산대사(西山大師)로 일반인들에게 더 알려져 있다. 그는 임진왜란 때 승병장으로서 큰 공훈을 세웠거니와 선(禪)ㆍ교(敎)에 두루 조예가 깊은, 조선시대를 대표할 만한 고승이기도 하다.
휴정은 35세의 젊은 나이로 당시 불교의 최고 지도자 격인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에 올랐다가 2년만인 1556년에 “내가 출가한 본뜻이 어찌 여기에 있겠는가.” 하고는 사임하고 금강산에 들어갔다.
《선가귀감》은 금강산 백화암(白華庵)에서 쓴 것인데, 제자 유정(惟政)이 발문에서 밝혔듯이 50여 종의 경(經)ㆍ론(論)에서 중요한 내용을 발췌하고 간단한 해설을 덧붙인 책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1579년에 초간(初刊)된 이래 여러 차례 간행되었다. 그리고 제자인 사명당 유정이 임진왜란이 끝난 뒤 탐적사(探賊使)로 일본에 가서 임제종 승려들에게 이 책을 강의한 뒤로 도합 여덟 차례나 간행되어 일본 임제종의 부흥에도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와 일본, 두 나라 불교계의 스테디셀러였던 셈이다.
조선시대에 승려들은 이름난 사대부들의 시문(詩文)을 받아 모은 시권(詩卷)을 가지고 다니면서 자랑거리로 여겼다. 이러한 풍습은 중국 당(唐)나라 때부터 이미 보인다. 예컨대 대문호인 한유(韓愈)가 문창(文暢)이란 승려를 보내면서 <송부도문창사서(送浮屠文暢師序)>와 시를 지어준 것이 그 일례이다. 조선시대에도 승려들의 신분이 낮아진 터라, 행각하는 승려들이 명사들의 시문을 받는 것을 큰 영광으로 여겼고, 또한 사대부들의 서찰을 전해주는 우체부 역할까지도 하였다.
“문자를 여읜 한 구절과 격외(格外)의 뛰어난 보배”란 교외별전(敎外別傳), 격외선지(格外禪旨)를 뜻한다. 언어와 문자가 나온 자리인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 깨닫게 해야 함으로, 언어와 문자를 의지하되 언어와 문자를 벗어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즉 《선가귀감》에 수록된 많은 얘기들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니, 여기에도 집착하지 말고 곧바로 달을 보아야 함을 일러준 말이다.
도를 닦는 사람을 숫돌에 비유한 글은 《치문경훈(緇門警訓)》의 <자수심선사소참(慈受深禪師小參)>에서 인용한 것이다. 맹자(孟子)는 “사람들의 병통은 자기 밭은 버려두고 남의 밭에 김을 매는 것이다.[人病舍其田而芸人之田]” 라고 하였거니와 사람들이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제쳐두고 부질없는 세상사에 관심을 두는 병통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다르지 않은가 보다. 수행자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소위 지식인들에게 통렬한 경책(警策)이 될 것이다.
《선가귀감》에는 이 밖에도 말세의 승려들을 통렬히 꾸짖은 곳이 많다. “마음이 세상의 명리(名利)에 물든 자들은 권력에 아부하면서 풍진 속을 쫓아 다녀 도리어 속인들에게 비웃음을 산다.”는 대목은 오늘날 세상사에 관심이 많은 종교인들의 모습을 참으로 잘 꼬집었지 않은가. 그렇지만 종교인도 오욕칠정(五慾七情)을 가진 인간이다. 탐욕으로 세상을 더럽히고 아수라의 싸움판을 만드는 종교인이 아니라면, 세속에서 오욕락을 맘껏 누리는 사람들이 저자거리의 수행자들을 쉽게 질타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세상은 실리(實利)가 가장 큰 진리요 명분이 되었지만, 지식인도 진리와 명분을 양식으로 삼고 살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종교인과 다르지 않다. 남의 글만 외고 다니지는 않은지, 남의 밭에 가서 김을 매고 있지는 않은지, 자기 숫돌만 닳고 있지는 않은지, 세상을 바로잡는다고 아우성치는 지식인들은 반성해 볼 일이다.
이상하 < 한국고전번역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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