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佛敎에關한 글

효봉(曉峰) 스님

경호... 2012. 11. 22. 09:42

효봉(曉峰) 스님

 

多讀으로 14세에 백일장서 장원

 

▲스님은 12세에 사서삼경을 통달했다.

 

 

스스로 동구불출(洞口不出), 오후불식(午後不食), 장좌불와(長坐不臥), 묵언(默言)의 4가지 규약을 정하고 엄격히 지켰던 선사. ‘판사 출신 선사’, ‘절구통 수좌’, ‘통합종단 초대종정’ 등의 수식어가 따라붙는 근대 한국불교 고승 효봉(曉峰, 1888~1966)스님이다.


효봉은 1888년 5월28일 평남 양덕 쌍룡면 반석리 금성동에서 아버지 수안(遂安) 이 씨 병억(炳億)과 어머니 김 씨 사이에서 5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유달리 영특해 이웃은 물론 인근 동리에까지 신동으로 소문이 났다. 그리고 신동답게 12세에 이미 할아버지로부터 ‘사서삼경’을 배워 통달했다. 평생 선비로 산 할아버지 영향을 받아 많은 책을 볼 수 있었고, 그런 다독의 결과는 14세 때 평양감사가 연례행사로 연 백일장에서 수많은 재동들과 글재주를 겨뤄 장원급제하는 영광으로 나타났다.


백일장에서 장원급제를 할 정도로 글재주가 비상함은 많은 책을 보고 사유의 깊이가 남달랐음을 의미하는 것임에도, 효봉의 어릴 적 책읽기가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입적 3일 전에야 출가 전 속가 이야기가 알려졌던 만큼, 구체적으로 어떤 책을 읽었는지까지는 밝혀지지 않은 것이다.


여하튼 어려서부터 영특했던 효봉은 한학에 이어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했고 평양고보를 졸업한 뒤에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26세 때부터 36세까지 10년간(1913∼1923) 서울과 함흥에서 지방법원 및 고등법원에서 판사로 재직했다. 이때 효봉의 삶을 바꾼 일대 사건이 벌어졌다. 나이 서른여섯이던 1923년, 최초로 사형선고를 내린 후 몇 날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자기 자신의 존재를 돌아보고 인간사회의 구조를 재인식했다. 결국 ‘이 세상은 내가 살 곳이 아니다. 내가 갈 길은 따로 있을 것’이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미련 없이 집을 떠나 유랑생활을 시작했다.


효봉은 입고나온 옷을 팔아 엿판 하나를 사고 이후 3년 동안 엿판을 낀 채 팔도강산을 방랑했다. 장마철엔 서당에 들러 글을 가르치기도 하고, 농짝을 짊어지고 옮겨주는 일을 하며 먹고 자기를 해결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누더기 엿장수 뒤를 졸졸 따르는 시골 아이들에게 엿을 공짜로 나눠주다가 밑천이 바닥나기도 했다. 고난은 스스로 선택한 참회의 길이었다.


효봉은 참회의 시간을 거쳐 1925년 금강산 유점사에 들러 스승을 찾기에 이르렀다. 수소문 끝에 찾아간 이가 금강산 도인으로 불리는 신계사 보운암 석두(石頭)스님이었다.


이곳에서 석두 스님에게 사미계와 함께 원명(元明)이라는 법명을 받은 효봉은 ‘늦깍이’ 출가를 의식하며 쉼 없이 정진에 정진을 거듭했다. 조주무자를 화두로 받아 좌선에만 전념하던 효봉은 제방의 선지식 친견을 위해 길을 나섰으나, 수행은 결국 남의 말에 팔릴 일이 아니고 오로지 스스로 참구하며 깨달아야 하는 것임을 절감하고는 다시 금강산으로 돌아왔다. 엉덩이 살이 허는 줄도 모르고 화두일념에 미동도 하지 않아 ‘절구통 수좌’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하지만 깨달음에 대한 갈망이 컸던 효봉은 드디어 생사 결단을 내렸다.


1930년 늦은 봄 금강산 법기암 뒤에 단칸방 토굴을 짓고는 ‘깨닫기 전에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토굴 밖으로 나오지 않으리라’는 맹세와 함께 토굴로 들어갔다. 밖에서 출입문까지 봉쇄하도록 한 후 토굴에 들어간 지 1년 6개월 만에 스스로 벽을 허물고 나온 효봉은 그 깨달은 바를 “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타는 불속 거미집엔 고기가 차 달이네/ 이 집안 소식을 뉘라서 알랴/ 흰 구름은 서쪽으로 달은 동쪽으로”라는 게송으로 읊었다. 

 

 

성철에 “책만 메고 다니면 안 돼”

 

효봉은 1년 6개월의 토굴생활 끝에 깨달음을 얻고 1932년 4월 부처님오신날에 유점사에서 동선(東宣) 화상을 계사로 구족계와 보살계를 수지했다.


이후 설악산 봉정암, 오대산 상원사 등 선원에서 한 철씩 정진하다 1937년 운수의 발길을 송광사에서 멈췄다. 효봉은 그곳 조계산 송광사 선원(禪院) 삼일암(三日庵)에서 조실로 10년을 머무르며 수많은 후학들의 눈을 밝혀주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정혜쌍수(定慧雙修)에 관한 확고한 인식을 갖추기도 했다.


그런 효봉은 송광사 선원 조실로 있으면서 근검절약과 청규적용을 엄격히 한 것으로 유명하다. 상좌 법정이 찬거리를 구하러 갔다가 10분 늦게 돌아오자 “오늘은 공양을 짓지 마라. 단식이다. 수행자가 그렇게 시간관념이 없어서 되겠는가”라며 공양시간 10분 늦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또 밥알 하나를 흘려도 불같이 호통을 쳤고, 초 심지가 다 타기 전에는 새 초를 갈아 끼우지 못하게 했다. 뿐만아니라 모든 대중이 함께 노동을 하는 운력에서도 예외를 두지 않았다. 당시 수행에 매진하며 운력을 소홀히 하던 성철이 송광사에 방부를 들이려하자 “책 보따리만 메고 다니면 안 된다. 운력도 함께 해야지”라며 역정을 내기도 했을 만큼 절약과 청규에 엄격했다.


효봉은 또 계정혜 삼학을 수행의 근본이념으로 삼았다. 자신이 이를 갖추고 닦는 것은 물론이고 후학들에게도 집 짓는 일에 비유해서 그 가르침을 전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계는 집을 지을 터와 같고, 정은 그 재료이고, 혜는 그 기술과 같다. 재료가 아무리 좋아도 터가 시원찮으면 집을 세울 수 없고, 또 기술이 없으면 터와 재료도 쓸모가 없게 된다. 이 세 가지를 두루 갖추어야 집을 지을 수 있듯이 삼학을 함께 닦아야만 생사를 면하고 불조의 혜명을 잇는다.”며 삼학을 수행의 근본으로 삼을 것을 당부했다.


효봉은 해방 후 불교계가 인재양성의 필요성을 인식해 해인사에 출가 수행승의 종합수도원인 가야총림을 개원할 때 방장으로 추대됐다. 당시(1949년 4월) 상당법어에서 서로 반목하며 제 역할을 못하는 선교 두 무리들을 향해 던진 일갈은 오늘날에도 곱씹어볼 내용이다.


“교학자들은 마치 찌꺼기에 탐착해 바다에 들어가 모래를 세는 것과 같아서 교를 말할 때에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켜 깨달아 들어가는 문이 있는 줄 알지 못하고 곧 사견에 떨어져 있다. 또 선학자들은 이른바 본래부터 부처가 되었으므로 미혹도 깨침도 없으며 범부도 성인도 없고, 닦을 것도 증할 것도 없으며 인도 과도 없다 하여 도둑질과 음행과 술 마시고 고기 먹기를 마음대로 감행하니 어찌 가엾지 아니한가. 이 일을 밝히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바다 속에 들어가 육지를 다닐 수 있는 수단과 번갯불 속에서 바늘귀를 꿰는 눈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한편 성철에게 “책 보따리만 메고 다니면 안 된다”고 했던 효봉 자신은 옛 조사들의 어록이나 경전 보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가야총림 상당법어에서 ‘화엄경’이나 ‘금강경’ 가르침을 예로 들어 법을 설한 것이 그 반증이다. 그런가 하면 “과거 여러 스님들의 가풍은 제각기 다르지만 배우는 사람을 지도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모두 친절했다”며 “가장 친절한 분이 위로는 육조 스님이요, 중간에는 조주 스님이며, 아래로는 보조 스님이다. 그래서 이 산승은 위로는 육조 스님을 섬기고 중간으로는 조주 스님을 섬기며 아래로는 보조 스님을 섬긴다”고 했을 정도로 혜능, 조주, 보조 스님의 가르침을 익히고 후학들에게 전했다. 

 

 

“옛 사람 어록으로 스승 삼으라”

 

▲스님은 후학들에게 경학하는 자세를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가야총림 방장으로 후학을 제접하며 선 수행에 매진할 것을 당부하던 효봉은 동화사에서도 ‘정혜쌍수’를 강조했다. 1958년 동화사 금당선원 상당법어에서는 “내 문하에서는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한다. 정이란 모든 망상이 떨어진 것을 말한다. 정이 없이 얻는 혜는 건혜(마른 지혜)다. 옛날 달마 스님이 이조 혜가에게 처음으로 가르치기를 ‘밖으로 모든 반연을 끊고 안으로 헐떡거림이 없어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 도에 들어갈 수 있다’ 하였으니 이것이 입도요문(入道要門)”이라며 정과 혜를 함께 닦도록 주문했다.


그런 효봉도 불교정화 시절에 “큰 집이 무너지려 하니 여럿의 힘으로 붙들라”며 그토록 꺼리던 시정에 나왔다. 종단 일을 수습하기 위해 종회의장과 총무원장 자리에 오르기도 했고, 네팔에서 열린 세계불교도대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세간에 나와 있을 때도 선사로서의 풍모는 여전했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 생일 초대로 경무대를 찾은 날, 이승만이 효봉의 생일을 묻자 “생불생(生不生) 사불사(死不死), 살아도 산 것이 아니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데 생일이 어디 있겠소”라고 답한 일화는 지금도 널리 회자되고 있다.


효봉은 후학들에게 경학과 옛 선지식들의 어록을 보도록 독려했다. 1949년 10월 동안거 결제법어 때는 경학을 공부하는 학인들에게 특별히 경학을 공부하는 자세를 일러주기도 했다.

 

“무릇 경론을 공부하는 사람은 무엇을 위해서인가. 그것을 세간법에 비하면 의학자는 모든 사람의 병을 고치는데 그 목적이 있고, 사업가는 갖가지 사업을 경영하는데 목적이 있으며, 법학자는 행정이나 사법으로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경학을 공부하는 사람도 불조의 어록을 공부하여 불조가 되는 문에 들어가 실천하는데 그 목적이 있으니, 그같이 하면 학인과 교수가 다 이롭겠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자신과 타인을 다 속이는 일이다.”


또 ‘대승기신론’을 공부하는 기신론산림 회향 때는 “문자가 있는 ‘대승기신론’의 논주는 마명 대사이지만 문자 없는 ‘대승기신론’의 논주는 누구인가. 다시 묻노니 이 ‘대승기신론’이 말세 중생의 신근을 키웠는가. 혹은 말세 중생의 신근을 끊었는가”라고 묻고 “만일 그것이 말세 중생의 신근을 끊었다면 마명 대사는 나를 위해 밝은 스승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것이 말세 중생의 신근을 키웠다면 마명 대사는 내 원수가 될 것”이라며 문자에 매달리지 말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경학을 공부하되 그에 매달리지 말라는 간곡한 선지식의 가르침인 것이다.


효봉은 그런가 하면 옛 선지식들의 어록을 스승으로 삼을 것을 권하기도 했다. 어느 때인가 법상에서 “몇 십 년을 두고도 바른 눈을 아직 밝히지 못했다면 그것은 자신의 그릇된 소견에 얽혀 있기 때문”이라고 수행자들을 경책했다. 그리고 이어서 “그럴 때는 선지식을 찾아 다시 공안을 결택하라. 가까이 그런 선지식이 없을 때는 옛 사람의 어록으로 스승을 삼아야 한다”며 어록을 통해서 배울 수 있음을 강조했다.

 

그렇게 자상한 가르침으로 후학들의 공부를 돕던 효봉은 1966년 10월 입적에 이르러 마지막 말씀을 청하는 제자들에게 “나는 그런 군더더기 소리 안할란다. 지금껏 한 말들도 다 그런 소린데”라며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는 “내가 말한 모든 법(五說一切法) 그거 다 군더더기(都是早騈拇) 오늘 일을 묻는가(若間今日事) 달이 일천 강에 비치리(月印於千江)”라는 게송을 읊고 세납 79세 법랍 42세로 입적에 들었다. 

 

/ 법보신문

 

 

 

[종교와 인물-효봉스님]

한국인 최초 판사, 스님 되다

 

 

 

 “너나 잘해.”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 등장하는 유명한 대사 “너나 잘하세요”가 언뜻 떠오르지만, 이는 효봉스님이 평소 강조하던 법어 가운데 하나다.

◆“남의 잘못 들춰내지 말라”

어느 날 한 제자가 효봉스님에게 다른 스님의 잘못을 고자질하러 왔다. 이는 평소 계율을 강조했던 효봉스님의 뜻을 염두해 둔 것이었다.

“스님, 스님들 중 술 마시고 여자를 만나는 스님이 있습니다. 이를 바로잡으심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효봉스님은 무덤덤하게 “네가 보았단 말이지?”라고 되물었다.

그리고는 “네, 스님”

“수행자는 술 마시면 안 된다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여자를 가까이해서도 안 되는다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잘 알고 있군, 그래”와 같은 짧은 대화가 두 스님 간에 오갔다.

이후 효봉스님은 고자질하는 스님을 크게 꾸짖었다. “너나 잘해라, 이 녀석아!” 하고 말이다.

남의 잘못을 험담하는 것을 싫어했던 효봉스님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지 말고, 자신부터 아는 바를 잘 실천하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남의 잘못을 덮어줄 줄 알아야 함을 강조한 것이기도 하다.

효봉스님의 가르침은 오늘날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인터넷에 비방글이 난무하고, 선거판에서도 ‘네거티브 전략’이 오가는 등 상대방에게 상처를 내는 일이 잦아진 현대사회에서 한 번쯤 새겨둘 필요가 있는 듯하다.

효봉스님의 이력을 살펴보면 매우 독특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한국인 최초의 판사’라는 것. 일제강점기, 일본 와세다대학 법과를 졸업한 그는 1914년부터 평양복심법원에서 10년 동안 판사를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피고에게 사형을 선고하게 됐는데 이로 인해 죄책감과 회의감이 들어 결국 판사를 그만두고, 엿장수로 전국을 떠돌아다녔다.

◆늦깎이 스님 ‘절구통 수좌’ 되다

그렇게 정처 없이 3년간 떠돌아다니던 그는 금강산 신계사에서 석두스님을 만나 스승으로 모시고 출가했다. 당시 나이가 38살이었는데 다른 스님들에 비해 많은 나이였다.

때문에 더욱 수련과 정진에 힘을 다했고 이에 ‘절구통 수좌’라는 별명이 생겼다. 이는 밤에도 눕지 않고 앉은 채 수행했으며, 한 번 앉으면 절구통처럼 움직일 줄 모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출가 후 5년이 지나도 깨달음을 얻지 못한 그는 “깨닫기 전에는 죽어도 나오지 않겠다”는 각오를 하고선 1년 6개월간 금강산 법기암 뒤 토굴에 흙벽을 만들고 들어가 정진했다. 말 그대로 목숨을 건 정진이었다.

이후 깨달음을 얻고선 구산?법정스님 등 많은 후학을 길러냈으며, 고은 시인도 한때 일초라는 이름으로 효봉스님의 제자로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제자가 바로 법정스님이다. 법정스님의 가르침 ‘무소유’ 또한 효봉스님의 절약하는 모습과 가르침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또한 효봉스님은 한국불교 통합종단의 초대 종정으로 추대되며, 많은 업적을 남긴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천지일보=백지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