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돈오선(頓悟禪)
돈오는 일거에 다 깨달아 버린다는 뜻
어느날 갑자기 아닌 노력 있어야 성취
돈오선에서 돈오(頓悟)란 ‘한 번에 깨닫다’ ‘일거에 다 깨달아 버리다’라는 뜻이다.
이는 하나하나 단계적으로 깨달아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일시에 모든 것을 깨닫는 것, 또는 곧장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이런 참선수행법을 지향하는 것을 돈오선이라고 한다.
돈오(頓悟)는 점오(漸悟, ‘하나씩 차례대로 깨달아 나감’ 혹은 ‘수행의 단계를 거쳐서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는 방법’)를 비판하면서 탄생한 사상 혹은 수증관(修證觀, 닦아 깨닫는 방법)이다.
따라서 점오의 반대적 개념에서 이해하는 것이 더 용이할 것이다. 이것을 야구에 비교하면 돈오는 만루 홈런 한방으로 끝내는 것이고, 점오는 매회 안타를 쳐서 차근차근 점수를 추가해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의할 것은 홈런이라는 것도 꾸준히 연습, 노력한 결과 나오는 것이지 노력 없이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돈오란 깨닫는 순간을 가지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돈오선은 계통적으로는 육조혜능(慧能, 638∼713)의 남종선을 가리킨다.
남종선이라면 대통신수의 북종선을 제외한 선, 즉 임제종, 조동종(묵조선), 위앙종, 운문종, 법안종 등 중국의 5가7종을 통칭한다. 역사적으로는 당(唐) 중기 이후의 선은 거의 다 돈오선이라고 할 수 있다.
육조혜능은 돈오에 대하여 ‘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지식들이여(여러분), 나는 홍인화상의 수행처에서 한마디의 가르침을 듣고 그 말에서 즉시 깨달았소.
곧바로 진여의 본성을 깨달았소. 그래서 이 교법을 널리 펴서 도(道)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곧장 보리(진리)를 깨닫게 하고자 하는 것이오.
각자 자기의 마음을 관찰하여 자기의 본성을 돈오케 하기 위함이오
(善知識. 我於忍和尙處, 一聞言下大悟,
頓見眞如本性. 是故, 將此敎法, 流行後代, 令學道者, 頓悟菩提.
各自觀心, 令自本性頓悟.
‘六祖壇經’ 般若品)”
돈황본 ‘단경’에는 또
“오조화상은 깊은 밤(三更)에 나(혜능)를 조사당으로 불러 ‘금강경’을 설해 주었다.
나는 한번 듣고 즉시에 ‘금강경’의 뜻을 깨달았다.
그날 밤 오조홍인화상으로부터 법을 받았는데, 그 누구도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없었다. 또 홍인화상으로부터 돈법(頓法)과 가사를 전해 받았다
(五祖夜至三更, 喚慧能堂內, 說金剛經.
慧能一聞, 言下便悟.
其夜受法, 人盡不知, 便傳頓敎及衣)”라고 기록하고 있다.
원래 이 돈오사상은 육조혜능이 창안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 약 300년 정도 앞서 활동했던 도생(道生; 竺道生, 355~433)이 처음으로 주장한 것이다.
도생은 승조와 함께 구마라습의 4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돈오성불론’이라는 글에서 종래의 수행 방법인 점수를 비판하면서 돈오를 주장했으나 당시에 이 주장은 호응을 받기는커녕 터무니없는 설이라고 하여 도생은 배척을 받고 쫓겨났다.
돈오, 즉 어느 순간에 한 번에 모두 깨달아 버린다는 것은, 하나하나 깨달아 간다는 점오(漸悟)의 논리와 대비하여 본다면 매우 매력적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한방에 이루어진다는 것이 멋은 있지만 실제 가능한지가 문제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모든 것은 부단한 노력 끝에 이루어진다.
다만 이루어지는 그 순간의 느낌으로는 ‘어느 날 갑자기’일 수는 있다.
그래서 ‘돈오’라고 할 수 있지만, 자칫 돈오주의는 노력은 하지 않고 어느 순간에 깨닫게 되겠지 하고 막연히 기대하게 되는 병통을 낳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16. 보조선(普照禪)
보조지눌 스님의 선사상과 수행법
유일하게 우리나라에서 형성된 선
보조국사 지눌(普照知訥, 1158~1210)의 선사상, 가르침, 수행법을 ‘보조선’이라고 한다.
보조국사는 고려 시대 선승으로 최초로 우리나라에 화두참구의 간화선을 도입, 정착시킨 이다.
선에는 조사선, 간화선 등 전통적인 선 외에도, 달마선, 임제선, 우두선 등 선승의 이름을 딴 다양한 선이 있다. 이들은 모두 탁월한 안목과 지도방법, 그리고 선풍(禪風)으로 납자들을 교화하여 한 시대를 풍미했다. 지금도 그 가르침이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는데, 보조선도 그중 하나이다.
여러 가지 이름의 선은 거의 다 중국에서 형성되었다. 그런데 유일하게 우리나라에서 형성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보조선이다. 어떤 하나의 사상이나 학파도 마찬가지지만 선 역시 하나의 유파(流派)로 기록되자면 특출한 사상과 가르침, 지도방법, 그리고 문파가 있어야 한다. ‘보조선’이라는 명칭으로 정착될 수 있었던 것은, 보조지눌의 사상과 가르침, 수행법이 탁월했고, 그 문하에서 무려 16국사가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보조선의 개창자인 보조지눌은 고려 중기의 선승으로 자호(自號)는 목우자(牧牛子)이다. 8세에 출가하여 25세에 승과(僧科)에 합격했다. 어느 날 ‘육조단경’을 읽다가 “진여는 자각(自覺)의 본체이다. 자각은 진여의 지혜작용이다. 자성이 자각하여 보고 듣고 느끼고 알지만, 그 진여는 만 가지 경계에 물들지 않으며 항상 자재하다(眞如, 是念之體. 念是眞如之用. 自性起念, 雖卽見聞覺知, 不染萬境, 而常自在)”라는 구절에 이르러 문득 깨달았다. 그리고 ‘대혜어록(大慧語錄)’의 “선은 고요한 곳에도 있지 않고 시끄러운 곳에도, 일상의 생활 속에도 있지 않고 사량분별하는 곳에도 있지 않다”는 구절에서도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조계산 송광사에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조직하고, 습정균혜(習定均慧), 즉 정혜쌍수를 바탕으로 수행할 것을 강조했다.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 성성적적을 균등하게 가질 것),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 화엄론에 의한 수행, 깨달음), 간화경절문(看話徑截門, 화두참구를 통한 돈오의 깨달음)의 3가지 방법을 가지고 수행자들을 지도했다.
보조선은 우리가 알고 있는 조사선, 간화선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다만 수행법에 있어서 강조하는 것이 있다면 정혜쌍수이다.
‘정혜쌍수(定慧雙修)’란 정(定)과 혜(慧)를 함께 닦아야 한다는 뜻으로,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는 수행법인 선정(禪定, 깊은 명상)과 현상 및 본체를 관조하는 지혜(智慧)를 함께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이것을 ‘정혜등지(定慧等持, 정과 혜를 균등하게 유지함)’라고도 한다. 화두를 참구할 때에는 적적(寂寂)과 성성(惺惺) 어느 하나에 편중하는 것을 경계(警戒)하고 이 두 가지를 함께 닦는 것으로 곧 수(修)와 오(悟)의 병행이라고 할 수 있다. 보조지눌의 논리는 정(定)이나 혜(慧) 어느 하나에 치우치는 것은 참다운 수행의 길이 아니라는 것으로, 요컨대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선정과 지혜를 닦는 수행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혜쌍수는 오늘날 한국선불교의 수행법이기도 한데, 이것을 더 확장하여 해석하면 참선(좌선, 명상, 삼매)과 동시에 지혜를 갖추는 수행을 병행해야만 올바른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로지 앉아 있는 좌선중심주의도 옳지 못하고, 지혜중심주의로 수행하는 것도 옳지 못하다.
다만 선정의 방법은 삼매 하나인데 비하여, 지혜를 갖추는 방법은 하나일 수만은 없다. 지혜를 갖추자면 학문적 지식과 경험적 지식, 깊은 사유(觀照), 그리고 정법안장(正法眼藏, 정법을 볼 줄 아는 탁월한 안목)을 갖춘 훌륭한 선승의 법문을 듣는 것도 반드시 필요하다.
윤창화
/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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