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 이준관
연기가 오른다.
그러나 나무보다 더 높이
오르지 못한 연기들은
그만 내려와 어스름 저녁이 된다.
그 저녁을 아이들은 와와 몰고 가지만
저녁은 슬그머니 빠져 나와
어머니의 고달픈 주름살과 함께
닭장으로 부엌으로 김치독으로
부지런히 옮겨 다닌다.
그러다 아이들이 돌아올 때쯤
밥에 뜸을 다 들이고 이제는
바쁜 허리를 조금 조금 펼 때쯤
저녁은 팽나무 위로
빨간 달을 올려 보내고
자꾸만 칭얼거리는 벌레들은
풀밭으로 놓아 보내고
바삐 바삐 뒷산으로 넘어 간다.
저녁별 / 이준관
강가에서 물수제비 뜨다 오는 소년이
저녁별을 쳐다보며 갑니다
빈 배 딸그락거리며 돌아오는 새가 쪼아먹을
들녘에 떨어진 한 알 낟알 같은
저녁별
저녁별을 바라보며
가축의 순한 눈에도 불이 켜집니다
가랑잎에서 부스럭거리며 눈을 드는
풀벌레들을 위해
지상으로 한없이 허리를 구부리는 나무들
들판엔 어둠이
어머니위 밥상포처럼 덮이고
내 손가락의 거친 핏줄도
풀빛처럼 따스해 옵니다
저녁별 돋을 때까지
발에 묻히고 온 흙
이 흙들이
오늘 내 저녁 식량입니다
한 통 / 이준관
아픈 데는 어떠냐고
걱정스레 묻는 친구의
전화 한 통
보고 싶다
단 한 줄 적혀 있는
사랑하는 사람의
편지 한 통
인생에서
그 한 통이면
충분하다
물 한 통처럼
메아리 / 이준관
네가 소리쳐 부르면
난 우뚝 산으로 설래.
네 목소린 내 마음속에
깊이깊이 울려 퍼지겠지.
그걸 메아리로 돌려보낼래.
―너를 좋아해!
―너를 좋아해!
―정말이야!
―정말이야!
그러다 가끔 넌 장난도 치겠지.
―널 미워해!
그럼 난 움찔 놀랄 거야.
하지만 난 흉내쟁이가 아냐.
얼른 또 다른 메아리를 만들래.
―그래도 난 널 좋아해!
어렸을 때 혼자 산에 올라 곧잘 메아리를 불러내곤 했다. 메아리는 언제 불러내도 내가 기쁠 때는 기쁜 목소리로, 슬플 때는 슬픈 목소리로 변함없이 대답을 보내왔다. 저녁놀이 뜨면 빨간 저녁놀 빛깔로, 산머루가 익어가면 까만 산머루 빛깔로 한결같은 대답을 보내왔다. 언제나 불러낼 수 있는 메아리가 있어 나는 외롭지 않았다.
네가 소리쳐 부르면 우뚝 산으로 서서 네 목소리를 메아리로 돌려보내겠다는 생각이 참 아름답다. 산을 향해 '너를 좋아해!' 소리치면 메아리도 똑같이 '너를 좋아해!' 하고 대답한다. 그러나 이런 메아리도 가끔 장난을 친다. 친한 사이라도 가끔 얄궂은 장난이 끼어들 듯. 그러나 '널 미워해!' 하고 말해도 '그래도 난 널 좋아해!' 하고 대답해 줄 테다. 얼른 또 다른 메아리를 만들어서.
―신형건(19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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