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의 내력 / 김남극
위아래가 잘 맞아야 되는 거다
물푸레나무를 슥슥 깎아 탕탕 공이를 박아넣고
그놈 공이가 윗구멍에 척 맞아떨어져
오른쪽으로 슬슬 돌아가야 되는 거다
마른 강냉이를 타갤 땐 몸이 덜 달아
덜덜거리거나 써러럭 거친 소리룰 내서
삭지 않은 강냉이쌀을 내뱉는 거고
잘 불은 두부콩을 갈 때면
몸은 적당히 달아 올라
슥슥 스스슥 희멀건 콩물을 내뿜는 거다
콩을 다 갈고 나서 구박물을 훅 부으면
몸을 부르르 떨면서 확 온몸의 물을 내뿜는 거다
그게 가장 이상적인 교접이다
문제는 잘 돌리는 거다
박자를 맞추어 힘을 골고루 주고
오래 견디는 거다
문제는 움죽거리는 맷돌 입에다
적당히 마음을 쏟아붓는 거다
넘치면 막 차올라 속옷이 젖기도 하고
모자라면 뻑뻑해
맷돌이 닳기도 하는 거다
3세기를 살아온 맷돌이 마루 구석에 서 있다
이 집에서 난 2세기를 살았다
맷돌질하며 살았다
아침이 저녁 같다 / 김남극
아침이 저녁 같다
밤새 누군가 내 뼈를 다시 맞추고 갔나보다
마디마다 끼익 끼익거린다
어설픈 의사처럼 다리를 들었다 놨다
팔을 앞으로 뒤로 돌려보며
몸을 꿰어 맞춰본다
겸손한 나이가 지나가고 있으니
내가 몸을 굽혔다 폈다하면서
고개를 주억거리는 건 당연한 일
아침이 저녁 같고 또
저녁이 아침 같은 하루가 지나간다
옥양목 한 필 / 김남극
이젠 따로 이불을 깔고 잠자리에 드는
아버지 어머니 사이 같이
조금 벌어져 버린, 잘 맞지 않는 장롱 문을 열면
옥양목 한 필
고운 명주 보자기에 쌓여 있다
고비를 넘던 아버지의 청춘 빛이 남은
생애 유일한 상품이 되어버린 옥양목 한 필
1년에 한 번씩 일광욕하는 날
콩깍지를 벌리는 햇빛 속에 내어놓으니
햇살이 팅팅 튕겨난다
손 끝에 마음을 모아 쓰다듬어 보면
세월은 고운 결만 남기고 사라졌다
저 빛깔
언젠가 개울가에서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리고
망연히 앉아 바라보던
그 물빛 같은
산란기 맞아 여울살로 오르는 피라미
그 섬광 같은 비늘 빛 같은
저 빛깔
세월은 그 오랜 빛만 남기고 사라졌다
저 광택만 남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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