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영상시

집의 내력 / 김남극

경호... 2012. 11. 5. 13:50

 

 

 

 

 

 

집의 내력 / 김남극


위아래가 잘 맞아야 되는 거다

물푸레나무를 슥슥 깎아 탕탕 공이를 박아넣고

그놈 공이가 윗구멍에 척 맞아떨어져

오른쪽으로 슬슬 돌아가야 되는 거다

마른 강냉이를 타갤 땐 몸이 덜 달아

덜덜거리거나 써러럭 거친 소리룰 내서

삭지 않은 강냉이쌀을 내뱉는 거고

잘 불은 두부콩을 갈 때면

몸은 적당히 달아 올라

슥슥 스스슥 희멀건 콩물을 내뿜는 거다

콩을 다 갈고 나서 구박물을 훅 부으면

몸을 부르르 떨면서 확 온몸의 물을 내뿜는 거다

그게 가장 이상적인 교접이다


문제는 잘 돌리는 거다

박자를 맞추어 힘을 골고루 주고

오래 견디는 거다

문제는 움죽거리는 맷돌 입에다

적당히 마음을 쏟아붓는 거다

넘치면 막 차올라 속옷이 젖기도 하고

모자라면 뻑뻑해

맷돌이 닳기도 하는 거다


3세기를 살아온 맷돌이 마루 구석에 서 있다

이 집에서 난 2세기를 살았다

맷돌질하며 살았다

 

 

 

아침이 저녁 같다  / 김남극

 

아침이 저녁 같다


밤새 누군가 내 뼈를 다시 맞추고 갔나보다

마디마다 끼익 끼익거린다


어설픈 의사처럼 다리를 들었다 놨다

팔을 앞으로 뒤로 돌려보며

몸을 꿰어 맞춰본다


겸손한 나이가 지나가고 있으니

내가 몸을 굽혔다 폈다하면서

고개를 주억거리는 건 당연한 일


아침이 저녁 같고 또

저녁이 아침 같은 하루가 지나간다

 

 

 

옥양목 한 필 / 김남극

 

이젠 따로 이불을 깔고 잠자리에 드는

아버지 어머니 사이 같이

조금 벌어져 버린, 잘 맞지 않는 장롱 문을 열면

옥양목 한 필

고운 명주 보자기에 쌓여 있다

고비를 넘던 아버지의 청춘 빛이 남은

생애 유일한 상품이 되어버린 옥양목 한 필

1년에 한 번씩 일광욕하는 날

콩깍지를 벌리는 햇빛 속에 내어놓으니

햇살이 팅팅 튕겨난다

손 끝에 마음을 모아 쓰다듬어 보면

세월은 고운 결만 남기고 사라졌다


저 빛깔

언젠가 개울가에서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리고

망연히 앉아 바라보던

그 물빛 같은

산란기 맞아 여울살로 오르는 피라미

그 섬광 같은 비늘 빛 같은

저 빛깔

세월은 그 오랜 빛만 남기고 사라졌다

저 광택만 남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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