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 유종인
전생(前生)의 빚쟁이들이 소낙비로 다녀간 뒤
내 빚이 무엇인가
두꺼비에 물어보면
이놈은 소름만 키워서
잠든 돌에
비게질이다
단풍은 매일 조금씩 구간(舊刊)에서 신간(新刊)으로
한 몸을 여러 몸으로 물불을 갈마드는데
이 몸은
어느 춤에 홀려
병든 피를
씻기려나
추녀 밑에 바래 놔둔 춘란 잎을 어루나니
서늘타, 그 잎 촉(燭)들!
샛강 물도 서늘했겠다
막걸리 몇 말을 풀어서
적막 강심(江心)을
달래야겠다
국수 / 유종인
1
늙은 창녀와 먹어도 되고
노숙 노인과 먹어도 되네
도망 중인 조선족과 눈빛 깊은 네팔 人과
한 세월
젓가락질하며 울음 감춰 먹어도 되네
2
출출하신 어머니가 무덤 밖에 나셨을 때
무덤 문 닫히기 전에
아들과 서서 먹는
저승도 장수하시라
말아드린
잔치국수
좀 더 깊어 갈 가을을 위해 독자에게 유종인 시인의「가을은」을 한 편 더 소개하면서 시월을 엽니다.
퍼질러 앉는다.
청단풍나무에서 홍단풍나무로 물드는 길을 내 두 발은 쉼 없이 걸어서 가고, 내 마음은 단풍무덤에 퍼질러 앉아 있습니다. 내 몸은 어두워서 더 깊은 동굴 속에 갇혀 있어도, 이 복잡한 마음만은 가을국화 꽃향기를 곱하기하며 키웁니다. 허공에 퍼질러 앉아 쭉정이는 가려내고 한 톨의 낱알을 주워 더 깊은 호주머니에 담습니다. 낱알이 호주머니에서 들썩입니다. 이런 느낌은 무엇일까요? 몸의 행간에 뜨거운 밥을 짓는 것일까요? 아니면 내 영혼의 피부를 간질이며 돋은 떡잎 같은 그 봄을 기억하는 것일까요?
매우 따뜻한 꿈틀거림으로 다가옵니다. 내 몸은 세상물결 따라 흘러가지만, 내 마음은 눈빛이 머문 그 자리에 한참을 퍼질러 앉았다가 가뿐하게 자리를 옮깁니다. 가을은 참 행복한 계절입니다. 마음의 동공까지 확장시켜서 붉고 단아한 빛을 움켜쥐게 합니다. 움켜진 손가락이 시詩의 나라로 가는 길을 안내합니다. 손바닥을 펼치듯 시집 한 권 펼칩니다. 반짝이는 별이 내 손바닥 안에 있었다는 것을 시집을 통해서 깨달아가는 시간입니다.
오늘, 유종인 시인의 시조집 『얼굴을 더듬다』를 감상하는 시간의 초침은 멈추지 않습니다. 신비스러운 기氣운이 내 몸과 영혼의 우주 안에 뛰어놉니다. 까르르 까르르…
유종인 시인의 시조집 「국수」를 감상하는 동안 시인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습니다. 한 번도 본적 없는 시인의 시집에서 이렇게 보름달 같이 꽉 찬 친근감이 모서리에 기대고 있던 내 마음을 정중앙에 앉힙니다. 잊고 지낸 물컹한 그리움도 찾아줍니다. 이산가족 상봉보다 더 뜨거운 눈물이 흐릅니다.
‘무덤 문 닫히기 전에’ ‘아들과 서서 먹는’ ‘잔치국수’와 같이 「풀」「무연고 묘지에 내리는 눈」「파묘」등을 감상하는 시간은 걷잡을 수 없는 그리움과 후회가 교차하는 시간입니다.
이다음에 유종인 시인을 만난다면 꼭! 술 한 잔 권하고 싶습니다. 악수도 해보고 싶습니다. 그의 시의 기운도 받고 싶습니다. 그의 시조가 어쩌면 이리도 내 마음을 쿵쾅거리게 하는지… 좀처럼 흥분이 가라앉지 않습니다. 이것은 내 마음의 행간 폭이 좁아서 일까요? 아니면 그의 시조가 좁은 마음을 넓힌 것일까요? 한가위를 앞둔 달과 별들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합니다. 의미 있는 시조집과 동행한다는 것은 무한 행복입니다. 내 마음의 행복을 안겨 준 이 시조집에 감사드립니다.
유종인 시인의 첫 시조집 『얼굴을 더듬다』를 감상하는 동안 내 몸 주위로 가득히 메운 것은 오라였습다. 이 시조집을 받아들이는 것은 나의 몸이 아니고, 내 시각도 아니고, 내 후각도 아니었습니다. 시각과 후각의 느낌을 초월하는 신비스럽게도 내 영혼이 어느 詩의 우주에 닿아 교신하는 오라가 오색무지개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 그 무엇이 첫 페이지를 여는 순간부터 내 영혼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풀」「춘니」「마음」「팔레스타인」「묵집」「빈 화분을 보며」「파묘」「경계의 꽃밭」「채송화 소견」「선인장 소견」「연적을 사다」「꽃게에 물린 자국」「얼국을 더듬다」「수국」「사창가의 개오동나무」「가을은」「카메라 옵스큐라」「국수」「무연고 묘지에 내리는 눈」「촉지도를 읽다」「왕버들 목침」등 어느 것 하나 내 영혼의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오라는 그렇게 내 주위를 돌며 강한 빛을 발산하여 눈과 귀를 멀게 할 만큼 가을을 향해 강하게 다가왔습니다.
유종인 시인은 인천에서 출생하여, 1996년 『문예중앙』시 부문 신인상과 2003년 『동아일보』신춘문예에 시조가 당선되어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2011년 『조선일보』신춘문예 미술평론에도 당선됐다. 시집으로 『아껴먹는 슬픔』『교우록』『수수밭 전별기』『사랑이라는 재촉들』 등이 있으며, 시조집 『얼굴을 더듬다』가 있다.
/ 임성구의 시조바라기
유종인 시집 -『얼굴을 더듬다』(실천문학사, 2012)
시는, 필요 없는 말 덜 쓰는 거죠
제12회 미당·황순원 문학상 - 본심 후보작
시 - 유종인 ‘눈과 개’외 18편
유종인의 시에는 세련된 언어 감각이 빛난다. “서정적 언어의 밀도가 높다”거나 “정서를 포착할 때 흐트러지지 않고 시를 깔끔하게 마무리한다”는 평을 듣는다. 묵묵한 사물, 그 결과 켜에 귀 기울여 마음을 발견하는 것이 시인의 일이라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시인 유종인(44)을 거쳐 나온 언어는 맵시가 있다. 예심 심사위원인 이영광 시인은 “유종인은 말의 뉘앙스와 결을 잘 살려 낡고 별것 아닌 것에서 새로운 의미를 빚어내는 데 능하다”며 “정서는 옛것에 기대어 있지만 세련된 언어 감각을 구사한다”고 평가했다.
그의 시작에서 두드러지는 건 순우리말의 구사다. 본심에 올라간 작품과 지난해 나온 시집 『사랑이라는 재촉들』은 순우리말의 향연이다.
“순우리말에는 풍경이나 영상 이미지가 담겨 있어요. ‘비설거지’란 말이 있는데, 비가 오기 전에 빨래를 걷거나 비를 맞으면 안 되는 물건을 치우고 덮는 등 단도리한다는 말이에요. 서술어를 쓰지 않아도 그 모습이 그려지죠.”
순우리말이 그를 사로잡은 것은 사물을 바라보는 그의 태도가 달라진 데도 이유가 있다.
“시가 딱딱해져서 불만이었어요. 일방적으로 앞서 말하려 해서 그런거였어요. 사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 켜와 결을 들여다보지 못했다는 자책이 생겼어요. 사물의 말을 듣게 하는 게 순우리말이었어요.”
‘시(詩), 서(書), 화(畵)를 넘나드는 상상력을 보여준다’는 평을 듣는 그의 시는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언어라는 붓으로 그려내는 시의 이미지는 묵향이 은은한 동양화와 겹쳐지고, 군더더기를 쳐낸 시어는 동양화의 여백과 닮았다.
“시는 필요없는 말을 덜 쓰는 거에요. 시인은 글을 버리며 살 수는 없지만, 그런 회의가 있어야 진실에 가까운 말을 쓸 수 있죠.”
그는 시를 쓰는 마음은 부모의 마음으로 주변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고 했다.
“아버지는 정취를 즐기는 풍류를 남겼고, 어머니는 시의 기본 바탕인 마음자리를 가르쳐주셨어요. 늘 생각하고, 기도하고 걱정하고, 마음을 졸이는 ‘지극한 마음’이에요. ”
지극한 마음은 사랑이고, 사랑은 관심이다. 지극한 마음을 갖고 주변의 사물에서 정취를 찾아내는 그의 눈에 든 것이 돌과 이끼 등이다.
“이끼는 꽃도 못 피고 그늘에 있는 존재죠. 소담스러우면서도 아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푹신한 방석에 앉은 느낌도 주고, 쓰다듬으면 가만한 위로도 되요. 사람도 그런 존재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늦되고 더디고 세련되지 않았지만 사람과 자연의 마음을 알아가는 것이 크다고 했다. 말에 얽혀 있지만 마음을 들여다보지 않는 요즘의 세태 속에 그가 시에 담고 싶은 것은 마음이다.
이끼 / 유종인
그대가 오는 것도 한 그늘이라고 했다
그늘 속에
꽃도 열매도 늦춘 걸음은
그늘의 한 축이라 했다
늦춘 걸음은 그늘을 맛보며 오래 번지는 중이라 했다
번진다는 말이 가슴에 슬었다
번지는 다솜,
다솜은 옛말이지만 옛날이 아직도 머뭇거리며 번지고 있는
아직 사랑을 모르는 사랑의 옛말,
여직도 청맹과니의 손처럼 그늘을 더듬어
번지고 있다
한끝 걸음을 얻으면 그늘이
없는 사랑이라는 재촉들,
너무 멀리
키를 세울까 두려운 그늘의 다솜,
다솜은 옛말이지만
사랑이라는 옷을 아직 입어보지 않은
축축한 옛말이지만
/ 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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