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이야기 / 문정희
잠시 반짝이다 결국 깨어지는 유리가
사랑을 닮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모래를 끓여 유리를 만드는 동안
천 도의 불꽃으로 타오르던 사랑이
거짓말처럼 얇은 한 조각 파편으로 남을 때
신을 향해 돌거나
해를 향해 돌거나
결국 어딘가를 향해 돌고 도는 작은 심장을
유리로 한번 들여다보고 싶을 때가 있다
어찌하여 나는 유리를 믿지 못하는가
유리처럼 먼 곳을 투시해보고 싶은 목숨일 뿐인가
내 안의 신을 향해
내 안의 해를 향해
끝없이 묻는 것이 전부인가
망원경이 되어 별자리를 바라보고
하늘 중에서도 깊은 하늘을 항해하다
그만 깨지고 마는 유리를 닮은
내 사랑은 어찌하여 이리도 슬픈 두께여야 하는가
김치 / 문정희
미안해요, 어머니
나는 김치가 그립지 않아요
그 아리고 매운맛을 벌써 잊어버렸나 봐요
나의 혀는 이미 창녀가 다 되어
아무거나 입으로 들어오는 대로 받아들이네요
진종일 한마디도 써본 적이 없는 모국어와
외로움에 굶주린 창자는
결국 홀로 꿈틀거리던 혀를 마비시켰나 봐요
무엇이건 들어오는 대로 씹고 삼키려 하네요
당신을 떠나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밤마다 세고 그리워하다가
서걱이는 이국종 햇살에 길이 들고
몸뚱이는 바람 든 무우처럼 윙윙거릴 뿐이네요
소꿉장난 / 문정희
사랑하는 그 애
오래 물 속에 같이 살고 싶은
물고기 같은 남자
글쎄, 일곱 살에 벌써 사내가 된
미운 그 남자
"너는 엄마고 나는 아빠다"
꽃잎 빻아 김치 담아
아침 먹고 점심 먹고 저녁 먹고
그리고 그 담엔 할 일이 없어
조금 생각해 보다가
엄마 아빠처럼 포개 자버린 애
사랑하는 그 애
맹수 같은 한숨 후르륵 몰아쉬며
땅을 박차고 튀어오르는 폭풍우
글쎄, 그 속에 내 생애를 사납게 가둬버린
미운 그 남자
<찔레>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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