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빙(結氷)의 아버지 / 이수익
어머님,
제 예닐곱 살 적 겨울은
목조 적산 가옥 이층 다다미방의
벌거숭이 유리창 깨질 듯 울어 대던 외풍 탓으로
한없이 추웠지요, 밤마다 나는 벌벌 떨면서
아버지 가랭이 사이로 시린 발을 밀어 넣고
그 가슴팍에 벌레처럼 파고들어 얼굴을 묻은 채
겨우 잠이 들곤 했었지요.
요즈음도 추운 밤이면
곁에서 잠든 아이들 이불깃을 덮어 주며
늘 그런 추억으로 마음이 아프고,
나를 품어 주던 그 가슴이 이제는 한 줌 뼛가루로 삭아
붉은 흙에 자취 없이 뒤섞여 있음을 생각하면
옛날처럼 나는 다시 아버지 곁에 눕고 싶습니다.
그런데 어머님,
오늘은 영하(零下)의 한강교를 지나면서 문득
나를 품에 안고 추위를 막아 주던
예닐곱 살 적 그 겨울밤의 아버지가
이승의 물로 화신(化身)해 있음을 보았습니다.
품 안에 부드럽고 여린 물살은 무사히 흘러
바다로 가라고,
꽝 꽝 얼어붙은 잔등으로 혹한을 막으며
하얗게 얼음으로 엎드려 있던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우울한 肖像 / 이수익
오, 어머니
왜 당신은 눈물을
글썽이나요?
왜 당신은 앞으로 바라보질 못하고
옆으로만 보시나요?
어머니
그전부터 나는 당신에게서
우리는 매일 아름다운 비쟌틴을 향해
걸어가고 있노라고, 들어 왔읍니다.
그리고 지금은 새들이
天上 높이 떠서 노래하고
사방에서 꽃들이 樂想처럼 피어남을
보고
내가 마치 영광의 正門을 통해
입장하려는 걸
느끼는데
오, 어머니
당신은 왜 말없이 눈물만
흘리나요?
열애 / 이수익
때로 사랑은 흘낏
곁눈질도 하고 싶지.
남 몰래 추억도 만들고 싶지.
((외도(外道)도 즐기고 싶지)
어찌 그리 평생 붙박이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나.
마주 서 있음 만으로도
그윽이 바라보는 눈길만으로도
저리 마음 들뜨고 온몸 달아올라
절로 열매 맺는
나무여, 나무여, 은행나무여.
가을부터 내년 봄 올 때까지
추운 겨울 내내
서로 눈 감고 서 있을 동안
보고픈 마음일랑 어찌하느냐고
네 노란 연애편지 같은 잎사귀들만
마구 뿌려대는
아, 지금은 가을이다. 그래, 네 눈물이다.
나의 하얀 손 / 이수익
그녀의 가슴 속으로
나의 하얀 손이 흘러들어간다
고요하게 그녀의 시선이 멈춘 채
내가 피워낼, 서투른 몇 송이의 장미를
함께 감상해 보자는 것이다
펄럭이는 그녀의 가슴 속에서 나는
침이 마른다 얼굴이 온통 시뻘겋게 부어오른다 숨이
탁, 탁 막힐 것 같다 그리고
火傷으로 부푸는 상처들을 기억해 내려고 할 것이다
나의 하얀 손이 그녀의 두 젖가슴을
휩쓸어가는 동안 오,
그녀는 뜨거운 죽음처럼 기립해 있다
<시인시각> 2011
'#시 > 영상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집의 내력 / 김남극 (0) | 2012.11.05 |
---|---|
유리 이야기 / 문정희 (0) | 2012.11.05 |
춘향의 노래 / 복효근 (0) | 2012.11.05 |
그대에게 가는 길 / 박시교 (0) | 2012.11.05 |
네가 앉은 그 자리가 꽃자리다 ...... 구상 (오상순) (0) | 2012.1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