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부 / 장석남
오도카니 앉아 있습니다
이른 봄빛의 분주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발목이 햇빛 속에 들었습니다
사랑의 근원이 저것이 아닌가 하는 物理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빛이 그 방에도 들겠는데
가꾸시는 매화 盆은 피었다 졌겠어요?
흉내내어 심은 마당가 홍매나무 아래 앉아서 목도리를 여미기도 합니다
꽃봉오리가 날로 번져 나오니 이보다 반가운 손님도 드물겠습니다
行事 삼아 돌을 옮겼습니다
돌 아래, 그늘 자리의 섭섭함을 보았고
새로 앉은 자리의 청빈한 배부름을 보았습니다
책상머리에서는 글자 대신
손바닥을 폅니다
뒤집어보기도 합니다
마디와 마디들이 이제 제법 古文입니다
이럴 땐 눈도 좀 감았다 떠야 합니다
이만하면 안부는 괜찮습니다 다만
오도카니 앉아 있습니다
[이달에 만나는 詩]
그 님의 매화… 봄 손님이 발갛게 오셨을까
《 새초롬한 봄바람 사이로 홍매나무 꽃봉오리들이 빼꼼히 얼굴을 내민다. 길어진 오후 햇살은 마당가 제 발치까지 닿아있다. 다시 봄이 움트려 한다. 문득 먼 곳에 계신 선생님, 어머니, 그리고 먼저 세상을 뜬 사람들을 떠올린다. 발갛게 솟아오른 꽃망울은 그들이 내게 보낸 봄 인사일까. 》
장석남 시인
‘이달에 만나는 시’ 3월 추천작으로 장석남 시인(47)의 ‘안부’를 선정했다.
지난달 나온 시집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문학동네)에 수록된 시다. 시인 이건청 장석주 김요일 이원 손택수 씨가 추천에 참여했다.
봄이 오는 길. 마당가 매화나무에 불그스름한 꽃망울에서 시인은 안부 인사를 떠올린다.
“전화도 있고 다른 무엇도 있지만 꽃소식으로 안부를 묻는 멋은 괜찮지 않은가.
함께 같은 종류의 꽃을 본다는 것처럼, 이심전심 괜찮으시냐는 안부처럼, 그윽한 것도 없다. 해마다 이맘때면 매화 봉우리를 보며 주위 분들의 안부를 스스로 묻곤 한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한층 깊어진 사유와 서정적 세계를 보여준다. 이는 ‘고요’라는 시어로 응축된다.
“말 이전이 침묵이라면, 말 이후의 그것은 고요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말을 다 삭히고 난 세계, 결론 이후의 세계, 편안한 세계이기도 하고 허무한 세계이기도 하겠으나 끝내 우리가 갈 수밖에 없는 세계….”
모든 경쟁 원리나 세속적 욕망을 버려야 닿을 수 있는 게 고요인 것 같다고 시인은 말했다.
손택수 시인은 “‘오도카니’ 고독하다. 외로움이 봄볕을 더 눈부시게 한다. 매화분을 키우는 이의 안부가 문득 그리워지는 이 가난한 외로움은 골똘하고 하염없어서 그 맑음으로 하여 세상을 다 ‘꽃봉오리’로 만든다.
봄(春)은 봄(視)에서 온다”고 추천 이유를 밝혔다.
“장석남은 우리 시단의 흔치 않은 고요파 시인 중의 하나다. 그는 고요의 겸손으로 말갛게 씻긴 사물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에게 고요는 취향이 아니라 사유의 본질이다. 장석남의 시집들은 마음이 시끄럽고 어수선할 때 읽으면 딱 좋다.” 장석주 시인의 추천사다.
장석남 시집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파도 너머 고요를 시경으로 보여주는 7번째 신작
"상실의 아픔을 아늑한 서정으로 달래 껴안는 것"
인천 연안부두에서 쾌속정으로 1시간을 달려야 닿을 수 있는 덕적도에 탯줄을 묻은 시인 장석남(47)씨가 파도 너머의 고요를 시경(詩經)으로 보여주는 7번째 신작 시집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문학동네)를 들고 돌아왔다.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니 시력은 벌써 25년이 됐다.
장씨는 이번 시집에 절제된 시어로 일상 속에서 미묘하고도 깊은 서정을 보여주는 시 60편을 묶었다. 각 시에서 드러나는 서정은 단아하면서도 청매빛처럼 고요하다.
"저물면 아무도 없는 데로 가자/
가도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고요의 눈망울 속에 묻어둔/
보석의 살들- 이마 눈 코/
깨물던 어깨, /
점이 번진 젖, 따뜻한 꽃까지 다 어루어서/
잠시 골라 앉은 바윗돌아 좀 무겁느냐?/
그렇게 청매빛으로다가 저문다//
결국 모과는 상해버렸다"
('저물녘-모과의 일' 전문)
그래서 자주 아침과 서산 아래 어둠, 솔바람이 그를 지천에서 감싸고 먼지와 검불이, 돌멩이와 그림자는 친구가 된다. 번잡한 도시에서 길을 잃은 고요는 생생하게 살아나고 이를 통해 사람 또한 살아있음을 느끼도록 한다.
시력 25년의 장석남씨는 7번째 신작 시집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를 펴내며 "만해(한용운)가 한겨울 널따란 냇물을 맨발로 건너며 중간에서 이도 저도 할 수 없었다던 고초 이야기도 생각난다"고 말한다.
문학동네 제공
"그 집은 아침이 지천이요/
서산 아래 어둠이 지천/
솔바람이 지천이다/
먼지와 검불이, 돌멩이와 그림자가 지천이다/
길이며 마당가론 이른 봄이 수레째 밀렸고/
하늘론 빛나며 오가는 것들이 문패를 빛낸다//
나는 큰 부자가 되길 원했으므로/
그 부잣집에 홀로 산다/
쓰고도 쓰고도/
남고 남아 밀려내리는 고요엔/
어깨마저 시리다"
('와운산방' 전문)
장 시인의 이 같은 서정을 '호젓함'이라고 규정한 문학평론가 엄경희씨는 "근심과 무거움을 껴입고도 편안한 기분이 드는 바로 그 지점에서 호젓함은 생성된다"며 "상실의 아픔을 아늑한 서정으로 달래 껴안는 것, 이것이 장석남의 호젓함"이라고 분석했다.
생활도 자연스럽게 한 자리를 잡는다. 그러니까 어느 날 경기도 양평 길에서 무쇠 솥을 샀을 것이다. '꽃처럼' 무거운 솥을 차에 싣고 집으로 돌아온 뒤 솥을 씻고 쌀과 수수, 보리를 섞어 안친다. 불을 때 밥을 짓고 구수한 밥 냄새를 맡으며 아마 솥을 이용한 먼 조상을 떠올렸으리라.
"양평 길 주방기구종합백화점/
수만 종류 그릇의 다정한 반짝임과 축제들 속에서/
무쇠 솥을 사 몰고 왔다/
-꽃처럼 무거웠다/
솔로 썩썩 닦아/
쌀과 수수와 보리를 섞어 안친다/
푸푸푸푸 밥물이 끓어/
밥 냄새가 피어오르고 잦아든다/
그 사이/
먼 조상들이 줄줄이 방문할 것만 같다"
('무쇠 솥' 부문)
매운 시간의 그늘은 또 어떤가. 시간은 나이로 쉼없이 향하고 급기야 쉽지 않은 존재로 자리 잡는다. 하긴 20대 초반부터 시를 써온 그가 벌써 40대 후반이 됐으니 중년도 많이 쌓였을 터이니.
"봉숭아는 분홍을 한 필/
제 발등 둘레에 펼치었는데/
마당은 지글거리며 끓는데/
하산한 우리는 된 그늘을 두어 필씩 펼쳐놓고서/
먹던 물 대접 뿌려서 마당귀 돌멩이들 웃겨놓고서/
민둥산을 이루었네"
('중년' 전문)
장씨는 '시인의 말'에서 "만해(한용운)가 한겨울 널따란 냇물을 맨발로 건너며 중간에서 이도 저도 할 수 없었다던 고초 이야기도 생각난다"고 시력 25년의 처지를 빗댄 뒤 "나는 아직 어느 경계 안으로도 들어서지 못했다"고 진단했다. 그의 진심을 느끼려 하니, 시란 결국 고민과 결핍의 산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 세계 김용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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