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조 속에선 허리께만큼 눈이 쌓여 오가도못하는 암자에서 홀로 우는 노승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다. 시장바닥에서 발가벗고 춤을 추는 괴승의 헛헛한 웃음이 보이는 듯도 하다. 조오현 스님은 시조 ‘내가 나를 바라보니’에선 “온갖 것 다 갉아먹으며 배설하고 알을 슬기도 하는 벌레 한 마리”가 된다. ‘산에 사는 날에’서는 하루는 풀벌레로 울고 하루는 풀꽃으로 웃는다,
짧막한 시조 한 수 속의 블랙홀에 들어가면 억겁 동안 쌓인 자신의 한을 만나게 된다. 그러다 시조 ‘어미’에 이르러서는 설움을 토해내며 울지 않을 수 없다. 이 시조의 어미소는 죽도록 일하다 힘이 떨어지자 미처 젖도 못 뗀 새끼를 두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다가 당산 길 앞에서 주인을 떠박고 헐레벌떡 뛰어와 새끼에게 젖을 먹여준다.
어린시절 소머슴으로 절에 들어가 살기 시작해 파란고해를 거친 스님은 지금 고통 중생을 적멸로 이끄는 ‘설악산 신흥사’ 조실이다. 만해상과 만해축전을 만든 주인공이기도 하다. 해마다 만해축전에서 시인학교와 시낭송회 등 시인잔치가 빠지지 않는다.
이 책은 문학평론가 권영민 서울대 명예교수가 엮었다. 만해축전에 참가했다가 저자와 첫만남에서 ‘쓸데없는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는 핀잔을 들었다는 권 교수는 서문에서 지난 2005년 ‘세계평화시인대회’ 만찬장에서 오현 스님이 예정이 없이 즉흥적으로 발표한 시조를 소개한다.
삶의 즐거움을 모르는 놈이
죽음의 즐거움을 알겠느냐
어차피 한 마리
기는 벌레가 아니더냐
이다음 숲에서 사는
새의 먹이로 가야겠다.
이번 책 ‘적멸을 위하여’는 이 시조의 제목이다. 권 교수는 그때 이 시조를 들은 노벨문학상 수상자 월레 소잉카 시인이 “이 시 하나에 ‘평화’라는 우리의 주제가 다 압축되어 있다”면서 “대단한 인물”이라고 감탄했던 사실을 전한다.
“끝없이 기침을 하며 비릿비릿하게 살점 묻은 피를 토해내는”(‘천만’)
그의 시조는 우리 몸속에 켜켜히 쌓인 어혈을 쏟아내게 하는 마중물이다. 고통이 없는 행복이, 비움이 없는 충만이, 집착이 없는 적멸이, 죽음이 없는 삶이 있을 것인가. 한 차례 추위가 뼈에 사무치지 않고 어찌 이처럼 코를 찌르는 매화향기를 얻겠는가.
조현 종교전문기자 / 휴심정
'#사색 > 책 소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 맥주가 독일 맥주보다 맛 없는 이유 (0) | 2013.03.23 |
---|---|
부엌의 바이블 요리책 (0) | 2013.01.21 |
안부 / 장석남 (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문학동네)) (0) | 2012.07.02 |
불쑥 너의 기억이 / 이정하 (0) | 2012.07.01 |
만나라, 사랑할 시간이 없다. / 신현림 (0) | 2012.07.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