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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뭔데 .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 전우익

경호... 2012. 7. 1. 11:35

 

 

 

 

사람이 뭔데 / 전우익 

 

 

우린 밥만 먹고 사는 게 아니라
사계절도 먹고 살지요.
계절을 피부로, 마음으로, 눈과 코로 마시지요.
누군가 말했어요.
살림살이는 비록 구차하지만
사계절이 있어 풍성하다고요.
산다는 것이 힘들지만 그 힘든 고비를 넘기면
신나는 데가 있습니다.
'힘들지만 신난다'
이런 게 사는 것 같아요....

 

 

사람이 뭔데, 인간이 뭔데, 내가 뭔데하는 생각이 듭니다.

편지랑 소포 부치며 <보내는 사람><받는 사람>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아요.

그래서 <보냄><받음>만 쓰고 '사람'은 뺍니다.

참사람 구실은 도저히 못할 것 같고 가짜 사람 노릇은 하고 싶지 않아서요.

인권에만 매달린 사람은 가짜 같아요.

천지만물에 두루 성스러움과 존엄함이 깃들어 있음을 알고 받들어 대접하는 사람이 참 같아요..

 

 

 

연리지란 나무끼리 가지가 맞닿아 결이 서로 통한 걸 말하는데요.

엄나무는 어린 줄기에 탄력이 있어 나무끼리 묶어주면 잘 붙어 한그루가 된대요.

이런 나무가 뜰에 있으면 집안이 화목하대요.(P27)

 

 

오래 사는 게 삶의 목표는 아니지만 몇 백 년 몇 천 년을 산 나무는 예사롭지 않은 존재 같답니다.

그 앞에 서면 존재의 뜻을 알 수 있을 것 같답니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 중에서 나무는 특별한 존재 같아 엄숙한 느낌이 듭니다. 크고 오래 묵은 나무는 늙음과 젊음을 더불어 살고, 삶과 죽음을 함께 안고 있답니다.

노거수(老巨樹)는 나무 전체에서 생명유지 활동을 하는 부분이 극히 적답니다. 나무의 태반은 이미 살아야겠다는 노력에서 자유로운 존재가 됐답니다. 이른바 아무일도 하지 않고 살고 있는 거죠.

이 나무는 이미 살아야겠다고 발버둥 치지 않는 존재가 되어, 다만 하늘과 땅을 우러러 조용히 기도드리고 있는 것 같답니다. 그러한 생명앞에 섰을 때, 우리 마음도 조용해 질 수 밖에 없겠지요(p38~40)

 

 

어떤 연장이 없어진다는 건 그 연장만 없어지는 게 아니고 그 연장으로 이루어진 문화도 함께 사라진답니다.(p46)

 

 

가정(家庭)이란 말이 우리말인지 일본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가정은 집과 뜰(뜰에는 나무와 풀이 있지요)이 어울려 이뤄지지요.

그렇게 원래 사람은 나무와 풀과 함께 살아왔는데 지금은 집만 덩그러니 세웁니다. 나무와 풀도 없는 집에서 외롭게 살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그들은 한없이 허전하고 초조한 고립감에 젖어 있습니다.

인간 회복은 가정, 즉 집과 뜰의 회복, 사람과 나무와 풀이 함께 사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같은 시대를 사는 인간으로 하고 싶은 말은,

절대로 착한 일 하겠다고 덤비지 말고 눈에 뜨이는 지독한 나쁜 짓이나 하지 말고 살아보자는 부탁입니다

인디언의 삶, 그들의 순진무구한 미소와 웃음소리 앞에서 역사가 무슨 큰 의의가 있으며 2,500년 동안 문자를 써 왔다고 무엇이 더 우월한가?

그 미소는 자연의 미소고 웃음소리는 우주의 소리다(p64)

 

 

우린 밥만 먹고 사는 게 아니라 사계절도 먹고 살지요. 계절은 피부로, 마음으로, 눈과 코로 마시지요.

누군가 말했어요. 살림살이 비록 구차하지만 사계절이 있어 풍성하다고요.

눈, 그 찬 눈이 어째서 마음를 그렇게 포근하게 해주지요?

비는 소리내며 오는데 눈은 소리 없이 와요. 한 수 위 같아요.

소리치는 것, 소리없는 것, 어느쪽이 나아요

형은? (p76)

 

 

책은 덜 읽고 산과 풀 나물보고 배워요.

바라보는 견학見學, 뜻을 새기려 하지 마시고 不求甚解, 낯을 익히고 친해지소.

친하려면 이름 알아야지요. 이름불러주면 금방 친해져요.

친하면 서로 아끼게 되죠.

사람친구에 나무친구까지 생기면 더 풍성한 삶 되지요. (p78)

 

 

 

형. 세월과 나이 탓인지 경험에서 우러난 건진 몰라도 나무를 대하는 태도가 꽤 바뀌었어요.

처음부터 생나무 썩은 나무 가리지 않고 ?지만 생나무보다는 고사목, 좀 썩은 나무, 집 뜯은 나무가 좋은 걸 알았어요.

사람도 속이 어느만큼 썩어야, 풍상도 겪어야 인심과 세상을 아는 사람맛 나는 사람 되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나무 켤 때 처음엔 넓게 켰는데 이젠 좁고 작게 켜요. 크면 부담스럽고 자리도 더 차지해요. 책 딱 한권 놓을 만한 작은 책상 만들래요.(81페이지)

 

 

 

글씨도 그와 같아서 너무 재줄 부린 글씨는 잠시 잠깐 보긴 좋지만 금방 싫증이 나죠. 그냥 즐겁게 붓과 종이와 사람이 어울려 잘 노는 글씨가 제일 좋은 글씨래요.

그래, 사는 데도 운명과 싸울 게 아니고 놀래요. 언젠가 일직 권 선생님한테 취생몽사가 제일인 것 같다고 했더니, 그게 마음대로 되느냐 하셨어요.

사명감 가지고 이땅에 태어났다는 작자들, 스스로도 힘겹게 살고 남도 피곤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p83)

 

 

고요한 산에서 고함쳐 고요을 깨뜨리는 자들, 하얗게 쌓인눈밭을 마구 짖짓밟아 난장판 만드는 미치광이들. 얼마 전에 거창 가조에 있는 큰 저수지엘 갔습니다. 어마어마한 물이 꽉 차 있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요. 사람은 그 만만분의 일만 모여도 야단 법석을 떨 텐데 물은 정말 대단하구나 싶었어요.

앞산에 빽빽이 들어선 수많은 나무는 찍소리도 없이 한평생을 보내는 걸 봅니다. 조용한 몸가짐으로 말을 넘어선 말을 하는구나 싶어요.(86페이지)

 

 

인권人權에만 매달린 사람은 가짜요,

목권木權, 옥권屋權, 산권山權, 강권江權, 천지만물 두루 성스러움과 존엄성이 깃들어 있음을 알고 받들고 대접하는 게 참사람 아닐까 싶습니다.

 저희가 자랄 때 어른들께서 자주 말씀하셨어요.

‘복 까불지 말라’고. 행동 함부로 하고, 물건을 아끼지 않는 지금 세상은 온통 복 까불고 있는 것 같습니다.(p106)

 

 

인생이란 선택이 아니라 인연이구나 싶어요.

나무에서 떨어진 씨가 그대로 박혀 있어야 싹터 자랍니다.

굴러다니면 말라버립니다(p113)

 

 

몸과 마음이 어긋날 때가 있는데 그건 욕심(마음)탓 같아요. 몸은 욕심내지 않아요.

마음을 따라가면 몸이 지치지만 몸을 따라가면 마음도 편해집니다.

마음대로 살지 말고 몸대로 살아갑시다.

마음이란 것 허황한 때가 제법 많아요. 믿을 게 못 됩니다.

몸은 함부로 나대지 않아요(p114)

 

 

난장판 같은 세상에서 속 빈 강정같이 사랑 사랑하는데,

참된 삶이란 사랑과 증오로 이뤄집니다.

증오도 사랑과 존경 못지 않게 소중합니다.

사랑의 배경은 증오고 미움의 배경은 사랑이나 존경입니다

(p122)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 전우익

 

 

 

 

 

잎을 훌훌 털어버리고 엄동을 맞을 비장한 차비로 의연하게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이

스님의 모습과 겹쳐 든든하고도 선합니다. 고난의 길을 뚫고 가려면 간편한 몸차림을 하라는 가르침인가요?

해마다 낙엽을 보며 또 엄동에 까맣게 언 솔잎을 보며 느끼는 일입니다.

참 삶이란 부단히 버리고 끝끝내 지키는 일의 통일처럼 느껴집니다. 신진대사가 순조롭게 이루어져야 생명의 운행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이치와 같습니다.

 

가을의 낙엽에서는 버림, 청산을 결행하고, 겨울의 얼어붙은 솔잎에서는 극한의 역경에서도 끝내 지켜야 할 것은 지키라는 것을 온몸으로 가르침을 배운다고 여기면서도, 그게 쉽지 않고 버리기도 지키기도 힘들다는 점만을 알 따름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정쩡하게 목숨만 이어 갑니다.

버릴 줄 알아야 지킬 줄 알겠는데 버리지 못하니까 지키지 못합니다.

 

느티나무는 가을에 낙엽 진 다음 해마다 봄이 되면 새 잎을 피울 뿐만 아니라 껍질도 벗습니다. 누에를 쳐보니 다섯 번 잠을 자고 다섯 번 허물을 벗은 다음 고치를 짓습니다. 탈피탈각이 없이는 생명의 성장과 성취는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탈피 탈각을 하지 못하면 주검이겠지요.

단풍과 지는 해가 산천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것을 보면서 때때로 인생의 마지막을 저렇게 멋지게 마치진 못할망정 추접게 마치지는 말아야 하는데 하고 느낍니다.

 

사실 마지막이란 일상이 쌓여서 이루어지는 거지 어디서 느닷없이 나타나는 게 아닐진대 삶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끝마침도 제대로 이루어지겠지요. 제대로 이루어진다는 건 자연의 운행과 역사의 과제에 충실한 삶을 사는 건데, 세상의 흐름은 자연과 멀어지고 역사보다는 순간과 개인적인 삶으로 오르라드는 것 같습니다.

--- p.20-21

 

 

 

스님,종교 교리와 민족 해방, 인간 해방이란 이론도 무슨 씨 비슷한 데가 있지 않습니까?

그 씨를 사람들의 마음속에 심을 때 심어졌는지도 모르게 심어 그 사람이 씨를 싹틔워 키우고 꽃피워 열매 맺게 한다고 느끼곤 합니다. 그러한 것이 진짜 같은데, 요사이 논의들은 큰 나무를 옮겨 심는 것처럼 어마어마하게 커서 가슴에 심기보다는 짊어지고 다녀야 할 판입니다. 그것을 짊어지고 다니느라 사람은 지치고, 이론은 사람들의 등과 다리에서 시들어 버리는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가슴에 심어 기르고 키울 수 있을 만큼 작고 작은 교리와 이론이어야 사람 사이에 씨로 뿌려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씨가 땅에 묻혀 싹을 틔우듯, 사람의 인격과 삶의 일부도 딴 사람에게 묻혀야 한다고 여깁니다.

--- pp.65-66

 

 

 

세월이 가는 걸 본 사람도 나무가 크는 걸 본 사람도 없는데

세월은 가고 나무는 자랍니다.

 

나무는 뿌리만큼 자란다고 합니다.

뿌리보다 웃자란 미루나무는 바람이 좀 세게 불면 나가 자빠집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뿌리가 나무를 지탱하고 있는데

눈에 뜨이지 않는 일 보다는 눈에 보이는 나무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 민심같이 느껴집니다.

 

아름답고 푸르름을 유지해 주는 것이 건강한 뿌리에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그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겉모습만 숲을 갖추고 있다 해서 그것도 전부는 아닙니다.

얽히고 설켜 생명을 돋아내는 흙과 뿌리의 상호 작용이 싱싱한 잎새 굵은 줄기를 만들어 내지요.

태양도 있고 물도 있어 신록의 여름은 화사합니다.

모든 삼라만상이 이렇게 서로 섞이고 흐르며 살거늘 오늘 저 추악한 자들은 민족의 물줄기를 막아나서고 있군요. 그것조차 순리에 서지 못해 제 힘으로 부치는 듯 지구상에 가장 포악한 세이턴을 등에 업고서...

 

 

생나무 보다는 고사목, 좀썩은 나무집 뜯은 나무가 좋은걸 알았어요

사람도 어느 만큼 썩어야, 풍산도 겪어야 사람 맛 나는 사람 되듯이요

버릴 줄 알아야 지킬 줄 알겠는데 버리지 못하니까 지키지 못합니다

 

 

밤낮없이 밝은 이 시대가 더욱 캄캄합니다.

제 모습 갖지 못하는 사람이 세상 탓합니다

첩첩산중이라 하더니 살아갈수록 모를 것이 사람 같아 서글퍼집니다.

어떤 사람이 취직한 다음 착실하게 일한 결과 과장,부장,사장,회장이 된 다음 하나 더 올라가니

송장이 되더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꼴찌인 줄 알면서도 달리는 사람이 점점 많아질까요 적어질까요?

 

 

인생이란 각자가 평생을 바쳐 스스로의 자화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랍니다

도장을 새기는 데 음각과 양각이 있듯 책을 읽을 때도 노상 그럴 수는 없지만 때로는 도장처럼 마음에 새기게 됩니다

 

 

곡식이 자리잡고 제대로 크면 잡초가 맥을 추지 못합니다

세상도 그런 게 아닌가 여겨 봅니다

 

 

밥이 시시하고 흙을 모르고 세상에 무서운 게 없으면 망하는구나 싶습니다

절대로 착한 일 하겠다고 덤비지 말고 눈에 뜨이는 지독한 나쁜 짓이나 하지 말았으면 해요

 

 

물건을 아낀다는 건 대상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자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며 고마움의 표시라고 여겨요

 

 

정신과 육체의 수많은 병이 나돌고 사람들은 약으로 수술로 병을 다스리려 드는데 말도 안돼요.

병은 크게는 세상에서 작게는 생황에서 옵니다만 세상과 각자의 삶을 고치려 들지 않고 병만 고치려하는 것 같아요.

 

 

올 봄에 도라지밭에서 나는 냉혹한 자연법칙과 아무리 힘겹고 어려워도 끈질기게 달라붙으면 문제는 풀린다는 걸 배웠습니다. 미봉책인 제초제를 썼다면 나의 삭막한 인간성을 더욱 처참해졌을 거고 뿌리가 살아 남은 풀은 다시 돋아나 어차피 다시 풀을 뽑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포기와 대응, 미봉책과 근원적 해결, 발뺌과 책을 흔쾌히 지고 살아가는 겸손한 외경심, 이런 것들을 풀을 뽑으면서 되새겨 봤습니다.

 

 

이 땅에 사람만 사는 게 아닌데 누가 주인이고 누가 나그넬까요?

큰소리 치는 쪽이 나그네 같아요

 

 

사람도 착하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착함을 지킬 독한 것을 가질 필요가 있어요.

마치 덜 익은 과실이 자길 따 먹는 사람에게 무서운 병을 안기듯이, 착함이 자기 방어 수단을 갖지 못하면 못된 놈들의 살만 찌우는 먹이가 될 뿐이지요.

착함을 지키기 위해서 억세고 독한 외피를 걸쳐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요즘 이런 생각을 했어요.

삶이란 그 무엇(일)엔가에 그 누구(사람)엔가에 정성을 쏟는 일이라고.

 

그 누구도 참답게 사는 길을 처음부터 단번에 알지는 못한대요.

한평생 그 길을 찾아 걸음을 멈추지 않는 것이 참답게 사는 길이라고 합니다. 인생이란 각자가 평생을 바쳐 스스로의 자화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고요. 사람이란 별 것 아닌 것 같아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물건을 어떻게 만나고 다루는지에 따라서 그 사람됨이 이루어지겠지요.

삶이란 그 무엇엔가 그 누구엔가에 정성을 쏟는 일이라고....

 

 

사람은 노동을 통해서 사람이 된다고 하는데, 고역은 사람을 삐뚜러지고 잔인하게 만들어 왔다고 생각해요. 노동의 고역에 오랫동안 시달려 온 사람들은 일 자체를 부정합니다. 그래서 고들은 자식들은 일을 시키지 않겠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자식들은 사무원,공무원을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일을 변화시켜 노동의 고역(비지깜 흘리며 하는 일)에서 벗어나게 하자는 게 아니고 나와 내 자식만은 일을

시키지 않겠다는 것은 극히 이기주의적인 발상입니다. 일을 변화시키는 일이 생활을 변화시키고 삶의 방식과 태도를 변화시켜 결국은 자신과 세상도 변화시키는 기초가 될 수 있지 않느냐 하고 생각해 봅니다

 

 

스님, 봄이 되자 동리 앞 신작로로 관광버스가 뻔질나게 지나 다닙니다. 화사하게 차려입으신 구경군들이 마냥 즐거운 표정으로 주마 대신 고속버스로 간간촌하시며 지나갑니다.

그런데 스님, 이하늘 밑 어디에 과연 구경거리가 있습니까?

그러나 구경꾼에게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과 몸뚱이도 구경거리가 되는가 봅니다. 이리 다듬고 저리 다듬어 좀더 많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으니까요.

구경꾼이 바로 구경거리 질을 하는 샘입니다

 

 

사람이란 별 것 아닌 것 같아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물건을 어떻게 만나고 다루는지에 따라서 그 사람됨이 이루어지겠지요.

 

때때로 말뚝을 박으며 생각해 봅니다. 나를 어디에 박아야 하냐고.

어떤 땐 환하고 어떤 땐 흔들거립니다.

 

 

올 겨울도 춥겠지요. 우리는 통계 숫자로 사는 게 아니라, 그해 여름 그해 겨울을 살기에 언제나 그해 겨울과 그해 여름이 가장 춥고 더워요. 덥지 않은 여름이 없고, 춥지 않은 겨울이 없듯이 역사도 수월할 때가 없었을 겁니다.

 

모두가 함께 저지르고 있으니 그것이 참된것인지 그른것인지 잊을때가 많다.

나이가 들면 초연해지는 것일까? 아니면 유난히 농촌과 자연을 사랑해서 이런 생각을 할수 있었을까?

삼라만상의 축제이고 조상에게 인사 드리는 날이 온갖 말못할 미물과 동물의 제사날이라니...

이것이 한평생 살아가는 데 있어 생겨나는 부조화인가 아이러니인가?

미물을 동물을 아끼고 사랑하고 애써 키워 결국 조상에게 잘 보이려 그 하룻날 모두가 제사날이 되는것이 내가 남에게 잘 보이려하고 잘 살려 하는것이 하루 아침에 죽음으로 물거품 되는거야 매 한가지인것 만 같다.

 

 

상차리는데 힘을 쓴 나머지 지쳐서 설거지를 못하는지, 설거지를 시시하게 여겨서 그런지, 저도 설거지를 며칠만에 한 번 합니다만, 그때그때 하는 것이 좋은데도 잘 안돼요.

그런데 음식솜씨는 상차림에 나타나지만 인간의 됨됨이는 설거지에 나타나는것 같습니다.

 

 

도장을 새기는데 음각 양각이 있듯, 책을 읽을때도 노상 그럴 수는 없지만

때로는 도장처럼 마음에 새기게 됩니다.

그럴때는 아파서 좀 읽다 덮고 그 통증이 사라져야 다시 읽기 시작 합니다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봉화 상운면 구천리 전우익 선생 생가生家에 가다

 

봉화 상운면 소재지에서 안동방면으로 5분여 가다보면 고가옥과 오래 된 소나무가 사람들을 반기는 상운면

구천리가 나온다

이곳 마을에서 오랜 기간 농사를 짓고 나무와 함께 살다가 농사꾼의 세상사는 이야기인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의 책을 펴낸 전우익(全遇翊) 선생의 생가生家를 만난다

 

 

 

 

 

전우익 선생은 한국의 농부작가·재야사상가.

자연에 순응하여 사는 삶에 대해 진솔하게 표현한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를 발표하였는데 100만부가 넘게 팔리면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외의 저서에 《호박이 어디 공짜로 굴러옵디까》등이 있다.

 

아호는 무명씨를 뜻하는 '언눔',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일꾼'을 뜻하는 '피정(皮丁)'이다.

1925년 경상북도 봉화군에서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중동중학을 졸업한 뒤 경성제국대학을 중퇴하였다. 1947년 좌익 계열의 민청에서 반(反)제국주의 청년운동을 하다, 6·25전쟁 후 사회안전법 위반으로 옥고를 치렀다. 이후 연좌제와 보호관찰 처분을 받아 자유롭지 못한 신분이 되자 낙향하여 한평생을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1993년 시인 신경림의 주선으로 출판된 이후 한 방송사 프로그램에 소개되어 100만 부가 팔려 베스트셀러가 된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는 가까운 이들에게 보내는 편지글 모음으로,

농사짓는 이야기, 나무·흙·등을 통해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삶을 진솔한 문체로 쓴 산문집이다.

이외의 저서에 《호박이 어디 공짜로 굴러옵디까》(1995), 《사람이 뭔데》(2002)가 있다.

2003년 뇌졸중으로 투병생활을 하다가 2004년 12월 19일 한평생 지켜온 고향 봉화군 상운면 구천리 자택에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눈에 비친 농민의 삶은 자연의 조화에 순응하는 삶이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역시 경독(耕讀)의 일체화라고 했다.

참된 경(耕)은 독(讀)을 필요로 하며 독(讀)도 경(耕)을 통해서 심화되고 제구실도 할 수 있다.”

 

그는 자연의 이치에서 세상사의 지혜를 찾아낸다.

초겨울 쇠죽을 쑤려고 캔 쑥에 단단한 뿌리가 달려 있는 모습에서 자연의 생명력을 확인하고, 계절의 리듬을 타고 자연스럽게 자라는 나무를 보면서 억지와 경쟁이 난무하는 인간 사회의 고달픈 모습을 안타까워한다.

 

 

 

 

 

 

선생은 생전 나무에 대한 애정은 집안 곳곳에 찾아 볼 수 있었다 불쑥자란 나무는 봄이면 꽃이피고 꽃향기는 꽃을 사랑했던 사람의 발자국을 따라 집안 가득 맴돌 것이다.

80년대 90년대 운동권 학생들과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곳에 찾아와 머무르면서 시국을 토론하고 농촌의 넉넉한 인심을 가져간 곳이기도 하다.

 

 

 

 

 

삶이란 그 무엇인가에, 그 누구엔가에 정성을 쏟는 일

 

스님, 거처하는 방문 앞 아름드리 느티나무 잎이 마지막 역사役事인 아름다운 단풍으로 물 들었다 다 떨어졌겠지요

잎을 훌훌 털어 버리고 엄동을 맞을 비장한 차비로 의연하게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이 스님의 모습과 겹쳐 든든하고도 선합니다.

고난의 길을 뚫고 가려면 간편한 몸차림을 하라는 가르침인가요?

해마다 낙엽을 보며 또 엄동에 까맣게 언 솔잎을 보며 느끼는 일 입니다. 참삶이란 부단히 버리고 끝끝내 지키는 일의 통일처럼 느껴집니다.

신진대사가 순조롭게 이루어져야 생명의 운행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이치와 같습니다.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중에서]

 

(2009.3.15. 글 사진 詩人 곽대근)

 

http://cafe.daum.net/bhla/AECr/3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