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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허전함

경호... 2012. 5. 25. 12:53

불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허전함

 

철학자 리처드 테일러의 조사에 따르면 불륜은 성적 모험이 아니라 실패한 결혼의 징후다.

남편이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몰라줄 때, 아내가 자신의 자부심에 상처를 줄 때, 불륜이 싹튼다.

 

 

별 인과관계야 없겠지만 총선 기간에 유난히 연예인이 이혼했다는 소식이 많이 들려왔다. 누구누구가 곧 결혼하거나 열애 중이라는 뉴스도 꼬리를 물었다. 세상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사람들이 ‘할 일’은 하고 산다는 얘기이다. 연예인은 대개 이혼 사유로 성격 차이를 들지만 파국의 계기는 불륜인 경우가 많다. 보통 사람의 가정이 깨지는 이유도 비슷하다. 스포츠신문에 나느냐 안 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특히 남자는 평생을 성욕에 압도돼 살아간다. 항상 이웃집 여자를 넘본다. 힌두 수행자처럼 엄격하게 금욕을 실천했던 간디조차 성욕에서 놓여나지 못해 몸부림쳤다.

일본의 남아시아 연구가 나카지마 다케시가 쓴 <간디의 물음>(김영사 펴냄, 2012년)에 따르면 간디는 아내를 성적 도구로만 여긴다고 자책하다가 30대 중반에 아내와의 성관계를 아예 끊어버렸다.

하지만 그는 만년에 젊은 여성들을 발가벗겨 데리고 잔다는 의혹에 시달렸다. 가까이한 여러 처녀 가운데는 그의 조카도 있었다. 간디는 처음 그 사실을 부인하다가 나중에 “금욕 실험이었다”라고 변명했는데 뒷말이 끊이지 않았다. 성 문제에 관한 한 간디의 행태 역시 불투명하다.

 

 

 

 

불륜은 사람들이 막연하게 생각하는 형태와는 확연히 다르다. 바탕에 성욕이 깔린 것은 맞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경우도 많다. 흔히 쓰는 ‘놀아난다’는 표현은 적당하지 않다. 불륜은 대개 진지하고 신중하다.

 

미국의 저명한 철학자 리처드 테일러는 1979년부터 1981년까지 3년 동안, 그리고 한참 시간이 흐른 1996년 미국의 세 도시 다섯 개 일간지에 다음과 같은 광고를 냈다.

 

“혼외 불륜 관계의 원인과 결과를 연구하는 교수입니다. 설문지와 인터뷰에 응해주실 분을 찾습니다.

비밀은 보장됩니다.”

 

이 조사에는 뜻밖에도 수백 명이 응해왔다. 그 가운데 추린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의 상담 사례를 곁들여 쓴 책이 바로 <결혼하면 사랑일까>(부키 펴냄, 2012년)이다. 그는 불륜을 비난하거나 인정하려는 의도에서 이 주제를 다루지 않았다. 그보다는 불륜을 이해하고 그 파괴적인 여파를 줄이기 위한 지침을 마련하려고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탈레반을 닮은 도덕 원칙주의자들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그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결혼이라는 제도를 보완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족을 달았다.

 

수백 명 설문 결과 분석

 

그는 결혼 생활 중에 바람을 피우거나,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성행하는 동거와 같은 사실혼 관계에 있으면서 한눈을 파는 사람들의 사례만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순간의 성욕 때문에 잠깐잠깐 외도를 하는 사람들은 제외했는데 그런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결혼하면 사랑일까>리처드 테일러 지음부키 펴냄

 

그에 따르면 부부가 가정을 계속 유지하거나 정조를 지킨다고 해서 성공한 결혼이라고 볼 수는 없다. 실제로 부부의 태반이 더 이상 서로 사랑하지 않거나 심지어 증오하는데도 아이들의 양육이나 생활의 안정과 같은 여러 가지 이유로 헤어지지만 않았을 뿐이다. 그런 경우는 명백히 실패한 결혼이다.

저자는 부부간에 결혼을 유지하는 다른 요인들의 비중이 점차 커가는 게 외도보다도 훨씬 더 결혼을 황폐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불륜은 실패한 결혼의 징후다. 사랑이 식었다는 증거이다. 단지 쾌락을 추구하거나 금지된 재밋거리를 찾느라 불륜을 저지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 사례는 아주 드물었고, 그 경우의 대부분은 남자였다. 광고에 응답을 보내준 사람은 절반 이상이 여자였다.

여성은 대개 미혼이었고 나이 많은 기혼자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상대 남자 중 상당수가 불륜과 결혼 생활을 병행했다. 애정 표현을 잘 하지 않는 냉담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여성이 나이 많은 기혼자와 사랑에 빠지는 경향이 짙었다. 여자건 남자건 응답자의 교육 수준은 전반적으로 높았다.

 

불륜이란 성적 모험일 뿐이며 따라서 우발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완전히 잘못 짚었다. 특히 여성은 성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 관계에서 남자는 불능 증상을 보이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불능 상태가 오래 지속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는 젊은 남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 얘기는 대부분 여성 입에서 나왔는데, 여성은 발기부전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 때문이다.

 

결혼한 남성과 여성이 불륜에 빠지는 이유는 다른 듯하면서도 비슷하다.

여자들이 남편을 지루하다고 표현할 때가 가장 위험하다. 아내는 남편이 자기의 사소하고 일상적인 욕구를 알아차리지 못할 때 차라리 나무기둥과 사는 게 더 낫겠다고 느낀다. 남편이 자기의 진정한 가치를 몰라줄 때 절망한다. 이럴 때 자기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는 남자가 나타나면 아내는 바로 사랑에 빠진다. 가방끈이 짧거나 무능한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성은 그 남자의 눈을 통해 자신의 외모와 재능 가운데 눈부신 면을 볼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하다.

아름답고 지적인 여성이 평범한 대머리 중년과 사랑에 빠지는 이유다. 저자는 불륜에 빠지는 여자의 마음은 허영심이라고 표현한다.

 

로맨스가 막장으로 가지 않으려면…

 

남편은 자부심에 상처를 입었을 때 아내에게서 돌아선다.

남자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여자가 아니라 자신을 향한다는 것이 저자의 추론이다. 남자는 자신의 기량이나 재능, 천부적 소질이 아무리 신통치 않더라도 매우 소중히 여긴다. 아내가 이런 부분을 공격하면 남편은 깊은 상처를 입는다. 자신의 이런 특징을 알아주고 격려하는 여자가 있다면 남자는 그녀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쏟는다. 남자는 그런 여자의 품에서 몇 번이고 우뚝 발기해 오래 버티고 싶어한다.

아내가 남편의 불륜 상대가 의외로 외모나 교양이 초라한 걸 알고 놀라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남자의 생명은 이런 자부심이기에 남자들은 뻔뻔하게 불륜 상대를 데리고 다니며 동네방네 자랑하기를 즐기는 경향이 있다. 결국 남편이라는 거울, 아내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추할 때 불륜이 싹튼다.

 

아내나 남편의 마음이 다른 데 가 있다고 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염탐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흔히 결혼 서약은 이런 질 나쁜 행동도 허용한다고 여기지만 세상 누구에게도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불륜 못지않은 배신이다. 현장을 덮치거나 증거를 들이대고 심지어 덫을 놓는 행위 역시 상황을 악화시킬 따름이다.

 

조용히 신뢰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상황에서 벗어나는 이상으로 할 일은 없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자칫하면 순간 부풀었다 꺼질 자부심과 허영심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키울 뿐이다.

특히 남편이나 아내의 불륜 상대에 대한 질투심이나 적개심을 억누를 필요가 있다. 부부 관계가 복원될 가능성이 있는 경우에는, 배우자가 불륜에 일정한 거리를 두는 한, 불륜 때문에 결혼이 위협당하는 일은 없다. 그런 노력에도 성과가 없다면 그건 이미 죽은 결혼이고 그걸 억지로 끌고 갈 이유는 없다.

 

저자는 친절하게도 불륜에 빠진 연인에게도 지침을 내린다.

이 사람들은 언제라도 상대를 파멸로 몰아갈 강력한 무기를 지니며, 그 무기가 발사되면 많은 사람이 끔찍한 피해를 보기 때문이다. 저자는 상대가 내게 무엇을 바라는지 정확하게 알고 그것을 채워주려고 노력하며, 항상 정직하라고 충고한다. 그래야 사랑할 때나 헤어진 뒤에도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 특히 ‘아이가 조금만 더 크면 이혼할게’와 같은 뻔한 거짓말은 나중에 큰 화를 부른다.

불륜은 남자에게 자존심을 채우려는 여정이고, 그래서 과시하거나 자랑하고 싶어지지만 그런 욕심을 눌러야만 한다. 불륜으로 자기를 부풀리겠다는 발상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무엇보다도 둘이 나눴던 비밀을 폭로하는 것은 금물이다. 황홀한 로맨스가 막장 드라마로 돌변하는 가장 큰 이유다.

 

결혼에도 그렇듯, 불륜이나 이혼에도 필요한 것은 분노나 증오가 아니라 사랑이다.

그게 저자의 철학이다.

 

/ 시사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