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강 논어(論語)
‘논어(論語)’는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공자어록(孔子語錄)입니다.
어록의 문화전통에 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서경(書經)’에서였지요.
사관(史官)에 좌우이사(左右二史)가 있고 좌사(左史)가 왕의 언(言)을 기록한다고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공자어록은 중국의 문화적 전통에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지요.
‘노자(老子)’에는 노자(老子)라는 인간이 보이지 않는 반면에 ‘논어’에는 공자의 인간적 면모가 도처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마 ‘노자’와 ‘논어’의 최대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논어’에는 공자뿐만 아니라 공자의 여러 제자들의 모습도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매우 친근하게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공자 당시에 ‘논어’라는 서물(書物)이 존재했을 리가 없습니다.
후대에 제자들에 의해서 학단(學團)차원의 사업으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 당시의 정황이나 당시의 중요한 쟁점에 접근하는 것이 어렵다는 견해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강의는 유가사상의 전모를 이해하기 위한 것도 아니며 그 핵심을 다루자는 것도 아닙니다.
중언부언입니다만 우리의 현실을 반성할 수 있는 몇 가지의 주제를 재조명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공자를 종주(宗主)로 하는 유가학파(儒家學派)는 한(漢)나라 이후 중국의 관학(官學)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중국의 지배담론(支配談論)입니다.
공자의 중요성은 관학이라는 사회정치적 위상 때문에 각별한 것이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하게는
5천년의 중국 사상사에서 BC 500년이라는 ‘공자의 시대’가 갖는 의미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자의 시대가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라는 것은 너무나 잘 아는 사실입니다.
5천년 중국 역사에서 꼭 중간입니다. 이 시점을 전후하여 중국의 사상사가 전후로 확연히 구분됩니다.
공자(BC 551---479)
ㅣ-------------- 공 자 --------------ㅣ
BC3,000 BC500 AD2,000
그리고 이 시점을 경계로 하여 화려했던 사상의 춘추전국시대도 막을 내립니다.
소위 사회에 관한 가장 근본적 담론이 정리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양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사회경제사적 의미를 일단 규정하고 ‘논어’를 읽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춘추(春秋)시대(BC.770-BC.403)와 전국(戰國)시대(BC.403-BC.221)는
사회경제적 성격에 있어서 구별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춘추(春秋)’는 물론 공자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으며 노(魯)나라 은공(隱公) 1년부터 애공(哀公) 14년까지의
왕(王)의 행(行)을 기록한 것입니다.
‘전국시대’는 송(宋)의 사마광(司馬光)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집필하면서
당시의 강국인 진(晉)이 한(韓)· 위(魏)· 조(趙) 3국으로 분열된 BC 403년부터 전국시대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춘추’와 이어지는 시기이나 굳이 그것을 피한 까닭은
자기가 성인(聖人) 공자(孔子)를 잇는다는 평판을 기피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서경’과 ‘춘추’가 공자의 저작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공자는 역사학의 개조(開祖)로 불립니다.
그러나 ‘서경’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주(周)의 문,무,주공(文,武,周公)의 사적(史蹟)만이 사실이고
그 이전은 후에 가상(加上)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춘추’의 공자 저작도 의심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으며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평가를 후세에 남김으로써
불충한 신하와 불효한 자식을 외포(畏怖)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썼다고 하나
공자가 과연 이러한 역사관을 가졌는가도 의심스럽지요.
‘춘추’의 집필과 그 집필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이것은 맹자 이후 유교 이념을 전파하기 위한 자료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은 구전(口傳)되어 오던 사화(史話)들을 한대(漢代)에 문자화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것으로서
경문(經文)의 해설서로 귀중한 자료입니다.
지리멸렬한 ‘춘추’보다는 이 시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춘추좌씨전’이 더 낫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의 사회경제적 성격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역사책 이야기로 흘러버렸습니다.
춘추전국시대의 특징은 다음 3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1)경제적 토대의 변화
이것은 한 마디로 철기시대(鐵器時代)의 광범한 혁명적 변화입니다.
경제적 토대의 변화는 생산력의 발전과 직결되는 것이며 생산력은 기술 즉 노동생산성의 개념입니다.
노동생산성은 노동용구의 발명에 의하여 비약적으로 발전합니다.
춘추전국시대는 철기의 발명으로 특징지어지는 BC 5세기 제2의 ‘농업혁명기’에 해당됩니다.
철기 이전의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의 청동기는 생산용구가 아니었습니다. 지배계급의 상징물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고조선 시기가 바로 청동기시기입니다.
고조선에 대하여는 그처럼 광대한 영토를 통일할 수 있는 군사력과 통일된 영토를 경영할 수 있는 행정역량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을 들어 고조선사(古朝鮮史)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식민사관의 잔재가 아직도 남아 있음은 물론입니다.
청동기기(靑銅器機)가 견고하지 않기 때문에 생산용구로는 부적합하고 산출량도 많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배계급의 신분을 표시하는 무기나 장식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청동기와 청동무기 특히 고조선 시대의 상징인 비파형 동검(琵琶型 銅劍)이 보여주는 위력은
가히 충격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박물관에서 보는 녹슨 청동기와는 달리 번쩍번쩍 빛나는 청동제 기기를 상상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대륙간 탄도탄을 보유하고 있거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정도의 위력을
과시할 수 있었으리라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전쟁없이도 평화적으로 복속시킬 수 있는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특히 고조선의 지방자치형태인 거수국(渠帥國)에 관한 연구가 최근에 진척되면서
고조선의 강역(彊域)과 역사는 물론이며 단군사화(檀君史話)에 대한 실증적 연구도 새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청동기와 철기의 차이에 대하여 이야기하다가 고조선이야기로 잠시 본론에서 벗어났습니다.
상주(商周)시대의 청동기문명에서부터 춘추중기 철제무기 및 철제농기구가 보급되면서
정치, 경제, 사회, 군사 전반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납니다.
제(齊)나라 수도 임치(臨淄)에서는 발굴된 야금유적지(冶金遺蹟地)의 넓이가 10여만 평방m에 이르고.
철제농기구도 다량 발견되었습니다. 철이 출토된 산이 무려 3천6백9개소에 달합니다.
우경(牛耕)으로 황무지가 개간되고 심경(深耕)으로 단위면적 당 생산량이 급증하는 등 토지생산력이 높아지면서
토지에 대한 관념이 변화합니다. 대규모 수리사업도 그 일환으로 행하여지게 됩니다.
요컨대 기계화 이전의 농업의 기본 틀이 확립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농업생산력의 증대는 수공업, 상업의 발달로 이어집니다. 여불위(呂不韋)와 같은 대상인이 등장하는 시기였습니다.
전쟁방식도 변화하였습니다.
4, 5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를 타고 청동창칼로 무장한 귀족들이 싸우는 차전(車戰)에서
강남(江南)의 오월전(吳越戰)에서 보듯이 평민병사의 보병전(步兵戰) 중심으로 변화하였습니다.
부국강병에 의한 패권경쟁(覇權競爭)이 국가경영의 목표가 되고 침략과 병합이 자행되고 사회의 모든 가치가 붕괴되고
오직 부국강병이란 하나의 가치로 획일화되는 시기입니다.
신자유주의와 무한경쟁으로 질주하는 현대자본주의의 사활적 경쟁과 다르지 않습니다.
2) 사회의 재편기(再編期)
종법사회(宗法社會)가 재편되는 시기입니다.
공자와 그 제자들이 활동한 시기는 가부장적(家父長的), 종족지배적(宗族支配的) 사회질서가 동요되는 시기입니다.
사회경제적 토대의 변화에 의해서 이전의 사회질서가 근본적으로 동요되는 시기입니다.
‘종(宗)’은 제사집단(祭祀集團)을 의미하며 ‘종자(宗子)’는 선대종자(先代宗子)의 정실장자(正室長子)를 의미합니다.
모든 종자(宗子) 중에서 당연히 주왕(周王)이 최고의 권위를 가지며 제후와 대부는 조상숭배의식을 토대로
왕과 결합되는 소위 친친사상(親親思想)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제사법(祭祀法)을 보면 이러한 주대(周代)의 종법이 그대로 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사권은 장자에게 있습니다. 보다 높은 선조에 대한 제사권을 가진 종가(宗家)의 종손(宗孫)이 권력을 가집니다.
지금은 문중재산의 관리권 정도에 불과합니다만 종법질서를 근간으로 하는 사회에 있어서는 대단한 권력이었습니다.
춘추전국시대는 이러한 주대의 종법질서가 붕괴되는 시기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천자(天子,王)-제후(諸侯,특정국 제후가 公)-대부(大夫,상위 대부가 卿)-사(士,家臣)의 위계질서가 재편되는 시기입니다.
제후와 대부의 강성(强盛)-->토지소유권의 하이(下移)-->주왕실(周王室)의 물적 토대 약화(弱化)로 이어집니다.
주왕실은 직할지(直轄地)의 병력과 재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낙읍(洛邑)의 주왕실은 지도력을 잃고 대신 중원을 호령하는 패국(覇國)이 등장하게 됩니다.
수십 개의 도시국가가 춘추시대에는 12제후국으로, 다시 전국시대에는 7국으로, 드디어 진(秦)나라로 통일되는 과정을 밟게 됩니다.
3)관료적 중앙집권의 조직화와 제자백가의 출현
대토지 소유자(大土地 所有者), 대상인(大商人)과 함께 지식인(士君子)이 새로운 지주(地主)로 등장하는 시기입니다.
부국강병이라는 국가적 정책목표 아래에 군사력, 경제력, 사회조직에 이르기까지 국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모든 노력이 경쟁적으로 경주되는 시기입니다.
따라서 사회의 각 부문에서 전문적 지식이 요구되는 시기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시기는 인류의 정신사에서 사회사상이 최고로 고양되었던 기원전 6-7세기이며 동서양 한결같이
각국이 고대 제국으로 나아가던 사상의 황금시대였다는 점은 서론부분에서 이야기하였습니다.
이른바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시대입니다. 자(子)는 교사, 가(家)는 학파의 호칭입니다.
주(周)왕실이 몰락하면서 전직관리(前職官吏)들이 지방으로 분산됩니다.
자연히 관리와 교사가 그 직책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지역적으로도 분리되었습니다.
관리와 교사가 분리되어 관리(官吏), 전문가(專門家), 교사(敎師)가 동일하였던 ‘학문은 관부에 존재한다(學在官府)’는
전통이 무너지고 향촌에서 예(禮)를 구하게 됩니다.
더 이상 관리=전문가=교육자가 아니게 됩니다.
사마담(司馬談)은 학파의 연원을 이러한 관리들의 지방분산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관리들이 향촌으로 분산되어 학파를 이루었다는 것이지요.
古典.禮樂--文士-----儒家
戰術-------俠------墨家
話術------辯者-----名家
占星.術數--方士-----陰陽家
政術-----法律之士---法家
出世間----隱者------道家
중앙의 관부(官府)가 붕괴되면서 동시에 제자백가가 출현한 것은
패권경쟁에 있어서 정치기구의 확충과 관료군(官僚群)에 대한 요구가 커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법질서 하의 귀족신분과는 상관없는 새로운 관료군이 등장하게 됩니다.
지식인(士, 君子)이 대토지 소유자, 대상인과 함께 새로운 지주계층으로 등장하고 지방문화와 사설학숙(私設學塾)이 생겨납니다.
공자의 사숙(私塾)은 이러한 관료군에 대한 수요와 함께 나타난 직업교육기관이었으며
관리 소개소(官吏 紹介所)의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자와 ‘논어’에 관한 이야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중국 최대의 이데올로기로서 군림해 온 사상입니다.
오죽하겠습니까? 2천년동안 쌓이고 쌓여 온 공자상(孔子像)은 이미 실증적 분석의 대상이 아닙니다.
곡부 대성전(大成殿)의 화려한 풍경은 공자 당시의 풍경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공자를 빙자하려는 역대 제왕들이 공자를 금(金)으로 칠갑(漆甲)해 놓았습니다.
진짜 공자를 만나기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금치 못합니다.
예제를 읽어가면서 그러한 성격의 일단을 살펴보기로 하지요.
제6강 논어(論語) - 2
學而時習之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人不知而不?不亦君子乎 (學而篇)
學(학) : 6경을 배우다.六經은 詩書禮樂易春秋
時(시) : 때때로. 때에 맞추어.
習(습): 익히다. 실천.
不?(불온) : 노여워하지 않다.
여러분도 아마 알고 있는 학이편(學而篇)에 있는 논어의 첫 구절입니다. 뜻은 알고 있지요?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먼 곳에서 벗이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 않으랴.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니 어찌 군자가 아니겠는가.’
여러 가지 번역이 있습니다만 전체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자구(字句)해석에 관한 몇가지 차이점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이 구절에 담겨 있는 사회적 의미를 읽어야 합니다.
춘추전국시대가 종래의 종법사회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확립되기 이전의 과도기, 격동기였다는 이야기를 하였지요?
그것과 관련된 내용이 우선 눈에 뜨입니다. ‘학습(學習)’이 그것입니다.
오늘날도 학습을 통하여 사회적 신분상승을 도모하기도 하지요.
학(學)의 내용이 당시에 무엇이었는가에 대하여 흔히 육경(六經)를 들기도 하지만,
크게 보아서 그것은 어떻든 개인의 수양에 관한 내용과 사회경영에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었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을 학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예제사회나 신분제사회에서는 학습은 의미가 없습니다.
수기는 물론이며 치인도 학습의 대상이 아닙니다.
완고한 신분제의 억압 속에서 학습이 갖는 의미는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물론 ‘기쁘지 않으랴’라고 공자 자신의 심경의 일단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지극히 사적인 형태로 개진되고 있습니다만 학습의 의미에 대하여 언급한다는 것은
사회의 재편기와 관련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그러한 성격은 다음 구절에도 있습니다.
즉 붕(朋)의 개념입니다. 붕은 친우(親友)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친우라는 것은 수평적 인간관계입니다. 신분사회에는 없는 개념입니다.
같은 계급 내에서는 물론 존재할 수 있습니다만
멀리서 벗이 온다는 것은 수평적 인간관계가 사회적 현상으로 언급되고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신분제를 뛰어 넘은 교우(交友)에 의미를 두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공자 역시 자신이 천한 출신임을 피력하기도 하였으며 실제로 성인지후예(聲人之後裔)라는 것을
성인(聲人)의 자손으로 해석하여 그가 무당의 자손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붕(朋)은 수평적 인간관계이며 또 뜻을 같이하거나 적어도 공감대가 있는 인간관계를 의미합니다.
공자의 학숙(學塾)에는 초기에는 천사(賤士)의 자제가 찾아왔으며
후기에는 중사(中士)의 자제도 입학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보더라도 붕(朋)의 개념이 등장한다는 것은
종래의 획일적 질서가 변화하는 사회 재편기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엽지 않다는 구절을 들어 이 구절이 공자 만년(晩年)에 쓰여졌음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공자는 식읍(食邑)을 봉토로 하사 받는 대부(大夫)가 되기를 원하였으나
결국 그러한 신분으로 상승하지 못하고 녹(祿)을 받는 사(士)로서 피고용자에 머무르고
결국 학원원장(學院院長)으로 만족해야 했었다는 것을 근거로 들지요.
그러한 자신의 일생을 돌이켜보고 공자학단의 역사적 책무에 관한 소명의식을 천명한 것이라고 해석되기도 합니다.
엄청난 의미부여이기도 합니다.
어쨌건 귀족신분이란 남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존립이 불가능한 속성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복식(服飾)이나 가옥(家屋) 거여(車轝) 등등을 색깔이나 디자인으로 구분하고 등급화하는 것이지요.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엽지 않으니 이 어찌 군자라 하지 않겠는가 라는 것은
공자 자신의 달관의 일단을 피력하는 것이면서 그러한 달관이 사회적 의미로 읽혀질 수 있는
어떤 ‘새로운 가치’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 첫 구절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읽어야 하는 것 바로 이러한 사회 재편기의 변화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습(習)’에 관한 것입니다.
이 ‘습(習)’을 배운 것의 복습(復習)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습(習)의 뜻은 그 글자가 상징하고 있듯이 ‘실천’(實踐)의 의미입니다.
부리가 하얀(白) 어린 새가 날개짓(羽)을 하는 모양이 이 습(習)자의 모양입니다.
이 ‘습(習)’의 의미는 배운 것을 다시 복습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배운 것을 실천함을 뜻하는 것으로 읽어야 합니다.
배운 바, 자기가 옳다고 믿는 바를 실천할 때 기쁜 것이지요.
‘논어’에는 이 곳 이외에도 습(習)을 실천의 의미로 읽어야할 곳이 더러 있습니다.
같은 학이편(學而篇)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이 구절도 매우 잘 알려진 것입니다.
曾子曰 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 不忠乎 與朋友交而 不信乎 傳不習乎(學而篇)
자신을 매일 3번(또는 여러 번을, 또는 3가지를) 돌이켜 본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일하되 그것이 진심이었는가를 돌이켜보고, 벗과 사귐에 있어서 불신 받을 일이 없지나 않았는지,
그리고 마지막 구절에 ‘傳不習乎’가 나옵니다만 이 경우 여러 해석이 가능합니다.
성현의 말씀(傳)을 복습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고,
잘 알지 못하는 것(不習)을 가르친다(傳)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구절을 ‘자기는 주장(傳)하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고(不習) 있지나 않는가?’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주장하나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 당시에도 하나의 사회적 유형(類型)으로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노장(老莊)이나 한비자(韓非子)에는 도처에 공리공담을 일삼는 부류들에 대한 비판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경우의 습(習)은 당연히 실천의 의미로 읽어야 하는 이유가 더욱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습(習)은 실천의 의미로 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론과 실천이 결합될 때 기쁜 것이지요.
따라서 시(時)의 의미도 ‘때때로’가 아니라 여러 조건이 성숙한 ‘적절한 시기“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그 실천의 시점이 적절한 때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時)는 often이 아니라 timely의 의미입니다.
끝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 구절이 미치고 있는 영향이 매우 크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이 구절 전체의 음보(音譜)에 주목해보지요. 시조(時調)의 운율과 같습니다.
學而時習之에서 有朋....不亦樂乎에 이르기까지는 시조의 초장(初章)에서 중장(中章)에 이르는 부분과 같습니다.
3444의 운율이지요. 시조의 종장(終章)이 3543으로 변조(變調)가 되지요.
마찬가지로 ‘人不知而不? 不亦君子乎’에서도 글자 수(數)가 많아지면서 그 조(調)가 바뀝니다.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와 같은 운율입니다.
아마 시조가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논어’는 영향력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장에서 우리가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은 사회의 본질은 인간관계라는 사실입니다.
사회의 성격을 읽는 관점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동의하고 있는 많은 관점과 개념들이 있습니다.
생산관계, 통신기술, 정치제도, 문화기제 등 참으로 많은 관점과 개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개념의 바탕에 있는 것이 바로 인간관계라 믿습니다.
인간관계의 변화야말로 사회변화의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준거(準據)입니다.
‘논어’에서 우리가 귀중하게 읽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인간관계에 관한 담론입니다.
언젠가 어느 기자로부터 사회과학도로서 감명깊게 읽은 책을 소개해 달라는 질문을 받고
내가 아마 ‘자본론’과 ‘논어’를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기자가 매우 당황해하였어요.
이 두 책이 서로 너무나 이질적인 책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 두 책은 다같이 사회관계를 중심에 놓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동질적인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계급관계는 생산관계이기 이전에 인간관계이지요.
그리고 메자로스(I. Meszaros)는
진정한 ‘새로운 사회’는 자본제도(資本制度)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장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자본제도’의 핵심은 위계적인 사회의 노동분업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생산자에 대한 지배체제입니다.
생산자에 대한 지배가 자본주의 사회의 자본가에 의하여 행하여지든,
사회주의 사회의 권력층에 의하여 장악되든 본질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다는 것이지요.
자본제도의 핵심개념이 인간관계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관계에 관한 담론을 중심으로 사회적 관점을 정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제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사회변혁의 문제를 장기적 재편과정으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치혁명 또는 경제혁명 또는 제도혁명 등의 단기적(短期的)이고 선형적(線型的)이고 기계적(機械的)인 방법론을
반성하고 불가역적(不可逆的) 구조변혁(構造變革)의 과제를 진정으로 고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6강 논어(論語) - 3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爲政)
溫(온) : 따뜻이 데우다. 익히다. 깊이 탐구하다. 캐어 들어가다.
故(고) : 이전에 배운 것. 옛 것.
知新(지신) : 새로운 것을 알다.
溫故知新 : 이전에 배운 것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알다. 또는 故 이외의 새로운 것을 알다.
可以爲師矣(가이위사의) : 스승이 될 수 있다. 또는 스승이란 해 볼만하다.
이 구절은 널리 사용되고 있는 구절입니다. ‘옛 것을 익혀서 새로운 것을 안다’는 뜻입니다.
이 구절을 다시 읽어보자는 까닭은 먼저 과거와 현재의 관계를 강조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흔히 과거란 흘러 가버린 것으로 치부합니다. 그리고 과거는 망각의 시작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생각하면 과거에 대한 우리의 관념만큼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시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매우 허약하고 잘못된 것이지요.
다음 글은 ‘강물과 시간’이라는 글의 일부입니다.
“흔히 시간이란 유수(流水)처럼 흘러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은 유수처럼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유수처럼 흘러가는, 그야말로 물과 같다는 생각은 두 가지 점에서 잘못된 것이다.
첫째로 시간을 객관적 실재(實在)로 인식한다는 점이 그렇다. 시간이란 실재가 아니라 실재의 존재형식일 따름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자기의 나이를 2백살, 3백살이라고 대답한다.
나무가 변하지 않고 사막이 변하지 않고 하늘마저 변하지 않는 아프리카의 대지에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나이에 대한 그들의 무지는 당연한 것이다. 해가 뜨고 지는 것마저도 변화가 아니라 반복이다.
아프리카의 오지에 1년을 3백65개의 숫자로 나눈 캘린더는 없다. 시간은 실재의 변화가 걸치는 옷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로 시간은 미래로부터 흘러와서 현재를 거쳐 과거로 흘러간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미래로부터 시간이 다가온다는 생각은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매우 비현실적이고도 위험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마치 미래에서 자란 나무를 현재의 땅에 이식(移植)하려는 생각만큼이나 도착된 것이다.
시간을 굳이 흘러가는 물이라고 생각하고 그 물질적 실재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정작 강물이 흘러가는 방향은 반대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과거로부터 흘러와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향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시간이라는 형식에 담기는 실재의 변화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새 천년 담론의 와중에서 나는 시간의 실재성과 방향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현재 나타나고 있는
몇 가지 오류들과 무관하지 않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우선 대부분의 새 천년 담론이 이끌어내는 결론이 그렇다.
새 천년 담론은 다가오는 변화를 능동적으로 수용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를 결론으로 이끌어 낸다.
이러한 미래담론의 기본구도는 2가지 점에서 오류를 낳는다.
첫째 미래의 어떤 실체가 현재를 향하여 다가오는 구도이다.
그리고 둘째 그 미래는 현재와는 아무 상관없는 그야말로 새로운 것이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이러한 구도는 시간에 대한 우리의 도착된 관념과 무관하지 않다.
시간에 대한 도착된 관념은 결국 사회변화에 대한 도착된 의식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물질의 존재형식인 시간이 실체로 등장하고, 그 실체는 현재와 상관없는 전혀 새로운 것이며,
그것도 미래로부터 다가온다는 사실은 참으로 엄청난 허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허구가 밀레니엄 담론을 지배하는 기본 틀이 되고 있다.
밀레니엄 담론뿐만 아니라 우리사회의 변화 읽기와 변화에 대한 대응방식의 기본 틀이 되고 있다.“
위에서 인용한 글은 주로 ‘미래’에 대한 잘못된 관념에 초점을 맞춘 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경우도 같은 논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과거 현재 미래가 각각 단절된 형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관념은 사유(思惟)의 차원에서 재구성(再構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시간을 과거 현재와 미래로 구분하는 것은 결코 객관적 실체에 의한 구분일 수가 없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는 하나의 통일체일 뿐입니다.
우리가 논어의 이 구절에서 읽어야 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통일적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주역 지천태(地天泰) 괘의 효사(爻辭)에 무왕불복(無往不復)이란 구절이 있습니다.
주역 편에서 설명하였습니다. 지나간 것은 반드시 돌아온다는 뜻입니다.
20세기를 보내면서 20세기를 돌이켜보는 프로그램을 제작한 적이 있습니다. ‘KBS 일요스페셜’이었습니다.
20세기를 끝내면서 비슷한 프로그램이 여러 방송국에서 제작되었습니다.
NHK는 20세기를 ‘욕망(慾望)은 질투(嫉妬)한다’는 타이틀로 만들었고 BBC에서는 ‘희망과 절망’이란 주제로 정리하였다고 합니다.
KBS가 제작한 일요스페셜의 오프닝 멘트 중에 바로 이 ‘무왕불복’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되돌아오지 않는 과거란 없다’는 멘트가 그것입니다.
20세기를 허공을 향한 질주(疾走)로 규정하고 그러한 질주가 21세기에도 다시 반복되리라는 절망을 담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지금 20세기의 오만과 패권주의가 버젓이 반복되고 있는 참담한 현실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지금이 과연 21세기인가를 회의하고 있는 것이지요. 요컨대 과거란 지나간 것이 아닙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편의를 위한 관념적 개념화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란 구절을 무엇보다 먼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하나의 통일체로 인식하는
화두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과거와 현재의 내부을 구성하고 있는 실체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변화시켜냄으로써
즉 온고(溫故)함으로써 새로운 미래(新)를 지향(知)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구절을 보다 진보적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구절은 많은 경우 온고(溫故)쪽에 무게를 두어 옛것을 강조하는 전거(典據)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전통을 강조하거나 나아가서 복고적 주장의 근거로 원용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온고(溫故)보다는 지신(知新)에 무게를 두어 고(故)를 딛고 신(新)으로 나아갈 것을
이야기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따라서 온(溫)의 의미가 단지 옛 것을 복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에 국한될 수 없습니다.
때로는 단절하는 것이 온(溫)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위에서도 이야기하였듯이 고(故)와 신(新)이 서로 통일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옛 것 속에는 새로운 것을 위한 가능성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변화를 가로막는 완고한 장애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신(知新)의 방법으로서의 온(溫)이란
생환(生還)과 척결(剔抉)이라고 하는 두 가지 의미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가이위사의(可以爲師矣)는 ‘스승이 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무난하다고 생각합니다.
문법적으로는 ‘스승이란 해볼만한 것이다’라고 해석에도 물론 무리가 없습니다.
스승이란 단지 정보만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더구나 과거지사(過去之事)를 전하는 것만으로 스승이 될 수는 없지요. 스승이란 창조자이어야 합니다.
비판적 지성의 소유자라야 스승이라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스승이 이러한 창조자이며 나아가 비판적 지성이라면 물론 해볼만한 것이라는 해석이 자연히 가능합니다.
제6강 논어(論語) - 4
君子不器 (爲政篇)
器(기) : 그릇과 같음. 그릇은 특정한 형태 특정한 용도로만 쓰임.
따라서 군자는 그릇과 같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
이 구절의 의미는 널리 알려진 것과 같이 매우 분명합니다.
여러 주(注)에서 부연 설명되고 있듯이 ‘그릇’(器)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그릇이란 각기 그 용도가 정해져서 서로 통용될 수 없는 것(器者 各適其用 而不能相通)입니다.
어떤 그릇은 밥그릇으로도 쓰고 국그릇으로도 쓴다고 우길 수도 있습니다만
그릇(器)의 의미는 특정한 기능의 소유자란 의미입니다.
군자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 구절의 의미입니다.
군자(君子)의 품성에 관한 것이며 유가사상이 제기하는 인간상(人間像)이기도 합니다.
이 구절은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를 논하면서 바로
이 논어구를 부정적으로 규정함으로써 널리 알려진 구절이기도 합니다.
베버의 경우 기(器)는 한마디로 전문성(專門性)입니다. 베버가 강조하는 직업윤리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전문성에 대한 거부가 동양사회의 비합리성으로 통한다는 것이 베버의 논리입니다.
군자불기(君子不器)를 전문성과 직업적 윤리 즉 프로페셔날리즘(professionalism)의 거부로 이해하였습니다.
분업을 거부하였고 뷰로크라시(官僚性)를 거부하였고 전문성을 위한 훈련을 거부하였고
이윤추구를 위한 경제학적 훈련(training in economics for the pursuit of profit)을 거부하였다고 이해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동양사회가 비합리적이며 근대사회 형성에서 낙후될 수밖에 없는 원인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막스 베버의 논리가 자본주의를 최고의 가치로 전제하고 그것을 합리화시키는 논리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읽은 사람이면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을
동력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논의를 구태여 이 대목에서 재론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논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뛰어넘고 그것의 대안적 모색에 초점이 모아져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바로 그 점과 관련하여 이 구절을 재조명하고 싶은 것이지요. 오늘날도 전문성을 강조하기는 막스 베버와 다르지 않습니다.
전문성은 경쟁논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 생각해보면 자본가는 전문성을 띠지 않습니다.
브로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자유주의자들과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가들이 경제적 전문화의 위대한 실천가였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전문화를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성공한 자본가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자본가는 언제나 전문화를 거부했으며 어느 한 분야에 스스로 옥죄이는 것을 회피하였다.
전문화는 존재했지만 그것은 언제나 아래층에서 하는 일이었다.”
전문화는 아래층에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차를 전문적으로 모는 사람, 바퀴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사람,
배를 전문적으로 젓는 사람 등 전문성은 대체로 노예신분에게 요구되는 것이었습니다.
귀족은 전문가가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면 군자는 하나의 기능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육예(六藝)를 두루 익혀야 하는 것입니다.
예악사어서수(禮樂射御書數)를 모두 익혀야 하였지요.
동서양을 막론하고 귀족들은 시도 읊고 말도 타고 활도 쏘고 창칼도 다루었습니다.
오늘날 요구되고 있는 전문성은 오로지 노동생산성과 관련된 자본의 논리입니다. 결코 인간적 논리는 아닙니다.
소로우가 ‘월든’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 중에서 아주 감명 깊은 구절이 있습니다.
노동자의 비극은 발전할 수 없음에서 오는 것이며 그것은 ‘같은 것’ ‘아는 것’만을
반복적으로 사용하기를 강요받는 것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공자가 말한 군자불기(君子不器)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하여는 논란의 여지가 많습니다.
그것이 보편주의적 가치이든 그렇지 않든 일단은 귀족들만의 특권적 품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합니다.
공자에게 있어서 군자와 소인의 구별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라는 계급적 신분적 구분이 아닙니다.
군자-소인의 구분은 윤리적 기준으로 나누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군자불기(君子不器)의 명제는 공자의 인간학과 관계되는 것이며
나아가 동양학의 인간학과도 직결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론에서 이야기하였습니다만 동양학에서 최고의 가치는 ‘인성(人性)의 고양(高揚)’입니다.
당연히 인간을 최고의 위상에 두려는 동양학의 인문주의(人文主義)입니다. 비종교적이며 인문주의적 가치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 즉 인간적 논리는 경쟁과 효율성과 속도의 논리에 밀려나고 있습니다.
자본의 논리가 석권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보편적 상황입니다.
따라서 논어의 이 구절은 신자유주의적 자본논리의 비인간적 성격을 드러내는 구절로서
읽혀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제6강 논어(論語) -5
子曰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爲政篇)
道(도) : 導이다. 이끌다.
政(정) : 행정명령. 法敎.
齊(제) : 강제하다. 가지런히 하다.
民免而無恥.(민면이무치) : 형벌은 면하려고만 할 뿐 부끄러움이 없다
格(격) : 바르다. 진심으로 따르다. 正也.
이 글의 뜻은 한마디로 덕치주의(德治主義)의 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행정명령으로 백성을 이끌어가려고 하거나 형벌로써 질서를 바로 세우려 한다면
백성들은 그러한 규제를 간섭(干涉)과 외압(外壓)으로 인식하고 진심으로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될 수 있으면 그러한 규제와 형벌에 저촉되지 않으려고 하는 소극적 대응에 그칠 뿐이라는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그러한 부정을 저지르거나, 행정적, 사법적 제재(制裁)를 받더라도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이와 반대로 덕(德)으로써 이끌고 예(禮)로써 질서를 세우면 부끄러움도 알고 질서도 바로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위정편의 이 구절은 법가적 방법보다는 유가적 방법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법은 최소한의 도덕입니다. 법은 적극적 가치가 아닙니다. 포지티브(Positive)의 개념이 아니라 네거티브(Negative)개념입니다.
그런 점에서 덕치주의는 법치주의에 비하여 보다 근본적인 관점 즉 인간의 삶과 그 삶의 내용을
바라보는 관점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하여 법치주의는 최소한의 사회적 질서
즉 공동체라는 시스템의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규제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춘추전국시대는 법가에 의해서 통일됩니다.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총체적 난국에서는 단호한 법가적 강제력이 사회의 최소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불가피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덕치(德治)가 평화로운 시대 즉 치세(治世)의 학(學)이라고 한다면
정령과 형벌에 의한 규제를 중심에 두는 법치(法治)는 난세(亂世)의 학(學)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려는 것은 법가와 유가의 차이가 아닙니다.
나는 여러분과 함께 이 구절을 2가지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물론 형(刑)과 예(禮)를 인간관계라는 관점에서 조명해보는 것입니다.
나중에 법가(法家)에 관하여 강의할 때 다시 부연 설명되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사회의 지배계층은 예(禮)로써 다스리고 피지배계층은 형(刑)으로 다스리는 것이 주(周)나라 이래의 원칙이었습니다.
형불상대부 예불하서인(刑不上大夫 禮不下庶人)이지요.
형은 위로 대부에게 적용되지 않으며 예는 아래로 서인에게까지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물론 예(禮)의 의미도 매우 다양합니다만 여기서는 형(刑)과 예(禮)의 차이를 전제하고 논의를 진행하지요.
예와 형의 가장 큰 차이는 그것이 인간관계에 미치는 영향의 차이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형은 최소한의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에 비하여 예는 인간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사회적 질서를 세우려는 우회적 접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관계 그 자체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보는 입장이지요.
사회적 질서는 이 인간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한 하나의 조건으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사회의 기본적 질서가 붕괴된 상황에서 인간관계의 아름다움이란 한낱 환상에 불과한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형벌에 의한 사회질서의 확립이 더 근본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법과 예는 그 접근 방법에 있어서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차이를 인간관계의 개념으로 재조명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치란 바로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형(刑)은 인간관계의 잠재적 가능성을 가두는 것이며
반대로 예(禮)는 인간관계를 열어놓음으로써 그것이 최대한으로 발휘될 수 있는 가능성을 키우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 춘추전국시대를 법가가 통일하였다고 하였지요? 그런데 통일제국인 진(秦)나라가 단명으로 끝납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법가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 통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견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진한(秦漢)을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봐요.
진나라의 시기는 통일과 건국과정이며 그것이 곧 법가적 통치방식이었으며 한(漢)나라의 시기는 이를 계승하여
통일제국을 다스려나가는 시기라고 보아야 하며 그것이 곧 덕치를 기본으로 한 통치방식이었다고 하여야 옳습니다.
따라서 법치와 덕치의 비교는 그 시대의 상황에 따라서 평가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여담입니다만 지금은 정년 퇴임하셨지만 내가 감옥에 있을 때 보안과장으로 계셨던 분이 계십니다.
몇 년 전입니다만 영등포 교도소 소장으로 근무하실 때 내가 전화를 받고 교도소로 방문하여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분도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하셨지만 나로서도 잊을 수 없는 분이었습니다.
그 분은 아마 내가 만난 보안과장 중에서 가장 무서운 소위 ‘악명 높은’ 보안과장이었습니다.
교도소의 규칙을 위반하는 사람에 대한 처벌은 예외가 없었지요.
본인도 그것을 근무원칙으로 공공연히 밝히고 계신 분이었어요.
그 분의 지론은 법이 약하면 약한 사람들이 피해를 본다는 것이었어요.
교도소 규칙이 느슨하면 ‘열외통뼈’들이 약한 재소자들을 착취하고 구타하고 못살게 군다는 것이었어요.
실제로 그 과장을 무서워하는 사람은 소위 열외통뼈들이었지요.
약한 사람들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좋아하였습니다.
법가적 정치는 이처럼 기본적 시스템을 수립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의 잠재력을 키우고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기에는 법가적 대응은 부족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근본이 총체적 난국에 처해 있을 경우 즉 인간관계 자체가 유린되고 황폐화되어 있는 국면에서는
최소한의 시스템을 수립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법가적 대응과 유가적 대응을 법치와 덕치라는 논리로 단순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위에서 이야기하였습니다만 소위 부끄러움(恥)에 관한 부분입니다.
덕(德)으로써 이끌고 예(禮)로써 질서를 세우면 부끄러움도 알고 질서도 바로 서게 되지만
정형(政刑)으로 다스리면 형벌을 면하려고만 할 뿐이며 설사 법을 어기더라도 부끄러움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만 교통순경이 교통법규 위반차량 네다섯 대 중에서 한 두 대만 딱지를 끊자
적발된 차량운전자가 당연히 항의를 하였지요. 저 애도 위반차량이라는 것이지요.
교통순경의 답변이 압권이지요. “어부가 바닷고기 다 잡을 수 있나요?”
사카구치(坂口安吾)의 ‘타락론(墮落論)’에 의하면 사회적 위기의 지표로서 ‘집단적 타락의 증후군’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집단적 타락의 증후군도 여러 가지 내용이 있습니다만 우선 이 교통위반 사례와 같이
모든 사람이 범죄자라는 사회적 합의가 있는 상태가 그 중의 하나입니다.
적발된 사람만 재수 없는 사람이 되는 그러한 사회입니다.
또 한가지는 유명인의 부정(不正)이나 추락(墜落)에 대하여 안타까워하는 마음 대신에
고소함을 느끼는 단계가 있다는 것이지요. 부정에 대하여 분노를 느끼거나 추락에 대하여 연민을 느끼기보다는
한마디로 ‘쌤통’이라는 것이지요.
타인의 부정(不正)과 추락에 대하여, 그것도 사회의 유명인의 그것에 대하여 오히려 쾌감 느끼는 단계가 되면
한 마디로 구제불능인 사회라는 것이지요.
타인의 부정이 오히려 자신의 부정을 합리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지요.
부정의 연쇄를 끊을 수 있는 여지가 없어지는 상태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사회의 본질에 대하여 수많은 논의가 있습니다만 나는 사회의 본질은 부끄러움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끄러움은 어디서 오는가? 인간관계의 지속성(持續性)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일회적인 인간관계에서는 그 다음을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는 나중에 다시 논의하겠습니다.
어쨌든 위정편의 이 구절은 정치와 인간관계에 관하여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제6강 논어(論語) -6
子夏問曰 巧笑?兮 美目盼兮 素以爲絢兮 何謂也
子曰 繪事後素
曰 禮後乎
子曰 起予者 商也 始可與言詩已矣 -八佾-
반(盼) : 예쁠 반, 검은 자위와 흰자위가 또렷이 구분되는 눈.
천(?) : 예쁠 천, 보조개 천.
현(絢) : 고울 현, 무늬 현
소(素) : 흴 소, 바탕 소. 사람의 바탕 즉 仁의 의미.
이 구절의 전체적인 의미에 대하여는 이론이 없지만 다만 회사후소(繪事後素)의 해석에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우선 전체의 의미를 먼저 읽어보기로 하지요.
자하가 시경(衛風의 碩人)의 구절에 대하여 그 뜻을 공자에게 질문했습니다.
"아리따운 웃음과 예쁜 보조개, 아름다운 눈과 검은 눈동자, 소(素)가 곧 아름다움이로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공자가 대답하였습니다. “그림은 소(素)를 한 다음에 그리는 법이지 않은가.”
자하가 말했다.“ 예를 갖춘 다음입니까?”
공자가 말했다. “네가(商) 나를 깨우치는구나! 더불어 시를 논할 수 있겠구나.”
이러한 일반적 해석과 달리 회사후소(繪事後素)를 ‘그림을 그린 다음에 흰색으로 마무리하는 법이다’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예후호(禮後乎)도 ‘나중에 예로써 마무리를 한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러한 해석상의 차이는 크게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공자와 자하가 나눈 이 대화의 핵심은 미(美)에 관한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소(素)를 먼저 한다,
아니다 나중에 한다고 하는 해석상의 차이는 부차적인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대화의 핵심은 이를테면 미의 형식(形式)과 내용(內容)에 관한 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소와 보조개와 검은 눈동자와 같은 미의 외적인 형식보다는 예(禮)가 더 근본적이라는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회사후소(繪事後素)에 대한 해석상의 차이는 근본적인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회사후소를 그림을 그린 다음에 소(素)를 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소이위현(素以爲絢)에 대한 해석상의 차이도 마찬가지로 근본적인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
흰 칠로 마감하여 광채를 낸다’고 해석하여도 상관없습니다. 문법적으로도 크게 무리가 없습니다.
어느 경우든 소(素)는 예(禮)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예(禮)가 요구되는 시점이 어느 때인가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바탕칠(下塗)을 한 다음에 그림을 그리든 또는 그림을 그리고 난 후에 흰 칠로 마감하여 완성하든
그 순서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경우든 예(禮)가 아름다움의 바탕이라는 의미이거나 아니면 예로서 미를 최종적으로 완성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크게 보아 양자간에 큰 차이가 없습니다.
이곳에서 여러분과 함께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미(美)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 예(禮)에 관한 것입니다.
이 글에서 예의 의미는 인간적 품성(品性)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품성이란 바로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인간관계를 통하여 도야(陶冶)되는 것이며 인간관계 속에 발현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아름다움에 있어서 조형성(造形性)과 품성에 관한 논의는 매우 유익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설사 조형성이 미의 중요한 구성부분이라고 하는 경우에도 그 조형성에 대한 평가기준이 문제됩니다.
그 시대의 조형미는 그 시대 특유의 미감(美感)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지요.
여러분의 스타와 우리 세대의 스타가 조형성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 까닭이 그런 것이지요.
우리 교실에는 미인이 많아서 반미인론(反美人論)을 펴기도 매우 어렵습니다.
그리고 미인을 좋아하면서 반미인론을 펼친다고 핀잔 받은 일도 있었습니다만
얼굴 생김새가 미인이기 때문에 호감을 갖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 사람의 사상(思想)이 인간적인 매력이 되는 사람도 분명히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미인론의 일환으로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예(禮)와 인간관계에 관한 논의입니다.
대체로 미인은,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이 미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보통사람과는 다소 다른 생각과 행동을 보입니다. 흔히 공주병(公主病)이라고 하는 증세들이 그런 것이지요.
미인은 대체로 자신에 대한 칭찬을 미리 예상하고 있습니다. 칭찬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에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예상했던 칭찬이 끝내 없는 경우에 무척 서운한 것은 물론이지만 반면에 예상대로 칭찬을 받는 경우에도
그 칭찬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지요. 특별히 감사할 필요가 없지요. 이것은 사실 그렇게 결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느낌의 문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자기의 미모에 대한 평가를 기준으로 하여 사람을 분류하고 그러한 평가가
사람과의 관계 건설에 초기부터 영향을 준다면 그것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지요.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여러 사람이 함께 일하는 경우에 나타납니다.
미인은 대체로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그 일익을 담당하려는 자세가 허약합니다.
소위 꽃으로 ‘존재’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미인이라는 자의식이 없는 사람이 열심히 일함으로써 자신의 의미를 확인하려고 하는 것에 비하여
매우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의 역할을 감당함으로써 자신을 실현하고 자기를 확인하려는 자세를 보입니다.
칭찬으로써 자기를 실현하고 확인하려는 작풍(作風)과는 매우 다른 것이지요.
현대는 미의 기준이나 소위 미모(美貌)가 획일적이지 않는 것이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미인이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도 드물고
반대로 스스로 미인이 아니라는 자의식을 가진 사람도 상대적으로 매우 적어졌습니다.
미인의 사회적 의미가 상대적으로 작아졌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반미인론(反美人論)을 펼칠 필요가 없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미를 상품화하는 문화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특히 상품미학(商品美學)에 이르면 미의 본령은 완벽하게 외적인 형식에 국한됩니다.
미의 내용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디자인과 패션이 미의 본령이 되고 그 상품이 가지고 있는 유용성(有用性)은 주목되지 않습니다.
교환가치(交換價値)가 가치의 주류가 되고 사용가치(使用價値)는 가치로서 평가받지 못합니다.
교환가치를 기본적인 원리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 미(美)의 문제는 단지 미인론(美人論)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야기했던가요? 미(美)라는 글자의 자(字)풀이입니다. 글자 그대로 양(羊)자와 대(大)자의 회의(會意)입니다.
양이 큰 것이 아름다움이라는 것입니다.
유목민들의 생활에 있어서 양(羊)은 생활의 모든 것입니다.
생활의 물질적 전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고기는 먹고, 그 털과 가중은 입고 신고, 그 기름은 연료로 사용하고 그 뼈는 도구로 사용합니다.
한마디로 양은 물질적 토대 그 자체입니다. 그러한 양이 무럭무럭 크는 것을 바라볼 때의 심정이 바로 아름다움입니다.
그 흐뭇한 마음, 안도(安堵)의 마음이 바로 미(美)의 본질(本質)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물건(상품이 아닌 물건)은 그 사용가치 즉 유용성으로서 비로소 물건이 됩니다.
사람의 아름다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아름다움도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아름다움이라면, 즉 일회용 상품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라면,
관계 속의 당사자로서의 인간이라면 인간의 미란 그것의 외적 형식이 아니라 그 인간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인간미(人間味)라고 하는 경우의 의미와 같습니다.
그 인간성이란 철저하게 인간관계에서 형성되고 인간관계를 통하여 발휘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바로 인간관계 그 자체를 황폐화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미의 본령을 그 외면적 형식으로부터 예(禮)의 문제로 되돌려 놓음으로써 온당한 자리매김을 하는
이 논어의 대화는 매우 뜻깊은 것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6강 논어(論語)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