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問/漢字

신영복의 고전강독 제6강 논어(論語)

경호... 2012. 2. 3. 01:44

 

 제6강 논어(論語)

  
‘논어(論語)’는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공자어록(孔子語錄)입니다.

어록의 문화전통에 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서경(書經)’에서였지요.
  
사관(史官)에 좌우이사(左右二史)가 있고 좌사(左史)가 왕의 언(言)을 기록한다고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공자어록은 중국의 문화적 전통에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지요.
‘노자(老子)’에는 노자(老子)라는 인간이 보이지 않는 반면에 ‘논어’에는 공자의 인간적 면모가 도처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마 ‘노자’와 ‘논어’의 최대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논어’에는 공자뿐만 아니라 공자의 여러 제자들의 모습도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매우 친근하게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공자 당시에 ‘논어’라는 서물(書物)이 존재했을 리가 없습니다.

후대에 제자들에 의해서 학단(學團)차원의 사업으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 당시의 정황이나 당시의 중요한 쟁점에 접근하는 것이 어렵다는 견해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강의는 유가사상의 전모를 이해하기 위한 것도 아니며 그 핵심을 다루자는 것도 아닙니다.

중언부언입니다만 우리의 현실을 반성할 수 있는 몇 가지의 주제를 재조명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공자를 종주(宗主)로 하는 유가학파(儒家學派)는 한(漢)나라 이후 중국의 관학(官學)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중국의 지배담론(支配談論)입니다.
공자의 중요성은 관학이라는 사회정치적 위상 때문에 각별한 것이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하게는

5천년의 중국 사상사에서 BC 500년이라는 ‘공자의 시대’가 갖는 의미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자의 시대가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라는 것은 너무나 잘 아는 사실입니다.

5천년 중국 역사에서 꼭 중간입니다. 이 시점을 전후하여 중국의 사상사가 전후로 확연히 구분됩니다.
  
   공자(BC 551---479)
   ㅣ-------------- 공 자 --------------ㅣ
   BC3,000                BC500                 AD2,000
  
그리고 이 시점을 경계로 하여 화려했던 사상의 춘추전국시대도 막을 내립니다.

소위 사회에 관한 가장 근본적 담론이 정리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양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사회경제사적 의미를 일단 규정하고 ‘논어’를 읽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춘추(春秋)시대(BC.770-BC.403)와 전국(戰國)시대(BC.403-BC.221)는

사회경제적 성격에 있어서 구별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춘추(春秋)’는 물론 공자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으며 노(魯)나라 은공(隱公) 1년부터 애공(哀公) 14년까지의

왕(王)의 행(行)을 기록한 것입니다.
‘전국시대’는 송(宋)의 사마광(司馬光)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집필하면서

당시의 강국인 진(晉)이 한(韓)· 위(魏)· 조(趙) 3국으로 분열된 BC 403년부터 전국시대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춘추’와 이어지는 시기이나 굳이 그것을 피한 까닭은

자기가 성인(聖人) 공자(孔子)를 잇는다는 평판을 기피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서경’과 ‘춘추’가 공자의 저작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공자는 역사학의 개조(開祖)로 불립니다.

그러나 ‘서경’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주(周)의 문,무,주공(文,武,周公)의 사적(史蹟)만이 사실이고

그 이전은 후에 가상(加上)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춘추’의 공자 저작도 의심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으며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평가를 후세에 남김으로써

불충한 신하와 불효한 자식을 외포(畏怖)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썼다고 하나

공자가 과연 이러한 역사관을 가졌는가도 의심스럽지요.
‘춘추’의 집필과 그 집필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이것은 맹자 이후 유교 이념을 전파하기 위한 자료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은 구전(口傳)되어 오던 사화(史話)들을 한대(漢代)에 문자화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것으로서

경문(經文)의 해설서로 귀중한 자료입니다.

지리멸렬한 ‘춘추’보다는 이 시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춘추좌씨전’이 더 낫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의 사회경제적 성격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역사책 이야기로 흘러버렸습니다.

춘추전국시대의 특징은 다음 3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1)경제적 토대의 변화
  
이것은 한 마디로 철기시대(鐵器時代)의 광범한 혁명적 변화입니다.

경제적 토대의 변화는 생산력의 발전과 직결되는 것이며 생산력은 기술 즉 노동생산성의 개념입니다.
노동생산성은 노동용구의 발명에 의하여 비약적으로 발전합니다.

춘추전국시대는 철기의 발명으로 특징지어지는 BC 5세기 제2의 ‘농업혁명기’에 해당됩니다.
철기 이전의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의 청동기는 생산용구가 아니었습니다. 지배계급의 상징물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고조선 시기가 바로 청동기시기입니다.
고조선에 대하여는 그처럼 광대한 영토를 통일할 수 있는 군사력과 통일된 영토를 경영할 수 있는 행정역량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을 들어 고조선사(古朝鮮史)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식민사관의 잔재가 아직도 남아 있음은 물론입니다.
  
청동기기(靑銅器機)가 견고하지 않기 때문에 생산용구로는 부적합하고 산출량도 많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배계급의 신분을 표시하는 무기나 장식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청동기와 청동무기 특히 고조선 시대의 상징인 비파형 동검(琵琶型 銅劍)이 보여주는 위력은

가히 충격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박물관에서 보는 녹슨 청동기와는 달리 번쩍번쩍 빛나는 청동제 기기를 상상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대륙간 탄도탄을 보유하고 있거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정도의 위력을

과시할 수 있었으리라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전쟁없이도 평화적으로 복속시킬 수 있는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특히 고조선의 지방자치형태인 거수국(渠帥國)에 관한 연구가 최근에 진척되면서

고조선의 강역(彊域)과 역사는 물론이며 단군사화(檀君史話)에 대한 실증적 연구도 새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청동기와 철기의 차이에 대하여 이야기하다가 고조선이야기로 잠시 본론에서 벗어났습니다.
  
상주(商周)시대의 청동기문명에서부터 춘추중기 철제무기 및 철제농기구가 보급되면서

정치, 경제, 사회, 군사 전반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납니다.
제(齊)나라 수도 임치(臨淄)에서는 발굴된 야금유적지(冶金遺蹟地)의 넓이가 10여만 평방m에 이르고.

철제농기구도 다량 발견되었습니다. 철이 출토된 산이 무려 3천6백9개소에 달합니다.
우경(牛耕)으로 황무지가 개간되고 심경(深耕)으로 단위면적 당 생산량이 급증하는 등 토지생산력이 높아지면서

토지에 대한 관념이 변화합니다. 대규모 수리사업도 그 일환으로 행하여지게 됩니다.

요컨대 기계화 이전의 농업의 기본 틀이 확립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농업생산력의 증대는 수공업, 상업의 발달로 이어집니다. 여불위(呂不韋)와 같은 대상인이 등장하는 시기였습니다.
  
전쟁방식도 변화하였습니다.

4, 5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를 타고 청동창칼로 무장한 귀족들이 싸우는 차전(車戰)에서

강남(江南)의 오월전(吳越戰)에서 보듯이 평민병사의 보병전(步兵戰) 중심으로 변화하였습니다.
부국강병에 의한 패권경쟁(覇權競爭)이 국가경영의 목표가 되고 침략과 병합이 자행되고 사회의 모든 가치가 붕괴되고

오직 부국강병이란 하나의 가치로 획일화되는 시기입니다.

신자유주의와 무한경쟁으로 질주하는 현대자본주의의 사활적 경쟁과 다르지 않습니다.


2) 사회의 재편기(再編期)
  
종법사회(宗法社會)가 재편되는 시기입니다.

공자와 그 제자들이 활동한 시기는 가부장적(家父長的), 종족지배적(宗族支配的) 사회질서가 동요되는 시기입니다.

사회경제적 토대의 변화에 의해서 이전의 사회질서가 근본적으로 동요되는 시기입니다.
‘종(宗)’은 제사집단(祭祀集團)을 의미하며 ‘종자(宗子)’는 선대종자(先代宗子)의 정실장자(正室長子)를 의미합니다.

모든 종자(宗子) 중에서 당연히 주왕(周王)이 최고의 권위를 가지며 제후와 대부는 조상숭배의식을 토대로

왕과 결합되는 소위 친친사상(親親思想)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제사법(祭祀法)을 보면 이러한 주대(周代)의 종법이 그대로 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사권은 장자에게 있습니다. 보다 높은 선조에 대한 제사권을 가진 종가(宗家)의 종손(宗孫)이 권력을 가집니다.
지금은 문중재산의 관리권 정도에 불과합니다만 종법질서를 근간으로 하는 사회에 있어서는 대단한 권력이었습니다.

춘추전국시대는 이러한 주대의 종법질서가 붕괴되는 시기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천자(天子,王)-제후(諸侯,특정국 제후가 公)-대부(大夫,상위 대부가 卿)-사(士,家臣)의 위계질서가 재편되는 시기입니다.

제후와 대부의 강성(强盛)-->토지소유권의 하이(下移)-->주왕실(周王室)의 물적 토대 약화(弱化)로 이어집니다.
주왕실은 직할지(直轄地)의 병력과 재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낙읍(洛邑)의 주왕실은 지도력을 잃고 대신 중원을 호령하는 패국(覇國)이 등장하게 됩니다.
수십 개의 도시국가가 춘추시대에는 12제후국으로, 다시 전국시대에는 7국으로, 드디어 진(秦)나라로 통일되는 과정을 밟게 됩니다.

 

3)관료적 중앙집권의 조직화와 제자백가의 출현
  
대토지 소유자(大土地 所有者), 대상인(大商人)과 함께 지식인(士君子)이 새로운 지주(地主)로 등장하는 시기입니다.

부국강병이라는 국가적 정책목표 아래에 군사력, 경제력, 사회조직에 이르기까지 국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모든 노력이 경쟁적으로 경주되는 시기입니다.
따라서 사회의 각 부문에서 전문적 지식이 요구되는 시기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시기는 인류의 정신사에서 사회사상이 최고로 고양되었던 기원전 6-7세기이며 동서양 한결같이

각국이 고대 제국으로 나아가던 사상의 황금시대였다는 점은 서론부분에서 이야기하였습니다.
이른바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시대입니다. 자(子)는 교사, 가(家)는 학파의 호칭입니다.
  
주(周)왕실이 몰락하면서 전직관리(前職官吏)들이 지방으로 분산됩니다.

자연히 관리와 교사가 그 직책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지역적으로도 분리되었습니다.

관리와 교사가 분리되어 관리(官吏), 전문가(專門家), 교사(敎師)가 동일하였던 ‘학문은 관부에 존재한다(學在官府)’는

전통이 무너지고 향촌에서 예(禮)를 구하게 됩니다.
더 이상 관리=전문가=교육자가 아니게 됩니다.

사마담(司馬談)은 학파의 연원을 이러한 관리들의 지방분산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관리들이 향촌으로 분산되어 학파를 이루었다는 것이지요.
 
      古典.禮樂--文士-----儒家
      戰術-------俠------墨家
      話術------辯者-----名家
      占星.術數--方士-----陰陽家
      政術-----法律之士---法家
      出世間----隱者------道家
  
중앙의 관부(官府)가 붕괴되면서 동시에 제자백가가 출현한 것은

패권경쟁에 있어서 정치기구의 확충과 관료군(官僚群)에 대한 요구가 커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법질서 하의 귀족신분과는 상관없는 새로운 관료군이 등장하게 됩니다.
지식인(士, 君子)이 대토지 소유자, 대상인과 함께 새로운 지주계층으로 등장하고 지방문화와 사설학숙(私設學塾)이 생겨납니다.

공자의 사숙(私塾)은 이러한 관료군에 대한 수요와 함께 나타난 직업교육기관이었으며

관리 소개소(官吏 紹介所)의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자와 ‘논어’에 관한 이야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중국 최대의 이데올로기로서 군림해 온 사상입니다.

오죽하겠습니까? 2천년동안 쌓이고 쌓여 온 공자상(孔子像)은 이미 실증적 분석의 대상이 아닙니다.
곡부 대성전(大成殿)의 화려한 풍경은 공자 당시의 풍경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공자를 빙자하려는 역대 제왕들이 공자를 금(金)으로 칠갑(漆甲)해 놓았습니다.

진짜 공자를 만나기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금치 못합니다.

예제를 읽어가면서 그러한 성격의 일단을 살펴보기로 하지요.

 

 

제6강 논어(論語) - 2

  
     
學而時習之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人不知而不?不亦君子乎    (學而篇)

  
        學(학) : 6경을 배우다.六經은 詩書禮樂易春秋

        時(시) : 때때로. 때에 맞추어.
        習(습): 익히다. 실천.

        不?(불온) : 노여워하지 않다.
  
  여러분도 아마 알고 있는 학이편(學而篇)에 있는 논어의 첫 구절입니다. 뜻은 알고 있지요?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먼 곳에서 벗이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 않으랴.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니 어찌 군자가 아니겠는가.’
  
여러 가지 번역이 있습니다만 전체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자구(字句)해석에 관한 몇가지 차이점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이 구절에 담겨 있는 사회적 의미를 읽어야 합니다.
춘추전국시대가 종래의 종법사회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확립되기 이전의 과도기, 격동기였다는 이야기를 하였지요?

그것과 관련된 내용이 우선 눈에 뜨입니다. ‘학습(學習)’이 그것입니다.
오늘날도 학습을 통하여 사회적 신분상승을 도모하기도 하지요.

학(學)의 내용이 당시에 무엇이었는가에 대하여 흔히 육경(六經)를 들기도 하지만,

크게 보아서 그것은 어떻든 개인의 수양에 관한 내용과 사회경영에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었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을 학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예제사회나 신분제사회에서는 학습은 의미가 없습니다.

수기는 물론이며 치인도 학습의 대상이 아닙니다.

완고한 신분제의 억압 속에서 학습이 갖는 의미는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물론 ‘기쁘지 않으랴’라고 공자 자신의 심경의 일단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지극히 사적인 형태로 개진되고 있습니다만 학습의 의미에 대하여 언급한다는 것은

사회의 재편기와 관련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그러한 성격은 다음 구절에도 있습니다.

즉 붕(朋)의 개념입니다. 붕은 친우(親友)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친우라는 것은 수평적 인간관계입니다. 신분사회에는 없는 개념입니다.
같은 계급 내에서는 물론 존재할 수 있습니다만

멀리서 벗이 온다는 것은 수평적 인간관계가 사회적 현상으로 언급되고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신분제를 뛰어 넘은 교우(交友)에 의미를 두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공자 역시 자신이 천한 출신임을 피력하기도 하였으며 실제로 성인지후예(聲人之後裔)라는 것을

성인(聲人)의 자손으로 해석하여 그가 무당의 자손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붕(朋)은 수평적 인간관계이며 또 뜻을 같이하거나 적어도 공감대가 있는 인간관계를 의미합니다.
공자의 학숙(學塾)에는 초기에는 천사(賤士)의 자제가 찾아왔으며

후기에는 중사(中士)의 자제도 입학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보더라도 붕(朋)의 개념이 등장한다는 것은

종래의 획일적 질서가 변화하는 사회 재편기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엽지 않다는 구절을 들어 이 구절이 공자 만년(晩年)에 쓰여졌음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공자는 식읍(食邑)을 봉토로 하사 받는 대부(大夫)가 되기를 원하였으나

결국 그러한 신분으로 상승하지 못하고 녹(祿)을 받는 사(士)로서 피고용자에 머무르고

결국 학원원장(學院院長)으로 만족해야 했었다는 것을 근거로 들지요.
그러한 자신의 일생을 돌이켜보고 공자학단의 역사적 책무에 관한 소명의식을 천명한 것이라고 해석되기도 합니다.

엄청난 의미부여이기도 합니다.
  
어쨌건 귀족신분이란 남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존립이 불가능한 속성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복식(服飾)이나 가옥(家屋) 거여(車轝) 등등을 색깔이나 디자인으로 구분하고 등급화하는 것이지요.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엽지 않으니 이 어찌 군자라 하지 않겠는가 라는 것은

공자 자신의 달관의 일단을 피력하는 것이면서 그러한 달관이 사회적 의미로 읽혀질 수 있는

어떤 ‘새로운 가치’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 첫 구절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읽어야 하는 것 바로 이러한 사회 재편기의 변화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습(習)’에 관한 것입니다.

이 ‘습(習)’을 배운 것의 복습(復習)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습(習)의 뜻은 그 글자가 상징하고 있듯이 ‘실천’(實踐)의 의미입니다.

부리가 하얀(白) 어린 새가 날개짓(羽)을 하는 모양이 이 습(習)자의 모양입니다.

이 ‘습(習)’의 의미는 배운 것을 다시 복습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배운 것을 실천함을 뜻하는 것으로 읽어야 합니다.
배운 바, 자기가 옳다고 믿는 바를 실천할 때 기쁜 것이지요.

‘논어’에는 이 곳 이외에도 습(習)을 실천의 의미로 읽어야할 곳이 더러 있습니다.

같은 학이편(學而篇)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이 구절도 매우 잘 알려진 것입니다.
  
     曾子曰 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 不忠乎 與朋友交而 不信乎 傳不習乎(學而篇)
  
 자신을 매일 3번(또는 여러 번을, 또는 3가지를) 돌이켜 본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일하되 그것이 진심이었는가를 돌이켜보고, 벗과 사귐에 있어서 불신 받을 일이 없지나 않았는지,

그리고 마지막 구절에 ‘傳不習乎’가 나옵니다만 이 경우 여러 해석이 가능합니다.
성현의 말씀(傳)을 복습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고,

잘 알지 못하는 것(不習)을 가르친다(傳)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구절을 ‘자기는 주장(傳)하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고(不習) 있지나 않는가?’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주장하나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 당시에도 하나의 사회적 유형(類型)으로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노장(老莊)이나 한비자(韓非子)에는 도처에 공리공담을 일삼는 부류들에 대한 비판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경우의 습(習)은 당연히 실천의 의미로 읽어야 하는 이유가 더욱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습(習)은 실천의 의미로 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론과 실천이 결합될 때 기쁜 것이지요.
따라서 시(時)의 의미도 ‘때때로’가 아니라 여러 조건이 성숙한 ‘적절한 시기“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그 실천의 시점이 적절한 때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時)는 often이 아니라 timely의 의미입니다.
  
끝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 구절이 미치고 있는 영향이 매우 크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이 구절 전체의 음보(音譜)에 주목해보지요. 시조(時調)의 운율과 같습니다.
學而時習之에서 有朋....不亦樂乎에 이르기까지는 시조의 초장(初章)에서 중장(中章)에 이르는 부분과 같습니다.

3444의 운율이지요. 시조의 종장(終章)이 3543으로 변조(變調)가 되지요.

마찬가지로 ‘人不知而不? 不亦君子乎’에서도 글자 수(數)가 많아지면서 그 조(調)가 바뀝니다.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와 같은 운율입니다.

아마 시조가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논어’는 영향력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장에서 우리가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은 사회의 본질은 인간관계라는 사실입니다.

사회의 성격을 읽는 관점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동의하고 있는 많은 관점과 개념들이 있습니다.

생산관계, 통신기술, 정치제도, 문화기제 등 참으로 많은 관점과 개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개념의 바탕에 있는 것이 바로 인간관계라 믿습니다.

인간관계의 변화야말로 사회변화의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준거(準據)입니다.

‘논어’에서 우리가 귀중하게 읽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인간관계에 관한 담론입니다.
  
언젠가 어느 기자로부터 사회과학도로서 감명깊게 읽은 책을 소개해 달라는 질문을 받고

내가 아마 ‘자본론’과 ‘논어’를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기자가 매우 당황해하였어요.

이 두 책이 서로 너무나 이질적인 책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 두 책은 다같이 사회관계를 중심에 놓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동질적인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계급관계는 생산관계이기 이전에 인간관계이지요.
  
그리고 메자로스(I. Meszaros)는

진정한 ‘새로운 사회’는 자본제도(資本制度)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장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자본제도’의 핵심은 위계적인 사회의 노동분업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생산자에 대한 지배체제입니다.
생산자에 대한 지배가 자본주의 사회의 자본가에 의하여 행하여지든,

사회주의 사회의 권력층에 의하여 장악되든 본질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다는 것이지요.

자본제도의 핵심개념이 인간관계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관계에 관한 담론을 중심으로 사회적 관점을 정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제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사회변혁의 문제를 장기적 재편과정으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치혁명 또는 경제혁명 또는 제도혁명 등의 단기적(短期的)이고 선형적(線型的)이고 기계적(機械的)인 방법론을

반성하고 불가역적(不可逆的) 구조변혁(構造變革)의 과제를 진정으로 고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6강 논어(論語) - 3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爲政)
  
               溫(온) : 따뜻이 데우다. 익히다. 깊이 탐구하다. 캐어 들어가다.
            故(고) : 이전에 배운 것. 옛 것.
            知新(지신) : 새로운 것을 알다.
            溫故知新 : 이전에 배운 것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알다. 또는 故 이외의 새로운 것을 알다.
            可以爲師矣(가이위사의) : 스승이 될 수 있다. 또는 스승이란 해 볼만하다.

  
 이 구절은 널리 사용되고 있는 구절입니다. ‘옛 것을 익혀서 새로운 것을 안다’는 뜻입니다.

이 구절을 다시 읽어보자는 까닭은 먼저 과거와 현재의 관계를 강조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흔히 과거란 흘러 가버린 것으로 치부합니다. 그리고 과거는 망각의 시작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생각하면 과거에 대한 우리의 관념만큼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시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매우 허약하고 잘못된 것이지요.

다음 글은 ‘강물과 시간’이라는 글의 일부입니다.
  
  “흔히 시간이란 유수(流水)처럼 흘러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은 유수처럼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유수처럼 흘러가는, 그야말로 물과 같다는 생각은 두 가지 점에서 잘못된 것이다.
  
  첫째로 시간을 객관적 실재(實在)로 인식한다는 점이 그렇다. 시간이란 실재가 아니라 실재의 존재형식일 따름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자기의 나이를 2백살, 3백살이라고 대답한다.

    나무가 변하지 않고 사막이 변하지 않고 하늘마저 변하지 않는 아프리카의 대지에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나이에 대한 그들의 무지는 당연한 것이다. 해가 뜨고 지는 것마저도 변화가 아니라 반복이다.

    아프리카의 오지에 1년을 3백65개의 숫자로 나눈 캘린더는 없다. 시간은 실재의 변화가 걸치는 옷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로 시간은 미래로부터 흘러와서 현재를 거쳐 과거로 흘러간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미래로부터 시간이 다가온다는 생각은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매우 비현실적이고도 위험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마치 미래에서 자란 나무를 현재의 땅에 이식(移植)하려는 생각만큼이나 도착된 것이다.

    시간을 굳이 흘러가는 물이라고 생각하고 그 물질적 실재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정작 강물이 흘러가는 방향은 반대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과거로부터 흘러와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향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시간이라는 형식에 담기는 실재의 변화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새 천년 담론의 와중에서 나는 시간의 실재성과 방향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현재 나타나고 있는

   몇 가지 오류들과 무관하지 않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우선 대부분의 새 천년 담론이 이끌어내는 결론이 그렇다.

   새 천년 담론은 다가오는 변화를 능동적으로 수용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를 결론으로 이끌어 낸다.

   이러한 미래담론의 기본구도는 2가지 점에서 오류를 낳는다.
  
  첫째 미래의 어떤 실체가 현재를 향하여 다가오는 구도이다.

    그리고 둘째 그 미래는 현재와는 아무 상관없는 그야말로 새로운 것이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이러한 구도는 시간에 대한 우리의 도착된 관념과 무관하지 않다.

  시간에 대한 도착된 관념은 결국 사회변화에 대한 도착된 의식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물질의 존재형식인 시간이 실체로 등장하고, 그 실체는 현재와 상관없는 전혀 새로운 것이며,

  그것도 미래로부터 다가온다는 사실은 참으로 엄청난 허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허구가 밀레니엄 담론을 지배하는 기본 틀이 되고 있다.

  밀레니엄 담론뿐만 아니라 우리사회의 변화 읽기와 변화에 대한 대응방식의 기본 틀이 되고 있다.“
  
위에서 인용한 글은 주로 ‘미래’에 대한 잘못된 관념에 초점을 맞춘 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경우도 같은 논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과거 현재 미래가 각각 단절된 형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관념은 사유(思惟)의 차원에서 재구성(再構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시간을 과거 현재와 미래로 구분하는 것은 결코 객관적 실체에 의한 구분일 수가 없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는 하나의 통일체일 뿐입니다.
  
우리가 논어의 이 구절에서 읽어야 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통일적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주역 지천태(地天泰) 괘의 효사(爻辭)에 무왕불복(無往不復)이란 구절이 있습니다.

주역 편에서 설명하였습니다. 지나간 것은 반드시 돌아온다는 뜻입니다.

20세기를 보내면서 20세기를 돌이켜보는 프로그램을 제작한 적이 있습니다. ‘KBS 일요스페셜’이었습니다.

20세기를 끝내면서 비슷한 프로그램이 여러 방송국에서 제작되었습니다.

NHK는 20세기를 ‘욕망(慾望)은 질투(嫉妬)한다’는 타이틀로 만들었고 BBC에서는 ‘희망과 절망’이란 주제로 정리하였다고 합니다.
KBS가 제작한 일요스페셜의 오프닝 멘트 중에 바로 이 ‘무왕불복’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되돌아오지 않는 과거란 없다’는 멘트가 그것입니다.

20세기를 허공을 향한 질주(疾走)로 규정하고 그러한 질주가 21세기에도 다시 반복되리라는 절망을 담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지금 20세기의 오만과 패권주의가 버젓이 반복되고 있는 참담한 현실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지금이 과연 21세기인가를 회의하고 있는 것이지요. 요컨대 과거란 지나간 것이 아닙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편의를 위한 관념적 개념화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란 구절을 무엇보다 먼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하나의 통일체로 인식하는

화두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과거와 현재의 내부을 구성하고 있는 실체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변화시켜냄으로써

즉 온고(溫故)함으로써 새로운 미래(新)를 지향(知)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구절을 보다 진보적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구절은 많은 경우 온고(溫故)쪽에 무게를 두어 옛것을 강조하는 전거(典據)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전통을 강조하거나 나아가서 복고적 주장의 근거로 원용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온고(溫故)보다는 지신(知新)에 무게를 두어 고(故)를 딛고 신(新)으로 나아갈 것을

이야기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따라서 온(溫)의 의미가 단지 옛 것을 복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에 국한될 수 없습니다.
때로는 단절하는 것이 온(溫)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위에서도 이야기하였듯이 고(故)와 신(新)이 서로 통일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옛 것 속에는 새로운 것을 위한 가능성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변화를 가로막는 완고한 장애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신(知新)의 방법으로서의 온(溫)이란

생환(生還)과 척결(剔抉)이라고 하는 두 가지 의미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가이위사의(可以爲師矣)는 ‘스승이 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무난하다고 생각합니다.

문법적으로는 ‘스승이란 해볼만한 것이다’라고 해석에도 물론 무리가 없습니다.
스승이란 단지 정보만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더구나 과거지사(過去之事)를 전하는 것만으로 스승이 될 수는 없지요. 스승이란 창조자이어야 합니다.

비판적 지성의 소유자라야 스승이라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스승이 이러한 창조자이며 나아가 비판적 지성이라면 물론 해볼만한 것이라는 해석이 자연히 가능합니다.

 

제6강 논어(論語) - 4

   

         君子不器      (爲政篇)
  
          器(기) : 그릇과 같음. 그릇은 특정한 형태 특정한 용도로만 쓰임.
                      따라서 군자는 그릇과 같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
  
이 구절의 의미는 널리 알려진 것과 같이 매우 분명합니다.

여러 주(注)에서 부연 설명되고 있듯이 ‘그릇’(器)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그릇이란 각기 그 용도가 정해져서 서로 통용될 수 없는 것(器者 各適其用 而不能相通)입니다.

어떤 그릇은 밥그릇으로도 쓰고 국그릇으로도 쓴다고 우길 수도 있습니다만

그릇(器)의 의미는 특정한 기능의 소유자란 의미입니다.
  
군자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 구절의 의미입니다.

군자(君子)의 품성에 관한 것이며 유가사상이 제기하는 인간상(人間像)이기도 합니다.
이 구절은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를 논하면서 바로

이 논어구를 부정적으로 규정함으로써 널리 알려진 구절이기도 합니다.
베버의 경우 기(器)는 한마디로 전문성(專門性)입니다. 베버가 강조하는 직업윤리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전문성에 대한 거부가 동양사회의 비합리성으로 통한다는 것이 베버의 논리입니다.
군자불기(君子不器)를 전문성과 직업적 윤리 즉 프로페셔날리즘(professionalism)의 거부로 이해하였습니다.

분업을 거부하였고 뷰로크라시(官僚性)를 거부하였고 전문성을 위한 훈련을 거부하였고

이윤추구를 위한 경제학적 훈련(training in economics for the pursuit of profit)을 거부하였다고 이해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동양사회가 비합리적이며 근대사회 형성에서 낙후될 수밖에 없는 원인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막스 베버의 논리가 자본주의를 최고의 가치로 전제하고 그것을 합리화시키는 논리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읽은 사람이면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을

동력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논의를 구태여 이 대목에서 재론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논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뛰어넘고 그것의 대안적 모색에 초점이 모아져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바로 그 점과 관련하여 이 구절을 재조명하고 싶은 것이지요. 오늘날도 전문성을 강조하기는 막스 베버와 다르지 않습니다.

전문성은 경쟁논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 생각해보면 자본가는 전문성을 띠지 않습니다.
브로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자유주의자들과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가들이 경제적 전문화의 위대한 실천가였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전문화를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성공한 자본가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자본가는 언제나 전문화를 거부했으며 어느 한 분야에 스스로 옥죄이는 것을 회피하였다.

 전문화는 존재했지만 그것은 언제나 아래층에서 하는 일이었다.”

전문화는 아래층에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차를 전문적으로 모는 사람, 바퀴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사람,

배를 전문적으로 젓는 사람 등 전문성은 대체로 노예신분에게 요구되는 것이었습니다.
  
귀족은 전문가가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면 군자는 하나의 기능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육예(六藝)를 두루 익혀야 하는 것입니다.

예악사어서수(禮樂射御書數)를 모두 익혀야 하였지요.
동서양을 막론하고 귀족들은 시도 읊고 말도 타고 활도 쏘고 창칼도 다루었습니다.

오늘날 요구되고 있는 전문성은 오로지 노동생산성과 관련된 자본의 논리입니다. 결코 인간적 논리는 아닙니다.
  
소로우가 ‘월든’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 중에서 아주 감명 깊은 구절이 있습니다.

노동자의 비극은 발전할 수 없음에서 오는 것이며 그것은 ‘같은 것’ ‘아는 것’만을

반복적으로 사용하기를 강요받는 것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공자가 말한 군자불기(君子不器)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하여는 논란의 여지가 많습니다.

그것이 보편주의적 가치이든 그렇지 않든 일단은 귀족들만의 특권적 품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합니다.
공자에게 있어서 군자와 소인의 구별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라는 계급적 신분적 구분이 아닙니다.

군자-소인의 구분은 윤리적 기준으로 나누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군자불기(君子不器)의 명제는 공자의 인간학과 관계되는 것이며

나아가 동양학의 인간학과도 직결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론에서 이야기하였습니다만 동양학에서 최고의 가치는 ‘인성(人性)의 고양(高揚)’입니다.

당연히 인간을 최고의 위상에 두려는 동양학의 인문주의(人文主義)입니다. 비종교적이며 인문주의적 가치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 즉 인간적 논리는 경쟁과 효율성과 속도의 논리에 밀려나고 있습니다.

자본의 논리가 석권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보편적 상황입니다.

따라서 논어의 이 구절은 신자유주의적 자본논리의 비인간적 성격을 드러내는 구절로서

읽혀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제6강 논어(論語) -5

   

           子曰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爲政篇)
  
              道(도) : 導이다. 이끌다.

              政(정) : 행정명령. 法敎.

              齊(제) : 강제하다. 가지런히 하다.
              民免而無恥.(민면이무치) : 형벌은 면하려고만 할 뿐 부끄러움이 없다
              格(격) : 바르다. 진심으로 따르다. 正也.

  
이 글의 뜻은 한마디로 덕치주의(德治主義)의 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행정명령으로 백성을 이끌어가려고 하거나 형벌로써 질서를 바로 세우려 한다면

백성들은 그러한 규제를 간섭(干涉)과 외압(外壓)으로 인식하고 진심으로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될 수 있으면 그러한 규제와 형벌에 저촉되지 않으려고 하는 소극적 대응에 그칠 뿐이라는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그러한 부정을 저지르거나, 행정적, 사법적 제재(制裁)를 받더라도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이와 반대로 덕(德)으로써 이끌고 예(禮)로써 질서를 세우면 부끄러움도 알고 질서도 바로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위정편의 이 구절은 법가적 방법보다는 유가적 방법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법은 최소한의 도덕입니다. 법은 적극적 가치가 아닙니다. 포지티브(Positive)의 개념이 아니라 네거티브(Negative)개념입니다.
그런 점에서 덕치주의는 법치주의에 비하여 보다 근본적인 관점 즉 인간의 삶과 그 삶의 내용을

바라보는 관점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하여 법치주의는 최소한의 사회적 질서

즉 공동체라는 시스템의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규제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춘추전국시대는 법가에 의해서 통일됩니다.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총체적 난국에서는 단호한 법가적 강제력이 사회의 최소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불가피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덕치(德治)가 평화로운 시대 즉 치세(治世)의 학(學)이라고 한다면

정령과 형벌에 의한 규제를 중심에 두는 법치(法治)는 난세(亂世)의 학(學)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려는 것은 법가와 유가의 차이가 아닙니다.

나는 여러분과 함께 이 구절을 2가지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물론 형(刑)과 예(禮)를 인간관계라는 관점에서 조명해보는 것입니다.

    나중에 법가(法家)에 관하여 강의할 때 다시 부연 설명되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사회의 지배계층은 예(禮)로써 다스리고 피지배계층은 형(刑)으로 다스리는 것이 주(周)나라 이래의 원칙이었습니다.
    형불상대부 예불하서인(刑不上大夫 禮不下庶人)이지요.

    형은 위로 대부에게 적용되지 않으며 예는 아래로 서인에게까지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물론 예(禮)의 의미도 매우 다양합니다만 여기서는 형(刑)과 예(禮)의 차이를 전제하고 논의를 진행하지요.
    예와 형의 가장 큰 차이는 그것이 인간관계에 미치는 영향의 차이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형은 최소한의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에 비하여 예는 인간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사회적 질서를 세우려는 우회적 접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관계 그 자체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보는 입장이지요.

    사회적 질서는 이 인간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한 하나의 조건으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사회의 기본적 질서가 붕괴된 상황에서 인간관계의 아름다움이란 한낱 환상에 불과한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형벌에 의한 사회질서의 확립이 더 근본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법과 예는 그 접근 방법에 있어서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차이를 인간관계의 개념으로 재조명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치란 바로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형(刑)은 인간관계의 잠재적 가능성을 가두는 것이며

    반대로 예(禮)는 인간관계를 열어놓음으로써 그것이 최대한으로 발휘될 수 있는 가능성을 키우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 춘추전국시대를 법가가 통일하였다고 하였지요? 그런데 통일제국인 진(秦)나라가 단명으로 끝납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법가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 통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견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진한(秦漢)을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봐요.

    진나라의 시기는 통일과 건국과정이며 그것이 곧 법가적 통치방식이었으며 한(漢)나라의 시기는 이를 계승하여

    통일제국을 다스려나가는 시기라고 보아야 하며 그것이 곧 덕치를 기본으로 한 통치방식이었다고 하여야 옳습니다.
    따라서 법치와 덕치의 비교는 그 시대의 상황에 따라서 평가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여담입니다만 지금은 정년 퇴임하셨지만 내가 감옥에 있을 때 보안과장으로 계셨던 분이 계십니다.

    몇 년 전입니다만 영등포 교도소 소장으로 근무하실 때 내가 전화를 받고 교도소로 방문하여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분도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하셨지만 나로서도 잊을 수 없는 분이었습니다.

    그 분은 아마 내가 만난 보안과장 중에서 가장 무서운 소위 ‘악명 높은’ 보안과장이었습니다.

    교도소의 규칙을 위반하는 사람에 대한 처벌은 예외가 없었지요.

    본인도 그것을 근무원칙으로 공공연히 밝히고 계신 분이었어요.
    그 분의 지론은 법이 약하면 약한 사람들이 피해를 본다는 것이었어요.

    교도소 규칙이 느슨하면 ‘열외통뼈’들이 약한 재소자들을 착취하고 구타하고 못살게 군다는 것이었어요.

    실제로 그 과장을 무서워하는 사람은 소위 열외통뼈들이었지요.
  
    약한 사람들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좋아하였습니다.

    법가적 정치는 이처럼 기본적 시스템을 수립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의 잠재력을 키우고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기에는 법가적 대응은 부족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근본이 총체적 난국에 처해 있을 경우 즉 인간관계 자체가 유린되고 황폐화되어 있는 국면에서는

    최소한의 시스템을 수립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법가적 대응과 유가적 대응을 법치와 덕치라는 논리로 단순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위에서 이야기하였습니다만 소위 부끄러움(恥)에 관한 부분입니다.
     덕(德)으로써 이끌고 예(禮)로써 질서를 세우면 부끄러움도 알고 질서도 바로 서게 되지만

     정형(政刑)으로 다스리면 형벌을 면하려고만 할 뿐이며 설사 법을 어기더라도 부끄러움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만 교통순경이 교통법규 위반차량 네다섯 대 중에서 한 두 대만 딱지를 끊자

     적발된 차량운전자가 당연히 항의를 하였지요. 저 애도 위반차량이라는 것이지요.

     교통순경의 답변이 압권이지요. “어부가 바닷고기 다 잡을 수 있나요?”
  
     사카구치(坂口安吾)의 ‘타락론(墮落論)’에 의하면 사회적 위기의 지표로서 ‘집단적 타락의 증후군’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집단적 타락의 증후군도 여러 가지 내용이 있습니다만 우선 이 교통위반 사례와 같이

     모든 사람이 범죄자라는 사회적 합의가 있는 상태가 그 중의 하나입니다.
     적발된 사람만 재수 없는 사람이 되는 그러한 사회입니다.

     또 한가지는 유명인의 부정(不正)이나 추락(墜落)에 대하여 안타까워하는 마음 대신에

     고소함을 느끼는 단계가 있다는 것이지요. 부정에 대하여 분노를 느끼거나 추락에 대하여 연민을 느끼기보다는

     한마디로 ‘쌤통’이라는 것이지요.
     타인의 부정(不正)과 추락에 대하여, 그것도 사회의 유명인의 그것에 대하여 오히려 쾌감 느끼는 단계가 되면

     한 마디로 구제불능인 사회라는 것이지요.

     타인의 부정이 오히려 자신의 부정을 합리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지요.

     부정의 연쇄를 끊을 수 있는 여지가 없어지는 상태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사회의 본질에 대하여 수많은 논의가 있습니다만 나는 사회의 본질은 부끄러움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끄러움은 어디서 오는가? 인간관계의 지속성(持續性)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일회적인 인간관계에서는 그 다음을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는 나중에 다시 논의하겠습니다.
어쨌든 위정편의 이 구절은 정치와 인간관계에 관하여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제6강 논어(論語) -6

   

           子夏問曰 巧笑?兮 美目盼兮 素以爲絢兮 何謂也
        子曰 繪事後素
        曰 禮後乎
        子曰 起予者 商也 始可與言詩已矣 -八佾-

  
                  반(盼) : 예쁠 반, 검은 자위와 흰자위가 또렷이 구분되는 눈.
              천(?) : 예쁠 천, 보조개 천.
              현(絢) : 고울 현, 무늬 현
              소(素) : 흴 소, 바탕 소. 사람의 바탕 즉 仁의 의미.
  

이 구절의 전체적인 의미에 대하여는 이론이 없지만 다만 회사후소(繪事後素)의 해석에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우선 전체의 의미를 먼저 읽어보기로 하지요.
  
  자하가 시경(衛風의 碩人)의 구절에 대하여 그 뜻을 공자에게 질문했습니다.

  "아리따운 웃음과 예쁜 보조개, 아름다운 눈과 검은 눈동자, 소(素)가 곧 아름다움이로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공자가 대답하였습니다. “그림은 소(素)를 한 다음에 그리는 법이지 않은가.”
  자하가 말했다.“ 예를 갖춘 다음입니까?”
  공자가 말했다. “네가(商) 나를 깨우치는구나! 더불어 시를 논할 수 있겠구나.”
  
이러한 일반적 해석과 달리 회사후소(繪事後素)를 ‘그림을 그린 다음에 흰색으로 마무리하는 법이다’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예후호(禮後乎)도 ‘나중에 예로써 마무리를 한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러한 해석상의 차이는 크게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공자와 자하가 나눈 이 대화의 핵심은 미(美)에 관한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소(素)를 먼저 한다,

아니다 나중에 한다고 하는 해석상의 차이는 부차적인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대화의 핵심은 이를테면 미의 형식(形式)과 내용(內容)에 관한 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소와 보조개와 검은 눈동자와 같은 미의 외적인 형식보다는 예(禮)가 더 근본적이라는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회사후소(繪事後素)에 대한 해석상의 차이는 근본적인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회사후소를 그림을 그린 다음에 소(素)를 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소이위현(素以爲絢)에 대한 해석상의 차이도 마찬가지로 근본적인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

흰 칠로 마감하여 광채를 낸다’고 해석하여도 상관없습니다. 문법적으로도 크게 무리가 없습니다.
어느 경우든 소(素)는 예(禮)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예(禮)가 요구되는 시점이 어느 때인가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바탕칠(下塗)을 한 다음에 그림을 그리든 또는 그림을 그리고 난 후에 흰 칠로 마감하여 완성하든

그 순서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경우든 예(禮)가 아름다움의 바탕이라는 의미이거나 아니면 예로서 미를 최종적으로 완성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크게 보아 양자간에 큰 차이가 없습니다.

 

이곳에서 여러분과 함께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미(美)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 예(禮)에 관한 것입니다.

이 글에서 예의 의미는 인간적 품성(品性)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품성이란 바로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인간관계를 통하여 도야(陶冶)되는 것이며 인간관계 속에 발현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아름다움에 있어서 조형성(造形性)과 품성에 관한 논의는 매우 유익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설사 조형성이 미의 중요한 구성부분이라고 하는 경우에도 그 조형성에 대한 평가기준이 문제됩니다.
그 시대의 조형미는 그 시대 특유의 미감(美感)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지요.

여러분의 스타와 우리 세대의 스타가 조형성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 까닭이 그런 것이지요.
우리 교실에는 미인이 많아서 반미인론(反美人論)을 펴기도 매우 어렵습니다.

그리고 미인을 좋아하면서 반미인론을 펼친다고 핀잔 받은 일도 있었습니다만

얼굴 생김새가 미인이기 때문에 호감을 갖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 사람의 사상(思想)이 인간적인 매력이 되는 사람도 분명히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미인론의 일환으로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예(禮)와 인간관계에 관한 논의입니다.
  
대체로 미인은,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이 미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보통사람과는 다소 다른 생각과 행동을 보입니다. 흔히 공주병(公主病)이라고 하는 증세들이 그런 것이지요.
미인은 대체로 자신에 대한 칭찬을 미리 예상하고 있습니다. 칭찬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에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예상했던 칭찬이 끝내 없는 경우에 무척 서운한 것은 물론이지만 반면에 예상대로 칭찬을 받는 경우에도

그 칭찬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지요. 특별히 감사할 필요가 없지요. 이것은 사실 그렇게 결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느낌의 문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자기의 미모에 대한 평가를 기준으로 하여 사람을 분류하고 그러한 평가가

사람과의 관계 건설에 초기부터 영향을 준다면 그것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지요.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여러 사람이 함께 일하는 경우에 나타납니다.

미인은 대체로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그 일익을 담당하려는 자세가 허약합니다.

소위 꽃으로 ‘존재’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미인이라는 자의식이 없는 사람이 열심히 일함으로써 자신의 의미를 확인하려고 하는 것에 비하여

매우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의 역할을 감당함으로써 자신을 실현하고 자기를 확인하려는 자세를 보입니다.

칭찬으로써 자기를 실현하고 확인하려는 작풍(作風)과는 매우 다른 것이지요.
  
현대는 미의 기준이나 소위 미모(美貌)가 획일적이지 않는 것이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미인이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도 드물고

반대로 스스로 미인이 아니라는 자의식을 가진 사람도 상대적으로 매우 적어졌습니다.
미인의 사회적 의미가 상대적으로 작아졌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반미인론(反美人論)을 펼칠 필요가 없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미를 상품화하는 문화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특히 상품미학(商品美學)에 이르면 미의 본령은 완벽하게 외적인 형식에 국한됩니다.
미의 내용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디자인과 패션이 미의 본령이 되고 그 상품이 가지고 있는 유용성(有用性)은 주목되지 않습니다.

교환가치(交換價値)가 가치의 주류가 되고 사용가치(使用價値)는 가치로서 평가받지 못합니다.
교환가치를 기본적인 원리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 미(美)의 문제는 단지 미인론(美人論)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야기했던가요? 미(美)라는 글자의 자(字)풀이입니다. 글자 그대로 양(羊)자와 대(大)자의 회의(會意)입니다.

양이 큰 것이 아름다움이라는 것입니다.
  
유목민들의 생활에 있어서 양(羊)은 생활의 모든 것입니다.

생활의 물질적 전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고기는 먹고, 그 털과 가중은 입고 신고, 그 기름은 연료로 사용하고 그 뼈는 도구로 사용합니다.
한마디로 양은 물질적 토대 그 자체입니다. 그러한 양이 무럭무럭 크는 것을 바라볼 때의 심정이 바로 아름다움입니다.

그 흐뭇한 마음, 안도(安堵)의 마음이 바로 미(美)의 본질(本質)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물건(상품이 아닌 물건)은 그 사용가치 즉 유용성으로서 비로소 물건이 됩니다.

사람의 아름다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아름다움도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아름다움이라면, 즉 일회용 상품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라면,

관계 속의 당사자로서의 인간이라면 인간의 미란 그것의 외적 형식이 아니라 그 인간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인간미(人間味)라고 하는 경우의 의미와 같습니다.
  
그 인간성이란 철저하게 인간관계에서 형성되고 인간관계를 통하여 발휘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바로 인간관계 그 자체를 황폐화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미의 본령을 그 외면적 형식으로부터 예(禮)의 문제로 되돌려 놓음으로써 온당한 자리매김을 하는

이 논어의 대화는 매우 뜻깊은 것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6강 논어(論語) -7

   

         子曰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子路)
  
                     和(화) : 화목하다. 평화롭다.
                     同(동) : 같다. 부화뇌동하다. 

  
  “군자는 화목하되 부화뇌동하지 아니하며, 소인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화목하지 못한다.”
  
이것이 가장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이러한 해석이 잘못인 것은 화(和)와 동(同)을 대비의 개념으로 해석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양학에서는 어떤 개념을 설명하는 경우 그 개념 자체를 상술하거나 비유를 들어 설명하기보다는

그와 대비되는 개념을 나란히 대비시킴으로써 그 뜻이 드러나게 하는 방식을 선호합니다.
한시(漢詩)의 대련(對聯)이 그렇습니다. 이러한 대비는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모든 개념은 차이를 규정하는 것에 의하여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단독자(單獨者)라는 개념이 성립되는 것은 다른 모든 것과의 차이를 전제(前提)함으로써 가능한 것일 뿐입니다.

나아가서 보편성에 대한 특수성의 개념이라든가, 본질에 대한 현상의 개념이라든가,

이념에 대한 현실이라는 개념 역시 그것은 근본적으로 차이를 부각시킴으로써 가능한 것입니다.
소위 독특(獨特)의 의미는 그 독특한 의미를 읽는 것과 동시에 그와 다른 것을 함께 읽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독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대상에 대한 인식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과의 차이에 대한 인식입니다.
정체성(identity) 역시 결과적으로는 타자(他者)와의 차이를 부각시킴으로써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세계는 통체적(統體的)이기 때문에 차이를 부각시키는 방법 즉, 개념적 방법으로 세계에 접근하는 것은

그것이 인식과정의 불가피한 방법상의 문제라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세계에 대한 인식을 그르칠 수도 있습니다.
부분에 매몰되게 함으로써 전체의 모습을 못 보게 하지요.

이것이 분석(分析)과 전문화(專門化)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고, 동시에 근대성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세계에 대한 일차적 인식 소위, 감성적(感性的) 인식은 세계에 대한 부분적 인식일 수밖에 없고,

또 전체로부터 분리된 부분을 대상으로 삼지 않을 수 없지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번 주의해야 하는 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이 분리된 대상을 더욱 정치(精緻)하게 개념화하는 방식은 전체와의 거리를 더욱 확대할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심화과정에서 대상 그 자체가 관념화된다는 사실이지요.
이에 비하여 대비(對比)의 방식은 분리된 대상을 다시 관계망(關係網) 속에 위치시킴으로써

대상 그 자체의 관념화를 어느 정도 저지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동양학에 있어서 대체로 대비의 방식을 선호하는 까닭은 동양학 그 자체가 관계론적 구조를 띠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야기가 다소 관념적(?)으로 흘렀습니다만 일반적인 해석에 따르면, 화(和)와 동(同)의 대비가 불가능합니다.
화(和)가 화목하고 서로 잘 어울리는 의미로 사용되고, 동(同)이 부화뇌동(附和雷同)과 동일(同一)의 의미로 사용된다면,

어느 경우든 화(和)와 대(對)를 이루지 못합니다.

그리고 동(同)의 의미도 처음 구에서의 의미와 다음 구에서의 의미가 각각 상이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처음 구에서는 부화뇌동 즉 자신의 분명한 입장이 없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다음 구에서는 동일함 즉, 차이가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다분히 윤리적 수준에서 해석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라면 새롭게 재조명할 가치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논어의 이 화동론(和同論)은 매우 중요한 담론입니다.

나는 이 화동론이 근대사회 즉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을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는 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근대와 탈근대를 구획하는 결정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화(和)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관용(寬容)과 공존(共存)의 논리입니다.  

반면에 동(同)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인 가치만을 용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배(支配)와 흡수합병(吸收合倂)의 논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화(和)와 동(同)은 철저하게 대(對)를 이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군자화이부동(君子和而不同)의 의미는 군자는 자기와 타자(他者)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타자를 지배하거나 자기와 동일한 것으로 흡수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반대로 소인동이불화(小人同而不和)의 의미는 소인은 타자를 용납하지 않으며 지배하고 흡수하여

동화(同化)한다는 의미로 읽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화(和)의 논리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의 논리이면서 나아가 공존과 평화의 원리입니다.

그에 비하여 동(同)의 논리는 지배, 흡수, 합병의 논리입니다.
동(同)의 논리 하에서는 단지 양적(量的) 발전만이 가능합니다.

질적(質的) 발전은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화(和)의 논리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강의의 서론 부분에서 중국이 추구하는 21세기의 패러다임에 대하여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지양(止揚)한 새로운 문명을 가장 앞서서 실험하고 있는 현장이

바로 중국이라고 주장하는 중국적 자부심에 관하여 이야기하였습니다.
자본주의를 소화하는 대륙적 소화력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그러한 강력한 시스템이 작동하였던 것이 사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가 중국에 유입되면 불학(佛學)으로 되고, 마르크시즘도 중국에 유입되면 마오이즘으로 되는

강력한 대륙적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현대중국은 자본주의를 소화하고 있는 중이며 동시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지양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준비하고 있는 현장이라는 것이지요.
자본주의가 패권적 구조를 내장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제국주의적 팽창과정 그리고 현대 자본주의에서

적나라하게 나타나고 있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적 논리는 한마디로 강철의 논리입니다.
스스로를 강철과 같은 강한 존재로 키워가려는 존재론적 구조를 드러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지배, 흡수, 합병이라는 동(同)의 논리입니다. 종교와 언어까지도 동일할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나라는 그러한 식민지 역사를 경험하였지요.

그러므로 동(同)의 논리를 극복하는 것은 곧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과 무관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지양하고자 하는 중국적 의지는 일단 그 역사적 의의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이 만들어내고자 하는 새로운 문명이 그 근본에 있어서 또 하나의 동(同)일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중국의 중화주의(中華主義)는 철저히 문화적인 것이며, 결코 패권적이지 않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설령 그러한 주장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문화주의란 군사적 강제나 정치적, 경제적 강제를 배제한다는 의미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곧 다른 문화, 다른 가치, 그리고 다른 삶의 방식에 대한 관용과 공존을 존중한다는 의미는 아니지요.

근본에 있어서 얼마든지 또 하나의 동(同)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극좌(極左)와 극우(極右)는 통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는 말입니다.
  
그러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적 격동기에 도처에서 확인되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나는 극좌와 극우가 다 같이 동(同)의 논리에 기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제국주의적 팽창이라는 극우의 논리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극좌의 논리는 둘 다 강철의 논리이며

존재론적 구조이며 결국 동(同)의 논리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러한 점에서 극좌와 극우는 그 근본적인 패러다임에 있어서 상통(相通)할 수 있는 구조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문명은 이 동(同)의 논리를 결별하는 것에서 출발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화(和)의 논리는 자기와 다른 가치를 존중합니다.

타자를 흡수하고 지배함으로써 자기를 강화(强化)하려는 존재론적 의지를 갖지 않습니다.

타자(他者)란 없으며 모든 타자와 대상이란 사실은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일 뿐임을 인정합니다.
문명과 문명, 그리고 국가와 국가 간의 모든 차이를 존중합니다.

이러한 차이와 다양성이 존중됨으로써 비로소 공존과 평화가 가능하며 나아가 진정한 문화의 질적 발전이 가능한 것입니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명제가 바로 이러한 논리라고 생각하지요.
  
우리는 이러한 화동담론(和同談論)을 우리의 통일론으로 확장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과 북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서로 다른 체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흡수합병이든 적화통일이든 기본적으로 동(同)의 논리에 따른 통일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통일논리를 동(同)의 논리가 아닌 화(和)의 논리로 통일과정을 이끌어 간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공존과 평화의 논리로 통일과정을 이끌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존과 평화정착은 통일과업의 90%를 차지하는 압도적 과제라고 할 만큼 사활적인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비롯하여 다양한 문화와 가치 그리고 삶의 방식을 존중하는

공존의 구도를 확립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나아가 진정한 상생(相生)의 장(場)으로 나아가는 진정한 패러다임의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우리나라는 중국과 같은 대륙적 소화력을 갖추고 있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불교, 유학, 마르크시즘, 자본주의 등 어느 경우든 더욱 교조화되는 경향을 보여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중국적 방식을 원용할 수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바로 이 점에서 우리의 고유한 역할과 가능성이 발견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는 물론 보다 종합적이고 심도 있는 연구가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다만 이러한 부정적 측면을 도리어 진정한 패러다임 쉬프트의 선구적 현장으로 만들어내는 노력이 경주될 때

통일이라는 민족적 과제로부터 세계사적 과제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화동담론을 고담준론으로 이끌어 가고 말았습니다만 논어의 이 구절을 일상적 의미로 읽더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도대체 자기흉내를 내는 사람을 존경하는 사람은 없는 법이지요.

 

제6강 논어(論語) - 8

  

   子曰德不孤必有隣(里仁)
  
  “덕(德)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 또는 이웃이 생긴다.”
  
  별로 어렵지 않은 글입니다.  백범(白凡)선생이 평소 자주 인용한 글 중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상호불여신호(相好不如身好)’.
  그것입니다. 얼굴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는 뜻입니다.

  미모(美貌)보다는 건강(健康)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스스로 당신을 미남(美男)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보다고 이 글을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건강(身好)은 실생활(實生活)에 있어서 미모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더구나 백범처럼 풍찬노숙(風餐露宿)하지 않을 수 없었던 독립운동에서는 더욱 그러하였으리라고 짐작됩니다.
  백범의 이 구절에 ‘신호불여심호(身好不如心好)’를 추가한 사람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읽은 글이라 정확한 기억은 없습니다만 신체가 건강한 것보다는 마음 좋은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옳은 말입니다. 노신(魯迅)이 의사(醫師) 되기를 포기하고 문학(文學)으로 진로를 바꾼 이유가 바로

  이 신호(身好)와 관계가 없지 않습니다.
  일본 유학시절에 노신은 건장한 중국청년이 러시아의 첩자라는 혐의를 받고 일본인들에게

  뭇매를 맞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러일전쟁 당시의 일이었습니다.
  그 건장한 청년의 모습에서 크게 뉘우쳤기 때문이었어요.

  노신은 우매한 정신의 각성이 더욱 시급한 중국의 과제라고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일생이 증거하는 바와 같이 중국인의 정신의 각성을 위하여 치열한 일생을 살아갑니다.
  
  심호(心好)를 정신이나 사상의 의미로 읽지 않고 마음씨 또는 인간성의 의미로 읽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미모(美貌)의 기준을 외형적 형식미에 둘 경우 사흘이 안 간다는 것이지요.
  변화 그 자체에 몰두하는 오늘의 상품미학(商品美學)에서는 더욱 덧없는 것이지요.

  마음(心) 좋다는 것은 마음이 착하다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착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안다는 뜻입니다.
  배려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착하다는 것은 이러한 관계에 대한 각성을 정서적인 수준에 이르도록 완성해 놓고 있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내가 갖고 있는 가장 큰 불만의 하나는 여러분들은 사람을 볼 줄 모른다는 것이지요.

  전에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사람 보는 눈이 완벽하게 상품미학에 매몰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동성(同性)간에서는 즉 남자가 남자친구를 사귈 때나 또는 여자가 여자친구를 사귈 때에는

  미모를 별로 고려하지 않습니다. 상호(相好)보다는 심호(心好)를 우위에 둡니다.
  문제는 이성(異性)간에는 이것이 역전된다는 것이지요.

  정물(靜物)이 아닌 사람의 경우 생각이 있고 행동이 있는 경우 상호(相好)보다는 신호(身好), 심호(心好) 훨씬 더 중요합니다.
  당연히 사람을 볼 때에는 동성(同性)이건 이성(異性)이건 미모보다는 언행(言行)을 봐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언행의 바탕이 되는 사상(思想)을 봐야 합니다.

  사상이 정감으로 뒷받침되어 있는 그런 수준의 완성도를 봐야 하는 것이지요.
  
  내가 좋아하는 그리스 철학자의 경구가 있습니다. 셍 텍쥐베리의 글을 통하여 널리 알려졌지요.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함께 바라보는 것이다.”
  심호(心好)는 상품미학이 지배하는 오늘의 감성적 환경에서 다시 한번 주목되어야 할 단어(單語)입니다.
  나는 이 글에 다시 한 구절을 더 추가하고 싶습니다. ‘심호불여덕호(心好不如德好)’가 그것입니다.

  “마음 좋은 것이 덕(德)좋은 것만 못하다”는 뜻입니다.
   덕(德)의 의미는 논어의 이 구절에 나와 있는 그대로 입니다. ‘이웃’(隣)입니다. 이웃이란 그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입니다.
   심(心)이 개인으로서의 인간성과 품성이란 의미라면, 덕(德)은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에 무게를 두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마음이 좋으면 그 사람의 인간관계도 좋아지고 넓어지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심과 덕을 일정하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덕은 당연히 인간관계에 무게를 두는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덕(德)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게 마련이다. 이 구절은 사람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사회복지학과 학생들이 잘 알겠지요. 최근에는 연복지(緣福祉)에 대한 논의가 있습니다.
  복지문제를 국가와 개인 즉 사회와 개인의 문제로 인식하는 서구적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고

  공동체라는 우리의 전통과 정서를 바탕으로 복지문제에 접근하자는 것이지요.
  요컨대 50세까지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 온 사람은 노후가 보장된다는 것이지요.

  국가나 사회복지기관이 보살피지 않더라도 그때까지 그가 맺어온 인간관계가 안전망(安全網)이 되어

  그의 노후를 책임진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삶의 시스템 자체를 인간적인 것, 즉 덕성스러운 것으로 영위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입니다.

  말하자면 복지문제를 삶의 문제 속으로 포용해나가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령공편(衛靈公篇)에 ‘군자모도불모식(君子謀道不謀食)’ 그리고 ‘군자우도불우빈(君子憂道不憂貧)’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군자는 도(道)를 구하고 걱정하는 법이며, 식(食)을 구하거나 빈(貧)을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와 통하는 것이지요.
  
  변혁기의 수많은 실천가들이 한결같이 경구(驚句)로 삼았던 금언(金言)이 있습니다.

  “낯선 거리의 임자 없는 시체가 되지 마라”는 것이었어요.
  운동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중과의 접촉 국면을 확대하는 것, 그리고 그 과정을 민주적으로 이끌어 가는 것,

  그리고 주민과의 정치목적에 대한 합의를 모든 실천의 바탕으로 삼는 것.
  이러한 것들이 모두 ‘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隣)’의 원리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인간관계로서의 덕(德)이 사업수행에 뛰어난 방법론으로서 검증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자체가 삶이며 가치이기 때문에 귀중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지요.

 

제6강 논어(論語) - 9

   

      子貢問政 子曰 足食 足兵 民信之矣. 子貢曰 必不得已而去 於斯三者何先? 曰 去兵.
    子貢曰 必不得已而去, 於斯二者何先? 曰 去食. 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顔淵)
  
                   民信之(민신지) : 使民信之 백성들이(民) 그(之)를 믿고 따르게 한다.(信)
                必(필) ; 만약.
                何先(하선) : 무엇을 먼저.
                信(신) : 믿음. 信은 人 + 言의 회의(會意)로서 그 말을 신뢰함을 뜻한다.
                            함부로 말하지 않는 까닭은 그것을 지키지 못할까 두려워서이다.
                 政(정) : 正. 바르게 하는 것. 뿌리를 바르게 하여 나무가 잘 자라도록 하는 것.
  
  “자공이 정치에 관하여 질문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정치란 경제(足食), 군사력(足兵), 그리고 백성들의 신뢰(民信之)이다.

   자공이 묻기를 만약 이 3가지 중에서 하나를 버리지 않을 수 없다면,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하겠습니까?

   군사력을 버려라(去兵). 만약 (나머지) 2가지 중에서 하나를 버리지 않을 수 없다면 어느 것을 버려야 하겠습니까?

   경제를 버려라(去食).

   예부터 백성이 죽는 일을 겪지 않은 나라가 없었지만 백성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면 나라가 설 수 없는 것이니라.”
  
  이 구절은 정치란 백성들의 신뢰를 얻는 것이며, 백성들의 신뢰가 경제나 국방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천명한 구절입니다.
 자공(子貢)은 호상(豪商)으로서 공자의 주유(周遊)에 동참하지 못함을 반성하여 공자 사후 6년을 수묘(守墓)한 제자입니다.

 그리고 공자 사후에 그의 재산을 들여 공자교단을 발전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그리하여 공자는 자공과 함께 부활하였다고 하지요.
  
 공자가 정치에 있어서 신(信)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천명하는 까닭은 물론 그 기능적 측면을 고려해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국경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신(信)만 있으면 백성들은 얼마든지 유입될 수 있었지요.

 그리고 백성이 곧 식(食)이고 병(兵)이었습니다. 백성으로부터 경제도 나오고 백성으로부터 병력(兵力)도 나오는 법이지요.
 ‘난중일기(亂中日記)’를 읽어보면 충무공의 전략전술과 군량미도,

 그리고 병력 역시 민(民)에서 나왔으며 민신(民信)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을 고로(古老)들과의 끊임없는 대화에서 충무공의 소위 해상 게릴라전의 전술도 나올 수 있었으며,

 그리고 충무공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삼남(三南)의 백성들이 다투어 전라좌수영 관내로 유입되었고,

 이러한 민신(民信)을 기반으로 병력과 군량미가 확보되었고, 결과적으로 삼남의 곡창지대를 지킬 수 있었고,

 그것이 임란의 방어거점이 되고, 적의 수송로를 차단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처럼 백성들의 신뢰는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결정적 요체(要諦)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논어의 이 대화의 핵심은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물음에 있다고 생각하지요.
  
 진(秦)나라 재상으로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엄격한 법가적 정책의 선구자로 알려진 상앙(商?)에게는

 이목지신(移木之信)이란 유명한 일화가 있지요.
 상앙이 진나라 재상으로 부임하면서 나라의 기강이 서지 않는 것은 바로 백성들의 정부에 대한 불신에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래서 대궐 남문 앞에 나무를 세우고 방문(榜文)을 붙였지요.
  “이 나무를 옮기는 사람에게는 백금(百金)을 하사한다.”
 옮기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상금을 천금(千金)으로 인상하였지요. 그래도 옮기는 자가 없었어요.

 그래서 다시 상금을 만금(萬金)으로 인상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상금을 기대하지도 않고 밑질 것도 없으니까 장난삼아 옮겼습니다.

 그랬더니 방문(榜文)에 적힌 대로 만금을 하사하였습니다.
 그 이후로는 나라의 정책이 백성들의 신뢰를 받게 되고 진나라가 부국강병에 성공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물론 지어낸 이야기입니다만 무신불립(無信不立) 신뢰가 없으면 나라가 설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일화입니다.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의 능력은 그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human-network)에 있으며

 이 인간관계는 신뢰(信賴)에 의하여 지탱되는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정(政)이란 정(正)이라는 의미에 대하여 조금 더 이야기해야 합니다.
 정(正)이란 뿌리를 바르게 한다고 주(註)를 달았습니다. 정치란,

 우리나라의 제도정치권의 현실처럼 정치란 정권창출이 아니지요. 권력다툼이 정치가 아닙니다.
 정치를 피를 흘리지 않는 전쟁으로 규정하기도 하고, 정치를 계급지배의 방법으로 이해하기도 하는 등

 여러 측면에서 정치를 규정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논의하고 지나 가야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정(正)에 대한 올바른 이해입니다. 뿌리를 바르게 하여 나무가 잘 자라게 하는 것.

 이것이 정치의 근원적 의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정치란 그 사회의 잠재적 역량을 극대화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잠재력을 극대화한다는 것은 바로 인간적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적 잠재력의 극대화는 ‘인간성의 최대한의 실현’이 그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 잠재력과 인간성은 바로 인간관계의 소산(所産)인 것은 다시 부연할 필요가 없지요.
  
 자공의 정치에 대한 질문과 공자의 대답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참으로 많습니다.

 더구나 오늘날의 부정적 정치현실을 목전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나라가 신뢰를 얻지 못하면 서지 못한다(無信不立)고 하는 것은 모든 역량들이 나라를 떠나는 것이지요.
 이민(移民)가는 것만이 나라를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강호(江湖)에 묻히는 것도 떠나는 것입니다.

 양화(良貨)가 악화(惡貨)에게 구축(驅逐)되는 것도 나라를 떠나는 것이며 사회의 선량한 역량이 억압되고 소외되는 것에

 이르러서는 그 극한적 상황을 드러내는 것이라 해야 하겠지요.

 

제6강 논어(論語) -10

         

            樊遲問仁 子曰 愛人 問知 子曰知人(顔淵)
  
         “번지가 인(仁)에 관하여 질문하였다. 공자가 대답하기를 인이란 애인(愛人)이다.

          이어서 지(知)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공자가 대답하기를 지(知)란 지인(知人)이다.  지인(知人)이란 타인을 아는 것이다.”
  
  논어(論語)에서 인(仁)에 대한 공자의 답변은 여러 가지입니다.
  극기복례(克己復禮-顔淵)

  기소불욕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仲弓)

  기언야인(其言也 -司馬牛)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더 있습니다만 다 조사하지 못하였습니다.
  공자는 이처럼 인(仁)이란 자기(私心)를 극복하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답변한 경우도 있고,

  자기가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라고 대답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인이란 말을 더듬는 것이라고 답변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처럼 인(仁)의 의미는 특정한 의미로 한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 적절한 대답을 하고 있는 경우도 있으며 또 질문하는 사람의 성향에 따라서

  그에게 맞는 답변을 공자는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仁)을 애인(愛人) 즉 남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번지는 공자가 타고 다니는 수레를 모는 마부입니다. 늘 공자를 가까이 모시는 사람입니다. 물론 제자입니다.

  번지에게 인의 의미를 애인으로 이해시키려고 한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되는 것은 위의 여러 가지 답변에 공통되는 코드가 타인과의 관계라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극기복례(克己復禮)의 경우는 사(私)와 공(公:禮)의 관계를,

  그리고 기소불욕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의 경우는 기(己)와 인(人)의 관계를 인(仁)의 내용으로 삼고 있습니다.
  사마우(司馬牛)에게 이야기한 ‘인이란 말을 더듬는 것이다’(其言也인)의 경우는 더욱 철저합니다.

  인이란 말을 더듬는 것이라고 한 이유가 위지난언지득무인호(爲之難言之得無仁乎.실천이 어려우니 어찌 말을 더듬지 않겠는가)

  입니다. 자기가 한 말은 다른 사람과의 약속이라는 뜻입니다. 이 역시 나와 타인의 관계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仁)이란 이처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덕목(德目)입니다.
  ‘위태로운 사랑은 자기의 측근에게만 미치며 멸망하는 자의 사랑은 제 한 몸에게만 미친다’(董仲舒)라고 한 것도

  같은 관점에서 인(仁)을 이야기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知)에 관한 공자의 답변은 이러한 점이 훨씬 더 분명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지식(知識)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냉정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위 객관적 지식이나 정보(情報)에 대하여는 더욱 부정적이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구절에서 이어지는 대화는 정치에 관한 것입니다.

  곧은 사람으로서 굽은 사람을 바르게 만드는 것의 중요성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왕(齊王) 건(建)은 보통사람의 3배나 되는 재주가 있었지만 현자(賢者)를 알아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진(秦)의 포로가 되었다고 해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知)란 지인(知人)이다”라는 선언은 우리에게 매우 깊은 반성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연과학적 지식 즉 지극히 객관적 사실이라는 지식도 궁극적으로는 인간적 당파성에 기초해 있는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모든 지식은 사람과 관계되지 않는 것이 없는 법입니다.
  
  따라서 그 사람을 이해하지 않고 그 말(言)을 이해할 수 없으며 그 사람을 이해하지 않고 그 행(行)을 이해할 수 없는 법입니다. 

  우리의 유행가에도 그런 가사가 있었어요.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내가 어찌 너를 알겠느냐?”하는 가사였습니다.
  더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자기를 보여주지 않는 법이지요.

  자기의 알몸을 보여줄 리가 없지요. 지(知)와 애(愛)는 함께 이야기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애정이 없는 이를테면 나와 아무런 관계없는 타자(他者)와 대상(對象)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
  나와 타자(他者)사이에 놓여 있는 근원적인 비대칭성(非對稱性)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인식(知)은 애정과 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 구절에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6강 논어(論語) - 11

    子曰 富與貴, 是人之所欲也. 不以其道得之, 不處也. 貧與賤, 是人之所惡也. 不以其道得之 不去也. (里仁)
  
  이 구절을 뽑아서 함께 읽는 이유는 여러분이 충분히 이해하리라고 믿습니다.

  부귀(富貴)와 빈천(貧賤)의 가치중립성(價値中立性)에 대한 환상을 지적하자는 것이지요.
  이 구절의 해석에 다소의 이견이 있습니다. 가장 널리 통용되는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귀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면 그것을 누리지 않으며

   빈천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이 아니면 그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여기서 해석상의 이견이 있는 부분은 ‘불이기도득지(不以其道得之)’입니다.

  “그 도로써 얻지 않은 것”이란 뜻입니다. 부정(不正)한 방법으로 얻은 것을 의미합니다.
  이 경우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부귀는 쉽게 이해가 가지만 빈천(貧賤)의 경우는 쉽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닌 빈천이 과연 어떤 것인가? 쉽게 이해가 가지 않지요.
  
  그래서 다산(茶山)은 이 경우의 득(得)을 탈피(脫避)의 의미로 해석합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벗어날 수 없는 한 벗어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해석이 이를 따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 도로써 얻은 빈천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꼭 빈천은 아니라 하더라고 처음부터 부귀와 상관없는 삶을 선택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는 “그 도로써 얻은 빈천”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반대로 부귀를 얻기 위하여 부정한 방법에 의존했다가 빈천하게 되는 경우가

  이를테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그 도로써 얻지 않은 빈천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빈천은 불거(不去)해야 하는 것이지요. 책임져야 한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읽고 싶은 이유는 빈천을 무조건 탈피해야하는 것을 전제로 해석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빈천도 얼마든지 도로써 얻을 수 있는 어떤 가치라는 것을 선언하고 싶은 것이지요.
  
어느 경우든 우리가 이 글에서 읽어야 하는 것은 부귀와 빈천에 대한 반성입니다.
  부의 형성과정이 정당한 것인가? 그 사람의 출세가 그 능력에 따른 정직한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물음은

  어느 시대에나 있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보편적인 시각은 오로지 그 결과만을 두고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빈천의 경우도 그것을 당자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이 세태입니다. 게으르다거나 낭비적이라거나 하는 것이 그런 시각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귀와 빈천을 그 역사와 과정을 통하여 이해하는 자세입니다.

  개인의 경우 몇몇 재벌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리는 부귀의 형성과정에 대하여 전혀 무지합니다.

  특히 서울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나의 경우에는 고향에 내려가면 그 곳에서는 선명하게 보입니다.

  조선조 말에서부터 일제하 해방후 자유당 공화당 신한국당을 거쳐오면서 그와 그의 가계(家系)가 어떻게 살아왔는가 하는

  역사가 선명하게 보입니다.
  지금 소유하고 있는 전답과 건물의 소유주(所有主)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대다수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줄곧 고향에서 살아오고 있는 친구들을 만나면 주로 나누는 대화가 그런 것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과정과 역사가 드러나지 않는 사회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친일파가 처단되지 않은 역사를 우리가 살고 있기도 하지요.

  그 과정과 역사는 완벽하게 은폐되고 그 결과와 성과만을 바라보게 하는 사회를 우리가 살고 있지요.
  
  개인의 경우뿐만이 아니라 국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이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근대사회의 역사가 보여주는 것은 한마디로 억압과 수탈의 역사입니다.

  21세기의 평화를 갈망하던 우리들의 소망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자본주의의 부귀(富貴)에 대하여 그 과정(過程)과 그 도(道)에 대하여 우리는 너무나 무지(無知)합니다.
  우리가 근대기획 즉 선진자본주의를 국가적 목표로 하여 매진하고 있는 한 자본주의의 과정은 은폐되는 것이지요.

  모든 침략과 수탈이 합리화되고 미화(美化)되고 선망(羨望)의 대상이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역사의식과 이러한 사회의식 속에서 부귀와 빈천의 온당한 의미를 읽어내기란 매우 어렵지요.
  
  집안의 어른 중에 보학(譜學)이라는 문화전통을 복원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분이 계시지요.

  그래야 자손을 위해서라도 부정한 방법으로 부귀를 도모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보학(譜學)에 의하여 될 일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사회의 관계망과 역사의 관계망, 즉 사회 역사적 관계망(關係網)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이

  보다 근본적인 과제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이 근본적인 과제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들의 천민적인 의식에 대한 반성도 그에 못하지 않을 만큼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제6강 논어(論語) - 12

 

       子曰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爲政)
  
         “학(學)하되 사(思)하지 않으면 어둡고, 사(思)하되 학(學)하지 않으면 위태롭다.”
  
  이러한 번역에서 여러분이 무엇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무척 난감하지요.
  옥스퍼드 번역본 ‘논어’에는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Learning without thought is labourlost
  Thought Without learning is perilous.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학(學)과 사(思)에 대한 이해가 애매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번에 화이부동(和而不同)을 설명하면서 대련(對聯)과 대(對)에 대하여 이야기한 것 기억하지요?

  이 구절도 완벽한 대련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학(學)과 사(思)를 대(對)로 읽는 것이 핵심입니다.

  일반적으로 학을 배움(leatning), 그리고 사를 생각(thought) 또는 사색으로 읽을 경우 학과 사가 대를 이루지 못합니다.

  다같이 정신영역에 관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학(學)은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론적 탐구라는 의미로 쓰여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반면에 사(思)는 생각이나 사색의 의미가 아니라 실천(實踐)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글자의 구성도 ‘전(田)+심(心)’입니다. 밭의 마음이 사(思)입니다. 밭이란 노동하는 곳입니다. 실천의 현장입니다.
  
  내게는 이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에 얽힌 이야기가 있습니다.
  할아버님께서 언젠가 어린 손자인 나를 앉혀놓고 이 구절을 설명하셨습니다.

  1시간쯤 책을 읽고 나서는 반드시 30분 정도는 생각을 해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책을 덮고 읽은 것을 다시 생각하면서 머리 속에서 정리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어둡지(罔) 않다는 것이 할아버님의 해석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동안 할아버님의 그런 말씀이 생각나서 자주 그렇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읽은 것을 다시 생각하면 내용의 핵심을 확인하게 되기도 하고 또 글 전체의 구성도 이해하게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내가 감옥에 앉아서 책을 읽으면서 깨닫게 됩니다. 책을 읽어도 도대체 머리에 남는 것이 없었어요.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어떤 책을 약 30-40페이지쯤 읽고 나서야 그 책은 전에 읽은 것이란 걸 알게 됩니다.
  감옥에서 책읽는 것이란 그저 무릎 위에 책 한권 달랑 올려놓고 읽는 것입니다.

  독서는 그 이전과 이후와 완벽하게 단절된 그저 독서일 뿐입니다. 실천과 유리된 독서입니다.
  책을 읽고 나서 책을 덮고 읽은 것을 다시 생각하고 정리해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책을 읽는 것(學)이나 책을 덮고 생각하는 것(思)이 똑같은 정신활동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할아버님의 해석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사(思)를 경험(經驗)과 실천(實踐)의 의미로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학과 사를 대(對)로 읽어야 하는 것이지요.
  

  경험과 실천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은 현장(現場性)입니다. 그리고 구체성(具體性)입니다.
  현장성이란 것은 그야말로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현장이란 것은 조건적이고 우연적이고 상대적입니다.

  한마디로 특수한 것입니다.
  따라서 경험지(經驗知)는 보편적인 것이 아닙니다. 학(學)이 보편적인 것임에 비하여 사(思)는 특수한 것입니다.

  학이 generalism을 의미한다면 사(思)는 specialism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學而不思則罔의 의미는 현실적 조건이 사상(捨象)된 보편주의적 이론은 현실에 어둡다는 의미입니다.
  반대로 사이불학즉태(思而不學則殆)는 특수한 경험적 지식을 보편화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뜻이 됩니다.

  학교연구실에서 학문(學問)에만 몰두하는 교수가 현실에 어두운 것이 사실입니다.

  반대로 자기 경험을 유일한 잣대로 삼거나 보편적인 것으로 전제하고 일을 처리하면 위험한 것이지요.
  일반적으로 자신의 경험에서 이론을 이끌어내는 사람들,

  즉 대부분의 현장활동가들은 대단히 완고합니다. 자기경험만을 고집합니다.
  생산직 기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인(匠人)적인 자존심으로 자기방식을 고집합니다. 경험적 지식은 매우 완고합니다.

  따라서 경험주의(經驗主義)를 주관주의(主觀主義)라고 합니다.
  
  그러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썼습니다만 자기의 경험적 사실을 곧 보편적 진리로 믿는 완강한 고집에서

  나는 오히려 그 정수(精髓)의 형태는 아니라 하더라도 신의(信義)와 주체성(主體性)의 일면을 발견합니다.
  경험이 비록 일면적이고 주관적이라는 한계를 갖는 것이긴 하나,

  아직도 가치 중립적이라는 ‘인텔리의 안경’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나는,

  경험을 인식의 기초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공고한 신념이 부러우며, 경험이라는 대지에 튼튼히 발딛고 있는

  그 생각의 ‘확실함’을 배우고 싶습니다.
  경험 고집은 주체적 실천의 가장 믿음직한 원동력이기 때문입니다.

  몸소 겪었다는 사실이 안겨주는 확실함과 애착은 어떠한 경우에도 쉬이 포기할 수 없는 저마다의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주관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세상이란 참으로 다양한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동(大同)은 멀고 소이(小異)는 가깝지요.

  자기의 처지에 눈이 달려 있기 때문에 누구나 자신의 시각과 이해관계에 매몰되기 쉽지요.
  따라서 사회적 관점을 갖기 위해서는 학(學)과 사(思)를 적절히 배합하는 자세를 키워가야 합니다.

  공자가 이 구절에서 이야기하려고 한 것이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이론과 실천의 통일입니다. 현실적 조건에 대한 고려가 있어야 함은 물론이며

  동시에 특수한 경험에 매몰되지 않는 이론적 사고의 필요성에 대하여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학(學)이 객관주의적이고 사(思)가 주관주의적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만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반대측면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학(學)이 주관적이고 사(思)가 객관적인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매우 사소한 일화입니다만 여러분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집에 전기공사를 할 때의 일입니다.나도 전기수리공을 도우면서 한나절을 같이 일한 적이 있었어요.
  그 때의 그 전기수리공과 주고 받은 대화 내용입니다. 집에 책이 많은 걸 보고 그 수리공이 내게 학교 선생이냐고 물었어요.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그의 말이 선생은 참 좋겠다고 부러워했어요.
  그런데 그가 부러워하는 이유가 무척 철학적이었습니다.

  그가 부럽다고 하는 이유는 물론 전기수리보다 교실에서 가르치는 일이 훨씬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쉽다는 것이 육체적으로 편하다거나 방학이 있어서 쉽다는 뜻이 아니었어요.
  
  “책상에서는 1개이지만 실제로 일해보면 10개도 넘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어요.
   교실보다는 현실이 훨씬 더 복잡하다는 것이지요.
  그가 주장하는 바는 요컨대 이론(理論)은 주관적이고 실천(實踐)은 결코 주관적일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관념적일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가 이야기한 것은 어쩌면 단순하다 복잡하다는 정도의 일상적 대화였습니다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 내용은 매우 철학적인 것이지요.
  그는 마치 확인 사살하듯이 못박았어요.
  “머리는 하나지만 손은 손가락이 10개나 되잖아요.”
  내가 반론을 폈지요.
  “머리에는 머리카락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의 대답은 칼로 자르듯 명쾌했습니다.
  “머리카락요? 그건 아무 소용없어요, 모양이지요. 귀찮기만 하지요.”
  그렇습니다. 생각하면 ‘머리’란 머리카락으로 이런저런 모양을 내면서

  결국 ‘자기(自己)’를 디자인하고 합리화(合理化)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더구나 머리카락이란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지요. 그 수리공도 모자를 쓰고 있었어요.

 

제6강 논어(論語) - 13

 

       子曰 寗武子 邦有道則知 邦無道則愚 其知可及也 其愚不可及也 (公冶長)
  
  이 구절을 소개하는 것은 어리석음, 즉 우(愚)의 의미를 함께 생각해보기 위해서입니다.
  영무자(寗武子)는 위(衛)나라의 대부라고 합니다.

  공자는 영무자의 예를 들어 지(知)와 우(愚)에 대하여 생각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대학이란 지식의 전당입니다. 지(知)를 가르치고 배우는 곳입니다.

  더구나 정보화 사회로 규정되는 현재의 분위기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논어의 이 구절은 그것을 다시 한번 반성하게 한다는 데에 재조명의 의미가 있습니다.
  공자가 영무자의 예를 들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비교적 분명한 것입니다.
  “영무자는 나라에 도(道)가 있으면 지혜로웠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어리석었다.

    그 지혜로움은 (많은 사람들이) 따를 수 있지만 그 어리석음은 (감히) 따를 수 없다.”
   여기서 방유도(邦有道)는 정치가 올바른 나라, 방무도(邦無道)는 정치가 그른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급(可及)은 따를 수 있다. 불가급(不可及)은 따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불가급이란 것은 쉽게 흉내내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우(愚)가 어렵다는 것이지요.

  사람이란 지혜롭기보다는 어리석기가, 즉 지혜를 드러내기보다는 그것을 숨기고 어리석은 척 하기가 더 어렵다는 뜻입니다.
  
  논어에는 유도(有道)와 무도(無道)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관하여 여러가지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위태로운 나라에는 들어가지 않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살지 않는다.(危邦不入 亂邦不居)
  천하에 도가 있으면 자신을 드러내고 천하에 도가 없으면 숨는다.(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
  나라에 도가 있으면 빈천(貧賤)이 수치요, 나라에 도가 없으면 부귀(富貴)가 수치이다.
  (邦有道 貧且賤焉恥也 邦無道 富且貴焉恥也) <泰伯>
  사어는 나라에 도가 있을 때도 곧기가 화살 같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도 곧기가 화살 같았다.(史魚 邦有道 如矢 邦無道 如矢)
  거백옥은 나라에 도가 있으면 벼슬에 나아가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자신의 재능을 말아서 품에 감추었다.

  (遽伯玉 邦有道則仕 邦無道 則可卷而懷之)<衛靈公>
  대체로 나라에 도가 없으면 벼슬하지 않고, 슬기를 드러내지 않으며, 재능을 감추고 물러나 몸을 숨기는 방식으로 대응합니다.

  사어(史魚)의 경우는 예외적으로 도(道)의 유무(有無)를 불문하고 대쪽같이 처세한 것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영무자의 경우에도 원주(原註)에는 무자(武子)는 위나라 대부(大夫)로서 이름이 유(兪)이며 문공(文公)과 성공(成公) 때에

  벼슬하였는데 성공(成公)이 도가 없어 나라를 잃음에 이르자 그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어렵고 험한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고

  쓰고 있습니다. 원주에서는 우(愚)를 사어(史魚)의 시(矢)와 같은 뜻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어느 경우든 지(知)보다는 우(愚)가 어려운 덕목으로 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생각하는 것은 지(知)는 무지(無知)를 깨달을 때 진정한 지(知)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愚)야말로 최고의 지(知)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내가 좋아하는 구절 하나를 소개하고 마칩니다.
  
  “세상에는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2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에 자신을 잘 맞추는 사람이며

   어리석은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게도 세상을 자신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이 세상을 조금씩 나은 것으로 바꾸어간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 지혜롭게 영합하는 사람들만 있다면 세상이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은 없는 법이지요.

  그나마 조금씩 바뀌어 나가는 것은 세상을 우리에게 맞추려는 우직한 노력 때문이지요.

 

제6강 논어(論語) - 14 

 

       子曰 孟之反 不伐 奔而殿 將入門 策其馬 曰 非敢後也 馬不進也 (雍也)
  
                 孟之反(맹지반) : 魯나라 대부. 이름은 칙(側)
                 伐(벌) : 자랑하다. 誇功.

                 奔(분) : 패주(敗走), 퇴각(退却). 패퇴(敗退).
                 殿(전) : 軍後. 後備를 맡음(앞에서 인도하는 것을 啓)
                 策(책) : 鞭. 채찍으로 때리다.

  

 "맹지반은 자랑하지 않는다. 퇴각할 때는 (가장 위험한) 후미(後尾)를 맡았다.

 그러나 막상 성문에 들어올 때는 (화살을 뽑아) 말에 채찍질하면서

  '내가 감히 후미를 맡으려고 하지 않았는데 말이 나아가지 않아서 뒤처졌다’고 하였다.”
  

     
  애공 11년에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원주(原註)에서는 맹지반의 이러한 겸손과 사양의 마음을 평하여 윗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욕심이 날로 사라지고(人欲日消) 하늘의 이치가 날로 밝아진다(天理日明)고 하였습니다.
  맹지반이 후비(後備)를 맡은 공(功)을 숨긴 까닭은 전쟁에서 패하여 돌아왔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전승(戰勝)이나 개선(凱旋)의 경우에는 후비를 맡을 필요가 아예 없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원주(原註)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공(功)을 숨기고 겸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욕심(慾心)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욕심이 없어야 겸손할 수 있으며 욕심이 없어야 하늘의 이치가 날로 밝아지는 것이지요.
  
  제갈공명(諸葛孔明)의 명석한 판단은 무사(無私)에서 오는 것이라 합니다.

  천하를 도모하려는 사사로운 욕심이 없었음은 물론, ‘윗사람이 되려고 하는 욕심’마저도 없었지요.
  이처럼 무사(無私)하기 때문에 공평(公平)할 수 있고 공평하기 때문에 이치가 밝아질(天理明) 수 있는 법입니다.

  우리가 집단이기주의와 이해관계집단의 주장을 신뢰하지 않는 것은 그 주장과 논리가 사사로운 것이기 때문이지요.
 
  아마 여러분 가운데는 전번 강의에서 진리란 참여(參與)이며 조직(組織)이라고 이야기한 사실을 들어

  지금의 이야기와 모순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리가 참여의 방식이며, 진리는 조직되는 것이라면 참여점(entry point)에 있어서의 입장(立場)과 당파성(黨派性)은

  당연히 무사(無私)함과 모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진리는 무사(無私)할 수 없는 법이지요.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하여 여러분도 준비를 해서 다시 시간을 내어서 논의하기로 합시다.

  이것은 공(公)과 사(私)의 경계(境界)에 관한 논의이면서

  상대적 진리와 절대적 진리의 문제와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논의는 공자가 맹지반의 예를 들어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에 한정하기로 하지요.

  자기의 공(功)을 숨기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이 이 장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겸손함을 뒷받침하는 것이 무욕(無慾)과 무사(無私)라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욕과 무사에서 우리의 논의를 끝낸다면 그것은 너무나 상투적인 윤리학에 갇히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공과(功過)를 불문하고 아무리 교묘한 방법으로 그것을 숨기더라도

  결국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알게 되며 공치사(功致辭)란 결국 공치사(空致辭)로 전락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일이지요.
  그래야 비로소 겸허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경우에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명석합니다.

  이 말에 대하여 아마 쉽게 동의하지 않으리라고 생각됩니다.
 
  다소 추상적인 이야기로 들릴 지 모르지만 “타인이란 항상 자기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습니다.”

  이 말에 대하여도 쉽게 동의하지 않을 지 모릅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여러분은 지금 나보다 낮은 자리에 앉아서 주로 내 강의를 듣고 있지요?

  여기 교단에 서 있는 내가 주의해야 하는 것은 여러분이 매우 유리한 위치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일입니다.
  나도 학생 때에는 지금 여러분이 앉아 있는 위치에서 선생님들의 강의를 들었지요.

  그 때 느낀 것입니다만 학생이란 위치 즉 교단 아래에 턱받치고 앉아 있는 바로 여러분의 자리는

  선생의 일거수 일투족이 너무나 잘 보이는 자리라는 사실이었어요.
  강의내용을 이해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강의내용에 대한 선생 자신의 이해 정도가 너무나 훤하게 들여다보이는 것이었어요. 

  마치 맨홀에서 작업하는 사람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치부(恥部)를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모든 타인(他人)은 그러한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집단적 타인(他人)인 대중(大衆)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대중은 현명하다고 하는 것이지요. 대중은 결코 속일 수 없습니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는 격입니다.
  우리가 명심하여야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겸허해야 되는 이유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더 하지요. 교도소는 거짓말이 판치는 곳입니다만 동시에 거짓말이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곳입니다. 

  같은 감방에서 오래 동안 함께 생활하는 곳이기 때문에 거짓말이 언젠가는 탄로가 나게 마련입니다.
  일단 거짓말을 하면 그 거짓말을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그 거짓말과 상충되는 말을 피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 거짓말을 했을 때 누구누구가 그 자리에 있었는가를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거짓말이 탄로 나지 않기 위하여는 거짓말과 거짓말이 행해진 환경을 동시에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해집니다. 왜냐하면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가듯이 거짓말에 노출되는 사람의 수가 기하급수로 늘어납니다. 

  도대체 감당이 불감당이지요. 아무리 기억력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지방신문사 기자였다고 으스대던 친구가 있었는데 어느 날 그만 탄로가 났어요.

  '인터뷰’를 ‘인터폰’이라고 했다는 풍문이 들려 왔지요. 

  그래서 어느 날 누군가가 다시 확인했지요. “누구를 인터폰 했다고?” 그 작자는 “ooo를 인터폰 했다”고 분명히 대꾸했습니다. 

  막상 당자는 그걸 눈치채지 못하였지만 여러 사람 앞에서 확인사살 당하였지요. 교도소의 강점(强點)이지요.
  여기에 비하여 오늘날의 우리사회는 거짓말의 수명이 상당히 긴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겸손할 필요가 별로 절실하지 않는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실상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제6강 논어(論語) -15

 

      子貢問曰 鄕人皆好之何如 子曰未可也 鄕人皆惡之 何如
      子曰 未可也 不如鄕人之善者好之 其不善者惡之(子路)
  
                鄕人(향인) : 마을 사람.
                未可(미가) : 좋지 않음. 옳지 않음.
                何如(하여) : 어떠한가? (如何는 ‘어떻게’의 뜻)
                惡(오) : 미워함.
  

       “자공이 질문하였다. ‘마을사람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공자가 대답하기를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마을사람 모두가 미워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공자가 대답하기를 ‘(그 역시)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마을의 좋은 사람이 좋아하고 마을의 좋지 않은 사람들이 미워하는 사람만 같지 못하다.”
  
  이 대화에 대하여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쓴 내용을 소개하지요.

  내가 감옥에서 그 글을 쓸 때의 심경이 매우 착잡하였습니다.

  감옥에는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마을의 좋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라 할 수 있지요.
  그리고 나는 비교적 감옥의 많은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지내는 편이었어요.

  그래서 이 구절이 더 심각하게 읽혔지도 모릅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쓴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자(朱子)의 주석에는 마을의 선한 사람들이 좋아하고 마을의 불선한 사람들 또한 미워하지 않는 사람은

   그의 행(行)에 필시 구합(苟合, 迎合)이 있으며,

   반대로 마을의 불선한 사람들이 미워하고 마을의 선한 사람들 또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그의 행(行)에 실(實)이 없다 하였습니다.”
  
  내친 김에 책의 내용을 같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합(苟合)은 정견(定見)없이 남을 추수(追隨)함이며, 무실(無實)은 선자(善者)의 편이든 불선자의 편이든

   자기의 입장을 갖지 못함에서 연유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뎐이 없는 입장이 있을 수 없고 그 역(逆)도 또한 참이고 보면

   '논어(論語)’의 이 다이얼로그(dialogue)가 우리에게 유별난 의미를 갖는 까닭은,

   타협과 기회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면서 더욱 중요하게는 파당성(派黨性, parteilichkeit)에 대한

   조명과 지지라는 사실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불편부당(不偏不黨)이나 중립을 흔히 높은 덕목으로 치기도 하지만

   바깥 사회와 같은 복잡한 정치적 장치 속에서가 아니라 지극히 단순화된 징역 모델에서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싸울 때의 ‘중립(中立)’이란 실은 중립이 아니라 기회주의보다 더욱 교묘한 편당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을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호감(好感)을 얻으려는 심리적 충동도 실은 반대편의 비판을 두려워하는

   '심약(心弱)함’이 아니면, 아무에게나 영합하여는 ‘화냥끼’가 아니면,

   소년들이 갖는 한낱 ‘감상적(感傷的) 이상주의(理想主義)’에 불과한 것이라 해야 합니다.

   이것은 입장과 정견이 분명한, 실(實)한 사랑의 교감이 없습니다.

   사랑은 분별이기 때문에 맹목적이지 않으며, 사랑은 희생이기 때문에 무한할 수도 없습니다.
   징역을 살만큼 살아본 사람의 경우가 아마 가장 철저하리라고 생각되는데

   '마을의 모든 사람’에 대한 허망한 사랑을 가지고 있거나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증오에 대하여 알만큼 알고 있기’ 때문이라 믿습니다.
   증오는 그것이 증오하는 경우든 증오를 받는 경우든 실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불행이 수반되게 마련이지만,

   증오는 ‘있는 모순’을 유화(宥和)하거나 은폐(隱蔽)함이 없기 때문에 피차의 입장과 차이를 선명히 드러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증오의 안받침이 없는 사랑의 이야기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증오는 ‘사랑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나도 오랜만에 읽어보는 셈입니다. 논어의 이 대화가 양극단을 좋지 않다고 하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만인으로부터 호감을 받는 경우와 만인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경우 둘 다 좋지 않다는 것이지요.
  양극단은 실제로는 없는 것입니다. 위선(僞善)으로서, 또는 위악(僞惡)으로서만 상정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사회란 이웃을 내몸같이 사랑하는 구조도 아니며 동시에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행해지는 구조도 아님은 물론입니다.

  대립과 모순이 있으며 사랑과 증오가 함께 존재하는 세계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실상을 최소한 미화하거나 은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맹자 진심(盡心下)편에 있는 구절입니다.
  
  “내가 향원(鄕愿:마을 사람들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것은 사이비(似而非)를 증오하기 때문이다.

   자주색(紫)을 싫어하는 것은 빨강색(朱)을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논어’는 전에도 이야기하였습니다만 나로서는 인간관계에 관한 담론의 보고입니다.

춘추전국시대는 고대국가가 출현하는 시기이며 따라서 당시의 백가(百家)들은 당연히 사회론에 있어서 쟁명(爭鳴)을 하였지요.
‘논어’는 그러한 담론 중에서 사회의 본질을 인간관계에 두고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붕(朋)이건 예(禮)건 인(仁)이건 사회는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가 근본이라는 논리입니다.

바로 이 점이 다른 사상에 비하여 ‘논어’가 갖는 진보성의 근거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논리는 계급관점이 결여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의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은 계급적 개념이며

‘논어’는 오히려 주(周) 봉건제하의 노예적 질서를 옹호하고 있는 사상이라고 비판을 받게 됩니다.
이 점에 대하여는 논의가 무성합니다만 다시 논의하기로 하지요.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하여는 앞으로 많은 전문 연구자들이 논의를 계속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과거의 사상을 비판할 경우 우리가 가장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것이 비판의 시제(時制)입니다.

고대사상을 오늘의 시제에서 평가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것이 당대사회의 제반조건(諸般條件)에서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를 존중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사상은 역사적 토대를 갖는 것이지요. 특정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태어나고 묻히는 것이지요.

모름지기 당시(當時)를 기준으로 평가해야 온당한 것이지요.
우리는 다만 논어가 인간관계론을 중심에 두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인간관계론은 주대(周代)의 종법질서(宗法秩序)를 뛰어넘는

세계라는 사실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논어’에 대한 접근경로도 그런 쪽으로 한정하려고 합니다.
그렇더라도 ‘논어’에 관한 예제(例題)를 더 많이 다루어야 합니다만 그러지 못합니다.

몇 가지만 더 이야기하면서 마무릴 하기로 하겠습니다.
  
옹야편(雍也篇)에 있는 다음 구절은 내용과 형식의 변증법적 통일에 관한 논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이 이 구절을 상품미학(商品美學)에 대한 반성으로 읽어주기 바랍니다.
  
  子曰 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然後 君子(雍也)
  
              質(질) : 내용, 바탕 文(문) : 형식, 문채
              勝(승) : 이기다. 지나치다. 過하다.
              野(야) : 거칠다.

              史(사) : 사치스럽다.
  
    “바탕이 문채(文彩)보다 승(勝)하면 거칠고 문채가 바탕보다 승하면 사치스럽다.

     형식과 내용이 고루 어울린 후라야 군자이다.”
  
  내용과 형식의 통일에 관한 것입니다. 승(勝)하다는 표현은 물론 지금은 쓰지 않지요.

  그러나 과거에는 매우 일상적으로 사용되던 말이었지요.
  이 구절에서 ‘승(勝)하다’는 말은 여러분의 언어로는 ‘튄다’로 해석해도 되겠네요.

  내용이 형식에 비하여 튀면 거칠고 형식이 내용에 비해 튀면 사치스럽다, 그런 의미입니다.
  이 경우 내용을 행(行), 형식을 언(言)으로 바꾸어 읽어도 상관없습니다.

  사람과 의상(衣裳), 실천(實踐)과 사상(思想) 등 여러 가지 경우에 우리는 이러한 범주적 인식을 하고 있습니다.
  
  조화와 균형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쪽 측면이 튀는 경우를 우리는 얼마든지 경험하고 있지요.

  세상에는 내용도 없는 이야기를 매우 아름답게 잘도 풀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값으로 매기는 것이 무리입니다만 사람보다는 훨씬 비싼 옷을 입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키지도 못할 주장을 늘어놓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반대로 말없이 어떤 일을 이루어 놓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보다 못한 옷을 입고, 사람보다 작은 집에 살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광고 카피의 문장과 표현이 도달하고 있는 그 형식에 있어서의 완성도(完成度)에 대하여는 누구나 감탄하고 있는 일이지만

  광고 내용을 그대로 신뢰하는 소비자는 없습니다. 상품의 질이 그것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런 경우 사치스럽다(史)고 하는 것이지요.
  반면에 사회운동단체의 성명서는 광고 카피의 반대측의 극한점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용만으로 승부하려고 하지요. 도덕성과 정당성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쳐서 주장을 제시하는 형식이

  심히 거칠기 짝이 없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 표현하는 형식과 언어를 적절히 절제함으로써 훨씬 더 진한 감동을 이끌어 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격을 떨어트려 놓아 아쉬움을 금치 못하는 경우 많지요. 질이 승하여 거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이야기 같습니다만 이 구절은 내 경우에는 붓글씨 체와 관련이 없지 않습니다.

  서도(書道)에 있어서의 내용과 형식의 문제입니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글씨체를 민체(民體)다, 연대체(連帶體)다, 어깨동무체다, 심지어 유배체(流配體)라고도 합니다만

  나로서는 매우 고민한 글씨체입니다.

  나는 한글의 글씨체는 물론 오랫동안 궁체(宮體)와 고체(古體)를 바탕으로 하여 썼었지요.
  고체도 마찬가지입니다만 특이나 궁체의 경우 더욱 그 특징이 쉽게 눈에 뜨입니다.

  궁체는 궁중에서 궁녀들이 쓰던 글씨체에서 유래합니다. 여러분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귀족적 형식미가 추구되고 있습니다.
  정연(整然)하고 하체(下體)가 연약하면서 전체적으로 정적(靜的)인 그러한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이러한 미학(美學)을 가지고 있는 궁체와 고체는 물론 시조(時調)나 별곡(別曲) 성경구(聖經句) 같은 내용을 쓸 때는

  그 내용과 형식이 잘 어울립니다.
  
  그러나 내가 자주 썼던 민요나 민중시를 그러한 형식에 담았을 때는 내용과 형식이 전혀 어울리지 못하였지요.

  신도엽, 신경림, 박노해 등 민중적 정서와 서민적 가락을 담기에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글씨체였습니다.

  마치 된장찌개를 유리그릇에 담아 놓은 것같이 내용과 형식이 불화(不和)를 빚지요.
  이러한 반성이 계기가 되어 글씨를 쓸 때는 항상 이 구절을 생각하게 되지요.

  지금도 글씨의 형식과 내용을 조화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만

  글씨에 시간을 내기가 어려워서 지지부진 답보하고 있는 형편이지요

  조금 전에도 이야기하였듯이 위 구절에서 여러분들은 상품미학의 허구성을 읽는 것이 필요합니다.

  온통 상품미학에 포섭되어 그로부터 우리의 감수성을 이끌어내고 있는 것이 현대의 문화적 상황입니다.
  상품(商品)은 교환가치의 획득을 목적으로 합니다.

  경제학 교과서에는 상품을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통일물로 설명하고 이를 상품의 이중성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상품은 교환가치가 본질입니다. 사용가치는 교환가치에 종속되는 것이지요.

  상품은 한마디로 말해서 팔기 위한 것입니다. 사용가치는 교환에 필요한 하나의 요소에 불과합니다.
  여기서 다시 ‘논어’의 구절로 돌아가서 문질(文質)개념으로 이야기합시다.

  상품의 사용가치는 내용(質)이고 교환가치는 형식(文)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문질(文質)이 빈빈(彬彬)하지 못하다는 것이지요.

  상품에 있어서는 그 형식이 전체를 규정한다는 사실입니다. 상품의 내용인 사용가치는 소비되는 시점에서 판단됩니다.
  그에 반하여 구매행위는 소비 이전에 일어납니다.

  그것은 상품의 브랜드, 디자인, 컬러, 포장 등 외관 즉 형식에 의하여 결정됩니다.
  
  광고 카피 역시 소비자가 소비보다 먼저 만나는 약속입니다. 광고는 그 상품이 담고 있는 사용가치에 대한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소비단계에서 허위성이 드러납니다.

  이약속이 배반당하는 지점 즉 그 형식의 허위성이 드러나는 지점이

  패션이 시작되는 지점이라는 사실은 여러분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반론이 없지 않습니다. 반품(返品)과 AS가 뒤따른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하자(瑕疵)에 대한 보상입니다. 광고 카피의 허구성을 뒤집는 것이 못됩니다.
  더구나 사용가치를 먼저 만나게 하는 장치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즉 상품의 성격을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며 더구나 상품생산구조 자체에 대하여

  하등의 영향도 줄 수 없는 것이지요. 결국 형식만으로써 구매를 결정하게 하는 시스템의 보조적 기능에 불과한 것이지요.
  반품과 AS 자체가 또하나의 상품으로 등장하여 허구적인 약속구조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역설적이지요.

  결국 많은 사람들이 그 배신(背信)의 경험 때문에 상품을 불신하고 나아가 증오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나의 패션은 동일한 과정을 반복하여 또 다른 패션으로 전이(轉移)합니다. 그러다가 한바퀴 돌아서 다시 오기도 하지요.
  어쨌든 패션은 ‘변화 그 자체’가 됩니다. 상품문화와 상품미학의 본질이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새로운 것에 대한 가치, 그리고 변화의 신선함이라는 메시지는 실상 환상(幻像)이고 착각(錯覺)이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가 상품사회에서 도달할 수 있는 미학과 예술성의 본질이 이러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며,

  상품사회에서 우리가 키우고 있는 감수성과 정서가 이러한 내용을 갖는 것이지요.
  상품을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세포(細胞)라고 합니다. 세포의 본질이 사회체제에 그대로 구조화되는 것이지요.

  형식(形式)을 먼저 대면하고 내용(內容)은 결국 만나지 못하는 구조 속에 놓여 있는 것이지요.

  문(文)이 승(勝)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도 이러합니다. 속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그저 거죽만을 스치면서 살아가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표면(表面)만을 상대하면서 살아가지요.
  사용가치가 아예 없는 상품도 얼마든지 존재합니다. 브랜드만으로 운영되는 회사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굴지의 세계적인 회사로 군림하고 있지요.
  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남.’
  짧은 만남 그리고 한 점(點)에서의 만남입니다.
  
  위나라 대부인 극자성(棘子成)이 말하기를

  "군는 본바탕이면 그만이지 무엇 때문에 문식(文飾)을 할 것이랴”(君子 質而已矣 何以文爲)하였습니다.

   당시에도 오늘날과 비슷한 상황이었던가 봅니다. 상당히 과격한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러자 자공(子貢)이 반론했습니다. “애석하구나. . . . 문채는 본바탕이요 본바탕은 문채이니 (만일 무늬가 없다면)

  표범의 털 뽑은 가죽이 개와 양의 털 뽑은 가죽과 무엇이 다르랴”(文猶質也 質猶文也 虎豹之? 猶犬羊之?)고 하였습니다.

  곽(?)은 털을 뽑은 가죽을 말합니다.
  자공의 반론은 내용과 형식은 분리될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춤과 춤추는 사람을 어떻게 따로 떼어놓을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물론 분리는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고루 조화되어 빈빈(彬彬)하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형식도 경시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형식이 내용을 채우게 되는 경우도 많지요.

  때에 따라서는 형식이 내용을 결정하기까지 하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극자성이 당시의 폐단을 바로 잡으려고 다소 과격한 논리를 편 것이 사실이지만 그 잃음이 지나치고

   자공이 또 자성의 폐단을 바로 잡으려 하나 근본과 끝, 무거움과 가벼움을 구별하지 못하였으니 잃음이 또한 크다”고

  주해(註解)를 달고 있습니다.
  
  주자(朱子)는 문(文)이 이기는 것이 질(質)을 멸(滅)함에 이르면 근본이 망할 것이니

  사(史한 것보다 차라리 야(野)한 것이 낫다고 개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사(史)와 야(野) 중에서 하나를 택한다면?

 

제6강 논어(論語) - 16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雍也)
  
  
이 구절에서 모르는 한자는 없지요?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잘 알려진 구절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지(知), 호(好), 낙(樂)의 차이입니다.
  글자 그대로 지(知)는 아는 것. 호(好)는 좋아하는 것. 낙(樂)은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도 언급되어 있는 구절입니다.

  지(知)란 진리의 존재를 파악한 상태이고, 호(好)가 그 진리를 아직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한 상태로 보는 데에 비하여

  낙(樂)은 그것을 완전히 터득하고 자기 것으로 삼아서 생활화하고 있는 경지로 풀이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상적인 교육은 놀이와 학습(學習)과 노동(勞動)이 하나로 통일된 생활의 어떤 멋진 덩어리-일감-을 안겨주는

  것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무엇을 궁리해가며 만들어내는 과정이 바로 그러한 것인데

  즐거움은 놀이이고 궁리는 학습이고 만들어내는 행위는 노동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知), 호(好), 낙(樂)의 차이를 규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 각각을 하나의 통합적 체계 속에서 깨닫는 일이 중요합니다.
  지(知)를 대상(對象)에 대한 인식이라고 한다면 호(好)는 대상과 주체간의 관계에 관한 규정입니다.

  그에 비하여 낙(樂)은 대상과 주체가 혼연히 일체화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知)가 분석적인 것이라면 호(好)는 주관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낙(樂)은 주체와 대상이 원융(圓融)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낙(樂)은 어떤 판단 형식이라기보다는 질서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체와 부분, 체(體)와 용(用)이 혼연(渾然)의 일체(一體)를 이룬 어떤 질서(秩序)와 장(場)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知)는 역지사지(易地思之)하지 않고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호(好)는 대상을 타자(他者)라는 원천적 비대칭적 구조 속에 가두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知)와 호(好)를 지양(止揚)한 곳에 낙(樂)이 있다고 생각하지요.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고전강독의 관점에서 이를 규정한다면 “낙(樂)은 관계의 최고형태”인 셈입니다.

  그 낙의 경지에 이르러 비로소 어떤 터득(攄得)이 가능한 것이지요.
  세계인식이 정보(情報)형태의 파편적 분석지(分析知)에 머물거나 이데올로기적 가치판단(價値判斷)에서

  자유롭지 못한다면 낙(樂)의 경지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지요.
  지(知)에서 호(好)로 호(好)에서 낙(樂)으로 세계와의 관계를 높여나가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지요.

 

제6강 논어(論語) - 17

 

       子曰 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雍也)
  
  이 구절도 위에서 설명한 구절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지자(知者)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仁者)는 산을 좋아한다. 지자는 동적(動的)이고 인자는 정적(靜的)이다.

    지자는 즐겁게 살고 인자는 오래 산다.”
  
  고주(古註)와 주해(註解)에 나타난 이 구절의 설명을 몇 가지 읽어보지요.
  “물이란 순리를 좇아가면서도 작은 빈틈도 남겨두지 않고 채우는 것이 지자(知者)를 닮았고,

   움직일 때는 아래에 처하는 것이 예절바른 사람을 닮았고, 깊은 곳으로 떨어지면서도 주저함이 없으니

   이는 용자(勇者)를 닮았고, 방해물을 만나 갇혔을 때는 스스로를 맑게 하니 이는 천명을 아는 자(知天命)를 닮았고,

   중도에 꺾이지 않고 마침내 목적지에 이르니 이는 덕있는 자를 닮았다.

   천지는 물이 있으므로 이루어지고, 많은 무리의 생물은 물이 있으므로 평온을 누리는 바,

   이러한 이유로 지자는 물을 좋아하는 것이다.” (韓? ‘韓詩外傳’卷三)
  
  “산은 우뚝 높이 솟아 있다. 높이 솟아 있다고 좋아하는가. 산은 초목이 그곳에서 자라고,

  새와 짐승들이 그곳에 모여들고 그곳에서 번식하고, 온갖 재물이 그곳에서 번식하는데,

  산은 그것들을 낳아 자라게 하면서도 그것들을 자기 소유로 여기지 않는다.

  사방에서 산에 있는 것들을 베어 가는데도 자기 것이라 여기지 않고 기꺼이 내어 준다.

  산은 구름과 바람을 만들어 내어 하늘과 땅 사이를 소통시켜 양(陽)과 음(陰)의 기운이 화합하게 하고,

  비와 이슬을 내려 만물이 살아가게 하는데, 백성들은 그것을 먹고 살아간다.

  이러한 이유로 인자는 산을 좋아하는 것이다.”(‘孔子家語’. ‘尙書大典’)
  
  “인자(仁者)는 의리(義理)를 지키는 것으로 편안히 여기고 그 성품이 중후하여 쉽게 옮겨가지 않는다.

    이는 산의 성질과 비슷하므로 그래서 인자는 산을 좋아하는 것이다.”(朱子 ‘四書集注’)
  
  “지자(知者)는 자신의 재주와 지혜를 사용하여 사물에 민첩하게 대처하는 것을 즐기는데,

   이는 물이 쉬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과 같으므로 동적(動的)이라 하였고,

   인자(仁者)는 산처럼 느긋이 한 자리에 고정되어 있는 것을 편안히 여기고 즐기는데,

   자연은 움직이지 않으므로 비로소 만물이 그곳에 터잡고 살아갈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래서 정적(靜的)이라 한 것이다.”(包咸 ‘論語章句’)
  
  “인자가 오래 사는 것은 밖으로는 탐내는 것이 없고, 안으로는 청정한 삶을 살고, 마음은 화평하여 중정(中正)을 잃지 않으며,

   천지 가운데서 좋은 것은 취하여 그것으로 자기 몸을 기르기 때문이다.”(董仲舒 ‘春秋繁路’ ‘循天之道‘)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이 생각하기에 너무 고루(固陋)하지요?

  나로서도 매우 답답하게 느껴지는 대목이 한 두군데가 아니지요.
  중요한 것은 옛사람들의 생각을 접해보는 일입니다.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정서와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입니다.

  고루하고 답답하게 느껴지면서도 지자(知者)와 인자(仁者)를 비교하는 옛사람들의 관점이 상당부분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산(山)과 수(水)와 사람에 대한 매우 근본주의적인 생각을 알게 됩니다.
  
  내 경우에는 원문과 주석들을 읽는 동안에 지자와 인자의 이미지가 어렵풋이 형상화됩니다.

  지자(知者)는 눈빛도 빛나고 사물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고 특히 사물의 변화에 대하여

  정확한 판단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자(仁者)는 일단 앉아 있는 사람으로 형상화됩니다. 지자(知者)가 서 있거나 뛰어 다니는 사람임에 비하여

  인자(仁者)는 한 곳에 앉아서 지긋이 눈감고 있을 듯 합니다.
  작위(作爲)하지 않고 오히려 무위(無爲)의 나날을 보낼 것 같은 인상이지요. 수고롭지 않은 사람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이러한 비유가 너무 문학적인 설명입니까? 여러분도 아마 형상화하고 있으리라고 짐작됩니다.
  인자(仁者)는 한마디로 관계망(關係網)의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지자(知者)는 개별적인 사물들간의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그물코에 대하여 이해가 있는 사람으로 생각됩니다.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엉뚱하게도 지자(知者)의 모습과 함께 알튀세르(L. Althusser)를 떠올리게 됩니다.

  특히 그의 상호결정론(over determination)을 떠올리게 됩니다.

  사물과 사물의 관계에 있어서 일방적이고 결정론적인 인과관계(因果關係)를 지양하고자 하는

  그의 정치(精緻)한 논리를 생각하게 됩니다.
  반면에 인자(仁者)는 오히려 노장적(老莊的)이기까지 합니다.

  개별적 관계나 수많은 그물코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세계를 망라하는 그물, 즉 천망(天網)의 이미지로 다가옵니다.
  
  “하늘을 망라하는 그물은 성글기 그지없지만 하나도 놓치는 법이 없다.”(天網恢恢 疎而不漏)
  인자(仁者)는 최대한의 관계성(關係性)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공자는 노예제 부활을 주장하는 복고주의자라는 비판이 있습니다.

     공자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주로 비림비공(批林批孔)의 일환으로 임표(林彪)비판과 함께 행해졌지요.

     공자가 과연 노예제 부활을 주장하였는가에 대한 논의는

     당연히 주(周)사회의 성격 그리고 ‘아시아적 생산양식’(生産樣式)에 관한 논의와 연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본본주의적 생산양식에 앞서는 제양식(諸樣式)의 하나로서의 아시아적 생산양식은 토지사유의 부재(不在),

     촌락공동체(Dorfgemeinschaft) 그리고 동양적 전제군주제를 특징으로 하는 정체적(停滯的)인 사회로 규정합니다.
  
     주(周)사회가 이러한 단계의 사회성격을 갖는 것으로 규정되는 경우 공자는 노예제의 부활을 주장하는

     복고주의자가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의 근거가 되는 아시아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정체적인 사회라는 개념은

     제국주의 사관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유럽의 역사발전 단계를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동양적 전제군주국가(專制君主國家)라는 개념 역시 냉전시대의 조어(造語)라는 비판이 있습니다.

     전제군주국가란 국가가 군주(君主)의 인격 속에서 구현된다는 논리입니다.

     동양의 군주 즉 천자(天子)는 그러한 전형이 아니며 따라서 엄밀한 학문적 개념이 아니라는 반론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한 논의는 또 다른 전문적 논의가 됩니다. 여러분이 일단 비판적 관점을 갖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이러한 공자 비판은 공자의 이론이 3백년 후 노예제 사회라는 규정이 전혀 적합하지 않은 한초(漢初)에

     공식적인 국가이념이 되는 것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한대(漢代)는 관료적 중앙집권제이며 황실과 대관료지주간의 모순이 지배적인 모순이었습니다.

     공자 당시에도 주례(周禮)의 회복을 주장한 공자의 보수적 왕도주의가 신흥 관료지주의 패권주의(覇權主義)에

     수용되지 않았음은 물론입니다.
     그러러나 그것이 공자가 복고주의자라는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공자의 정치적 주장은 오히려 왕, 대부 등 귀족을 한편으로 하고 그리고 다른 한 편인 신흥 관료지주간에 벌어진 혼란과

     쟁패의 와중에서 제3계급(君子)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확립하는 것이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절대왕권에 대하여 제3계급의 견제를 정당화하는 이론이 유가사상의 핵심이며 바로 이러한 제3의 길과

     제3의 방식이 공자학파가 만세(萬世)의 목탁(木鐸)으로 자처하게 하는 사상적 입지(立地)라는 것이지요.
     공자학파의 입지는 결국 국(國)이라는 제도적 질서와 야(野)라는 소위 재야(在野)의 질서가 대치하는

     대립국면의 중간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가의 초기 발상지가 국(國)과 국(國)사이의 야(野)에 있었으며 국법질서가 미치지 못하는 이 영역은 국(國)의 질서에

     저항하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사람들의 집합처이기도 하였다는 것이지요.
     이 근거지에서 소유(小儒)를 극복하고 인문질서(人文秩序)를 세우고 대유(大儒)의 길,

     즉 자(君子)의 도(道)를 지향하였던 것이 공자와 공자학파라는 것이지요. 보수와 진보, 억압과 자유라는

     2개 대립축 사이에 공자학파의 사상적 본령이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2)논어’가 갖는 최대의 매력은 그 속에 공자의 인간적 풍모가 풍부하게 담겨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백가쟁명(百家爭鳴)의 백가(百家)중에서 공자만큼 인간적 이미지를 남기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것은 ‘논어’라는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공자의 이미지가 미화되었다는 것이지요.

     충분히 납득이 가는 주장입니다.
     곽말약(郭沫若) 같은 대학자도 동의하는 것이지요.

     공자의 인간적 면모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그의 묘비명이나 예찬문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그의 반대자의 견해를 통하여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하지요.
     나는 물론 공자의 인간적 면모가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공자사상은 하나의 사회사상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논어’는 공자 개인의 사상도 아니라고 생각하지요.

     마오어록(毛澤東語錄)이 모택동 개인의 어록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의 집단적 사상이듯이 ‘논어’라는 서물(書物)은

     공자 사후에 공문(孔門)의 제자들이 상당한 기간을 걸쳐서 공동으로 집필된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공자의 면모에 관한 글 중에서 몇 가지를 소개하지요.
     "외모(外貌)를 성(盛)하게 꾸미어 세상을 미혹시키고 음악(音樂)을 만들어 우민을 음란(淫亂)하게 하고

      오르내림의 예(禮)를 번잡하게 하며 --- 음(音)도 율(律)로 만들었다.

      명(名)을 세워 일을 게을리 하니 직(職)을 지키게 할 수 없으며, 상례(喪禮)를 중시하여 슬픔을 따르니

      백성에게 사랑을 베풀게 할 수 없으며, 거만(倨慢)하여 스스로를 따르는 자이며 남의 나라에 들어가

      상하(上下)를 이간(離間)하고 어지럽힌다.”
  
      “田成子 常이 임금을 죽이고 나라를 훔쳤으나 공자는 그의 예물을 받았다.”(莊子)
  
       우리 나라에 번역된 나카지마 아츠지(中島敦)의 중단편집 ‘역사 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原題 ‘李陵 - 山月記’)에는

       공자의 인간적 면모가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제자인 자로(子路)와의 관계를 통하여 그리고 자로의 시각을 통하여 묘사되는 공자의 인간적 면모가

       매우 사실적인 필치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공자를 골려주기 위하여 돼지와 수탉을 들고 소란을 피우며 찾아온 자로와의 첫 대면에서부터

        자로가 죽임을 당하고 소금절임되고 난 후 공자는 모든 젓갈을 내다버리고 상에 올리지 않았다는 후일담에 이르기까지

        자로와 공자가 이루어내는 사제관계는 그대로 인간관계의 아름다운 정점(頂點)을 보여줍니다.
  
  3) 공자는 조실부(早失父)의 천사(賤士) 출신으로 회계를 담당하는 계리(季利), 목축을 담당하는 승전(乘田) 등

      말직에서 시작하여 50세에 형별을 관장하는 사구(司寇)에 이르렀습니다.
      사구로 있을 당시 자기의 경쟁자이며 개혁가인 대부 소정묘(少正卯)를 직권으로 죽였고 전(田)의 크기에 따라 징세하는

      전부제(田賦制)에 반대하는 등 절대왕권주의자였다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공자에 대한 단편적인 사실로써 공자를 규정하는 것은 전체를 보지 못하는 우(愚)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당시의 전후 상황이 정확히 파악되지 못한 상황에서는 온당한 해석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지요.
      공자의 시대는 종법사회(宗法社會)가 붕괴되고 새로운 질서가 아직도 형성되지 않는 과도기적 상황이었습니다.

      부국강병을 국가경영의 최우선과제로 삼는 무한경쟁의 시대였으며

      그런 점에서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적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부국강병이라는 경쟁원리가 대세인 상황에서 왕도주의적인 정책을 주장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종법적 질서와는 명백하게 구별되는 인간관계의 관점을 개진한다는 것은

      사회철학적 관점에서 매우 획기적인 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仁)이 비록 민(民)을 배제한 지배계급내부의 원리라고 하더라도 인간관계에 대한 담론은 획기적인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그 자체로서 제3의 사회이론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 차례 이야기하였습니다만 ‘논어’는 인간관계론의 보고(寶庫)입니다.

  춘추전국시대에 백가(百家)들이 벌였던 토론(爭鳴)은 고대국가건설이라는 사회학 중심의 담론이었습니다.
  ‘논어’의 독자적 영역이라면 숱한 사회학적 담론 중에서 사회의 본질을 인간관계에 두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논’의 제일 첫장에 나타나는 친구(朋)의 이야기는 공자사상의 핵심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학교를 찾아오는 분들을 환영하는 인사에서 내가 자주 인용하는 글입니다.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먼 곳에서 벗이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 않으랴.
  
  사실 우리 학교는 먼 곳에 있는 학교거든요. 물론 서울의 변두리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만

  우리 학교가 지향하는 교육이념에서 본다면 더 먼 학교이지요.
  우리 사회의 주류 담론에서 한참 밀려나 있는 비주류 담론이지요.

  그런 점까지 생각하면 참으로 먼 곳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학교를 찾아온 분들이 어찌 진정한 벗이 아닐 수 있으며

  그것이 어찌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있겠느냐는 뜻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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