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問/大學

태학사전 / 본문 1절 ~ 3절

경호... 2012. 1. 29. 13:53

태학사전-본문순

 

-( ) 없이 마침표(.)로 맺은 한문은 집주의 글자 설명입니다.

-'(원문1; 원문2; ......).'는 해당 뜻으로 쓰인 본문 예시입니다.

-『태학』에 쓰인 뜻만 기록하였습니다.

 

 

 

1절

 

태학 대학大學: 『태학』이렇게 쓰면 책으로서의 태학. 「태학」이렇게 쓰면 『예기』의 편명으로서의 태학. 아무 표시 없이 쓰면 학문의 이름, 학교의 이름이다.

본문 太學之道의 태학은 학문의 이름이다. 태학의 규모와 내용을 한눈에 보고 찾을 수 있는 유학의 지도이다.

 

태학의 목표는 至善의 추구이다. 이 목표를 구현할 일을 明明德으로 규명한다.

明明德은 마음을 밝힌다는 뜻이다.

마음을 밝힌다는 것은 구체성이 결여된 관념적인 표현이다. 至善을 추구하는 일을 범연히 표현한 것일 뿐이다. 이 범연한 표현 明明德은 다시 구체화되어야 한다.

明明德은 格物致知, 正心修身으로 구체화된다.

좀 구체화 세분화된 것이라 하여 이들을 조목(條目)이라고 부른다. 조목은 나무의 가지와 그물눈을 가지고 한 비유이다. 이제는 실제화되어야 한다.

明明德은 新民으로 실제화된다.

明德은 더불 상대가 있어야 發하고 밝힐 수 있다. 民이 바로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 실제이다. 따라서 民은

新의 목적어가 아니다. 목적어는 역시 明德이다.

新民은 民과 더불어 나의 明德을 새롭게 하는 일, 밝히는 공부의 명칭이다.

民은 오륜으로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군신 부자 부부 장유 붕우. 이 오륜의 民과 더불므로서 나의 마음에 그들을 향한 明德이 發하고, 그들과의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그 明德을 밝혀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이다.

新民은 이제 구체화 과정을 밟는다.

齊家 治國 平天下가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齊家 治國 平天下는 格物致知와 正心修身이 실제화된 명칭이다. 格物致知와 正心修身은 修身으로 요약한다.

이 요약한 표현을 적용하여 실제화한 조목 齊家 治國 平天下를 표현하면, 齊家는 家를 무대로 하는 修身이며, 治國은 國을 무대로 하는 修身이며, 平天下는 천하를 무대로 하는 修身이다.

한문식으로 표현하면 修身於家國天下하는 것이 각기 齊家 治國 平天下이다.

 

明明德은 新民으로 실제화됨으로써 관념의 늪에 빠지지 않고, 新民 明明德을 내용으로 함으로써 覇者들의 치인술과 다르게 된다. 이렇게 하여 이념과 그 이념이 구현된 일, 그리고 그 일의 구체화와 실제화 작없이 끝났다. 이제는 이러한 모양의 학을 경영, 운전할 무엇 드라이버가 필요하다. 그게 바로 誠意이다.

誠意는 태학을 돌아가게 하는 드라이버이다. 誠意가 아니면 태학은 돌아가지 않는다. 意 한자만 쓰면 관념이 된다. 意는 반드시 내용을 품고 있어야 한다. 즉, ‘~에 대한 意’라야 살아 있는 意가 된다.

誠意의 意는 태학의 意이고, 明明德하고자 하는 意이고, 格物致知 正心修身하고자 하는 意이다. 意에 걸리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면에서 태학은 誠意 한 말로 요약한다.

 

 

 

  지之:

 

1)동격을 나타내는 조사로 우리말 ‘~의 -’, 또는 ‘~(이)란 -’의 뜻. ‘태학의 도’ 또는 ‘태학이란 도’의 뜻을 품고 있다(大學之道 태학의 도; 天之明命 하늘의 명령<이 경우 天즉 命의 의미를 품고 있다>; 혈矩之道 혈구의 道),

 

2)영문법식 문장의 節에서 節의 주어를 나타내거나 하며 古之欲明明德의 경우는 시간을 나타내는 조사의 뜻을 겸하고 있다고 본다. 이 때문에 ‘옛날의’보다는 ‘옛날에’라고 번역하게 된다

(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 옛날 천하를 무대로 明德을 밝히고자 하는 경우는;

民之不能忘也 인민들이 있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此謂知之至也 이것이 知가 이르렀다는 뜻이다;

人之視己 남이 자기를 보는 것을;

挑之夭夭 복상나무의 요요함;

民之所好好之民之所惡惡之 또는 好人之所惡 惡人之所好,인민들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인민들이 싫어하는 것은 싫어하고;

殷之未喪師 은나라가 아직 민중의 마음을 잃지 않았을 적에;

人之有技若己有之 남이 재주 지니고 있음을 마치 자신이 지닌 것 같이 하고

人之彦聖其心好之 남이 잘생기고 똑똑한 것을 마음으로 좋아하여)

 

3)목적격 대명사, ‘그것을’(未之有也 그것이 아직 없다<有는 목적어 형식으로 주어가 자리하는 동사이다. 즉 목적어 자리에 주어가 자리한다. 이 때문에 ‘그것을’이 아니고 ‘그것이’이다>;

故諺有之曰 그러므로 속담에 이런 말이 있으니; 能敎人者無之 남을 가르칠 수 있는 경우는 없다<能敎人者를 앞으로 빼고 대신 之를 끼워넣었다. 無도 주어가 목적어 자리에 위치하는 동사이다>;

民法之 인민들이 그것을 본받는다; 民從之인민들이 그것을 따른다;

民之所好好之民之所惡惡之 인민들이 좋아하는 것-그것을 좋아하고, 인민들이 싫어하는 것-그것을 싫하니;

道善則得之不善則失之矣 잘하면 그것을 얻고, 잘하지 못하면 그것을 잃는다는 뜻이다

<여기의 之는 형식이 목적겨 조사이지만 굳이 밝히지 않아도 알아듣는 목적어를 나타낸다. 동사에 이러한 之를 붙여서 명사가 아니고 동사임을 나타내기도 하고 포함하는 범위와 성격을 유동성 있게 하기도 한다;

寔能容之 이런 사람이야 말로 그것을 잘 포용할 수 있다 하겠으니<이런 사람이야 말로 참으로 포용성이 있다 하겠으니;

心誠求之, 마음이 알차게 그것을 구한다면;

唯仁人放流之 인자라야 그런 자들을 쫓아내어;

生之者衆 食之者寡 爲之者疾 用之者舒 생산은 많고 먹어치우는 것은 적으며 만드는 것은 빠르고 쓰기는 천천히 하면;

雖有善者亦無如之何矣 비록 잘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어찌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4) 소유격을 나타내는 조사, ‘~의’.

(湯之盤銘 탕임금의 반명; 其子之惡, 제 자식의 나쁜 점; 民之父母 인민의 부모).

 

5)此之謂自謙, 此之謂혈矩之道, 此之謂民之父母와 같은 형식에서의 之는 주격조사나 목적격조사로 번역한다. ‘이것이 바로 ~이다’, ‘이것이 바로 ~라고 하는 그것이다’, ‘이것을 일러 바로 ~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라고 부른다’ 등의 의미를 가지는데, 此는 설명의 말이며, 謂 다음에 놓이는 말은 此에 포함된 내용을 지닌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말로서, ‘此之謂~’은 此가 품고 있는 것들을 요약하면 바로 서로 잘 알고 이쓴 ~이란 의미를 지닌다).

 

6)영문법 상의 전치사, ‘~에(대하여)’. ‘於(~에)’ 또는 ‘於之(그것, 거기에)’와 같은 뜻.

(人之其所親愛而벽焉 사람은 자신이 친애하는 사람에게 중심을 잃으며).

 

7)‘이 그 저’.(之子于歸<之子는 그녀> 그녀가 시집을 가네).

 

8)동사 뒤에 붙어 형용사절을 만드는 무엇.(伐氷之家 어름을 베어 빙고에 저장하는 재력家門; 聚斂之臣 취렴하는 신하).

 

 

도道:

 

1)‘길(路)’: 여기와 저기를 연결하는 무엇. 현실과 이상, 현재와 미래 등이 공존하는 상태 또는 공존하게 하는 무엇이다. 현실에 기초하고 있으면서 이상을 향하여 있다. 이 때문에 道는 현실을 내포한 목표이며 이념이기도 하다.

 

2)법(法).

예)書道는 書法. (君子有大道,生財有大道). 3)理의 별칭: 일용, 실제상황에서 부르는 理.

예) 道理. 大學之道와 知所先後則近道와 혈矩之道 등에서 道의 용례는 道가 동사가 아니라는 한에서 의미가 넓다.

 

3)理의 별칭: 일용, 실제상황에서 부르는 理.

예) 道理. 大學之道와 知所先後則近道와 혈矩之道 등에서 道의 용례는 道가 동사가 아니라는 한에서 의미가 넓다.

 

4)‘~을 뜻하다(言)’. (如切如磋者道學也; 道盛德至善民之不能忘也; 道得衆卽得國失衆卽失國; 道善則得之不善則失之矣).

 

 

재在:

‘~에 있다’ (在明明德 在新民 在止於至善).

 

명明:

‘밝히다’ 속어로 쓰는 ‘밝힌다’는 말이 明明德의 明에서 왔다고 본다. 속어의 의미는 무엇을 매우 좋아하여 그것을 즐기거나 또는 항상 구한다는 것이다.

이 곳의 明 역시 이런 뜻으로 보면 근사할 것으로 보인다.(明明德).

 

 

명덕明德:

마음의 별칭. 明德者 人之所得乎天而虛靈不昧 以具衆理而應萬事者也. 집주에 표현된 明德의 정의는 틀림없는 마음이다. 마음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할 무엇이 따로 없다.

心者人之神明 所以具衆理而應萬事者也(『맹자』「진심」상편 제1장의 집주).

心의 정의와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明德은 일단 일상에서 쓰는 心과 같이 상용할 수 있는 말이다.

明德과 心. 『명심보감』이라는 책이름에서 이르는 명심의 心이나 明明德의 明德이나 같은 뜻일 것이다.

心과 明德은 통용하는 말이다. 그러나 明德이라는 말이 있고 心이란 말이 존재한다면 明德이라고 쓸 때와 心이라고 쓸 때의 구분은 있다. 心은 마음을 나타내는 말로서는 가장 범위가 넓은 말이다.

明德은 心에 비하여 사용범위가 좁다. 마음을 통틀어 말하면 心인 것이다. 明德은 心 가운데 明한 부분이다. 이러한 明은 정도의 차이 즉 광협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므로 明德의 측면에서 보면 마음은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성인이나 衆人(일반인)나 다 같다. 그러나 心으로 말하면,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 성인과 중인의 마음이 같지 않다. 비유하자면 광석에 비유할 수가 있다. 광석이 금을 함유하고 있는 정도는 광구마다 광석 마다 다를 것이다. 광석은 心을 비유하며, 그 안에 박힌 금은 明德을 비유한다.

광석으로 말하면 돈 잘 벌어주는 광구와 그러하지 못한 광구의 광석이 다르다. 그러나 금으로 말하면 다 같은 것이다. 이것이 明德과 心이 다른 설명의 하나이다. 心은 범위가 넓은 말이므로 이렇게 저렇게 이용에 자유롭다. 그 중에 心은 氣로써 理인 性과 상대하여 쓸 수 있다.

心의 경우 心卽氣, 性卽理란 용어의 대비가 가능하지만 明德은 性과 상대하여 쓸 수가 없다. 이상은 남당 한원진의 구분을 따른 것인데, 상대하여 쓸 수 없는 까닭은, 明德이 性의 의미를 겸하고 있으며 어떤 경우이건 明德은 情을 전제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明德은 情인 것이다. 明德은 心의 用으로서 情을 포함하지 않고는 쓰이지 않는다. 따라서 明의 조건만 갖추어지면 일상에서 쓰는 마음이라는 말과 明德은 합치한다.

 

 

명명덕明明德: →新民.

 

신新: ‘새롭게 하다’ 新者革其舊之謂也. (新民; 苟日新日日新又日新; 作新民; 其命維新)

 

민民: ‘인민’, 태학이 기술된 당시는 일인이 君인 시절이므로 이 民은 정치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下民의 뜻이 상당 작용하고 있다. 이는 시대상황이 반영된 것일뿐 民이 근원적으로 下民에 국한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전후좌우상하의 人이 다 民이다. 군신 부자 부부 장유 붕우 등의 人이 다 民이다.

(新民; 惟民所止; 民之不能忘也; 大畏民志; 民從之; 民法之; 上老老而民興孝; 黎民).

 

 

신민新民:

明明德의 실제 명칭이다. 明明德은 나의 明德을 밝히는 일이다.

明德이란 마음의 파동이다. 물의 물결처럼 마음도 물결, 즉 파동인 것이다. 이 파동은 외부의 작용을 받아서 인다. 외부라는 것은 가국천하라는 무대에서 오륜이라는 인륜으로 인한 모든 것들이다. 따라서 오륜의 인륜이 아니면 明德은 發할 것(일 것)도 없고 또 明할 일도 없다. 그러므로 明明德, 마음을 밝힌다고만 하고 그 구체적인 무엇이 없으면 明明德은 한갓 관념에 불과하게 된다. 생각 속의 나무에 불과하게 된다. 明明德이라는 생각 또는 當爲, 또는 한 그루 나무는 그 실제, 심겨 자랄 實地를 필요로 하게 된다.

新民이 바로 明明德의 실제를 표현한 명칭이다. 民은 나의 마음에 明德을 發하게 하고, 더불어 그 明德을 밝힐 수 있게 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明明德의 사상을 담아낸 것이 新民이므로 民은 新의 목적어가 아니다.

民은 明德이 발하게 하는 상대물이면서 동시에 明할 수 있게 하는 상대물이다. 따라서 新民은 ‘民으로 인하여 발한 나의 明德을 民과 더불어 새롭게 함’의 뜻을 간직한 표현인 것이다. 明明德과 新民은 두 개의 일이 하나의 일이 되는 것이다. 明明德은 총론, 新民은 그 실제에 해당하는 이름이다.

 

 

지止:

1)‘머물다’. 이 말에는 자연, 무심, 무위의 뜻이 있다. 즉 절로의 뜻이 스며 있다. 新民을 하되 그것이 작위, 인위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렇게, 절로절로 하는 것을 말한다. 爲人父止於慈는 아버지로서 慈에 머물렀다는 말인데, 이 말은 아버지로서 자식에 대한 明德인 慈를 밝히는 일에 작위가 없이 무위자연으로 하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止者必至於是而不遷之意.

(止於至善; 惟民所止; 止于丘隅; 於止知其所止; 穆穆文王於緝熙敬止; 爲人父止於慈).

 

2)‘지선의 소재’ 止者所當止之地卽至善之所在也. (知止而后有定).

 

 

어於:

1)‘~에[에서]’, ‘~에 대하여’ 영문법 소위 전치사. (欲明明德於天下者; 自天子以至於庶人; 於止; 爲人君止於仁; 誠於中形於外; 所惡於上毋以使下).

 

2)‘타동사+於+목적어’의 형식으로 ‘타동사+목적어’로 연결된 것보다 미묘한 언어감각을 가지게 한다. 대표적인 것이 觀과 察이라는 동사이다. 觀於 察於 또는 察乎의 모양으로 타동사 노릇을 하는 것이 마치 서양어에서 제3격을 거느리는 동사와 비슷한 면이 있다. 영어에서도 동사에 전치사가 붙어서 타동사 노릇을 하는 게 많이 있다. (不察於鷄豚).

 

3)감탄사. →於(오)를 보라.

 

 

지至:

1)‘이르다’ (物格而后知至; 自天子以至於庶人; 無所不至).

2)‘지극한’, ‘지극하다’. (至善)

 

 

지선至善:

‘최상의 善’이라는 뜻으로 고정된 절대선이 아니다. 家 國 天下라는 시공의 무대와 오륜이라는 인륜의 상황에서 뽑아올린 최상선이므로 시공에 따라 변한다. 예를 들면 어린이로서, 어린 시절의 至善이 있고, 성인으로서 성인시절의 至善이 있다. 이러한 至善은 중용과 동의어이다. 이러한 至善이 가능한 근거는 역시 性善이다.

이 善은 절대선으로 至善의 가능근거이다. 至善則事理當然之極也.

 

 

선善:

善의 기본은 마음(심지각)이 좋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 기본위에 다음과 같은 조건을 충족하면 다듬어진 善이 된다. 事理에 합당해야 한다. 物理가 있고 事理가 있다. 物理에 합당하면(合理) 眞이라고 한다. 사람이 늙어병들어 죽는 것은 物理에 합당한 것으로 眞이다. 그리고 동시에 사리에 합당한 善이기도 하다. 그러나 요절하는 것은 物理에는 합당하지만 事理로 보아 합당하지 않다. 그래서 眞일 수는 있지만 善은 아니다. 物理로 보면 눈물이 없고, 事理로 보면 회노애락이 있다. 이것이 物理와 事理의 차이점이다.

事理란 경우가 복잡하다. 事理라고 할 때의 그 事는 家 國 天下라는 무대에서 군신 부자 부부 장유 붕우의 관계 속에 펼쳐진다. 배고플 때는 먹는 것이 善이지만 배부를 때는 안 먹는 것이 善이듯이 善은 경우수가 많은 만큼 고정적이지 않다. 家 國 天下와 오륜이라는 여러 각각의 상황에서 그 때마다 합당함의 극치를 이루면 그것이 至善이다. 至善 역시 고정된 절대선이 아니다.

 

 

2절

 

 

지知:

1)‘알다’, (知止; 知所先後; 知其所止; 知本; 食而不知其味).

2)‘지식’, ‘지혜’ 知猶識也. (致知在格物).

 

이후而后: 이후(以後)와 같다. ‘~한 다음에’

 

유有:

1) ‘생기다’ (知止而后有定).

2)‘~(에)있다’ (物有本末 事有終始; 未之有也; 有所忿치則不得其正; 故諺有之曰; 有諸己而後求諸人; 若有一개人).

3)‘소유하다’ (有國者).

4)‘고용하다’ (與其有聚斂之臣寧有盜臣).

5)글자 수를 맞추기 위한 조사 또는 형용사 위에 놓여 형용사의 뜻을 돕는 말. (有斐君子).

 

정定:

1)‘결정’, ‘一定’ (有定).

2) ‘安定하다’ (一人定國).

 

능能:

‘할 수 있다’, ‘제대로’, ‘잘’

(能靜; 民之不能忘也; 能敎人者; 能喩諸人者; 寔能容之; 以能保我子孫黎民; 能愛人; 能惡人; 見賢而不能擧).

 

정靜: ‘안정되다’ (能靜).

 

안安: ‘안정되다’ (能安).

 

려慮: ‘헤아리다’, ‘살피다’ (能慮).

 

득得:

1)‘할 수 있다’ 能의 뜻. (不得盡其辭).

2)‘얻다’ (不得其正; 得衆卽得國; 善則得之不善則失之矣).

 

 

 

3절

 

물物: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존재하는 모든 것. (物有本末; 格物).

 

본本: 나무의 뿌리(지하부), 사물의 핵심. (以修身爲本; 知本; 德者本也財者末也; 外本內末)

 

말末: 나무의 지상부→本

본말本末:→本

 

사事:

1) ‘일’ 物은 홀로 쓰면 物이지만, 物과 事로 구분하는 경우(나란히 쓰는 경우), 物은 명사에 해당하는 것이고, 事는 동사에 해당하는 것이다. 物은 존재하는 낱낱의 것이고 事는 이 낱낱의 관계작용이다. (事有終始).

2) ‘섬기다’ (孝者所以事君也).

 

종終:

1)‘끝내’ (終不可言+宣兮).

2)‘잘 마무리하다’ ‘끝까지 잘 되다’ (其事不終者也)

종시終始: ‘始終’

 

소所: 동사의 앞에 붙어

1)동사를 명사화한다. (所先後; 其所厚者薄; 無所不用; 惟民所止; 所謂; 無所不至; 有所恐懼; 之其所親愛而벽焉; 孝者所以事君也; 其所令; 所藏乎身; 所惡於上; 民之所好).

2) 타동사를 수동형으로 만든다. 이 경우 대개는 ‘爲~所-’의 형식을 취한다.

예)爲~所殺(~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다). (十目所視 十手所指).

 

선先:

1)‘먼저’ (先治其國; 擧而不能先).

2)‘먼저 하다’ (所先後).

3)‘선도하다’, ‘이끌다’ (毋以先後),

 

후後:

1)‘뒤의 것(사람, 시대, 제도 등)’ (毋以先後; 所惡於後).

2)‘뒤로 하다’ (所先後).

 

즉則: ‘~則’의 형식으로 ‘~면’ (如見其肺肝然則何益矣; 有所忿치則不得其正).

 

근近: ‘~에 가깝다’ (近道矣).

 

의矣:

문장의 끝에 붙는 말.

형용사를 서술어로 하고 있는 문장에 붙는 경우가 많고(知所先後則近道矣; 其本亂而末治者否矣; 如見其肺肝然則何益矣; 天下鮮矣; 雖不中不遠矣; 財恒足矣),

미래의 단정을 나타내는 문장 즉 ‘이[하]리라’의 토가 붙을 문장에 쓰이는 것으로 본다(벽則爲天下륙矣; 不善則失之矣; 必自小人矣; 亦無如之何矣).

 

 

 

'#學問 > 大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태학사전 傳 1장 ~傳 3장  (0) 2012.01.29
태학사전 / 본문 4절 ~ 7절  (0) 2012.01.29
心廣體?   (0) 2012.01.29
大學- 傳 10章 10-21 ~終  (0) 2012.01.29
大學- 傳 10章 10-16 ~20   (0) 2012.0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