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唯識講義

『唯識』- 귀신에게 먹힌 사람 (본문, 강의) 《了》

경호... 2012. 1. 17. 01:20

-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귀신에게 먹힌 사람

    (본문)


    66-2-224 
    如人遠行 獨宿空亭.
    夜中有鬼 擔一死屍 來著其前. 復有一鬼 從後而來.
    瞋罵前鬼云 是我屍 何以擔來. 前鬼復言 本是我物 我自擔來.
    二鬼各以一手爭之. 前鬼語曰 可問此人.
    後鬼卽問 是誰死人 誰擔將來. 是人思惟.
    此之二鬼 皆有大力. 實語虛語 皆不免死. 我今不應妄語答鬼.
    便答後鬼 前鬼擔來. 後鬼大瞋 拔其手足 出著地上.
    前鬼愧之 取屍補之 補之便著.

    어떤 사람이 먼 길을 가다가 홀로 빈 정자에서 자게 되었다.
    귀신이 한 밤중에 하나의 죽은 시체를 짊어지고 그 사람 앞에 왔다.
    다시 또 하나의 귀신이 뒤를 쫓아 나타났다.
    그 귀신은 앞에 온 귀신에게 성을 내면서
    “이것은 나의 시체인데, 무엇 때문에 가져 왔는가”고 따져 물었다.
    그러자 앞의 귀신은
    “본래 나의 것이므로 내가 짊어지고 온 것이다”고 말하였다.
    두 귀신은 각자 한 손으로 시체를 잡고 다투었다.
    그러다가 먼저 왔던 귀신이
    “이 사람에게 물어 보면 알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뒤에 왔던 귀신이
    “이것은 누가 죽인 사람이며, 누가 짊어지고 왔는가”라고 물어 보았다.
    이 사람은 생각하였다.
    두 귀신 모두가 대단한 힘의 소유자다.
    바른말을 하든 거짓말을 하든 두 가지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거짓말로 귀신에게 답하지는 않겠다.
    그리고 뒤에 왔던 귀신에게
    “앞에 왔던 귀신이 짊어지고 왔다”라고 답하였다.
    이 말에 뒤에 왔던 귀신은 크게 노하여
    그 사람의 손과 다리를 뽑아서 땅 위에 던져 버렸다.
    앞에 왔던 귀신은 그 사람의 곤란한 입장을 부끄러워하여
    갖고 왔던 시체의 손과 다리를 뽑아서
    그 사람의 몸에서 떨어져 나간 손과 다리의 자리를 메꿔 주었다.

    臂手足等 擧身皆易.
    於是二鬼 共食所易活人之身 各各拭口 分首而去.
    其人思惟 父母生身 眼見食盡. 我今此身 盡是他肉. 爲有身耶 爲無身耶.
    如是思惟 心懷迷亂 不知所措 猶如狂人.
    天旣明矣. 尋路而去 至前國土.
    見有佛塔. 凡見衆僧 不論餘事 但問 己身爲有爲無.
    諸比丘問 汝何人耶. 答曰 我亦不知 是人非人.
    卽爲衆僧 廣說上事. 衆僧皆云 此人自知 己身無我 易可化度.

    이런 식으로 팔과 손과 발 등의 온 몸둥아리가
    모두 시체의 것과 바뀌게 되었다.
    여기에 두 귀신은 살아 있는 사람의 바꾸어진 팔과 다리를 같이 맛있게 먹고서,
    각자 입을 훔치고 헤어져 자기 갈 길로 가버렸다.

    기막힌 일을 당한 그 사람은
    “부모님이 낳아주신 몸을 내가 보는 앞에서 귀신들이 다 먹어버렸다.
    그리고 지금 나의 이 몸은 모두 다른 사람의 몸둥아리다.
    그렇다면 나의 몸은 있는 것인가, 아니면 없는 것인가”고 생각하였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서 마음속이 혼란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마치 미친 사람과 같았다.

    그러다 날이 밝았다.
    이 사람은 가야 할 길을 찾아 가다가 어떤 나라에 도착하였다.
    그 나라에서 부처님 탑이 있는 것을 보았다.
    거기서 많은 스님들이 있는 것을 보고는
    다짜고짜 단지 자기 몸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없는 것인가를 물었다.
    그러자 모든 비구가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하고 물었다.
    그 사람은 답변하여 “저도 제가 사람인지 아닌지를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는 많은 스님들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자기가 겪었던 일을 자세히 이야기 하게 되었다.
    그러자 대중 스님들은 모두
    “이 사람은 스스로 자기 몸에 나라는 것이 없다라는 사실을 아니,
    쉽게 교화하고 제도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卽語之言 汝身本來恆自無我. 但以四大 和合聚集 計爲本身.
    如汝本身 與今無異. 時諸比丘 度爲沙門. 斷煩惱盡 得阿羅漢.
    是故有時 於他人身 亦計爲我 已無我故. 有時於我 謂爲他人故.
    文殊問經云 有老人夜臥 手捉兩膝 而便問云 那得有此兩小兒耶.
    身若有我 云何不識 謂爲小兒. 故知橫計皆無定實.

    곧 그에게 법을 설하여 말하기를
    “당신의 몸은 본래가 항상 나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단지 지수화풍 사대가 화합하여 모인 것으로서
    허망하게 본래 나의 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당신이 본래 갖고 있던 몸도 지금 갖고 있는 몸과 더불어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고 하였다.
    그때에 모든 비구가 이 사람을 제도하여 사문을 만들었다.
    그는 모든 번뇌를 끊고서 아라한이 되었다.

    이 때문에 어떤 때에는 다른 사람의 몸에서 또한 나라고 하는 생각을 하나,
    이미 나라고 하는 것은 없다.
    나라고 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어떤 때에는 나의 몸에서 다른 사람의 몸이라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문수문경』에서
    “어떤 노인이 밤에 누워서 손으로 양 무릎을 잡고
    ‘어찌 여기에 두 어린 아이가 있는가’고 말했다”고 하였다.
    몸에 만약 나라는 것이 있다면
    어떻게 자기 무릎을 알지 못하고 어린 아이라고 말하겠는가.
    그러므로 알아야 하니,
    잘못된 생각에는 모두 결정된 어떤 실체가 없는 것이다.



    (강의)

    어떤 사람이 먼 길을 가다가 홀로 빈 정자에서 자게 되었다.
    귀신이 한 밤중에 하나의 죽은 시체를 짊어지고 그 사람 앞에 왔다.
    다시 또 하나의 귀신이 뒤를 쫓아 나타났다.
    그 귀신은 앞에 온 귀신에게 성을 내면서
    “이것은 나의 시체인데, 무엇 때문에 가져 왔는가”고 따져 물었다.
    그러자 앞의 귀신은
    “본래 나의 것이므로 내가 짊어지고 온 것이다”고 말하였다.
    두 귀신은 각자 한 손으로 시체를 잡고 다투었다.
    그러다가 먼저 왔던 귀신이
    “이 사람에게 물어 보면 알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뒤에 왔던 귀신이
    “이것은 누가 죽인 사람이며, 누가 짊어지고 왔는가”라고 물어 보았다.
    이 사람은 생각하였다.
    두 귀신 모두가 대단한 힘의 소유자다.
    바른말을 하든 거짓말을 하든 두 가지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거짓말로 귀신에게 답하지는 않겠다.
    그리고 뒤에 왔던 귀신에게
    “앞에 왔던 귀신이 짊어지고 왔다”라고 답하였다.
    이 말에 뒤에 왔던 귀신은 크게 노하여
    그 사람의 손과 다리를 뽑아서 땅 위에 던져 버렸다.
    앞에 왔던 귀신은 그 사람의 곤란한 입장을 부끄러워하여
    갖고 왔던 시체의 손과 다리를 뽑아서
    그 사람의 몸에서 떨어져 나간 손과 다리의 자리를 메꿔 주었다.


    이 사람은 공연히 빈 정자에 잠자다가 귀신에게 혼쭐이 난거네요.
    이것은 꿈속의 일이 아니에요.

    이런 식으로 팔과 손과 발 등의 온 몸둥아리가
    모두 시체의 것과 바뀌게 되었다.
    여기에 두 귀신은 살아 있는 사람의 바꾸어진 팔과 다리를 같이 맛있게 먹고서,
    각자 입을 훔치고 헤어져 자기 갈 길로 가버렸다.


    이것은 귀신이 아니고 사람 잡아 먹는 나찰 같은 거네요.

    기막힌 일을 당한 그 사람은
    “부모님이 낳아주신 몸을 내가 보는 앞에서 귀신들이 다 먹어버렸다.
    그리고 지금 나의 이 몸은 모두 다른 사람의 몸둥아리다.
    그렇다면 나의 몸은 있는 것인가, 아니면 없는 것인가”고 생각하였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서 마음속이 혼란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마치 미친 사람과 같았다.


    자기 육신은 없고 죽은 시체로 되어 있으니까 곤란하죠.

    그러다 날이 밝았다.
    이 사람은 가야 할 길을 찾아 가다가 어떤 나라에 도착하였다.
    그 나라에서 부처님 탑이 있는 것을 보았다.
    거기서 많은 스님들이 있는 것을 보고는
    다짜고짜 단지 자기 몸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없는 것인가를 물었다.
    그러자 모든 비구가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하고 물었다.
    그 사람은 답변하여 “저도 제가 사람인지 아닌지를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는 많은 스님들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자기가 겪었던 일을 자세히 이야기 하게 되었다.
    그러자 대중 스님들은 모두
    “이 사람은 스스로 자기 몸에 나라는 것이 없다라는 사실을 아니,
    쉽게 교화하고 제도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곧 그에게 법을 설하여 말하기를
    “당신의 몸은 본래가 항상 나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단지 지수화풍 사대가 화합하여 모인 것으로서
    허망하게 본래 나의 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대가 화합해서 이루어진 게 몸인데
    그 몸을 내 것이다, 내 몸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는 거죠.

    당신이 본래 갖고 있던 몸도 지금 갖고 있는 몸과 더불어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고 하였다.
    그때에 모든 비구가 이 사람을 제도하여 사문을 만들었다.
    그는 모든 번뇌를 끊고서 아라한이 되었다.


    깨달았네요.

    당신이 본래 갖고 있던 몸도 지금 갖고 있는 몸과 더불어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고 하였다.
    그때에 모든 비구가 이 사람을 제도하여 사문을 만들었다.
    그는 모든 번뇌를 끊고서 아라한이 되었다.

    이 때문에 어떤 때에는 다른 사람의 몸에서 또한 나라고 하는 생각을 하나,
    이미 나라고 하는 것은 없다.
    나라고 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어떤 때에는 나의 몸에서 다른 사람의 몸이라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문수문경』에서
    “어떤 노인이 밤에 누워서 손으로 양 무릎을 잡고
    ‘어찌 여기에 두 어린 아이가 있는가’고 말했다”고 하였다.
    몸에 만약 나라는 것이 있다면
    어떻게 자기 무릎을 알지 못하고 어린 아이라고 말하겠는가.
    그러므로 알아야 하니,
    잘못된 생각에는 모두 결정된 어떤 실체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를 얘기하는데,
    하나는 몸이 바뀌므로 해서 몸은 내가 아니라고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귀신이 먹어버린 몸뚱아리하고 귀신이 바꾸어준 몸뚱아리하고
    별 차이가 없다는 얘기죠.
    그래서 몸은 아는 성질이 없다고 『유마경』에서 얘기를 합니다.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져도
    내가 일어났다, 내가 사라졌다고 얘기 하지 않습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은 서로가 모르니라.
    그리고 최종적으로 유마거사가 문수보살에게 하는 얘기가
    ‘몸은 아는 성질이 없습니다.’ 이랬습니다.
    아는 성질이 없다는 것은
    물질적인 것이지 자아라고 하는 것은 없다는 얘기죠.
    그런데 이 몸뚱아리를 ‘내’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거죠.

    노인이 양 무릎을 잡고 ‘아니 아이들이 왜 있지’ 이렇게 했단 말이에요.
    아이들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무릎을 아이들이라고 했을 때 포인트는 뭡니까?
    생각이죠.
    아이들이라는 생각.
    그런데 몸이 ‘내’라는 생각, 이런 생각이 문제죠.
    그래서 말씀을 드리자면, ‘내’라고 하는 것은 없는 거예요.
    생각에 ‘내’가 있는 거죠.
    그러면 이 생각이라는 것도 앞에서 공부 했듯이
    화합해서 이루어진 것은 실체가 없는 거죠.
    역시 생각 그 자체도 자아가 없는 거예요.
    이렇게 알면 번뇌가 다 사라져서 진여를 얻겠죠.
    그게 원성실성이에요.
    여기서 말하는 두 무릎이 어린아이들로 착각을 하거나
    몸을 ‘내’라고 생각하는 것은 타에 의해서 일어나는 의타기성이에요.

    정리를 하면 이렇게 됩니다.
    유식삼성은 변계소집성, 의타기성, 원성실성을 얘기하죠.
    의타기성은 타를 의지해서 일어나는 우리 마음을 얘기하고,
    원성실성은 진여를 얘기합니다.
    바뀌지 않고, 쉽게 말하면 숨도 쉬지 않고 땀도 흘리지 않고
    왔다갔다하지 않는 변함이 없는 마음, 텅 빈 마음,
    이런 마음이 진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변계소집성으로 살아가죠.
    변계소집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대상이 고정되어 있다고 분별하고,
    분리되어 있다고 분별하고, 스스로 존재한다고 분별하는 겁니다.
    그런 것은 사실 새끼줄을 보고 뱀으로 착각한 거죠.
    고정되지도 않고 분리 되지도 않고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새끼줄을 뱀으로 착각하듯이
    고정되어 있다고 착각하고 분리 되어 있다고 착각하고
    스스로 존재한다고 착각을 하는 겁니다.
    그런 착각은 왜 일어나느냐 하면,
    바로 마음,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의타기성이죠.
    쉽게 말해서 몸을 ‘내’라고 한다든지
    두 무릎을 아이들이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이 생각이라는 것, 마음 자체가 타를 의지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인연법으로 보면 스스로 존재하는 게 아닌 거예요.
    그리고 이 마음이라는 것은 실체도 없고 자아도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선정에 들어가면 생각이 안 일어나거든요.
    지혜에 의해서 생각은 실체가 없고 자아가 없음을 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이렇게 알게 되면 새끼줄을 보고 뱀으로,
    몸을 ‘내’라고 착각하지 않게 되는 거죠.
    그러면 의타기성은 소멸해버리고 원성실성만 남는데, 그게 진여에요.
    물론 변계소집성은 원래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유식삼성을 배치시켜보면 여기 내용이 그런 식으로 나온다는 겁니다.

    부부가 사이가 좋으면 “자기야~” 이렇게 부르는 게 다르죠. ㅎㅎㅎ
    이 ‘자기’라는 것이 자기 자신을 얘기하는 것인지,
    남편이나 아내를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인지 도대체가 헷갈리잖아요.
    그거 왜 그런 겁니까? ㅎㅎㅎ
    그런데 사이가 안 좋으면 “자기야~”라는 것은 온데간데없고
    ‘놈’이라든지 ‘년’이라든지 이런 말이 나오죠. ㅎㅎㅎ
    거기에는 전부다 생각이 만들어 낸 거죠.
    그런데 이것에 의해서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하잖아요.

    이런 진실을 알면 남편이나 아내를 어떻게 대해야 될 것이냐 이거죠.
    안 그래요?
    뭔가 해답이 안 나옵니까?
    이때 유식 공부했던 것을 대입 시켜서 곰곰이 생각을 해 봐야 됩니다.
    이때는 서로의 관계를 좋고 싫어함, ‘내’다 ‘너’다로 맺으면 안 되고
    사랑과 연민으로 회복해 가야 됩니다.

    자기야 할 때는 괜찮은데,
    년, 놈 할 때는 문제가 생기니까 항상 조심해야 되요.
    그렇게 안 하면 유식 공부한 것을 제대로 써보질 못해요.

    우리 불자들이 기본적으로 네 가지는 철저히 해야 되요.
    첫째, 기도는 반드시 해야 되고,
    기도하더라도 나와 남이 함께 좋아지는 기도를 해야 됩니다.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한 기도는 않는 게 좋습니다.
    두 번째는 법문을 꼭 들어야 됩니다.
    경전을 수지독송하는 것, 불교 서적을 읽는 것도 법문 듣는 게 됩니다.
    세 번째는 들었으면 명상을 해야 된다는 거죠.
    그리고 네 번째, 힘들고 어려운 사람 도와주는 봉사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기도, 법문, 명상, 봉사 이 네 가지가 잘 갖춰지면 좋습니다.

                                                                                            《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