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唯識講義

『唯識』- 바른 것은 쌍차쌍조(雙遮雙照)에 (본문, 강의)

경호... 2012. 1. 17. 01:17

-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바른 것은 쌍차쌍조(雙遮雙照)에

    (본문)


    65-1-220
    問 夫能所之見則心境宛然.
    聖人知見 如何甄別.

    答 雙照有空 不住內外.
    似谷答聲而絶慮. 如鏡鑒像而無心.
    妙湛圓明 寂而常照. 故云常在正念 亦名正知.
    非是有念有知. 亦非無念無知.
    有無皆想 俱非正知. 但無念而照 名曰正照.
    無知而知 名曰正知.
    若唯無念 寂而失照 若但照體 照而失寂 並稱不正 正在雙行

    : 중생이 능(能)과 소(所)로 보는 지견은 마음과 경계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성인의 지견은 이것과 어떻게 확실하게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 쌍으로 유(有)와 공(空)을 관조하고,
    안과 바깥의 경계에도 머물지 않는다.
    이것은 골짜기가 메아리에 답하듯 일체 생각이 끊어진 것과 같다.
    거울에 영상이 비추듯 무심한 것과 같다.
    현묘하고 담담하게 뚜렷하고 밝은 것이 공적하면서도 항상 비춘다.
    그러므로 항상 바른 생각에 있다고 하며, 또한 이것을 바른 앎이라고 한다.
    이것은 망념이 있거나 어떤 아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전혀 생각이 없거나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있다거나 없다는 상대적인 모든 생각은 망상으로, 모두가 바른 앎이 아니다.
    단지 망념이 없는 것으로서 비추면 바르게 비추는 것이라 한다.
    아는 것이 없는 것으로서 알면 바른 앎이라고 한다.
    만약 오로지 아무 생각도 없는 것이라면 공적하나 비추는 작용을 잃는 것이다.
    단지 비추는 작용만 있다면 비추나 공적한 자리를 잃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바른 것이라 할 수 없다.
    바른 것은 쌍으로 적(寂)과 조(照)가 행해지는 곳에 있는 것이다.



    (강의)

    쌍차쌍조(雙遮雙照) 이랬는데,
    쌍(雙)은 주관과 객관을 얘기합니다.
    주객이 고요하게 비어 있는 것을 쌍차(雙遮)라고 하고
    주객이 서로 비추는 것을 쌍조(雙照)라 해서
    주객이 동시에 비어 있으면서 동시에 비추는 것을 얘기 합니다.
    그래서 쌍차쌍조(雙遮雙照)는 분리되어 있는 게 아니고 하나입니다.

    묻습니다.
    : 중생이 능(能)과 소(所)로 보는 지견은 마음과 경계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성인의 지견은 이것과 어떻게 확실하게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능(能)은 주관, 소(所)는 객관을 얘기 합니다.
    능(能)은 능동적인 것이고 소(所)는 장소 같은 거죠.
    그래서 주관과 객관으로 보는 지견은
    보는 마음과 보여 지는 대상이 분명하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성인의 지견은 중생과 어떻게 구별하느냐 묻죠.

    답을 합니다.
    : 쌍으로 유(有)와 공(空)을 관조하고,
    안과 바깥의 경계에도 머물지 않는다.
    이것은 골짜기가 메아리에 답하듯 일체 생각이 끊어진 것과 같다.
    거울에 영상이 비추듯 무심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항상 바른 생각에 있다고 하며, 또한 이것을 바른 앎이라고 한다.


    ‘쌍으로 유(有)와 공(空)을 관조하고’
    이 말은 주객이 유와 공을 비춰본다, 이런 말이에요.

    수행을 하면,
    있음과 비어 있음, 형상이 있는 것과 형상이 없는 것,
    이 두 가지가 상대적으로 많이 나타납니다.
    비춰본다는 것은 자기의 생각이나 감정을 붙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얘기 합니다.
    여기는 기본적으로 거울이 하나 생겨야 됩니다.
    자기가 보고 듣고 행동하는 것을 거울에 비춰보듯이 자기가 알아야 되요.
    그런 것이 생겨야만 관조라는 말을 쓰는 겁니다.

    그런데 유와 공을 관조한다는 것은
    이것은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있음을 보면 없음이 있고, 없음을 보면 있음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것을 쌍으로 비춰본다.
    쌍으로 비춰보는 것은
    거울 두 개를 마주보게 하고 가운데 물건을 놓고 비춰보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그렇게 쌍으로 비춰보는 경계는 안과 밖이 없다는 거죠.
    보는 주체도 없고 보여 지는 객체도 없이 주객이 내외명찰(內外明徹)해서
    안과 밖이 맑고 투명하게 통해져 있는 거예요.
    그런 상태에서 유와 공을 관조한다 이런 얘기에요.

    ‘안과 바깥의 경계에도 머물지 않는다.’
    마음이 안에도 머물지 않고 밖에도 머물지 않는다는 거예요.
    ‘경계’는 보여지는 대상을 얘기 합니다.
    이 보여지는 대상에 내 안쪽에도 머물지 않고 바깥쪽에도 머물지 않는다는 것인데,
    내 안쪽의 경계는 생각 감정 이미지 이런 것들에 머물지 않고
    바깥쪽의 보여지는 세계에도 머물지 않는다 이런 얘기에요.

    ‘이것은 골짜기가 메아리에 답하듯 일체 생각이 끊어진 것과 같다.’
    골짜기는 텅 비어 있기 때문에 고함을 지르면 메아리쳐서 돌아오는데
    이 메아리는 인위적으로 조작을 해서 돌아오는 게 아니고
    그냥 가감 없이 반응해서 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생각이 없죠.

    ‘거울에 영상이 비추듯 무심한 것과 같다.’
    거울에 영상을 비추지만 거울이 생각을 해서 비추는 것은 아니죠.

    ‘현묘하고 담담하게 뚜렷하고 밝은 것이 공적하면서도 항상 비춘다.’
    안과 밖이 텅 비어 있으면서도 항상 비추는 게 있는 거예요.

    ‘그러므로 항상 바른 생각에 있다고 하며, 또한 이것을 바른 앎이라고 한다.’
    이런 경지는 공부를 해서 어느 정도 가야만이 체득될 수 있는 경지이기도 하지만
    수행체험이 있으신 분은 이해가 빠릅니다.
    그런데 명상을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은 이게 무슨 얘긴지 잘 모를 거예요.

    안과 밖이 없어지려면 제일 먼저 몸이 없어져야 되요.
    수행을 하다보면 몸이 사라지는 현상이 오는데
    이때 몸을 기준으로 해서 안과 밖이 없어집니다.
    두 번째는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면 안과 밖이 없어져요.
    그때의 생각이라는 것은 감수작용, 표상작용, 또는 선악을 생각하는 마음,
    이런 것들이 전부다 실체가 없고 자아가 없음을 확실히 아는 거예요.
    그래서 아는 앎만 남아 있는데,
    그때는 기본적인 몸이 없으니까 안과 밖이 없고,
    생각에 의해서 안과 밖이 나눠지는데,
    그 생각도 비어져 버리는 그런 상태에요.
    이런 상태가 아공(我空)이라 그럽니다.

    그 다음에는 바깥 대상도 전부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고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수행을 하면 실제로 이 세계는 변하고 비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요.
    그렇게 해서 보여지는 이 세계가
    자아도 없고 실체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법공(法空)이라 그럽니다.
    그래서 아공에서 안과 밖이 없고 법공에서 안과 밖이 없고,
    이런 아공법공에서 평등공으로 해서 안과 밖이 없고,
    이렇게 안과 밖이 없는 상태로 들어갈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 안과 밖이 없는 것을 얘기 하는데,
    안이 있고 밖이 있다면 유가 있고 공이 있다는 거예요.

    이것은 망념이 있거나 어떤 아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전혀 생각이 없거나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있다거나 없다는 상대적인 모든 생각은 망상으로, 모두가 바른 앎이 아니다.


    ‘이것은 망념이 있거나 어떤 아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니다.’
    허망하게 일어나는 생각이 없고, 대상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다.

    ‘또한 전혀 생각이 없거나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생각이 아무것도 없으면 나무나 돌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거예요.
    인간은 그런 것은 아니죠.

    그래서 여기 얘기가
    ‘전혀 생각이 없거나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안다는 것은 의식이 깨어 있는 겁니다.

    ‘있다거나 없다는 상대적인 모든 생각은 망상으로, 모두가 바른 앎이 아니다.’
    보조스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도는 아는 곳에 있지 않고 모르는 곳에도 있지 않다.
    아는 것으로 도를 삼으면 그것은 분별 망상이요,
    모르는 것으로서 도를 얻으려고 하는 것은 무지하다, 무명이다.’ 이랬어요.
    그래서 알고 모르는데서 깨달음을 얻는 게 아니에요.
    여기 얘기가, 알려고 하는 것은 망상이기 때문에
    망상으로 진리를 깨칠 수 없다 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목석같이 있으면 그것도 깨달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깨닫는다는 것도 아는 것인데,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느냐 하면,
    있음, 유(有)에 걸리지 않고, 텅 빈 공(空)에 걸리지 않으면 바른 앎이에요.

    이렇게 얘기하면 오해가 생깁니다.
    말꼬리를 잡는 사람은 ‘불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을 진리라 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는데 그건 아니죠.
    여기서 부정하는 것은 잘못된 견해에 의해서 보여 지는 세계를 부정하는 거죠.
    이 세계가 고정되어 보이거나 분리시켜 보이거나 스스로 존재하는 것 같이 보이면
    다 잘못 보고 있는 거고, 이런 것은 없다는 것을 부정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긍정하는 것은
    모든 것은 관계성으로 존재하고 매 순간 시간적으로 변한다는 것,
    고정되거나 분리되어 있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것,
    이것을 아는 것이 바로 긍정하는 것이다 이거죠.

    그래서 수행을 하게 되면 유무(有無)에서 벗어납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 몸부터 해서 세상을 바로 보게 되는 겁니다.
    어떤 물질을 부셔서 아무것도 없는 것을 공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아요.
    형상 그대로 비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죠.
    어떤 형상을 인식할 때 실체로서, 유(有)로서 보지 않고
    아무것도 없는 무(無)로도 볼 수가 없어요.
    만일에 이것이 실체가 있어서 유(有)로 본다면 부서지지 말아야 되는데 부서질 것이고
    무(無)로 본다면 눈앞에 분명히 있기 때문에 없다고 얘기도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관계성으로 존재하는 겁니다.
    사람 몸도 그렇고 몸과 정신작용도 그렇고,
    삼라만상 우주도 다 그렇다 그 말이에요.
    그래서 있다거나 없다는 상대적인 모든 생각은 망상이라는 겁니다.

    단지 망념이 없는 것으로서 비추면 바르게 비추는 것이라 한다.
    아는 것이 없는 것으로서 알면 바른 앎이라고 한다.
    만약 오로지 아무 생각도 없는 것이라면 공적하나 비추는 작용을 잃는 것이다.
    단지 비추는 작용만 있다면 비추나 공적한 자리를 잃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바른 것이라 할 수 없다.
    바른 것은 쌍으로 적(寂)과 조(照)가 행해지는 곳에 있는 것이다.


    ‘단지 망념이 없는 것으로서 비추면 바르게 비추는 것이라 한다.
    아는 것이 없는 것으로서 알면 바른 앎이라고 한다.’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은 대상을 인식하지 않는다는 거죠.
    여기에도 종류가 있어요.
    혼침(昏沈)에 빠져 있으면 대상을 알 수가 없고,
    너무 고통스러워도 대상을 알 수가 없죠.
    그리고 아무런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면 역시 대상을 알 수가 없어요.

    그런 것도 있지만
    대상을 보기는 보지만 대상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지에 가면
    주관과 객관이 없는 자리에 들어가는 겁니다.
    이 자리는 주관계도 없고 객관계도 없는, 안과 밖이 없는 자리에요.
    안과 밖이 없다고 해서 아무것도 없는 없을 무(無)라고 오해하면 안 돼요.
    그래서 참으로 언어문자로 표현하기 어려운 거예요.
    대상을 매순간 변하는 것으로 볼 수만 있다면
    모양과 색깔을 인식하지 않게 됩니다.
    이 형상 그대로 텅 비어 있는 거예요.

    그러면 진리의 입장에서는 없어야 되는데,
    보여 지는 이것은 뭐냐 이거죠.
    이것은 전부다 분별해서 망념으로 보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살짝 뒤집어보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본래 이 세계는 모양과 색깔이 없는 세계인데,
    그럼에도 보여 지는 것은 마음이 만들어서 본다는 겁니다.
    전자현미경으로 보면 이런 모양이나 색깔이 없는데
    육안으로 보니까 있는 거죠.
    그래서 수행을 하면 어느 순간 이것이 비어져 보인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과학에서 얘기하는 말과 똑같이 되는 거죠.

    그런데 만들어서 보는 데 있어서 성인과 범부의 차이가 있습니다.
    범부는 무의식적으로 감정과 생각을 덧 붙여서 실체가 없다는 것을 모르고 보고,
    성인은 대상을 매 순간 변하고 실체가 없음을 알고 인식을 한다는 겁니다.
    모르는 것은 미혹한 것이고, 안다는 것은 의식이 깨어 있다는 거예요.
    미혹하니까 찻잔이 실체가 있는 것 같이 느껴지고 예쁘면 가지려 하고 그러지만
    모든 것은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져 있고
    인연이 다 하면 깨지는 것을 알면 욕심을 안 부리게 되는 거죠.
    자기 몸뚱아리, 집, 명예, 지위, 모든 게 그런 거예요.

    중생은 자기감정과 생각을 덧붙여서 왜곡시켜서 만들어내지만
    부처님은 없던 것을 만들어 내는 겁니다.
    앞에서 공부 했듯이 그게 유식이에요.
    산을 금으로 바꾸는 게 유식이 아니고
    없는 산을 만들고 없는 금을 만들어 내는 거죠.
    서방 극락정토도 아미타부처님이 중생 구제하려고 만드신 거예요.

    ‘만약 오로지 아무 생각도 없는 것이라면 공적하나 비추는 작용을 잃는 것이다.’
    아무 생각이 없다면 텅 비기는 비는데 거기에 비추는 작용이 없어요.

    ‘단지 비추는 작용만 있다면 비추나 공적한 자리를 잃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바른 것이라 할 수 없다.
    바른 것은 쌍으로 적(寂)과 조(照)가 행해지는 곳에 있는 것이다.’
    쌍으로 고요하고 쌍으로 비춘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비추긴 비추되 텅 비어 있고, 텅 비어있되 비춘다, 이런 말이죠.

    수행을 하면서 몸이 사라지는 경험을 자주 하는 사람은
    어느 순간 누구와 대화를 하거나 일상생활에서
    마음의 안과 밖이 텅 비어 있는 것을 경험을 해요.
    그래서 비춘다, 고요하다는 것이 무슨 의미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대상을 인식할 수 없다면 주관도 같이 사라져서 안과 밖이 고요하다는 거예요.
    주관이 비추면 대상이 같이 비춰서
    안과 밖이 비추는 것만 있다 해서 쌍조라 그러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