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唯識講義

『唯識』- 분별은 부처님의 뜻과 (본문, 강의)

경호... 2012. 1. 17. 01:16

-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분별은 부처님의 뜻과

    (본문)


    64-6-218
    不知外質卽佛心故. 所以 諸佛如來 隨多心念 意能頓了.
    如金剛經云 爾所國土中 所有衆生 若干種心 如來悉知.
    華嚴經 頌云.
    無量億劫勤修學 得是無上菩提智
    云何不於一念中 善知一切衆生心.
    此是意圓對. 如來一念之中 皆一時頓應 無一不應.
    故名圓對. 斯乃了心非心 方能遍應.
    若心在有無 則成隔礙.

    중생은 바깥 경계의 본질 자체가 부처님 마음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모든 부처님과 여래께서는 이것을 모두 아시기 때문에,
    모든 중생들의 생각을 따라서 뜻으로 단번에 아실 수가 있다.
    이것은 마치 『금강경』에서 “저 국토 가운데에 존재하는 모든 중생의 작은 마음까지도
    여래는 모두 아신다”고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화엄경』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무량억겁 부지런히 닦고 배워서
       위 없는 깨달음의 지혜 얻음에
       어찌하여 한 생각 일어나는 곳
       일체중생 마음을 알지 못할까.

    이것이 부처님의 뜻으로 일체중생을 원만하게 상대하는 것이다.
    여래는 일념 가운데에 일시에 모든 중생에게 상응하니,
    한 생각도 상응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일체중생을 원만하게 상대한다고 한다.
    이것은 마음이 마음 아닌 것임을 요지하여야,
    두루 일체중생의 마음에 상응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마음이 있다거나 없다는 분별에 있다면
    부처님의 뜻과 거리가 생기는 것이다.



    (강의)

    중생은 바깥 경계의 본질 자체가 부처님 마음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모든 부처님과 여래께서는 이것을 모두 아시기 때문에,
    모든 중생들의 생각을 따라서 뜻으로 단번에 아실 수가 있다.
    이것은 마치 『금강경』에서 “저 국토 가운데에 존재하는 모든 중생의 작은 마음까지도
    여래는 모두 아신다”고 하는 것과 같다.


    ‘중생은 바깥 경계의 본질 자체가 부처님 마음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알 수 있는 것은 뭐냐.
    『해심밀경』 ‘서품’에 보면
    부처님께서 정토에서 법문하시는 내용이 나오는데,
    보이는 모든 것이 아름다운 보석이에요.
    그게 부처님께서 만드신 세계입니다.
    그런 세계에서 법문을 들으려면 초지 이상의 보살이라야 들을 수 있고
    성문 연각은 그 세계를 볼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부처님의 위신력에 의해서
    부처님께서 그네들을 그렇게 볼 수 있도록 해 줍니다.
    그래서 정토를 보지 못하는 일반 대중들도 같이 참여해서 부처님 법문 듣는 내용이
    『해심밀경』 첫머리에 나옵니다.

    저는 유식을 몰랐을 때 경전에서 그런 얘기가 나오면
    ‘아이고 참, 풍도 대단하다’ 이랬는데. ㅎㅎㅎ
    그게 부처님 능력인 걸 나중에 알았습니다.
    『화엄경』 ‘입법계품’에 보면,
    부처님께서 강단에서 삼매에 들면 성문 연각 보살들이 있는데
    보살들은 부처님이 펼쳐 논 삼매의 세계를 보지만 성문 연각은 못 봐요.
    갑자기 강단이 크고 넓어지면서 주변이 바뀌기 시작하지만
    성문 연각들은 바뀌지 않은 모습 그대로 보는 겁니다.
    경계가 안 되니까 보지를 못해요.
    그 법회자리에는 수많은 부처님과 성문 연각 보살들이 참석을 하고 있는데
    성문과 연각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래서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요, 눈이 있어도 봉사다,
    이렇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귀나 눈이 망가져서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게 아니라
    가지고 있어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다는 거죠.

    그런데 유식에서는 땅을 바꾸어서 금으로 만든다는 게 아니고
    그냥 금으로 만들어 낸다 그랬죠.
    그게 유식이에요.
    그래서 십지보살만 되어도 이 세계를 만들어서
    중생들을 살게 한다고 『화엄경』에 나오는데,
    새롭게 만드는 것이지 기존에 있는 무엇을 새롭게 바꾸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유식의 뜻이 그런 겁니다.
    오직 마음뿐이라는 게 지극해지면
    그런 물질을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이 있는데,
    그 자체가 바로 마음이다 이거예요.
    그래서 여기에
    ‘부처님 마음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라는 말이 그런 얘기에요.

    ‘그러나 모든 부처님과 여래께서는 이것을 모두 아시기 때문에,
    모든 중생들의 생각을 따라서 뜻으로 단번에 아실 수가 있다.’
    중생 생각을 따라 다 아는 거예요.
    그래서 『금강경』에 ‘다 알고 다 본다’, 실지실견(悉知悉見)이라는 말이 나오죠.
    부처님은 진짜 보시고 다 안다 이거죠.

    ‘이것은 마치 『금강경』에서 “저 국토 가운데에 존재하는 모든 중생의 작은 마음까지도
    여래는 모두 아신다”고 하는 것과 같다.’
    여기 『금강경』얘기가 나오네요.

    이것을 『화엄경』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무량억겁 부지런히 닦고 배워서
       위 없는 깨달음의 지혜 얻음에
       어찌하여 한 생각 일어나는 곳
       일체중생 마음을 알지 못할까.


    깨달음의 지혜, 이것에 의해서 중생들의 마음을 속속들이 다 안다 이거죠.
    그래서 신심이 돈독해서 기도나 경전 독송이나 염불이나 그 외에도 수행하시는 분들은
    불보살님이 늘 함께 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귀가 안 열리고 눈이 안 열려 있기 때문에 함께 있어도 모른다는 거죠.
    그러니까 기도하면서 감응이 안 온다고 한탄할 게 아니고
    본인의 두꺼운 업장을 의심해 봐야 되는 거예요.

    이것이 부처님의 뜻으로 일체중생을 원만하게 상대하는 것이다.
    여래는 일념 가운데에 일시에 모든 중생에게 상응하니,
    한 생각도 상응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일체중생을 원만하게 상대한다고 한다.
    이것은 마음이 마음 아닌 것임을 요지하여야,
    두루 일체중생의 마음에 상응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마음이 있다거나 없다는 분별에 있다면
    부처님의 뜻과 거리가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의 뜻으로 일체중생을 원만하게 상대하는 것이다.
    여래는 일념 가운데에 일시에 모든 중생에게 상응하니,
    한 생각도 상응하지 않는 것이 없다.’
    기도할 마음을 내면 벌써 부처님하고 상응이 되는 거예요.
    서로 상응하게 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몰라요.

    ‘그러므로 일체중생을 원만하게 상대한다고 한다.
    이것은 마음이 마음 아닌 것임을 요지하여야,
    두루 일체중생의 마음에 상응할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이 마음 아닌 것임을 요지하여야’ 이것은 아주 중요한 말인데,
    마음이 마음임을 요지한다, 이러면
    그게 딱 가려져서 중생의 마음도 모르고 상응도 안돼요.
    그것은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공은 비어 있죠.
    공은 비어 있기 때문에 비어 있는 성질에 의해서 공도 부정해 버려야 됩니다.
    공이 비어있다는 속성 때문에 공이라고 하는 그 공도 부정을 하게 되는 겁니다.
    어떻게 공이라는 게 인정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공공이라는 말이 나오죠.

    이게 마찬가지에요.
    마음의 본질이 공하기 때문에 마음이 마음인줄 요지한다면
    내 마음이 내 마음을 보는 것이기 때문에
    중생 마음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어요.
    그래서 마음 자체가 비어 있기 때문에
    마음이 마음 자체의 벽을 허물어 버려서 부처님 덕과 서로가 상응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만약 마음이 있다거나 없다는 분별에 있다면
    부처님의 뜻과 거리가 생기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