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唯識講義

『唯識』- 자기 마음을 벗어나지 못한다 (강의)

경호... 2012. 1. 17. 01:14

  -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자기 마음을 벗어나지 못한다 (강의)

    어떤 사람이
    “논주(論主)께서 바깥의 색은 실재 없는 것으로
    알음알이 경계라고 말씀하신 것은 옳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타인의 마음 같은 것은 실재 존재하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자기 마음에 반연되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질문하였다.


    ‘바깥의 색은 실재 없는 것으로
    알음알이 경계라고 말씀하신 것은 옳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말은, 바깥에 보이는 모든 색은 실체가 없다,
    단지 우리가 그렇게 인식하기 때문에 그런 게 있을 뿐이라는 거죠.

    파란색을 인식한다면, 실제 바깥 대상이 파란색이 있는 게 아니고
    내가 파란색이라고 인식하니까 대상이 파란색이 있는 것이다, 이런 얘기에요.
    바깥 경계에 파란 색이든 빨간 색이든 우리가 결정해서 보는 겁니다.
    결정해서 보는 것은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본다는 거죠.

    ‘그러나 타인의 마음 같은 것은 실재 존재하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자기 마음에 반연되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질문하였다.’
    내가 빨갛다, 파랗다, 그렇게 보는 것은
    내가 지어서 보는 게 옳다고 할 수 있지만,
    타인의 마음은 내가 짓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그러니까 실제로 있는 게 아니냐 이거죠.

    이게 맞을까요, 틀릴까요?
    한 번 봅시다.
    이 질문의 의도는 이렇다.
    이 사람의 마음이 만약 다른 사람의 마음을 친히 반연하여 집착한다는 것은
    곧 이 사람의 마음을 떠나서 따로 어떤 마음이 있어 경계가 된다.
    또 만일 이 사람의 마음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반연하여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경계가 있어도 반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반연하여 집착한다면 따로 다른 마음이 있으므로
    유식의 이치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반연하여 집착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타인의 마음을 아는 지혜가 성립할 수 있겠는가의 뜻이다.


    다른 이의 마음을 반연해서 내가 집착을 한다면,
    유식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는 거죠.
    유식이라는 것은 오직 마음뿐이고 다른 경계는 없는데
    타인의 마음을 설정을 해버렸다 이거예요.
    그렇게 되면 내 마음하고 타인 마음하고 마음이 두 개가 되잖아요.
    오직 마음뿐이라는 것은 한 개의 마음인데, 두 개가 됐으니까
    다른 사람의 마음을 반연해서 집착한다는 자체가 유식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는 거죠.

    만일에 타인에 마음을 반연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다면,
    오직 마음뿐이고 다른 경계가 없으니까 유식의 가르침에 합당하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이거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는 지혜가 성립되지 않지 않느냐.
    그러면 도대체 뭐가 맞는 거예요?

    제가 얘기 한다면,
    타인의 마음이 따로 있고 내 마음이 따로 있다면,
    그것은 유식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게 확실히 맞아요.
    그렇지만 타인의 마음과 내 마음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서로 관계하는 것이 마음이라고 본다면,
    같은 하나의 마음이죠.
    이렇게 본다면 문제될 것은 없죠.
    과연 그렇게 얘기할까요?
    한 번 봅시다.
    논주가 답변하여
    “비록 타인의 마음이 자기 알음알이의 경계가 아니라고 설하더라도,
    이것은 단지 그 마음이 친히 반연되어지는 것을 말하지 않을 뿐이다”고 하였다.
    이 답변의 의도는 이렇다.
    비록 타인의 마음을 설하더라도 이 사람의 경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친히 반연되어지는 것을 말하지 않을 뿐이다’
    여기서 친히 반연된다고 얘기하는데,
    그렇다면 간접 반연은 없다는 얘기는 아니죠.
    내가 인식을 하지 않으면 반연되지 않을 뿐이지,
    그렇다고 대상을 인식하고 있는 타인이 반연하지 않는 것은 아니죠.

    그러면 뭐라고 얘기하는지 봅시다.
    만약 이 사람이 타인의 마음을 친히 반연한다면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타인의 마음을 본질로 삼아 의탁한다면
    스스로의 상분(相分)을 변화한 반연으로
    또한 타인의 마음을 아는 지혜[他心智]가 있다는 것이다.


    타심지(他心智), 단지 타인의 마음을 아는 지혜에 대한 얘기네요.

    단지 상분을 변화하여 반연할 때에는 타인의 본질을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단지 타인의 영상이 자기 마음 위에 나타나는 것으로 말미암아
    타인의 마음을 알았다고 한다.
    이것으로 곧 타인의 마음을 아는 상분은 자기 마음을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또한 오로지 식(識)일 뿐이다.


    여기서 해법은 지극히 유식학적으로 풀었습니다.
    타인의 마음을 반연을 할 때,
    타인의 마음을 직접 반연하는 것은 아니고
    타인의 마음을 보는 이 마음에 상분이 생기는 겁니다.
    영상이 생기는 거죠.
    그러니까 내 마음과 타인의 마음이 서로 인연관계가 이루어 졌을 때
    직접 그 사람의 마음을 반연하는 게 아니고
    그 사람의 그 모습, 영상이 생겨서
    그 사람 마음의 그림자인 영상을 자기가 보는 겁니다.
    그 영상은 자기가 만든 것이기 때문에 유식이다.

    쉽게 얘기하면,
    아내가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고 의심을 해서
    어느 때 여관 앞에서 어느 여자와 얘기하는 것을 봤는데 바람피운 게 아니냐고 한다면,
    남편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아니죠.
    남편이 여기에 대해서, 나는 결백하다,
    내가 그 여자를 만난 것은
    비즈니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여러 번 만난 것은 사실인데
    여관 앞에서 봤다고 그것을 결부시켜서 얘기하면 되겠느냐, 이랬다면,
    사실 남편의 말이 맞다고 합시다.
    그럼 아내는 무엇을 근거로 해서 바람을 피웠다고 하느냐 하면,
    같은 여자를 자주 만난 것, 여관 앞에 있었다는 것,
    또 하나는 항시 남편이 다른 여자하고 눈이 맞을까봐 노심초사하는 마음이
    뒤에 깔려 있는 거예요.
    그래서 노심초사하는 마음, 자주 만남, 여관 앞,
    이런 것이 서로가 인연관계가 결합하게 되면,
    남편이 바람 피웠다는 새로운 사실이 나오는 겁니다.
    마치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등나무를 보게 되면
    뱀으로 착각해서 나타나는 이치와 똑 같은 거예요.

    이것을 유식이라 그럽니다.
    어떤 사실이 나타나는 것을 모양 상, 나눌 분, 상분(相分),
    상의 부분이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원래 없던 바람피웠다는 게 나타난 거죠.
    상분이라는 게 그런 식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것을 대상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그 상분은 자기가 만든 거예요.
    이것을 유식에서는 변계소집의 모습, 변계소집상이라 그래요.
    자기가 헤아려서 집착해가지고 나타난 거예요.
    그래서 이런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고 얘기를 합니다.

    이것을 타파하는 방법은
    자주만나는 것, 여관, 뒤에 깔려 있는 불안감,
    이런 상호 관계에 의해서 ‘아! 뭐가 생겼구나.’, 이렇게 이해해야 되요.
    이것을 상호 관계에 의해서 일어나기기 때문에 의타기성이라 하고,
    잡되고 물들어 있는 현상, 잡념법(雜念法)이라 그럽니다.
    그래서 이런 오해에서 벗어나려면,
    대상에 내 감정을 덧붙이지 않는 훈련을 끊임없이 해야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두려워하는 마음, 의심하는 마음이 없어집니다.
    그런 마음이 없어지면 자주 만나는 것은 비즈니스 때문이고,
    여관은 우연히 일치가 됐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이 있으면 의심을 안 하게 되죠.

    그래서
    ‘이것으로 곧 타인의 마음을 아는 상분은 자기 마음을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또한 오로지 식(識)일 뿐이다.’ 이랬습니다.

    이것의 의도는 이 사람의 마음이 타인의 마음을 반연할 때에
    변화해 일어나는 상분은 알음알이에 해당한다는 것을 말한다.
    상분은 실제의 작용이 없어 손 같은 것으로 사물을 집어내는 것도 아니고,
    또한 태양 같이 빛을 나투어 친히 경계를 비추는 것도 아니다.
    타인의 마음을 반연할 때에, 단지 거울 속의 영상과 같아
    바깥의 형질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거울 속의 영상은 또한 실제의 작용이 없다.


    ‘이것의 의도는 이 사람의 마음이 타인의 마음을 반연할 때에
    변화해 일어나는 상분은 알음알이에 해당한다는 것을 말한다.’
    자기가 그렇게 분별하는 마음이다 그거에요.

    ‘상분은 실제의 작용이 없어 손 같은 것으로 사물을 집어내는 것도 아니고,
    또한 태양 같이 빛을 나투어 친히 경계를 비추는 것도 아니다.’
    허상이다 이 말이에요.

    ‘타인의 마음을 반연할 때에, 단지 거울 속의 영상과 같아
    바깥의 형질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거울 속의 영상은 또한 실제의 작용이 없다.’
    그렇죠.
    상분이라는 것은 거울 속에 영상이에요.
    그래서 상분의 작용은 의식에 의해서 나타나는 겁니다.

    타인의 마음을 반연할 때에도 또한 이와 같다.
    타인의 마음을 반연하는 바탕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타인의 마음을 안다고 한다.
    그러나 친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타인의 마음을 바탕으로 해서 타인의 마음을 알지만
    친히 바로 알 수 있는 게 아니고 자기가 그렇게 알음알이를 두고 본다 이거죠.

    친히 알아진다는 것은 자기 마음이 변하는 바를 말한다.
    식(識)이라 말하는 한 글자는 한 사람의 식이 아니다.
    총체적으로 일체 유정이 각각 모두에
    팔식(八識)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으로 곧 식의 자체이다.
    51개의 마음 작용인 심소(心所)가 식이 상응하는 것인데,
    어찌 홀로 한 사람의 식이라고 집착하겠는가.


    ‘친히 알아진다는 것은 자기 마음이 변하는 바를 말한다.
    식(識)이라 말하는 한 글자는 한 사람의 식이 아니다.
    총체적으로 일체 유정이 각각 모두에
    팔식(八識)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으로 곧 식의 자체이다.’
    팔식(八識)은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감각에 속하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5개 하고 의식하고
    잠재의식인 말나식, 표가 나지 않는 무의식인 아뢰야식, 이렇게 여덟 개죠.

    ‘51개의 마음 작용인 심소(心所)가 식이 상응하는 것인데,
    어찌 홀로 한 사람의 식이라고 집착하겠는가.’
    심소(心所)가 심리인데,
    이 심리는 여덟 개의 식에 다 작용을 해요.
    여덟 개의 식 중에 의식이 51개의 심리를 다 같이 상응합니다.
    ‘어찌 홀로 한 사람의 식이라고 집착하겠는가.’
    이 말은, 식이라는 것은 의타기성, 타를 의지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네트워크다, 이걸 얘기 하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