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唯識講義

『唯識』- 부처님 원력이 지옥의 장엄 (본문, 강의)

경호... 2012. 1. 17. 01:13

  -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부처님 원력이 지옥의 장엄 (본문)

    63-5-215
    問 若衆生惡業心 感現地獄事 理卽可然.
    且如觀佛心時 云何純現地獄.
    答 此略有二義.
    一若約理而觀 佛之心性 本含法界 無一塵而不遍 無一法而不通.
    二若約事而觀 佛唯用救苦爲意 以物心爲心.
    則地獄界全是佛心. 運無緣慈 不間同體.
    所以 觀佛心品云.
    佛告天王. 欲知佛心光明所照 常照如此無間無救諸苦衆生.
    佛心所緣 常緣此等極惡衆生 以佛心力自莊嚴故.
    過算數劫 令彼罪人發菩提心.

    : 중생이 악업을 지은 마음으로 지옥의 일을 감응하여 나타낸다면
    이치로 보아 옳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마음을 관할 때에, 무엇 때문에 순전한 지옥을 나타내는 것입니까.

    : 여기에 대략 두 가지 이치가 있다.
    하나는 이(理)의 측면에서 관한다면 부처님의 마음은
    본래가 시방법계를 머금어 하나의 티끌이라도 두루하지 않음이 없고,
    하나의 법이라도 통하지 않는 것이 없다.
    또 하나 사(事)의 관점에서 관한다면
    부처님은 오직 중생의 고통을 구제하겠다는 것으로 뜻을 삼아,
    중생의 마음으로서 자기 마음을 삼는 것이다.
    곧 지옥계 전부가 부처님의 마음이다.
    인연이 없는 중생까지 구제하고자 하는 자비심을 움직여,
    한 치의 틈도 없이 일체 중생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불심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대왕에게 말씀하셨다.
    부처님 마음의 광명이 비추는 곳을 대왕이 알고자 하면
    부처님 마음은 항상 이와 같이
    무간 지옥의 구제할 수 없는 모든 고통스런 중생을 비추는 것입니다.
    부처님 마음에 반연되는 것은 항상 이들 극악 중생을 반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처님 마음의 원력이 저절로 장엄하기 때문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겁 동안
    저 많은 죄인들에게 보리심(菩提心)을 발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강의)

    묻습니다.
    : 중생이 악업을 지은 마음으로 지옥의 일을 감응하여 나타낸다면
    이치로 보아 옳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마음을 관할 때에, 무엇 때문에 순전한 지옥을 나타내는 것입니까.


    지옥을 나타내는 이유가 뭐냐, 그런 거죠.
    죄업을 지으면 지옥에 태어나고 죽고, 이렇게 반복하면서 고통을 받는 것인데,
    부처님 마음으로 봤을 때는 지옥이 없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일체 중생도 부처님 마음을 다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중생에게 지옥이 왜 나타나느냐 이거죠.

    기독교인들은 지옥에 안 가려고 애를 쓰죠.
    죄를 지으면 아무리 부처님에게 빌던 하나님에게 빌던 지옥에 가게 되어 있는 거예요.
    자기가 지은 것은 자기가 받기 때문에 그것을 빌어서 될 일이 아니고
    받아야 만이 그 죄업이 없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원죄는 씻어지지 않는다고 보는 입장이에요.
    그런 입장에서 본다면 죄업이 없어지지 않으니까
    지옥에 떨어지면 못 헤어난다는 게 맞는 거죠.
    온갖 나쁜 짓을 다 지어도 하나님 믿기만 하면
    죄업이 다 없어진다 하는 게 기독교적인 사고방식이에요.

    그런데 죄라는 것은 자기가 지은 것은 자기가 받는 것이지
    누가 없애줄 수 없습니다.
    단지 영향을 주어서 죄업이 탕감이 된다든지
    다르게 전환되는 것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나 하나님이 아니더라도 본인이 참회를 하면 죄업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참회할 줄 모르면 문제가 되는 것이죠.

    여기서 얘기하는 부처님 마음이라는 것은
    모든 존재의 본질을 얘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미혹했을 때 죄를 짓게 되고 과보를 받게 되는데
    부처님 마음에는 지옥이 없는데 왜 나타나냐 이거죠.

    답을 합니다.
    : 여기에 대략 두 가지 이치가 있다.
    하나는 이(理)의 측면에서 관한다면 부처님의 마음은
    본래가 시방법계를 머금어 하나의 티끌이라도 두루하지 않음이 없고,
    하나의 법이라도 통하지 않는 것이 없다.
    또 하나 사(事)의 관점에서 관한다면
    부처님은 오직 중생의 고통을 구제하겠다는 것으로 뜻을 삼아,
    중생의 마음으로서 자기 마음을 삼는 것이다.
    곧 지옥계 전부가 부처님의 마음이다.
    인연이 없는 중생까지 구제하고자 하는 자비심을 움직여,
    한 치의 틈도 없이 일체 중생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불심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여기에 대략 두 가지 이치가 있다.
    하나는 이(理)의 측면에서 관한다면 부처님의 마음은
    본래가 시방법계를 머금어 하나의 티끌이라도 두루하지 않음이 없고’
    이렇게 되면 모든 존재가 부처님 마음이다 이 말이에요.

    ‘하나의 법이라도 통하지 않는 것이 없다.’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은 다 법인데,
    이(理)의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다 통하게 되어 있다 그거죠.

    ‘또 하나 사(事)의 관점에서 관한다면’
    사(事)의 관점은 현상의 측면을 얘기합니다.

    ‘부처님은 오직 중생의 고통을 구제하겠다는 것으로 뜻을 삼아,
    중생의 마음으로서 자기 마음을 삼는 것이다.
    곧 지옥계 전부가 부처님의 마음이다.’
    중생의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삼았기 때문에
    지옥계 전부가 부처님 마음이 아닌 게 없죠.

    부처의 마음은 중생의 마음을 없애는 특성을 가지고 있죠.
    향 연기가 허공으로 올라가면 싹 사라져 버리듯이
    허공이 향 연기를 없애고자 하는 마음이 없더라도
    허공 자체가 비어 있기 때문에 향 연기가 저절로 사라지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번뇌에서 벗어나고 번뇌를 없애려는 마음이라는 것은
    마치 허공과 같은 마음의 작용입니다.
    이게 부처님 마음이에요.

    그래서 내가 죄업을 지어서 지옥에 떨어졌지만
    부처님 마음을 생각하게 되면 죄업이 소멸해 가는 거예요.

    ‘인연이 없는 중생까지 구제하고자 하는 자비심을 움직여,
    한 치의 틈도 없이 일체 중생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불심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인연이 없는 중생까지 구제하고자 하는 자비심’ 이 말은
    무연자비(無緣慈悲)라는 말을 씁니다.
    그래서 번역을 ‘인연이 없는 중생까지’, 이렇게 하면 좀 곤란해요.
    무연(無緣)이라는 말은 그런 소리가 아니에요.
    이게 초벌번역이라서 이렇게 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무연(無緣)’이라는 것은 대상에 대해서 차별인식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무연자비라는 것은 잘난 중생이든 못난 중생이든 간에
    어떤 중생에게도 차별 없이 베푸는 절대평등의 자비를 얘기 합니다.
    인연 없는 중생을 구제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본문을 찾아봤는데, ‘무연자(無緣慈)’라는 말이 나오네요.
    인연이 없는 중생은 인연이 닿지 않기 때문에 구제 못합니다.
    인연이 닿을 때 구제가 가능한 거예요.
    그래서 무엇이든지 인연이 되어야 만이 가능한 겁니다.
    수행도 마찬가지로 아무리 노력을 했다하더라도
    깨달을 수 있는 조건이 아직 갖춰지지 않으면 못 깨닫는 겁니다.
    부처님이 중생을 구제하려고 해도 인연이 안 되면 구제 못하는 거예요.
    씨앗이 있다하더라도 주변조건하고 인연이 맞지 않으면 싹이 안 트는 겁니다.
    쭉정이라면 더 말할 게 없고,
    씨앗이 썩어버리면 싹이 안 트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연이 다 갖춰져야 되는 거예요.

    부처님 입장에서 본다면 누구든지 다 조건이 갖춰져서 구제할 수 있죠.
    중생의 입장에서는 부처님이 옆에 있어도 인연이 안 되면 못 보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소가 갈증이 있어서 물을 먹이려고 물가에 끌고 가더라도
    그 소가 물을 보고 물인 줄 모르면 계속 갈증에 시달리는 거죠.
    마찬가지로 부처님이 ‘너희들이 다 부처다, 고통에서 벗어나라,’
    이렇게 아무리 하더라도 중생이 그것을 못 알아들으면 못 벗어나는 거죠.

    그래서 ‘인연이 없는 중생까지 구제하고자 하는 자비심’이 아니고
    ‘어느 중생이든 다 구제하고자 하는 자비심’ 이렇게 하면 됩니다.

    ‘한 치의 틈도 없이 일체 중생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동체(同體)’라는 말이 있어요.
    이 말은 하나가 되는 게 아니고,
    체(體)가 같다[同]는 것은 본래 하나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일체 중생과 부처는 본래 하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관불심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대왕에게 말씀하셨다.
    부처님 마음의 광명이 비추는 곳을 대왕이 알고자 하면
    부처님 마음은 항상 이와 같이
    무간 지옥의 구제할 수 없는 모든 고통스런 중생을 비추는 것입니다.
    부처님 마음에 반연되는 것은 항상 이들 극악 중생을 반연하는 것입니다.


    극악 중생을 반연한다는 것은 아까 인연 없는 중생하고는 좀 다르죠.
    그래서 그렇게 해석하면 이게 틀렸다는 말이에요.
    부처님은 인연이 있든 없든 관계없이
    햇빛이 온 우주를 비추듯이 비추고 있는 거예요.

    이것은 부처님 마음의 원력이 저절로 장엄하기 때문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겁 동안
    저 많은 죄인들에게 보리심(菩提心)을 발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처님이 빛을 비추면,
    지옥 중생도 보리심을 일으켜서 진리를 깨치려고 마음을 내면 죄업이 없어집니다.
    그게 가능한 게 뭐냐 하면,
    기본적으로 일체중생의 마음과 부처의 마음은 본래 동체(同體)다,
    체가 같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본인이 죄업을 지어서 지옥에 떨어져도 본질은 부처님하고 똑 같기 때문에
    부처님의 빛을 받으면 바로 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는 거죠.

    그래서 ‘부처님 원력이 지옥의 장엄’이라 그랬는데,
    부처님의 빛이 지옥에 까지도 영향을 주는 거죠.
    여기서 기본적인 게 또 있는데,
    중생의 마음과 부처의 마음은 연기한다,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겁니다.
    만약 분리되어 있다면 백날 부처님 저를 구해주십시오해도 안 되는 거예요.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마음을 내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 원력이 장엄 그 자체다 하고 얘기 하는 겁니다.

    여기의 핵심은 중생의 마음과 부처님 마음, 마음이고
    또 하나는 마음과 마음은 연기하고 있는 것, 연기가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