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唯識講義

『唯識』- 좋고 싫은 것은 마음에 (강의)

경호... 2012. 1. 17. 01:11

-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좋고 싫은 것은 마음에 (강의)

    『아비달마경』에서 말하였다.
    보살은 네 가지 지혜를 성취하면
    오직 식뿐으로 다른 경계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곧 십지(十地) 이전의 작은 보살은
    비록 유식의 이치를 증득하지 못했더라도 부처님의 설법을 의지하는 것이다.
    나아가 십지의 보살들이 성취한 네 가지 유식의 지혜를 보게 된다.


    '네 가지 지혜'는 심식하고 관련이 있어요.
    이 네 가지 지혜에 대해서 하나하나 경계를 얘기 합니다.
    네 가지 지혜 중에 제일 먼저 생기는 것은 묘관찰지(妙觀察智)입니다.
    수행을 해서 몸이 사라지면 의식이 드러나는데
    그 의식을 대상으로 해서 탐진치만의견(貪瞋癡慢疑見)이라는
    여섯 가지 근본 번뇌를 없애면 이 의식이 묘관찰지로 바뀝니다.

    의식 자체가 분별하는 성향이 있는데,
    이런 분별 성향이 묘하게 관찰하는 지혜로 탈바꿈되는 거죠.
    이게 초지의 경지인데,
    그때는 말나식의 네 가지 번뇌[我見, 我慢, 我愛, 我癡] 중에 아견이 사라지면서
    묘관찰지에서 평등성지(平等性智)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말나식은 자아의식이라서 ‘나’가 있으면 ‘너’가 있는 불평등이 생깁니다.
    나와 남이 대립관계 있을 때는 높고 낮음, 많고 적음을 따지기 때문에
    자아관념이 들어서면 불평등해 집니다.
    그 불평등한 견해 중에서 ‘나’라고 하는 견해,
    이것이 초지(初地)에서 제일 먼저 없어집니다.

    그 다음에 이지(二地)부터 칠지(七地)까지 어떻게 닦아가느냐 하면,
    초지가 진여의 자리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진여로써, 청정으로써 닦아가는 겁니다.
    진여가 공이고 청정이에요.
    이렇게 해서 선천적인 번뇌, 아치 아만 아애를 없애 가는 거예요.
    칠지에 이르러서 말나식에서 평등성지로 완벽하게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말나식이 변환해서 평등성지를 이루는 게 두 번째 지혜에요.
    말나식은 잠재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의식으로 드러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수행을 해가지고 묘관찰지가 생기면
    잠재되어 있는 자아의식을 명확하게 볼 수가 있는 겁니다.
    그 전에는 어림도 없어요.
    우선 초지의 경지에 가는 게 중요한 거예요.

    이렇게 해서 팔지(八地)에 이르게 되면 더 깊이 아뢰야식의 위로 들어가면서
    대원경지(大圓鏡智)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거죠.
    팔지에 오르게 되면 제일 먼저 경계가 사라집니다.
    내 밖에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아뢰야식이 곧 경계라는 것을 알게 되는 거죠.
    팔지에서는 종자가 씨앗으로 저장되어 있기만 하고
    마음의 정보가 나타나지 않아서 현행하는 것이 없어집니다.
    이 경지에 이르면 저절로 공부가 된다 해서 무공용지(無功用智)라 하기도 하고
    물러남이 없는 불퇴전지(不退轉地)라 하기도 하고,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해서 부동지(不動地)라 하기도 하고,
    물질에 대해서 자유자재하다 해서 색자재지(色自在地)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구지(九地), 십지(十地)에 이르는 겁니다.

    십지에서 마지막에 금강에 비유되는 선정, 금강유정(金剛喩定)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아뢰야식 속에 저장되어 있는 온갖 정보가 소멸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렇게 완전히 소멸하면 불지(佛智)에 이르게 되고,
    큰 거울 같은 지혜, 대원경지를 얻게 되는 거죠.
    이게 세 번째 전환이 되는 거예요.
    그와 동시에 성소작지(成所作智)로 전환이 되는 겁니다.

    이런 과정에서 오직 마음뿐이라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
    제일 처음에 감각이 사라지면서 몸이 사라지고
    그 다음에 의식이 지혜로 전환 되면서
    대상을 분리시키고 고정화 시켜서 보던 것,
    내 밖에 스스로 존재한다는 이런 생각이 없어져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후천적인 번뇌가 사라지면서 진여의 자리에 들어가면
    오직 마음뿐이고 다른 경계가 없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나는 겁니다.
    그렇지만 은연중에 내 밖에 보이는 이 사물에도 무언가 있는 것 같이
    아직까지도 작용을 하는 거예요.
    그게 말나식이에요.
    이 말나식이 소멸하고 평등성지가 일어나면서
    내외가 평등해 지는 겁니다.
    평등해지면서 팔지보살에 이르러가지고
    내 마음이 바깥 경계의 노릇을 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면서
    오직 마음뿐이라는 게 드러나는 거죠.
    그러면서 후천적인 번뇌가 다 소멸하는데,
    일체 모든 현상을 나타내는 정보인 종자가 다 사라지고
    불지에 들어서면서 오직 마음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거죠.

    눈에 보이는 이 세계가 나와 관계성으로 존재하는 세계지
    따로 존재하는 게 없다는 거죠.
    우리가 사물을 보는 게 가지고 있는 정보를 덮어 씌워서 보는데
    이런 게 없어져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보이는 두두물물(頭頭物物)이 전부다
    마음의 현현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겁니다.

    ‘십지(十地) 이전의 작은 보살’은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사십 가지 단계를 얘기합니다.

    ‘비록 유식의 이치를 증득하지 못했더라도 부처님의 설법을 의지하는 것이다.’
    초지에 들어가기 전에는 부처님 설법을 의지를 해야 되는 거예요.
    『해심밀경』에서는 제일 먼저 선근을 짓는다 그랬어요.
    두 번째는 장애를 없애고, 세 번째는 성숙시키고,
    네 번째는 지혜와 복덕의 자량(資糧)을 갖춰서 초지에 들어간다 이랬습니다.
    선근은 몸이 사라져 버렸을 때 신심이 생겨서
    더 앞으로 수행해 나가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는데
    그때 보시행도 하고 계율도 지키면서 선근을 심어야 됩니다.
    그러면서 육신이 내가 아님을 깨닫는 아공(我空)을 성취하면서 장애물을 없애는 거예요.
    장애물이라는 것은 자아라는 관념이 나를 구속하는 거죠.
    이것은 말나식의 아(我)가 아니고 후천적으로 의식상에서 드러나는 아(我)예요.
    그러면서 십행의 법공(法空)으로 들어간다는 겁니다.
    법공으로 들어가면서 영적으로 성숙해져 가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내외명철(內外明哲)같은 텅 빈 경계도 오고
    바깥경계가 실체 없음을 아는 겁니다.
    자아의식이라는 게 바탕이 깔려 있지만 그 모습은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의식이 성숙해간다, 이렇게 얘기 합니다.

    십회향(十廻向)에 가서는
    진여에 들어가기 위해서 복덕과 지혜의 식량을 모으기 시작하는 거예요.
    복덕을 짓는 것은 어려운 사람을 많이 도와주는 거죠.
    『화엄경』에서 보면, 장기기증 같은 것도 합니다.
    아공, 법공, 평등공 경지가 십회향의 경지이기 때문에 그런 게 가능한 겁니다.
    이렇게 복을 쌓고 베푸는데 그 이치가 전부다
    지혜에 의지해서 베푼다는 것이 확연해 집니다.
    그래서 줘도 주는 주체도 없고 받는 주체도 없고 주는 물건도 없다,
    이렇게 알고 베푼다는 것은 지혜에 의해서 베푸는 거예요.
    존재는 서로 관계하면서, 의존하면서 존재한다,
    모든 것은 매 순간 변한다, 변하는 것에 집착하면 고통이 일어난다,
    이렇게 아는 것을 지혜라 그럽니다.
    이런 지혜를 통해서 베풀어 가면 복덕과 지혜가 쌓이고
    그런 힘으로 초지에 들어갑니다.
    이런 보살들을 십지 전의 보살이라 해서 작은 보살이라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에 ‘유식의 이치를 증득하지 못했다’는 말은
    초지, 진여의 자리에 들어갔을 때 비로소
    오직 마음뿐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는 겁니다.
    진여의 자리는 공의 자리고 주객이 없는 자리,
    그래서 안도 없고 바깥도 없는 다 비어버린 자리,
    따로 안을 내세울 것도 없고 바깥을 내세울 수도 없는 그런 경지의 자리에요.
    그러면서 유식을 체득하는 거죠.
    그런데 팔지보살에 이르러야 완벽해진다는 겁니다.
    겉으로 드러나 있는 것은 유식이라고 알지만
    속에서 무엇인가 번뇌를 일으키는 잠재되어 있는 놈이 말나식인데
    그 놈이 소멸해 버려야 되는 거죠.

    그래서 부처님 설법을 의지해야 된다는 겁니다.

    수행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법문을 듣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자비선사에서 삼존불을 모시는데,
    석가모니를 모시는 것은 자비선사가 명상을 하는 곳이기 때문에 모시고,
    문수보살을 모시는 것은 바로 법문이에요.
    그리고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것은 자비, 행을 얘기하는 겁니다.
    이렇게 이론과 실천을 같이 하는 곳이 바로 보리마을의 자비선사에요.
    불보살을 모시는 것도 상징적으로 한다는 겁니다.

    ‘나아가 십지의 보살들이 성취한 네 가지 유식의 지혜를 보게 된다.’
    십지보살들이 네 가지 지혜를 보게된다 했는데,
    초지에 가야만이 묘관찰지가 성취되고,
    더 나아가서 평등성지, 대원경지, 성소작지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십지의 보살들이 성취한 네 가지 유식의 지혜를 보게 된다는 말이 그거에요.

    마침내 유루관(有漏觀)에 들어가 십지 보살이 땅을 황금으로 만들고,
    긴 강을 휘저어 맛좋은 우유로 만들며,
    산더미 같은 고기와 쌀 등을 만드는 것을 본다.

    이 작은 보살은 유루관에 들어가서 관하는 것을 마치고,
    곧 “이와 같이 변화한 실제의 금, 은 등은
    모두 십지 보살의 변화시킬 수 있는 마음을 벗어나지 못한다.
    여기에 다시 다른 바깥 경계는 없다”고 말하게 된다.
    작은 보살은 유루관을 마치고 나서
    또한 참 유식의 이치를 수순하여 깨달아 들어 갈 수가 있었다.


    ‘마침내 유루관(有漏觀)에 들어가 십지 보살이 땅을 황금으로 만들고,
    긴 강을 휘저어 맛좋은 우유로 만들며,
    산더미 같은 고기와 쌀 등을 만드는 것을 본다.’
    이게 가능하다는 겁니다.
    십지보살에 이르면 일부러 큰 땅덩어리를 만들어서 중생들을 이주시켜서 살게 한다,
    그래서 지구 땅덩어리도 보살의 몸일 수가 있어요.
    극락세계도 마찬가지로 그 자체가 아미타부처님일 수가 있는 거예요.
    보살이 황금으로 땅을 만든다, 대단한 일이죠.
    여기 보면 맛좋은 우유도 만들고 고기와 쌀도 만든다, 이랬는데
    이런 게 가능한 거예요.
    빨리 초지를 이루어서 십지보살이 되어야 되지 않겠어요? ㅎㅎㅎ
    그거 되면 대길이지 뭐. ㅎㅎㅎ
    이런 게 가능하다 이거죠.

    ‘이 작은 보살은 유루관에 들어가서 관하는 것을 마치고’
    유루관(有漏觀)은 무루관(無漏觀)에 반대됩니다.
    유루(有漏)는 있을 유(有), 샐 루(漏),
    아직까지 대상을 반연한다, 번뇌를 얘기 합니다.
    반연이라는 것은 대상을 의지해서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눈으로 사물을 보면 마음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눈구멍으로 마음이 새어나간다 해서 유루라 그러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귀로 소리를 듣는 거, 코로 냄새 맡는 거,
    혀로 맛을 보는 거, 피부로 촉감을 느끼는 거,
    이런 게 다 마음이 새어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초지에 들어가기 전에는 수행을 해도 전부다 유루관이에요.
    번뇌가 있는 수행을 하는 거죠.
    이런 것이 진여의 자리에 들어가야 만이 새는 것이 없다,
    그때 비로소 바깥 대상이 전부 자기 마음인 줄 알기 때문에
    대상을 인식하지 않는 경계가 온다 이거죠.

    ‘곧 “이와 같이 변화한 실제의 금, 은 등은
    모두 십지 보살의 변화시킬 수 있는 마음을 벗어나지 못한다.
    여기에 다시 다른 바깥 경계는 없다”고 말하게 된다.’
    십지보살 경지까지 들어가지 못했더라도
    성실하게 수행을 해가면
    유루관에 들어서 관을 하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는 얘기에요.

    그래서 ‘작은 보살은 유루관을 마치고 나서
    또한 참 유식의 이치를 수순하여 깨달아 들어 갈 수가 있었다.’

    또 이것은 마치 승론(勝論)의 조사가
    육구의(六句義)를 지켜서 몸을 변화하여 큰 돌을 만드는,
    이것은 실지의 효용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실재의 경계가 정해져 있다면
    마음을 따라 몸의 경계가 변하여 돌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승론(勝論)’은 주석(註釋)에 보면,
    부처님 당시의 인도 육파철학의 하나로
    우주만유를 분석한 공간적 유물적 다원론이 된다.
    이것을 6종으로 나눈 것이 육구의(六句義 : 實, 德, 業, 同, 異, 和合)다, 이랬는데,
    육구의가 실재한다고 보는 거예요.

    ‘육구의(六句義)를 지켜서 몸을 변화하여 큰 돌을 만드는,
    이것은 실지의 효용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육구의를 통해서 몸을 돌로 만들 수도 있다는 거죠.

    ‘그러나 실재의 경계가 정해져 있다면
    마음을 따라 몸의 경계가 변하여 돌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실재의 경계는 정해져 있는 게 아닌 무상이죠.
    그런데 신통이라는 것은
    일어나고 사라지고를 반복하는 무상에서 못 벗어난다 이런 얘기입니다.

    묻습니다.
    : 땅이 변하여 금이 될 때에
    땅이 사라지고 금의 종자가 따로 생기도록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땅 자체가 전변하여 금이 되는 것입니까.


    오직 마음이 만든다 했는데,
    땅이 변해서 금이 되는 것은 아니죠.

    답을 합니다.
    : 『유식경』에서는
    “불보살이 되는 것은 묘관찰지로서 대원경지와 이숙식에 연계되어
    땅의 종자를 일으키지 않고서 금의 종자를 생겨나게 한다”고 하였다.
    이것으로서 증상연(增上緣)이 되어
    중생의 땅이 멸하고 금이 생겨나도록 하는 것을 전변이라 한다.
    땅 자체가 전변하여 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유식경』에서는
    “불보살이 되는 것은 묘관찰지로서 대원경지와 이숙식에 연계되어
    땅의 종자를 일으키지 않고서 금의 종자를 생겨나게 한다”고 하였다.’
    여기에 ‘이숙식(異熟識)’은 아뢰야식을 얘기 합니다.
    아뢰야식에 저장된 정보가 있는데,
    여기서 금의 종자가 튀어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땅의 종자를 일으키지 않고서 금의 종자를 생겨나게 한다’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게 달리 익어버리는 이숙(異熟)이 되는 거예요.
    왜 달리 익는다고 하느냐 하면,
    저장된 종자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데
    현행해서 튀어나오면 선이든 악이든 둘 중에 하나가 되는 거지만
    아뢰야식에 저장 될 때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에요.
    그래서 달리 익는다는 말이 그런 겁니다.
    마치 쌀을 씻어서 물을 붓고 불을 때면 밥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에요.

    ‘이것으로서 증상연(增上緣)이 되어
    중생의 땅이 멸하고 금이 생겨나도록 하는 것을 전변이라 한다.
    땅 자체가 전변하여 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증상연(增上緣)’이라는 것은 증가한 연으로,
    일체의 간접적인 원인으로
    결과를 생기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에요.
    그렇지만 결과가 발생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 것을 증상연이라 그럽니다.
    그래서 이것은 결과를 얻는데 방해는 하지 않는다,
    땅 자체가 금으로 되는 게 아니고
    직접 원인인 이숙식[아뢰야식]에 저장 된 종자가 금으로 바뀌어 나오는 거죠.

    또 하늘과 인간과 귀신과 고기 등의 세계에서
    현상이 보여 지는 것은 업의 차별을 따르는 것이다.
    단지 이것은 오직 경계로서, 식이 변화한 것이다.


    하늘신이나 인간이나 귀신이나 고기의 세계에서는
    보이는 현상이 다 달라요.
    물을 예로 든다면,
    사람은 물로 보는데, 천상의 신들은 유리로 본다고 하고,
    아귀는 피고름으로 본다고 하고,
    물고기는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로 보는 거죠.
    이렇게 다르게 보는 것은 업의 차별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식이 변화한 것이라는 겁니다.

    만약 식(識) 바깥에 따로 실재의 경계가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마음을 따라서 땅이 황금으로 변할 것인가.
    나무나 돌 등도 또한 같은 이치다.
    또 이것은 마치 한 아름다운 여인을 비유하는 것과 같다.
    음탕한 사람이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깨끗하고 미묘한 것으로 삼음으로서 마음에 좋아하는 생각을 내게 된다.


    치문(緇門)에도 보면,
    단정한 남녀를 보게 되면 음탕한 마음이 일어난다, 이런 말이 있어요.
    여자를 볼 때 깨끗하고 미묘한 것으로 보이면 음탕한 마음이 생기는 거예요.
    그 다음에 설명이 나옵니다.

    그러나 일체가 청정치 않다는 관을 하는 사람이 이 여자를 보면
    여러 종류의 혐오스러운 피와 고름 같은 것이 몸에서 흘러나와,
    한 곳도 깨끗한 곳이 없게 된다.
    똑같은 여자가 이 여자를 보면 질투하고 증오하며 성내고 싫어한다.
    눈으로 보려고도 않으면서 더러운 년이라 한다.

    그러므로 음탕한 사람이 이 여자를 보면 즐거움이 되나,
    질투하는 사람이 보면 고통이 된다.
    청정한 수행을 하는 사람이 이 여자를 보면 도(道)를 얻을 것이며,
    마음에 아무런 선입견이 없는 사람이 이 여자를 보면
    끌리거나 싫어하는 법이 없어, 마치 나무나 돌을 보는 것과 같다.


    그렇죠.
    한 여자를 두고도 여러 각도로 볼 수 있는 거예요.
    그 전에도 얘기했는데, 「청정도론(淸淨道論)」에도 똑같은 얘기 나옵니다.
    어떤 여인이 부부싸움을 하고 보따리 싸가지고 친정집에 가는데,
    언덕에서 아주 잘생긴 스님을 만납니다.
    그래서 마음이 끌려서 미소를 지으며 유혹을 하는데,
    이 스님은 백골관을 수행하는 스님이라
    여인이 미소 지을 때 햇빛에 반사 된 치아를 보는 순간
    여자는 온데간데없고 백골로 보이는 거예요.
    그러면서 거기서 깨달음을 얻습니다.
    여자는 유혹에 실패하고 지나가고 난 뒤에
    어떤 남자가 쫓아와서 이러이러한 여자가 안지나가더냐 물으니까
    이 스님 하는 말이 무엇인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지나가긴 갔는데,
    뼈 무더기가 지나갑디다, 이렇게 얘기 한 거예요.ㅎㅎㅎ

    그래서 계율에도 보면,
    비구는 여자를 보지 마라, 비구니는 남자를 보지 마라, 이런 게 있습니다.
    이렇게 여자나 남자로 보면 마음에 동요가 일어나니까 수행이 안 되는 거예요.
    여인과 접촉도 못하게 합니다.
    접촉을 하게 되면 감각이 일어나서 번뇌가 일어나기 때문에 접촉을 못하게 하는 거예요.
    계율을 그렇게 엄격하게 하는 이유가 수행 때문에 그런 겁니다.

    만약 아름다운 여자의 실체가 실재로 청정한 것이라면
    네 종류의 사람이 볼 때에 모두 다 청정하게 보아야 한다.
    반대로 실제 청정한 것이 아니라면
    네 종류의 사람이 모두 다 청정하지 않다고 보아야 한다.
    이로써 좋고 싫은 것이 마음에 있는 것이며,
    마음 밖에 따로 정해진 것이 없다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만약 아름다운 여자의 실체가 실재로 청정한 것이라면
    네 종류의 사람이 볼 때에 모두 다 청정하게 보아야 한다.’
    네 종류의 청정한 사람이라는 것은 앞에 얘기 했죠.

    그런데 ‘반대로 실제 청정한 것이 아니라면
    네 종류의 사람이 모두 다 청정하지 않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거든요.

    ‘이로써 좋고 싫은 것이 마음에 있는 것이며,
    마음 밖에 따로 정해진 것이 없다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네 사람이 보는 게 다 다른 거죠.
    음탕한 사람, 질투가 있는 사람, 마음에 아무런 선입견이 없는 사람, 청정한 사람,
    이 네 종류의 사람이 여자를 보는데 각각 다르게 보잖아요.
    청정하다면 다 똑같이 청정하게 보고,
    더럽다면 다 똑같이 더럽게 봐야 되는데, 그게 아니라 이거죠.
    여기 내용이 그런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