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唯識講義

『唯識』- 반연(攀緣)은 식(識)이 나타낸다 (본문, 강의)

경호... 2012. 1. 17. 01:09

  -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반연(攀緣)은 식(識)이 나타낸다

    (본문)


    62-2-211
    又 說所緣唯識所現者 汝謂識外所緣 我說卽是內識上所現.
    世親說 謂識所緣 唯識所現.
    乃至 佛告慈氏 無有少法能取少法. 無作用故.
    但法生時 緣起力大 卽一體上 有二影生. 更互相望 不卽不離.
    諸心心所 由緣起力 其性法爾 如是而生.
    心意識所緣 皆非離自性者 自性卽自心法. 或理體卽義之所依.

    반연되는 것은 오직 식(識)이 나타낸다고 설한 것은,
    당신이 식 이외의 반연되는 것을 말하므로
    내가 곧 안의 식 위에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세친 보살도 식이 반연하는 것은 오직 식에서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였다.
    나아가 부처님은 자씨 미륵보살에게
    “아무리 적은 법이라도 취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법 자체가 없어 작용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고 말씀하셨다.
    단지 법이 생겨날 때에 연기의 힘이 크므로
    일심의 바탕 위에서 두 가지 그림자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것이 서로 다시 바라보고 의지하면서 같은 것도 아니요, 다른 것도 아니다.
    모든 마음과 마음의 작용이 연기의 힘으로 말미암아 그 성품이 그러하여,
    이와 같이 생겨나는 것이다.

    “심의식(心意識)이 반연하는 것은
    모두 자성(自性)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자성 자체가 자기 마음의 법이라는 것이다.
    언제나 이치의 바탕 그 자체가 사물의 존재 근거가 되는 것이다.



    (강의)

    반연되는 것은 오직 식(識)이 나타낸다고 설한 것은,
    당신이 식 이외의 반연되는 것을 말하므로
    내가 곧 안의 식 위에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반연되는 것’은 대상이죠.
    ‘대상은 오직 식(識)이 나타낸다고 설한 것은,
    당신이 식 이외의 반연되는 것을 말하므로
    내가 곧 안의 식 위에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식이 우리 마음인데,
    마음 밖에 따로 존재하는 게 있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래서 반연되는 것은 곧 우리 마음 안에서 대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세친 보살도 식이 반연하는 것은 오직 식에서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였다.
    나아가 부처님은 자씨 미륵보살에게
    “아무리 적은 법이라도 취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법 자체가 없어 작용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고 말씀하셨다.


    여기 있는 찻잔이나 책상도 여기서 말한 대로라면 마음이 나타낸 겁니다.
    여러분이 저를 보고 있는데,
    그것도 여러분 마음이 저를 나타낸 것이고,
    제가 여러분이 보이는 것은 제 마음이 여러분을 나타낸 거예요.
    이런 입장에서 보면, 여러분하고 저하고는 분리되어 있지 않아요.
    그래서 대상은 마음이 나타낸다 하는 겁니다.

    마음이 나타낸 이 대상이라는 게 결국 마음이죠.
    그런데 이 마음이 무명, 번뇌에 오염되어 있다면
    마음이 나타내는 그 대상도 오염되어 있는 거죠.
    반대로 청정한 마음이 반연 된 것은 청정하겠죠.
    마음이 나타내는 대상이 고정되어 있고 분리되어 있게 보인다면,
    그것은 번뇌 망상에 의해서 마음이 만들어서 보는 거예요.
    청정한 마음에 의해서 나타낸 세계라는 것은
    마음이 청정하면 국토가 청정하다고 『유마경』에 얘기 하듯이
    모든 존재를 실체가 없는 관계성으로 보고,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보지를 않습니다.

    이 마음은 모양과 색깔을 나타내는 게 아주 특징적인 것인데,
    여러분 자체는 연기고 공입니다.
    그런데 물든 마음, 오염된 마음이 일어나면서
    연기라는 공의 모습에 덮어씌워서 고정되게 보이고 분리시켜서 보고,
    좋다 나쁘다, 크다 작다, 별별 망상을 다 일으키는 거예요.

    중요한 것은
    ‘법 자체가 없어 작용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왜냐하면, 법이라는 것은 아무리 적은 법이라도 취할 것이 없다,
    매 순간순간 변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이렇게 매 순간순간 변하고 바뀌면 잡을 수가 없어서
    취할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단지 법이 생겨날 때에 연기의 힘이 크므로
    일심의 바탕 위에서 두 가지 그림자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것이 서로 다시 바라보고 의지하면서 같은 것도 아니요, 다른 것도 아니다.
    모든 마음과 마음의 작용이 연기의 힘으로 말미암아 그 성품이 그러하여,
    이와 같이 생겨나는 것이다.


    ‘단지 법이 생겨날 때에 연기의 힘이 크므로
    일심의 바탕 위에서 두 가지 그림자가 생겨나는 것이다.’
    ‘두 가지 그림자’는 주관과 객관을 얘기 합니다.

    ‘이것이 서로 다시 바라보고 의지하면서 같은 것도 아니요, 다른 것도 아니다.
    모든 마음과 마음의 작용이 연기의 힘으로 말미암아 그 성품이 그러하여,
    이와 같이 생겨나는 것이다.’
    마음과 마음의 작용이 있어서 연기한다는 얘기에요.
    이것은 타를 의지해서 일어나는 의타기성을 얘기합니다.
    네트워크라는 게 그런 겁니다.
    여러분과 제가 이런 공간에서 공부할 수 있는 것은
    마음과 마음이 서로 계합되어 있다는 거예요.
    저는 유식 법문을 하기 좋아하고,
    여러분은 제 법문 듣기를 좋아하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듣기를 좋아하는 마음과
    제가 강의하기를 좋아하는 마음이 서로 연기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이 법회가 이루어진 겁니다.

    마음이 이렇다면 물질적인 것도 얘기할 수 있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사실 생각해 보면, 내가 대상이 무엇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마음뿐이지 몸이 아니거든요.
    사물이 아니라는 얘기에요.

    마음과 마음이 서로 상호관계를 가지고 있는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은
    과거는 지나가서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아서 없다고 생각 하셔야 되요.
    여러분 법회 참석하기 위해서 아침에 오셨는데,
    그것은 지금 시점에서 보면 기억만 남아 있을 뿐이지
    현실적으로는 없습니다.
    미래는 오지 않아서 아예 없는 거고.
    그러면 지금 현재 대상을 무엇이라고 아는 것은 머리에서 일어나는 거죠.
    머리에서 일어났다 사라졌다하는 것은 현재입니다.
    이런 생각들은 바깥 경계를 반연해서 일어나는 거예요.
    반연해서 일어나는 이런 생각들이 서로 교류를 하는 거죠.
    왜냐하면, 그 바깥 경계라는 것도 마음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지금까지 유식강의를 많이 들으셨기 때문에
    긴 설명은 안 해도될 거 같아요. ㅎㅎㅎ

    ‘같은 것도 아니요,’
    이것은 주관과 객관이 서로 상대하고 있기 때문에 같은 것은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만일 떨어져 있다면 인식 불가능하기 때문에 다른 것은 아니죠.

    “심의식(心意識)이 반연하는 것은
    모두 자성(自性)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자성 자체가 자기 마음의 법이라는 것이다.
    언제나 이치의 바탕 그 자체가 사물의 존재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이치’는 오직 마음이 만들었다는 그 이치를 얘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