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唯識講義

『唯識』- 부처님 가피의 표현 (강의)

경호... 2012. 1. 10. 12:43

-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부처님 가피의 표현 (강의)

    자, 부처님 가피 표현을 어떻게 하는 가 봅시다.
    중생의 근성이 백 천 가지이면
    모든 부처님의 교묘한 감응은 무량한 것이다.
    곧 부처님의 가피가 중생의 근기에 따라 감응하는 것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뜻이다.
    지금 간략하게 말하면 네 가지가 된다.


    네 가지가 있으니까 살펴보세요.

    첫째는 부처님의 가피가 은밀하게 감응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부처님의 가피가 눈에 드러나지 않고 숨어 있는 근기에 감응하는 것이다.
    셋째는 부처님의 가피를 받는 중생의 근기와 그 감응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넷째는 부처님의 가피를 받을 중생의 근기가 드러나지만
    부처님의 가피가 은밀하게 감응한다는 것이다.


    ‘첫째는 부처님의 가피가 은밀하게 감응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부처님의 가피가 눈에 드러나지 않고 숨어 있는 근기에 감응하는 것이다.’
    이것은 법신으로 감응하는 거죠.

    ‘셋째는 부처님의 가피를 받는 중생의 근기와 그 감응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응신감응이에요.

    ‘넷째는 부처님의 가피를 받을 중생의 근기가 드러나지만
    부처님의 가피가 은밀하게 감응한다는 것이다.’
    은밀하게 감응하는 것은 법신감응이라 했죠.

    그렇다면 이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만약 몸과 입과 뜻을 깨끗하게 닦아 나가는 수행을 현재 시점에서 실천하지 않았으나,
    과거의 선근을 빌려 공부가 되어지는 것을
    부처님의 가피가 눈에 드러나지 않고 숨어 있는 근기에 감응하는 것이라고 한다.


    드러나 있는 근기는 지금 법문 듣고 수행하는 것을 얘기합니다.
    숨은 근기, 드러나지 않은 근기는
    수행할 줄도 모르고 남에게 베풀 줄도 모르는데
    어쩌다 기도 하거나 수행을 하게 되면
    바로 체험이 오고 감응이 오는 거예요.
    이런 것은 전생에 심어 놓은 선근에 의해서 오는 겁니다.
    이게 숨어 있는 근기에 감응하는 것이다 하는 거예요.

    선근이라는 것은 선한 뿌리, 남에게 많이 베풀어
    그 착함이 뿌리가 생긴 거예요.
    뿌리가 있으면 반드시 싹이 트고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죠.
    그래서 선근을 많이 심으면 그 힘에 의해서
    깨달음의 꽃이 피고 바로 부처의 열매를 맺는다는 겁니다.

    비록 신령스럽게 감응하는 것을 보지 못하더라도
    은밀하게 법신의 이익 되는 바가 되어,
    보지도 듣지도 않으면서 깨닫고 알아지는 것을
    부처님의 가피가 은밀하게 이익을 주는 것이라고 한다.


    나와 있죠.
    분명히 보지도 듣지도 않으면서도 깨닫고 알아지는 게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은 전생에 선근을 심은 사람이죠.
    그런데 반대되는 사람 있죠.
    열심히 법문 듣고 수행 하는데도 불구하고 감응이 없는 사람. ㅎㅎㅎ
    이런 분은 선근을 심어야 됩니다. ㅎㅎㅎ
    다리 꼬고 앉아서 내면 관찰하는 자체가 선근을 심는 거예요.
    다만 그 선근의 힘이 바로 안 나타나서 그런 겁니다.

    둘째에 부처님의 가피가
    눈에 드러나지 않고 숨어 있는 근기에  감응하는 것으로서
    중생의 이익을 드러낸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과거에 선근을 심어놓아 이미 부처님의 가피가
    눈에 드러나지 않고 숨어 있는 근기에  감응하는 것이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부처님을 만나 법을 들으면 현전하는 자리에서 이익을 얻는다.
    이것이 이익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때 이익이 만일에 깨달음이라면 굉장한 것이죠.
    여기 감응한다는 것이 꼭 기도만이 아니에요.
    수행도 감응하는 게 있습니다.
    그래서 초지 아래, 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 중생들이게는
    화신불하고 감응이 있고,
    초지이상 십지까지는 응신불하고 감응이 있습니다.
    이렇게 응신과 감응이 있는 수행자는 대개 성인들이에요.
    칠지보살이 팔지에 오르려면 관세음보살님에 감응이 있고
    팔지에서 십지까지는 보현보살의 감응이 있다고 얘기 할 수 있어요.
    초지보살에 들어갈 때는 아마 문수보살이 아니겠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보살들이 나타나서
    자기보다 경지가 낮은 보살들을 이끌어내는 감응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부처님이 최초에 제도한 사람들과 같다.
    그들이 제도 받는 시점에서 어찌 선근을 닦았었겠는가.
    부처님께서 그들이 전생에 닦아 놓은 근기를 관조하고
    손수 그들에게 가시어 제도하신 것이, 곧 이 이치이다.


    ‘최초에 제도한 사람들’이라는 게 다섯 비구를 얘기합니다.
    이 다섯 명의 수행자들은 닦은 게 있어서 부처님 말씀을 듣자마자 깨달았죠.
    그 이후에 야사(耶舍)하고 그 친구들이 50여명이 출가 했는데,
    이 분들은 한 번도 닦은 적이 없어요.
    그런데 부처님 말씀을 듣고 다 아라한이 됐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전생에 선근을 많이 닦아 놨다 이거예요.
    이게 감응으로 오는 깨달음입니다.
    집안이 편안해진다든지 없던 일이 생긴다든지
    얽히고설킨 게 풀어진다든지 하는 것은 기도해서 오는 감응이라면,
    수행해서 오는 감응은 깨달음입니다.
    그게 다른 거예요.

    셋째에 부처님의 가피를 받는 중생의 근기와
    그 감응이 드러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현재 시점에서 몸과 뜻과 입으로 부지런히 정근하여 게으르지 않으면
    부처님의 감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정근은 정진을 얘기합니다.
    기도나 참선이나 열심히 정진하면서 게으르지 않으면
    부처님의 감응을 받을 수 있다는 거죠.

    이것은 마치 수달 장자가 무릎을 꿇고 합장하여
    부처님께 기원정사에 머물기를 간청하니
    부처님이 기원정사에 가신 것과 같으며,
    월개 장자가 몸을 숙이고 겸허한 마음으로
    부처님이 오셔서 재난 물리치기를 바라자 부처님이 왕림하신 것과 같다.
    수행자가 머무는 도량에서 예배하고 참회하면
    부처님의 신령스런 상서를 감응할 수 있으니,
    곧 이것이 부처님의 가피를 받는 중생의 근기와 그 감응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지난 봄에 보살계 수계산림했는데,
    대전에 계신 분들이 수계를 받고 나서 꿈을 꾸신 분들이 있었어요.
    꿈 내용이 아들을 깨끗한 물에 몸을 씻어줬다는 겁니다.
    이게 감응이에요.
    계를 받는 것은 선근을 심는 겁니다.

    넷째에 부처님의 가피를 받을 중생의 근기가 드러나지만
    부처님의 가피가 은밀하게 감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마치 평생 부지런히 고생하여 현세에 착한 일을 쌓더라도,
    부처님의 감응으로 나타나는 중생의 이익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피를 받을 중생의 근기가 드러나지만
    부처님의 가피가 은밀하게 감응한다는 것이다.


    중생의 근기가 드러난다는 것은
    기도나 수행하면 근기가 드러나죠.
    근기에는 세 종류의 근기가 있는데,
    하근기는 자기 욕심만 차리는 것, 이익을 추구하고,
    남이 듣던 말든 관계 안합니다.
    중근기는 명예나 재물을 취하고 사는 삶이 허망하다고 아는 사람입니다.
    허망한줄 알면서 집착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는 거죠.
    상근기는 허망한 줄도 알고 가지고 있는 재물로 남을 도와주는,
    이타행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드러납니다.

    드러나지만
    ‘부처님의 가피가 은밀하게 감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마치 평생 부지런히 고생하여 현세에 착한 일을 쌓더라도,
    부처님의 감응으로 나타나는 중생의 이익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은밀하게 감응하는 것은 안 드러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안 드러나면 마음이 변해서 종교를 바꾸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피를 받을 중생의 근기가 드러나지만
    부처님의 가피가 은밀하게 감응한다는 것이다.’
    확인되는 이익은 드러나지 않아요.
    그래서 은밀하게 작용하는 것은 은밀하게 감응하는 겁니다.

    만약 이 네 가지 뜻을 안다면 일체 머리를 숙이고
    하는 일에서 복이 헛되게 버려지는 것은 없다.
    종일토록 감응할 것도 없고, 종일토록 후회할 것도 없다.
    만약 오래 살아야 할 생명 죽이기를 좋아하거나
    어려운 사람에게 보시 잘하는 사람을 보아도,
    여기에 분별하는 삿된 견해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을 알지 못한다면
    부질없이 공력을 들이고 쓸데없는 생각을 하여 근심하고 후회함으로서
    참다운 이치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석론』에서
    “지금 나의 병고는 모두 과거의 업보다.
    금생에 복을 닦은 과보는 미래에 있다”고 하였다.
    바른 생각으로 삿된 생각이 없으면 이 네 가지 뜻을 얻게 되는 것이다.


    네 가지 뜻을 잘 이해를 한다면 쓸데없는 생각을 안 한다는 거죠.
    그래서 법을 들어야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겁니다.
    너무 멋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 법문을 들은 공덕이 헛되지 않아서
    미래에는 반드시 거기에 상응하는 결과를 얻을 거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