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唯識講義

『唯識』- 부처님 가피의 표현 (본문)

경호... 2012. 1. 10. 12:42

  -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부처님 가피의 표현 (본문)

    61-9-209 
    衆生根性百千 諸佛巧應無量 卽是機應不同意也. 今略言爲四.
    一者 冥應. 二者 冥機. 三者 顯機顯應. 四者 顯機冥應.
    其相云何. 若修三業 現在未運身口 藉往善力 此名爲冥機也.
    雖不相見靈應 而密爲法身所益 不見不聞 而覺而知 是爲冥益也.

    중생의 근성이 백 천 가지이면
    모든 부처님의 교묘한 감응은 무량한 것이다.
    곧 부처님의 가피가 중생의 근기에 따라 감응하는 것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뜻이다.
    지금 간략하게 말하면 네 가지가 된다.

    첫째는 부처님의 가피가 은밀하게 감응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부처님의 가피가 눈에 드러나지 않고 숨어 있는 근기에 감응하는 것이다.
    셋째는 부처님의 가피를 받는 중생의 근기와 그 감응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넷째는 부처님의 가피를 받을 중생의 근기가 드러나지만
    부처님의 가피가 은밀하게 감응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만약 몸과 입과 뜻을 깨끗하게 닦아 나가는 수행을 현재 시점에서 실천하지 않았으나,
    과거의 선근을 빌려 공부가 되어지는 것을
    부처님의 가피가 눈에 드러나지 않고 숨어 있는 근기에 감응하는 것이라고 한다.
    비록 신령스럽게 감응하는 것을 보지 못하더라도
    은밀하게 법신의 이익 되는 바가 되어,
    보지도 듣지도 않으면서 깨닫고 알아지는 것을
    부처님의 가피가 은밀하게 이익을 주는 것이라고 한다.

    二 冥機顯益者. 過去植善 而冥機已成.
    便得値佛聞法 現前獲利 是爲顯益.
    如佛最初得度之人. 現在何嘗修善. 諸佛照其宿機 自往度之 卽其義也.
    三 顯機顯應者. 現在身口 精勤不懈 而能感降.
    如須達長跪 佛往祇洹 月蓋曲躬 聖居門閫.
    如卽行人道場禮懺 能感靈瑞 卽是顯機顯應也.

    둘째에 부처님의 가피가
    눈에 드러나지 않고 숨어 있는 근기에  감응하는 것으로서
    중생의 이익을 드러낸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과거에 선근을 심어놓아 이미 부처님의 가피가
    눈에 드러나지 않고 숨어 있는 근기에  감응하는 것이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부처님을 만나 법을 들으면 현전하는 자리에서 이익을 얻는다.
    이것이 이익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부처님이 최초에 제도한 사람들과 같다.
    그들이 제도 받는 시점에서 어찌 선근을 닦았었겠는가.
    부처님께서 그들이 전생에 닦아 놓은 근기를 관조하고
    손수 그들에게 가시어 제도하신 것이, 곧 이 이치이다.

    셋째에 부처님의 가피를 받는 중생의 근기와
    그 감응이 드러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현재 시점에서 몸과 뜻과 입으로 부지런히 정근하여 게으르지 않으면
    부처님의 감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수달 장자가 무릎을 꿇고 합장하여
    부처님께 기원정사에 머물기를 간청하니
    부처님이 기원정사에 가신 것과 같으며,
    월개 장자가 몸을 숙이고 겸허한 마음으로
    부처님이 오셔서 재난 물리치기를 바라자 부처님이 왕림하신 것과 같다.
    수행자가 머무는 도량에서 예배하고 참회하면
    부처님의 신령스런 상서를 감응할 수 있으니,
    곧 이것이 부처님의 가피를 받는 중생의 근기와 그 감응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四者 顯機冥應者.
    如雖一世勤苦 現善濃積 而不顯感冥有其利. 此是顯機冥益.
    若解四意 一切低頭擧手 福不虛棄. 終日無感 終日無悔.
    若見喜殺壽長 好施貧乏 不生邪見.
    若不解此者 謂其徒功喪計 憂悔失理.
    釋論云 今我病苦皆過去 今生修福報在當來. 正念無僻 得此四意也.

    넷째에 부처님의 가피를 받을 중생의 근기가 드러나지만
    부처님의 가피가 은밀하게 감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마치 평생 부지런히 고생하여 현세에 착한 일을 쌓더라도,
    부처님의 감응으로 나타나는 중생의 이익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피를 받을 중생의 근기가 드러나지만
    부처님의 가피가 은밀하게 감응한다는 것이다.

    만약 이 네 가지 뜻을 안다면 일체 머리를 숙이고
    하는 일에서 복이 헛되게 버려지는 것은 없다.
    종일토록 감응할 것도 없고, 종일토록 후회할 것도 없다.
    만약 오래 살아야 할 생명 죽이기를 좋아하거나
    어려운 사람에게 보시 잘하는 사람을 보아도,
    여기에 분별하는 삿된 견해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을 알지 못한다면
    부질없이 공력을 들이고 쓸데없는 생각을 하여 근심하고 후회함으로서
    참다운 이치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석론』에서
    “지금 나의 병고는 모두 과거의 업보다.
    금생에 복을 닦은 과보는 미래에 있다”고 하였다.
    바른 생각으로 삿된 생각이 없으면 이 네 가지 뜻을 얻게 되는 것이다.